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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의자리

오캄의 심적 언어와 동의어 문제

<이 논문은 2007년도 학술지 "중세철학"에 실릴 논문입니다.> 

 

옥캄의 심적 언어와 동의어 문제1)


유대칠

(대구가톨릭대학교)


1. 문제설정.

오캄은 외부 실재에 관한 존재론적 언질(ontological commitment) 없이 심적 언어 가운데 개념의 다양성을 설명해야 했다. 즉, 실체와 성질만을 인정한 오캄은 다른 범주를 거부하는 가운데 이에 대한 개념 혹은 명사(terminus)가 외부와 상관없이 심적 언어 가운데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보여야했다. 이에 대한 가장 해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실체와 성질을 제외한 다른 것을 의미하는 내포명사(connotativa nomen)는 실상 없어도 상관없단 것이다. 이것은 외부 실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심적 언어 가운데 만들어진 논리적 복합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포명사를 옹호하는 가운데 오캄의 존재론과 심적 언어를 무리 없이 선보이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내포명사의 위상을 인정한다면, 이와 동의어로 보일 수 있는 명목적 정의(quid nominis)와의 관계도 해결되어야한다. 오캄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방식에서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심적 동의어를 부정했다. 그에게 동일한 의미론적 기능을 가진 다수의 표현은 심적 언어의 경제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내포명사가 없어져도 그만이라고 보는 이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이 둘이 동의어라지만, 하나는 없어지거나 다른 것으로 환원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포명사를 인정하는 이에겐 내포명사와 명목적 정의의 분명한 관계를 설명해야했다. 물론 동의어가 아니란 입장에서 말이다. 바로 이러한 논의가 오캄의 단순내포명사와 심적 동의어에 관한 주된 논쟁의 내용이다. 1975년 스페이드의 논문 이후, 더 엄밀하게 1990년 파나쵸의 논박이 있은 이후 오캄 의미론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바로 이와 관한 문제이다. 파나쵸의 등장은 1975년 이후 일반적 해석으로 여겨지던 스페이드 해석에 대한 새로운 대안과 반론을 야기하였다.2) 본 논의의 목적은 바로 이러한 논의에 들어가 나름의 입장을 정리함에 있다.

  현대 분석철학자인 차머스는 이러한 논의의 형세를 간단하게 요약하며 제 3의 길을 시도한다. 그의 정리를 읽어보자.


“스페이드는 단순내포명사가 실존할 수 없다고 논증한다. 왜냐하면 만일 <단순내포명사가> 실존한다면, 그것은 그것의 펼쳐진 명목적 정의와 동의어가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연히 심적 언어 가운데 동의어는 없다! 파나쵸는 또 다른 가능성을 점친다. 그것은 단순내포명사는 실존하지만, 사실 그것의 명목적 정의와 동의어는 아니란 것이다. 지금의 논의는 세 번째 가능성이다. 즉 단순내포명사는 실존하며, 그것은 그것의 명목적 정의와 동의어라는 것이다.”3)


차머스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잘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1999년 차머스의 논의 이후 발표된 2001년 게스킨의 입장을 이에 더하여 네 번째 가능성으로 제시한다. 게스킨은 이 문제를 오캄 철학의 연대기 변화와 연결한다. 물론 그의 기본적 입장은 스페이드에 있다고 하지만, 파나쵸의 입장을 무시하지 않고 있다. 그렇게 이 두 상이한 가능성을 연대기적 논의에서 해결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4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단순내포명사의 유무(有無)와 명목적 정의의 관계에 대하여 서로 논쟁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동시에 또 다른 한편 스스로의 입장을 더욱 더 견고히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스페이드의 논의는 비록 그 내용은 다르지만, 게스킨에게 영향을 주었고, 파나쵸의 논의도 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차머스에게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본 논의도 결국 그러한 논의의 한 부분이다. 과연 단순내포명사는 존재하는가? 그리고 심적 동의어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문제가 결국 본 논의가 다루고자 하는 최종의 물음이다.


2. 오캄을 둘러싼 네 가지 입장.

기본적으로 오캄은 동의어를 거부한다. 그런데 내포명사와 명목적 정의는 ‘정의되는 것’과 ‘정의’의 관계이며, 흔히 동의어의 관계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가 된다. 분명 오캄은 심적 동의어를 부정한다. 그런데 어찌 이 가운데 동의어만을 허락했겠는가. 스페이드는 이 문제에 관하여 1990년 이전까지 독보적 입지를 가졌던 해석을 내놓았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내포명사와 명목적 정의는 동의어이지만, 결과적으로 심적 동의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선 심적 동의어가 없다는 대전제를 생각한다면, 이 둘이 동의어라는 것은 이 둘 가운데 하나가 없어도 좋은 것이 되는 것이 더 적절하게 된다. 혹은 명목적 정의로 환원되거나 말이다. 이와 같이 심적 동의어를 부정하기 위해선 내포명사가 단순한 것이 아니라, 절대명사(absoluta nomen)와 공의어(syncategoremata)로 구성되어지는 복합적인 명목적 정의로 환원되어야한다. 결국 스페이드는 명목적 정의가 그 내포명사보다 인식론적으로 앞선다는 논리를 통하여 내포명사는 없어져도 좋은 것으로 결론짓는다. 결국 이 둘은 동의어이지만, 심적 동의어는 없는 것이 된다. 그리고 만일 복합내포명사가 아닌 단순내포명사가 있다면, 이것은 단순한 것과 복합적인 것, 즉 서로 다른 두 가지 것이 심적 언어 가운데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되며, 이것은 이 둘이 동의어임을 암시하게 된다. 즉 심적 동의어가 가능하게 된다. 그렇기에 스페이드는 단순내포명사의 실존을 인정하지 않는다.4) 이러한 스페이드의 해석은 많은 이에게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아담스와 노모어가 그러한 인물이다.5)

