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레올리 개념론의 틀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1.서론
어찌된 일인지 아우레올리는 필자에게 그리 낯익은 이름이 아니었다. 이 이름은 필자가 옥캄의 저서를 읽기 시작하면서 접하게 되었다. 그는 옥캄의 보편자 이해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역사적으로 그 시대에 주도적 스승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1277년 이후 중세 스콜라 철학의 흐름을 대변하며, 옥캄의 선구적 인물로 여겨지고 있으며, 실재로 스코투스, 두란두스, 하클레이 등과 함께 그 시대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인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존재론적 사유의 이해는 단지 그에 관한 이해를 넘어 그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게 해 준다.
그는 기존의 실재론을 반대하고, 개념론을 전개한다. 하지만 그의 개념론은 후기 옥캄의 그것과는 다르다. 비록 이 둘이 개별자의 세계를 구상하고. 보편자를 단지 개념이라 하였다고 하더라고, 개념이 과연 무엇인가의 문제에서 이 둘은 서로 다른 길을 간 것이다. 물론 뵈너가 말했듯이 초기 옥캄이 아우레올리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손치더라도 후기의 그는 저서 여러곳에서 초기 견해를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다. 즉 초기 아우레올리의 영향 속에 구성된 자신의 논리를 포기하고 새로운 논리를 취한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취해지고 버려졌다는 아우레올리의 논리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흔히 이는 대상적 존재(esse objectiva) 혹은 드러난 존재(esse apparens)로 간단하게 표현한다. 개념을 영혼 가운데 실재적으로 혹은 주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적으로 혹은 드러난 존재로 존재한다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한다.
이러한 아우레올리의 논의는 개별자의 세계라는 존재론적 세계관에서 기인한다고 보아야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은 위의 대상적 존재라는 보편자 이해의 틀을 제공함과 동시에 인식에 있어서도 지성의 직접적 대상으로 개별자를 논하게 하였다. 이제 아우레올리에게 보편자는 단지 주체적 존재가 아니라, 대상적 존재를 가질 뿐이며, 우리 지성의 대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와 달리 보편자만이 아니라, 개별자 역시 포함되어야한다고 아우레올리는 본다.
이러한 논의에서 중세 후기 철학자들은 신의 권능과 직관적 인식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다. 신의 권능은 절대적이다. 그 절대적 권능은 지금 여기 있는 대상의 현존 없이도 지성 가운데 직관적 인식을 야기할 수 있다. 즉 대상의 현존 없이 직관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신의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제이 원인 없이 제일 원인으로 결과를 낳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신에 의하면 대상의 현존 없는 직관적 인식은 분명 가능하다. 이와 같은 신의 권능이란 논의와 함께 아우레올리 뿐 아니라, 많은 중세 후기 철학자들을 자극하고, 그 시대의 철학적 논의를 달군다.
앞으로 필자가 이곳을 통하여 전개할 것은 그러한 아우레올리의 논리를 더욱 더 자세히 풀어감이다. 한편 이에 앞서 그의 논의가 이루어지게 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는 작업도 함께 수행할 것이다.
2.1277년 이후 철학 체계와 아우레올리의 시대
스콜라철학은 흔히 토마스 아퀴나스와 스코투스 그리고 옥캄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실재로 최대한 간략화하여 중세철학을 전달하여는 철학사 중심의 논의에서 보자면, 다른 수가 없는 것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해버리기에는 스콜라철학의 다양성은 매우 아쉽다. 그러한 예는 스콜라 철학 전역에서 보여지지만, 이곳에선 우선 1277년 이후의 시대를 통하여 살펴보겠다. 1277년 이후 스콜라철학은 매우 다양한 시도들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아우레올리는 그러한 다양한 시도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면 무엇을 위한 시도들이었는가? 이를 위해선 1277년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277년은 어쩐 의미에서 근대철학의 희미한 시작이며, 중세스콜라철학의 새로운 분기점이다.1) 이 단죄는 신의 절대적 자유를 선언한다. 신의 의지에 대한 어떠한 제한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신은 자연의 법칙을 넘어서 그것에 구속되지 않는 존재이다. 즉 신의 전능하다. 한편 신은 단지 보편자만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도 인식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 간단한 논의는 중세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은 개별자를 지성은 보편자를 대상으로 한다고 정의한다. 