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베우스 나탈리스 후기 중세 철학 열전
유대칠
(토마스 철학 학교)
1.0 나탈리스 독법에 대한 논의
나탈리스1)는 다른 많은 후기 중세철학자들이 그렇듯이 어떤 범주에 그를 포함시켜야 할지라는 논의가 한때 문제시되었다. 일부 학자는 그를 토마스 아퀴나스의 노선을 따른 인물로 규정하곤 하였고, 또 다른 이들은 이와 구분하여 이해하곤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의 기본적 태도가 가지는 문제를 필자는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나탈리스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연구의 접근은 그가 토마스 아퀴나스와 얼마나 유사하며 얼마나 구분되는가하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자신이 어떤 논리를 구성하가라는 것이 문제이다. 즉 그 자신을 다른 철학과와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그만의 고유한 논리를 찾는 것이다. 완전히 동일한 인물이 아닌 이상 분명하게 비교의 대상이 되는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철학을 구사하기 마련이며, 굳이 비교란 것을 한다하여도 그 비교란 말 자체가 이미 이 둘의 차이를 전제하는 가운데 가능할 뿐이다. 그렇다면 비교란 동일한 것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다른 것을 확인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나탈리스의 철학을 토마스 아퀴나스의 그것과 비교하여 그 유사성을 구하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즉 토마스 아퀴나스와 다른 그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나탈리스는 기본적으로 1277년 이후 철학자이다. 그 시기 이미 토마스 아퀴나스의 담론은 상당부분 공개적으로 금지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도미니코 수도회는 여전히 토마스 아퀴나스에 관한 지지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1317년경부터는 나탈리스 등을 중심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성(諡聖)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도미니코 수도회 자체적으론 반-토마스 아퀴나스주의에 관하여 나름으로 강력한 단속을 하였다. 예를 들어, 도미니코 출신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과 분명한 경계선을 유지하며, 혁신적 길(via moderna)로 나아간 두란두스는 1314년과 1317년에 걸쳐 전자에선 90개 명제가 후자에선 200여개 이상의 명제가 토마스 아퀴나스와의 관계에서 오류로 지적되곤 했다. 그렇지만 당시 수도회가 토미스트 양성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성을 앞두고 반-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하여 보다 강한 단속을 한 것으로 보인다.2) 결론적으로 도미니코 수도회는 자신의 선배인 토마스 아퀴나스에 관하여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리고 나탈리스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이 수도회의 수장의 자리에 오른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단죄에 관한 당시 파리대학의 입장은 1290년대에 이르기까지는 유지 되었으며, 비록 교황 마르티누스 4세의 사후 이러한 상황은 점점 약화되었지만, 1277년 이후 유럽의 철학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전히 강력한 비판의 대상이었다. 먼저 강의 헨리의 비판 이후, 둔스 스코투스와 하클레이 그리고 오캄을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이 그를 비판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미 논의한 바와 같이 수도회 내부에서도 다른 소리들이 나오곤 하였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1277년의 단죄가 남긴 후기 중세철학의 판세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은 쉽사리 뿌리내리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계승하는 이들도 많은 부분에서 1277년의 단죄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당시 유능한 토마스 노선을 가진 이로 알려진 로마의 자일스나3) 나탈리스의 스승이던 파리의 요한(흔히 요하네스 뀌도르라고 함) 등도 다르지 않다. 이들은 성체성사와 같은 논의에서 그들의 선배이며, 그들이 기본적으로 자기 철학의 틀이라 불렀던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 자신을 구분하였다.4) 이들은 분명 초기 토마스트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때 토미스트란 어디까지나 동일한 철학을 구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에 우호적이며, 많은 부분 그의 철학에 의존하지만, 동일하지 않은 논리구조를 가진 구별되는 철학자들이라는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되어야할 것이다. 이들은 분명 1277년 이후라는 상황에 속에서 철학을 해야했기에 근본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대적 조건과는 달랐다. 