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세철학의자리

옥캄과 뷔리당 그리고 크래토른의 의미론적 차이- 세가지 언어의 의미론적 상관관계에 관하여

이 글에 관한 모든 관한을 토마스철학학교 유대칠에게 있으며, 자유로운 사용이 가능하지만, 인용이나 인터넷상<홈페이지, 미니홈피, 카페, 클럽, 블로그 등...>의 사용시 분확하게 출처를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옥캄과 뷔리당 그리고 크래토른의 의미론적 차이

- 세 가지 언어의 의미론적 상관관계에 관하여.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1.들어가기.

간혹 철학사에 간단하게 정리되고 마는 옥캄(Ockham)의 시대는 사실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논의가 혼잡하게 서로 격론을 펼치던 시대였다. 존재론과 인식론 그리고 의미론 혹은 논리학 혹은 언어철학이 각기 상이하게 여러 철학자에 의하여 다루어졌으며,1) 그 가운데 필자가 이곳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옥캄과 뷔리당(Buridan) 그리고 크래토른(Crathorn)의 의미론과 이들 서로의 차이이다. 중세 후기의 철학은 이미 스콜라 철학 일반의 논의가 그렇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관한 해석에서 시작된다. 그러한 중세 철학의 전통에서 대체로 선두에 선 인물로 보에티우스(Boethius)가 거론된다. 보에티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중세에 전달하며, 자신 나름의 해석을 더하여, 단순한 전달자를 넘어 하나의 해석자로 위치한다. 보에티우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는 새롭고 다양한 해석들이 등장하게 된다. 예를 들어, 필자가 이곳에서 전개하게 될 옥캄과 크래토른의 논의가 그러하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시작하여 보에티우스를 걸쳐 중세 후기에 달한 논의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논의의 시작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론』(de interpretatione)이다. 이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말소리에 담긴 것은 머리 속에서 겪은 것에 대한 상징물이며, 글은 다시 말소리에 담긴 것에 상징물이다. 그리고 글자가 모든 사람들에서 같지 않듯이, 또한 말소리도 같지 않다. 그러나 머리가 겪는 바는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데, 이것에 대한 표현물이 일차적으로 말과 글이다”라고 한다.2) 이글에 의하면 말소리와 글자는 국가나 인종 그리고 사람마다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이들의 근거가 되는 머리 속의 것, 즉 심적 개념은 동일하다. 예를 들어, apple과 사과는 그 말소리와 글은 다르지만, 이들이 근거하는 정신 가운데 심적 개념인 X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 X에 대하여 각각의 언어는 서로 다른 말소리와 글을 가진다는 것이다.

 중세인들의 많은 경우는 위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을 따라서 문자언어와 발화언어는 규약적인 것이며, 심적언어는 자연적인 것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이것도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소개를 가지고,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는 방법은 각양각색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에티우스와 옥캄 그리고 뷔리당은 동일한 소재를 두고 서로 다른 방법의 해석을 내어놓는다. 하지만 방법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동일한 곳에 다다르게 된다. 즉 심적언어는 자연적이며, 그 외 것은 규약적이란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세 언어 사이의 관계를 그렇게 정의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크래토른이 그러한 인물이다. 그는 중세 유일하게 공통된 결론을 부정한다. 그러한 그는 옥캄의 논의를 수용하며, 일면에선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에 머물면서, 자신의 도주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노력이 그의 고유한 의미론을 형성하며, 다른 중세 철학자들의 의미론과 다른 나름의 벽을 쌓는 소임을 하게 된다. 옥캄과 뷔리당 그리고 크래토른의 이러한 노력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출발하여 나름의 철학적 입지를 분명하게 하는 중세 철학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마이어는 후기 중세 자연 철학은 많은 경우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가운데 있으나, 때로는 이를 거부하고, 때로는 이를 대체하는 무엇을 제시한다고 한다.3) 이러한 마이어의 논의는 자연학뿐 아니라, 의미론에서도 유의미하다. 그리고 본 논의는 이를 확인하게 해 줄 것이다.


2.아리스토텔레스에서 보에티우스에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심적언어는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반면 발화언어와 문자언어는 이와 달리 규약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이 셋 언어에서 심적언어 혹은 심적개념이 가장 근원적인 것이다. 하지만 중세인들에게 야기된 하나의 궁금증은 이 심적언어를 중심으로 한 이들 언어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많은 중세인들은 보에티우스의 논의에 의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보에티우스는 이들 사이의 관계를 의미(significatio)로 이해하였다. 그러면서 발화언어는 대상에 관한 심적언어(개념)와 대상을 의미하며, 단지 차이가 있다면, 직접적으로는 그것은 개념을 의미하며, 간접적으로 대상을 의미한다는 것이라고 한다.4) 이러한 보에티우스의 아리스토텔레스 독법은 많은 부분 토마스를 비롯한 많은 중세 철학자들에게로 계승된다.5)

 보에티우스의 논의를 정리한다면, 대상은 우선 심적개념과 관계된다. 즉 심적개념은 우선적으로 대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발화개념은 심적개념와 의미관계를 가지며, 문자언어는 다시 발화언어와 의미관계를 가진다. 그렇기에 발화언어는 대상을 심적개념 혹은 심적언어에 의하여 의미하게 되며, 직접적으로 의미하지 못한다.

 보에티우스의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 독법에 근거한 논의는 중세 몇몇 학자들에 의하여 논박된다. 예를 들어 아이리(Peter Ailly)는 문자언어가 발화언어에 하위의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논의한다.