그러면 감각 없이 그저 지성적인 것만이 남은 신은 보편자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신은 오윤아나 김하니 혹은 김시향과 같은 개별자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인간’이란 보편자만을 인식할 뿐이란 것이다. 1277년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의 전지함을 선언한다. 1277년 단죄는 신의 전지전능함이란 기본적 전제를 이후 철학의 토대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신의 전지전능함은 다음의 철학적 논의로 이어진다. 우선은 자연의 법칙은 영원하고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일 수 없단 사실이다. 신의 자신의 절대적 권능으로 이 법칙을 다르게 할 수 있다. 즉 기적을 있게 할 수 있다. 성서에 의하면, 신은 처녀를 성교 없이 임신하게 할 수 있으며, 바다를 가를 수 있고, 죽음 이후 다시 살아날 수 있으며, 잘려진 귀를 다시 붙일 수 있다. 신은 그의 절대적 권능으로 우주의 자연 법칙을 다르게 할 수 있으며, 지금 임신이 남성과 여성의 성교에 의하여 가능하다는 필연성은 단지 신이 그것을 그렇게 지금까지 의지한다는 조건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필연성은 절대적 필연성이 아니라, 단지 조건적 필연성이다. 물론, 이러한 눈으로 세계를 보는 것을 일부 학자들은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의 위기를 초래하였다고 보기도 했다. 중세인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이유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의 대상은 필연적이며, 영원한 것이며, 이는 생성되거나 소멸될 수 없으며, 또한 다르게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정의한다.2) 쉽게 “다르게 될 수 없는 것”이 학문의 대상이다. 자연학의 대상으로 임신은 언제나 남여의 성교로 가능하며, 이는 다르게 될 수 없다. 그러나 1277년 이후 철학계는 단지 여기에 머물 수 없었다. 신은 분명 다르게 할 수 있는 존재이며, 그로 인하여 세계는 다르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적었듯이 이에 관하여 일부 학자들은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1277년 이후 등장한 유명론 철학의 절대적 필연성 부정을 형이상학과 학문의 위기를 초래했다며 부정적 평가를 하기도 한다.3)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1277년의 결과로 진행된 시대적 흐름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1277년의 단죄는 자연의 법칙이나 어떤 필연성으로 신을 제한하는 것을 금지하였기 때문이다.
금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직 신의 전지함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의 전지함에 관한 신학적 전제는 인식에 관한 새로운 철학적 과제를 남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보편자는 이성의 몫이다. 반면 개별자는 감각의 몫이다. 그렇다면, 감각적 요소를 하나도 가지지 않은 신은 개별자를 인식할 수 있는가? 이러한 논의는 아베로에스를 걸쳐 중세 스콜라철학으로 이어진다. 즉 신은 개별자를 인식할 수 없다는 논의가 중세 스콜라철학에 유입된 것이다.4) 그러나 이는 신앙의 차원에서 허락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은 전지하지 못하게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1277년 이후 철학은 개별자 역시 지성의 대상으로 놓는다. 이를 주장한 스코투스와 옥캄... 등의 논의도 이러한 1277년 이후 체계 속의 철학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전능과 전지와 관련된 위의 두 논의는 서로 무관하지 않았다. 절대적 필연성이란 보편자의 필연성이다. 우주의 동일성, 즉 우주가 다르게 될 수 없는 것은 우주가 감각적 경험을 넘어선 어떤 형태로 있음을 의미한다. 즉 우주의 필연성은 감각과 개별자를 넘어서 실재하는 그 무엇, 바로 보편자를 상정한다. 그렇기에 보편자를 실재를 주장하는 실재론자들은 우주의 인과적 법칙성을 잘 설명할 수 있으나, 반면 유명론자들은 이것이 쉽지 않다.5) 하지만 1277년 이후 체계에선 유명론이 시대적 결실로 자연스럽게 귀결된다. 1277년 이후 철학적 체계란 지성의 개별자에 관한 인식과 신의 절대적 권능을 근거하여 이루어진다. 우주의 절대적 필연성을 부정함으로 감각을 넘어서 우주의 절대적 동일성을 유지한 보편자의 부정으로 이어지며, 개별자의 세계를 그린다. 그리고 그 개별자는 지성의 대상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런 이유에서 1277년 이후 중세 철학에선 개념론 혹은 유명론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비록 실재론이 있다 하여도, 그 실재론은 위의 두 가지 논의에 대한 실재론적 해법을 가져야만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개념론자인 옥캄과 같은 이들의 등장은 1277년 이후의 자연적 귀결이다. 물론 이러한 옥캄도 몇 명의 사상적 선배를 가진다. 두란두스와 아우레올리가 그러한 인물이다.6) 그렇게 보자면, 분명 아우레올리는 1277년 이후 철학 체계 속의 인물이다.
3.아우레올리의 보편자 이해
아우레올리는 보편자가 영혼 외부의 실재성을 가진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개념이며, 이 개념은 드러난 존재(esse apparens), 현대적 의미에선 지향적 존재일 뿐이라 한다. 그렇기에 그의 보편자 이해는 그의 개념에 관한 이해와 필연적으로 연관된다.
