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를 철학자라 기억해서 그를 철학자라 부르는 것이지 사실 그의 글을 조금 신경 써 읽으면 그는 스스로를 철학자라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말하면 그는 강론을 하는 설교가이고 교회의 지도자이며 신학자다. 신학자라는 말도 오해를 살 수 있다. 그는 이론을 만들 생각보다는 당시 이단과 이교 철학에 빠져들 신자들에게 정통 신앙을 자신의 이성, 즉 철학을 활용하여 설득하고 있다. 그는 어느 구체적인 이론을 목적으로 한 신학자나 신학교 선생이 아니라, 교회 지도이고 강론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가장 가까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 될 거다.
그는 스스로를 철학자라 하지 않았지만 우린 그를 철학자라 기억한다. 그가 시간의 문제를 고민했다지만 그 고민의 이유는 철학적이지 않다. 그 이유는 매우 철저하게 신학적이다. 그는 정치에 관하여 고민하지만 마찬가지다. 매우 철저히 신학적이다.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이라 부르는 거의 모두가 그렇게 철저하게 신학적인 이유에서 만들어진 거다. 그렇게 신학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그 신학이 지금 철학사가에 의하여 철학으로 기억되는 거다.
정확하게 그는 철학자가 아닌 교부이고 교부로 매우 성실했다.
2023년 2월 14일 새벽
유대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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