“발화문장과 문자문장은 심적문장에 종속된다. 그러나 발화문장과 문자문장이 그들 자체 가운데 종속되는 것은 필요 없다.”6)


하지만 이러한 아이리의 논변도 큰 이변을 야기하지는 못했으며, 대체로 보에티우스의 아리스토텔레스 독법에 근거한 세 언어 사이의 의미론적 연관은 중세 철학자들에게 수용되어졌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해는 경험적 사실로 보여졌기 때문이다. 공통의 의사소통에서 인간들은 한국어를 구사하는 이와 영어를 구사하는 이들 사이 어떤 어려움을 발견하게 된다. 비록 동일한 의미대상에 대한 논의를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도 중세 후기에 이르러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비록 결론적으로 동일한 논의를 한다고 하여도 그를 설명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3.옥캄, 새로운 시작.

후기 중세 철학자들 사이에선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 논리에 문제점을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만일 문자 혹은 발화언어가 심적언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문자 혹은 발화언어의 모든 요소들이 심적언어에 그 존재를 두어야만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옥캄은 발화나 문자언어에서 보여지는 다양한 우유들이 심적언어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명사의 여러 종류와 형태들은 심적언어엔 없는 것이며, 동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분명 언어 가운데 어떤 부분들은 심적언어 가운데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적언어는 의미론적 속성의 제일 요소임은 분명하다.7) 이러한 옥캄의 논의는 그의 명명(Impositio)에 관한 논의에서 분명해진다. 그의 언어 구분은 일차적으로 자연적으로 의미되어지는 것과 규약적으로 의미되어지는 것이다. 즉 전자의 심적언어와 후자의 발화 그리고 심적언어가 그것이다. 명명의 논의는 바로 규약적 언어의 구분에 문제이다. 명명은 제일 명명과 제이 명명으로 구분된다. 제일 명명은 인간과 책상 그리고 의자와 같은 일차적 명칭이라면, 제이 명명은 이러한 명칭들에 대한 명칭들 예를 들어 류와 종 그리고 명사와 동사 등과 같은 것이다. 즉 이름의 이름 혹은 명사의 명사를 두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선 제이 명명만을 논의를 위하여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제이 명명의 것들은 문법가의 전문 용어에서 사용되어지는 것으로, 기호로써 작용하는 화법의 요소들이 이러한 것이다. 이러한 문법가가 사용하는 것은 대체로 ‘이름들의 이름’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란 ‘이름’은 그 품사가 ‘명사’이다. 이때 ‘명사’는 한 사람을 칭하는 이름의 이름이다. 이때 ‘인간’이란 단어에 상응하는 영혼 가운데 개념이 바로 ‘명사’이다. 그런데 더 엄밀하게 격(格)이나 어형(conjugation)과 같은 제이 명명의 것들은 일치하는 개념이 없다.8)

이러한 논의에서 적어도 분명한 것은 발화언어와 문자언어가 모두 심적언어 가운데 그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격’이라는 것은 규약적 언어의 차원에선 존재하지만 이것은 이에 상응하는 어떤 심적개념을 가지지는 않는 것이다. 옥캄의 논리에선 모든 규약적 언어의 것이 심적개념을 의미하는 것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규약적 언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심적언어에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적언어는 규약적 언어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며, 인간 상호간 의사소통의 수단인 것은 분명하다.9) 심적언어에 근거하여 우리는 한국어와 영어를 가로지르는 번역이 가능한 것일 수 있다. 이를 트렌트맨(J.Trentman)은 20세기 초 분석철학의 이상언어와 관련하여 해석하기도 하였다.10) 이러한 해석의 사실 여부를 떠나, 이와 같은 해석이 옥캄에게 가능한 것은 그가 생각한 심적개념은 대상에 대한 자연기호의 기능을 가지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11)

이러한 것은 뿌리 깊은 중세의 전통에서 옥캄이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점이다. 중세의 많은 이들은 자연기호에 의하여 의미된 것이 심적개념의 존재를 믿었다. 이들에게 규약적 단어들은 직접적으로 대상을 의미하지 못하며, 심적개념에 의지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인간’이란 일반단어는 개별적 인간으로부터 추상된 인간본성을 지시하며, 그것은 직접적으로 개별적 대상을 지시하지 않으며, 오직 추상의 방식으로 주어진 인간본성을 지시한다.12) 그리고 우리의 심적개념은 바로 이러한 인간본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인간’이란 규약적 단어는 영혼 가운데 심적개념을 의미함으로 그 존재의 이유를 가지는 것으로 보았다. 즉 ‘인간’이란 문자 혹은 발화언어는 직접적으로 개념을 의미하며, 오직 개념에 의하여 대상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모든 규약적 언어가 심적 언어를 의미함으로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스코투스는 ‘인간’이란 일반명사에 의하여 의미되어지는 첫 번째 것을 본질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본질은 그에게 하나의 실재성을 가진다. 그렇기에 그에게 ‘인간’이란 일반명사가 의미하는 것은 개념이 아니라, 실재성이다. 옥캄은 이러한 스코투스의 논의를 수용한다. 하지만 옥캄에게 실재성은 본질이 아니라, 개별자이다. 그렇기에 그는 ‘인간’과 같은 일반명사는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적 개별자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에게 본질이나 보편자와 같은 것은 단지 개념이다. 옥캄에게 보편자는 실재성을 가지지 않으며, 단지 개별자를 향한 제일 지향의 지향, 즉 기호의 기호일 뿐이다.13) 초기 옥캄은 이를 단지 ‘만들어진 것’(ficta)라고 하였고, 후기 옥캄은 이를 ‘사고작용’(intellectio)라고 하였다. 전기이건 후기이건 상관없이 옥캄에게 보편자는 실재성을 가진 하나의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개념이다. 그런데 우리의 규약적 언어는 바로 그러한 언어의 사용자가 자신의 개념을 의미하기를 의도하며 사용하는 한에서 의미를 가진다.14) 인간과 의자 그리고 책상과 같은 것은 영혼 외부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러한 것은 제일 명명과 제일 지향의 것이다. 하지만 다른 것들 예를 들어 종과 류 그리고 보편자와 같은 것은 제일 명명의 것으로 어떤 것의 분명한 명칭이지만, 제이 지향의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우선 개별자를 지칭하는 것의 명칭이나 의미이거나 혹은 그것에 대한 또 다른 명칭이나 의미이다. 이러한 것에 아닌 것들 예를 들어 명사나 동사 그리고 분사와 같은 것을 생각해 보자. 과연 이러한 것은 이에 상응하는 심적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우선 이러한 것은 영혼 외부의 개별자에 관한 어떤 것도 아니다. 즉 제일 지향의 것이 아니다. 그러면 개별자에 관한 개별적 개념의 개념 역시 아닐 것이다. 즉 인간이란 단어와 같은 뜻으로 명사란 단어가 의미론적으로 다루어질 수 없단 말이다.