그는 모든 인식 작용 가운데 알려지는 사물은 대상적 존재(esse obiectiva)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에게 모든 지식의 근거는 드러남의 방식에 의하여(per modum apparentis) 주어진 어떤 것을 가짐이다. 여기에서 장미의 개념은 단지 알려진 한에서 혹은 드러난 한에서 장미이며, 이 장미는 실재적 존재와 구별된다.7) 아우레올리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로 파악된 개념’은 ‘드러난 존재’라는 존재의 방식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이는 ‘지향적 존재’와 ‘대상적 존재’와 동의어이다.8) 그렇기에 ‘소크라테스’와 ‘소크라테스로 파악된 개념’은 실존의 상이한 방식을 가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것이다. 그 동일성이 소크라테스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실재적 존재이며, 반면 ’소크라테스의 개념‘은 드러난 존재 혹은 지향적 존재이다. 그런데 실재적 존재와 달리 대상의 드러난 존재 혹은 지향적 존재는 그것을 현실화하는 지각자가 요청된다. 지각자에게 대상화되거나 드러나지 않거나 지향되어지지 않는 한에서 이들 존재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개념이다.
또한 보편자는 개념이다. 즉 보편자는 드러난 존재에 지나지 않으며, 실재적 존재이지 않다. 즉 지성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반면 개별자는 영혼 외부의 실재적 존재이다. 그런데 본성에 의한 모든 개별자들은 각각 상이한 존재론적 혹은 본질적 측면을 가진다. 그리고 아우레올리는 이러한 본질적 측면을 ‘근거’(ratio)라고 부른다.9) 상이한 개별자들 가운데 찾아지는 동일한 종류의 ‘근거’는 '유사성'이다.10) 옥캄은 소크라테스는 플라톤과 유사하며, 이는 지성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서 어떤 공통개념을 추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옥캄의 유사성은 두 실체 사이의 관계이다.11) 아우레올리에게 영혼 외부에 실존하는 개별자들의 다양성 가운데 유사성은 보편적이고 공통된 명사의 근거이다. 이 유사성에 근거한 보편자는 영혼 외부의 사물이나 영혼 외부의 어떤 실재성을 가지지 않으며, 단지 대상적 존재이다.
3.1.중세 대상적 존재의 전통
14세기엔 대상적 존재이 하나의 화두였다. 여기엔 13세기 후기 철학자인 스코투스도 무관하지 않다. 그는 대상적 존재를 인식된 존재(esse cognitum) 혹은 표상된 존재(esse repraesentatum) 혹은 더 중요하겐 축소된 존재(esse diminutum)와 상화환치 가능한 것으로 본다.12) 이러한 인식된 존재로 대상적 존재라는 것은 스코투스의 존재론적 논의를 비판하는 개념론자들에도 어떤 식으로든 논의된다. 바콩토르프(Baconthorpe)와 초기의 옥캄 그리고 아우레올리 등이 이러한 인물들이다.
‘대상적 존재’에 관한 논의는 옥캄에 이르러 ‘만들어진 것(fictum)-이론’으로 전해진다.13) 그러나 만들어진 것-이론이란 단지 당시 아우레올리의 것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초기 옥캄과 아우레올리뿐 아니라, 옥캄의 또 다른 선배인 하클레이(Henry of Harclay)가 그러한 인물이다. 그는 ‘만들어진 것’은 영혼이 만드는 것이고(fingit), 이는 영혼 가운데 있다고 한다. 또한 그 역시 1277년 이후 인물로 영혼 외부의 것은 단지 개별자뿐이라고 주장한다. 보편자는 개별자와 같은 존재론적 위치를 가지지 않는다. 보편자는 단지 ‘만들어진 것’이고, 이 만들어진 것은 영혼 가운데 주체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대상적으로 존재한다.14) 대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대상적 존재를 가지는 개념은 실재하지 않고 불가능한 존재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해태와 청룡과 같은 것이 그러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실재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의 영혼 가운데 만들어진 것 혹은 대상적 존재를 가지는 것이다.15) 이러한 ‘만들어진 것-이론’은 하클레이에 의하여 권위를 가지기 시작한 것만은 아니며, 더 오랜 역사를 가진다. 바로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권위이다.16) 또 한 권위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다른 많은 논의가 그렇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논의에서도 중세에 많은 논의의 원천을 제시하였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 가운데 존재와 영혼 외부의 존재를 구분하며, 후자의 경우를 10범주로 나눈다. 여기에서 영혼 가운데 존재가 바로 대상적 존재의 예가 되어진 것이다. 중세의 이러한 다양한 논의는 ‘만들어진 것-이론’이란 전통으로 이어졌다. 그 가운데 이 이론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아우레올리이다.
3.2.아우레올리의 대상적 존재와 보편자
아우레올리의 이론에 관해서는 위에서 이미 간단하게 정리하였다. 이제 그의 글을 읽어볼 차례가 되었다.
