본문 바로가기

중세철학의자리

(98)
중심과 변두리, 보편의 세상에서 개체의 세상으로, 명령의 세상에서 소통의 세상으로 (신나는 철학사) 중국 푸젠성(福建省) 무이산(武夷山) 계곡에는 아홉 구비(九曲)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 약 8㎞ 정도 길이의 아홉 계곡을 '무이구곡(武夷九曲)'이라 하며, 그 각각을 승진동(升眞洞), 옥녀봉(玉女峯), 선기암(仙機巖), 금계암(金鷄巖), 철적정(鐵笛亭), 선장봉(仙掌峯), 석당사(石唐寺), 고루암(鼓樓巖), 신촌시(新村市)이라 한다. 1183년 '주희(朱熹, 1130년~1200년)'는 다섯 번째 계곡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이듬해「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圖歌)」를 썼다. 무이산의 아홉 계곡, 즉 무이구곡은 주희가 아름답다고 한 공간, 주희가 머문 공간, 즉 주희의 공간, 즉 주자학의 공간으로 여겨졌다. 그래서인지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년~1620년)는 자신의 머물던 성주 가야산 북쪽 대..
17세기, 신학과 법학 그리고 의학의 예비학으로 철학은 자기 길을 나아가게 된다. (유대칠의 신나는 철학사) 17세기 이야기를 해보자. 1600년대 많은 철학자는 더는 귀족 집안의 사람이 아니다. 물론 데카르트와 보일과 같이 귀족 집안의 사람이 있지만, 가상디와 같이 농민의 아들도 있었고 구두를 만드는 장인의 아들인 톰마소 캄파넬라와 같은 사람도 있었다. 캄파넬라와 같은 이는 어려서 귀족과 같은 교육을 받지 못했고 라틴어와 헬라어를 독학해야 했다. 메르센과 같은 이도 가난했기에 교회에서 생계를 해결해야 했고, 가상디 역시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17세기 많은 철학자는 더는 귀족이 아니었고, 생계를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했지만, 그들은 교회에도 대학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은 애써 공부한 지식이었기에 그들은 귀족 집안의 개인 교사, 즉 과외 선생이니 도서관의 사서 등을..
대학 안의 철학과 대학 밖의 철학, 18세기 철학 공간의 다양성 속 프랑스 (유대칠의 신나는 철학사) 18세기 프랑스의 철학을 보자. 당시 프랑스 대학에서 철학 교육은 중세 이후 유지된 방식을 따랐다. 물론 데카르트의 철학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주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중세의 스콜라 신학과 철학이 힘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등에서 과거의 교육 방식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다. 당장 당시 철학과가 대학의 독립된 학과로 없던 시절, 신학과 법학 그리고 의학의 예비학으로 철학은 데카르트의 영향을 녹아들어 갔지만,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 아퀴나스주의의 형이상학에 근거한 교재들이 신학을 위한 예비학으로 철학의 교과서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연 철학에선 달랐다. 수학이 중시되고 점차적으로 전문화되어갔다. 이러한 분위기는 통합된 하나의 거대한 철학, 그리고 그 철학의..
철학, 그게 뭔데! 돈 안 되면 유럽도 철학 안 했다! 18세기 이후 신학부와 법학부 그리고 의학부에 입학하기 위해 굳이 인문학부를 통과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제 철학 공부를 하지 않아도 신학자(혹은 성직자 혹은 목회자)가 될 수 있고 법학자(법률가)가 될 수 있으며 의학자(의사)가 될 수 있단 말이다. 그러면 사실 누가 철학과에 들어오겠는가? 철학이란 고귀한 학문을 배우고 익혀 신학자와 법학자 그리고 의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철학 하는 이의 편에서 하는 욕심이다. 1750년 할레 대학과 예나 대학은 철학을 공부하는 인문학부 혹은 철학부에 입학하는 이들이 없었다. 학생들은 바로 신학부와 의학부 그리고 법학부에 입학했다. 괴팅겐 대학에서도 665년의 입학생 가운데 단 60명만이 철학부를 선택했다. 학생이 오지 않으니 교수의 월급도 함께 떨어졌다. 철학부 ..
주체, 여성신비가의 편에서 생각해 본다. '주체(subject)'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기 인식'을 통하여 '주체'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꼭 자기 인식만이 유일한 주체의 인식 수단이었을까?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서 절대 의심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틀을 마련하고 그 틀 위에서 나는 나가 되어 있음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굳이 이러한 방식 이외 다른 방법은 없을까? 중세 보편 논쟁에서 실재론은 보편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나는 나라는 생각보다 나는 '그리스도교인'이라거나 나는 '사람'이란 식의 보편적 서술의 주어 그리고 보편적 존재의 일원으로 나를 확인받았다. 주어라고 하지만 그 주어는 술어에 의하여 서술되어야 의미를 가진 주어이며, 보편적 존재에 참여할 때 의..
윌리엄 오컴의 존재론? 그런게 있는가? 윌리엄 오컴의 존재론, 뭐.. 이런 식의 말을 많이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 플라톤의 존재론, 그런데 그 존재론이란 말을 우리가 사용하듯이 그렇게 윌리엄 오컴이 사용했을까? 아니다. 존재론이란 말 자체가 없던 시대의 사람이다. 존재론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어떤 단일한 행위가 없던 시대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존재론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그런 말이 없었다. 윌리엄 오컴의 존재론, 그런 사유를 굳이 만들어내기 위해 그의 저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그의 글귀를 모아야 한다. 그리고 그가 하지 않은 일을 해야 한다. 우리의 시야에 존재론이라 불리는 어떤 것을 구성하기 위해 말이다. 그런데 중세를 산 윌리엄 오컴은 스스로를 철학자라고도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자인가? 우리가 그를 철학자라 기억해서 그를 철학자라 부르는 것이지 사실 그의 글을 조금 신경 써 읽으면 그는 스스로를 철학자라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말하면 그는 강론을 하는 설교가이고 교회의 지도자이며 신학자다. 신학자라는 말도 오해를 살 수 있다. 그는 이론을 만들 생각보다는 당시 이단과 이교 철학에 빠져들 신자들에게 정통 신앙을 자신의 이성, 즉 철학을 활용하여 설득하고 있다. 그는 어느 구체적인 이론을 목적으로 한 신학자나 신학교 선생이 아니라, 교회 지도이고 강론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가장 가까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 될 거다. 그는 스스로를 철학자라 하지 않았지만 우린 그를 철학자라 기억한다. 그가 시간의 문제를 고민했다지만 그 고민의 이유는 철학적이지 않다. 그..
14세기 자연 철학의 가치와 르네상스 아리스토텔레스 자연 철학 14세기 자연 철학의 가치와 르네상스 아리스토텔레스 자연 철학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오캄연구소) 머독은 오랜 시간 중세 자연철학을 연구한 대표적인 연구가다 그는 중세 자연철학과 르네상스 자연철학을 비교하며 연구하기도 했다. 그는 13세기 스콜라 철학에서의 자연 철학과 1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