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대학과 인문학부 그리고 교수 시제 브라방1)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1.들어가기
필자의 본 연구는 13세기 대학과 인문학부 그리고 교수들의 학문 자유 탐구에 그 목적이 있다. 13세기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시대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중세 무슬림으로 넘어가 다시 유럽으로 넘어온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13세기 철학을 더욱 더 풍성하게 하였다. 돌아온 그리스의 철학은 더 이상 그저 그리스 철학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이븐 루시드와 이븐 시나 등 중세 무슬림의 대표적 철학자들이 함께 동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중세 무슬림 철학자들은 유럽 철학계의 중심에 서게 된다. 당시 대표적 철학자들은 모두가 이들 두 철학자의 영향 속에서 스스로의 철학을 일구어갔고, 이는 그 이후 서양 철학의 큰 흐름이 된다. 이러한 새로운 철학적 소재뿐 아니라, 13세기 철학은 철학의 논의마당 또한 새로운 틀을 가지게 된다. 바로 대학이 성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대표적인 철학자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대학에서 스스로의 철학을 다져갔다. 대학은 철학자들의 공간이며, 철학자들이 철학자로 존재할 수 있는 성벽과 같은 공간이었다. 특히 인문학부는 철학의 전문적인 수련의 장소, 즉 현대적 의미의 철학과로 기능하였다.
필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선 당시 대학을 다루고, 이어서 인문학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표적인 인문학부의 교수인 시제 브라방을 다룰 것이다.2)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우선은 13세기 대학이 외부 권력과 다툼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의 위상을 유지하였는지, 이어서는 당시 대학 내부의 내적 갈등을 살피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로 얻게 된 것은 13세기와 그 이후 중세철학의 이해에 있어서 또 다른 역사적 이해의 측면을 제공해 줄 것이다. 즉 단지 이론만이 아니라, 그 이론이 생겨난 보다 근본적인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본 연구는 개별적 철학자의 철학적 이론을 분석하는 것 보단 대학과 인문학부 그리고 대학의 교수들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를 그 방법론으로 취할 것이다,
2.13세기 대학의 내부
2.1 대학의 탄생과 그 구성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유능한 스승들이 있는 곳에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이황의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많은 유생들이 안동으로 길을 떠나 모이듯이, 그렇게 12세기 유럽의 지식을 갈구하는 젊은이들은 유명한 스승에게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모인 이들은 하나의 집단(societas)을 일구기 시작했다. 즉 사설학교가 성립되었다. 물론 당시 교육기관이 이러한 사설학교만 있던 것은 아니다. 11세기 후반부터 존재하던 대성당학교가 있었다. 대성당학교는 인문학과 성서 등을 교육하는 수준 높은 지적 공간으로 존재하였다. 그리고 12세기까지 이들 대성당학교가 유럽 사유의 중심이었다. 예를 들어 초기 보편자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샤르트르 학파의 근거지가 바로 샤르트르 대성당학교가 아닌가 말이다. 이들 대성당학교는 당시 교회가 성직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즉 대성당의 지원 속에 있었다. 이러한 대성당학교에 비하여 사설학교는 철저하게 선생 개인의 능력과 명성에 의존하였다.3) 물론 이들 사설학교는 대성당학교에 비하면 외부의 지원이 없었다. 학생들에게 받는 수강료나 혹은 매우 유능한 선생이라면 성당에서 지원 받은 약간의 생계비가 재원의 전부였다.
당시 상당수의 유능한 선생들이 파리와 옥스퍼드와 같은 특정의 도시에 몰려 시작하였다. 이러한 선생들이 있는 곳엔 학생들이 온 유럽에서 몰려왔다. 그러나 파리엔 자국인 뿐 아니라, 독일, 영국 등 온 유럽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사실 13세기 초 파리대학엔 프랑스국적의 학생이 아니라, 대부분 외국인 학생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렇게 온 유럽에서 유능한 선생의 가르침을 듣기 위하여 도시로 몰리자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였다. 당시 학생과 선생들은 도시 내부 외국인으로 어떤 법적 보호막도 없이 살아가야 했다. 당시 토착민들에게 이들은 그저 외국인에 지나지 않았다. 사설학교는 당시 외부 세력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다. 1155년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황제가 볼로냐의 사설학교들에 특별한 보호 조치를 했다지만, 여전히 이들은 그저 개별적으로 분리된 사설학교일 뿐이었다. 결국 1200년 도시와 선생학생 집단 간에 분쟁이 일어난다. 이에 당시 왕인 필립왕은 선생들이 파리를 모두 떠날 것을 염려하여, 이들에게 특권을 준다. 이것이 1200년이고, 흔히 많은 교과서와 역사책은 이 날을 파리대학의 설립연도라고 하지만, 사실 대학은 이미 그 이전에 서서히 만들어져가고 있었다. 그 과정을 보자.
당시 많은 사설학교들은 그들이 당시 토착세력인 지주, 지역주교, 지역민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며 학문에 전념하기 위하여 당시 상공업에서 취하던 길드, 즉 조합의 방식으로 연대한다. 그러면서 이들 사설학교는 하나의 큰 조합(guild)이 된다. 바로 대학(universitas)인 것이다. 당시 길드가 상공업을 지배하였듯이, 새롭게 등장한 학문의 길드, 즉 대학은 곧바로 학문계의 지배자가 된다. 이러한 길드의 영향은 길드의 장인을 가리키는 magister란 명칭이 대학의 교수를 가리키는 단어가 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학은 이제 더 이상 어떤 개별 선생의 제자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으로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즉 대학은 과거 사설학교와 질적으로 다른 조합의 형태를 가지게 된 것이다.
우선 대학의 공부는 인문학부에서 시작된다. 모든 대학의 조합원들은 인문학을 공부해야만 한다. 파리대학의 경우 인문학부에서 6년을 공부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서 인문학부의 교수가 될 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문학부의 학위를 마치면, 인문학부 교수에 남아 철학 연구를 하거나, 상위학부인 신학부, 의학부, 교회법학부, 민법학부로 진학했다. 하지만 1219년 당시 교황인 호노리우스 3세가 민법학부를 세속적이라는 이유로 폐지한 이후 파리대학은 신학부와 의학부 그리고 교회법학부만이 남게 된다.4) 1215년 파리대학의 상황을 살필 수 있는 꾸르송의 로베르투스의 기록인 『십자가의 하인』에 의하면, 인문학부는 14세 무렵 입학하여 20세가 되기 전엔 누구도 교수가 될 수 없었다. 그 이전 인문학부에서 6년간 인문학을 공부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수가 된 이는 적어도 2년 동안은 강의 유지를 서약해야만 했다. 그리고 20세에 인문학부를 마치고 신학부에 진학하여 15-16년 강의를 듣고 나서 최소 35세는 되어야 교수가 될 수 있었다. 교과과정의 첫 6년은 단순 청강생이며, 그 뒤 4년은 성경을 익히고, 남은 2년은 롬바르두스의 『명제집』을 연구하였다. 이렇게 신학부를 마치게 된다.5)
우선 인문학부는 외국인 집단이 스스로의 학문 자유를 유지하기 위하여 만든 조합의 성격이 드러나듯이 출신 국가에 따른 지역단(natio)으로 구분되었다. 예를 들어, 파리대학은 프랑스, 노르망디, 피카르디, 영국 지역단이 구분되었다. 각 지역단의 대표가 학생감이 되며, 네 지역단의 학생감의 위엔 인문학부의 학장(rector)이 있었다.
상위 학부인 교회법학부와 의학부 그리고 신학부는 학장과 전담교수(regens)로 그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학의 구성원인 4개 학부가 함께 모여 공통의 것을 토론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또한 이들은 각각 학부와 지역단 별로 서로 다른 성당과 수도원에 모였다. 그렇기에 대학이란 이름으로 모인 이 네 개 학부는 매우 느슨한 조직이었다.6)
비록 인문학부가 하위 학부일지라도 인문학부의 학장이 13세기 동안 대학의 실질적 대표, 즉 조합장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인문학부의 학장은 재임기간이 3개월에 지나지 않았지만, 재임이 가능한 직책이었다.
대학이란 조합은 1200년 프랑스 왕에 의하여 그 특권을 인정받음으로 안정적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인정받는다. 하지만 여전히 외부에 존재하는 두 세력, 정부권력과 교회권력은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
2.2 대학의 존재이유, 학문의 자유.
대학의 존재이유는 처음부터 자신들의 권리를 유지하며, 학문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조합이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교수와 학생들이 선택한 생존 방법이었다. 특히 13-14세기 대학이란 조합은 설립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이며, 초심을 유지하려는 교수와 학생들의 노력이 변함없이 이어지던 시기였다. 이들은 어떠한 외부의 간섭으로부터도 자유롭기를 원했다. 그것이 그들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몇 가지 사건을 살펴보자. 우선 옥스퍼드대학의 경우이다.