“예술의 형상은 두 가지 방식이라 말 된다는 것이 아래와 같이 분명하다. a.하나는 영혼 가운데 있는 형상이고, 다른 것은 영혼 외부에 존재하는 이것(형상)이며, 이는 동일하다. 예를 들어, 어떤 이의 건강함은 건강의 개념에 대한 것이고, 이는 영혼 가운데 있고, 이는 육체 가운데 실존하는 건강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b.건강함에 정의, 이는 영혼 가운데 있고, 또한 이는 대상의 진리 가운데 있다고 귀결된다. 이것이 주해자의 뜻이다. 그러므로 c.사고된 건강함과 영혼 외부에 있는 건강함은 하나이고, 실재적으로 동일한데, 이는 비록 존재의 방식 가운데 차이를 가지지만, 지성 가운데 건강함은 드러난 혹은 지향적 존재를 가지며, 참으로 영혼 외부에 육체 가운데 (건강함은) 실존하는 그리고 실재적 존재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d.이러한 차이로 인하여 하나를 아는 것은 다른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고 말 되며, 어떤 방식에서 다른 것은 존재의 방식에서 다르다. 비록 그것이 같은 대상이라고 해도 말이다.”17)
여기에서 아우레올리는 영혼 가운데 형상과 영혼 외부의 형상을 구분한다. a에 의하면 ‘건강함’은 영혼 가운데 형상과 영혼 외부의 형상으로 설명된다. 그런데 b에 의하면 이 둘은 일종의 동일성을 가진다. 건강함의 정의에서 영혼 가운데 있고, 또한 대상의 진리 가운데 있을 때 가능하다. 즉 어떤 식으로든 영혼 가운데 건강함과 영혼 외부의 건강함은 동일성을 가져야한다. 그러나 c에 의하면 전자는 인식된 건강함이며, 이는 대상적 존재(지향적 존재)를 가진 것이다. 반면, 후자는 영혼 외부의 건강함 가운데 있는 형상으로 주체적 존재를 가진다. 즉 존재의 방식이 다른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d는 이 둘 가운데 하나를 아는 것이 다른 것을 동시에 아는 것은 아니며, 이는 존재의 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비록 동일한 건강함이란 대상을 향한다고 하여도 말이다.
여기에서 지성 가운데 대상적으로 주어진 존재, 즉 대상적 존재는 드러난 존재이기도 하다. 이 드러난 존재는 영혼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파악된 것으로 지성 가운데 대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18)
인식된 것은 대상화되어진 존재란 것이라면, 보편자 역시 그것이 인식된 것인 한에서 대상화된 존재이다. 보편자는 여럿에 관하여 공통되게 서술되어지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인간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들뢰즈와 가타리 등의 여럿에 관하여 공통되게 서술되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보편자는 여럿에 관한 하나의 단일성에 근거한다. 아우레올리는 이러한 단일성이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가능적으로 존재할 뿐이라고 단언한다.19) 이러한 논의는 보편자 역시 그렇다는 것이 된다. 여러 개별자들은 수적으로 하나의 단일성 가운데 보편자로 되어질 수 있다. 즉 그런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여기에서 단일성은 유사성과 같이 하나의 관계에 속한다. 즉 두 가지 개별자 사이의 관계인 것이다. 그런데 아우레올리에 의하면 관계 역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대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에게 “A는 흰 것이고, B는 흰 것이다”는 “A와 B는 색에서 유사하다”로 귀결되어진다. 여기에서 이러한 귀결의 심적 행위는 흰 것A와 흰 것B라는 대상적 존재 가운데 가능한 것이며, 여기에서 유사성과 같은 관계 역시 대상적 존재 가운데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후자는 전자의 경우보다 더 대상적인 것이다.20) 아우레올리에게 유사성과 같은 것은 보편자의 근거이며, 이러한 유사한 대상이 유사성의 속성을 가지는 것은 표상의 방식으로 가능하다.21) 그리고 이러한 것에 근거하여 개별자의 인식은 종(보편자)의 인식보다 더 완전하다.22) 반면 보편자의 인식은 개별자의 인식보다 더 대상적인 존재이다.
보편자는 개별자의 인식보다 더 대상적인 것이다. 아우레올리에게 인식된 존재란 곧 대상적 존재이다. 이는 개별자나 보편자나 마찬가지이다. 보편자는 개별자들의 인식 가운데 주어진 대상적 존재들의 관계에서 얻어진다. 즉 그들 사이의 유사성에서 구해진 단일성인 것이다. 그러한 단일성은 결국 존재론적 위상을 가지지 못하며, 단지 여러 개별자들 사이의 유사성에 그친다. 그런데 이 유사성이란 것도 결국 대상적 존재들 사이의 대상적 존재이다.
아우레올리는 개념론자이다. 그에게 모든 인식된 것은 개념과 관련되며, 이 개념은 대상적 존재로 설명된다. 보편자는 개념이면서, 동시에 개별자 인식보다 덜 대상적인 존재이다. 보편자가 단지 그러한 것이라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단지 개별자만이 남게 된다. 이제 보편자의 인식과 개념론에 이어서 개별자의 인식에 관하여 다루어보자.