이와 다른 가능성을 점치는 파나쵸는 스페이드에 대한 반론에서 자신의 길을 연다.6) 단적으로 파나쵸는 단순내포명사를 인정한다. 이것은 스페이드와는 화해가 될 수 없는 길로 나섬을 의미한다. 스페이드의 해석에선 절대명사만이 단순한 것이고, 내포명사는 복합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논한 바, 후자의 것은 전자에 의한 논리적 구성물로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간(homo)이란 실체는 절대명사이며, 이에 관한 사고작용은 단순한 것이다. 하지만 하얀 것(album)과 같은 것은 하양(albedo)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며, 명목적 정의와 같은 논리적 구성물이다. 그러나 파나쵸는 이러한 것이 문헌적 근거도 없으며, 이론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간단히 오캄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한다. 단적으로 절대명사와 내포명사는 단순한 것인가 복합적인 것인가로 구분되지 않으며, 이 둘은 모두 단순한 것일 수 있다. 즉 스페이드와 달리 단순내포명사가 심적 언어 가운데 존재함을 긍정한다. 그리고 단순내포명사와 그것의 복합적인 명목적 정의는 공존이 가능한 것으로 본다. 즉 어느 하나가 없어져도 좋을 것이 아니다.7) 그리고 단순내포명사와 명목적 정의의 공존에도 불구하고, 파나쵸는 스페이드가 제기하는 문제 없이 심적 동의어가 없다는 오캄의 논의를 완성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해석은 1990년 이후 뜨베다레와 고두 등의 해석에 영향을 주었다.8)

분명 스페이드와 파나쵸는 기본적으로 심적 동의어를 부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에 대한 근본적인 반론이 1999년 차머스에 의하여 제기된다. 다음의 글을 읽어보자.


“스페이드와 파나쵸는 심적 동의어의 불가능성을 가정하기에 이(차머스 자신의) 가능성을 거부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심적 동의어의 가능성을 위한 현재의 논증을 수용한다면, 이것은 선택지에 놓일 것이다.9)


여기에서 차머스는 분명하게 자신의 해석을 기존의 해석과 경계 짓는다. 우선 그는 단순내포명사의 존재를 인정한다. 단순내포명사는 있어야하며, 그것의 존재 이유는 이론적으로 명목적 정의를 위한 축약이다. 만일 이와 같은 축약이 없다면, 그것은 심적 언어 가운데 더욱 더 문제가 된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단순내포명사가 있음으로 덜 문제 있는 심적 언어가 된다. 이러한 논의는 화용론적 접근에 근거한다. 심적 언어 가운데 자주 반복되는 표현이 있다면, 심적 언어 체계 가운데 어떤 축약형이 있음으로 더욱 더 문제없는 심적 언어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차머스는 단순내포명사는 존재해야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심적 언어 가운데 단순내포명사와 그것의 명목적 정의가 심적 동의어의 관계를 가진다고 한다.10) 차머스의 해석은 많은 학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지만, 그 자신도 어느 정도 인정하듯이 이론적 논리성에 비하여 문헌적 타당성에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오캄의 문헌 곳곳에 흔히 발견되는 심적 동의어의 불가능성에 관한 문헌적 증거를 무시할 순 없기 때문이다.11) 그러나 1999년 이후 이 논의를 다루는 이들에겐 꼭 언급해야하는 해석이 될 만큼 영향력을 가진 해석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2001년에 등장한 게스킨의 연대기적 해법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스페이드의 논의에 근거하지만, 뚜렷한 차이도 보인다. 그는 단순내포명사가 초기 덜 성숙한 단계에선 인정되지만, 후기 성숙한 단계에선 인정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에게 단순내포명사와 심적 동의어의 부재는 오캄의 성숙한 존재론과 의미론에 적절하며, 문헌적으로도 사실이다. 반면 파나쵸의 해석은 단지 초기 아직 성숙하지 않은 오캄에 대한 해석에만 적절하다.12) 또한 그에게 차머스의 해석은 부적절한 것이다. 이는 비록 이론적 흥미를 가지지만, 심적 동의어를 인정하는 것은 오캄에게 이론적으로도 분석적으로도 문헌적으로도 사실이 아니다.13)

이상의 네 가지 해석을 정리했다. 이 해석들은 간혹 서로간의 오해가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스페이드는 파나쵸를 심적 동의어를 인정했다고 소개한다.14) 그러나 사실 이러한 스페이드의 해석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파나쵸에 관한 오해를 야기할 수 있다. 차머스와 게스킨과 같은 이들은 여전히 파나쵸를 심적 동의어를 부정하는 이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파나쵸 자신도 변함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된 것인가. 물론 파나쵸가 마치 자신은 단순명사 사이의 동의어만을 부정하며, 단순내포명사와 명목적 정의 사이의 동의어는 예외라도 되는 듯이 읽혀질 수 있는 글을 적은 것은 사실이다.15) 하지만 분명하게 파나쵸는 단순명사 사이는 물론이며 단순내포명사와 명목적 정의 사이에서도 심적 동의어를 인정하지 않았다. 심적 동의어를 인정하는 차머스 역시 자신과 파나쵸를 다른 해석으로 본다.16) 반면 스페이드는 차머스와 파나쵸를 동일한 선상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분명하게 파나쵸는 심적 동의어를 인정하지 않는다. 게스킨은 스페이드의 파나쵸 해석에 관하여 개인적 연락을 통하여 파나쵸가 여전히 심적 동의어를 인정하고 있지 않음을 확인했다고 자신의 논문에 적고 있다.17) 오해의 소지가 있는 언급은 있었지만, 파나쵸는 꾸준히 심적 동의어를 부정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18)

위에서 4가지 해석으로 오캄을 둘러싼 여러 해석을 정리하였지만, 세부적으론 이보다 더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19) 파나쵸의 해석에 긍정적인 뜨레다레 역시 관계명사와 내포명사의 세부적 이해에서 파나쵸와 차이를 가진다. 하지만 필자가 아는 한 큰 맥락에서 4가지로 정리함엔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이를 간단히 도식화해 보겠다. 스페이드는 단순내포명사는 부정하며 심적 동의어도 부정한다. 파나쵸는 단순내포명사는 긍정하지만 심적 동의어는 부정한다. 차머스는  이 둘을 모두 인정한다. 또한 게스킨은 이를 연대기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면 본 논의는 이 가운데 어디로 행해가야 할 것인가. 크게 스페이드와 파나쵸의 해석을 두고 고민을 이어가 보기로 한다.20)


3. 오캄 심적 언어와 단순내포명사.

3.1 오캄의 명사론.