옥캄에게 심적개념을 이루는 보편자도 엄밀하게 영구한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 지성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캄은 한국인의 공책과 영국인의 note가 동일한 심적개념을 가짐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이들이 공유하는 어떤 심적개념 X는 영혼 외부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보편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사물을 지칭한다. 즉 한국인과 영국인이 보고 있는 동일한 사물에 관한 동일한 개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보편자로 공책이나 note가 가능한 것은 이러한 제일 지칭에 대한 지칭으로 가능할 뿐이다. 그리고 이 X를 말하는 이와 글 쓰는 이가 의미하기를 의도하는 한에서 규약적 언어는 의미를 가진다. 적어도 이러한 선에서 심적언어는 규약적 언어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지만, 한편 모든 규약적 언어의 것이 심적언어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관한 예를 이미 위에서 살폈다. 그렇기에 심적언어와 규약적 언어의 관계는 대상과 거울의 관계와 다르다. 그리고 의미와 의미대상의 관계와 같지 않다. 규약적 언어는 심적언어에 종속되어지지만, 의미하는 관계는 아닌 것이다. 만일 의미하는 것이라면, 심적언어를 의미하는 것으로 규약적 언어라면, 규약적 언어의 모든 요소들은 심적언어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살폈듯이 옥캄에게 이는 타당하지 않다.

옥캄에게 심적언어와 규약적 언어 사이의 관계는 새롭게 정립되어야만 했다. 기존에 유지되던 의미의 관계는 1:1의 관계이다. 마치 거울과 대상과 같은 관계인 것이다. 그러나 옥캄에게 심적언어과 규약적 언어는 거울과 대상과 같은 의미의 관계로 설명되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하게 심적언어는 의미론적 논의의 근거가 된다. 심적언어는 의사소통의 근거이며, 규약적 언어의 의미가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면, 옥캄의 선택은 하나이다. 의미관계는 아니지만, 심적언어가 의미의 중심에 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속(Subordinatio)-이론이다.15)

발화적 표현의 문법적 구조는 그 의미의 근거를 심적언어에 두지만, 그 구조는 심적구조와 일치하지 않는다. 물론 어떤 특정의 관점에서 이 두 언어가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런 이유에서 심적언어의 모든 요소들은 발화언어 가운데 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발화언어의 모든 요소가 심적언어에 있는 것은 아니다.16) 이러한 맥락에서 심적언어와 발화 혹은 문자언어 사이엔 의미가 아닌 종속으로 이해될 뿐이다. 다른 말로 옥캄은 비록 심적언어와 발화 혹은 문자언어의 관계를 의미라고 한다 하여도, 이때 의미는 종속으로 읽어야한다. 그에게 세 언어 사이에 이야기되는 의미는 이제껏 이야기된 1:1의 관계가 아니라, 종속인 것이다. 심적언어에 발화언어는 종속된다. 그리고 이 발화언어에 문자언어는 종속된다. 그리고 발화언어과 심적언어는 심적개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이는 직접적 의미대상(significatum immediatum)인 대상(res)을 의미하며, 이러한 대상을 의미하기 위하여 심적개념에 종속된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이제 의미관계로 이야기되는 것은 대상과 세 언어 사이이며, 세 언어 자체 가운데 관계는 종속관계일 뿐인 것이다. 이러한 논의로 볼 때, 옥캄은 심적언어에 모든 규약적 언어가 종속된다는 논리를 유지하면서, 규약적 언어가 심적언어에 그 의미론적 측면에서 종속되지만, 또 다른 면에서 독립적 면을 가진다는 논리를 선보인 것이다.

옥캄의 논리는 중세적 전통의 아리스토텔레스 이해의 길에서 벗어난 새로운 길을 선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옥캄의 새로움은 또 다시 당시 학자들 사이에 논쟁을 야기하였다. 몇몇 학자들은 옥캄의 종속-이론을 견지(堅持)하는 가운데 옥캄의 논리를 더욱 더 견고히 하였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옥캄을 넘어 또 다른 새로움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옥캄의 동시대 인물이며, 파리에 머물던 뷔리당과 영국인 철학자 크래토른을 맞주하게 된다.


4.뷔리당의 다른 해법.