4.아우레올리의 직관적 인식
1277년 이후 체계에선 신이 어떻게 개별자를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것을 짐으로 지게 된다. 감각 없이 지성뿐인 신은 보편자만이 인식한다는 것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위를 벗어나야한다. 아우레올리는 신이 감각의 중재 없이 개별자를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23) 전능한 신은 이를 할 수 없는 그러한 무능한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개별자는 지성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는 분명 아리스토텔레스의 틀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거기에 아우레올리는 신의 절대적 권능은 대상의 현존 없이 지성 가운데 그 실재성을 인식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즉 김시향이나 오윤아라는 실재적 존재를 가진 대상의 현존 없이 지성 가운데 이들에 관한 직관적 인식을 야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아우레올리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스코투스와 옥캄 그리고 그 시대의 많은 철학자들이 공유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고민이었다.24) 그 고민의 흔적을 따라 아우레올리를 다루어보자.
4.1.직관적 인지와 추상적 인지
스코투스는 1277년 이후 세대를 이끄는 지도적 인물이다. 그는 우리 인식의 토대가 되는 것은 지금 이곳(hic et nunc)의 개별자가 아니겠는가 라며 논의를 시작한다. 그러면서 직관적 인식과 추상적 인식을 구분한다. 그에 의하면, 직관적 인식은 개별자를 향한다면, 추상적 인식은 본성 혹은 보편적 본질을 향한다. 그 가운데 추상적 인식의 대상은 엄밀하게 초-개별적인 본성(die Ueberindividuelle Natur)이다. 이는 모든 종 가운데 동일한 보편자 혹은 본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25) 각각의 것을 사전적으로 정리하자면, 추상적 인식은 모든 실존으로부터 추상하는 한에서 지성 가운데 주어지는 그러한 인식이다. 직관적 인식은 실존 가운데 현존하는 한에서 사물에 대하여 있을 수 있는 그러한 인식이다.26) 인간에 관한 지성상(intelligible Species)은 인간의 무엇임을 말한다. 하지만 인간에 관한 지성상( 혹은 인간의 보편자)는 지금 이곳에 있는 송윤아와 김하니 혹은 김시향의 존재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쉽게 내가 보고 듣고 있는 개별자의 존재에 관하여 말하지는 않는다. 전자는 추상적 인식의 대상이고, 후자는 직관적 인식과 관련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직관적 인식은 감각과 깊은 관련된다. 예를 들어, 개별적 개가 지금 여기 존재하는가의 여부를 아는 것은 감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27)
1277년 이후 체계의 철학자인 헤르베우스(Hervaeus Natalis, Nerve Nedelec) 역시 직관적 인식을 감각과 관련하여 이해한다. 하지만 그 길은 스코투스와 사뭇 구분된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뜨거운 표면의 물을 볼 때, 우리는 물의 드러남 혹은 현상을 본다. 그리고 이 드러남과 현상은 실재적으로 거기 있다. 그러나 물은 없다. 그에 의하면, 인식되어지는 것은 지향적 대상으로 설명되어진다. 즉 인식의 모든 지향적 대상은 지향적 존재를 가진다. 물에 대한 우리가 인식을 가진다면, 지향적 물을 가짐이고, 이 지향적 물은 실재적 물에 근거한다.
상상해보자. 만일 신이 그의 절대적 권능으로 감각의 매개 없이 지성 가운데 어떤 표상을 던져놓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직관적 인식은 인식되어지는 대상의 실재적 현존은 필요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28) 1277년 이후 체계에선 신의 절대적 권능이 하나의 큰 테마이다. 이를 무시할 수 없다. 신은 원하지만 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이는 헤르베우스뿐 아니라, 그 시대의 고민거리였다. 신은 원한다면, 제이 원인의 매개 없이 제일 원인으로 직접적으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는 토마스가 구사하는 성체성사의 논의에서도 찾아진다. 그리고 알베르투스의 기적에 관한 논의에서도 흔히 보여진다. 신은 제이 원인인 남성이나 정자 없이도 처녀를 임신시킬 수 있으며, 실체라는 제이 원인 없이 제일 원인으로 빵의 우유들을 잔존하게 할 수 있다. 즉 실체 없는 우유와 정자 없는 임신을 가능하게 할 절대적 권능을 가진 것이다. 그런 신이라면, 실재적 대상의 현존 없이 지성 가운데 직접적인 인식을 야기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직관적 인식은 지금 여기 있는 대상에 관한 것이고, 추상적 인식은 보편적인 것에 관한 것이라는 구분이 제고된다. 추상적 인식은 지성 가운데 주어진 그러한 인식으로 지금 여기 있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런데 헤르베우스에 의하면, 추상적 인식과 직관적 인식의 구분은 스코투스와 다르게 해석된다.
이러한 인식에 관한 고민과 신의 절대적 권능에 의한 고민은 1277년 이후 줄곧 지속된 고민이며, 이는 아우레올리도 예외가 아니다.