누구나 이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오캄의 심적 언어 전반을 이해해야하며, 이에 관한 나름의 관점을 가져야만 한다. 그렇기에 오캄의 심적 언어 전반을 개괄적으로 정리해 보겠다.21)

오캄에게 언어란 항상 세 가지 차원에서 논의된다. 심적 언어와 발화언어 그리고 문자언어이다. 이러한 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론』 이후 보에티우스를 걸쳐 중세시기 널리 수용되었다. 이들 언어의 가장 분명한 차이는 심적 언어가 자연기호와 관련된다면, 남은 두 언어는 인간 사회의 규약과 관련됨에 있다. 이에 따라 발화언어와 문자언어를 규약언어라 부르기로 한다. 문제는 이 심적 언어와 규약언어 사이의 관계이다. 이는 중세철학자들 사이에도 이견이 있었다. 예를 들어, 보에티우스 이후 많은 이들은 이를 의미(significatio)의 관계로 이해했다. 하지만 오캄은 이와 달리 종속(subordinatio)의 관계로 이해한다. 의미 관계에선 규약언어의 모든 요소들이 심적 언어의 반영으로 이해된다. 즉 심적 언어를 의미한다. 하지만 종속 관계에선 규약언어들이 심적 언어에 종속될 뿐 그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렇기에 규약언어의 모든 요소들이 심적 언어의 반영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이러한 맥락에서 문법을 위하여 마련된 규약언어의 모든 문법적 요소들이 무차별적으로 심적 언어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규약언어의 동의어가 심적 언어의 동의어를 반영하는 것도 아니다.22)

오캄의 체계에서 서로 다른 두 명사가 심적 동의어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규약언어에선 이러한 동의어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논의한 바와 같이 규약언어의 동의어가 심적 언어의 동의어를 반영하진 않는다. 간단하게 책방과 서점이란 동의어는 심적 언어 가운데 하나의 심적 명사에 종속된 두 가지 규약언어일 뿐이며, 심적 동의어를 반영하진 않는다. 그것이 오캄에게 더욱 더 경제적인 심적 언어이며, 차후 논의될 그 자신의 존재론적 사유와도 문제없이 조화되기 때문이다.

본 논의의 선구적 인물인 트랜트만은 이런 심적 언어를 현대철학의 이상언어와 관련하였다.23) 현대철학자들이 이상언어를 현대 논리학의 고유 대상이라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캄은 심적 언어를 논리학의 고유 대상이라 한다. 이러한 심적 언어는 오캄에 의하면 다양한 명사(terminus,名辭)들로 구성된다. 이러한 명사는 오캄 시기 매우 중요한 시대적 논의 대상이었다. 존재론적 언질 없이 심적 언어 가운데 다양한 명사들이 어떻게 기능하였는가라는 것은 당시 개념론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존재론이 가진 타당성을 알리는 길이었을 것이고, 한편 이를 논박하는 이 역시 이러한 논의의 장에서 논박 했어야만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당시 명사의 속성은 가장 흔한 논의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명사는 가장 근본적으로 단의어(categoremata)와 공의어(syncategoremata)로 구분된다. 단의어는 ‘생명’, ‘동물’, ‘인간’ 등과 같이 그 자체로 다른 수식어 없이 의미를 가지는 명사이다. 반면 공의어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지 못하며, 오직 어떤 것에 부과되는 경우에만 의미를 가지는 명사이다. 예를 들어, ‘어떤’, ‘오직’, ‘아니‘ 등과 같다.24) 이 가운데 단의어는 다시 명사(nomen,名詞)와 동사(verbum,動詞)로 구분된다. 그리고 이러한 명사는 그 구실과 형태에 따라 또 다시 몇 가지로 구분된다.

명사는 고유명사(propria nomen)와 일반명사(communia nomen)로 구분된다. 이에 관한 오캄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고유명사는 하나의 명칭으로 하나의 대상만을 의미한다. 이는 한민지, 이소희, 김유림 등의 명칭과 같다. 반면 일반명사는 하나의 명칭으로 다수를 의미할 수 있다. 즉 늑대, 동물, 인간 등과 같다. 명사는 또 다시 구체명사(nomina concreta)와 추상명사(nomina abstracta)로 구분이 된다. 구체명사는 말 그대로 구체적인 것을 그리고 추상명사는 추상적인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본 논의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명사의 구분이 남아있다. 바로 내포명사와 절대명사이다.25) 우선 이 두 명사의 차이는 대상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그 대상은 범주의 차원에서 쉽게 이해된다. 절대명사는 제일 의미대상인 실체와 성질을 의미한다. 이차적으로 제이 의미대상을 의미할 수 있지만, 이것은 고유한 기능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즉 절대명사는 인간, 하양, 동물...등과 같은 실체와 성질을 그 의미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이것은 오캄의 존재론에 의하면 영혼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며, 이러한 실재적 대상은 영혼의 직관적 인식(notitia intuitiva)의 대상이며, 실재의 무엇임, 즉 실재적 정의(quid rei)로 이해되어지는 것이다.26) 이런 절대명사는 단순한 것이다. 단순한 것이란, 어떤 복합적 사고의 결과물이 아니라, 외부 실재에 대한 직관적 인식이란 단순한 사고에 의한 것임을 의미한다. 절대명사는 바로 이러한 직관적 인식에 의한 것이며, 결과적으로 단순한 것이다. 또한 ‘인간’이란 절대명사는 인간으로 의미되어지는 모든 것에 무차별적으로 의미되어지며, 다른 어떤 상관되어지는 것에 대한 이해 없이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절대명사는 현대철학의 자연종(natural-kind)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음의 글을 읽어보자.


“절대명사(absoluta)에 의하여 의미되는 모든 것은 우선적으로 의미되는 것이다. 소, 원숭이, 인간 그리고 다른 동물들을 의미하는 ‘동물’이란 명사에 의하여 분명해 진다. 이는 하나의 대상을 우선적으로 의미하지 않으며, 이차적으로 다른 것을 의미한다...<중략>...내포명사(connotativa)는 하나의 대상을 우선적으로 의미하며, 이차적으로 다른 것을 의미한다.”27)


절대명사는 위에서 논의한바 그대로이다. 하지만 내포명사는 절대명사와 다르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그것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대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내포명사는 실체와 성질을 제외한 다른 범주의 것과 관련된다. 혹은 개별적 성질을 가진 것과 관련된다. 예를 들은 내포명사 ‘하얀 것’은 성질 ‘하양’에 대한 파생어이다.

오캄에게 내포명사는 우선적으로 파생어이다. 이것은 영혼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명칭의 차원에서 영혼 가운데 있음을 의미한다. 즉, 오캄에게 ‘하얀 것’이나 ‘아버지’와 같은 개념은 그 자체로 그것에 상응하는 외부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고 행위에 의한 것이다. 다르게 옥캄에게 실체와 성질가 아닌 남은 것은 단지 사고 행위에 의한 파생어일 뿐이다. 그리고 파생으로 주어진 모든 것은 실재의 무엇임, 즉 실재적 정의가 아니라, 단지 명목적 정의를 가진다.


