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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의자리

포르피리우스와 그의 주해자 보에티우스의 서로 다른 입장: 보편자 논쟁의 두 가지 갈림길.

<이 글의 모든 권한은 토마스 철학 학교 유대칠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명확한 출처를 명시하는 조건 아래 자유로운 사용을 허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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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피리우스와 그의 주해자 보에티우스의 서로 다른 입장.

-포르피리우스와 보에티우스의 보편자 이해를 통한 중세 보편자 이해의 기반 다지기.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설정.

 보편자는 무엇인가? 중세 철학의 핵심적 논의 가운데 하나인 보편자 논쟁을 이해하기 위하여 가장 우선되게 논의되어야할 것은 보편자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논의의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그 논의의 내용을 보다 풍부하게 할 것임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필자는 보편자가 무엇인가에 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특히 중세 보편자 논쟁의 시원에 서 있는 철학자인 보에티우스의 관점에서 말이다.

 보에티우스는 누구인가?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그리스어로 옮겨 후세에 전한 인물이다. 즉, 그리스어로 사유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라틴어로 사유하는 중세 철학에게 전해준 인물인 것이다. 그런데 그가 전한 것은 단지 번역된 책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는 철학적 문제 역시 후세에 전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보편자의 문제이다. 즉 그는 중세 대표적 철학적 논의인 보편자 문제를 후세에 전한 중세철학의 시원에 선 철학자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이 보편자 이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포르피리우스 등의 고민에 대한 주해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다. 즉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그의 보편자에 관한 논의가 담긴 것은 그의 독자적 철학 저작이나 신학 저작이 아니라, 포르피리우스의 『이사고게』에 관한 두 번째 주해에서 찾아지는 것이다.1)

 보에티우스는 당시 철학적 논의의 중심에선 포르피리우스와 알렉산더 아프로디시아스 등의 철학적 논의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해하였고, 이러한 고민의 결과로 그는 자신의 고유한 철학적 논의를 일구였다. 이는 후대 중세 철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토마스 역시 그의 아리스토텔레스 이해에 아비첸나와 아베로에스 등의 흔적이 있듯이 말이다.

 비록 보편자에 관한 논의에서 보에티우스가 중세의 선구에 서 있지만, 보편자 문제 자체가 그에 의하여 성립된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하여, 포르피리우스와 알렉산더 아프로디시아스 그리고 그 외 많은 철학자들의 논의가 이미 있었고, 이러한 논의가 보에티우스를 걸쳐 중세로 이어져 다루어졌다.2) 그렇기에 그의 보편자에 관한 이해는 중세철학의 보편자 이해에 매우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중요한 것이다. 그의 존재론적 입장이 실재론인지 유명론인지 등을 논의하기 앞서 과연 그의 보편자가 어떠한 것인지 고민하는 것은 보에티우스의 철학을 연구함에도 그리고 그의 철학적 논의를 계승하여 나아가는 중세철학자들의 철학적 고민을 연구함에도 유익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보에티우스의 보편자 이해의 틀이 된 포르피리우스 자신은 보편자를 ‘술어’의 차원에서 이해한다. 즉, 보편자란 여럿에 관하여 서술되어지는 것이며, 개별자는 단지 하나의 것에 관하여 서술되어지는 것이란 말이다. 이러한 술어인 보편자는 플라톤과 형상과 같은 것이 아니다. 플라톤의 형상(idea)은 술어의 차원을 넘어선 존재론적 의미를 가진다. 이는 플라톤 자신이 형상을 술어가 아님이라 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뿐인가, 그는 모든 공통명사가 형상인 것도 아니며, 이러한 형상은 추상에 의한 개념도 아니라고 하였다.3) 즉, 포르피리우스가 이야기하는 보편자는 모든 개별적 존재자와 존재론적 연관을 가지는 그러한 형이상학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단지 술어의 차원에서 기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에티우스는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보편자의 이해를 제시한다. 즉 그의 보편자 이해는 엄밀하게 포르피리우스와 구별되는 것이다. 그리고 보에티우스는 알렉산더 아프로디시아스의 이론을 가져와 보편자 문제의 해법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적어도 필자에게 성공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한 세부적 논의는 이후 본 논의의 내용을 이루게 될 것이다. 필자는 본 논의를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와 포르피리우스 그리고 알렉산더 아프로디시아스와 보에티우스 등의 보편자 이해의 논의를 따라가려 한다. 그럼으로 중세 보편자 논쟁을 보는 또 다른 하나의 측면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1. 『이사고게』, 『범주론』의 입문서.

1.1 『범주론』에서 보편자의 이해.

 포르피리우스에게 『이사고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의 이해를 위한 입문서의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이해를 위한 것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이 저서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음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언뜻 스쳐보면, 『이사고게』와 『범주론』의 연관을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한번 곱씹어 살펴보면, 이 둘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에서 공통된 것의 형식을 가장 먼저 고민한다. 예를 들어, ‘실재 가운데 인간’과 ‘그려진 인간’은 모두가 동물이란 술어가 공통으로 서술된다. 이를 ‘동음이의어’라고 한다. 이는 명칭만 같을 뿐, 그 근본은 다르다. 또한 ‘인간’과 ‘소’ 역시 모두 동물이란 공통된 술어로 서술된다. 이들은 동음이의어와 달리 명칭과 그 근본이 모두 동일하다. 이를 ‘동음동의어’라 할 수 있다.4) 이러한 논의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공통된 것, 즉 ‘동물’이란 것을 술어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즉 보편자는 기본적으로 여럿에 관한 술어이며, 이것이 기본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다.5)

 후자의 경우, 즉 동음동의어를 보자. 인간과 소는 모두 동물이란 류(genus)로 서술된다. 이때 류는 존재론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술어의 차원의 것이다. 이를 더욱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과 소는 모두 동물이란 술어를 가지며, 이는 이들이 동물이란 류의 종(species)이기에 가능하다. 하지만 이 종이란 것도 각각의 개별자에 대한 하나의 술어이다. 예를 들어, 류성룡과 이황은 모두 인간이다.

 그러면 개별자에 관하여 공통되게 서술되는 ‘인간’이란 것과 이러한 종들에 관하여 공통되게 서술되어지는 ‘동물’이란 것은 존재론적 위상을 가지는가? 적어도 『범주론』 1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자를 존재론적 위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술어의 차원에서 정의하고, 논의를 진행한다.