4.2.아우레올리식 이해
아우레올리에 의하면, 지성은 감각의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개별자를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29) 신의 권능은 충분히 그렇게 행할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굳이 직관적 인식이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성 가운데 직접적으로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직관적 인식은 추상적 인식과 그 대상에서 차이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 추상적 인식은 지금 여기 없더라도 지성 가운데 주어진 것을 대상으로 한다. 그런데 직관적 인식도 신의 권능에 의하여 그렇게 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직관적 인식과 추상적 인식은 단지 반성적으로 구분되어질 어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 대상의 측면에서 구분된다고 할 수는 없다.30)
이러한 아우레올리의 논의는 스코투스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그의 철학의 많은 경우는 스코투스의 논의를 고민할 결과물이다. 그 자신이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실재로 스코투스의 파리 강의를 듣기도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우레올리의 직관적 인식에 관한 고민도 스코투스와 무관하지 않다.31) 그렇기에 아우레올리는 우선 스코투스의 논의를 정리하고,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다.
스코투스에 의하면, 인식되어진 대상이 없는 한에서 추상적 인식은 불가능하며, 대상이 실재적 존재가 아닌 한에서 직관적 인식은 있을 수 없다.32) 아주 간단하게 대상의 현존 없이 인식 가운데 실재성이 주어질 수 없단 것이다. 하지만 아우레올리는 이를 거부한다. 그렇다고 모든 인식에서 실재적 대상이 소용없는 것은 아니다. 그도 일상적 상황에서 감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단지 신이 그의 절대적 권능을 행사할 때이다. 신은 대상의 현존 없이 실재성을 보존할 수 있음은 필연적 사실이다.33) 신은 이를 행하지 못할 정도의 존재일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신의 전능함을 거부하는 결과를 낳는다. 신이 없다면, 대상의 현존 없이 인식 가운데 실재성이 있을 수 없다. 이 모든 논의는 신에게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는 아우레올리의 글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냐하면 신의 현실성은 인식을 보전하고 야기하는 것이라 요청되어진다.”34) 즉, 신은 인식을 야기하는 존재이며, 그렇기에 신이 없다면, 그러한 인식은 불가능한 것이다. 예를 들어, 아우레올리는 신이 없을 경우 대상의 현존 없이 인식 가운데 실재성이 주어질 수 없다고 하는데, 이러한 논의도 신이 그러한 인식을 야기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신 없이는 현존 하지 않은 것에 관한 직관적 인식이 불가능한 것이다.35) 그렇기에 결과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직관적 인식은 대상이 부재할 때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때도 일어날 수 있다.”36)
이러한 아우레올리의 논의도 그의 개념론의 한 틀을 이룬다. 이 모든 논의의 배경에는 그의 개념론이 자리 잡고 있다. 이미 위에서 논의하였듯이 그에게 개념은 곧 인식된 존재이며, 인식된 존재는 ‘드러난 존재’, 즉 ‘대상적 존재’이다. 직관적 인지에 의하여 주어진 인식도 대상적 존재로 설명되어지며, 드러난 존재로 설명되어진다. 대상이란 지성 가운데 드러나 혹은 나타난 존재이다. 대상적 존재는 실재적 존재와 다르다. 인식된 존재는 영혼 외부의 실재적 존재와 동일한 존재를 가지지 않으며, 지향적 존재 혹은 대상적 존재를 가지는데, 여기에서 신은 영혼 외부의 실재적 존재 없이 영혼 가운데 바로 드러나게 할 수 있을 만한 존재이다. 오윤아와 김하니 그리고 김시향이란 각각의 개별자들은 실재적 존재를 가진다. 그러나 인식된 오윤아, 김하니 그리고 김시향은 실재적 존재가 아니라, 단지 대상적 존재를 가지며 영혼 가운데 있다. 여기에서 신은 영혼 외부의 것 없이 대상적 존재로 영혼 가운데 오윤아와 김하니 그리고 김시향을 인식하게 할 수 있다.