이러한 상이한 조건에 의하여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수용하고 활용했지만, 1277년 이후라는 조건 속에서 나름의 변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파리의 요한은 그의 『명제집 주해』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특출한 박사’(doctor egregius)라 부르며 높인다. 하지만 이러한 존경이 파리의 요한에게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과 동일한 철학을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는 로마의 자일스 역시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이 1277년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의 많은 논의들은 진화를 거듭하지만, 여전히 둔스 스코투스와 페트루스 아우레올리 그리고 강의 헨리와 같은 이들의 노선에 선 이들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예를 들어, 이러한 진화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견지되고 있는 존재와 본질의 실재론적 구분과 같은 존재론적 담론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구분이 당시 토마스 노선의 마지노선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1277년 이후 철학판의 기본적 흐름에선 존재(esse)와 본질(essentia)의 실재론적 구분을 허락하지 않았다. 에베센의 지적과 같이 13세기 후반 철학에선 양상론이 강력한 존재론적 담론을 구성한다.5) 양상론에 의하면 존재와 본질은 서로 실재론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라틴어 esse, ens 그리고 essenta 사이의 구분은 단지 양상의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는 많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다소 차이는 있지만, 이와 유사한 논리들이 당시 철학계에 유행하였다. 예를 들어, 강의 헨리와 같은 철학자는 존재와 본질을 지향적 구분이란 대안적 방법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둔스 스코투스와 같은 인물도 토마스 아퀴나스의 실재론적 구분을 거부하고, 형상적 구분을 취하였다. 오캄, 시제 브라방, 리카르두스 데 메디아빌라 그리고 디트리히 프라이베르그와 같은 인물들도 역시나 본질과 존재의 구분에 있어서 실재론적 구분을 거부하였다. 1277년 이후 존재와 본질에 관한 논의는 비록 그 방식에선 상이하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실재론적 구분에 대해선 부정적이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나탈리스 자신은 직접적으로 실재론적 구분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논의 전반을 볼 때, 분명 그는 실재론적 구분에 관하여 회의적이었다. 즉 비-토마스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을 옹호해야했다. 하지만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이 오류가 아니라는 것을 옹호하려 한 것이지, 철학자로서 나탈리스 자신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완전히 수긍하진 않았다. 그의 존재론적 담론이나 인식론적 담론에서 발견되는 것은 그를 ‘아주’ 넓은 의미에서 토미스트일 수 있지만, 엄밀한 의미의 토미스트란 해석에 관해선 상당히 회의적이게 만든다.
필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나탈리스 자신의 철학을 아주 흐리지만 그 외곽이라도 그려보도록 하겠다.
2.0 나탈리스에게로 접근
나탈리스의 수사본은 유럽의 여러 도서관에 보관되어 전해 졌으며, 1505년 베니스에서 처음 출판되었고, 1647년 두 번째로 파리에서 출판되었다. 이렇게 전해진 나탈리스의 문헌은 많은 문제점을 문헌연구가들에게 남겼다. 예를 들어, 르 망(Le mans) 국립도서관 Ms. n.231 사본의 경우가 그렇다. 코흐는 이 문헌을 연구한 결과, 이것이 나탈리스의 것으로 보았다. 그것도 당시 그의 논적(論敵)이던 메츠의 제임스의 『명제집 주해』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바티칸 수사본 가운데 cod.vat.lat.985번과 1118번의 경우는 나탈리스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메츠의 제임스 노선 철학자들에 의하여 쓰인 것으로 나탈리스 자신의 이론에 대한 반론이 그 내용이란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와 같은 문헌 연구는 나탈리스와 메츠의 제임스 사이 존재하는 차이를 규명함에 큰 기여를 하였다.6) 또한 나탈리스가 1314년에 적은 두란두스의 철학적 담론이 오류임을 지적한 글은 나탈리스와 두란두스의 관계를 연구함에 기여를 하였다.7) 그 외에도 그의 『임의토론집』 역시나 그의 철학적 입장을 전하는 좋은 수단이 된다. 그는 『임의토론집』 1에서 둔스 스코투스와 대결하며, 2에선 두란두스와 4에선 아우레올리와 대결한다. 특히 『임의토론집』4를 집필할 때 아우레올리는 1316년 봄에서 1318년 가을까지 파리대학에서 『명제집』을 강의하며 자신의 혁신적 길을 다지고 있는 중이었다.8) 이와 같이 나탈리스의 저서들은 당시 많은 철학자들이 그렇듯이 논쟁적이며, 논박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즉 자신의 논적에 관하여 강력하게 논박을 하고 있다. 그렇기 이를 연구하는 현대의 해석가들은 바로 이러한 그의 논박 가운데 그의 철학적 입장을 구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문헌에 관한 연구와 함께 그를 어떻게 철학사 가운데 분류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야기되었다. 이에 20세기 초 많은 연구가들은 그를 토미스트로 분류하였다.