 동물은 그려진 인간과 실재 가운데 인간에 공통되게 서술되어지는 것이다. 비록 그 근거가 달라도 그렇다. 인간과 소는 동일한 근거에 동일한 명칭으로 서술되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론적 측면이 아닌 술어적 측면에서 보편자를 이해하고,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1.2 입문서『이사고게』6).

 포르피리우스는 동일한 명칭을 가지며, 동일한 근거를 가지는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하나의 소개서를 적는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인간이란 것으로 동일하게 서술되어질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가 간단하게 적은 『범주론』에서의 술어에 관한 논의의 이해를 위하여 포르피리우스는 몇 가지 기본적인 전문 용어들을 소개한다. 즉, 류, 종, 차이, 속성, 우유이다. 그리고 이러한 틀을 통하여 그는 각각의 범주를 하나의 보편적인 것으로 가정하는데, 그것은 이들이 여럿에 대하여 공통되게 서술되어지기 때문이다.

 포르피리우스는 기본적으로 보편자를 술어의 차원에서 이해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압축된 논의를 펼쳐서 처음 이를 접하는 이들에게 안내서를 제공하려 한다. 이러한 목적이 바로 『이사고게』의 목적이다. 그렇기에 포르피리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준하여 보편자를 술어의 측면에서 받아드리고, 이러한 이해에서 논의를 전개한다.

 그러면서 포르피리우스는 이러한 보편자에 관한 논의를 제한한다. 이것은 매우 유명하며, 중세 보편자 논쟁을 이해하는 틀로 흔히 인용되는 것이다. 이를 정리해 보자.


“류와 종은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심적인 것인가?

만일 실재적인 것이라면, 물체적인가 아니면 비물체적인가?

비물체적인 것이라면, 감각적인 것으로 분리된 것인가 아니면 그 가운데 있는 것인가?“7)


포르피리우스는 이에 관한 논의를 다루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중세 철학자들의 몫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적어도 필자는 그가 보편자를 심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고 본다. 이는 이후 그의 논의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선명해질 것이다.


2. 포르피리우스의 보편자 이해.

2.1 『이사고게』의 보편자와 공통 본성의 구분

 ‘이성적인 것’이란 것은 보편적인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서술되기 때문이다. 포르피리우스는 류는 여러 개별적 존재가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러한 점에서 단지 하나의 것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는 것과 구분된다고 한다.8) 하지만 여럿에 대하여 서술되어진다고 하는 것들은 저마다 상이한 방식으로 여럿에 대하여 서술되어진다. 이 여러 가지 서술의 방식이 류와 종 그리고 속성과 차이 그리고 우유이다. 이 다섯 가지는 대표적인 보편자로 여겨지면서 중세 철학사에 줄곧 다루어진다.9)

 포르피리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등장하는 10개의 범주들을 각각 존재자라고 서술되어진다면, 그것은 일의적으로 서술되기 때문이 아니라, 다의적으로 서술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10개의 존재자들을 최초의 류라고 한다. 그런데 그에게 류란 여럿에 관하여 서술되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10개의 범주는 여럿에 관하여 서술되어지는 서술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서술 방식의 10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10)

 그에게 류란 보편자이며, 이는 술어의 방식에서 이해되어지고 정의되며 적용된다. 류란 존재론적 혹은 형이상학적 측면의 것이 아니다. 즉 플라톤의 형상과 그 근본에서 다른 것이다. 플라톤의 형상은 영혼 외부에 존재하는 진정한 존재이며, 다른 모든 것에 존재론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플라톤의 형상은 술어가 아니다. 그것은 실재적 존재이며,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플라톤 자신이 이미 형상은 술어가 아니라고 한 것에서 분명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여럿에 속하는 것으로 보편자를 정의한다.11) 하지만 이러한 것은 존재론적 측면에서 이해되어야하는가? 아니다. 그에게 이는 여럿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는 술어로 보편자일 뿐이다. 포르피리우스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와 “플라톤은 인간이다”라는 명제에서 ‘인간’은 여럿에 대하여 공통되게 서술되어지는 술어이지, ‘인간’이란 형상에 각각의 개별자가 참여하기에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의 개별자에 관하여 상이한 술어가 가능하며, 이러한 술어들은 다른 개별자와 구분되고, 이러한 구분되는 술어들의 집합으로 그 개별자를 정의한다.12)

 플라톤의 형상은 모든 개별적 존재자의 존재론적 원리 혹은 시원 혹은 참된 존재로 공통 본성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공통 본성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해되고 정의되지만, 술어의 차원은 아니다. 즉 포르피리우스가 이야기하는 여럿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는 보편자와 그 성질이 다른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의 단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되거나 정의될 수 있다. ‘인간’의 경우를 보자. 공통 본성으로 인간은 모든 개별적 인간들이 그 공통 본성에 참여함으로 인간의 본성을 가지게 되는 그러한 존재이다. 하지만 술어적 차원에서 ‘인간’은 모든 개별적인 이성적 동물에 대하여 공통되게 서술되어지는 하나의 개념 혹은 술어이다.

 플라톤은 모든 보편적 술어가 형상, 즉 공통 본성은 아니라고 했다. 즉 플라톤은 보편자와 공통 본성을 구분한 것이다. 그의 문헌을 살펴보자.


“헬라스인을 하나의 형상처럼 나머지 모든 형상들한테서..... 또한 어떤 이는 1만을 마치 하나의 형상(eidos)처럼 분리해...”13)


 이 간단한 글귀가 어찌 보면 많은 것을 담고 있다. 포르피리우스는 헬라스인이나 지역을 나타내는 테바인과 같은 것을 보편자로 소개하고 있다.14) 그런데, 플라톤은 이를 형상, 즉 공통 본성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포르피리우스가 그것을 술어의 차원에서 정의하고 이해하기 때문이며, 공통 본성이나 형상으로 이해하지 않은 이유에서 기인한다.

 이렇게 된다면 포르피리우스는 『이사고게』에서 존재하는 것을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을 서술하는 방식의 상이한 방법을 분류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러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적 입장에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지만,15) 적어도 포르피리우스에게 보편자는 그러한 것이었다. 하지만 보편자와 형상에 대한 이러한 구분은 포르피리우스에 이르는 오랜 철학의 서구 철학의 전통이었다. 그리고 이 전통 속에서 포르피리우스의 보편자가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2.2 알렉산더와 신플라톤주의에서 보편자 문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조화 꿈꾸기.