인식된 것은 분명 대상적 존재이며, 그 존재가 실질적 존재와 구분되어 있다. 존재하는 방식이 서로 다른 것이다. 이 존재의 방식의 차이에서 이 문제의 기본적인 방향이 잡혀있다. 이러한 논의는 옥캄에게로 이어진다. 옥캄은 아우레올리와 마찬가지로 신의 권능에 의하여 대상의 실재적 존재 없이도 영혼 가운데 대상적 존재로 개념을 드러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5.잠정적 정리
정리해보자. 아우레올리는 보편자를 실재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지성의 작품이다. 혹은 유사성의 산물이며, 개별자 인식을 통하여 얻은 하나의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인식된 모든 것’은 대상적 존재 혹은 드러난 존재이다. 그것은 보편자도 개별자도 모두 그렇다. 인식된 모든 것이 대상적으로 드러난 것 혹은 나타난 것으로 설명되어진다면, 신의 절대적 권능에 의하여 감각을 통하지 않고 지성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면, 그 드러남은 외부의 대상 없이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거부함은 곧 신의 전능함을 거부하는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당대 샤톤(W.Chatton)과 후기 옥캄 등에 의하여 비판받는다.37) 샤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알고 사랑하는 것은 대상적 존재가 아니라, 주체적 존재라고 한다. 그런데 만일 아우레올리의 말이 옳다면,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는 것은 거짓이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명제에서 주어는 주체적 존재가 아니라, 단지 대상적 존재를 가지는 것에 한정되기 때문이며, 또 다른 한편 그 술어는 주체적 존재를 가지는 영혼 외부의 것을 지시하기 때문이다.38) 이러한 샤톤의 비판들은 어떤 식으로든 옥캄의 초기 태도를 변화시켰다. 그러나 아우레올리의 논의 혹은 이를 따르는 초기 옥캄의 견해는 샤톤에 의하여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우레올리는 1277년 이후 논의에 충실해야하는 1277년 체계의 운명에 놓여진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 존재하는 개별자는 지성의 대상일 수 있다. 즉 오직 보편자만이 지성의 대상이고, 그럼으로 신은 보편자만을 인식한다는 것에 관한 1277년의 단죄의 문제를 벗어나려는 것이다. 또한 신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렇기에 신은 자연의 법칙을 넘어설 수 있고, 제이 원인 없이 제일 원인으로 모든 우주의 법칙을 다스릴 수 있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신은 직접적으로 혹은 제일 원인으로 영혼 외부의 대상 없이 지성 가운데 대상적으로 드러내게 할 수 있다. 만일 이를 거부한다면, 신은 적어도 인식의 문제에서 무능한 것이 되고 만다. 사실 토마스 아퀴나스나 대 알베르투스 등의 중세 철학자들도 신의 기적을 논하며, 신이 자연의 법칙을 넘어설 수 있다고 한다. 성체성사에선 축성 이후 빵의 실체는 빵이 아니며, 단지 빵의 우유만이 실체 없이 잔존한다고 한다. 즉 제이 원인으로 실체 없이 제일 원인으로 신이 빵의 우유들을 잔존하게 하는 것이다. 그 뿐인가? 성서의 많은 기적이 이를 보이고 있다. 아우레올리는 인식의 문제에로 이를 확대한다.
아우레올리의 논의는, 그의 철저한 개념론적 논의는 1277년 이후 체계라는 신학적 틀에 기인한다. 그에게 모든 인식된 것을 개념이다. 보편자도 인식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렇기에 개념일 뿐이다. 이러한 개념론은 신학적 틀에서 완성되었고, 또한 신학적 틀을 더욱 더 분명하게 하는 시대적 수단이 되었다. 물론 그의 모든 논의가 1277년 이후 모든 문제를 해결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샤톤 등의 비판적 논의도 쉽사리 묵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옥캄의 후기에 이르러 옥캄은 샤톤의 영향 가운데 아우레올리의 논의를 벗어난다. 하지만 옥캄의 변화된 입장에서도 아우레올리와의 공통된 틀이 놓여있었다.
위의 논의를 통하여 필자는 1277년 이후 체계와 개념론의 관계를 아우레올리를 통하여 살펴보았다. 그의 이러한 논의를 당시 큰 영향력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1277년 이후 체계의 또 다른 면을 위하여 옥캄의 후기를 숙제로 남기로 논의를 마치려 한다.
1) J.M.M.H.Thijssen, "What Really Happened on 7 March 1277?Bishop Tempier's Condemnation and Its Institutional Context" In Texts and Contexts in Ancient and Medieval Science, ed. E.Sylla et al. (Leiden:Brill,1997), 84.
2) Aristoteles, Ethica nicomachea 6,3. 1139b. 이에 관한 우리말 역본은 다음을 참조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최명관 옮김 (서울:서광사,1984).
3) 잔 마리땅, 『스콜라철학개론』박기운 옮김 (서울:동향,1957), 32; 에티엔트 질송, 『중세철학』이효상 옮김 (서울:동아,1968), 260-261; 에티엔느 질송, 『존재와 사유』박영도 옮김 (대구:이문출판사,1985), 67-128.
4) 이재경, 「해제-아베로에스, 이슬람에서 합리주의를 외치다」『결정적 논고』이재경 옮김 (서울:책세상,2005), 83-86.
5) 이좌용, 『존재론 연구 1』(서울:철학과현실사,2005), 48-49.
6) 에티엔트 질송, 『중세철학』, 254; G.Leff, The Dissolution of The Medieval Outlook (New York:Harper Torchbook,1976), 33. 많은 철학사에선 옥캄의 선구자로 여러 명을 들고 있다. 레프는 직접적으로 스코투스와 두란두스 그리고 아우레올리를 제시하며, 질송은 두란두스와 아우레올리를 제시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우레올리를 그 명단에서 제외하는 경우는 없다. 또한 필자는 여기에서 하클레이(Henry of Harclay)가 더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스코투스와 옥캄의 사이에 머물며 그곳에서 나름의 공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7) L.Spruit, Species intelligilis from Perception to Knowledge vol.1 (Leiden:Brill,1994), 288.