1209년 옥스퍼드 대학 인문학부에서 수학하던 이가 살인을 저지르고 도주하게 된다. 이에 옥스퍼드시의 시장은 이 도망자와 함께 생활하던 다른 3명을 함께 체포한다. 그런데 이들 3명은 살인에 관하여 알지 못 했다. 그러나 곧 무고한 이들은 교수형을 당하게 된다. 이에 분개한 대학의 교수학생조합은 연합하여 옥스퍼드를 떠난다. 그리고 이들의 일부는 캠브리지로 또 일부는 리딩(Reading)으로 자리를 옮겨 학업을 이어갔다. 이들이 옥스퍼드시를 단체로 떠나는 것은 시정부 당국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주었다. 우선은 상당한 구매력을 가진 인구의 상실을 의미했고, 이는 시재정과 시민 경제에 치명적이었다. 결국 시 당국은 대학에 사죄하고, 오히려 대학에 매년 일정 금액의 연구비를 지원하며, 가난한 학생을 돕는 등 적극적으로 대학을 지원한다. 그때야 사태는 진정되게 된다.7) 이러한 사태를 통하여 떠난 일부 선생과 학생은 캠브리지 일원에 남아 캠브리지대학의 초석을 다진다. 그리고 남은 학생들은 옥스퍼드대학에 돌아와 시정부의 지원 속에서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사건 속에서 우린 대학의 구성원들이 얼마나 완강하게 스스로의 자치권을 유지하려 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외부로부터 받아드리는 억압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차라리 포기하고 다른 곳에 가서 새롭게 조합을 구성하는 것을 선택하지 외부 세력의 부당한 간섭을 수용하지 않았다. 만일 대학이란 조합이 외부로부터 스스로의 구성원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대학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옥스퍼드대학뿐 아니라, 파리대학 역시 마찬가지이다. 1229년 파리대학 학생과 정부 공권력인 경찰이 유혈 충돌하게 된다. 이러한 충돌 가운데 경찰의 손에 대학의 구성원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에 대학은 2년간 총파업을 단행한다. 이들은 2년간 강의를 하지 않았으며, 1231년 당시 왕인 루이왕이 대학의 독립성을 보장함으로 2년 만에 해결된다.8) 여기에서도 파리대학은 20년 전 옥스퍼드대학의 구성원과 같은 생각에서 외부와 대항하였다. 파리대학의 구성원 역시 대학의 존재 이유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대학이란 외부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학문 연구에 충실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조합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한마디로 외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혹은 자치권이 없는 대학이란 존재의 이유를 상실했다 본 것이다. 즉 있을 필요가 없다. 더 이상 학문 연구의 자유를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2.3 대학 학문 자유의 결실, 대헌장.
파리대학엔 조합원이 아니면서, 대학과 깊은 연관을 가진 존재가 있었다. 바로 총장(chancellor)이었다. 총장은 교황의 대리인으로 교수자격(licentia docendi) 수여 독점권을 가진 존재였다. 이러한 총장은 그가 원하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교수자격을 수여할 수 있는 독점권을 가졌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1246-1249년 파리대학 총장이었던 고티에의 논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지식이란 교황과 그의 대리자인 총장에 의하여 허락되는 것으로 교육의 열쇠는 교수들에게 그저 위탁되어지는 것이라 정의했다.9) 물론 총장이 중세 모든 대학에서 이와 같은 위상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옥스퍼드대학에선 파리대학의 인문학부의 학장이 조합장의 역할을 하듯이, 동료 교수들에 의하여 선출된 총장이 대학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파리대학의 총장은 조합원이 아니며, 교황의 대리자로 대학 외부에서 주어졌다. 반면 옥스퍼드대학의 총장은 파리대학의 인문학부 학장과 같이 조합원으로 대학의 일원이었다. 이것은 중요하다. 파리대학의 총장과 옥스퍼드대학의 총장은 모두 총장이지만, 그 위치는 분명하게 다르다.
옥스퍼드대학의 총장이었던, 그로세테스테는 본래 옥스퍼드대학에서 신학 강의를 하고 있었고, 이후 그곳의 총장으로 동료들에 의하여 선출되었다. 1235년엔 옥스퍼드 등을 관할하는 링컨 교구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교황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토마스 아퀴나스 등에 대한 견해에서도 당시 교황과 그 뜻을 달리하였다. 그리고 총장으로 그는 대학에 대하여 큰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마치 지금 미국대학의 이사장과 같이 학문적 자리는 아니었으며, 단지 대학 조합원을 보호하는 등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며, 결코 교과과정이나 연구에 개입하지 않았다.10) 요약하자면, 옥스퍼드대학의 총장은 대학 구성원에 의하여 선출된 구성원 내부의 인물이며, 대학을 보호하고 지원하지만 학문적 강제의 권한을 가지지 않은 직책이었다. 하지만 파리대학의 총장은 달랐다. 파리대학의 총장은 외부에서 주어진 인물로 교수자격을 통한 강력한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파리대학이 오랜 시간 가진 문제의 중심이 되었다.
항상 독점적 권력은 악용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1219-1223년, 1283-1284년, 1331-1332년 그리고 1384-1387년 사이 일어난 금전거래에 의하여 교수자격 남발에 대한 총장과 학생교수조합의 마찰을 보자. 금전거래에 의한 교수자격은 1215년 꾸르송의 로베르투스의 『십자가의 하인』에서도 확인되지만 대학의 초기부터 금지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 가장 빈번하게 다루어지는 마찰이 바로 이 금전거래와 관련된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을 이해하기 위하여 1384-1386년의 마찰을 살펴보자. 당시 총장인 요하네스(Johannes Blanchart)는 대학 구성원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학위를 독단적으로 부여한다. 이에 교수학생조합은 강력하게 대항하며, 앞으로 다루게 된 대헌장과 꾸르송의 로베르투스의 글인 『십자가의 하인』을 거론하며, 총장이 개인적으로 사사로이 학위를 부여함에 반론을 제기한다. 마침내 신학부의 젊은 교수인 36세의 페트루스 알리쿠스(petrus Alicus)는 이러한 총장의 행태를 학문적으로 비판하며, 이를 『파리 대학 총장에 반대하는 논구』라는 저술로 남긴다.11) 마찰은 금전거래 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유력인사의 추천으로 학위를 남발하는 경우이다. 1330-1332년 마찰을 보자. 당시 총장은 왕과 왕자 등과 같은 외부 유력 인사의 추천에 따라 의학학위를 남발한다. 이에 의학부는 총장의 행태는 학부의 고유권한과 전통에 대한 무시임을 주장하며, 반발하고 나선다. 이와 같이 당시 교수학생조합은 총장과 대립하며, 자신들의 고유한 학문의 자유를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들은 총장에게 독점적으로 주어진 교수자격의 독점권은 어떤 식으로든 제한받아야한다고 보았다.
1212-1213년 당시 총장인 칸델리스의 요하네스(Johannes de Candelis)는 자신의 권한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에 교수학생조합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선다. 이 강력한 마찰은 대학의 역사상 매우 중요한 결과를 낳는다. 즉 총장의 권한이 제한받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교황인 이노센트 3세는 이전 파리대학의 교수 출신으로 어쩌면 내심 대학에 대한 향수가 있을 것이다.12) 그렇기에 그는 당시 총장이 아닌 교수학생조합의 편에 서게 된다. 우선 비록 총장이 그가 원하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교수자격을 허락할 수 있지만, 자연학자와 같은 경우엔 그 전문가인 교수들의 승인이 꼭 있어야만 한다. 또한 인문학부 교수자격의 학위 심사에선 6명교수의 동의가 필요한데, 3명은 인문학부 자체에서 그리고 3명은 총장이 지명하였다. 만일 총장이 교수들의 의견을 무시한다면, 교수들은 교황에게 청하여 학위를 줄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신학부에 있어서는 여전히 총장이 교수들의 검증 없이 그가 원하는 이에게 교수자격을 허락할 수 있었다.13) 그러나 분명 이는 총장의 권한이 축소되는 전환점이 된다. 1222년 파리대학의 학생이었던 소르본의 로베르투스는 총장이 개인적으로 모든 학위 준비자를 심사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며, 이는 전문가인 교수들에 의하여 이루어져야한다고 했다.14) 이러한 기록에서 보이듯이 당시 대학은 총장의 독점적 권력에 대하여 조합의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대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1231년 4월 13일 중세 대학의 역사상 기념비적인 결과물인 ‘대헌장’이란이 별명을 가진 교령 『학문의 어버이』가 교황 그레고리 9세에 의하여 반포됨으로 드러난다. 대헌장이란 별명이 보이듯이 이는 영국에서 일어난 『대헌장』에 준하는 대학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대헌장은 1212-1213년의 것보다 더욱 더 엄밀하게 총장의 권한을 제한했다. 우선 신학부과 교회법학부에 있어서도 교수자격을 원하는 이는 3개월 전에 그에 관한 생활과 학식 등이 담긴 자료를 신학부 교수들의 검증을 걸쳐 총장에게 주어지는 방식으로 변화된다. 총장의 권한은 더욱 더 제한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신학부와 교회법학부를 비롯한 인문학부까지 총장의 권한은 줄어들고, 교수학생조합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2.4 대헌장의 파기와 조합의 위기
『학문의 어버이』가 발표되고, 몇 년이 지나 새로운 교황과 대학의 마찰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13세기 중반 이후 대학의 가장 대표적이며 현실적인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이러한 마찰은 파리대학에선 1252-1259년, 1265-1272년 그리고 1282-1290년 때 일어나며, 옥스퍼드대학에선 1303-1320년과 1350-1360년 때 일어났다.15) 이러한 사건의 시작은 탁발수도자의 학내 진출에서 시작된다. 처음부터 이들의 학내 진출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다. 13세기 초 1220년 오히려 대학은 탁발수도자를 수용한 것으로 교황 호노리우스 3세로부터 높은 평을 받았다. 그런데 왜 대학은 1252-1259년 사이 탈발수도자의 학내 진출에 대하여 그렇게 강하게 대항하였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 시대의 대학과 교황 사이 일종의 권력 관계를 이해해야한다.