 신플라톤주의자들의 대부분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조화를 꿈꾸었다. 이러한 조화 속에는 이들 두 철학이 서로 모순이 아니라는 발상 때문이다. 포르피리우스의 경우를 보자. 그는 보편자와 형상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보편자는 여럿에 관하여 서술되어지는 술어적 측면의 것이지만, 형상은 이와 달리 존재론적 측면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보편자는 형상 이론의 대안이나 극복 방법이 아니었다. 차라리 이 둘은 조화를 꿈꾸어야할 것이었다. 이것은 포르피리우스만의 것이 아니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쟁점은 플라톤은 실체를 형상이라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를 개별자라고 한 차이에 기인한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보편자의 부정을 이끌어낼 근거가 된 것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보편자는 그 논의의 장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보편자란 개별자들에게서 추상하여 얻은 하나의 개념일 수 있다. 즉 여럿에 대한 술어란 것이다. 이러한 술어란 것은 스페이드의 이야기와 같이 언어적 요소에서 혹은 의미론적 요소에서 논의될 수 있을 뿐인 것으로 보인다.16) 즉 존재론적 측면을 가지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에게 형상은 단지 언어적 차원의 것이나 추상으로 얻어지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이는 엄밀하게 존재론적인 것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이론을 이해하고, 이들을 조화하려는 시도가 신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하여 시도된다.17) 이러한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아리스토텔레스 이해에 큰 역할을 하는 철학자는 알렉산더 아프로디시아스라고 할 수 있다.18) 그는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개별자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개별자 가운데 하나의 것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은 동일한 본성에 기인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본성은 개별자도 보편자도 아니다. 이 본성은 하나의 것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는 개별자도 여럿에 관하여 서술되어지는 보편자도 아니며, 보편자란 단지 그러한 본성이 파악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보편자란 본성으로 인하여 가능한 것이며, 더욱 더 엄밀하게는 본성에 대하여 우유적인 것이다.19) 또한 이 본성은 개별자에 존재론적으로 앞선다. 여기에서 알렉산더는 분명 보편자와 본성을 구분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것이 그의 보편자에 관한 존재론적 입장은 모두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의 보편자 이론은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어가는 사람의 한 명으로 자연종의 영원성이란 입장에서 실재론자일 수 있다. 하지만 필로폰누스가 전하는 알렉산더에 의하면 알렉산더는 공통된 것 혹은 보편자를 사고에 의존하였다고 보았다. 그런데, 만일 이렇다면, 보편자를 명사로 환원하는 것을 유명론라는 전제에서 알렉산더는 최초의 유명론자일 수도 있다.20) 그러나 이러한 논의에서도 그는 보편자와 형상을 구분하여 이해하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21)

 이러한 것은 이후 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이러한 알렉산더의 생각은 포르피리우스에게로 이어진다. 알렉산더의 생각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자 이론은 플라톤의 형상에 대한 대체물이 되거나 형상 이론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후 많은 철학자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조화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포르피리우스가 있다. 그도 이미 『이사고게』의 논의에서 다루었듯이 본성과 보편자를 구분한다. 그러면 이러한 논의는 포르피리우스와 알렉산더에게만 한정되는 이단적인 견해인가? 아니다. 신플라톤주의 근거를 지운 철학자인 이암블리쿠스에게서도 이러한 경향은 확인된다. 이암블리쿠스는 알렉산더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을 대립의 구조에서 이해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플라톤의 분유 혹은 참여의 이론에 근거한 존재론적 토대를 가진다. 이러한 토대에서 ‘참여하는 것’과 ‘참여된 것’ 그리고 ‘참여되지 않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을 구분한다. 예륻 들어 흰 것의 경우를 적용해보자. 흰 것이란 개별적인 사물은 ‘참여하는 것’이다. 반면 흰 것 가운데 존재하는 ‘내재하는 형상’으로 흼은 ‘참여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흼 그 자체’는 참여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알렉산더가 질료에 ‘내재하는 형상’(enylon eidos)과 질료와 분리된 형상을 구분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암블리쿠스는 두 번째 것, 즉 ‘참여된 것’을 ‘내재하는 형상’이라 부른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세 많은 발전을 야기하는 추상 이론의 원천적인 한 형태를 볼 수 있다. 즉 추상이란 것은 ‘내재하는 형상’이 지성 가운데 주어지는 것이며, 이렇게 주어진 것이 바로 여럿에 대하여 지성 가운데 주어진 하나의 개념 혹은 술어인 보편자이다. 하지만 이러한 내재하는 형상은 본성과 구분된다. 본성, 즉 참여되지 않은 것은 모든 참여된 것의 존재론적 근거이며, ‘내재하는 형상’과 구분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본성은 보편자도 아니다. 존재론적 측면의 것이지, 술어적 측면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명의 중요한 철학자는 심플리치우스는 그의 『범주론 주해』에서 우리가 공통된 것(to koinon)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를 분석한다.22) 이는 세 가지로 나뉘어진다. 개별자를 초월한 것과 개별자 가운데 있는 것 그리고 추상을 통하여 얻어 우리의 지성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내재하는 형상과 보편자이다. 이러한 논의에서 심플리치우스는 보편자와 형상 혹은 본성을 구분하는 흐름에 참여함을 볼 수 있다.23) 그리고 이러한 논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시리아누스에게로 이어진다. 시리아누스는 이암블리쿠스의 견해를 수용한다.

