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후기의 아리스토텔레스 벗어나기: 성체성사에 관한 중세 철학자의 이해를 통하여
out of Aristotle in late medieval Age
1. 이성(ratio)과 신앙(fides)의 접합지점.
그리스도는 최후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통한 성체성사라는 힘든 신학적 난제를 후세에 남겼다. 과연 성체성사에서 제대위의 빵과 포도주는 실재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인가, 아니면 단지 의미상에서 그런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인가? 그러나 당시 교회는 전자를 선택하였다. 하지만 이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문제는 신학과 철학에 있어서 하나의 주된 문제가 되었다. 빵은 축성 이전에는 빵이지만, 그 이후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런데 그 실체는 그리스도의 몸이라지만 그 우유는 여전히 빵이다. 그러면 빵의 우유는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적어도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에 근거하는 것은 아니다. 그 빵의 우유는 빵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실체로 실체의 전환이 이루어진 후에도 실체 없이 남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 속에선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우유는 실체에 의하여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간단한 원리 혹은 공리가 성체성사에서 통용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의 신앙과 철학의 이성은 서로 힘든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이다.
후기 중세 철학에서 성체성사에 관한 논의는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 속에서 이해되어진 실체와 우유에 관한 논의와 충돌하게 된다.1) 이러한 충돌은 새로운 틀을 준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실재로 성체성사에 관한 논의는 매우 다양한 모습을 가지게 되며, 이는 종교개혁에 이르러 성체성사의 이해 차이로 이어진다. 성체성사는 이와 같이 후기 중세 철학자와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전통적 중세 철학과 신학의 논의를 자신과 분리시키는 지점이 되는 것이다. 옥캄으로 대표되는 ‘사고의 경제성’은 기존의 성체성사에 관하여 새롭게 사고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고의 흐름은 종교개혁자들에게로 이어진다. 특히 루터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필자는 본론을 통하여 이성으로 대표되어지는 전통적 철학의 이해인 실체(substantia)와 우유(accidens, 부대성)의 논의가 신앙으로 대표되어지는 성체성사의 논의와 어떻게 접합되어 설명되어지는지를 다루려 한다.
2. 신앙에 관한 합리적 설명의 한계.
2.1 전통적 이해 속에서 실체와 우유에 관하여.
중세인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실체’와 ‘우유’는 형이상학의 중심 개념 가운데 하나였다. 예를 들어, a라는 사과가 있다. a라는 사과는 푸른빛을 낼 때도 그리고 시간이 지나 태양에 의하여 점점 붉은빛을 내어도 a라는 사과는 a라는 사과이다. 색의 변화로 a라는 사과가 b라는 사과로 변화하는 일은 없다. 여기에서 a가 a로 존재하는 근거, 즉 그 자체로 또한 자기 속에 근거하는 것을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a라는 사과의 색이나 그 맛과 같은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며 단지 실체로 인하여 존재할 뿐이다. 만일 a의 실체가 없다면 a의 우유들, 즉 색이나 맛이나 크기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2) 아리스토텔레스는 『변증론』에서 10개의 범주를 설명하면서 실체는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a라는 사과의 무엇임이 바로 a의 실체이며, a의 우유들이 아니란 말이다.3) a라는 사과는 그 실체로 인하여 지속되어지며, 동일한 것으로 머문다. 또한 우유는 결코 스스로 자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며 오직 실체에 동반되어 존재할 뿐이다. 이는 일반적인 생각에 의하면 매우 당연한 귀결이다. 즉 인간의 이성에 의하면 매우 당연한 결과이다. a의 실체가 없는 a의 우유란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 속에선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논의는 토마스에게서도 보여지는 것이다. 토마스에게도 실체과 우유의 관계에서 우유란 실체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토마스는 분명하게 그의 저서 『존재자와 본질에 관하여』에서 “본질은 고유하게 그리고 참되게 실체 가운데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 그리고 이차적으로 우유 가운데 있다”고 한다.4) 토마스 역시 a의 본질은 우선적으로 실체 가운데 있으며, 우유 가운데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한 근거는 우유란 실체 없이 존재하지 못하며, 단지 실체가 있음으로 거기에 부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에서 우유는 하나의 실체에서 다른 실체의 것으로 되어 질 수도 없다. 다시 말해 a의 우유가 b의 우유가 될 수는 없단 말이다.5)
하지만 이러한 실체와 우유에 관한 이해가 성체성사에 관한 설명에 합리적 설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이 형이상학의 문제가 신학으로 넘어가고 다시 이것이 인간의 인식론(지식 이론)의 문제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게 될 것이다. 축성 이후 빵과 포도주의 실체는 더 이상 빵과 포도주가 아니며, 이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체변화(transsubstantiatio)가 일어났다. 하지만 빵과 포도주의 우유들은 그대로 남아서 우리에게 빵과 우유로 인식되게 한다. 여기에서 빵과 포도주의 우유는 분명 실체 없이 있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는 위에서 논의한 것과 다른 것이다. 위에 따르면 우유란 실체 없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빵의 실체에 근거한 우유들이 다른 실체의 우유가 될 수도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한 신앙의 논의는 어떻게 합리적 설명의 길을 모색하게 되어질 것인가? 이것이 중세인에게 던져진 하나의 과제였다.