대학의 교수인 성 아모르의 윌리엄은 탁발수도자가 초래한 대학의 위기를 강하게 주장한다. 간단하게 논의의 핵심엔 대학은 조합이며, 이 조합은 조합원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탁발수도자들은 스스로 조합원이길 거부하면서 동시에 대학의 구성원이길 원했다. 성 아모르의 윌리엄은 우선 그들이 학칙을 위반하였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신학학위를 받았지만, 문제는 인문학부에서 학위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 대학의 학칙에 의하면 신학학위를 하기 위해선 우선 인문학부에서 학위를 받아야한다. 또 이들은 1229-1231년 그리고 1253년 대학이 외부의 세력에 대항하여 파업을 했을 때도 이에 참여하지 않았다.16) 대학은 외부의 세력에 대항하여 학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의 규율을 가지고 결성된 조합이다. 그런데 1229년 이후 탁발수도자들은 외부 세력에 대항하여 설립되었다는 대학의 존재 이유에 충실하지 않았다. 거기에 이들은 조합 자체 규율마저 무시해 버린 것이다. 이에 성 아모르의 윌리엄은 이들이 대학 내부에 혼란을 야기하는 존재임을 주장한 것이다. 당시 교황 이노센트 4세는 이러한 주장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교황은 1254년 7월 4일 탁발수도자들에게 대학의 학칙을 준수하라고 명령했다. 이어서 11월 20일 당시 도미니코수도회와 프란치스코수도회, 두 탁발수도회의 특권을 제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노센트 4세는 곧 죽게 되고, 프란치스칸 수도회의 보호자이며, 추기경인 인물이 교황으로 선출된다. 바로 알렉산더 4세이다. 그는 중세사 연구가들에 의하여 중세 대학의 방해자로 규정된 인물이다.17) 그는 이미 교황 이전 시기부터 탁발수도회와 관련되어 있었고, 그의 눈에 전적으로 자신에게 충성하는 탁발수도자들은 대학을 제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선행자인 이노센트 4세가 진행하던 모든 것을 중지한다. 그리고 1255년 4월 14일 새로운 교서 『생명의 나무』를 통하여 탁발수도자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선다. 하지만 알렉산더 4세는 당시 『학문의 어버이』 체계 속에선 탁발수도자를 합법적으로 학내로 진출시킬 수 없음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는 새로운 체계를 만든다. 『생명의 나무』를 통하여 알렉산더 4세는 다시 총장의 독점적 권력을 인정한다. 즉 대헌장인 『학문의 어버이』의 체계를 파기한다.
당시 총장인 하이메릭쿠스(Haimericus de Veire)는 대학 구성원인 성 아모르의 윌리엄과 같은 학내 강력한 반발로 인하여 소극적으로 교황의 편에 서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교서인 『생명의 나무』는 총장의 권한을 다시 강화시킨다. 그렇기에 당시 파리대학의 교수와 학생 조합에선 이를 ‘죽음의 나무’라고 부르며 강하게 반발한다.18) 강력한 반발에 대하여 교황은 다시 명령을 하여 총장의 권한을 강화시킨다. 우선 총장에게 그가 원하는 이라면 재속사제이건 탁발수도자이건 교수자격을 주라고 하며, 교수학생조합에겐 그들을 받아들이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말을 듣지 않은 학위준비자라면 거부해 버리라고 총장에게 명령한다. 그리고 하이메릭쿠스는 이에 고분고분하게 따른다. 교황 알렉산더 4세는 매우 강하고 빠른 속도로 이를 전개한다. 1255년 일련의 사건 이후 1256년 3월 3일 교황은 대학에 탁발수도자 토마스 아퀴나스를 신학부교수로 받아드리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교수학생조합은 매우 강하게 이를 거부한다. 우선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부교수의 최소 연령에도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꾸르송의 로베르투스의 『십자가의 하인』에선 14세는 되어야 인문학부에 입학이 가능하며, 적어도 6년은 수학해야 졸업이 가능하다. 그렇게 되어 20세는 되어야 인문학부의 교수가 될 수 있으며, 그 후 적어도 15-16년은 공부해서 아무리 적어도 35세는 되어야 신학부의 교수가 될 수 있다. 이것이 파리대학의 학칙이다.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에 적합하지 않았다. 거기에 1년 사이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과정 속에서 교황의 독선에 대학은 강하게 반발한다. 대학의 조합원은 대헌장의 체제를 지지하며 새로운 체제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황에 의하여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신학부교수로 대학으로 보내어진 보나벤투라는 당시 대학의 반발과 그러한 반발의 중심에선 성 아모르의 윌리엄과 논쟁을 벌인다.19) 예를 들어 1255년 2월 10일 윌리엄은 친-탁발수도자 정책으로 대학에 강제하려는 교황에게 논박의 글을 적는다. 이에 보나벤투라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응수하는 글을 적는다.20) 많은 윌리엄은 이들 탁발수도자들의 존재에 대하여 매우 강력하게 비판한다. 그들은 혼란을 야기하는 존재로 본 것이다. 이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탁발수도자들은 스스로 가난을 결단한 존재로 십자가의 길을 가는 이들이며, 오히려 가난에 반대하는 이들이 잘못이라 비판한다. 그리고 오미이러..등을 비롯한 많은 연구가들이 여기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점을 탁월하다고 한다.21) 르 고프와 같은 많은 중세사 연구가들이 지적하듯이 문제의 핵심은 조합원으로 존재하지 않는 탁발수도자에 있었다. 당시 대학의 구성원인 조합원들, 교수와 학생 사이엔 일종의 수강료가 있었다. 그것은 본래 대학이 사설학교의 시절에서 내려온 하나의 전통이기도 했다. 또한 이것은 12세기 교황 알렉산더 3세에 의하여 그 원칙이 정해진 조합의 내적 규칙이었다. 수업료는 교수들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특히 교수조합과 학생조합에서 학생조합이 더 활발하던 이탈리아의 대학에선 수업료가 학생이 교수들을 견제하는 수반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교회로부터 당시 세속적 학문으로 여겨지던 학문인 인문학의 교수나 볼로냐대학의 민법학부 교수들은 당시 신학부교수들에 비하여 교회로부터의 성직록에서 제한이 있었다. 당시의 교수들은 성직록을 받거나 수강료를 받거나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자신의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다. 하지만 성직록과 수강료 둘 다 휘하지는 못하며, 이 가운데 하나만을 취해야만 했다. 그런데 교회로부터 지원이 없는 이에게 수강료는 대학 내에서 그가 생존하며 학문을 이어가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것은 많은 이들이 오해하듯이 악덕스러운 행위나 부도덕적 경제행위가 아니었고, 학생들도 이를 인정하였다. 그렇기에 파리대학을 비롯한 당시 많은 인문학부의 교수들 가운데 성직록이 없는 이들은 개별적으로 수강료는 어떤 양심적 문제도 없이 받았다.22) 그리고 이일은 조합의 존재 이유에도 부합하였다. 경제적 이유로 학문은 중단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대학의 교수에 대한 지원의 경우 이탈리아의 파두아 대학에선 앞선 유능한 대학을 앞서기 위하여 시정부가 나서서 급여를 주며 우수한 교수를 유치하려 했다. 이와 같이 교수들은 수강료로 학생에게 구속되는 것에서 자유롭기 위하여 외부의 연구비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교수들도 학생들이 선출해야만이 교수가 됨으로 완전히 조합을 떠나 경제적 자유를 누리진 못했다. 학생들의 경우도 가난으로 배우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가난한 이들은 수강료를 내지 않아도 되었고, 많은 경우 성당 등의 지원이나 개별적 후견인 등의 지원 속에서 학업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즉 대학 내부의 수강료는 대학 내부의 자체적 교율 속에서 원활하게 돌아갔다. 당시 이들을 비판하듯이 이들이 가난의 삶을 거부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탁발수도자들과 같이 수강료를 무조건 받지 않는 것은 대학 내부에서 수강료에 의존하는 교수들의 학문 자유에 치명적이었다. 그렇기에 토마스 아퀴나스와 보나벤투라 등의 반론은 현실적으로 큰 호감을 가지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가난이나 신학적 문제로 대학의 조합원이 탁발수도자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탁발수도자들이 대학의 구성원이길 원하면서 조합원이길 거부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상황에서 이 당시 가장 강력하게 교황에게 대항한 학부는 인문학부였다. 그들은 스스로의 학문인 철학을 아주 고유한 지적 작업으로 이해했다. 그렇기에 다른 비전공 총장이나 교회와 국가 권력에 의하여 교수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실재로 이들은 지난 13세기 초 1212-1213년과 대헌장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권한을 강화하여 갔고, 자신들만의 고유의 심사 제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들은 파리대학에서 신학부와 교회법학부와 다른 성격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대학의 누구보다 대학의 자율권을 위하여 투쟁하였고, 그런 가운데 그들의 대표인 인문학부의 학장은 대학을 실재적으로 대표하는 인물로 부각되게 된다.