모든 파생(denominatio)은 명칭의 무엇임을 설명하는 정의를 가진다.”28)


이와 같이 파생어가 명목적 정의만을 가진다면, 내포명사도 당연히 명목적 정의만을 가지게 된다. 이런 내포명사는 하나의 구체적 개별자와 관련하여 파생되어지는 것이기에 구체명사와 관련된다.29) 또한 관계명사 역시 내포명사에 포함된다. 오캄에 의하면 어떤 구체적 주체 가운데 있는 ‘하양’에서 ‘하얀 것’이 파생된다. 물론 주체 가운데 있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이것이 영혼 외부 주체 가운데 실제로 있음을 의미하진 않는다고 오캄은 단언한다.30) 오캄에게 파생어는 실재 가운데 무엇이 아니라, 단지 명칭으로 영혼 가운데 주어진 것이며, 실재에 대한 어떠한 존재론적 언질도 아니다. 관계명사 역시 예외가 아니다. 관계 문제에 있어 중세철학자 가운데 이견이 많다. 분명 내포명사와 관계명사를 구분하는 이들도 있었다.31) 하지만 오캄은 단호히 관계명사가 내포명사에 속한다고 정의한다.32) 관계 역시 실재가 아닌 단지 하나의 개념이란 것이 오캄 개념론의 논리이다.


3.2 단순내포명사의 가능성 모색.

앞서 정리한 절대명사와 내포명사는 그 방식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고유한 철학의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 고대철학에서 정의(dikaiosyne)와 정의로운 이(ho dikaios)의 경우를 보자. 여기에서 ‘정의’는 절대적 존재이다. 반면 ‘정의로운 이’는 ‘정의’ 가운데 참여하는 것의 명칭이다. 즉 절대명사가 아니라, 파생어(paronyma)이다.33) 파생어의 또 다른 논의를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서 찾을 수 있다.”34) 이에 의하면 ‘문법학자’는 ‘문법’에 의한 파생어이다. 이는 ‘하얀 것’과 ‘하양’에 적용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하양’은 추상명사이며, ‘하얀 것’은 구체명사이다.

이런 구체명사는 중세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실체적 구체명사이며, ‘하얀 것’은 우유적 구체명사이다. 이 둘은 구분된다.35) 이 가운데 문제가 되는 것은 우유적 구체명사이다. 이는 말 그대로 우유를 의미하며, 기본적으로 실체가 아닌 다른 범주들을 의미한다. 중세철학자들의 상당수는 우유적 구체명사의 일차적 의미대상은 바로 이러한 주체 가운데 우유이며, 이차적 의미 대상은 주체라고 한다. 이는 아베로에스에서 알베르나의 페트루스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이다. 이들에 의하면, 우유와 관련된 파생어, 즉 이에 상응하는 구체명사는 주체 가운데 우유를 일차적으로 의미하며, 단지 이차적으로 주체를 의미한다.36) 그러나 아비첸나는 다르다. 아베로에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아비첸나는 파생어도 일차적으로 주체를 의미하며, 이차적으로 우유를 의미한다고 정의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13세기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비판의 대상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이와 같이 아비첸나를 거부하고 아베로에스 등의 노선을 따른 가장 큰 이유는 주체와 그 주체 가운데 있는 우유의 구분에 있다. 만일 이와 파생어인 구체명사, 즉, 내포명사가 우유가 아닌 주체를 일차적으로 지시한다면, 주체와 그 주체의 우유 혹은 실체와 우유의 구분에 문제가 생긴다고 본 것이다.

14세기 오캄에게도 파생어는 핵심 개념이다. 그는 파생어가 의미하는 것이 주체 가운데 실존하는 어떤 우유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즉 ‘하얀 것’은 영혼 외부의 실재를 대상으로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파생으로 영혼 가운데 주어진 개념일 뿐이다. 내포명사가 실재적 정의를 가지지 않는다고 단언한 이유는 이것이 영혼 외부에 대한 존재론적 언질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함이다. 오캄의 존재론을 위해선 내포명사가 심적 언어 가운데 기능하지만, 외부 대상의 실존을 의미하지 않아야한다. 예를 들어 관계명사 ‘아버지’를 보자.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한 주체 가운데 내재하는 어떤 실재가 아니다. ‘아버지’란 관계명사는 두 대상으로부터 얻어진 어떤 명칭, 즉 파생어일 뿐이다.37)

이렇다면 ‘아버지’의 정의는 실재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명칭의 무엇임을 정의하는 것이다. 그렇게 내포명사는 단지 명목적 정의만을 가진다. 또한 이 둘은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만일 이러하다면, 내포명사는 명목적 정의와 동의어인가? 만일 내포명사가 단지 명목적 정의만으로 이해되어지고, 즉, 명목적 정의로 환원되어지는 것이라면, 내포명사는 없어져도 좋을 것이 된다.38) 이러한 논의는 이 둘이 심적 언어 가운데 공존할 수 없다는 논의와 맥을 같이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공존이란 곧 심적 동의어가 존재함을 의미하게 된다. 이리 본다면, 내포명사는 없어져 무방한 것(dispensable)이고, 단순내포명사란 없다. 이러한 논의가 타당한 것이라면, 우린 스페이드의 논의에 손을 들어 주어야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논의가 과연 오캄에게 타당한 것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오캄에게 실재하는 범주는 실체와 성질뿐이다. 그렇기에 직관적 인식의 일차적 대상은 실체와 성질뿐이다. 단순한 인식인 직관적 인식으로 얻어지는 단순개념은 이에 따르면 실체와 성질을 의미하는 절대명사뿐이다. 이러한 직관적 인식으로 얻어진 절대명사는 심적 언어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된다. 그리고 내포명사는 이러한 절대명사와 공의어에 의하여 합성된 것이게 된다. 즉 내포명사는 명목적 정의로 환원되어버린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페이드는 내포명사가 단순개념일 수 없으며, 다양한 개념에 의하여 복합된 명목적 정의에 의하여 가능한 개념으로 정의한다. 즉, 명목적 정의가 내포명사보다 인식론적으로 앞서는 것이다. 이러한 스페이드의 논의는 브라운39)과 노모어와 같은 많은 이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논의를 논박하려면, 내포명사가 직관적 인식을 가져야한다고 주장해야한다. 다시 말해 내포명사가 단순한 것이라고 주장해야한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는 내포명사가 일차적인 인식 대상에 대한 직관적 인식에 의하여 주어진다는 것을 함축한다. 만일 이렇다면, 실체와 성질만이 존재한다고 하는 오캄의 존재론적 사유는 실패하게 되고, 결국 오캄의 개념론 전체가 파기되게 된다. 내포명사에 상응하는 다른 범주들도 외부 실재에 참여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스페이드는 자신의 논의가 몇몇 문헌적 어려움을 감안하여도 오캄의 존재론과 의미론을 문제없이 공존하게 하는 방법이라 믿었고, 그렇게 믿고 있다. 즉 스페이드에게 단순내포명사의 긍정은 그 자체로 오캄 존재론의 파기를 의미한다.