2.2 전통적 성체성사에 관한 논의.
중세인들의 교과서 롬바르두스(Lombardus)의 『명제집』에서도 이 난제는 등장한다. 빵과 포도주의 우유는 실체변화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것도 실체 없이 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이란 실체의 측면에서 보자면, 그리스도교의 몸과 피는 하나의 고유한 실체이지만, 이 실체는 우유 없이 있는 것이다.6) 중세의 위대한 학자인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는 이러한 문제는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는 우유(accidens)가 존재하는 것은 내재(inesse)라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므로 이 우유가 어떤 물체(corpus) 가운데 내재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것으로 보여진다.7)
여기에서 알베르투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며 우유가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재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은 필연적인 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우유는 실체에 의하여 존재함을 인정하고 있다. 만일 이렇지 않고, 우유가 스스로 존재한다면 이는 우유가 아니라 실체로 전환된 것이라고 해야한다고 알베르투스는 단언한다.8) 그런데 성체성사에서 실체는 그리스도의 몸과 포도주로 변화하였다지만, 그 우유는 여전히 남아있다.
이 성사에서 우유 가운데 있는 제일 되는 것은 양(quantitas)이고, 이것 자체는 양이다. 그리고 왜냐하면 이들은 질료에 더 고유한 것이고, 이것이 스스로 있고, 또한 다른 우유는 마치 모양, 색 그리고 맛, 향과 같은 그러한 것은 (양) 그 자체 가운데 있다.9)
여기에서 알베르투스는 우유 가운데 제일인 양(quantitas)을 지적하면서,10) 이것이 축성 이후에서 변화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빵과 포도주의 양 가운데 빵과 포도주의 맛과 향과 같은 것이 있는데, 이 양이 실체변화 이후에도 변화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유의 잔존 가운데 실체의 변화를 알베르투스는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실체 없는 우유의 잔존이라는 난제를 알베르투스는 성체성사는 초자연(super naturam)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성체성사를 자연의 법칙을 넘어서는 기적의 하나(in miraculis) 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기적이란 어떤 것인가?
그러므로 신은 처녀의 자궁이 임신하게 할 수 있으며, 그리고 처녀의 자궁은 순응할 수 있었다.11)
이와 같이 신은 처녀의 자궁에 정자 없이도 임신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신은 그의 절대적 권능으로 자연의 법칙을 넘어서는 일을 행할 수 있다. 신에게 이러한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알베르투스의 해법은 간단하다. 성체성사에서 일어난 실체 없는 우유의 잔존은 신의 초자연적 능력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며, 이는 이성에 의하여 합리적 설명이 불가능하며, 단지 초자연만이 가장 합리적으로 철학의 논의로는 설명되지 않는 신앙을 가장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라 생각한 것이다.
철학은 인간 이성의 합리적 설명을 전재한다. 알베르투스는 성체성사에 관한 완전한 합리적 해석은 힘들며, 이는 자연을 넘어선 초자연적인 것, 즉 기적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알베르투스에게는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었던 것이다. 스승 알베르투스의 이러한 방법은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로 이어져간다.