8) K.H.Tachau, Vision and Certitude in the Age of Ockham: Optics, Epistemology and the Foundation of Semantics 1250-1345 (Leiden:Brill,1988), 90.
9) 여기에서 ratio를 우선 근거라고 번역하지만 이것은 충분하지 않다. 단지 더 많은 고민 이후 사용된 역어를 위한 임시적 역어일 뿐이다.
10) 유사성에 관한 옥캄의 경우는 다음의 것을 참고하라. C.Panaccio, Les mots, Les concepts et Les choses (Bellarmin:Vvin,1992), 258-267.
11) Ibid., 266.
12) L.Spruit, Species intelligilis from Perception to Knowledge vol.1, 277.
13) A.De Libera, La philosophie médiévale (Paris:PUF,1993), 441; A.Maurer, The Philosophy of William of Ockham (Toronto:PIMS,1999), 504.
14) G.Gal, "Henrucus de Harclay: Quaestio de significato conceptus universalis" Franciscan Studies 31 (1971), 178-234;
15) Ibid., 225.
16) Augustinus, de trinitate 8.6.
17) Aureolus, Scriptum super primum Sententiarum d.9, p.1, a.1. 335-343. ed. R.Friedman et al. (2003) 이 본문에서 사용된 아우레올리의 라틴어 저서들은 다음의 홈페이지에 The Peter Auriol Homepage at http://www.igl.ku.dk/~russ/auriol.html.제공된 것을 사용했다.
18) Ibid., 406-408.
19) M.Henninger, "Aureoli and Ockham on Relation" Franciscan Studies 45 (1985), 237.
20) Ibid., 238.
21) Aureolus, Scriptum super primum Sententiarum d.35, p.4, a.3. 1260-1261; 1362-1366. ed. R.Friedman et al. (2004).
22) Ibid., 1328-1329.
23) Aureolus, Scriptum super primum Sententiarum d.35, p.4, a.3. 1252-1254.
24) 이 문제에 관한 고전적 연구서는 다음이 있다. E.Hochsterter, Studien zur Metaphysik und Erkenntnislehre Wilhelms von Ockham (Berlin:Walter de Gruyter,1927), 27-55; Ph.Boehner, "The Notitia Intuitiva of Non-exitents accoerding to William Ockham" In Collected Articles on ockham, ed. E.Buytaert (New York:The Franciscan Institute,1992), 268-299. 그리고 각각의 개별적인 연구는 다음의 것이 있다. R.G.Wengert, "Three Senses of Intuitive Cognition: A Quodlibetal Question of Harvey of Nedellec" Franciscan Studies 43 (1983), 408-433; E.Karger, "Ockham's Misunderstood Theory of Intuitive and Abstractive Cognition"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Ockham, ed. P.Spade (Cambridge:Cambridge University Press,1999), 204-226; R.Pasnau, "Cognition"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Duns Scotus, ed. Th.Williams (Cambridge:Cambridge University Press,2002), 285-311.; J.Bpler, "Intuitive and Abstractive Cognition" In The Cambridge History of Later Medieval Philosophy, ed. N.Kretzman, et al. (Cambridge:Cambrideg University Press,1982), 460-478; G.Payne, "Cognitive Intuition od Singulars Revisited(Matthew of Aquasparta versus B.J.Lonergan)" Franciscan Studies 41 (1981), 346-384; R.G.Wengert, "The Sources of Intuitive Cognition in William of Ockham" Franciscan Studies 41 (1981), 415-447.
25) E.Hochsterter, Studien zur Metaphysik und Erkenntnislehre Wilhelms von Ockham, 27.
26) Duns Scotus, Ordinatio 2,d.3,p.2,q.2,n.321. 이에 관한 다음의 영어 번역서를 참고했다. Philosophy in the Middle Ages, ed.&trans. A.Hyman et al. (Indianapolis:Hackett Publishing Company,1973), 631-632.
27) R.Pasnau, "Cognition", 296-297.
28) R.G.Wengert, "Three Senses of Intuitive Cognition: A Quodlibetal Question of Harvey of Nedellec", 427. 이곳에서 우리는 직관적 인식에 관한 헤르베우스의 라틴어-영어 대역을 접할 수 있다.
29) Aureolus, Scriptum super primum Sententiarum d.35, p.4, a.3. 1252-1254.
30) R.G.Wengert, "The Sources of Intuitive Cognition in William of Ockham", 419.
31) Peter Aureol, "Intuition, Abstraction, and Demonstrative Knowledge" In The Cambridge Translations of Medieval Philosophical Texts, trans. R.Pasnau (Cambridge:Cambridge University Press,2002), 178-218.
32) Ibid., 199.
33) Ibid., 204.
34) Ibid., 205.
35) Ibid.
36) Ibid., 200.
37) F.Kelley, "Walter Chatton VS. Aureoli and Ockham Reading the Universal Concept" Franciscan Studies 41 (1981), 222-249.
38) Ibid.,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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