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의 “원죄에 관하여” 발췌
유대칠 옮김
(토마스철학학교)
<이 번역은 토마스철학학교 원전 강독 스터디의 일환으로 유대칠이 번역하였다.>
(이 글은 2002년 초기 보편자 논쟁에 관한 궁금증으로 시작한 나의 오도와
질베르투스 에 관한 독서에서 시작하였다. 당시 나의 이해 수준으론 많은 것을 얻어 내지 못했다. 그러나 2005년 가을 다시 읽게
되면서 당시 가진 나의 이해의 많은 부분이 수정되었고, 더하여 졌다. 전체적으로 “오도의 원죄에 관하여”을 읽고 그 가운데 필자의 눈에 그의
보편자를 이해함에 유익하다 여겨지는 몇 부분을 발췌하여 번역하였다. 그후 번역하고 나서 스페이드(P.Spade)의 영어 발췌 번역을 구해서 읽을
수 있다. 비록 스페이드가 발췌한 부분과 나의 발췌 부분에 차이가 있을지라도, 번역에 큰 도움을 입은 것은 분명하다. 이 번역은 나 자신이
2005년 여름에 계획한 혼자만의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이 번역에 참고한 것은 다음의 것이 있다. 마지막으로 그냥 혼자 머리 속으로 읽는 것과
이것을 문자로 표현하는 것이 이렇게 차원이 다른 어려움인지 또 한번 알게 해 주었다.)
Odo, De peccato orginali,
In Patrologiae cursus completus... series latina 160
(Paris:Garnier,1880),1071-1102.
trans. P.Spade, Five Texts om the Mediaeval
Problem of Universals (Indianapolis:Hackett Publishing Company,1994), 20-25.
2권
류와 종과 개별자에 관하여.
/1079D/이 의문에 반대하여
그러한 교리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1080A/그것은 류와 종이 관련되어지는 것과 다르게 개별자가 종과 관련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종은
류보다 더 실체적으로 관련되며,류는 종의 실체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종이 류를 더하여 실체적으로 차이를 가진기 때문이다. 즉,
종은 류보다 더 실체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동물보다 더 실체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성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성적인 것은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으로 개별자들은 실체적으로 종이상의 어떤것도 가지지 않으며, 실체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고, 인간과 페트루스는 다르다. 하나의 종
아래 여러 개별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실체적인 것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우유적일 뿐이다. 그러므로 종만이 류 가운데 존재할 수 없을
때, 개별자는 종 가운데 존재할 수 있다. 마치 페트루스를 제외한 모든 인간의 개별자가 살해되어도, 오직 인간 종은 개별자 페트루스를
가지듯이 말이다. /1080B/페트루스는 우유적 집합에 의한 개별자이다. 예를 들어, 인간 종은 종이다. 왜냐하면 종은 다수 개별자 가운데
공통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불사조와 같이, 비록 의 개별자만을을 가질지라도, 여럿 가운데 공통된 것일 수 있기 때문에 종이다. 그렇기에
종 불사조와 이 불사조는 다르다. 불사조는 종적 본성(specialis natura)이다. 이는 공통된 것이다. 이 불사조는 참으로 개별자인
한에서 본성이다. 이는 특수자(singlaris)와 다르게 존재할 수 없다. 종 불사조는 류와 차이로 한계되어지며, 이 불사조는 우유들의
속성으로 고려되어진다. 개별자는 오직 하나인 것에 대하여 말되어질 수 있다. 비록 종은 오직 하나에 대하여 서술되어질 뿐이라도 말이다. 참으로
개별자는 오직 특수자이다./1080C/
류와 종차로 부터 이성은 종을 포착하고, 우유의 속성으로 부터 감각은 개별자를 지각하며,
보편자를 위하여 이성의 더 내적인 이성이 유효하고, 특수자를 위하여 참으로 외적인 감각적 인식이 유효하다. 우리는 개별자를 물질적으로 감각하고,
보편자는 이성적으로 지각한다. 그리고 단지 종에 대하여 개별자로 말되어질 때, 우유가 개별자에 대하여 말되는 것으로 유효하듯이 그리고 종에
대하여 말되는 것이 유효하다. 비록 근본적으로 그리고 앞선 곳에서 개별자 가운데 우유가 있었을지라도 말이다.