대헌장의 파괴와 1250년 반발은 토마스 아퀴나스 수용 명령이 내려진 이후로도 오랜 시간 이어진다. 토마스 아퀴나스 수용 명령은 1256년에 있었지만, 그는 1257년에 가서야 취임강연을 할 수 있었고, 적어도 1259년에 가서야 파리대학의 혼란은 잠잠해 진다. 이러한 반발의 중심에 인문학부가 있었다.
3. 인문학부의 교수 시제
3.1 인문학부의 위상과 그 교수진
르 고프는 인문학부를 13세기 대학의 꽃이라고 한다. 사실 13세기 철학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중세 무슬림 철학의 유입이다. 아베로에스와 아비첸나는 새로운 고전이 되었다. 이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현장이 바로 인문학부이다. 많은 역사가들이 이들을 지금의 철학과라 부르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이들은 굳이 그리스도교 철학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가장 궁극적인 물음은 철학 바로 그 자체였다. 시제는 신앙과 이성은 다르며, 내가 안다는 사실과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서로 다르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23) 즉 인문학부의 철학은 신학부 등 여타 학부와 다른 고유한 영역이란 것이다.
당시 많은 이들은 인문학부의 영역이 신학과는 다른 고유한 영역을 가진다고 인정했다. 예를 들어 1212-1213년 총장과 교수학생조합의 마찰에서 교황은 총장이 신학부와 달리 인문학부의 교수자격 수여권한을 제한한다. 그 이유는 신학부가 성격상 성직자의 양성과 성경 그리고 『명제집』 등을 다루지만, 인문학부는 이와 달리 인간의 이성에 근거하여 문법학과 수학 등을 비롯하여 철학 일반을 다루는 것으로 교회의 권력이 그 진위와 공과를 심사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13세기 학문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다. 1212-1213년 교황 이노센트 3세의 관점에선 신학부의 신학과 인문학부의 철학은 서로 다른 영역을 가진다.
인문학부는 13세기 초, 적어도 1250년대 알렉산더 4세에 의하여 제한되기 이전까지 독자적인 학문적 위상을 가졌다. 이는 1231년 대헌장에서도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인문학부는 매우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이단이나 금지 된 이론들도 인문학부 내에선 상당히 유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당시 금지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자연학 저서들도 인문학부 내에선 읽혀졌고, 13세기 중엽엔 금지령이 사실상 그 의미를 상실하였다. 그리고 돈이 드는 박사학위는 물론이고 학사 학위를 하지 못한 이들도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으며, 시대의 도전적인 질문에 대하여 고민한 당시 유럽의 지적 공간이 바로 인문학부였다. 이를 자크 르 고프는 당시 인문학부를 교회와 국가의 권력에서 가장 자유로우며, 질서 위계를 벗어나 있으며, 가장 도시 및 민중의 삶에 가까운 지식 공간이었다고 적고 있다.24) 이들 인문학부 학생과 교수들은 당시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부교수로 오는 것에 모두가 반대하였지만, 그의 철학이 잘못되었다고 보진 않았다. 비록 인문학부의 학생들이 신학부의 수업을 들을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 대하여 나름의 평가를 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후 그의 시신을 돌려달라며 적은 감동의 편지는 신학부의 교수나 학생이 아니라, 당시 인문학부의 작품이란 것을 보면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3.1.1 인문학부 교수 로저 베이컨
당시 파리대학 인문학부엔 최고의 교수진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필자는 두 명의 영국인 교수에게 주목한다. 바로 로저 베이컨과 요한 작크빌이다. 로저 베이컨은 1237-1247년 파리대학교 인문학부 교수였다. 그리고 그는 영국으로 돌아간다. 그가 인문학부의 교수로 활동할 때, 신학부엔 알베르투스 마뉴스가 교수로 있었다. 그리고 영국으로 돌아가서도 그는 파리대학의 사태들에 주시하고 있었다. 그에게 철학함 혹은 학문함이란 단지 이론이 아니라, 사회의 개혁을 담아야하고, 그 자신은 유독 교육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는 13세기 중반 파리대학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대학의 사태를 주시하며, 이러한 사태를 야기한 인물을 이름을 적지 않은 채 익명으로 비판한다. 많은 학자들은 이 익명의 인사를 알베르투스 마뉴스로 이해된다. 1271- 1272년 적은 『철학 연구의 요강』에서 베이컨은 이 인물이 인문학을 마치지도 않고 교수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들은 학생이 되기도 전에 신학과 철학의 교수가 되어버렸다!"며 그들의 교수직에 불만을 드러낸다.25) 베이컨은 직접적으로 토마스와 알베르투스를 거론하며, 이들은 인문학을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고, 그렇기에 학문의 기초를 가지지 못했으며, 학문 일반과 철학에 기초가 없다고 지적하였다.26) 그뿐 아니라, 그는 이들이 교수가 되기엔 많은 부족함이 있다고 지적하는데, 예를 들어 고전어에 무지를 든다. 이러한 베이컨의 불만은 1255년 경 인문학부 교수들의 일반적인 입장이었다. 우선 이들은 학칙에 어긋나며, 또 하나는 이들이 대학에서 정식적으로 인문학을 공부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실재로 그러한가. 사실 알베르투스는 파두아대학에서 어린 시절 수학하였다. 파두아대학은 1222년 볼로냐의 교수와 학생들이 이주하여 세워진 대학으로 볼로냐대학과 마찬가지로 법학이 강세였다. 하지만 그는 그 자신의 유년 시절에 대하여 그리 많은 말을 남기지 않았고, 그 당시 유명한 법학 교수들에 관하여 언급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 당시 자연현상에 관심을 가졌으며, 아리스토텔레스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수준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알베르투스는 그곳을 온전히 수료하지 못하고, 1223년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한 후, 퀼른의 수도원에서 수도원 소속 선생으로부터 신학을 배운다. 그리고 그는 그 후 독일의 여러 새롭게 생긴 수도원에서 수도원 소속 선생으로 활동한다. 그렇게 거의 20여년을 독일 수도원들의 선생으로 지낸다. 그 기간 적은 그의 저작이 『선의 본성에 관하여』이다. 하지만 이 저작은 13세기 최신의 철학자들에겐 그리 대단한 작품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곳의 논의는 이미 유행이 지나간 12세기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미 40대의 초에 이르게 되는 1240년 그는 드디어 당시 철학의 중심지인 파리에 오게 된다. 그는 12세기 이후 변화 없이 정적인 수도원의 학문적 분위기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1245년 신학학위를 가진다. 그리고 그는 독일인 최초로 파리대학 신학부 교수가 된다.27) 보자. 베이컨은 알베르투스가 파리대학에 와서 공부를 시작하던 시절부터 알베르투스를 알았을 것이다. 그가 인문학부 교수로 있을 때, 그는 인문학부를 공부할 적이 없으며, 파두아대학을 수료하지도 못한, 단지 수도원 소속 지방 선생에게 배운 알베르투스가 단지 5년도 되지 않아 신학교수가 된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가 평가하는 알베르투스는 처음부터 이미 대단하지 않았다. 그가 파리대학에 오기 전에 적은 『선의 본성에 관하여』는 당시 파리대학의 교수들에겐 지나간 철학의 공책 정도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알베르투스는 파리대학 이후 이러한 자신을 향한 비판에 반응이라고 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읽는 것에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 하지만 당시 많은 인문학부의 최첨단 철학으로 무장한 교수들에게 인정받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베이컨은 1250년 사태에 관하여 당시 인분학부의 교수들과 길을 달리한다. 