 시리아누스는 또 다른 구분을 제시한다. 그는 보편자란 ‘영혼 가운데’ 있거나 ‘실체’를 두고 사용하며, 이 보편자의 두 가지는 두 가지 술어의 형태와 병행한다고 한다. 하나는 서술된 것이 독립된 존재를 가지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별자가 그 가운데 분유하는 독립적인 것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24) 즉 그는 영혼 가운데 개념과 실체로 보편자를 구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실체와 같은 보편자는 바로 본성이며, 이는 내재된 형상과 다르다. 시리아누스의 견해가 아스클레피우스의 인용으로 살필 수밖에 없지만, 분명 그도 본성과 내재하는 형상 그리고 고유한 의미에서 지성 가운데 존재하는 술어 혹은 개념인 보편자를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포르피리우스는 공통된 것을 고민한다. 그 역시 공통된 것은 두 가지로 구분할 것이다. 본성과 보편자이다. 본성은 존재론적 측면에서 접근한 것이며, 반면 보편자는 술어의 측면에서 접근한 것이다. 즉, 존재론적으로 공통된 것은 본성이며, 술어적 측면에서 공통되게 서술되어지는 것을 보편자이다. 알렉산더에 의하면 그리고 많은 그 시대의 철학자에 의하면 이러한 보편자는 본성에 뒤에 선 것이다. 알렉산더에 의하면, 본성은 개별자도 보편자도 아니다. 반면 이 본성은 보편자의 근거가 된다. 동일한 여러 개별자가 하나의 공통된 개념으로 되어지는 근거는 본성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알렉산더가 보편자를 본성에 대하여 우유적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내재하는 형상과 본성 그리고 보편자는 서로 다른 것이다. 그리고 더욱 더 중요한 구분은 본성과 보편자가 구분된다는 것이다.


3. 주해자 보에티우스의 포르피리우스 이해.

 3.1 보에티우스 『이사고게에 관한 두 번째 주해』의 내용 정리.

 보에티우스는 『이사고게』를 주해함으로 중세 철학에 보편자 문제를 넘겼다. 이곳에서 필자는 보에티우스의 보편자 이론을 다룰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단지 그가 보편자를 어떻게 이해하였는가를 다룰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는다. 즉 보편자의 유무(有無)가 아니라, 보편자의 정의를 다룰 것이란 것이다.

 보에티우스는 보편자에 관한 두 가지 상반되는 이론의 해결책을 알렉산더의 해법으로 시도해 보려 한다. 즉 보편자의 존재를 부정할 것인가 아닐 것인가에 관한 해법으로 말이다. 그러면 그의 보편자 이해를 살피고, 동시에 그의 알렉산더 해법의 적용이 타당한지를 살펴보겠다.


“류와 종은 존재하거나 실존하거나 혹은 지성적으로 그리고 오직 인식함으로 형성되어지거나 이다. 그러나 류와 종은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이러한 것으로부터 이해되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공통된 것으로 여럿 가운데 시간적으로 하나로(uno)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가운데 하나인 것(unum)이 존재할 수는 없다.”25)


여기에서 보에티우스는 보편자가 실존하는가 혹은 개념적으로 존재하는가를 고민한다. 그러면서 보편자의 존재를 부정한다. 왜냐하면 여럿 가운데 시간적으로 동시에 존재하면서, 수적으로 하나의 것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체계에서 개별자는 하나의 수적 동일성을 유지한다. 즉 오윤아와 송윤아는 인간이란 공통된 본성을 가진다고 해도, 수적으로 각각 다르다.26) 그렇기에 이 둘에 모두 동시에 적용되면서 수적으로 하나란 것은 보에티우스에게 불가능해 보였을 것이다. 한편 보에티우스는 보편자의 존재를 긍정하는 논변을 제시한다.


“류와 종이 존재하지 않고 이해되어질 때, 그것에 대해 사고된 것은 참이 아니며...”27)


간단하게 사고의 대상은 존재해야하고, 우리는 류와 종을 사고한다. 그런데 만일 이렇게 사고된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이것은 거짓이 되어야한다. 보에티우스는 류와 종의 논의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 이론을 가져온다. 즉 진리란 사고와 대상의 일치란 것이다. 만일 사고가 대상과 일치되지 않거나 왜곡된 것이라면 이것은 진리가 아닌 거짓이다. 그렇기에 보에티우스는 류와 종에 관한 우리의 이해가 진리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존재해야한다고 본 것이다.

 보에티우스는 이렇게 보편자 존재의 부정적 논리와 긍정적 논리를 모두 내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보편자에 관한 두 가지 갈림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알렉산더의 해법을 소개한다. 보에티우스의 알렉산더에 의하면 사고 속에 있는 것은 실존하는 개별자들로부터 추상하여 가져온 것이다. 이러한 사고 속에 있는 것은 개별자 가운데도 실존한다. 개별자 가운데 실체적 유사성을 가진 것을 추상하여 사고 가운데 가진다는 논리이다. 실체적 유사성이 특수자 가운데 있을 때, 그것은 감각적인 것이며, 보편자로 있을 때, 그것은 지성적인 것이다.28) 보에티우스에게 알렉산더의 도움에 의한 이러한 논의는 보편자 문제의 한 해결책이 되었다. 보에티우스는 이러한 해법으로 포르피리우스가 야기한 문제가 해결되어진다고 본다. 문제와 해법을 도식화하여 보자.


1.류와 종은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심적인 것인가?

->류와 종은 개별자 가운데 실체적 유사성으로 존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단지 사고 속에만 있다.

2.만일 실재적인 것이라면, 물체적인가 아니면 비물체적인가?

->비물체적인 것으로 물체적인 것 가운데 존재한다.

3.비물체적인 것이라면, 감각적인 것으로 분리된 것인가 아니면 그 가운데 있는 것인가?

->플라톤은 분리된 것으로 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물체적인 것 가운데 존재한다.29)


이렇게 보에티우스는 우선 이 논의를 정리하다. 철학자 보에티우스는 알렉산더의 도움으로 보편자의 존재에 관한 난제를 해결한다. 그리고 다른 많은 중세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이러란 그의 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따라서 타당하다고 한다.30) 철학자로 보에티우스는 극단적 실재론으로 플라톤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길을 보다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알렉산더의 해법을 취한다. 그럼에도 보편자에 관한 포르피리우스의 문제를 반-플라톤의 입장에서 해결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반-플라톤적 노선을 위하여 선택한 그의 포르피리우스과 알렉산더의 이해는 얼마나 타당한 것인가? 이제 이를 살펴보겠다.


3.2 포르피리우스와 알렉산더의 주해자 보에티우스.

 결과적으로 보에티우스가 사용한 알렉산더의 해법은 포르피리우스가 제시한 문제 혹은 보편자에 관한 서로 다른 견해의 마찰에 관한 문제 혹은 반-플라톤적 견해에 대한 해법이 아니다.