토마스는 기적적이라고 불리는 것은 자연의 순리로부터 떨어진 것으로 신의 힘에 의하여 행해진 것들이라고 한다. 분명 토마스에게 신 없이 자연계 가운데 일어날 수 없는 것은 기적이다. 예를 들어, 태양이 거꾸로 돌거나 혹은 움직이지 않고 같은 자리에 서있는 경우가 그러한 것이다.12) 흄(D.Hume)에게 기적이란 자연 법칙의 위반이다. 죽은 이의 부활은 기적이지만, 죽은 이가 썩어지는 것은 자연적이다.13) 알베르투스와 토마스에게 기적은 자연 법칙의 위반이다. 하지만 흄과 같은 것은 아니다. 이들에게 기적은 단순한 자연 법칙의 위반이 아니라, 신의 능력에 의한 자연 법칙의 위반이기 때문이다. 자연 법칙은 대표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과 『형이상학』에 의하여 설명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서 처녀가 정자 없이 임신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우유가 실체 없이 잔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임신은 여자의 월경피에 남자의 정자가 열작용을 하여 가능한 것이며, 정자는 자기 속의 형상을 가지고, 열작용을 통하여 생명체라는 목적을 이룬다.14) 그리고 알베르투스의 발생론에서도 남성의 정자는 사지(四肢)의 형성과 영을 출현하게 하는 능력을 가진 것이며, 이것이 없이는 임신이 불가능하다.15) 하지만 알베르투스는 처녀의 임신, 즉 정자 없이도 임신이 가능한 경우를 든다. 바로 예수의 무염시태(無染始胎)가 그 경우이다. 또한 알베르투스는 실체 없이 우유가 잔존함도 인정해야했다. 바로 성체성사에서 제대 위의 빵과 포도주의 경우가 그 경우이다. 그리고 이를 알베르투스는 신의 능력에 의한 자연 법칙의 위반 혹은 자연 법칙을 넘어서는 것이라 했다.
토마스에게도 스승의 이는 문제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토마스는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아니지만, 이는 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는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앙에 의하여 보증된다고 한다.16) 그렇기에 토마스에게 제대 위의 빵과 포도주는 의미상에서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실재적으로 빵과 포도주라고 한다. 이런 가운데 토마스는 인간의 고유한 사고력으로 실체변화를 완전히 가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면서 이것은 신앙에 의하여 가지적인 것이라고 한다.17) 즉, 토마스도 성체성사의 현상을 완전히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힘들며 단지 신앙에 의하여 이것을 참이라고 할 뿐이라 한다. 알베르투스와 토마스 둘은 실체변화를 초-이성적 혹은 초-합리적 현상이라 인정하면서, 이는 신의 능력에 의하여 가능한 자연 법칙의 위반이라고 한다. 토마스는 신의 능력에 의하여 실체의 변화 이후에도 우유가 잔존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분명 자연 법칙에 적당한 것은 아니지만, 신의 능력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다.18) 토마스에 의하면, 이러한 신의 능력에 의한 초자연적 현상은 온전하게 이성에 의하여 합리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없단 말이다.19)
알베르투스와 토마스와 같은 이들에게 성체성사는 하나의 기적이다. 그리고 기적이란 일반적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이성이 이해하는 자연의 법칙과 다른 것이다. 처녀가 임신을 하고, 실체 없는 우유가 잔존하는 것,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고 바다가 갈라지는 것, 이러한 것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과 같은 이성의 영역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적 가운데 이성의 들어가는 마지막 지점은 신의 능력(potentia dei)이다. 즉 신의 능력은 절대적이며, 하지 못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신의 능력을 통하여 기적을 설명하는 것이 이성이 기적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마지막 선인 것이다. 이성이 신앙의 대상이 초-자연적 현상을 이해하는 마지막 선은 그것은 신의 능력에 의하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성과 신앙 만나는 접합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의 절대적 권능(potentia absoluta), 즉 신은 원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권능은 후기 중세 철학으로 이어진다.