우선 알베르투스나 토마스 아퀴나스가 학칙에 어긋나며 인문학부를 마치지 않은, 즉 철학을 전문적으로 익히지 않은 이들이란 것에 동의하지만, 이러한 공격이 탁발수도회 자체로 돌려지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것은 그 자신이 프란치스칸 수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베이컨과 알베르투스의 관계는 매우 흥미롭다. 알베르투스는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 베이컨을 항상 주시하였다. 이는 보편자 논쟁에서 볼 수 있다. 알베르투스의 보편자에 관한 생각이 담긴 『술어론』은 분명 베이컨 저작을 의식한 것이라 보아야한다. 이들 각각의 논의 가운데 알베르투스의 보편자론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로 이어지듯이, 베이컨의 이론은 이후 이루어진 둔스 스코투스와 옥캄 등의 전환점이 된다.28) 그리고 후기 중세 존재론으로의 전환점에 선 베이컨은 파리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던 인물이었다. 이를 볼 때, 당시 인문학부의 존재론적 입장의 한 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3.1.2 인문학부 교수 요한 작크빌
요한 작크빌은 시제 브라방의 스승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는 영국인이며, 1256년 시제가 인문학부의 교수가 되었을 무렵 학장이 되었다. 그는 아베로에스와 아리스토텔레스에 능통한 인물이었다. 그러한 그의 철학은 자신의 저서 『자연의 원리들에 관하여』에서 확인된다. 그는 그곳에서 비-질료적 존재들은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하며, 또한 우주란 영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를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베로에스에 근거하여 전개한다. 즉 그는 이후 시제 브라방이 주장한 철학적 논의의 선구적 입장을 선보인 것이다. 학장으로 선출 된지 2년이 못 되어 당시 재속사제와 수도회의 마찰에서 재속사제를 옹호라는 입장등과 관련되어 로마로 가게 된다. 그리고 그는 1258년 그로체스터 공작의 비서로 역사문헌에 등장하기도 한다, 1263년 시제 등의 인문학부 교수들이 활발한 활동을 할 때, 대학으로 돌아오지만, 곧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29)
베이컨과 같이 우리는 요한 작크빌에 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는 시제 브라방이 교수로 있던 인문학부의 학장이었다. 인문학부의 학장은 당시 파리대학이란 조합의 실질적 조합장이었다. 이 학장직은 재속사제교수들의 몫이었고, 탁발수도자들이 교수직을 차지하는 동안에도 대학은 학장직을 이들에게 내어주지 않고 계속 자신들의 조합원의 일원으로 그 자리를 지켰다. 그는 대학의 재정을 좌우하며, 조합의 총회를 주재했다. 이러한 인문학부의 학장에 이후 시제 철학의 선구자인 요한 작크빌이 있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암시한다. 바로 그가 1250년 한참 인문학부가 교황에 대항하여 대학의 자율권을 외칠 때 대학을 대표하던 학장이었다는 것이다.
3.2 시제 브라방과 주변 세계
시제 브라방은 자크 르 고프 등이 인정한 중세 인문학부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삶이 당시 인문학부 교수들의 삶을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1250년 경 베이컨이 파리대학 교수생활을 접고 개인 연구 시간을 가지던 무렵 인문학부에 입학한다. 분명 그가 입학 했을 무렵 인문학부엔 요한 작크빌과 같은 교수들에 의하여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베로에스에 관한 연구가 분석적이고 세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러한 인문학부에서 학칙에 따라 6년을 수학하고 1256-1257년 무렵 교수가 된다. 그는 브라방 지방, 즉 지금 네덜란드 남부주인 브라반트주 출신이며, 파리대학엔 이 지역 출신의 학생들이 일군을 이루고 있었다. 비트리아코의 야곱은 당시 파리대학 학생의 생활을 묘사하는 글에서 브라반트 사람들을 혈기왕성하고 선동적이며, 약탈자와 같은 성격으로 묘사한다. 사실 이 당시 대학생들은 각각의 출신에 따라 강한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타지생활을 하는 이들이라 동향 사람들끼리 강하게 뭉친 것이다. 그러면서 서로 다른 출신을 비꼬곤 했는데, 영국인은 술쟁이 호색가, 프랑스인은 계집애, 노르망디인은 허영꾼, 롬바르두스인은 탐욕가, 플란더스인과 브래맨인은 변덕쟁이 등으로 서로를 지칭하였는데, 브라반브인들은 산적과 같고 매우 선동적인 앞잡이 기질이 강하다고 했다.30) 이를 볼 때, 시제 역시 그러한 성격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어 보이며, 이는 곧 다룰 1266년 사건에서 볼 수 있다.
시제가 교수로 취임하던 시기는 대학 내부에 큰 혼란이 있었다. 우선 탁발수도자들이 교황에 의하여 대학에 진출하였고, 이에 대해 인문학부 교수들을 비롯한 많은 교수들이 반발하던 시기였다. 이 무렵 그는 새롭게 정비된 교수진의 일원으로 인문학부에서 교편을 잡는다. 새롭게 정비된 교수진으론 우선 학장 요한 작크빌과 시제 브라방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시제에게는 동료 교수들이 있었다. 그의 동료 교수로는 요하네스 프레텔(Johannes Fretel), 후이의 요하네스(Johannes von Huy), 노이빌레의 로베르투스(Robert von Neuville), 로이이어(Reuier), 시몽 브라방(Simon von Brabant)이다.31) 시제가 역사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266년 당시 교황 대사인 브리옹의 시몽(Simon de Brie)에 의해서 이다.32) 이 당시 시몽과 시제의 만남은 시제의 인생에 있어 불행의 시작이다. 사실 그와 시몽의 만남을 충실히 분석하지 않는다면, 시제의 삶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해하기 쉽다. 당시 인문학부는 4개의 지역단으로 분류 구성되었다. 그런데 부당하게도 울리아코의 요한이 피카르드 지역단이 아닌 프랑스 지역단에 분류 편입된다. 이에 피카르드 지역단의 일원이며 교수인 시제가 강하게 항의한다. 선동적이며 혈기왕성하다는 브라반트인의 기질에 따라 시제의 항의는 매우 강했던 것 같다. 이에 시몽은 이러한 소요의 원인 혹은 주동자에 시제 브라방을 지명한다. 시몽은 친 프랑스적인 인물로, 독일인과 같은 이들을 싫어했고, 프랑스인을 아주 좋아한 인물이다. 율리아코의 요한을 프랑스 지역단에 편입하는 것에 반대하는 반-프랑스적 인물인 시제가 맘에 들 리가 없다. 또한 1275년 5월 7일 당시 파리대학의 학장으로 선출된 라임의 알베릭의 선출에 반대하는 사태에서도 시몽과 시제는 악인연을 가진다. 여기에서도 시제는 새로운 학장에 반대하는 모임의 대표격으로 활동하였으며, 시몽은 이러한 시제와 그때도 마찰을 가지게 된다. 즉 시제와 시몽은 여러 모로 악연을 가졌다.
브리옹의 시몽은 당시 강력한 권력의 인물이었고, 그 권력의 배후엔 프랑스의 앙주왕가가 있었다.33) 그는 프랑스왕의 최고 고문을 지냈으며, 교황 우르바누스 4세(1261-1264)와 클레멘스 4세의 대사(1265-1268)를 걸쳐 교황 그레고리 10세(1271-1276)의 프랑스 대사을 걸쳐 추기경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후 마르티누스 4세 교황이 된다. 그 후 1280년 교황 니콜라우스 3세의 사후 비테르보에서 앙주왕가의 도움으로 교황에 선출된 것이다. 당시 프랑스왕의 동생인 앙주의 샤를은 가장 영향력이 있던 2명의 추기경을 구금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람인 시몽을 교황에 올린다. 하지만 선출된 비테르보에선 추기경의 강금 문제가 있었고, 로마는 프랑스왕을 거부하는 분위기에서 마르티누스 4세 역시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마르티누스 4세는 1281년 3월 23일 오르비에토에서 즉위한다.