 포르피리우스에게 보편자는 술어의 차원에서 이해된다. 그에게 류와 종은 보편자이며, 이는 여럿에 관하여 서술되어지는 술어이다. 이는 이미 살핀 바이다. 알렉산더 역시 보편자와 본성을 구분한다. 보편자는 술어의 차원에서 이해되지만, 본성은 이와 다른 것이다. 본성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여러 개별자가 동일한 본질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되어지는 존재론적 근거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편자란 추상된 본성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질료 가운데 내재하는 형상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논의는 이후 신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한다. 다양한 형태가 있지만, 대표적인 것을 필자의 이해에 따라서 도식화해 본다.


○ 존재론적 차원

1.본성-참여되지 않은 것. 예>흼

2.내재하는 형상-참여된 것. 예>흰 것 가운데 흼

3.개별자-참여하는 것. 예>흰 것

○ 술어적 차원

3.보편자-여럿에 대한 술어. 예>동물, 인간

4.개별자-오직 한 개인 개체에 대한 술어. 예>이 사자, 오윤아


이러한 도식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조화를 모색하는 이들 이후 철학자에게 큰 영향을 준다. 이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대립의 구도로 이해하지 않았다. 플라톤의 형상-이론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자-이론은 대체적 이론이 아니다.

 오히려 존재론적 측면에서 논의한 플라톤의 형상과 술어적 측면에서 논의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자를 조화하려 하였다. 이러한 것은 알렉산더뿐 아니라, 이암블리쿠스와 같은 철학자에게 보여 지는 것이다. 이들의 논리에 의하면, 형상 혹은 공통 본성은 존재론적으로 개별자를 앞서며, 개별자는 이로 인하여 동일한 본질을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본성 혹은 형상에 참여하는 개별자들은 그 질료 가운데 내재하는 형상을 가지며, 이러한 내재하는 형상이 추상에 의하여 지성 가운데 존재할 때, 이 지성 가운데 존재하는 것은 보편자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조화한 것이다. 각각 차이가 있고, 서로 다른 존재론적 근거를 가진다고 하여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조화 그리고 약간의 용어의 차이가 있어도 플라톤의 형상-이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자-이론이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도 동의하였다. 굳이 이 둘의 차이가 있다면, 실체(ousia)를 이해하는 차이게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플라톤은 실체를 형상이라 하였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를 개별적 존재로 본 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도 참여 이론과 존재론적 다양한 담론으로 조화하고자 이후 많은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형상과 보편자를 대립된 이론으로 보진 않았다. 오히려 서로 보충될 수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 특히 이러한 논의가 신플라톤주의자에 의하여 진행됨으로 그들의 이론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다가가게 하는 역사적 효과를 야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통에서 포르피리우스 역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다. 그도 두 철학자의 이론을 조화하려 한 것이다. 그렇기에 포르피리우스는 단순하게 플라톤의 아리스토텔레스 비판에 치우치지 않는다. 그러한 경향 가운데 그는 『이사고게』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정리한다. 그런데 그가 생각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은 술어의 문제이지, 존재론적 문제가 아니다. 이는 그의 『범주론 주해』에서 『범주론』의 목적은 언어의 차원에 있다고 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서 포르피리우스는 『이사고게』에서 대상에 관한 류와 종과 같은 것을 술어의 차원에서 다루지, 대상에 관한 류와 종의 존재론적 상황은 아니라고 하며, 이는 뒤로 미루어둔다. 아니, 『범주론』의 논의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제외한다. 쉽게 포르피리우스가 『이사고게』에서 전개하려는 것은 여러 대상에 관한 술어 혹은 표현이지, 그 술어의 존재 상태가 아니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술어의 존재론적 상태에 관한 논의는 더욱 더 높은 단계의 논의로 미루어둔다. 그는 당시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대립의 구조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보편자에 관한 그들의 생각은 조화된 것이지, 대립의 것으로 보지도 않았다.

 이제 이러한 포르피리우스와 알렉산더에 관한 보에티우스의 해석을 살펴보자. 우선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자 이론을 대립의 구조 속에서 이해한다. 다음의 글귀를 보면 확인된다.


“그러나 플라톤은 류와 종 그리고 다른 남은 것들을 보편자로 이해하며, 또한 물체적인 것을 넘어 존재하거 실존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으로 이 같은 것을 비물체적이며 보편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는 감각적인 것 가운데 실존하는 것으로 여진다.”31)


정리해보자. 이는 보에티우스가 포르피리우스가 제기한 3번째 물음에 관한 답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보에티우스는 플라톤에 의하면 류와 종 그리고 남은 것, 즉 속성, 우유, 차이와 같은 것이 보편자이며, 육체로부터 떨어져 존재한다고 해석한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류와 종을 비물질적인 것으로 보편자이며, 감각적 개별자 가운데 실존하는 것으로 주장했다고 해석한다. 플라톤의 형상은 류와 종과 같은 보편자가 아니다. 즉 술어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특히 포르피리우스가 제시하는 보편자 가운데 하나인 속성은 플라톤에게 형상의 하나가 아니다. 플라톤에게 형상은 실체이지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플라톤의 형상과 포르피리우스가 이야기하는 보편자는 그 내용이 다르다. 논의의 내용도 다르고, 정의도 다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류와 종은 술어의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개별자 가운데 존재하는 형상이 아니며, 실체도 아니다. 이러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해는 알렉산더와 포르피리우스에게 공통된 것이다. 그러나 보에티우스는 이러한 알렉산더와 포르피리우스의 해석과 논리가 아니라, 류와 종을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해한다. 그러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에 관한 논리를 술어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하는 보편자의 논의에 적용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분다면, 분명 보에티우스의 알렉산더와 포르피리우스의 이해는 문제를 가진다. 알렉산더와 포르피리우스는 보에티우스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 즉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가운데 누구의 보편자 이론이 더 우울한가의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형상과 보편자를 분명하게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보에티우스는 많은 면에서 신플라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는 신 가운데 형상과 내재하는 형상을 구분한다. 순수형상은 신 가운데 영원한 것이다. 이러한 신 가운데 존재하는 형상은 단순한 것이며, 이에 다른 개별자 가운데 내재하는 형상이 근거된다. 이는 다음의 글귀에서 확인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 어떠한 구별성도 없으며, 구별성의 다양성도 없으며, 우유들로부터 다수성도 그리고 그로 인한 수(numerus)도 없다.”32)


신 가운데 형상은 플라톤의 형상과 같은 것이다. 마치 플라톤의 데미우르구스의 정신 가운데 형상과 같이 말이다. 이러한 이해는 그리스도교화된 신플라톤주의 일반적 상식이었다. 이들은 신적 관념 가운데 찾아지는 피조물의 참된 존재의 모습을 신의 정신 가운데 순수한 상태로 있는 형상에서 찾았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존재는 바로 그 형상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 형상은 바로 사물의 가장 완전한 형상이기 때문이다.33) 이러한 형상은 질료적 요소를 전혀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순수형상과 내재하는 형상을 보에티우스는 구분한다.

