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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의자리

Insolubilia와 중세 학자들의 해결책 이해


"모든 명제는 거짓이다"
: Insolubilia와 중세 학자들의 해결책 이해


1. insolubilia에 들어가면서.

 뵈너(Boehner)가 지적하듯이 insolubilia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해결하기 어려운 것에 관한 논의이다. 그렇기에 스페이드(Spade)와 같은 현대 연구가들은 중세 insolubilia 문헌에서 거짓(Liar)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하고 풍부한 시도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해결되기 어려운 거짓 명제는 참이라고 하기도 거짓이라 하기도 힘든 명제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모든 명제는 거짓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 명제의 논리적 난제에 관하여 필자는 뷔리당(Buridan)의 논의로 충분할 것이라 믿는다. 뷔리당은 "모든 명제는 거짓이다"가 난제가 되는 이유를 매우 분명히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논의하는 것은 이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궁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는 참으로 대답하기 힘든 것인데 그것은 한번에 참과 거짓이 모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뷔리당은 우선 이 명제를 거짓이라 한다. 그러면 그의 논의를 따라가 보자. 이 명제를 거짓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뷔리당의 이야기가 타당하다. 그런데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이 명제로부터 나오는 것은 참이 된다. 그런데 만일 그러하다면, 다시 돌아가서 시작하는 명제, 즉 모든 명제가 거짓이라는 명제는 참이 아닌 것이 된다. 거짓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뷔리당 논의의 진위를 떠나서 이 명제의 진위를 논의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중세 많은 논리학자들이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부분적으로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여정을 단순하게 살펴보자. 이 노력의 여정을 스페이드는 3 시기로 나누어 다루었다. 첫 시기는 시작에서 약 1320년에 이르는 기간이며, 둘째 시기는 1320년에서 흑사병이 등장하는 시기이다. 셋째 시기는 1350년 이후이다. 그 가운데 첫 시기에는 폐기(cassatio)에 의한 insolubilia가 다루어졌다. 이 이론에서 insolubilia는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1225년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 관하여 일반적 견해로 다루어졌다. 하지만 이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는 그리 명확하지 않다. 13세기 중반 샤우드의 윌리엄(William of Sherwood)가 이 폐기를 통하여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 인물이다. 두 번째 시기에 다루어진 해결책은 절대적으로 참인 것이라는 몇몇 관점에서 오직 참된 것이 혼돈 된 것에 대한 오류로 insolubilia를 다루는 것이다. 이를 "경우에 따라서 그리고 단순하게"(secunsum quid et simpliciter)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피스트적 논박}(Sophistici elenchi)에서 같은 사람이 동시에 참과 거짓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의 문제를 제기한다. 예를 들어, "같은 사람이 동시에 자신의 서약을 지키고 또 깨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에서 '단순하게' 반대의 것 혹은 대립되는 두 가지의 것이 동일한 것에 속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특정의 관점 혹은 경우에 따라서' 같은 사물에 대립되는 것이 속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논의는 1330년경에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1350년 이후에 이루어진 논의를 살펴보자. 세 번째 시기의 초기 이론은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가 "경우에 따라서 그리고 단순하게" 오류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알맞은 insolubilia을 만든 것을 시도하는 것에서 일어난 듯 하다. 이에 따라서 insolubilia 가운데 현재 시점 동사는 insolubilia이 진술되기 이전의 시간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나는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다"라는 insolubilia는 사실 "나는 잠시 전 거짓을 이야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좀 전에 그가 거짓을 이야기했는가에 이 명제의 진위를 달린 것이다. 특히 스페이드는 브라카위스(Braakhuis)가 소개하는 익명의 저자를 통하여 이러한 관점과 이 관점이 자기-언급(self-reference)의 '제거'와 관련된다는 것을 보인다. 또한 스페이드는 브래드워딘(Thomas Bradwardine)를 통하여 이를 다시 보여준다. 브래드워딘은 자기-언급을 거부하는 '제한하는 이들'(restringentes)의 이론의 다양함을 다룬다. 제한하는 이들은 자기-언급의 제거를 주장한다. 여기에서 제거하는 이들은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한 부류는 모든 경우에서 자기-언급을 배제한다. 그리고 다른 한 부류는 일부의 경우에서 자기-언급을 허락한다. 그러나 insolubilia의 경우는 아니다. 그러나 이 둘은 분명 insolubilia에서 자기-언급을 제거함에서는 일치한다. 그 외에도 미쳐 소개하지 못한 다양한 것이 insolubilia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뵈너의 이야기처럼 분명 insolubilia은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해결하기 힘든 것을 다루는 것이다. 그리고 무척이나 다양한 중세 논리학자들이 이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필자가 의도하는 것은 insolubilia논의의 내용이다. "나는 거짓말하고 있다." 만일 이것이 참이라면 언급의 순환에 따라 다시 생각해 보면, "'나는 거짓말하고 있다'가 참이다"가 된다. 만일 그렇다면, 지금 이 말은 거짓말이 된다. 그러면 참이라는 결론이 애매해진다. 그래서 초기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이들은 이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했다. 이것이 무화(nullification) 혹은 폐기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insolubilia 명제는 참이라고 하면 그것은 거짓을 함께 논의하게 한다. 여기에서 "경우에 따라 그리고 단순하게"에 의한 것이 등장한다. 이어서 이러한 고민은 insolubilia의 현재 시칭의 동사가 실재로는 그 이전의 과거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해결책을 낳는다. "모든 명제가 거짓이다"라는 명제는 사실 "모든 명제는 그 이전에 모두 거짓이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insolubilia이 자기-언급의 명제가 아니라는 사실과 연결된다. 여기에서 '제거하는 이들'의 논의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위클리프(Wyclif)와 같은 이들은 나름의 독자적인 노선에서 이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고, 이것도 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도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논의는 위에서의 소개보다 더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렇기에 위에서 이미 논의한대로 중세 insolubilia의 논의는 논리적 난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보고(寶庫)이다. 이렇게 중세인들은 이 어려운 궤변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면 필자는 이어서 중세 몇몇 인물의 insolubilia 해결 방법을 따라갈 것이다.