여기에서 당시 시대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282년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인들은 아르곤 가문의 페트루스 3세를 그들의 왕으로 선출하여 프랑스왕가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했다. 당시 이탈리아 남부는 앙주의 사를의 지배에 있었다. 즉 그는 1262년 시칠리와 나폴리의 왕이 되었고, 그 외에도 알바니아와 예루살렘 등의 왕으로 봉해져 있었다. 이에 1282년 시칠리의 민중들이 봉기하여 그들의 손으로 왕을 세운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르티누스 4세는 앙주왕가의 편에 선다. 그는 아르곤의 페트루스 3세의 왕권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앙주의 샤르편에 선다. 하지만 1285년 1월 7일 앙주의 샤를이 죽게 되고, 마르티누스 4세는 정치적 기반을 상실하게 된다. 마르티누스 4세는 오르비에토를 떠나야 했다. 그렇다고 로마에 거주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페루지아에서 1285년 3월 28일 사망한다.
시제가 죽던 1284년 마르티누스 교황은 시제와 같은 곳인 오르비에토에 거주하였다. 물론 1284년 교황은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게 되고, 페루지아에서 죽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볼 때, 시제는 암살되었을 것이다. 자크 르 고프는 분명 그는 미친 비서 가샤펠의 고스윈에 의하여 우발적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암살당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혹자는 오르비에토에서 시제가 파리대학의 복귀를 위하여 노력했을 것이라고도 하지만, 시제는 시몽이 교황이 되었고, 그의 지배권 가운데 자신이 구금되었을 때, 이미 불행을 예감했을 가능성이 크다.
1266년 이미 자신과 좋지 않은 인연을 가진 그이다. 거기에 그는 당시 프랑스왕과 교황의 눈엔 좋지 않은 철학적 배경을 가졌다. 인문학부는 신학과 철학을 구분하였다. 이는 신앙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을 서로 구분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 인문학부의 인물들은 교황권과 왕권을 그 영역이 서로 다른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당시 오르비에토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다툼은 크게 두 파벌의 싸움이다. 두 파벌은 구엘파와 기벨리파이다. 구엘파는 친-교황세력으로 프랑스의 지원 속에 있었다. 마르티누스 4세와 앙주의 샤를의 연합과 관련된 파벌이다. 한편 기벨리파는 독일 슈타우겐왕가의 지원 속에 있었다. 독일은 프랑스의 확장을 견제하기 위하여 이탈리아 내부 상황에 민감하였다. 사실 슈타우펜왕가의 영지인 이탈리아 남부가 앙주가의 샤를에서 1262년 속하게 되면서 더욱 더 독일은 프랑스의 확장을 견제하였다. 이에 슈타우겐왕가는 아르곤가문과 연합한다. 슈타우겐왕가의 프리드리히 2세 황제는 아르곤 가문의 부인을 맞이하고, 시칠리에서 1282년 봉기하여 왕이 된 아르곤의 페트루스 3세는 프리드리흐 2세의 손녀와 결혼하였다. 1282년 시칠리의 민중봉기는 샤를이 아닌 아르곤의 페트로스 3세를 왕으로 추대한 것이다. 이러한 혼란기에 시제는 죽게 된다.
시제가 죽던 시기, 교황-프랑스연합과 독일왕가, 즉 구엘파와 기벨리파는 오르비에토에서 대치한다. 그리고 교황은 구엘파, 즉 교황-프랑스 연합에 손을 들어줌으로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한다.34) 이러한 오르비에토의 상황에서 시제는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겠는가? 그가 민중봉기의 편에 섰을 가능성은 크다. 그는 교황권과 왕권을 분명히 구분하였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교황과 프랑스에겐 눈의 가시였다. 그리고 1284년 시제는 죽음을 맞이한다. 당시 교회에 시제의 사상은 수용하기 힘든 것이었다. 교황은 자신의 힘든 처지 속에서 시제의 사상을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할 것으로 보았을지 모른다.
기록 상 남아있는 시제의 『정치학 주해』를 자세히 분석할 수 없지만,35) 그것의 내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고트프리(Godfrey of Fontaines)는 1285년 파리대학 신학부의 교수가 된다. 그가 신학부의 모든 과정을 마쳤으니 그는 1270년대 인문학부에서 수학하였을 것이고 시제의 영향을 접했을 것이다. 사실 시제의 형이상학에 관한 글이 그의 학생노트에 수록되어 있으며, 아비첸나와 아베로에스 사이 야기된 신의 존재가 자연철학과 형이상학 가운데 어느 것의 대상인지 논의하는 것에서 고트프리는 분명하게 시제의 영향 속에 있다.36) 그는 시제의 제자였으며, 그의 『임의토론집』엔 정치학적인 혹은 윤리학적인 시제의 관점이 녹아있다. 이곳에선 교황과 왕에 관한 논의가 담겨있다.37) 그리고 이는 다시 파리의 요한(John of Paris or John Quidort)에게 영향을 준다. 파리의 요한은 토마스 아퀴나스 사후 그의 철학의 옹호자였지만, 한편 시제-고트프리 노선의 정치학적 논의의 영향을 받는다. 파리의 요한은 이에 따라서 교황권과 왕권을 분리한다. 그리고 각각의 영역에서 각각은 다른 것에 비하여 우선권을 가진다고 주장한다.38) 마지막으로 이러한 논의는 단테의 『제정론』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39) 이러한 맥락에 의하여 도즈와 같은 연구가들은 단테의 학생시절 이탈리아 오르비에토에서 시제를 만났을 가능성마저 추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정치학적 사고는 지금에 들어선 근대 정치이론의 선구라고 평가받지만, 당시엔 매우 혹독한 대접을 받았다. 단테의 저서도 황제권에 우호적이라는 이유로 당시 성직자들에 의하여 반발을 샀으며, 요한 22세에 의하여 1329년 금서 조치를 당한다. 만일 가정이 맞다면, 시제 역시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1266년 이미 눈 밖에 나 있었고, 교황에게 그리 고분고분한 존재도 아니었다. 거기에 당시 많은 젊은 학자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가진 파리대학 인문학부의 주도적 인물이었다. 그런 존재가 1284년 점점 불리해지는 교황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을 것이다. 이에 가샤페의 고스윈이란 인물이 시제를 죽임으로 이어졌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 죽음은 적어도 시제의 죽음이 이미 다루어진 1284년 11월 10일 페캄의 편지 이전 일 것이다.
그 후도 시제에 관한 교회의 입장은 맹혹했다. 마르티누스 4세 이후 교황에 선출된 호노리오 4세는 마르티누스 4세와는 다른 노선의 인물이었다. 그는 파리대학 출신이며, 로마 시민과의 관계도 원만하였다. 또한 그는 수도회의 지지를 받았으며, 선대 마르티누스 4세이 수포로 돌려버린 동서교회 일치에도 노력하였다. 또한 교회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독일 함스부르그의 루돌프왕과 연대하며, 시칠리 문제에서도 보다 유연한 태도를 취하였다. 하지만 그는 2년 후인 1287년 죽게 되고, 다른 노선의 교황이 다시 등장한다. 이후 교황 가운데는 보니파치오 4세가 가장 주목받는다. 1302년 자신의 선대 교황이며 자신을 추기경으로 세운 마르티누스 4세가 프랑스왕에 종속되어 당한 폐해와 세속의 민중에게 당한 수난을 목적한 그는 『하나요 거룩한 교회』에서 교황권은 세속의 어떠한 권력을 넘어선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미 시대는 늦었고, 교황은 그 후 아비뇽 유수를 당하는 등 과거의 권력은 점점 약화된다. 예를 들어, 단테의 시대를 보자. 1309년 하인리히 7세는 약화된 황제의 권위를 위하여 이탈리아로 남하한다. 이에 당시 교황은 하인리히 7세를 승인하여 그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때 단테는 하인리히 7세의 편에서 로마로의 진군을 함께 한다. 이때 교황은 이중 외교로 당시 황제권과 멀어지게 되는데, 이에 단테는 교황권이 아직도 황제권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느끼고, 이때 『제정론』을 적었다. 이때 교회는 단테가 교회의 권력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시제 역시 단테와 마찬가지다. 시제는 탐탁치 않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단체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기간은 시제가 죽은 지 아직 반세기도 되지 않은 시점이다. 지금과 달리 그의 말을 그대로 들은 제자들이 대학교수가 되어 활동하던 시기이며, 특히 당시 학자들에 의하여 나온 단테와 파리의 요한 등의 정치학 이론은 교황에게 거슬리는 것이었고, 그 당시 이 모든 논의의 근저엔 신앙과 이성의 영역을 구분하는, 즉 교황권과 황제권을 구분하는 인문학부에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논의의 중심에 시제가 있었다. 시제 사후 철학은 인문학부가 아닌 신학과로 넘어간다. 시제 등의 제자들이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은 인문학부가 아닌 신학부로 진학하여 그곳의 교수가 된다. 그러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해가 아닌 신학부의 교재인 롬바르두스 『명제집』으로 철학을 하게 된다. 둔스 스코투스와 옥캄 그리고 시제 사후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자신의 철학을 『명제집 주해』에서 전개한다. 그리고 신학부도 과거와 같지 않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파리대학 인문학부는 매우 의미 있는 곳으로 남는다. 다만 많은 이들이 시제와 같이 인문학부에 남아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부로의 진학 후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게 된다. 파리대학 인문학부의 중세 동문엔 막강한 인물들이 있다.
