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6년도 2학기 대구가톨릭대학교 철학과 학생회 주최 세미나에서 유학장이 발표한 글입니다.]
중세 유럽과 무슬림 음악학(음악철학)에서 피타고라스의 위상과 복원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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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교양인의 필수품이었다. 조선의 선비도 풍류 없이 존재할 수 없었고, 서구의 스콜라티쿠스, 즉 스콜라학자들도 음악에 관한 이해 없이 존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음악은 단순한 취미의 수준을 넘어 그들의 철학적 사변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이것은 음악뿐 아니라, 당시 예술 전체가 그러했다. 예술은 그런 의미에서 문자언어로 기록된 고전과 함께 과거의 철학을 확인하는 또 다른 형태의 고전이라 할 수 있다. 안견의 그림에서 조선 초기 성리학의 세계관을 볼 수 있으며, 김홍도와 정선의 그림에서 박지원, 홍대용 경세치용 학파의 철학을 볼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서양 역시나 다르지 않다. 그리스의 조각과 고중세 음악에서 피타고라스의 존재론을 볼 수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당시 많은 철학자들은 그들의 음악철학적 논의에서 항상 피타고라스의 존재론을 결부하여 사고해 왔다. 그것은 음악이 단순히 취미의 단계를 넘어 피타고라스 철학의 흔적 혹은 피타고라스 철학의 화석(化石)임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문헌학적으로 당시 철학자와 음악이론가들의 문헌을 통하여 너무나 빈번하고 쉽게 찾아 읽을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러한 문헌학적이고 역사적 사실로 볼 때 피타고라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후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비록 두 사람과 같이 신학이나 존재론적 담론은 아니지만, 예술 철학의 담론에서 피타고라스는 지배적 이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가 자연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고 음악학은 피타고라스가 역사의 무게를 지탱하였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본 논의는 피타고라스의 철학이 고중세 음악이론에 어떤 영향을 주었고, 그 영향이 어떤 형태로 역사 속에서 드러났는가를 다루고자 한다. 즉 단순히 음악의 형태가 아니라, 그 속에 숨은 철학을 살피고자 한다.1)
음악 이해를 위한 존재론적 사유
피타고라스는 우주를 수학적 원리로 이해하였다. 우주란 수학적 원리의 반영이며, 우주를 코스모스, 즉 질서를 가진 것으로 만드는 수학이란 바로 우주를 우주로 존재하는게 하는 그러나 우주를 넘어서는 어떤 초월적 원리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수학은 진정한 메타-물리학(meta-physica: 초-자연학), 즉 형이상학의 위상을 가질 만 한 것이다. 모든 물리적인 것, 감각적인 것을 넘어 영원히 존재하는 어떤 수학적 존재는 이러한 이유에서 변화무쌍하고 상대적인 것으로 가능한 세상에 비하여 숭배의 대상이 될 만한 것으로 여겨졌다.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의 몸매보단 8등신의 몸매를 미(美)의 기준으로 삼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이다. 수학의 비례가 잘 드러난 것은 아름다움이며, 수학이 없는 곳엔 아름다움도 없었다. 그것은 아름다움이란 숭배할 만한 것, 즉 높은 가치를 가지는 것이며, 이것은 바로 수학이기 때문이다. 수학이 드러난 몸은 아름답다. 즉 8등신은 아름답다. 이렇게 수학은 인간 몸매의 기준을 제시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8등신으로 조각을 만다는 것은 수학적 비례, 즉 우주의 질서, 그 질서의 영원한 미 가운데 자신을 편입하려는 인간의 욕망이라 볼 수도 있다. 그리스의 조각을 보자. 그 비례성. 그 비례성은 현실의 인간보다 더 현실적인 그 무엇, 즉 수학적 존재를 보게 된다. 이러한 논리에서 수학적 비례의 인간은 영원히 존재하는 진정한 존재이며, 오히려 지금 우리가 감각하는 이런 인간들은 덜 존재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그리스의 조각엔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이 녹아있다. 그런데, 음악도 다르지 않다.
음악의 세 요소는 멜로디와 리듬 그리고 화성이다. 리듬은 그 자체로 수학적이다. 일정한 수학적 비례에 따른 운동이 바로 리듬이 아닌가 말이다. 화성 역시 다르지 않다. 음들이 가지는 어떤 수학적 비례성에 근거한 것이니 말이다. 음악은 그 자체로 수학적인 것이다. 그런데 피타고라스에 의하면 우주(mundus)는 그 자체로 수학적 존재이다. 그렇다면, 우주는 곧 음악이 된다. 맞다. 보에티우스와 이시도루스(ca. 570 - 636)는 우주에서 음악을 보았고, 음악에서 우주를 보았다. 이시도루스의 『음악에 관한 견해』(Sententiae de musica) 3장의 한 글을 읽어보자.