 만일 이러하다면, 보에티우스의 보편자 이론을 어느 정도 간단하게 그려볼 수 있다. 모든 피조물은 신의 순수형상에 의하여 가능하며, 신의 순수형상은 개별자를 앞선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는 보편성에 개념은 바로 신 가운데 동일한 형상을 가진 개별자들의 실체적 유사성을 추상함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도식은 중세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도식에서 보편자는 존재론적 측면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보에티우스의 보편자는 ‘서술함’(predicatio)의 측면에 아니라, 참여함(participatio)의 측면에서 주로 거론되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논의의 전체적 구조는 플라톤의 존재론에 매우 가깝다. 단지 내재하는 형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상기’가 아니라, ‘추상’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보에티우스는 포르피리우스와 알렉산더의 보편자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다. 보에티우스에게 보편자는 단지 술어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는 플라톤의 형상과 같은 차원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바, 포르피리우스와 알렉산더는 이와 길을 달리하였다.

 보에티우스의 해석이 철학적 차원을 떠나 주해자의 차원에서 포르피리우스와 알렉산더에 관한 정확한 해석이라 보기 어려운 것은 그의 해석이 가진 보편자와 형상에 관한 해석에 기인한다. 형상은 존재론적 차원의 것이지, 술어의 차원이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보편자는 술어 차원에서 다루어진다. 하지만 이 둘은 모두 ‘공통적인 것’(to koinon)이다. 하나는 여러 개별자에게 공통되게 주어진 것이다. 즉 모든 흰 것은 흼 그 자체라는 공통 본성 혹은 형상에 참여함으로 가능한 것이다. 흼이라는 본성 혹은 형상이 없이는 모든 흰 것들이 흰 것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에 분명 본성 혹은 형상은 공통된 것이다. 또한 이 모든 흰 것들은 흰 것이라는 술어로 서술되어진다. 여기에서 술어로 ‘흰 것’가 ‘흼’이라는 본성은 서로 다른 영역에 있다. 그러나 이 둘은 모두 공통된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공통된 것이고, 술어적으로 공통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적 논의에서 문제가 되는 제일 실체(prima substantia)와 제이 실체(secunda substantia)에 대한 논의에서 제이 실체는 공통된 것이지만, 술어의 차원에 존재론적인 것은 아니다. 만일 제이 실체가 존재론적으로 플라톤의 형상에 준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것은 보편자가 아니다. 비록 공통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에 관하여 나름으로 조화하려는 이들은 본성 혹은 형상 혹은 공통적 존재를 비록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이 실체라고 불렀지만, 이를 가장 완전한 의미의 실체로 불렀다.34) 이것은 실체 가운데 실체이다. 왜냐하면 모든 개별자들은 바로 이 실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술어가 아니다. 그리고 포르피리우스와 필로폰누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론에서 다루는 것은 여럿에 관하여 서술되어지는 것이며, 이는 우리 사고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에 한정된다고 본다.35)

 그러나 보에티우스는 이 술어의 문제를 존재론적 차원에서 접근한다. 즉 공통된 것의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영역의 것을 하나로 묶어 버린 것이다. 본성과 형상은 보편자로 보며, 포르피리우스의 다섯 보편자를 형상의 일부로 여기는 것,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의 특징을 개별자 가운데 보편자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에서, 필자는 보에티우스가 형상과 보편자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있음의 증거를 본다.


3.3 철학자 보에티우스의 저서에서 보편자 문제.

 그렇다고 보에티우스가 술어의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보편자는 아예 모르지는 않았다. 『인격과 두 가지 본성에 관하여』에서 보에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보편자는 단수자들에 관하여 서술되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 동물, 돌, 목재 그러한 류 혹은 종인 다른 여러 가지들에 그렇다.”36)


분명 보에티우스는 보편자를 여러 단수자들에 관하여 서술되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보에티우스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논의한다.


 “본질은 보편자 가운데 존재할 수 있고, 오직 개별자와 특수자 가운데 실체적으로 있는 것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보편자에 관한 우리의 사고는 특수자로부터 취해진 것이다. 보편자 가운데 자존(subsistentia) 그 자체가 있으므로, 참으로 특수자 가운데 그 실체를 취하며...”37)


여기에서 보에티우스는 본질이 보편자 가운데 존재하며, 개별자 가운데도 존재한다고 한다. 이 본질이란 것은 철저하게 존재론적 차원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편자 가운데 있는 자존은 개별자 가운데 있는 실체와 동일하다는 논리가 등장한다. 다음의 글을 읽어보자.


 “왜냐하며 우유의 주체인 동안 이것들에 실체적으로 있기 때문이다. 류와 종은 단지 그러한 것으로 자존한다. 왜냐하면 우유는 류와 종에 더해지지 않는다.”38)


여기에서 실체적으로 있다는 것은 바로 우유의 주체인 실체이다. 이러한 실체는 자존과 다르다. 자존은 보편자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존은 실체와 달리 우유가 더해져 있지 않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미 위에서 보에티우스가 말했듯이 보편자 가운데 존재하는 것과 개별자 가운데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종국에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철학자 보에티우스의 독자적인 철학 저서에서 보편자는 자존의 개념과 관련되어 이해된다. 이러한 보에티우스의 보편자 이해는 이후 오도가 『원죄에 관하여』 등에서 전개하는 극단적 실재론의 또 다른 철학적 근거가 될 것이다.