3.3 교수 시제 브라방과 1277년의 단죄
시제는 인문학부를 마치고 신학부 진학을 하지 않는다. 당시 신학부엔 토마스 아퀴나스와 보나벤투라 등이 교황의 개입으로 교수직을 가지게 되고, 이로 인하여 혼란에 빠져 있었다. 시제는 이러한 신학부보단 인문학부에 남아 교수직을 가지고 철학 연구를 이어간다. 단순하게 신학부 진학을 하지 않은 것은 상급학부로의 진학을 포기한 것을 넘어 시제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볼 수 있다. 신학부는 성공의 지름길이었다. 파리대학 신학부는 교주, 추기경 등 당시 최고 종교권력으로 가는 길이었다. 시제는 이 모두를 포기하고 철학에 인생을 건다. 이러한 그의 결심에서 보듯이 그는 열정적으로 강의를 이어간다. 그는 당시 다른 대표적 학자들이 보이듯이 신학 관련 저서를 적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신학부 교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퀼른의 알베르투스 마뉴스와 같이 제자들에게 신학과 철학을 모두 동시에 강의한 것과 달리 그는 철학에만 매진한다. 다른 이들과 같이 잠시 지나가는 길에 인문학부에 머물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과 같이 한번 아리스토텔레스를 강의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형이상학』에 관한 그의 주해가 다른 이들과 같이 하나만이 아닌 이유는 거기에 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그는 그 외에도 다양한 저서를 남겼으며, 그의 저서들은 상당수 그의 강의에 근거하여 만들어졌다.40) 그 가운데 제자 고트프리의 수사본에 등장하는 시제의 『자연학 주해』를 비롯하여 『꿈에 관한 견해』, 『생성소멸론에 관한 요강』 그리고 파리와 리스본의『자연학 주해』와 『영혼론』 관련 저서들에서 보여지듯이 우선적으로 그는 자연학을 강의하였고, 이미 말한 『형이상학』을 강의하였다. 그 외에 몇 편의 논리학에 관한 글이 있지만, 대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과 형이상학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연대기적으로 본다면, 초기엔 대체로 1265년 교수 취임 땐 자연학, 65-70년경엔 논리학 혹은 의미론, 69년에 자연학 특히 영혼론 그리고 70-72년엔 자연학, 72년엔 논리학에 집중하였으며, 73년엔 영혼론과 형이상학, 73-74년엔 자연학과 윤리학 그리고 파리대학을 떠난 75-76년엔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41)
그러나 그는 이러한 강의와 연구를 통하여 요한 작크빌과 같은 선대 인문학부 교수들의 이론을 계승하여 독자적인 철학으로 완성해 간다. 즉 흔히 이단적 아리스토텔레스나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라 불리는 것이다. 교회권력은 인문학부가 교황의 반대 소리를 높이고, 점점 완강해짐에 따라서 이들을 대학에서 견제해야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13세기 단죄는 교회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13세기 초 대학 내부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과 형이상학에 근거하여 철학을 전개한 디낭의 다비드와 그에게 영향을 준 베느의 아말리히가 단죄를 받았다. 그들은 초기 파리대학의 인문학부에서 신학에 적절하지 않은 것을 강의하였다는 이유로 단죄를 당했다. 그리고 그들의 저서는 파리대학 인문학부가 연구해서는 안 될 것으로 남게 된다.42) 그러나 아말리히가 범신론이라고 하는 것도 지금의 문헌 연구에서 드러났듯이 억울한 면이 많다. 그가 말한 “존재하는 것은 신적이란 것이다”란 명제는 당시 중세의 많은 이들이 말한 일반적 공리였기 때문이다.43) 단죄 이후 그들의 논의는 역사 속에서 잊혀져 갔고, 그들의 비판자들의 논의로 통하여 그들을 추정할 뿐, 다른 길은 없어졌다. 그리고 이들 두 명과 함께 금지된 스페인의 마우리스는 어떠한 인물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1277년 교회는 강력한 단죄를 다시 한번 시도한다.
1277년 단죄는44) 인문학부의 근간을 흔드는 강력한 조치였다. 당시 인문학부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논의들이 금지되었다. 우주의 영원성과 지성의 단일성 그리고 신앙과 이성의 관계 등을 비롯한 인문학부의 대부분 철학적 이론들이 모두 금지의 대상이 되었다. 이 단죄는 분명 인문학부의 학생과 교수들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단죄에서 항상 거론되는 파리의 주교인 텅피에는 우리의 생각보다 이 사건에 핵심적인 인물일 가능성은 적을 것이다. 그것은 당시 그의 권력의 위치와 시대적 상황을 살펴봄으로 확인할 수 있다. 1275년 5월 2일 당시 인문학부엔 새로운 학장 선출을 두고 내분이 일어났다. 이 사태에서도 시제는 주동자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때도 브리옹의 시몽과 시제 브라방은 악연으로 서로 만나게 된다. 이러한 사태로 시제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때 파리대학 인문학부를 떠나 고향 리즈로 돌아간 이들은 1276년 행해진 종교심사관에게 위험인물로 지목된 이들이다.
1276년 11월 23일 당시 종교심사관인 발의 시몽(Simon du Val)은 1277년에 앞서 시제 브라방과 니벨레스의 베르니에 그리고 가샤페의 고스윈을 위험인물로 거론한다. 사실 텅피에는 시제 등의 인물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그가 적은 단죄의 첫 머리엔 단지 '인문학부의 학생들'(studentes in artibus), 그리고 더 고유하겐 '인문학부의 교수들'(magistri in aritibus)이지, 엄밀하게 시제는 아니다. 하지만 1276년 종교심사관의 자료엔 그가 위험인물로 거론되며, 1277년 1월 18일 교황 요한 21세가 당시 파리 주교인 텅피에에게 심의목록 작성을 명했을 때, 텅피에는 새로운 시제에 관한 연구 없이 대체로 기존에 나와 있던 심사관 발의 시몽의 것에 근거하여 단죄의 목록을 만들어갔을 것이다.45) 이러한 목록이 만들어가던 시기 위험인물로 지명된 세 명은 파리대학에 거주하지 않았다. 가샤펠의 고스윈은 심사관의 심의 이후 리즈에 머물었으면, 시제 브라방과 베르니에는 자리를 옮기게 된다. 시제는 오르비에토에게 가기 전까진 고스윈과 함께 리즈에 머물었으나, 반면 베르니에는 파리로 돌아가게 된다. 생전 시제는 더 이상 파리대학에 돌아가지 못했지만, 베르니에는 소르본대의 교수가 되었으며, 1286년경엔 토마스 아퀴나스의 『명제집 주해』 카피하기도 하였고, 파리대학 신학부로 진출하게 된다. 그는 지적당한 세 명 가운데 유일하게 발의 시몽 종교심사관의 심의와 1277년 단죄 이후 파리대학에 돌아와 성공적 삶을 살아간 인물이다.