뷔리당은 옥캄의 길이 아닌 의미-이론을 제시한다. 옥캄에 의하면 문자와 발화언어는 심적언어 혹은 개념에 종속되며, 문자와 발화언어는 심적언어와 종속 관계를 가지며, 이들은 심적언어를 직접적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대상을 직접적 대상으로 한다. 하지만 뷔리당은 이러한 옥캄의 논의를 부정한다. 옥캄에 의하여 문자언어인 ‘인간’이 의미하는 직접적 의미대상은 개별적 인간이다. 그러나 뷔리당은 문자언어인 ‘인간’이 의미하는 직접적 의미대상은 심적개념이라고 한다. 물론 궁극적 의미대상(Sgnificatum ultimum)은 의미되어지는 대상일지라도 말이다.17) 그는 보에티우스의 전통에 따라서 이 세 언어 사이의 관계를 의미로 이해한다. 그는 옥캄이 직접적 의미대상과 궁극적 의미대상을 동일선상에서 이해한 것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은 옥캄과 그의 의미론적 논의의 정점에 선 지칭(suppositio)에 관한 이해의 차이로 이어진다.

지칭의 문제는 의미의 문제와는 구분된다. ‘인간’이란 단어는 의미를 가진다. 즉 존재했고 존재하며 존재할 모든 인간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이 보인다”라는 명제의 진위를 가릴 수는 없다. 이 명제에서 보여지는 인간은 적어도 지금 이곳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존재했고, 존재할 것이라는 과거와 미래의 인간이 이 명제에 적용된다고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명제 가운데 ‘인간’이란 단어는 그저 명제를 떠나 독립적으로 다루어지는 ‘인간’이라는 단어와 다른 의미론적 가치를 가진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것이 지칭의 문제이다. 위의 명제에서 ‘인간’은 지금 눈앞에서 보여지는 개별적 인간을 지칭한다. 이러한 지칭을 옥캄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18) 이는 인칭지칭과 단순지칭 그리고 실질지칭이다. 단순지칭은 “인간은 종이다”에서와 같이 영혼 외부의 개별자를 지칭하지 않고 신적명사만을 지칭한다. 실질지칭은 “인간은 두 글자이다”에서와 같이 어떤 독립적인 의미론적 역할을 하지 않는 물리적 조건들을 나타낸다. 즉 인간이란 단어 그 자체의 조건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인칭지칭이며, 이는 중세 후기 의미론의 가장 중요한 논의 대상이다. 이 인칭지칭은 위에서 보인 예와 같이 영혼 외부에 존재하는 보여지는 인간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즉 “이 인간은 싯다르타이다”에서 인간은 영혼 외부의 것을 지칭하며, 또한 “싯다르타는 성자이다”라고 할 때 싯다르타도 영혼 외부의 개별자를 지칭한다. 이러한 지칭은 의미론적으로 “싯다르타는 네 글자이다”와 같은 수준의 의미론적 논의와 구분된다. 이러한 옥캄의 지칭론은 중세 후기 의미론에 있어서 중요한 틀이 되었다.

뷔리당의 의미론적 논의는 세 언어 사이의 관계가 다른 것의 연장선으로 이해된다. 옥캄에게 “싯다르타는 성자이다”라고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것의 관계는 종속의 관계이다. 쓰여진 단어, 즉 문자언어로 싯다르타가 의미하는 것은 영혼 외부의 개별적 존재자로 싯다르타이다. 이는 말된 단어, 즉 발화언어의 차원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비록 문자언어가 발화언어에 종속된다고 하여도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규약적 언어의 의미론적 근거는 심적언어이다. 한편 뷔리당은 다르다. 뷔리당은 “싯다르타는 성자이다”라고 말하고 쓰는 규약적 언어에서 ‘싯다르타’는 직접적 의미대상으로 개념화된 심적언어로 싯다르타를 의미한다. 물론 궁극적으로 규약적 언어가 의미하는 궁극적 의미대상은 영혼 외부의 싯다르타이지만 말이다.

 옥캄에게 단순지칭은 영혼 가운데 존재하는 것을 지칭한다. “인간은 종이다”에서 인간은 종(species)을 단순지칭한다. 종이란 영혼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규약적 언어에서 “인간은 종이다”라고 할 때, ‘인간’은 직접적으로 영혼 가운데 존재하는 심적명사인 ‘종’을 의미한다. 하지만 뷔리당은 반대한다. 그는 이를 실질지칭으로 설명한다. 실질지칭은 그 자신을 의미할 때 사용된다. 옥캄은, “싯다르타는 네 글자이다”라고 할 때, 이는 싯다르타라는 단어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반면 “인간은 종이다”라고 하는 것은 실질지칭이 아니었다. 이것은 단어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심적개념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옥캄에게 이는 단순지칭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명제는 그것이 규약적일 때는 분명 심적개념과 관계되는 단순지칭이지만, 심적언어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심적언어로 “인간은 종이다”라고 할 때, 인간이 지칭하는 것은 심적개념인 종이다. 그래서 옥캄에게는 규약적 언어에서도 심적언어에서도 위와 같은 명제는 단순지칭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반면 뷔리당은 길을 달리한다. 뷔리당도 옥캄도 모두 실질지칭은 그 자체를 혹은 그 자신의 직접적인 의미대상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해석은 다르다. 옥캄은 “인간은 두 글자이다”와 같은 것에서 발화언어와 문자언어가 그 자체를 지칭하는 실질지칭이다. 그러나 “인간은 종이다”에서 인간은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심적언어 혹은 개념인 종을 지칭한다. 그렇기에 이는 실질지칭이 아니라, 단순지칭이다. 하지만 뷔리당은 “인간은 종이다”가 실질지칭으로 설명한다. 왜인가? 이 명제에서 ‘인간’을 옥캄은 심적개념을 지칭한다고 하지만, 그는 이것이 인간 그 자체를 지칭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옥캄에게 문자언어와 같은 규약적 언어의 명제 가운데 단어는 직접적으로 대상을 지칭한다. 그것은 심적개념에 종속되지만, 심적개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 뷔리당은 다르다. 그는 문자언어는 발화언어를 의미하고, 이는 심적개념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종이다”라는 문자언어의 인간은 직접적으로 개념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이 인간은 우선적으로 심적언어인 인간, 즉 종적 개념(conceptus specificus, artbegriff)인 인간이며, 그러한 조건 속에서 위의 명제 가운데 주어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심적개념으로 인간은 단지 종적 개념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개념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종적 개념도 파악되어진다. 이 심적개념의 인간은 주어의 위치에서 지칭하는데, 이는 단순지칭이 아니라, 인칭지칭이다. 즉 심적언어의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명제 가운데 주어는 모두 인칭지칭과 관련된다. 왜냐하면 뷔리당에게 모든 심적언어의 표현들은 궁극적 대상을 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뷔리당은 어떠한 심적 명제 가운데 명사도 실질적으로 지칭하지 않지만, 그러나 항상 인칭적으로 지칭한다라고 정의하는 것이다.19) 위의 내용을 정리하며 뷔리당의 글을 읽어보자.


