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도 학부 2학년때 적은 글입니다. 아직도 화일로 남아있네요...후훗...>
마리우스 빅또리누스의 삶과 사상
De
vita et philosophia Marii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서론
우리에게 그 이름마저 생소한 마리우스 빅또리누스(Marius Victorinus)는 단지 아우구스띠누스의 『고백록(告白錄)』에 등장하는 인물로써 기억할 뿐이다. 하지만 당시 강력하던 아리우스이단(Arius異端)을 상대로 한 그의 서술과 그가 전해준 신쁠라똔주의의 번역을 생각할 때 그가 단순히 『고백록』의 한 부분으로 우리에게 전해저서는 안될 것이라 생각하기에 이 소개서를 적어본다. 그러나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 적어 어찌할 수 없이 삶은 아구스띠누스의 저서를 준하고, 그의 사상은 현대독일어로 이루어진 그의 원전과 질송의 작품에 준하기로 한다. 신쁠라똔주의를 라띤말로 옮긴 이로써 우리는 그를 기억한다. 그는 실제로 아리스또떨레스의 『범주론』과 『명제론』 그리고 뽀르삐리오스의 『이사고게』를 라띤어로 옮겼고, 치체로의 『변증서』와 『발견서』에 대한 주해서를 적었으며, 뿐만 아니라 『정의론』과 『삼단추리론』이라는 자신의 저서를 적었다. 또한 아리우스이단에 대한 그의 신학적인 저서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에 준하여 논할 것이다.
본론
1. 『고백론』을 통한 그의 삶과 위상
아프리카출신에 마리우스 빅또리누스(337-362)의 생애는
우리에게 거의 전해지지 못하고 있으며, 다만 몇몇 다른 이들의 저서를 통하여 부분적으로 그의 삶을 다룰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카이저의 통치
기간 가운데 살았으며, 그의 동상이 로마의 포롬(광장)에 서있을 만큼 그는 당시 매우 뛰어나고 유명한 학자임에 틀임이 없다. 그의 신쁠라똔주의에
대한 번역서와 특히 『이사고게』에 대한 번역은 훗날 보에씨우스(Boetius)의 번역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또한 그 번역에 직접 주해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많은 이로부터 스승으로써 살았을 것이다. 즉, 당시 많은 이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라 보인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내용과는 달리 오랜 시간 우상숭배를 옹호한 이교도였으나, 기독교인으로서 죽음을 맞이하여음을 우리는
『고백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특히 쁠로띠노스(Plotinos)의 엔네아데스(Enneades)를 그리스말에서 라띤말로 옮겼으며, 그의 이
옮김은 아우구스띠누스에게 큰 영향력을 가진다. 아우구스띠누스는 이 책을 권하여준 만리우스 떼오도루스에게 고마움을 가진 것을 통해서도 우리는 다시
한번 이것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빅또리누스는 자신의 번역서에 바오로 서간과 요한복음서를 대조하며 주를 단 것은 아우구스띠누스의
회심(回心)에 큰 영향력을 가진다.
빅또리누스는 쁠라톤주의를 공부하고, 성서와 그 외 그리스도교에 관한 저서를 모조리 읽고
나서, 스스로 신자(信者)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신자가 된다는 것은 그 "벽"안에 들어가는 것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처음에는 교회에
출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신자로써 그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리고는 한 때 구원이 없는 수사학을 큰 소리로 이야기하였는데 하물며
구원이 있는 것을 어찌 당당히 말하지 못하겠는가 하며, 언제나 당당히 자신의 신앙을 이야기했다. 그의 이러한 회심(回心)에 많은 신자는 "
빅또리누스! 빅또리누스! "그의 이름을 연호(連呼) 하였다한다. 반면 이교인(異敎人)은 그의 이러한 회심에 실망하였다고 한다.
신쁠라똔주의의 번역서 뿐 아니라 이러한 그의 신앙인의 모습은 아우구스띠누스에게 큰 영향을 준다. 그가 빅또리누스와 같이 되려한다는 고백에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신자가 된 빅또리누스는 자신을 신학과 철학자에서 더욱 확연히 보이게 할 적수를 만난다. 그것이 바로
아리우스이단(Arius異端)인 것이다.
2. 삼위일체 대한 그의 가르침
당시 아리우스이단은 성자의 신성을 부정하고, 그를 가장 뛰어난
창조물 정도로 생각했다. 신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인데 신이 탄생하였다는 것은 불가(不可)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단은 빅또리누스에게
하나의 적수(敵手)가 되었다.
빅또리누스는 암브로시우스가 그의 신학 저술에서 그리 크게 이루지 못한 철학적 사유를 그의 신학
저술에서 이룬다. 그가 회심함이란 사실 단지 철학자임이 아니라, 신학자이기도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도구는 무엇보다
신쁠라똔주의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앞서 있는 일자(하나, )는 존재에 앞섬이란 의미에서 非-존재이다. 이때
비-존재란 무(無)가 아닌 모든 존재의 원인으로서 그 탁월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신자인 쁠로띠노스의 이 일자는 신자인 빅또리누스에게는
성부를 의미했다.
그 성부는 "최고의 비-존재이며, 모든 존재의 원인이다." 그리고 쁠로띠노스에 의하면 일자는 최고 지성을
유출하며, 이는 모든 가지성의 총계이며 동시에 최고의 존재이다. 즉 존재(existantia)와 지성( )을
유출한 것이다. 이 첫째 것을 빅또리누스는 성자로 보았다. 즉 이 지성을 말씀( )과 같이 본
것이다.
성부는 先-존재(앞서 있음)이며, 성자는 최고 존재(가장 뛰어난 있음)인 것이다. 성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이는 맨
처음부터 있었고, 하느님과 함께 하였으며, 그 자신이 하느님이다. 맨 처음부터 그와 함께 있음은 항상 있다는 것이다. 즉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부는 자신을 "존재하는 자 바로 그"라고 한다. 이리하면 성부와 성자는 하나로 묶인다. 유일한 항상 있음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자는 아리우스이단의 교설(敎說)과 같이 그리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성자를 "만들어지지않은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이미 신자가 되어버린 그에게 "삼위는 하나이다." 그는 말씀을 성부의 유출이나 창조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은 성부의 자기 나타남이다. 그리하여 빅또리누스는 그리스도인 말씀이 참 하느님이라 보았다. 존재 이전, 맨 처음부터 성부 속에
감추어진 맨 첫 존재는 말씀이며, 그 말씀으로서 존재의 나타남(계시)이 그리스도이다. 즉, 이 나타남(계시)은 성부 안에 있으며, 성자 안에서
나타난다. 이리 볼 때 성자-말씀은 성부의 나타남인 것이다. 성부가 성자의 원인이라 함은 신이 신 자신의 원인이라는 것이며, 이는 바로 하느님이
자기 원인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삼위일체를 모조리 설명할 수는 없고 그 자리는 신앙의 자리로 남는다.
결론
번역가로서 그는 보에씨우스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준 이며,
철-신학자로서 그는 아우구스띠누스에게 자극을 주었고, 아리우스이단을 대적했으며, 신자로써 그의 회심(回心)은 아우구스띠누스에게 모범이 되었다.
필자는 그러한 그의 성부와 성자를 다룬 삼위일체 사상을 살폈다. 그는 어쩌면 자신의 철학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표현하고자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정도가 너무나 강했다는 느낌도 든다.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 미루기로 한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논할 수
있는 그의 가르침이 너무나 적은 까닭이다. 그리고 그것은 필자에게 숙제이며, 앞으로 더 자세히 그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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