2. 옥캄(William Ockham, 1287-1347), 버얼리(Burley, 1275-1345) 그리고 위(僞)- 샤우드의 insolubilia에 관하여.

 옥캄과 버얼리 그리고 위-샤우드는 그 방식의 차이를 가지지만 '제한하는 이'의 법칙에 기인하여 문제를 해결해간다. 그것은 이미 논의한 대로 '부분은 결코 부분인 것의 전체를 지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거짓말을 한다"라는 소크라테스의 진술에서 서술어인 '거짓말'은 소크라테스 자신의 진술을 지칭하지는 않으며, 그 외 다른 모든 진술을 지칭한다. 본 논의의 제목을 예로 사용하자면, "모든 명제는 거짓이다"라는 명제에서 서술어인 '거짓'은 그 명제 자체를 지칭하지는 않으며, 그러나 다른 모든 명제를 지칭한다. 위-샤우드에 의하면, 위에 예를 든 소크라테스의 진술에서 '거짓말'은 '거짓말'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위-샤우드는 "'소크라테스는 거짓말을 한다'는 거짓이다"에서부터 "그러므로 소크라테스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거짓이다"에로 추론되는 것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즉 그에 따르면 "소크라테스가 A임이 거짓말이라 이야기한다는 거짓이다"는 참된 명제이며, 여기에서 "소크라테스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거짓이다"는 거짓 결론이다. 왜냐하면 전제의 "거짓말"은 지칭의 제한을 가지지만, 결론에 "거짓말"은 지칭의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위-샤우드에게 제한됨으로부터 제한되지 않음으로 서술어의 지칭이 이동하는 것은 부당한 것으로 본다. 그에게 전자의 '거짓말'은 지칭의 대상을 가지지만, 결론에서 '거짓말'은 지칭의 대상이 없다. 그렇기에 이 추론은 바른 것이 아니다. 위-샤우드는 그 연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경우에 따라서(secundum quid)와 확정함과 함께 하는 표현으로부터 단순하게(simpliciter)으로. 그리고 이는 분명하게 경우에 따라서 그리고 단순하게 비논리이다.