3. 중세 후기 스콜라 철학에로
토마스와 알베르투스의 실체변화에 의한 성체성사에 관한 이해는 중세 후기에 이르러 새롭게 회의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위클리프와 루터와 같은 인물이 그러한 인물이다. 이러한 중세 후기 철학과 신학에서의 반동은 전통적인 실체변화에 관한 이론에서 기인한다.
토마스에 의하면 잔존하는 우유는 그 양(quantitas)에 근거한다. 빵과 포도주에 있어서 균열은 성체 가운데 남아 있는 빵과 포도주의 양이다. 즉 균열의 주체는 양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몸이 균열되는 것은 아니라고 토마스는 주장한다.20) 또한 빵은 부패한다. 그리고 잔존하는 빵도 부패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육체가 부패하는 것인가? 이에 관하여 토마스는 질료의 본연적인 것으로 양적 능력에서 기인한다고 한다.21) 양이란 이렇게 토마스에게도 매우 중요한 개념인 것이다. 물론 이는 알베르투스에게도 그러하다. 알베르투스는 이미 위에서 보았듯이 우유 가운데 제일이 되는 것을 양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양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성체성사에서 양에 관한 논의는 또 다른 철학적-신학적 문제를 야기한다. 결론적으로 옥캄이 이야기하는 이에 관한 논변은 신의 권능과 관련된 신학적 원리에 근거한다.22)
옥캄의 견해는 성체성사에 관한 당시 교회의 이론에 반대되는 것으로 대부분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반대되어지는 실체와 질로부터 양이 분리되는 실재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교황 요한 22세와 같은 이들은 이러한 옥캄의 견해을 비난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성체성사 가운데 빵과 와인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것이며, 빵과 와인의 실체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으며, 그들의 양은 남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양은 잔존한 것을 유지하게 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토마스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토마스는 빵의 우유를 지지하는 것으로 양을 든다. 그러나 옥캄에게 양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편 옥캄은 분명하게 성체성사에 관한 교회의 논의에 일치되었다고 주장한다. 옥캄도 교회의 가르침과 같이 제대 위 빵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실재적으로 그리고 참되게 임재되었다고 하기 때문이다.23) 그리고 그 역시 실체의 변화를 믿었다. 하지만 그가 회의한 것은 성서에는 축성 이후 빵의 실체가 남아있지 않다고 성서가 가르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성서의 지지 속에서 옥캄은 당당하게 스스로의 성체성사에 의한 논의를 전개한다.
3.1 성체성사에서 옥캄의 양에 관한 논의
신이 그리스도의 몸과 함께 빵의 실체를 보존할 수 있는지는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토마스는 이에 관하여 반대되는 것을 주장하였다. 토마스는 빵의 실체와 그리스도의 몸이 공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그에 동의할 수 없었다. 빵의 실체는 사실 남아있지 않지만, 신의 권능에 의하여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함께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옥캄은 토마스에 비하여 이러한 스코투스의 견해에 더 호의적이었다.24) 옥캄에게 신의 절대적 권능은 신이 원하는 한에서 못할 것이 없다. 옥캄은 신이 빵의 실체 없이 빵의 우유들을 잔존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옥캄에게 신은 말 그대로 절대적 권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25) 이러한 신학적 원리가 옥캄의 철학의 전반적 근거가 되며,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사상은 신학과 철학의 분리라기보다 신학의 원리에 근거한다고도 할 수 있다.
옥캄의 논의에 반대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기관적 몸이어야만 한다고 한다.26) 그런데 이러한 논의는 양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실재로 옥캄에게 있어서 양에 관한 논의는 논리학 저작뿐 아니라, 성체성사에 관한 논의에도 엄밀하고 분명하게 드러난다.27) 그렇기에 양에 관한 논의를 통하여 서서히 다가가야 할 것이다.