“나귀라는 표현은 나귀의 개념의 중재에 의하여 의미되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귀들을 의미하며, 이는 그 개념에 의하여 파악되어진다...그러나 심적명제 가운데 개념이 지칭하는 것을 지칭한다. 그렇게 문자언어와 발화언어 가운데 모든 지시는 심적명제 가운데 지칭으로 환원된다.”20)


뷔리당에 의하면 규약적 언어의 단어는 심적 언어의 중재에 의하여 의미를 가진다. 지칭도 마찬가지이다. 규약적 언어의 명제에서 주어는 직접적으로 대상을 의미하지 못하고, 오직 심적언어의 중재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실질지칭은 그 자체 혹은 그 자신에 유사한 것 혹은 개념인 그 자신의 직접적 의미대상을 지칭할 때 이야기 되어진다”21)


이 짧은 글에서 뷔리당은 옥캄과 분명히 선을 긋는다. 옥캄에게도 뷔리당에게도 모두 실질지칭은 그 자체를 지칭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옥캄에게 규약적 언어, 즉 발화와 문자언어에서 단어 그 자체는 발화와 문자의 조건 속에서 단어 그 자체이다. 그러니 옥캄에게 “인간은 두 글자이다”와 같은 명제에게 인간은 실질지칭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뷔리당에게는 다르다. 그에게 규약적 언어의 단어는 심적언어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 심적언어는 규약적 언어의 직접적 의미대상이 된다. 즉 뷔리당에게 규약적 언어의 단어 그 자체는 곧 그것의 의미근거인 직접적 의미대상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의 도식을 통하여 정리해보자.


옥캄<도식 1>

 

명제

‘인간’의 의미 대상

문자언어

인간은 종이다

심적 개념으로 종

발화언어

인간은 종이다

심적 개념으로 종

심적언어

인간은 종이다

심적 개념으로 종


뷔리당<도식 2>

 

명제

‘인간’의 의미 대상

문자언어

인간은 종이다

심적 개념으로 종

발화언어

인간은 종이다

심적 개념으로 종

심적언어

인간은 종이다

대상


뷔리당의 경우 규약적 언어는 동일한 의미대상을 가지지만, 심적언어는 다르다. 심적언어의 경우 이는 인칭지칭이 적용되지만, 규약적 언어의 경우 동일한 의미대상이 아니기에, 동일한 의미론적 논의를 할 수 없다. 그렇기에 뷔리당은 규약적 언어의 경우 이는 실질지칭에 해당된다고 한다. 실질지칭은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 자체란 그 단어의 직접적 대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종속-이론에 따라서, 옥캄은 세 언어가 서로 종속의 관계이지만, 의미의 관계는 아니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서 옥캄은 자신의 지칭이론을 정비하였다. 하지만 뷔리당은 의미-이론에 근거하여 자신의 지칭이론을 정비하였다. 세 언어는 의미-관계를 가지며, 규약적 언어는 심적언어를 그 직접적 의미대상으로 하며, 이들 언어는 그 스스로 궁극적 의미대상을 의미하지 못하며, 오직 심적개념의 중개로 인하여 의미론적 기능을 수행할 뿐이다. 옥캄에게 실질지칭은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은 두 단어이다”의 경우에서 ‘인간’의 직접적 의미대상은 단지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 자체는 문자언어 혹은 발화언어의 조건 속에서 그 자체이다. 그렇기에 ‘두 단어’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뷔리당은 옥캄과 달리 “인간은 종이다”와 같은 것을 실질지칭이라 한다. 그것은 그것의 직접적 의미대상이 옥캄과 달리 심적개념이기 때문이다. 규약적 언어의 명제에서 ‘인간’은 심적개념을 의미한다. 마치 옥캄이 단순지칭으로 설명하듯이, 이를 뷔리당은 실질지칭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옥캄에게 단순지칭은 심적개념을 지칭한다. 뷔리당에게 규약적 언어의 명제에서 단어는 실질지칭이 적용된다. 왜냐하면 실질지칭의 정의는 그 자체의 직접적 의미대상을 지칭하는 것인데, 규약적 언어의 단어는 심적개념을 직접적 의미대상으로 가진다. 그렇기에 동일한 명제가 옥캄에게는 단순지칭으로 설명되고, 뷔리당에게는 실질지칭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뷔리당의 의미론은 옥캄과 그 근본이 다르다. 물론 개념론적 혹은 유명론적 사유의 측면에서 그들의 존재들은 어떤 공유의 공간을 가지지만, 이들은 의미론적 논의에서 서로 다른 길을 간다. 뷔리당은 옥캄의 새로운 길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의미-이론에 근거하여 자신의 존재론과도 길이 다르지 않는 자신의 지칭이론을 만들어갔다.