 경우에 따라서, 즉 제한에 의하여 참인 것에서 단순하게 명제를 바라보는 것에로 나아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이러한 오류, 즉 경우에 따라서 그리고 단순하게 오류의 대표격이 되는 것이다.
 옥캄과 뷔리당도 몇몇 오류적 논증을 다룬다. 옥캄은 다음과 같이 논의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거짓말을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거짓말을 이야기한다"는 추론은 좋지 않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그리고 단순하게 오류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거짓말을 이야기한다"는 명제에서 '거짓말'이라는 명사는 소크라테스가 거짓말을 이야기한다는 '이 거짓말'을 지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옥캄은 위-샤우드와 마찬가지로 '경우에 따라서 그리고 단순하게 오류'라 이 명제를 파악한다. 하지만 우리는 위-샤우드와 구별되게 옥캄과 버얼리를 이해해야한다. 물론 이 세 사람은 모두가 '제한하는 이'의 법칙에 근거한다. 즉 어떤 명제에서도 부분은 부분이 있는 전제를 지칭하지 않는다는 법칙 말이다. 위-샤우드와 제한하는 이들은 이를 insolubilia를 위한 문제에 적극 적용한다. 그런데 옥캄과 버얼리는 제한하는 이의 법칙을 이 insolubilia의 범위에 그 사용을 제한한다. 옥캄과 버얼리의 눈에 이는 자기-언급을 금지함으로 그 결론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것은 실수라고 한다. 버얼리는 이렇게 분석한다. "소크라테스에의하여 이야기되는 명제가 참이 아니라는 것은 참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에 의하여 이야기되는 명제가 참이 아니라는 것은 소크라테스에 의하여 말되는 명제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에 의하여 이야기되는 명제는 참이다." 이러한 추론에서 결론에 들어난 '소크라테스에 의하여 이야기되는 명제'라는 것은 '소크라테스에 의하여 이야기되는 명제가 참이 아니다' 전체를 지칭할 수 없다고 분석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추론은 바른 것이라 아니라고 버얼리는 논의한다. 여기에서 사용하는 제한은 제한하는 이들의 법칙에 따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 버얼리는 또 다른 '제한'을 제안한다. 긍정적 insolubilia인  "나는 거짓말을 이야기한다"를 고려해보자. 여기에서 '거짓말'이란 말은 나의 진술을 지칭한다. 우리가 이 말과 지칭된 것과 교환할 때, 우리는 "나는 '나는 거짓말을 이야기한다'를 이야기한다"라는 명제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긍정적 확정과 함께 하는 자기-언급'의 한 예이다. 이와 같이 옥캄과 버얼리는 자기-언급의 제거에 의하여 insolubilia라는 난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이렇게 위-샤우드와 옥캄 그리고 버얼리는 제한하는 이의 법칙에 의존하지만, 제한하는 이와 위-샤우드와 같은 이들은 옥캄과 버얼리와 그 형태가 다르다. 옥캄과 버얼리는 자기-언급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를 통하여 제한하는 이와 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3. 토마스 브래드워딘(Thomas Bradwardine, 1295-1349)의 insolubilia에 관하여.

 브래드워딘은 1321년과 1324년 사이 어느 시점에 insolubilia에 관한 저서를 적었다. 그의 이론은 의미(significatio)와 추단(推斷, consequentia)의 이어짐에 근거한다. 그는 모든 명제가 그 자신의 진리를 함축하는 것이라고 한다. "'마치 소크라테스는 달린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가 달리다는 참이다'"와 같이 말이다. 그러므로 "이 명제는 거짓이다"라는 insolubilia는 그 자체가 참임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이 거짓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모순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렇게 그것은 단순하게 거짓이다. 이렇게 이 역설(paradox)은 깨어진다. "모든 명제는 거짓이다"란 명제도 이러한 것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이 의미하는 것에서 참이다. 하지만 이 명제는 모든 명제가 거짓이라는 것 자체를 의미하기에 이 점에서는 참인 것이다. 그렇게 그것은 모순을 의미하며, 그리고 그렇게 그것은 단순히 거짓이다. 이러한 브래드워딘은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것이 되었다. 이는 당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주도적 이론 가운데 하나로 남게 된다. 

4. 스와인즈헤드(Robert Swyneshed)와 헤이테즈베리(William Heytesbury)의 insolubilia에 관하여.