개별자(individua)에 관하여.
/1080A/또한 개별자는 우유의
속성으로 함축된 것이다. 아무 것에 대해서도 서술되어지는 것은 것과 같이 말이다. 왜냐하면 개별자에 대하여 더 상위것이 말되어지기 때문이다.
참으로 개별자는 아무 것에 대해서도 서술되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종이 여럿 가운데 내재하지 않으나 오직 개별자만을 가진다면, 그 자체는
개별자에 대하여 말되어진다. 참으로 개별자는 아무 것에 대해서도 서술되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 새에 대하여 불사조가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하여 이 세상이 또한 이 별에 대하여 태양이 서술되어지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에서 개별자는 보편자에 의하여 불리어지지, 전체에 의하여
그러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전체 가운데 개별자가 있기 때문이며, 이는 전체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체는 그것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자체가 자신의 작음으로 나뉘어질 수는 없다. 마치 수적으로 하나와 선 가운제 점과 물체 가운데 원자와 같이 말이다. 그렇게 이는
보편자 가운데 가장 하위의 것이고, 전체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이다./1080B/ 바로 이것이 개별자라 불린다. 왜냐하면 이것은 더 작음으로
나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전체를 구성하지만 구성되어지지는 않는 개별자가 더 하위의 것에 대하여 서술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보편자의 개별자는 나누어지지만, 나누어져지지는 않는다. 전체의 우선된 개별자는 전체의 구성 가운데 있다. 궁극적인 보편자의 개별자는 보편자의
구분 가운데 있다. 보편자의 개별자는 보편자 그 자체, 전체 그리고 완전한 것을 그 자체 가운데 가지며, 전체의 개별자는 전체에 대하여 그
자체를 제외하면 그 자체 가운데 어떤 것도 가지지 않는다.
단수자(singulare)에
관하여.
/1080B/단수자는 참으로 모든 다른 것으로 부터 속성에서 분리되어지는 것이라 이야기된다. 즉 다른 모든 것으로 부터 어떤
방식에서 사물의 구분은 그저 개별자 가운데 있지 않고 보편자 가운데 있다. 왜냐하면 보편자는 자신의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비록 그에 대하여
감각적으로 그렇지 않을 지라도,/1080C/ 그럼에도 이성적으로 다른 것과 분리되어질지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이성은 보편자의 본성을 자기
능력의 통찰력으로 파악하며, 상호간에 그리고 개별자로 부터 분리한다. 예를 들어 비록 공통된 것일지라도 그럼에도 본질의 어떤 단수성을 가진다.
마치 개별자와 같이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본질은 단수적이다. 자기 본질의 단수성을 가짐으로 보편자와 같이 개별자도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는
다른 것으로 부터 각각 분리하여 고찰되어진다. 이러한 방식에서 모든 개별자는 단수자이다. 그러나 모든 단수자가 개별자는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말되어지지 않는다면, 개별자는 아니기 때문이며, 모두 단수자이다.
전체(totum)와 모두(omne)는
구분된다.
/1083D/왜냐하면 전체는 부분으로 이야기되며, 모두는 참으로 개별자로 이야기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가 보편자에
적절하며 참으로 전체는 구성된 것에 적절하다. 왜냐하면 모두는 개별자로 모여있지만, 전체는 부분이 뭉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종은 부분이
몽쳐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개별자가 모여진 것이다. 전체로 말되어지는 것 처럼 구성된 것은 단지 개별자 가운데 발견되어진다. 간혹 아무리
질료와 형상의 유사성에 의하여 종과 차이와 류와 같은 것이 흔히 유사한 어떤 것으로 이야기되어질지라도, 참으로 모든 보편적인 것은 단순한
것이고, 구성된 것은 본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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