그러나 문제는 오캄의 문헌에서 단순내포명사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하얀 것’에 대한 직관적 인식을 언급하고 있다.40) 그뿐 아니라, 파생어의 단순성을 언급하기도 한다.41) 그뿐 아니라, 다음의 글을 보자.


“범주들 가운데 있는 그것은 비-복합적(incomplexa)이다.”42)


이 간단한 글에서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다. 범주 가운데 실체와 성질과 관련된 절대명사가 비-복합적이란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이글에서 범주는 다른 모든 범주에 적용된다. 즉 양과 관계 그리고 능동과 수동... 등에도 모두 적용된다. 남은 범주에 관한 명사가 내포명사이고, 파생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내포명사도 비-복합적, 즉 단순한 것이란 결론이 추론된다. 오캄은 또 다음과 같은 논의의 전제를 던져준다.


“명사(terminus)란 단순한 것(비-복합적인 것)이다.”43)


오캄에게 명사는 기본적으로 단어(dictio)이다. 이와 같은 명사와 단어 그리고 개념은 그 자체로는 우선적으로 단순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개념과 명사로 구성된 명제는 복합적인 것이다.44) 상이한 심적 단어의 합성은 단지 문법적으로 여러 단어가 합성된 것을 넘어 의미론적으로 여러 가지 심적 개념으로 구성됨을 의미한다.


“...어떤 방식에서도 발화도 문자도 아닌 정신 가운데 모든 명제는 사고행위에 의하여 구성되며, 실재에 의하여 구성되지 않는다. 이 명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대한 사고행위와 연계사라 불리는 사고행위에 의하여 구성된다.”45)


우리가 명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 명제를 구성하는 각각의 명사에 준하는 사고행위(intellectio)의 합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고행위의 합성은 곧 복합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사고행위란 후기 오캄에 의하면 개념의 참 모습이다.46) 즉, 하나의 개념은 하나의 사고행위이다.

정리해보자. 실체와 성질을 제외한 다른 범주와 관련된 명사들은 비-복합적이며, 단순하다. 단순하다는 것은 직관적 인식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즉 직관적 인식에 의한 내포명사와 파생어, 간단하게 단순내포명사가 가능함을 의미한다. 사실 하나의 개념은 곧 하나의 사고행위이며, 이 사고행위는 단순한 하나의 행위이다. 이는 내포명사도 그것이 명사 혹은 개념인 이상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은 논의만으로 보자면, 단순내포명사의 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 그러면 이들 내포명사가 하나의 직관적 인식에 의한 것이라면, 이 인식의 대상인 영혼 외부의 대상을 전제하애한다. 바로 그 외부 존재에 대한 직관적 인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오캄의 개념론을 파기된다. 이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분명 ‘하얀 것’이나 ‘이버지’와 같은 내포명사들이 단순하다는 것은 직관적 인식의 대상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러면 오캄은 ‘아버지’와 같은 관계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실재한다고 여겼는가. 결론만 말하자면, ‘아니다!’ 이에 관하여 오캄의 존재론과 의미론을 수용한 한 중세철학자인 무명씨의 저서 『오캄의 옹호』를 읽어보자.


“새로운 형상이 시작됨 없이 관계의 종류에 대한 새로운 관계적 파생어를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만일 작용자가 로마에서 하얀 것을 만들었다면, 동시에 하얀 것은 다치아에서 ‘유사한 것’(simile)으로 파생되어진다. 이때 어떤 새로운 형상도 하얀 것이 로마에서 생성되어짐에 의하여 다치아에 있는 하얀 것에 일어나진 않았다.”47)


당시 이해된 오캄도 존재론적 언질을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오캄의 기본적 생각은 단순내포명사는 존재하지만, 존재론적 언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란 논의일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오캄의 의미론은 자기 존재론을 망치는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다행히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기존의 중세철학자들에겐 실체와 우유가 분명하게 구분된다. 오캄 역시 이러한 구분을 수용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필요 없는 것이 된다. 왜인가. 결론적으로 오캄에겐 지시어가 수적 동일성을 보장한다.48) 즉 지시어가 실체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것도 바로 고정지시어(rigid deictics)이다.

오캄은 단칭명사를 고유명사와 지시어 그리고 지시어와 일반명사로 구분하였다.49) 예를 들자면, ‘소크라테스’와 ‘이것’(haec) 그리고 '이 인간‘이다. 이 가운데 아담스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직관적 인식은 고유명사와 관련된다고 본다.50) 물론 아담스의 논리에 의하면 이것은 당연해 보일 것이다. 직관적 인식이란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영혼 외부의 것에 대한 단순한 경험적 인식과 관련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유에서 적용되는 ’이것‘이 아니라, 실체를 의미하는 고유명사를 직관적 인식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라 보았을 것이다.51) 하지만 이것에도 문제가 있다. 분명한 것은 고유명사는 항상 영혼 외부 경험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파나쵸는 오히려 지시어를 제시한다.52) 필자의 논리에도 이는 어느 정도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 필자의 길에서 이를 설명해 보겠다.

포르피리우스는 개별자를 ‘이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개별자는 우연적 요소의 모임이다. 즉 하나의 ‘이것’인 소크라테스는 소프로니스쿠스의 아들이기도 하고, 하얀 것이기도 하고, 선생이기도 하다.53) 이 모든 것이 ‘이것’에 모인다. 바로 ‘이것’이 개별자이다.54) 여기에서 ‘이것’에 대하여 진술하는 다양한 우유들은 파생어, 즉 내포명사의 형태를 취한다. 여기에서 내포명사는 우선적으로 주체 가운데 성질을 의미하며, 이차적으로 주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논의는 앞서 논의한 알베르나의 페트루스나 아베로에스 이외 많은 중세철학자들이 인정하는 바이다. 이러한 논의의 근거엔 철저한 실체와 우유의 구분이 있다. 우유는 자존하지 않으며 주체 가운데 내재하며 있단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우유에서 파생어가 발생한다. 여기에서 실체는 이러한 다양한 우유들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역할을 행한다. 즉 하나의 실체는 하얀 것이다가 검은 것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실체는 본질적이며, 관계와 같은 것은 우유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우유는 개별자 가운데 어떤 존재의 방식을 가진다. 하지만 오캄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실체와 우유에 관한 구분은 인정하지만 이들의 구분은 개념 속으로 들어간다.