뷔리당은 옥캄과 다른 길에서 세 언어의 관계를 설명하고, 이들 관계를 통하여 자신의 의미론을 다진 그 시대의 대표적 철학자임에 분명하다.


5.크래토른의 보다 새로운 해법

크래토른은 옥캄 이후 영국의 차세대 철학자였다. 그는 옥캄도 뷔리당도 아닌 길을 간다. 우선 그는 보에티우스 이후 그의 시기까지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한 의미-이론을 수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옥캄에 완전히 동의하지도 않았다. 그는 옥캄의 길을 따르면서 동시에 옥캄을 벗어나는 길을 선택하였다.

그의 의미론적 논의는 중세 의미론의 역사에서 하나의 충격이다. 그는 단어가 사고를 앞선다는 그리고 사고가 단어에 의하여 모양을 가진다는 논의를 긍정한 중세의 유일한 인물이다. 만일 이렇다면, 심적언어도 규약적 언어에 의하여 야기된 것이란 말이 된다. 또한 이는 심적언어도 다른 발화언어나 문자언어와 같이 규약적 언어에 다름 아니라는 말도 된다. 사실이다. 그는 세 가지 언어를 모두 규약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는 중세 철학에 있어서 하나의 충격적인 것이었다.22)

크래토른에 의하면 상징으로 모든 언어는 규약적인 것이다. 그는 언어의 모든 기호와 상징은 그것이 문자이건 혹은 발화이건 혹은 심적이건 간에 규약적이란 것이다. 크래토른 역시 명사와 그 대상 사이의 의미관계를 인과성과 유사성으로 설명한다. 이는 옥캄주의와도 유사한 것이다. 옥캄과 많은 중세철학자들은 세 언어 가운데 유사성을 지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에게 새로움은 무엇인가? 분명 그는 영혼 가운데 성질과 같은 심적명사에 관하여 논하는 한에서는 옥캄을 따라서 자연적 관계로 설명한다.23) 이는 어디까지나 영혼 가운데 성질의 심적기호에 한정된 것이다. 이 성질은 영혼 외부의 의미대상의 기호로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언어는 이러한 심적 언어의 성질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만일’이라는 표현은 언어 가운데 존재하지만, 이것은 그 의미대상이 영혼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언어는 심적 언어의 성질에만 한정되어 이해될 수 없다. 이러한 성질의 심적기호를 제외하고도 많은 언어적 요소들이 있다. 예를 들어, 공의어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것은 외부에 의미대상을 가지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성질의 심적기호는 자연적 유사성을 가진다. 하지만 심적언어는 그렇지 않다. 심적언어는 성질의 심적기호와 달리 규약적인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규약적 언어에는 성질의 심적기호를 넘어선 다양한 언어적 요소들이 있다. 성질의 심적기호는 비록 자연적 관계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지만, 심적언어는 다르다. 심적언어의 단어는 규약적 언어에서 기인한다. 우리가 말하기 배운 언어에 의존하여, 우리의 심적언어는 여타 언어의 유사성이 된다. 즉 심적언어는 규약적 언어의 유사성을 가지는 것이란 말이다. 또한 우리의 사고가 외부의 대상의 유사성이듯이 그렇게 우리의 심적언어는 규약적 언어의 유사성인 것이다. 이러한 심적언어는 단지 발화언어와 문자언어의 내면화에 지나지 않게 된다. 심적언어가 이렇게 규약적 언어에 근거한다면, 우리의 사고는 항상 규약적 언어의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옥캄은 세 언어 사이가 종속되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서로간의 독립적 위치를 인정하였다. 그러한 논의로 비록 심적언어에 종속되어지는 규약적 언어일지라도, 그것의 모든 요소가 심적언어에 존재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 즉 규약적 언어가 심적언어에 대하여 어느 정도 독립된 위치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를 이어가 크래토른은 더욱 더 분명하게 이들 사이의 독립성을 다진다. 기존의 이론에 의하면 ‘책’이라는 문자언어는 발화언어에 의미론적으로 종속된다. 그리고 이 ‘책’은 심적언어에 종속되어거나 의미하는 것이란 말이다. 이러할 경우 심적언어의 ‘책’은 자연적 의미로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것이며, 규약적 언어의 의미론적 원인이란 것이다. 즉 심적언어는 규약적 언어를 앞선다. 그런데 크래토른은 심적언어가 규약적 언어에 앞서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책’이란 단어를 듣고 말하고 쓰는 것을 배운다. 이러한 것에 의존하여 우리의 심적언어 구성되어진다. 그렇다고 자연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영혼 가운데 실재적 성질과 같은 ‘만들어진 것’(facta), 즉 대상적 존재(obiectiva esse)로 존재한다. 하나의 명사는 영혼 가운데 성질와 같은 것으로 취해진다면, 그것은 하나의 존재이다. 즉, 영혼 가운데 대상적으로 존재하는 이성적 존재(ens rationis) 정도인 것이다.24) 그러나 이러한 성질은 의미론적 중요성을 가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존재론적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의 명사가 존재론적 중요성 없이 취해진다면, 그것은 의미론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으나, 그것은 단지 사고의 대상으로 그러할 뿐이다. 그리고 크래토른은 외부 대상에 대하여 대상적으로 주어진 대상적 존재로 성질의 심적기호를 공공의 의사소통에 의하여 성립된 규약적인 심적기호와 구분한다.25) 이러한 크래토른의 논의는 중세 어떠한 철학자의 논의와도 구분되는 독자적인 지위를 가진다. 그의 논의는 중세인의 관점에서 하나의 충격적인 것임에 분명하다.