 이러한 보에티우스의 존재론은 신플라톤주의자들의 논리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 논의하였듯이 신플라톤주의자들은 많은 경우 본성(형상)과 내재하는 형상 그리고 개별자로 존재론적 구도를 삼았다. 보에티우스 역시 자존하는 본질로써 보편자와 개별자 가운데 본질로써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 그리고 개별자라는 도구를 가진다. 비록 몇 가지 수정과 차이를 가지지만, 기본적 구도는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보편자와 형상을 동일하게 보았다는 것이다. 포르피리우스에게 보편자는 술어의 차원이지 자존하는 것이 아니다. 포르피리우스는 보편자와 본성 혹은 형상을 구분한다. 공통된 것을 두 가지로 구분하여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보에티우스는 술어적 차원의 것을 존재론적 차원의 것에 포함해 버린다. 비록 술어적인 것을 알았지만, 존재론적 차원의 것으로 포함하여 그 의미에 집중하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이 철학자 보에티우스의 고민은 주해자 보에티우스의 이해의 연장선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4. 이후 중세 보편자 문제.

 보에티우스는 중세 존재론의 시작에 선 인물이다. 그의 문제설정과 이해 그리고 개념의 정리는 이후 중세 철학에 큰 영향을 준다. 오도를 보자. 오도는 보편자에 관한 극단적 실재론을 선보인다. 보편자가 가장 존재론적 의미에서 존재하며, 개별자는 그렇다. 그런데 이 보편자에 관한 극단적 입장은 보편자를 술어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중세 후기 철학에 이르러 그리고 중세 무슬림 철학자인 아비첸나에 이르러 보편자와 형상은 서서히 구분되어지기 시작한다.

 아비첸나는 공통본성과 보편자를 구분한다.39) 아비첸나는 다음과 같이 논의한다. “마성(equinitas)은 그저 마성일 뿐이며, 여럿도 보편자도 특수자도 아니다.”40) 여기에서 공통본성인 마성은 보편자와 분명하게 구분된다. 만일 공통본성이 보편자라면 그것은 술어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할 것이다. 이러한 아비첸나의 논의는 스코투스에게로 이어진다. 스코투스는 공통 본성을 보편자와 구분하여 이해하고 정의한다. 지성 가운데 존재를 가지는 본성, 즉 지성 가운데 본성은 보편자이며, 이는 다수의 개별자에 관하여 서술되어지는 것이다. 본성도 두 가지로 구분되어 사고되어질 수 있다. 하나는 ‘함축된 본성’이고 다른 것은 ‘함축되지 않은 본성’이다. ‘함축되지 않은 본성’은 공통된 것이며, ‘함축된 본성’은 개별자이다.41) 이렇게 아비첸나와 스코투스는 보편자와 본성을 구분한다. 그리고 이러한 아비첸나와 스코투스의 논의는 알렉산더와 포르피리우스의 이해의 기본 틀을 이어가는 것으로 보인다.42)

 보에티우스는 보편자를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해하였고, 이를 그의 철학에 적용하였다. 그리고 이는 그의 영향을 받은 이들에게 이어졌다. 반면 포르피리우스의 술어적 차원에서의 보편자 이해도 중세 보편자 이해의 한 편이 된다. 보에티우스 이후 아벨라르두스는 『이사고게』를 읽음으로 그 저서의 목적이 존재론적 차원이 아니라, 언어 철학적 차원의 것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보에티우스의 중재가 아닌 직접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에 근거하여 포르피리우스의 질문을 살피고, 언어 철학의 입장에서 이를 고찰한다. 그리고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 유명론을 수용한다. 보편자는 단지 술어이기에 술어의 존재론적 위치는 단지 술어에 그치는 까닭에 보편자에 대한 그의 입장은 유명론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보편자의 의미대상을 인정한다. 즉 존재론적으로 여럿에 공통된 것으로 보편자에 존재론적 근거인 공통된 것을 인정한다. 이렇게 보에티우스가 이야기하는 존재론적 입장에선 아벨라르두스는 실재론자이다.43)


5. 결론.

 포르피리우스와 그의 주해자인 보에티우스는 서로 다른 보편자의 정의와 이해에 근거한다. 전자는 술어적 차원의 것이고, 후자는 존재론적 차원의 것이다. 후자는 공통된 것의 두 가지 구분, 즉 본성과 보편자를 존재론적 차원의 것으로 모두 묶어 버린 결과이다. 포르피리우스의 논의에 대한 보에티우스의 포르피리우스의 의도와 다른 주해는 중세 보편자의 이해에 큰 영향력을 남긴다. 그리고 이 둘의 서로 다른 견해에 의하여 보편자 논쟁을 바라보는 두 가지 입장이 성립된다. 이미 위에서 보았듯이 아벨라르두스는 포르피리우스의 관점, 즉 보편자가 술어라는 입장에선 유명론자이지만, 보에티우스와 같이 보편자를 존재론적으로 정의하고, 그 존재론적 보편자의 실재라는 입장에선 실재론이다. 그러니 우리의 중세 보편자에 관한 논의는 이 두 관점에 대한 이해 속에서 그 진면모를 살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러한 두 관점에 대한 이해는 후기 중세 철학자들의 보편자에 관한 존재론적 입장과 의미론적 입장의 철학사적 논의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 필자는 보에티우스의 『이사고게에 관한 두 번째 주해』를 다음의 라틴어본을 두 텍스트로 삼았다. Boethius, Commentarium in porphyrium a se translatum ed. Migne in PL.64 71-158. 그리고 이에 관한 현대어 번역에는 다음의 영어본을 참고하였다. trans. & ed. P.Spade, Five Texts on the Mediaeval Problem of Universals (Indianapolis:Hackett Publishing Company,1994). 20-25.


2) L.Gerson, "Platonism and the Invention of the Problem of Universals" Archiv fuer Geschichte der Philosophie 87 (2004), 1-26.


3) Platon, Politikos 262c10-e3. 필자는 다음의 우리말 역본을 참고하였다. 플라톤, 『정치가』 김태경 옮김 (서울:한길사,2000); Platon, Parmenides 132B-C. 이에 대한 우리말 역본은 다음의 것을 참고하였다. 송영진, 『플라톤의 변증법』(서울:철학과현실사,2000).


4) Aristoteles, Categoriae c.1, 1a-15a 이에 관한 우리말 역본은 다음의 것을 참고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론-명제론』 김진성 옮김 (서울:EJB,2005).