우선 ‘이것’이 개별자란 사실은 오캄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것'에 관한 인식에서 실체에 관한 인식과 우유에 관한 인식은 과거와 같이 나누어지지 않는다. 오캄은 실체에 관한 우리의 직관적 인식, 혹은 경험적 인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실체의 인식이란 오히려 우유를 통하여 반성적 인식이다.55) 영혼 외부에 존재하는 범주란 실체와 성질뿐임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직관적 인식의 대상은 엄밀하겐 성질이 된다. 분명 오캄은 소크라테스와 그의 하양에 관한 직관적 인식이 가능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는 하양이 근거하는 주체라고 할 때, 소크라테스의 하양을 인식한다는 것은 소크라테스와 하양에 관한 직관적 인식이 동시적임을 말한다.56) 오캄에게 하양이 주체 가운데 있다는 것은 주체에 대하여 서술된다는 의미이지 존재론적으로 내재함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하양을 인식함은 하얀 것이란 술어가 서술되어지는 어떤 주체에 대한 직접적 사고행위이다. 하얀 것, 선생, 아버지... 이 모든 것은 주체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는 것이다. 주체 가운데 내재하는 것이 아니다. 즉 주체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술어 혹은 범주란 개념으로 영혼 가운데 있으며, 이 모든 개념들은 어떤 하나의 대상, 즉 ‘이것’에 대한 술어이다. 모든 범주의 명사들은 그것이 실체이건 성질이건 관계이건 양이건 바로 이 ‘이것’에 대한 직접적 인식에서 개념을 얻는다.57) 이 ‘이것’은 현대의 말로 고정지시어이다.

이러한 고정지시어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지시어와는 다르다. 지시어의 특성(character)은 서로 다른 상이한 문맥에 따라서 상이한 대상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즉 그 지시의 내용(contents)이 달라진다.58) 물론 필자가 이야기하는 고정지시어는 이러한 것이 아니다.

개별자인 소크라테스도 ‘이것’이다. 이 이것은 최초 소크라테스라는 명칭이 주어지기 이전에 주어진 것이며, 이때 심적 언어 가운데 이것은 다른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경우에 적용되지 못하는 고정지시어이다. 바로 이러한 ‘이것’은 아직 무엇이 아니다. 이것에 대한 직관적 인식이 영혼 가운데 하나의 습성(habitus)으로 남게 된다. 이 습성은 외부에 관한 사고행위로 영혼 가운데 주어진 유사성이다.59) 이렇게 영혼 가운데 주어진 습성은 또 다시 동일한 대상에 대한 직관적 인식이 일어날 때, 동일성을 유지하며 개념화되어진다. 즉 이것은 소크라테스로 아들로 선생으로 하얀 것으로 개념화되어지며, 이들은 ‘이것’에 대한 다양한 개념화이다. 이것은 이 모든 개념, 즉 명사들이 기인하는 것이지만, 이 명사들이 실재를 반명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이것에 대한 직관적 인식과 개념화로 영혼 가운데 명사로 있을 뿐인 것이다. 포르피리우스 저서의 주제는 보편자이며, 이 보편자는 주어에 대한 술어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어는 실체이다.60) 그런데 오캄은 지시어가 이 실체의 역할을 대신한다. 즉 술어의 동일성을 지시어가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이고, 아들이며, 하얀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결국 직관적 인식의 대상은 ‘이것’이고, 이 고정지시어에 대한 다양한 직관적 인식들이 영혼 가운데 습성으로 주어진 것이 각각의 개념 혹은 명사가 된다. 그렇기에 보편자는 영혼 외부에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 가운데 있는 것이 되며, 결과적으로 개념일 뿐이게 된다.61)

앞서 무명씨가 선보인 “유사한 것”에 대한 인식은 실체에 관한 직관적 인식이 아니라, 그것의 하양이란 성질에 관한 직관적 인식에서 기인한다. 만일 실체에 관한 것이라면, 유사한 것이란 술어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실체는 직관적 인식의 직접적 대상이 되지 못하며, 유사한 것으로 서술되어지는 것이 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계명사는 우유에 관한 직접적인 직관적 인식의 산물이다. 즉 단순내포명사이다.62) 또한 ‘유사한 것’과 마찬가지로 ‘하얀 것’이란 내포명사도 ‘이것’에 대한 술어이며, 이것은 일차적으로 하양을 가지는 물체를 지시하며 이차적으로 하양 그 자체를 지시한다. 여기에서도 ‘하얀 것’이란 내포명사의 직관적 인식은 가능하다. 이것은 복합적 인식이나 사고과정을 걸치지 않는 것이다.

오캄은 이와 같이 내포명사와 관련된 직관적 인식이 가능하지만, 이것이 실재의 반영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문헌적 증거를 가지기도 한다.63) 결과적으로 모든 범주 가운데 이 모든 것은 ‘이것’에 대한 직관적 인식의 방식 차이에 따른 것이다. 실체와 성질을 포함하여 범주 가운데 모든 명사들은 단순한 것이며,64) 직관적 인식의 대상이란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오캄은 실체와 우유에 관한 구분을 인정한다. 실체와 성질은 '무엇임 가운데'(in quid), 즉 본질적인 부분과 관련되며, 그 외 다른 범주의 우유들은 우연적인 측면을 나타낸다.


“관계는 실체 혹은 성질의 류에 대하지 않은 어떤 실재를 지시하진 않는다. 그리고 무엇임 가운데(in quid) 어떤 것에 대하여 서술되어지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 유사한 것(simile)은 인간과 하양에 대하여 무엇임 가운데 서술되지 않는다. 이것은 그것이 서술되는 것 그 자체가 아닌 어떤 것을 내포한다. 마치 양과 관계에 대한 것이 그러하며, 이렇게 그 이외 여섯 가지의 다른 모든 범주에 대하여 그렇다.”65)


관계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즉 오캄은 실체와 성질 그리고 그 이외 우유들을 구분한다. 이에 따라 결과적으로 절대명사와 내포명사의 구분 역시 인정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것’에 대한 것이며, 이것에 대한 술어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란 점에서 실체와 우유에 관한 과거와 같은 구분은 필요 이상의 것이 된다.66) 결국 영혼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이것’, 즉 개별자이며, 이것의 본질적 요소가 실체와 성질이며, 이것에 우유적 요소들은 그 외 범주이며, 이 본질적인 것이 아닌 것들이 내포명사를 이룬다. 이와 같이 내포명사도 절대명사도 이것에 대한 직관적 인식에서 기인하는 단순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스페이드가 이야기하듯이 오캄 존재론의 패기를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본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


4. 오캄의 심적 언어와 심적 동의어.