“음악 없이 어느 학생도 완전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 없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주(mundus) 그 자체는 소리들의 어떤 조화로 합성된 것으로 있음이라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의 형성됨으로 조화 가운데 천체(coelum) 그 자체는 운행한다.”2)
이 당시 지식인은 모든 지식을 철학적 지식에 근거하여 정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으로 인하여 모든 지식은 철학이란 이름으로 하나 되어 있었다. 음악학도 다르지 않다. 이런 가운데 음악은 지식인의 기본적 교양이 된다. 그것은 우주가 곧 음악이기에 우주를 고민하는 이들은 음악을 꼭 이해해야하기 때문이다. 우주는 수학적 조화이며, 이는 소리의 수학적 조화인 화음에 비견될 것이고, 천체가 일정하게 움직이며, 태양과 달이 뜨고 지는 것을 보면 그 천체는 리듬에 비견될 것이다. 이시도루스는 이와 같이 우주를 음악이라 하고, 음악이 없는 것에서 어떤 유익한 지식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3장의 타이틀은 “음악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Quid possit musica)란 물음에 대한 고민이다. 답은 간단하다. 음악은 지식이 필수이며, 어떤 의미에서 우주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이시도루스의 지식인은 우주를 수학적으로 파악하는 지식인, 바로 피타고라스적 지식인이다. 역으로 음악은 피타고라스적 존재론적이 스며든 것이며, 그것으로 가치를 가지는 그 무엇이 된다. 이 당시 음악은 철학이다. 철학의 일부이며, 철학자는 음악을 통하여 우주를 본다. 철학은 그렇게 음악에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이때 철학은 무엇보다 피타고라스의 존재론에 근거한 철학이며, 그런 의미에서 음악자란 피타고라스철학의 실천가이다. 이제 고대와 중세 시대를 통하여 음악에 얼마나 철학이 녹아들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음악에 관한 기본적 이론들이 얼마나 존재론적 사유와 관계를 가지는지를 다룰 것이다.
음악에서 리듬과 화음.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고대 피타고라스주의의 존재론은 음악에 핵심적 위상을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는 중세로 이어져간다. 바로 여기에 보에티우스, 이시도루스, 카시오도루스,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첸소리누스(Censorinus, fl. c.238) 등이 있다. 이들은 앞선 시대 존재론적 사유 속의 음악관을 중세로 전해준다.
이 가운데 우선 이시도루스의 논의를 살펴보자. 그는 앞선 논의에서 이미 보인 바와 같이 피타고라스적 관점에서 음악을 이해하고, 정의하였다. 그런 그는 이러한 존재론적 기반 속에서 음악을 분류한다.
“음악의 부분들은 셋이다. 즉, 화음, 리듬, 척도이다. 화음(harmonica), 그것은 고음과 저음의 소리 가운데 분별되어진다. 리듬(Rhythmica ), 그것은 소리가 좋게 구성되어지든지 나쁘게 구성되어지든지 발화의 조우(incursionem, 遭遇)이다. 척도(metrica), 그것은 믿을 만한 근거에서 다양한 기준들의 헤아림을 인식하게 한다. 예를 들어, 영웅찬양가, 애가(哀歌) 등이다.”3)
이시도루스는 화음과 리듬을 중시한다. 음악의 세 요소들이 통일되지 않지만, 적어도 이 둘이 빠지는 경우는 없다. 예를 들어, 고대 위-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인 『화음에 관하여』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의 글을 읽어보자.