1277년 1월 18일 교황으로부터 내려진 위험인물에 대한 단죄 심의 목록 작성 명령은 곧 인문학부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역사적 결과물을 낳는다. 이미 1276년 발의 시몽 종교심사원에 의하여 큰 틀은 잡혔다. 텅피에 주교는 이에 근거하여 단죄의 목록과 금서의 목록을 작성하였다. 이 단죄목록들은 명령이 내려진지 두 달이 되지 않는 1277년 3월 7일에 작성된 것을 보면 순식간에 마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발의 시몽은 그때에도 여전히 프랑스에 거주하였기에 기본적인 틀을 구하기는 쉬었을 것이다. 거기에 그의 작업의 봉사자들이 있었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신학부의 일원인 성서박사와 다른 학내 구성원들이었다.46) 아마 이들 신학부의 교수들은 단죄의 목록을 결정하기 위하여 고민하였을 것이다. 포울리의 요한의 증언에 의하면 신학부 16명의 교수들이 동원되었다. 즉 텅피에를 중심으로 16명으로 구성된 심의위원회가 구성된 것이다. 이들 위원회 가운데는 이후 뛰어난 학자들이 있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1276년 신학부 교수가 된 겐트의 헨리가 그러한 인물이다.47) 헨리의 철학적 입장은 분명하게 시제와 토마스 아퀴나스 등과 구분되었다. 예를 들어, 1276년 이미 그는 토마스의 이론에 관하여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러한 그는 아마 단죄 목록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창조 관련 항목에 일조하였을 것이다. 그는 인문학부 통제를 목적으로 한 1277년 단죄에 참여한 후에도 1282년엔 당시 탁발수도자 교수들에 대하여 재속자세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헨리는 인문학부와 토마스 아퀴나스에 불만에 있었지만, 이후 시제와 성 아모르의 윌리엄 등을 이어 당시 교황인 마르티누스 4세 등의 세력에 의한 대학 내 탁발수도자의 진출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헨리는 인문학부를 제어함으로 신학부의 위상을 분명히 함과 동시에 교황의 개입으로 들어온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강하게 비판함으로 신학부 내 외부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가 마르티누스 4세 교황과의 좋지 않은 관계로 인하여 한 동안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는 1277년 이후 대학 뿐 아니라, 유럽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진 이가 되었다.48) 그는 1270년 이후에서 14세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철학자이며, 무척이나 철학계에 큰 영향력을 주었고, 활발하게 정치적 활동을 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헨리를 포함한 이들은 종교심사관 발의 시몽이 마련한 틀을 중심으로 단죄의 합리화와 단죄의 목록을 작성했을 것이다. 로마의 자일스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 심의위원회의 뜻은 때론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예를 들어 다수 교수들의 의견이 아닌 일부 보수적인 이들의 의견이 수용되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부의 교수들 이외에도 대학 외부 인물이 심의위원회와 관련되었다.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몇 명으로 줄여 추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시 교황의 대사인 브리옹의 시몽과 텅피에에 이어 다음 파리주교가 된 라눌페이다. 만일 전자이라면, 시제 브라방과의 악연을 생각 할 때, 시제에게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든 당시 브리옹의 시몽은 이 위원회와 관련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마련된 단죄의 목록은 이후 많은 비판을 받는다. 일부는 전문가도 아닌 이들에 의하여 정해진 어떤 합리성도 없는 것으로 비난하였다. 사실 이 당시 단죄는 무차별적이었다. 심지어 인문학부의 일원이 아닌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하여도 그의 주장이 인문학부 교수들의 것과 약간이라도 관련된다면 명단에 올라갔다. 간혹 전설에 의존하여 알베르투스 마뉴스가 1277년 초 퀼른에서 파리로 와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옹호하려 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라 보기 힘들다. 우선 교황이 내린 명령과 단죄 목록의 완성까지는 두 달이 걸리지 않았다. 그 사이 퀼른에서 이 소식을 듣고 당시의 교통과 통신 편으로 다시 파리로 왔다는 것은 단지 70세가 넘은 노인에겐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알베르투스 마뉴스는 사망 전 3년, 즉 1277년 이미 정신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가진 상태에 이르렀고, 1279년 8월 18일 이후 공식적 기록은 없어지며, 1280년 사망하게 된다. 그는 1274년의 리옹 공의회에도 참석하였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 그 당시 그는 상당한 연령으로 이동이 쉬운 나이가 아니었다.49) 설사 그가 1277년 당시 자신의 위치에서 파리의 사태를 알았다고 하여도,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 단죄의 대상이 될 것이라 보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문학부를 제어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텅피에는 이미 정해진 틀 속에서 단죄의 목록을 정했지만, 특정인을 지명하진 않았을 것이다. 불특정 다수의 인문학부 교수를 향했지만, 현실적인 조치들은 시제를 비롯한 인물들에게 향해졌다. 이들 세 명 가운데 한 명은 고향에 남아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시제는 오르비에토의 교황청간 이후 자신의 친구와 동명인 고스윈에게 살해당한다.50) 그리고 다른 한 명은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을 전하는 인물이 되어 신학부로 진출하게 되고 소르본대학의 교수가 된다.
4. 1277년 이후 대학과 인문학부
1277년 이후 인문학부에 대한 통제가 얼마나 실효를 거두었는지는 의문이다. 만일 단죄가 강력하게 실행되었다면, 당시 파리대학의 신학부 교수 가운데는 겐트의 헨리를 포함한 몇 명만이 학문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 파리대학 교수들의 상당수는 인문학부에서 시제와 다치아의 보에티우스와 그들의 동료들에게서 강의를 듣고, 신학부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알베르투스 마뉴스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다. 예를 들어, 고트프리의 학생 노트엔 토마스 아퀴나스뿐 아니라, 시제와 다치아의 보에티우스 등에 관한 기록으로 가득하며, 시제와 보에티우스를 하나로 묶으면 기록의 절반에 달한다. 그렇기에 고트프리는 자신의 존재론에서 시제의 철학을 이어간다.51) 그러한 고트프리는 파리대학 신학부에서 1285년에서 1304년까지 교수직을 이어간다. 친-토마스 아퀴나스 노선에 선 로마의 자일스는 1277년 단죄로 교수직을 정지 당한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창조설을 지지하였으며, 이는 겐트의 헨리에 의하여 강하게 비판받은 것이다. 하지만 10여년이 지나 다시 파리대학으로 복직한다.
인문학부에선 여전히 시제의 노선이 이어져갔다. 예를 들어, 1277년 이후 인문학부 교수이며, 혹자는 인문학부의 마지막 의미 있는 교수라는 라돌푸스 브리토(Radulphus Brito)는 철학과 신학 사이 관계에 관하여 고민한다. 1277년 사태는 신학자들이 행한 철학에 대한 심사였기에, 1277년 이후 많은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저마다 자기 학문의 고유 영역에 관하여 깊이 숙고하였다. 브리토 역시 그러한 인물이다. 그는 질료와 우주 영원성의 문제에서 1277년 단죄당한 명제는 신학에선 창조설이 타당하고, 철학에선 영원성이 타당하다고 하며, 그 영역을 구분했다. 즉 신앙과 이성의 각각 영역을 구분한 것이다. 만일 이러하다면, 우주의 영원성에 관한 시제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의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보았다. 브리토 이외에도 14세기 초 바톨로메오는 단죄당한 아베로에스의 철학을 계속 연구해 간다. 그리고 많은 인문학부 교수들은 1277년 단죄당한 지성단일성론과 관련하여 분리된 실체의 개체화 문제에 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였다.52) 즉 인문학부는 사실상 1277년 이후에도 그들의 연구를 이어갔고, 오히려 시제의 철학이 어떻게 합리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을 설명할 것인지를 고민하였다.
사실 시제의 지성단일성론을 제외하면 그의 철학의 많은 부분은 이후 강한 영향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존재론이 그러하고, 아직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그의 정치학적 입장이 그러하다. 그리고 지성단일성론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중세 말기까지 꾸준히 철학의 주요화두로 남게 되었다.
인문학부는 이와 같이 자신의 길을 계속 간다. 비록 1277년 심각한 파격을 받지만, 그들의 연구는 꾸준히 이어지고, 인문학부를 수료한 이들이 신학부로 넘어가면서 신학부에게로 까지 이어진다.
1277년 이후 인문학부가 약해진 이후, 교회는 신학부 조차 제어의 영역에 포함시키려 한다. 이에 1277년 단죄에 참여한 겐트의 헨리 등도 강하게 대응한다. 카에타니 추기경은 당시 겐트의 헨리 등의 이론을 비난하며 신학부를 제어하려 했다, 이때 제어의 수단은 탁발수도자의 권리 문제였다. 마르티누스 4세에 의하여 1282년 시작된 작업은 1290년에 이르게 되면 다시 확인된다.
이와 같이 13세기는 이론적 관계가 아닌 대학 내부와 외부 각종 마찰로 인하여 다양한 일들이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철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만들어갔다. 하지만 곧 교황의 권력이 점점 약화되면서 서서히 국가정부에서 국가의 목적에 의하여 대학을 설립하게 된다. 그러면서 대학은 종교적 영역에서 분명하게 근대 대학, 즉 국가 기관의 관할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예를 들어 정부에서 1365년 세운 비엔나 대학은 당시 파리대학의 뛰어난 교수들인 롱엔슈타인의 헨리(Henry of Longenstein)와 오이타의 헨리(Henry of Oyta)와 같은 이들은 초빙해 온다. 그리고 국가 정책의 자문 역할과 국가의 여러 프로젝트에 관련된 새로운 형태의 대학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13세기 시작된 중세 대학의 형태는 변화되며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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