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글로 읽는 중세 철학/한글 중세철학문헌

리딩의 요한 "명제집 주해" d.2, q.2, a.1

리딩의 요한(Johannes de reading)' 명제집 주해 D.2 qq.2&3

 

유대칠 옮김

(토마스철학학교)

 

=> 리딩의 요한의 글에서 우리는 라틴어 esse가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는 것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즉 우리말로 '이다'와 '있다'이다.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자와 본질에 대하여의 첫 부분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스코투스주의자인 리딩의 요한의 이후 논리가 어떨지 더 읽어봐야겠다.  

 

질문 2

 

1논항: 신의 존재는 확실하게 인식될 있는가.

 

1.1 첫째 논항에선 신의 존재(esse) 혹은 신의 단순한 실존(exsistentia) 우리에게 인식될수있는지의 여부가 물어지진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존재와 실존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의 의문은 복합적 esse 대하여 묻는다. 이것은 두가지로 있을 있다. 첫째 방식에서 esse 번째 요소로 서술되듯이, 신의 존재(esse) 신의 존재(esse)인가(sit) 같이 말이다. 이러한 방식에서 물어지지 않으며, 다만 '신은 존재한다(est)`라는 명제가 우리에게 확실하게 인식될 있는가와 같은 것이 물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가지로 야기된다. 이러한 방식에서 실존의 명백함을 통하여 그리고 가운데 신의 근거를 통하여 인식되어지는 , 마치 가운데 보여질 불의 존재자를 우리가 인식하듯이, 그리고 이러한 방식에서 우리에게 신의 존재는 가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제일 원리는 자체로 자명한 것으로 알려지기 때문이다. 또한 신의 존재는 자체로 자명하지 않다. 다른 방식에서 우리는 신의 존재는 원인과 함께 중재를 통하여 그리고 실존의 모음으로 인식한다는 것이 이해되어 있다. 연기로 부터 불을 인식하듯이 결과로 부터 존재를 인식한다. 그리고 그렇게 신의 존재는 방랑자(인간)에게 증명될 있다고 동의 되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의 존재가 방랑자에게 확실하게 인식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2논항에서 분명하듯이 다양한 방식으로 가정되어진다.

 

< 번역은 토마스철학학교 유대칠이 모든 권한을 가집니다. 하지만 자유로운 이용을 허락하며, 다만 인터넷 사용시(카페,홈페이지,블로그,클럽,미니홈피...) 혹은 인용시 출처를 명확히 해야합니다.>

 

© 유대칠 copyright reserved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