단순내포명사가 가능한 것이라면, 명목적 정의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적어도 이 둘이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과연 이 둘이 동일한 방식이라고 해야 하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오캄의 심적 동의어가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오캄은 곳곳에서 동의어를 부정하고 있다. 문헌 분석의 측면에서 차머스의 논의가 가진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 빈약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규약언어의 동의어가 심적 언어의 동의어를 의미한다는 것은 비-오캄적이다.


“동의어적 <규약언어의> 명사 가운데 어떤 것도 개념의 다수성에 일치하지 않는다.”67)


여기에서 분명히 규약언어의 동의어가 심적 언어의 다수성, 즉 심적 동의어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다음의 글을 보자.


심적명사 가운데 가정되는 그러한 다수성은 그리 큰 필요성(necessitas)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중략>...그러므로 개념의 다양성은 동의어의 그러한 다수성에 일치하지 않는다.”68)


이러한 논의는 오캄에겐 매우 흔한 것이다. 이와 같이 문헌에 의하여 스페이드와 파나쵸 그리고 게스킨 등은 한결같이 심적 동의어를 부정하고 있다. 스페이드는 내포명사와 명목적 정의는 동의어이며, 그렇기에 인식론적으로 우선한 명목적 정의를 제외한 내포명사는 없어도 좋을 것으로 해석한다. 만일 이러한 해석이 사실이라면, 앞서 필자가 논의한 단순내포명사와 관련된 모든 논의는 패기 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비판을 피하기 위하여 단순내포명사의 존재를 옹호하기 위하여 단순내포명사와 명목적 정의가 동의어가 아님을 보여야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 둘이 동의어가 아니라면, 어느 하나가 없어져도 좋을 것이 되진 않을 것이다.

스페이드는 맹인(caecus)이 그것의 명목적 정의가 동일한 방식에서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러한 해석에 의하면, ‘맹인’은 봄(visus)을 ‘부정적으로’(negative) 의미한다. 그리고 ‘맹인’의 명목적 정의는 ‘봄을 가지지 않는 동물’이다. 즉 ‘봄을 가지는 동물’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의미한다. 이렇게 된다면, 내포명사인 ‘맹인’과 그것의 명목적 정의는 모두 ‘부정적으로’라는 동일한 방식에서 동일한 대상을 의미하는 꼴이 된다. 그러면 맹인이란 내포명사는 동의어이며, 내포명사는 명목적 정의로 환원되어야할 것이 된다.69)

하지만 근본적으로 오캄에게 정의와 정의된 것은 동의어가 아니다.


정의(definitio)와 정의된 것(definitum)은 동일하지 않다. 왜냐하면 정의는 길어진(longus) 심적, 발화적, 문자적 진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영혼 외부 존재와도 그리고 정의된 단일한 명사와도(uno termino) 동일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정의된 것은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일반적으로 ‘정의와 정의된 것은 실재적으로 동일하다’라고 이해되어지는 방식이다.”70)


정의는 정의된 것의 길어진 혹은 펼쳐진 진술이다. 펼쳐진 진술은 여러 사고작용에 의한 복합적 포현이다. 이것이 하나의 단순한 명사와 동일할 순 없다. 하지만 동일하다고 하는 것은 동일한 대상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일한 대상을 취하는 것이 동의어인 것은 아니다. 이는 단순하게 프레게와 콰인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콰인에 의하면 ‘심장을 가진 동물’과 ‘신장을 가진 동물’은 그 외연이 동일하다. 그러나 ‘심장을 가진 동물’이란 개념의 의미는 ‘신장을 가진 동물’이란 개념의 의미와 동일하지 않다. 즉 ‘심장을 가진 동물’과 ‘신장을 가진 동물’은 대상만이 동일할 뿐,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71) 이와 유사한 경우를 프레게의 ‘샛별’과 ‘개밥바라기’의 경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72) 이로 볼 때, 동일한 대상을 취하지만 분명히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오캄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의와 정의된 것은 분명하게 동일한 대상을 취한다는 의미에서 동일하지만, 동일한 의미론적 위상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내포명사와 명목적 정의의 경우, 내포명사는 직관적 인식으로 얻어진 것을 감안한다면, 단순한 것과 복합적인 것으로 구분된다. 의미론적으로 이 둘은 동일하지 않다. 하지만 동일한 대상을 취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로 볼 때, 이 둘을 동의어로 보는 것은 많은 문제를 가진다. 이는 오캄 의미론의 핵심에 있는 지칭(suppostio)73)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칭론의 이해를 위해선 크게 세 가지를 이해해야한다. 단순지칭(suppositio simplex)과 인칭지칭(suppositio personalis) 그리고 실질지칭(suppositio materialis)이다. 첫째, “인간은 종이다”에서 ‘인간’은 독립된 단어 ‘인간’과는 그 뜻이 다르다. 문장 속에서 이 ‘인간’은 개별적 인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심적명사를 지칭한다. 이를 ‘단순지칭’이라 한다. 둘째, “인간은 달린다”에서 ‘인간’은 ‘달리는 개인’을 지칭한다. 그 경우 참이다. 이러한 ‘인간’은 영혼 외부의 개별자를 지칭한다. 이를 인칭지칭이라 한다. 셋째, “인간은 두 글자이다”에서 ‘인간’은 심적명사도 개별 인간도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단어 혹은 발화적 음성(의 무엇임) 등을 지칭한다. 이것을 ‘실질지칭’이라 한다.74)

오캄은 명목적 정의와 그 주어를 실질지칭의 관계로 이해했다.75) 즉 ‘하얀 것’과 ‘하양을 가지는 어떤 것’은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의미의 차원이 아니라, 지칭의 차원에서 생각해만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칭이 의미(significatio)와 분명한 차이를 가진다는 것을 이해해야한다. 의미는 독립된 단어와 관련된다. 즉 ‘인간’이 어떤 문맥 가운데 기능하지 않아도 우린 이 단어의 ‘의미’를 이해한다. 하지만 이러한 단어가 문장 속에서 기능할 경우 ‘인간’이란 단어는 위의 경우와 같이 서로 상이한 지칭과 관련되어 상이한 뜻을 가진다. 경우에 따라 심적명사, 개별자, 그리고 단어 자체의 무엇임을 의미하게 된다. 내포명사는 존재론적 언질 없이 영혼 가운데 있는 심적명사일 뿐이다. 이러한 명사 자체의 무엇을 설명하는 복합 표현이 명목적 정의이다. 실질지칭은 하나의 단어를 그 단어의 무엇임과 관련하여 사고하게 해 준다. 여기에서 우린 내포명사와 명목적 정의의 관계에 실질지칭에 적용됨을 이해할 수 있다. 명목적 정의란 그 단어의 무엇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칭으로 관계를 가지는 것은 동의어일 수 없다. 동의어란 의미의 문제이지, 지칭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의 글을 보자.