 스와인즈헤드와 헤이테즈베리에 관한 논의는 이후의 논의를 위하여 필요한 재료가 된다. 우선 스와인즈헤드(Roger Swyneshed)의 논의를 간단하게나마 정리하여보자. 그것은 그의 논의가 중세에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접근으로부터 세 가지 유명한 결론을 그린다. 첫째는 '일부 거짓 명제는 원천적으로 사실로 의미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일부 좋은 형식의 추론에서 거짓은 참으로부터 추론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추론의 추론은 거짓이다. 그러므로 이 추론의 추론은 거짓이다"와 같이 말이다. 여기에서 전제와 결론 양자는 실재에 상응하지만, 후자는 그 자체로 거짓이며, 전자는 그렇지 않다. 여기에서 스와인즈헤드는 비록 선한 추론이 진리를 보존하지 않아도 그것은 실재에 상응하는 것의 속성을 보존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이 명제는 거짓이다'와 같은 insolubilia는 비록 거짓이지만, 실재에 상응한다고 한다. 그 반대로 '그 명제는 거짓이 아니다'는 상응함에 실패하였고, 그렇게 그러한 방식으로 거짓이다라고 한다. 이러한 스와인즈헤드의 논의는 실재에 상응하는 것이라는 개념에서 진리의 개념을 분리시켰다. 헤이테즈베리는 매우 강한 영향력을 가진다, 그에 의하면, 이는 obligatio의 문제와 연관을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은 이후 중세 논리학자들의 저서에서 보여진다. 1335년에 적은 그의 저서에서 헤이테즈베리는 의미심장한 논의를 전개한다. "소크라테스가 거짓말을 이야기하고 있다"에서 이 말을 소크라테스 자신이 다른 어떤 말도 없이 그렇게 말한다면, 모순이라는 조건에서 소크라테스가 거짓말을 말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없다. 그에 의하면 어떤 명제와 문장도 insolubilia의 상황 아래에서 분명하게 그것이 일반적으로 행해지듯이 의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는 terminus와 마찬가지로 말된 명제와 쓰여진 명제의 의미가 인위적인 것에 대한 임의적 공인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만일 명제가 insolubilia의 상황 아래에서 상이하게 의미한다면, 그러면 그것은 새로운 인위적인 것이 임의적으로 공인되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헤이테즈베리의 이론에 의하면 심적 언어 가운데는 어떤 insolubilia도 없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헤이테즈베리의 이론은 후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이를 로버트 프랜드(Robertus de Flandria)의 insolubilia의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5. 베살리아의 요한(Johannes de Wesalia, ?)로버트 프랜드(Robertus de Flandria, 1335-1360)의 insolubilia에 관하여.

 스페이드의 작업을 통하여 우리는 많은 중세 철학자들의 insolubilia 관련 문헌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헤이테즈베리와 스와인즈헤드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베살리아의 요한(Johannes de wesalia)가 있다. 그런데 이 인물에 관하여 우리가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으며, 알려진 것도 우리를 혼란하게 하고 있다. {파리 대학의 연대기}(Chartularium universitatis parisiensis)에 의하면 동명(同名)의 두 인물이 전해지고 있다. 한 사람은 1344-1353년 동안 그리고 다른 한 명은 1417년과 관련되어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스페이드 이 가운데 전자에 관심을 두고 그가 필자가 논하려 하는 insolubilia 문헌의 저자라고 보고 있다. 그는 산 마르코(San Marco) 도서관의 obligationes와 관련된 문헌과 머턴 학파의 수사본 가운데 14세기 중반의 것으로 보이는 {obligatio의 기술에 관하여}(de arte obligatioria)의 유사성을 지적한다. 그리고 스페이드는 산 마르코의 그 수사본의 저자와 전자의 베살리아의 요한의 동일성을 추측해본다. 그러면서 베살리아의 요한의 저작인 14세기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도 말하듯이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이다. 베살리아의 요한의 insolubilia 관련 논의의 첫 질문은 스와인즈헤드의 영향력이 드러나 보인다. 그에게서 우리는 스와인즈헤드의 관점 가운데 특징적인 논의와 용어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두 번째 질문에서는 헤이테즈베리의 논의와 그의 특징적인 주장이 논의되기도 한다. 이러한 스페이드의 추정이 사실이라면, 14세기 중반 파리에 스와인즈헤드와 헤이테즈베리의 insolubilia가 논의되었다는 역사적 증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영향력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영향력은 로버트 프랜드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    
 로버트는 자신 이전의 두 가지 입장을 소개한다. 첫째 것은 insolubilia 명제가 우선적으로 그리고 원천적으로 사실을 의미하고, 또한 그 자체로 참임을 귀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insolubilia 명제는 이러한 귀결된 의미로 인하여 거짓이다. 이러한 입장을 스페이드는 약한 타르스키-상호조건주의와 관련지어 이야기한다. 이 이론에 관하여 프랜드가 맘속에 구체적으로 누구를 염두 해두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두 번째 입장에서 insolubilia 명제는 다시 한번 우선적으로 그리고 원천적으로 사실로서 의미하고, 추론적으로 의미한다. 혹은 후차적으로 사실보다 다른 방식을 의미하며, 그렇게 다시 한번 그의 추론된 의미에 의하여 거짓이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입장은 헤이테즈베리의 입장이 드러나며, 스와인즈헤드의 입장과는 반대되는 것이 드러난다. 이러한 로버트의 논의는 헤이테즈베리와 스와인즈헤드의 영향력이 보이는 또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6. 위클리프(Johannes Wyclif, 1330-1384)의 insolubilia에 관하여.