5) Cf. Aristoteles, Metaphysica 2,c.6, 1003a11.


6) Porphyry, "Isagoge" In Five Texts on the Mediaeval Problem of Universals trans. & ed. P.Spade, 1-19. 필자는 포르리우스의 인용에서 스페이드 번역의 편집에 따라 그의 구분 번호를 따랐다.


7) Ibid., n.2.


8) Ibid., n.10.


9) Cf. Ockham, Summa logicae 1,cc.14-25 (OP.1, 47-84). 옥캄 역시 보편자를 다루며 이들을 정의하고 분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그의 개념론을 전개한다.


10) Porphyry, "Isagoge", nn.30-31.


11) Aristoteles, Metaphysica VII, c.13, 1038a. 이에 관한 우리말 역본은 다음의 것을 참고하였다. 조대호 역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서울:문예출판사,2004).


12) Porphyry, "Isagoge", n.36.


13) Platon, Politikos 262c10-e3. 이는 김태경의 번역을 기반으로 하였으나, eidos를 종이 아닌 형상으로 필자가 고쳤다.


14) Porphyry, "Isagogoe", n.4.


15) Cf. T.Irwin, Aristotle's First Principles (Oxford:Clarendon Press,1990), 78-83.


16) P.Spade, "Universals and Wyclif's Alleged Ultrarealism" Vivarium 43 (2005), 115.


17) 아래의 신플라톤주의자들에 관한 논의는 다음의 연구물들을 참고하였다. L.Gerson, "Platonism and the Invention of the Problem of Universals"; L.Gerson, Aristotle and Other Platonists (Ithaca:Cornell University Press,2004); A..De Libera, L'art des généralités (Pqris:Aubier:1999), 25-157; L.Benakis, "The Problem of General Concepts in Neoplatonism and Byzantine Thought" In Neoplatonism and Christian Thought, ed. D.O'Meara (Albany:State University of NewYork,1982), 75-86.


18) 알렉산더 아프로디시아스에 관한 개괄적 논의는 다음의 것을 참고하였다. R.W.Sharples, "Alexander of Aphrodisias" In Routledge Encyclopedia of Philosophy, Version 1.0, (London: Routledge,1998); 또한 그의 보편자에 관한 논의는 다음의 것을 참조하였다. R.W.Sharples, "Alexander of Aphrodisias on Universals;Two Problematic Texts" Phronesis 50 (2005), 43-55.


19) A..De Libera, L'art des généralités , 141.


20) Ibid., 148-157.


21)  Cf. R.W.Sharples, "Alexander of Aphrodisias on Universals;Two Problematic Texts", 45. 알렉산더에게 보편적 공통 본성의 인식은 그것의 질료적 상태에서 지성의 추상으로 가능한 것으로 추상에 의존된 것이다. 이렇게 추상된 것은 본성은 필자의 관점에서 플라톤의 형상과 같은 것이지 않아 보인다. 알렉산더에 관한 또 다른 세부적 논의는 차후의 기회에 성과물을 내려 계획 중이다.


22) L.Gerson, "Platonism and the Invention of the Problem of Universals" 각주 53.


23) 심플리치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론』에서 공통적인 것을 다룰 때, 두 번째 것과 세 번째 것은 알았지만, 첫 번째 것은 거부한 것이 아니라, 알지 못했다고 본다.


24) L.Gerson, "Platonism and the Invention of the Problem of Universals" 각주 56.


25) Boethius, In isagoge l.1, 83A.


26) M.L.Gill, "Individuals and Individuation" In Unity, Identity and Explanation in Aristotle's Metaphysics, ed. I Scaltsas et al. (Oxford:Clarendon,1994), 61.


27) Boethius, In isagoge l.1, 34B.


28) Ibid., 85C.


29) Ibid., 85D-86A.


30) Ibid., 86A.


31) Ibid., 86A.


32) Boethius, De trinitate 2. (ed.Elsaesser, 10,56-58).


33) N.Clarke, "The Problem of the Reality and Multiplicity of Divine Ideas in Christian Neoplatonism" In Neoplatonism and Christian Thought, 120.


34) L.Benakis, "The Problem of General Concepts in Neoplatonism and Byzantine Thought", 81.


35) Ibid., 84.


36) Boethius, De persona et duabus naturis c.2 (PL.64, 1343D).


37) Ibid., c.3 (PL.64, 1344B).


38) Ibid., c.3 (PL.64, 1344C). 보에티우스의 실체적으로 있음과 자존함, 즉 substantia와 subsistentia는 서로 다른 개념으로 이는 보에티우스 이후 초기 중세 철학의 존재론을 이해함에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이는 보에티우스가 그리스어 개념들을 라틴어로 고착하며 고안한 것들이다. 이와 관련되어 중세 초기 존재론적 사유에 관한 작은 결실물을 필자는 준비하고 있다.


39) 아비첸나와 스코투스, 특히 스코투스의 고통본성에 관한 고민은 다음의 논문을 통하여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박우석, 「공통본성의 귀환:아리스토텔레스를 원용한 스코투스의 현묘한 논변들」『중세철학의 유혹』(서울:철학과현실사:1997), 152-183; J.Owens, "Common Nature:A point of Comparison between Thomistic and Scotistic Metaphysics" ed. J.Ross (Westport:Greenwood Publishing Company,1967), 185-209; P.King, "Duns scotus on the Common Nature" Philosophical Topic 20 (1992), 50-76.


40) 박우석, 「공통본성의 귀환」, 152.


41) P.King, "Duns scotus on the Common Nature", 50-76.


42) 알렉산더와 신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하면, 본성-내재하는 형상-개별자라는 기본적 도식이 있으며, 아비첸나와 스코투스는 공통본성(함축되지 않은 본성)-함축된 본성-개별자라는 도식이 있다. 이들 사이엔 어떤 유사상어 있으며, 이는 차후 더욱 더 자세한 논의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더는 중세 무슬림 철학자들에게 아랍어로 번역되어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이 당시 보에티우스 등의 중재가 미비한 상태에서 알렉산더를 직접적으로 접하며 일어난 결과일 수 있다는 추측을 해 본다.


43) P.Spade, "Introduction" In Five Texts on the Mediaeval Problem of Universals, x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