옥캄에게 양은 내포적 항이다. 옥캄의 언어-논리 이론에게 항에 관한 서술은 절대적이거나 혹은 내포적이거나 이다. ‘하양’은 절대적 항이다. 이것은 개별적 색을 지칭하거나 의미한다. 반면 ‘하얀 것’은 내포적 항이며, 이것은 인간과 같이 어떤 실재성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이 인간은 하얗다(이 인간은 하얀 것이다)”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인간이 하양이다”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인간이 색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하양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옮은 것이지만 말이다.28) 옥캄에게 양이란 내포적 항이며, 이는 어떤 실재성을 의미한다. 만일 양이 절대적 항이라면, 그것은 실체와 질의 그것으로부터 분리된 실재성을 의미하거나 지칭해야한다.29) 그러나 양은 내포적 항이며, 이는 실재성을 가진 것을 의미하는 것에 된다. 즉 양자와 같이 놓을 수 있는 것이 된다. 양과 관련되지 않은 양자가 있는가? 양자를 떠난 양이 있겠는가?
'양'과 '양자'(quantum, 양을 가지는 것)는 인칭 지칭(suppositio personalis)에서 엄밀하게 동의어이다. 마치 '인간'(homo)과 '인간성'(humanitas)이 인칭 지칭에서 동의어이듯이 말이다.30) “안현주는 인간이다”와 “안현주는 인간성이다”는 논리적으로 다르지만 인칭 지칭에서는 동일한 내용을 가진다.31) 옥캄에게 개별적인 인간이 아닌 인간성은 없다. 즉 인칭적이지 않은 인간성은 없다. 이를 다시 양과 양자에 적용해보자. 양과 양자는 인칭 지칭에서 동일한 것이며, 양자는 양을 가진 구체적인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옥캄은 실체가 본질적으로 양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양은 실체를 규정한다. 그렇다면 이런 논의를 염두해두고 성체성사에 관한 논의로 넘어가보자.
토마스에게 그리스도의 몸은 제대 위에서 실체의 방식에 따라 현존하지 양의 방식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여기에서 옥캄과 토마스의 갈림길이 읽혀질 것이다. 토마스에게 물질적 실체의 존재방식은 양을 통하여 제한적으로 현존하게 된다.32) 이런 양은 우유적인 것으로 빵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실체로 전환되고 실체 없는 우유로 남는다. 그리고 이 양은 다른 우유들이 근거하는 것, 즉 주체가 된다. 하지만 실체와 양에 관한 옥캄의 생각을 이해한다면, 실체가 변화하고, 양은 변화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는 것이 옥캄의 논의 속에서 문제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옥캄은 그리스도의 몸은 제대 위에 ‘분명하게’ 현존하지만, 그것이 ‘제한적으로’(circumscriptively) 있지는 않다고 한다.33) 제한적으로 있지 않다는 것은 무엇인가? ‘제한적으로’이란 것은 중세인들에게 물질적인 양과 관련된다. 양이란 토마스와 같이 장소적 제한과 항상 같이 하기 때문이다. 옥캄에 반대하는 많은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형태와 제한적으로 존재하는 기관적 몸(organicum)으로 제대 가운데 있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에 옥캄은 면도날을 들이댄다.
옥캄에게 양은 실체를 지시한다. 그러나 육체적 실체가 양자인 것은 그에게 필연적인 것도 아니며 그 자체로 정당한 것도 아니다. 이는 형태(figura)에 관한 논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형태는 내포적 항이며, 형체(형태를 가지는 것)는 실체를 지시하지만 육체적 실체가 형체인 것은 필연적이지도 그 자체로 정당하지도 않다. 그 이유는 신의 절대적 권능에 기인한다. 신은 양 없이 그리스도의 몸을 현존하게 할 수 있다. 신은 그의 절대적 권능으로 실체 없이 우유를 잔존하게 할 수 있다.34) 신은 이렇게 양 없이도 질을 잔존하게 할 수 있다. 제대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몸은 옥캄에게 양자도 아니고, '제한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는 정신적 실체의 형식으로 '분명하게' 현존하고 있다.35)
기존의 이론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의 기관적 몸으로 제대 가운데 있다. 그러면서 양은 그리스도의 몸과 관련 없는 우유적인 것이며, 다른 모든 우유들의 주체이다. 여기에서 옥캄의 눈에 거슬리는 것은 양과 실체 사이의 관계이다. 분명 누누이 말했지만 기존의 이론에 의하면 양은 실체가 아니다.36)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논의가 무리 없이 전개되어질 수 있는 것인가? 혹시 옥캄이 그 토록 싫어한 필요 이상의 그 무엇이 더해진 것은 아닌가? 이제 옥캄에 관하여 본격적으로 논의해보자.