“명칭의 무엇임을 설명하는 정의[=명목적 정의]는 동사(verborum), 부사(adverbiorum), 접속사(coniunctionum)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어디’(ubi)란 것을 정의하고자 하는 이는 ‘장소에 대한 의문부사’라고 말할 것이며, 유사하게 ‘언제’(quando)는 ‘시간에 관한 의문부사’라고 말할 것이고, 다른 것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는 실질적으로(materialiter) 지칭하는 한에서 정의되어지는 것에 대하여 정의가 서술되어진다.”76)


이와 같이 실질지칭이 적용되는 두 표현은 동의어일 수 없다. ‘어디’가 ‘장소에 대한 의문부사’와 동의어일 순 없다. 오히려 명목적 정의는 이 경우 메타언어적이다. 언어적인 것과 메타언어적인 것은 동일한 방식에서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오캄식의 동의어가 이곳엔 적용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우는 다음에서 더욱 더 두드러진다.


“‘실체는 단어(vox)이다’와 ‘양은 단어이다’라는 것은 그 주어가 의미적이지 않고, 실질적으로 지칭하는 한에서 참이다.”77)


실체는 단어와 동의어인가. 이 둘은 실질지칭의 관계로 참이 될 수 있는 명제를 이룬다. 하지만 이 둘은 동일한 것을 동일한 방식에서 의미하는 의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지칭 차원의 문제에서 이해되어야 온전히 이해되어지는 것이다.

스페이드는 맹인과 그 명목적 정의를 동의어라고 하였다. 이 둘이 동일한 방식에서 동일한 것을 의미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내포명사와 명목적 정의는 이와 같은 의미의 관계로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실질지칭의 관계이다. 이 둘이 실질지칭으로 관계된다면, 이 둘은 동의어일 수 없다.


5. 나가는 길.

스페이드의 해법에 의하면 심적 동의어는 없다. 그런데도 내포명사와 명목적 정의는 동의어이다. 그 말은 심적 동의어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둘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하나로 환원되어 없어져도 무방한 것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는 단순내포명사가 없으며, 내포명사는 명목적 정의로 환원되어지는 복합내포명사일 뿐이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해석에 의하면 단순내포명사가 있다는 것은 이것이 직관적 인식으로 얻어진다는 것이며, 이는 내포명사가 의미하는 우유들이 직관적 인식의 대상으로 영혼 외부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실체와 성질을 제외한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은 오캄의 존재론이 실패했음을 의미하게 된다. 그렇기에 단순내포명사는 심적 동의어의 부재를 위해서 그리고 오캄 존재론의 전체적 흐름을 위해서라도 없어야한다.

하지만 파나쵸는 이러한 해석에 반론을 제기하고, 오히려 오캄의 존재론과 의미론을 위하여 단순내포명사는 있어야만 하며, 이러한 단순내포명사와 명목적 정의는 동의어의 관계로 어느 하나가 없어져도 좋을 것이 아니라, 심적 언어 가운데 공존 가능하다고 본다.

필자는 엄밀하게 직관적 인식의 대상은 ‘이것’이며, ‘이것’에 관한 여러 술어인 범주들은 결국 ‘이것’에 대한 직관적 인식에 기반 한다고 하였다. 단지 이것의 본질적 측면을 이루는 것이 절대명사를 그리고 우연적 측면을 이루는 것이 내포명사를 이룬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모두는 이것에 대한 직관적 인식에 기반 한다는 것에선 차이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 오캄에게 우유와 실체 사이 주어지는 과거와 같은 구분은 필요 이상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내포명사와 절대명사는 모두 ‘이것’에 대한 직관적 인식에서 기인하며, 단순한 것이다. 즉, 단순한 내포명사는 존재 가능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내포명사는 명목적 정의와 동의어가 아니다. 만일 동의어라면, 분명 스페이드가 해석하듯이 이 가운데 하나는 없어져야 만이 오캄의 심적 언어에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은 실질지칭이 적용되어지는 것으로 동의어가 아니다. 동의어는 의미의 문제이지만, 오캄의 문헌에서 다루어지는 내포명사와 명목적 정의의 문제는 의미 차원이 아니라, 지칭 차원에서, 그것도 실질지칭 차원에서 다루어진다. 그렇기에 단순내포명사와 명목적 정의는 오캄의 심적 언어의 체계 가운데 공존이 가능하다.

논의의 시작에서 필자는 두 가지 물음을 던졌다. 이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답을 하겠다. 심적 동의어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순내포명사는 존재할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논의가 오캄의 의미론과 그의 존재론을 더욱 더 분명히 드러낸다고 확신한다. 앞으로 이루어져야할 오캄 존재론의 면도날이 향하는 방향과 면도날의 실체에 관한 더욱 더 많은 논의를 남겨 두고 이만 글을 줄인다.

























<참고문헌>


1차 문헌


오캄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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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캄 개별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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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____________, Summa logicae, ed. Ph.Boehner et al. OPh. 1 (1974)

___________________, Expositio in librum perihermenias aristotelis ed. A.Gambatese et al. OPh. 2 (1978)

__________________,  Expositio in librum praedicamentum aristotelis, ed. G.Gal, OPh. 2 (1978)

__________________, Quodlibeta septem, ed. J.Wey OTh. 9 (1980)

__________________, Expositio in librum porphyrii de praedicabilibus ed. A.Gambatese et al. OPh 2 (1978)

__________________, Quaestiones in libros physicorum aristotelis, ed. S.Brown, OPh. 6 (1984)

Ps-Ockham, Tractatus minor logicae, Elementarium logicae ed.. G.Etzkorn, OPh. 7 (1988)


그 외 1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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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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