 위클리프는 {난제들의 대전}(Summa insolubilium)을 내어놓았다. 그는 1363년에 이미 신학교의 선생이었고, 1372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이 insolubilia에 관한 저작은 1360년대 초에 저술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몇몇 인물은 1365년이라고 하지만, 이는 너무 늦은 듯 보인다. 그리하여 스페이드는 이는 1360년이라 소개한다. 위클리프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몇 가지 논의를 소개한다. 스페이드는 다음으로 이를 정리해낸다. 우선 위클리프에 의하면 ① 존재자와 같이 명제도 초월적 의미에서 참(verum)이다. 마치 존재론에서 존재자(ens)와 참이 서로 상호교환 가능한 것이듯이 말이다. 이러한 논의는 위클리프가 도입하긴 전에 논리학의 역사에선 거의 사용되지 않았었다. 그리고 특히 insolubilia에 관한 문제에서는 덜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② 그렇게 된다면, 명제는 참이다. 이는 우선적으로 명제가 의미하는 것은 실존한다. {난제들의 대전}에서 위클리프는 '제일 의미체'의 존재론에 관하여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다른 논리학 저서인 {논리학의 완결문}(Logicae continuatio)에서는 제일 의미체의 존재론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이 진리들은 실체나 우유가 아니라, 논리적 존재자 혹은 이성적 존재자이다. 그리고 나는 우선적으로 그리고 원리적으로 전체 의미(기호)로 파악되는 그러한 기호의 제일 의미체를 명한다. 마치 '인간'이라는 명사가 우선적으로 인간을 의미하고 우선적으로 일반적으로(in commune) 인간을 의미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 인간 (혹은) 저 인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제일 의미체의 존재론을 그려볼 수 있다. 이를 명제에 인용한다면, 한 명제는 우선적으로 그 명제가 의미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렇게 의미되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③ '한 명제가 참이다'는 우선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실존하며, 이는 명제 그 자체에서 독립된 것이다. 여기에서 '독립'이란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스페이드에 의하면, 이는 위클리프의 철학적 용어 가운데도 유난히 그 이해가 어려운 것이다. ①의 의미에서 진리(veritas)는 결과적으로 명제가 일치하거나 표현하는 사실 혹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의 측면에서 어떤 사건을 요청한다. 일반적인 경우에서 사실 혹은 사건은 관련된 의미에서 명제 그 자체에서 독립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경우에 그 명제는 ②의 의미에서 진리 혹은 참이며, ③의 의미에서도 그렇다. 이에 따르면, 한 명제는 참이다. 만일 우선적으로 실존재하는 존재자를 의미한다면 말이다. 이렇게 위클리프에 의하여 존재론적 논의가 insolubilia 논의에 적용된다. 그리고 이렇게 됨으로 insolubilia의 논의에 새로운 장이 시작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위클리프의 저서를 분석해보자. 위클리프는 난제들의 대전의 1장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마치 'deus est'는 우선적으로 이 명제로부터 전적으로 분리된 존재자인 신적 본질을 의미하듯이 어떤 명제는 전적으로 이 명제 자체로부터 분리된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러한 존재자는 이 명제로부터 전적으로 독립된 것이거나 혹은 의존하는 것이다. 만일 의존하는 것이라면, 마치 '이 명제는 의미한다'라는 이 명제가 그 자체로 지시하는 것처럼 지금 그러한 명제는 우선 의존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명제의 우선된 의미체들은 그 명제 자체에 의존하는 것이다. 만일 독립하는 것이라면, 지금 그러한 명제는 우선 독립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라 불린다. 마치 'deus est'라는 서술과 같이 말이다....
 첫 방식에서 명제는 참된 것이며, 마치 자기 본질이 참 그리고 진리인 존재 그 자체인 것처럼 말이다.... 둘째의 방식으로 명제는 참이라 말되어진다. 우선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자 혹은 존재자 그 자체가 이 명제 바로 자신인 존재자를 의미한다. 마치... '이 명제는 의미한다'의 의미되어지는 것에 대하여 그것 자신으로 지시되어지는 것처럼 혹은 독일한 존재자가 이 명제 자체로부터 전적으로 분리되고 독립된 것이라면, 마치 '하늘이 움직인다'와 같은 것의 의미에 대하여 그리고 deus est 그리고 유사한 것의 의미에 대한 것처럼... 셋째의 방식으로 명제는 참이라 말되어진다 왜냐하면, 우선적으로 이 명제로부터 분리된 존재자 혹은 독립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명제는 그 자체로 그 명제로부터 분리된 존재자를 의미한다. 즉 제일 의미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명제는 마치 존재자가 참과 환원 가능한 것이듯이 참과 환원이 가능하다. 이러한 방식에서 명제는 참이다. 그리고 우선적으로 제일 의미체를 의미한다면, 이러한 명제는 참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선적으로 이 명제로부터 분리된 것을 혹은 독립된 것을 의미하기에 이러한 명제는 참이라고 한다. 위클리프의 이러한 풀이법은 이미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중세의 존재론이 깔려있다. 위클리프에게 그러면 명제가 거짓인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우선 간단하게 위의 세 경우에 준하지 않을 때이다. 한번 살펴보자.