3.2 『임의토론집』에서 성체성사에 관한 논의
왜냐하면 양(quantitas)과 실재적으로 동일하지 않은 것과 양 가운데 주체적으로 실존하지 않는 것 그리고 양의 주체가 아닌 것은 양자(quantum) 그 자체가 아니다.37)
여기에서 옥캄은 양과 양자에 관한 이야기한다. 한마디로 양과 양자는 실재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양자의 형식으로 제대 가운데 있다면 문제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스도의 몸이 양자의 형식으로 제한적으로 존재하면서 양으로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가? 적어도 옥캄에게는 불가능하다. 이미 논의한 양과 양자에 관한 논의를 상기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제한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양자로 존재함과 관련되는 것이다. 기관적 몸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양자로 존재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존의 이론에 의하면 양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기존의 이론은 양자에 관한 논의에서 옥캄에게 무엇인가 부족했을 것이다.
주된 논의에서 나는 모든 연장을 가진 질은 참으로 양이라고 답한다. 이는 실체와 질들 사이를 중계하는 것으로 놓여지는 양자의 종류가 아니다. 그러나 대신 그 자신의 속성과 본질적 양에 의하여 양이다.38)
옥캄은 질을 그 자체의 본질적 부분에 의하여 연장을 가진다고 본다. 그리고 이는 그 자체로 분리된 어떤 절대적 존재에 의하여 그러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그런 각각의 질은 양자이며, 양이다.39) 여기에서 옥캄은 스코투스와 토마스를 겨냥하고 있다. 이들은 양을 축성 이후 실체가 없이 잔존하는 우유의 주체라고 보았다. 그러나 옥캄에게 양은 질의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연장을 가진 질은 진정 양이라고 한다. 질은 오히려 그 자체의 본질적 부분에 의하여 연장을 가지며, 이러한 질은 그대로 양자이고, 양이라고 한다.
이런 이유에서 옥캄은 양을 실체와 그 질 사이를 중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양은 실재로 연장을 가진 질이며, 연장을 가진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옥캄은 질을 어떤 식으로든 동일한 장소 가운데 다른 것(양)으로부터 구별되어지지 않는다고 한다.40) 이런 옥캄의 논의는 기관적 몸으로 제대 가운데 존재하지만 양과는 무관하다고 하는 이론에 대하여 면도날을 들고 필요 이상으로 늘어난 것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신은 그의 절대적 능력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옥캄은 실체변화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 속에서 무리하게 만들어가는 이성의 성체성사 이해에 의하여 일어나는 일부 필요 이상의 것을 제거함으로 논리적 경제성을 확보하려 한다.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에 의한 중세인들은 우유는 실체에 의하여 유지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많은 후기 중세철학자들에게도 그렇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성체성사에서 무너진다. 이는 성체성사를 논의하는 것에 어려움을 제시하게 된다. 이러한 어려움은 중세 철학자와 신학자들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다. 옥캄과 함께 후기 중세 철학의 대표격인 뷔리당은 신의 절대적 권능에 의하여 우유들이 실체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실체 없이 잔존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논의가 어려운 것은 실체는 스스로 존재하지만, 우유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41) 이에 관하여 전통적 견해에 의한 학자들은 우유 없이 실체가 신의 절대적 권능에 의하여 존재한다고 하면서, 그때 제대 위의 그리스도의 몸은 제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제한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양자로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은 양을 가지지 않는다고 한다. 양은 우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우유는 실체 없이 있는 것이며, 그 가운데 양은 실체 없이 잔존하는 질과 같은 것의 주체가 된다고 한다.