6.후기 중세 철학에서 심적언어

후기 중세 철학에선, 특히 14세기 철학에서부터 13세기 중세 철학에서의 일탈이 보여 진다.  이는 후기 중세 철학의 한 특징을 이룬다. 규약적 언어는 의미론적으로 심적언어에 빚을 지고 있다. 우리가 한 대상에 관한 심적개념을 가진다는 것은 영혼 외부에 존재하는 하나의 것에 대한 자연적 의미에 근거한 것이다. 한국인이 사과를 볼 때에도, 베트남인이 사과를 볼 때에도, 파키스탄인이나 이라크인이 볼 때에도, 동일한 하나의 개념을 가진다고 중세철학자들은 본다. 하지만 동일한 대상에 관한 이들의 발화 혹은 문자언어는 서로 상이하다. 이를 통하여 중세 대부분의 학자들은 규약적 언어는 심적언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심적언어는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지만, 규약적 언어는 그 사회와 국가 그리고 민족의 규약에 의하여 상이하다고 이해하였다. 옥캄의 시대에 이르러 이러한 이해에 대한 다양한 반론들이 등장한다. 물론, 반론을 또 다른 반론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옥캄은 규약적 언어의 모든 요소가 심적언어 가운데 존재한다고 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간단하게 이들 사이의 관계가 1:1의 관계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또한 이들의 관계는 거울과 대상의 관계도 아니라고 한다. 이들 세 언어의 관계는 의미론적으로 심적언어에 근거하여 종속되지만, 규약적 언어도 자신 나름의 위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존의 이해와 다른 길을 간다. 또한 그는 심적언어의 사과도 발화와 문자언어의 사과도 직접적으로 영혼 외부의 대상을 의미대상으로 가진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에 준하여 지칭론을 전개한다. 하지만 뷔리당은 옥캄과 다르다. 그는 세 언어의 관계를 의미로 이해한다. 그러면서 직접적 의미대상과 궁극적 의미대상을 구분한다. 뷔리당은 문자언어의 직접적 의미대상은 심적언어이며, 궁극적 의미대상은 영혼 외부의 대상이라고 한다. 옥캄에게 직접적 의미대상과 궁극적 의미대상을 동일하다.

뷔리당에게 모든 심적언어는 그렇기에 인칭지칭으로 설명된다. 반면 규약적 언어는 인칭지칭일 수 없다. 그것은 개별자를 직접적으로 지칭하거나 의미하지 못하고, 오직 심적언어에 의하여 궁극적으로 개별자를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옥캄은 다르다. 옥캄은 뷔리당과 같이 규약적 언어가 심적언어를 의미하며 존재하지 않으며, 그 스스로 직접적으로 개별자를 의미대상으로 가진다. 이렇게 이들은 서로 다른 의미론적 논의를 가지는데, 이는 서로 다른 세 언어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해법을 가지기 때문이다. 뷔리당과 옥캄은 모두 실재론이 아닌 개념론을 전개하지만, 이들이 가지는 의미론적 논의는 그 틀에서 이미 다른 것이다.

크래토른은 이 둘 모두를 부정한다. 크래토른의 시작엔 옥캄의 영향력이 크지만, 분명 그는 옥캄과 다르다. 우리가 대상에 관하여 가지는 하나의 개념이며, 영혼 가운데 성질이다. 이 성질은 영혼 가운데 대상적으로만 존재하는 대상적 존재이다. 즉, 존재론적으로 이는 대상적 존재의 위상을 가진다. 그리고 이는 자연적 의미로 외부 대상과 관련된다. 이 대상적 존재, 혹은 성질은 동일한 것을 한국인이 보아도. 파키스탄인이 보아도 동일한 것이다. 영혼 외부의 것에 대한 동일한 대상적 존재인 성질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적 성질은 규약적일 수 없으며, 자연적이다. 하지만 크래토른은 이러한 심적성질가 자연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 심적언어가 자연적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심적언어가 규약적 언어에 따른다고 정의한다. 즉 결국 심적언어도 규약적 언어라고 하는 것이다. 심적 성질이란 것을 제외하면, 심적언어란 규약적 언어에 의존한다고 보아야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규약적 언어 가운데 사고하고, 그 가운데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크래토른에게 옥캄도 뷔리당과 적절한 길은 아니다. 비록 옥캄이 조금은 더 나아 보일 수 있지만 말이다. 옥캄은 세 언어가 기존에 가지는 관계에 어느 정도 틈을 낸다. 이어서 크래토른은 이 틈은 더욱 더 분명하게 벌려 놓는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와 보에티우스를 걸쳐 중세 후기에 이른 전통적 노선에서 완전히 떨어진 새로운 길이 마련된 것이다.