 이 방식에서 어떤 명제도 거짓이라 말되지 않는다... 둘째 방식에서 명제는, 존재하지 않는 제일 의미체를 우선적으로 의미할 때, 거짓이다... 셋째 방식에서 명제는 자기 의미의 방식이 우선적으로 이 구별되는 것과 독립된 것으로부터 존재자에 일치하지 않기에 거짓이다.

 첫째 방식의 명제는 어떤 것도 거짓일 수 없다. 초월개념이란 의미에서 존재자는 존재함으로서 참과 상호교환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위에서 이러한 방식의 명제는 거짓이 될 수 없다고 언명했다. 그러면 문제는 남은 두 가지의 방식이다. 둘째 방식에서 제일 의미체가 실존하지 않을 경우 이 명제는 거짓이 된다. 세 번째 방식에서 거짓은 경우는 실존하거나 실존하지 않는 것을 우선적으로 의미하지만, 그러나 명제 그 자체에 의존되는 것일 때이다. 셋째 방식에 거짓인 것은 "이 명제는 의미한다"(haec propositio significat)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가 지시되어지는 것이며, 이는 이 명제 그 자체에 의존되는 것을 뜻한다. 이 세 방식에서의 거짓은 위에서 이야기한 참이 되는 세 방식에 모순이 되는 경우이다. "모든 명제는 거짓이다"를 위클리프의 방식으로 다루어보자. 여기에서 명제가 우선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실존한다. 그렇기에 이 명제는 두 번째 방식에서 참이다. 그러나 셋째 방식에서 이 명제는 거짓이다. 왜냐하면 이 명제가 우선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명제 자체에 독립된 것이 아니라, 의존된 것이다. 그렇기에 거짓인 것이다. 그렇기에 insolubilia는 두 번째 방식에서는 참이지만, 셋째 방식에서는 거짓이 된다. 이렇게 insolubilia는 하나의 난제가 된다.
 이러한 위클리프의 논의는 후에 1380년 활동한 로버트 알링톤(Robert Alyngton)등에게 영향을 준다. 그 외에도 익명의 수사본 등에서 위클리프의 해법이 후에 전수됨을 확인할 수 있다.
             