"왜 누구나 리듬(ρυθμῳ)과 톤(ὅλως) 그리고 화음(συμφωνιαις)을 즐기는가? 왜 우리는 그로 인하여 자연적 운동을 즐기는가? 이는 새로 태어난 아기 역시 그러한 것을 즐긴다는 것에서 분명해진다. 우리는 도덕적 지시에 의하여 노래를 즐긴다. 또한 우리는 리듬을 즐긴다. 규칙적 리듬으로 알려지며, 규칙적인 운동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자연적으로 규칙적인 운동은 비규칙적인 것 보다 더 친근하며, 본성(자연)에 더 적절하다(κατα φύσιν μαλλον). 규칙에 맞게 행하고 먹고 마신다면 우리는 본성(φυσιν)과 능력(δυναμις)을 보존되고 강화되는 것으로 분명해진다. 그러나 불규칙적인 것은 그러한 것을 약하게 하고 상하게 한다. 육체의 병들은 자연(본성)에 따른 정돈된 운동엔 있지 않다. 우리는 화음(συμφωνιᾳ)을 즐긴다. 왜냐하면 다른 것에 대한 조화관계를(λογον) 가지는 반대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조화관계(λογος)는 정돈된 것(ταξις)이며 이는 자연적으로 즐거운 것(ἡδύ)이다.“4)
위-아리스토텔레스는 음악을 음과 화음 그리고 리듬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정의한다. 여기에서 리듬은 우리가 즐기는 것이며, 그 이유는 그것이 규칙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규칙적인 것이란 수학적 비례에 따른 일정의 간격을 가진 형태의 운동을 의미한다. 이러한 리듬이 인간에게 적절한 것이 그것이 우리의 본성에 적절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를 든다. 자연에서 리듬을 가진 삶은 건강하지만, 리듬을 가지지 않은 불규칙적인 삶은 육체적 병을 야기한단 사실이다. 이러한 예에서 리듬이 가지는 상태가 우리에게 본성적으로 적절한 것임을 보인다. 그렇기에 리듬은 우리에게 즐거운 것이며, 우리의 본성과 능력에 이로운 것일 수 있다. 중세 음악이론가인 레기노 폰 프룀은 불협화음은 귀에 거슬리는 것이라고 한다.5) 하지만 더욱 더 적절한 표현은 이러한 것은 우리의 본성에 적절하지 않은 것이며, 그렇기에 우리의 귀를 괴롭히는 것이다. 우주를 자연적으로 수학적 질서를 가지지만, 불협화음은 이러한 우주의 자연적 질서를 무시한 것이고 이로 인하여 자연을 거스른단 것이다.
분명 화음 역시 피타고라스적 존재론이 스며들어있다. 중세 무슬림 철학자 알 파라비는 음악학을 화음의 종에 대한 최상의 인식이라 정의했다.6) 화음이란 하나의 조화이며, 정돈된 것이다. 이러한 것 역시 불협화음에 비하여 우리에게 자연적으로 즉 본성적으로 즐거운 것이다. 14-15세기 인물인 고벨리누스(Gobelinus Person, 1358-1421)는 음악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음악은 다음과 같이 기술된다. 음악은 상이하고 조화로운 것을 비례적으로 분별하는 소리의 예술이다.”7)
여기에서 음악은 서로 다르고 조화로운 것의 비례에 그 근거가 있다고 정의된다. 즉 화음이 음악 이해의 핵심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시도루스 역시 음악의 기본적 요소 가운데 화음과 리듬을 든다.
중세인들에게 화음음악은 인간의 목소리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리듬은 때림으로 역주되는 악기로 실행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음악의 기본적 요소들은 그 연주의 방식에 따라 음악의 물리적 구분으로 이어진다.
음악의 물리적 형태에 따른 구분.
음악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 화음음악과 오르간음악 그리고 리듬음악이다. 이시도루스가 전개하는 음악의 구분을 읽어보자.
“첫째는 화음이며, 이것은 노래의 발화로부터 구성된다. 두 번째는 오르간적이며, 이것은 호흡으로부터 구성된다. 세 번째는 리듬적인 것이며, 때려진 막대들의 수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목구멍을 통하듯이 발화로 소리가 마련(화음음악)되거나, 나팔을 통하여 혹은 피리를 통하듯이 호흡을 통하여 마련되거나(오르간음악), 혹은 심벌에 의하듯이 때림(리듬음악)으로 혹은 임의의 것에 의하여 노랫소리의 때림인 또 다른 것이 마련되기 때문이다.”8)
이시도루스가 이야기하는 이러한 구분은 이시도루스만의 것은 아니다. 그 이전 3세기 음악이론가인 첸소리누스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의 부분은 화음적, 오르간적, 리듬적이다... 화음적인 것은 구성되는 것이며, 오르간적인 것은... 그리스어 리듬은 이 그리스어에서 명칭을 가진다. 이것은 그것과 그것 자체가 구분된 것이 열거되는 것이다.”9)
그뿐 아니라, 14-15세기 인물인 고벨리누스에게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화음음악(Musica harmonica)은 인간의 소리 가운데 구성된다. 그리고 인간 창조의 기원으로부터 그 시작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된다.