이러한 논리에 관하여 옥캄은 양을 가지는 양자는 그의 인칭 지칭에 의하여 양과 같은 의미이며, 이는 곧 연장을 가진 실체를 의미하며, 또한 연장을 가진 질을 의미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도식은 분명하게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중세의 전통적 이해와는 사뭇 대조적인 것이다. 이렇게 옥캄은 지도리에 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벗어나려 한다. 그리고 그는 그 이후 일어난 아리스토텔레스 벗어나기의 길을 열어준다.
3.3 옥캄 이후 성체성사
옥캄과 같은 견해는 당시 유사한 형태를 가진다. 예를 들어 두란두스(Durandus)와 같은 이들이 있었다. 두란두스는 그리스도의 몸이 그의 양과 함께 제대 위에 현존한다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이는 신에게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두란두스의 사고는 옥캄과 비교해 볼 때 매우 흥미로운 것이다.42) 이렇게 후기 중세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 속에서 성숙된 전통적 견해에 관해 벗어나기를 시도한다. 두란두스와 옥캄 등과 같은 전통에 관한 벗어나기는 후에 위클리프와 루터 등에 이르게 된다. 루터의 공재설(Konsubstatiationslehre, doctrine of consubstantiation)이 그것이다. 이는 간단하게 빵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실체와 공존한다는 것이다.43) 루터는 실체 없이 우유가 존재한다고 하는 실체변화는 성서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으며, 공중에 매달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44) 이러한 루터의 논리는 옥캄에 의하여 제기된 문제제기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옥캄은 그리스도의 몸이 제대 위의 빵에 양자로 실존하지만 분명하게 실존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형식은 정신적 실체의 형식으로 그렇다고 한 것이다. 연장을 가진 물질적 실체는 연장을 가진 질과 같으며 이는 곧 양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은 양자고 있지 않으며 정신적 실체로 ‘제한적’이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존재한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루터의 논의는 실체 혹은 질의 그것으로부터 분리된 존재성으로 양을 거부한 옥캄의 연장선에 있단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4. 아리스토텔레스 벗어나기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를 읽는 하나의 눈을 제시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벗어나려는 이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중세 후기 철학에서 일어나는 아리스토텔레스 벗어나기도 대부분 아리스토텔레스 새롭게 읽기에서 시작된 것을 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 중세 후기 많은 철학자들은 전통적 해석에 근거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벗아나려 한다. 이는 성체성사에 관한 논의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근거한 전통적 논의의 이성과 신앙의 종합은 새로운 종합을 지향하게 된다. 가장 합리적으로 혹은 이성적으로 신앙의 사실을 이해하기 위하여 논리적 경제성을 지향하게 되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존재론의 논의를 제거하고, 신의 절대적 권능에 의존하게 된다. 이것이 기적적 현상에 관하여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노선이라 여긴 것이다. 헤겔의 역사 철학의 도식으로 중세를 이해하려는 경향에 이러한 논의는 새로운 이해의 길을 열 것이다. 교부는 이성의 우위이며, 13세기는 이성과 신앙의 종합이고, 그 이유는 이에 관한 반작용으로 이성과 신앙의 분리라는 도식으로 중세를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후기에도 옥캄과 같은 철학자는 나름으로 가장 합리적인 길을 찾아 나섰고, 이것은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 한계선의 넘어 선 것은 신의 절대적 권능에 의하여 설명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옥캄과 같은 이들의 아리스토텔레스 벗어나기는 이성과 신앙의 새로운 종합을 위한 대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 L.M.De Rijk, Jean Buridan (c.1929-c.1360) Eerbiedig ondermijner van het aristotelisch substantie-denken (Koninkijke Nederlandse Akademie van Wetenschappen Noord-Hollandsche, Amsterdam-New York-Oxford-Tokyo, 1994).
2) 요셉 드 프리스, 『스콜라 철학의 기본 개념』, 신창석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1997), 62쪽.
3) Aristoteles, Topica I, c.9; 아리스토텔레스, 『변증론』, 김재홍 옮김 (서울: 까치네, 1998), 32쪽.
4) Thomas Aquinas, De ente et essentia c.2.
5) 요셉 드 프리스, 『스콜라 철학의 기본 개념』, 63쪽.
6) L.M.De Rijk, Jean Buridan (c.1929-c.1360) Eerbiedig ondermijner van het aristotelisch substantie-denken , p.17.