6. 파울루스 베네투스(Paulus Venetus, 1365-1429)의 insolubilia에 관하여. 

 insolubilia에 관한 논의는 obligatio에 관한 논의와 깊은 관련을 가진다. insolubilia 명제의 해결을 위하여 파울루스 베네투스는 세 가지 단계를 설정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obligatio와의 관련 속에서 진행된다. 우선 첫 단계에 의하면, insolubilia 명제는 '동일화'되어진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혹은 해결되어질 수 있는 하나로 해석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obligatio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그들의 구별되는 각각의 형태에 의하여 insolubilia 명제의 몇몇 형태를 알아차린다. 이러한 두 번째 단계가 진행된다. 여기에서 이 명제는 전적으로 거짓이거나 부분적으로 거짓으로 여겨진다. 전자는 모순이 드러나며, 후자는 명명 상황 혹은 가정 속에서 모순을 가진다. 그렇게 이에 참여하는 학생은 insolubilia 명제가 불합리성을 가지게 되는 정확한 상황을 알아야하며, obligatio 가운데 '승인'되면 그들은 그러한 명제를 제거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려야한다. 마지막 셋째의 길이 이어서 진행된다. 여기에서 insolubilia 명제는 obligatio 가운데 승인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이라면 obligatio 가운데 승인되지 못한다. 그리고 해결(solutio)에서 어떤 방식에서는 그 명제가 참이며, 또 다른 방식에서는 거짓으로 해결되어진다. 이렇게 '동일화', '승인' 그리고 '해결'이라는 세 단계가 진행되어진다.
 insolubilia를 '동일화'하는 것은 마음 가운데 insolubilia의 구분과 마찬가지로 정의를 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명제는 거짓이다"와 같은 명제는 단순하게(simpliter) insolubilia이며, 다른 방식에서 이 명제는 경우에 따라서(secundum quid) insolubilia이다. 이어서 파울루스 베네투스는 insolubilia을 분류한다. 우선 명백한 insolubilia(insolubilia apparens)와 명백하지 않는 insolubilia(insolubilia non apparens)이다. 그리고 명백한 insolubilia는 먼저 범주적 insolubilia를 가지며, 이는 다시 아래의 것으로 구분된다. 즉, 단일 명제와 개별 명제 그리고 보편 명제와 배타적 명제 마지막으로 제외 명제이다. 이어서 명백하지 않은 Insolubilia도 있다. 이렇게 obligatio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insolubilia의 다양한 정의와 구분을 파악한다. 이어서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간다. 승인의 단계에서 insolubilia는 전적으로 혹은 단순하게 거짓이거나 부분적으로 거짓이다. 여기에서 전자는 이미 논의했듯이 모순을 가지며, 이는 obligatio 가운데 승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상황 혹은 경우에 따라서 거짓인 insolubilia는 항상 모순을 가지는 것이 아니며, 학생들은 모순이나 불합리로 나아가는 상황을 알아야한다. 그리고 이를 obligatio 가운데 승인된다면, 그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따라서 그러한 명제를 주의 깊게 거부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단계, 즉 해결의 단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파울루스 베네투스의 논의는 insolubilia와 obligatio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다루어지고 있다. 이는 이미 위에서 이야기한 헤이테즈베리 등과 같은 이들에게서도 보여지며, 이는 중세 논리학의 한 전통이 된다.          

7. 기약의 말.

 사도 바울로는 신약성서의 한 권인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재미난 글을 적고 있다. "그레데인 가운데 한 사람, 바로 그들 자신의 예언자가 '그레데 사람은 으레 거짓말쟁이요 고약한 짐승이며, 배만 채우려는 게으름뱅이'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 그레데 사람의 말은 참인가 거짓인가? 현대 논리학이나 의미론에서도 그리고 수학에서도 insolubilia의 논의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다. "모든 명제는 거짓이다." 과연 이 명제는 참인가 거짓인가? 어떤 이는 이러한 논의는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며, 어떤 이는 단순하게 이는 모순을 가진다고 하며, 또 어떤 이는 경우에 따라서 모순을 가진다고 한다. 즉 경우에 따라서 참이고, 경우에 따라서 거짓인 것이다. 또 이러한 논의는 중세 토론의 논의인 obligatio와도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 필자의 본 논의는 아주 간단한 소개이다. 이 논의는 차후의 논의를 위한 작은 시작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