서론에서 마이어가 후기 중세 자연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길에서 벗어나 나름의 길을 가는 특징을 가진다는 말을 빌러, 중세의 의미론도 그러한 것과 같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당시 세 언어 사이를 이해하는 두 가지 큰 흐름인 옥캄과 뷔리당을 살피고, 이어서 이들을 벗어난 크래토른을 살폈다.

옥캄과 뷔리당의 논의에게 이들이 가지는 의미론적 차이가 세 언어의 차이에서 야기됨을 보았고, 그 가운데 옥캄이 더욱 더 엄밀하게 탈-중세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론의 길을 가는 도주로를 닦았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크래토른을 만남으로 우리의 여정은 여기에서 마친다. 이 들 세 사람에 관한 보다 세밀한 논의는 다음으로 미루면서 말이다.


1) 중세 철학 시기에 다루어진 의미론적 논의에 근거한 명사(terminus)들의 논의는 다음의 것을 기초적으로 참고하길 바란다. P.Spade, "The semnatics of terms" In The Cambridge History of Later Medieval Philosophy, ed. N.Kretmann et al. (Cambridge:Cambridge University Press,1982), 188-196.


2) Aristoteles, De interpretatione c.1, 16a 3-7. 본 논의는 다음의 우리말 역본을 참고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론ㆍ명제론』김진성 옮김 (서울:EJB,2005).


3) A.Maier, On the Threshold of Exact Science, ed. & trans. S.Sargent (Philadelphia:University od Pennsylvania press,1982), 144.


4) Boethius, In librum de interpretatione, ed. prima 1, 298d-299a (PL 64).


5) Thomas, Summa theolociae I,q.13,a.1,c.a.; A.Maurer, The Philosophy of William of Ockham (Toronto:PIMS,1999), 16-17.


6) Peter Ailly, Concepts and Insoluble, trans.P.Spade (Dordrecht:Reidel,1980), par.93.


7) J.Biard, Guillaume d'Ockham - Logique et philosophie (Paris:PUF,1997), 35. 비아르드의 이 단행권은 옥캄의 논리학에 관한 지금까지의 가장 간단하고 요약적인 개론서이다. 필자 역시 이 저서의 안내가 초기 옥캄 이해의 큰 도움이 되었다.


8) Ockham, Summa logicae 1.11 (OP.1, 38-41).


9) C.Normore, "Ockham on Mental Language" In Historical Foundations of Cognitive Science, ed. J.Smith (Dordrecht:Kluwer,1990), 55.


10) J.Trentman, "Ockham on Mental" Mind 79 (1970), 586-590.


11) Ockham, Summa logicae 1,1 (OP.1, 7.13-25).


12) Thomas, Expositio libri peryermenias 1.2 (Leonine ed. 1.1: 10.88-112).


13) Ockham. Summa logicae 1.12 (OP.1, 41-44).


14) A.Maurer, "Ockham on Language and Reality" In Sprache und Erkenntnis im Mittelalter, ed.A.Zimmermann (Berlin:Walter de Gruyter,1981), 800.


15) 옥캄에 관한 첫 번째 괄목할 만한 연구와 지금껏 의미를 가지는 연구는 뵈너의 연구일 것이다. 뵈너의 이에 관한 연구는 지금도 옥캄 논의의 기본적 소재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Ph.Boehner, "Theory of Significantion" In Collected Articles on Ockham, ed.E.Buytaert (New York:The Franciscan Institute,1992), 201-231.


16) Ibid., 212-213.


17) Ch.Kann, Die Eigenschaften der Termini - Eine Untersuchung zur Perutilis logica Albert von Sachsen (Leinden:Brill,1994), 32-33. 칸의 이 연구서는 뷔리당과 옥캄 그리고 삭센의 알베르투스에 관한 의미있는 논의이다. 비록 이곳에선 논의의 주제에 따라서 알베르투스의 논의는 제외하지만, 알베르투스 역시 이 문제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이에 관한 논의는 칸의 위 연구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18) Ochkam, Summa logicae 1,63-77 (OP.1, 193-238). 이에 관한 간단한 정리는 다음의 것이 참고할 것이 있다. Ph.Boehner, Medieval Logic An Outline of Its Development from 1250 to c.1400 (Westpor:Hyperion Press, 1988), 36-43: J.Biard, Guillaume d'Ockham - Logique et philosophie, 46-54; 박우석, 『중세철학의 유혹』(서울:철학과현실사, 1997), 218-221.


19) Ch.Kann, Die Eigenschaften der Termini, 65.


20) Buridan, Sophisms on Meaning and Truth, trans. T.K.Scott (New York:Appleton-Century-Crofts, 1966), 75.


21) Ch.Kann, Die Eigenschaften der Termini, 62.


22) H.Kirjavainen, "Transcendental Elements in the Sematics of Crathorn" In Medieval Philosophy and Modern Times, ed.G.H-Hintikka (Dordrecht:Kluwer Academy Publishers, 2000), 45-58; F.Hoffmann, "Der Satz als Zeichen bei Holcot, Crathorn und Gregor von Rimini" In Miscellanea Medievalia 8 (1971), 296-313. 크래토른의 철학적 일반에 관해서는 다름의 글을 참조하라. A.Robert, "William Crathorn"  In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005) at http://www.plato.stanford.edu/; R.Pasnau, "William Crathorn" In A Companion to Philosophy in the Middles Ages, ed.J.Gracia et al. (Oxford:Blackwell, 2003), 692-693.


23) H.Kirjavainen, "Transcendental Elements in the Sematics of Crathorn", 46.


24) Ibid., 46-47.


25) Ibid.,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