7) Albertus Magnus, de sacramentis, tractatus V, de eucharistia, I, q.3, a.4, ad 1. (61, 44-45) 필자가 본 논의에서 사용하는 알베르투스의 판본은 Opera omnia Tomus XXVI, (Aschendorff, Muester Westf.: 1958)이며, 괄호 안에 번호는 사용 판본의 쪽수와 줄 번호이다.
8) Ibid, I, q.3, a.4, ad 2. (61, 47-49)
9) Ibid., I, q.3, a.4, ad 5. (62, 14-17)
10) 이 양 개념은 이후 옥캄에 이르러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게 된다. 양이란 분명 알베르투스도 이야기 하였듯이 우유 가운데도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11) Ibid., I, q.3, a.2, ad 4. (60, 5-7)
12) 브라이언 데이비슨, 『종교철학 입문』, 안형관, 이태호 옮김 (대구: 이문출판사, 1996), 276-277쪽.
13) 데이비드 흄, 『기적에 관하여』, 이태하 옮김 (서울: 책세상, 2003), 18-19쪽.
14) Aristoteles, Metaphysica VII, c.9, 1034a 30.
15) Albertus Magnus, Quaestiones super de animalibus XV, q.7, (271, 80-84).
16) ST., III, q.75, a.1, c.a.
17) Ibid.
18) Ibid., III, q.77, a.1.
19) Ibid., III, q.76, a.7.
20) Ibid., III, q.77, a.7.
21) Ibid., III, q.77, a.6.
22) A.Maurer, The Philosophy of William of Ockham (Toronto: PIMS, 1999), p.41.
23) William Ockham, Tractatus de corpore christi 2 (OTH 10, 91-92).
24) A.Maurer, The Philosophy of William of Ockham, p.44.
25) Ps. Ockham, A Compendium of Ockham's Teachings, trans. J.Davies (New York: The Franciscan Institute, 1998), pp.7-8.
26) G.Buescher, The Eucharistic Teaching of William Ockham (Washington, D.C.: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50), p.89. 이 저서는 옥캄의 성체성사와 관련된 철학적 논의와 신학적 논의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길을 열러줄 것이다.
27) E.Moody, The Logic of William of Ockham (New York: Russell & Russell, 1965), p.145.
28) William Ockham, Summa logicae I, c.10 (OPH 1, 35-38).
29) G.Buescher, The Eucharistic Teaching of William Ockham, pp.68-69.
30) E.Moody, The Logic of William of Ockham, p.150. 하지만 분명하게 옥캄은 구체 명사과 추상 명사를 구분한다.
31) 박전규, 『윌리엄 옥캄의 생애와 사상』(서울: 형설출판사, 1983), 170쪽.
32) ST., I, q.7, a.3; I, q.18, a.2.
33) William Ockham, Quodlibeta 4, q.33. 이 저작에 관한 영어 번역은 다음의 것을 참고하였다. William of Ockham, Quodlibetal Questions vol.1 Quodlibets 1-4, trans. A.Freddoso (New York&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91).
34) William Ockham, Tractatus de corpore christi 13 (OTH 10, 115-116).
35) G.Buescher, The Eucharistic Teaching of William Ockham, p.75.
36) 요셉 드 프리스, 『스콜라 철학의 기본 개념』, 62쪽.
37) William Ockham, Quodlibeta 4, q.33.
38) Ibid.
39) Ibid., 4, qq.19-24.
40) Ibid., 4, q.33.
41) L.M.De Rijk, Jean Buridan (c.1929-c.1360) Eerbiedig ondermijner van het aristotelisch substantie-denken, pp.26-27.
42) G.Buescher, The Eucharistic Teaching of William Ockham, p.92.
43) 다니엘 밀리오리, 『기독교 조직신학개론』, 장경청 옮김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4), 313-314; A.게르켄., 「오늘날 성체성사론에서 일어난 변화에 관한 교의학적 반성」, 『가톨릭 신학과 사상』25(1998), 241쪽.
44) B. Davies, The Thought of Thomas Aquinas (Oxford: Clarendon Paperbacks, 1992),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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