오르간음악(Musica organica), 그것은 호흡에 의하여 야기되는 것이다...
리듬음악(Musica rhythmica), 그것은 맥박과 심장의 박동에 의하여 야기되는 것이다. 이는 치타르 등으로 연주된다.”10)
그러면 화음음악과 오르간음악 그리고 리듬음악은 무엇인가? 화음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목소리에 근거한 음악을 말한다. 반면 오르간음악은 호흡에 근거하는 음악이다. 예를 들어, 이시도루스가 이야기하듯이 나팔과 피리로 연주되는 음악이다. 또 다른 하나의 구분은 리듬음악이다. 중요한 것은 단지 북이나 심벌을 넘어 치타르와 같이 막대와 피크로 쳐서 연주되는 악기들은 리듬음악의 요소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악기들은 일정한 박자에 따라 때림으로 연주되기 때문이다.
음악의 기본적 요소는 화음과 리듬으로 정리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멜로디를 더할 수도 음을 더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화음과 리듬은 음악의 본질적 부분이다. 화음은 사람의 입으로 나온 것이다. 즉 목소리에서 기인한다. 목소리의 음이 화음을 이룬다. 한편 리듬은 때림이다. 그러나 음률이 있는 악기의 때림도 그것이 일정한 수학적 비례에 의한 규칙적 움직임에 의존하기에 리듬음악에 속한다. 우리 악기 가운데 거문고와 같은 것이 그리고 중세 악기 가운데 치타르와 같은 것이 리듬음악에 속하는 악기인 이유는 바로 이러한 것이다.
그러면 오르간음악은 어떠한 것인가. 이시도루스의 소개를 따라가 보자.
“두 번째 구분은 오르간음악이다. 그 가운데 호흡을 불어놓음으로 채워진 발화의 소리 가운데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어 나팔과 풀피리 그리고 ... 이러한 악기들이 그렇다.”11)
화음과 리듬이 수학적인 미, 즉 피타고라스적 존재론에 근거한 미를 완성하는 요소라면, 오르간음악은 음악에 감정을 불어놓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여기에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필자가 번역한 단어는 라틴어로 animantur이다. 이는 ‘영혼을 불어놓는다’ 혹은 ‘생명을 불어놓는다’라는 의미도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오르간음악은 음악은 어떤 의미에서 피타고라스적 음악관계에서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다.
피타고라스적 존재론에 의하면 이곳에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것보다 초월된 수학적 질서와 원리, 즉 그 영원성을 중시한다고 보았다. 화음과 리듬은 이러한 의미에서 음악 가운데 피타고라스의 존재론이 가장 강하게 스며든 부분이다. 하지만 음악이 가진 정확한 수학성을 넘어 타인에 대한 호소력에선 오르간음악의 기능이 무시하기 힘들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음악은 여전히 수학적이다. 중세 무슬림철학자들의 음악관이나 14-15세기 음악이론가들 모두 음악을 수학적 조화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였다. 위-아리스토텔레스는 리듬은 규칙적 움동으로 규정하였다. 또 다른 고대 철학자인 플라톤은 리듬을 움직임의 질서라 정의하였다. 그리고 교부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잘 움직이는 예술(ars bene movendi)라 정의하였다. 위-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러한 규칙적인 운동, 즉 수학적 비례를 가지고 일정한 운동을 하는 리듬은 우리의 본성에 적절하다. 즉 우리는 수학적 존재이다. 피타고라스에 의하면 우주는 수학적이다. 그렇기에 우리도 수학적이며, 수학적인 것은 우리의 본성에 적절한 것이다. 그렇기에 리듬은 즐거운 것이다. 그것이 즐거운 이유는 우리가 수학적 존재이며, 우리의 본성에 적절한 것이기 때문이다. 화음도 다르지 않다, 화음도 정돈된 것이다. 그저 보이 좋게 정돈된 것이 아니라, 수학적 비례 가운데 정돈된 것이다. 그렇기에 리듬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본성에 적절한 것이다.
리듬은 고벨리누스의 위의 글에서 확인하였듯이 우리의 맥박과 심장박동에 의한 것이다. 리듬은 우리의 본성, 적어도 심장과 맥박에 적절하다. 위-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리듬을 우리의 물리적 능력과 본성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리듬은 막대로 때림 혹은 두드림의 형식으로 연주되며, 이렇게 연주되는 음악을 리듬음악이라 한다. 반면 화음은 목소리에서 기인한다. 알퀸(Alcuin, c.735-804)에 의하면, 인간 목소리의 차이(differentia)와 그 수학적 비례의 양(quantitas)에 의하여 화음이 일어난다.12) 이러한 화음 역시 리듬과 같이 우리의 본성에 적절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즐거운 것이다.
이러한 음악은 매우 이성적이다. 사실 수학적이란 것은 매우 합리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수학적 기초 위의 음악은 매우 정확한 합리성에 근거한다. 어쩌면 오르간음악은 이러한 음악에 감정의 여지를 남기는 것은 아닐까 한다.
인간 인식에서 음악의 학문적 위상
보에티우스는 인간 인식을 이론학과 실천학으로 구분한다. 실천학은 윤리학, 경제학, 정치학으로 세분되며, 이론학은 자연학과 수학 그리고 신학으로 세분된다. 여기에서 음악은 수학의 분과로 속하게 된다. 음악 역시나 이미 논의한 바와 같이 수학적 요소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우주는 거대한 음악, 즉 수학적 조화를 갖춘 것이며, 인간이 행하는 음악이란 이러한 우주적 조화는 아니지만, 인간적인 조화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에티우스의 논의에 의하면 자연학, 즉 움직이는 것에 관한 학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근거하며, 신학은 플라톤에 근거한다. 또한 수학, 즉 음악은 피타고라스에 근거한다. 고벨리누스는 음악의 이해는 현인 철학자 피타고라스에 의하여 준비되었고, 이것이 보에티우스에 의하여 헬라에서 라틴으로 전해졌다고 적고 있다.13) 이와 같이 피타고라스의 철학은 고스란히 그의 음악 분류에 적용된다.
“그 가운데 음악의 능력이 이야기되어지는 세 가지 음악이 있다. 그러므로 우선 논의되는 음악에 대하여 잠정적으로 그것들이 논의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연구를 위하여 음악의 종류(musicae genera)는 얼마나 되는 것으로 파악되어지는가. 바로 셋(tria)이다. 그 첫 번째는 우주적 음악(mundana)이다. 또한 두 번째는 인간적 음악(humana)이다. 셋 번째는 음률을 형성하는 키타르(cithara)와 피리(tibiis) 그리고 그 이외 다른 악기들에서와 같이 악기(instrumentis)에 의하여 구성되어지는 음악이다.”14)
우주는 하나의 우주이며, 수학적 비례와 조화로 가득하다. 그렇기에 우주를 연구하는 보에티우스에게 수학의 한 분과이다. 또한 이것은 음악과도 관련된다. 이제 음악은 단지 하나의기술을 넘어 학문의 한 영역, 그것도 아주 핵심적인 영역을 이룬다. 우주와 인간을 연결하는 고리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학은 단순하게 우주의 조화를 반영하는 악기의 연주를 넘어 우주를 체험하는 학문의 한 영역이다.
이제 음악은 학자의 기본적인 소양이 되었다. 학자는 음악 이해란 이름으로 피타고라스의 철학을 체득해야만 했다. 그 역시 중세인들에게 한 명의 철학자로 전해졌다. 13-4세기 인물인 고벨리누스라는 음악 철학자 혹은 음악학자는 분명히 그를 philosophicus, 즉 철학자라 칭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유럽에만 한 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중세 무슬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을 모두 정리하고, 이에 관한 개론서를 적는 등 활발하게 고대 그리스 철학을 무슬림 사회에 체득하게 한 인물인 알 파라비 역시 음악을 피타고라스주의와 관련하여 사고하였으며, 이는 학자의 기본적 소양으로 이해했다.
“음악의 학문은 참으로 조화의 종류 가운데 최상의 인식 가운데 파악된다.”15)
보에티우스도 알 파라비도 모두 음악이 학자의 기본적 소양이라 확신하였다. 음악이란 단순한 취향이나 즐김의 대상을 넘어 우주론적 사유의 대상이었고, 피타고라스의 정신이 화석화되어 역사 속에 살아 활동한 하나의 고전이었다. 피타고라스가 수학을 통하여 우주를 보고, 천문학과 음악을 그 우주의 반영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들이 수학의 한 영역이라 생각한 것이 보에티우스에게 그래도 드러난다. 이제 우리는 음악이 가지는 인간 인식 체계, 즉 학문에서의 위상에 관한 중세인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 무슬림 철학에서 음악과 철학적 세계관
중세 유럽인은 플라톤을 거의 알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2세기 말에 중세 무슬림으로 재유입되었지만, 플라톤은 르네상스에 이르러서야 유입되게 된다. 우리가 중세시기 플라톤주의라고 하는 것은 엄밀하게 폴로티노스주의라고 함에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세 유럽은 온전히 과거 그리스 철학은 이어가지 못 했다. 하지만 중세 무슬림은 달랐다. 이들은 플라톤의 모든 저작을 알고 있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물론 그리스 과학의 전영역을 알고 있었다. 알 가찰리와 같은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전 저작을 소개하고 그 주제와 내용을 소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철학 입문』을 적었다. 그리고 당시 중세 무슬림의 학문적 저서와 학자를 소개한 알 나딤의 기록에서도 우린 비교적 상세한 당시 이슬람 사회의 학풍을 이해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첫 철학자는 알 킨디이다. 그 역시 스스로 그리스의 철학을 번역 소개함에 나섰으며, 스스로의 철학을 일구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철학엔 음악에 관한 사고도 있다. 그는 음악을 학문의 차원에서 다룬다. 학문 가운데도 수학의 차원에서 말이다. 이는 유럽의 보에티우스 등이 다른 것과 유사하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피타고라스의 노선에 있다는 공통점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는 음악을 기하학, 천문학, 산수 등과 관련된 학문이며, 이와 같이 자연에 관한 이론적 학문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음악은 산수, 기하학, 기상학, 형이상학, 우주론 등과 관련된 종합적 학문이 된다. 그에게 현악기의 C현은 가장 놓은 음이며 불을 의미하고 여름을 의미한다. 그리고 A현은 이와 대비되어 겨울을 의미한다. 또한 D현은 물, G현은 공기를 의미한다. 각각의 현이 조화를 이루듯이 불, 공기, 물, 흙이 조화되며, 4계절이 조화된다고 본다. 그렇다면 악기로 연주되어지는 이와 같은 인간의 음악은 우주의 음악과 관련된다. 즉 음악이란 인간세계와 우주를 연결하며 조화로 하나 되게 하는 어떤 중간 매개가 된다.16)
알 킨디의 뒤를 이은 인물이 알 파라비이다. 알 파라비는 이미 논의한 바와 같이 대단한 철학적 지식을 가진 인물이며, 중세 무슬림 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 역시 기본적으로 알 킨디와 같이 수학적 조화 가운데 음악을 이해하였으며, 이는 유럽에 있어서 중세와 근대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력을 준 아비첸나, 즉 이븐 시나에게로 이어진다.
이와 같이 중세 무슬림 철학자들에게도 음악은 우주를 이해하는 하나의 관문이며, 우주와 하마되는 매개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음악의 이론과 작업에서 피타고라스는 없어서는 안 될 철학적 위상을 가진다.
잠정적 마무리
성리학자들은 그들의 그림에서 우주를 보고자 하였다. 그림의 본질에 관한 그들의 논의는 조선 성리학사의 일면을 장식한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같이 추상적 세계의 이상향을 실체로 볼 것인가 아니면 정선의 진경산수화와 같이 내 눈 앞의 현실을 실체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은 단순히 화풍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조선 초기, 불교에서 성리학이 유입되며 등장한 성리학과 경세치용 학파 사이 논쟁된 실체에 관한 문제와 연관된다. 이와 같이 성리학의 역사에서도 예술은 단지 즐김의 대상을 넘어 철학의 소재가 되며, 그것을 감상하는 것은 단순한 아름다움에 대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우주론적 논의로 이어진다. 서구와 무슬림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크게 불교 사회나 인도의 힌두교 사회 역시나 마찬가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에 관한 철학적 담론은 어디에나 있어 왔다.
그러한 인류사적 현상 가운데 본 논의는 피타고라스의 철학을 통하여 서구의 음악 이해를 살펴보았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느끼는 단계를 넘어 우주적 질서를 경험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모차르트의 음악 속에서 우린 우주의 생기와 그 질서 그리고 그 실체를 경험할 수 있다면, 피타고라스는 진정 참으로 잘 들었다고 하였을 것이다. 이에 의하여 많은 철학자들은 피타고라스의 정신 속에서 음악을 정리하였다. 아직 논의는 잠정적이다. 더욱 더 많은 헬라어와 라틴어를 부여잡고 번역하며 공부할 때 우린 서구인들이 이해한 음악의 역사를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논의는 단지 그 일부이며, 시작의 시작일 뿐이다.
단순한 음악의 물리적 구조를 넘어 그 음악이 가진 존재론적 가치의 복원, 본 논의가 필자에게 그러한 논의의 잠정적 결론이며, 미결의 것임을 이야기하며 논의를 마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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