그의 삶에 있어서도 그가 도미니코회 출신이며, 그 수도회의 수장을 역임했다는 것 그리고 당시 대표적 토미스트인 파리의 요한에게서 사사하였다는 점... 등이 그를 토미스트로 해석하는 거름이 되었다. 거기에 메츠의 제임스와의 논쟁 등에서 보이는 친-토마스 아퀴나스적 논의들은 이러한 해석에 더욱 더 힘을 주었다. 20세기 초 그랍만과 같은 해석가는 나탈리스를 탁월한 토미스트(ein hervorragender Thomist)로 해석하며,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헤르베우스 나탈리스의 철학적 저작은 명맥함과 세련됨으로 강의 헨리, 스코투스, 두란두스, 아우레올리 그리고 곧드프리를 반박하며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옹호한다."9)
하지만 나탈리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사이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차이 역시 무시되진 않았다. 불프는 나탈리스의 논의가 토마스 아퀴나스 이론의 발전된 형태가 아니라, 단지 비판에 대하여 옹호함에 그친 것이라고 지적한다. 즉 자신의 선배에 대한 비판을 옹호하는 의미 정도의 토미스트로 본 것이다. 그러면서 토마스 아퀴아스의 철학적 입장과 나탈리스의 고유한 철학적 입장을 어느 정도 구분한다.10) 이렇게 선을 긋는 근거가 되는 것은 바로 실재론적 구분에 관한 나탈리스의 입장 때문이다. 질송은 분명하게 이 둘을 구분하고, 그 근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실재론적 구분이라 직접적으로 거론한다.11) 필자 역시 나탈리스가 실재론적 구분에 관하여 강한 긍정을 하지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내심 거부하였다고 본다. 즉 무언의 거부이다. 그리고 실재론적 구분이 충실한 토미스트의 기준이 된다면, 분명 나탈리스는 충실한 토미스트가 아니다.
이제 그의 존재론과 인식론적 담론을 분석하여 보자. 그가 얼마나 토미스트가 아닌지 확인해 보아야하지 않겠는가. 즉 그가 얼마나 구분되는 사고를 하는지 확인해 보아야하지 않겠는가.
3.0 나탈리스의 존재론
나탈리스의 존재론을 연구한 이들은 그의 존재론적 담론에서 토마스 아퀴나스 존재론의 핵심인 ‘존재’(esse)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고백한다.12) 그것은 그의 기본적 논의가 이미 상당 부분 토마스 아퀴나스의 그것과는 분명한 선을 긋고 있기 때문이다.
나탈리스에 의하면, 존재는 하나의 본질에 직접적으로 속한다.13) 이는 그의 존재론을 이해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즉 각각의 어떤 본질은 그 자신의 존재를 가진다. 예를 들어, ‘인간 본질’은 ‘그 자신의 인간 존재’를 가진다. 그뿐 아니라, 나의 피부란 본질 혹은 형상도 그 나름의 존재를 가진다.14) 이리 된다면, 결과적으로 하나의 존재자 가운데 여러 형상의 다수성이 가능하다는 비판을 받게 될지 모른다. 즉 당시 토마스 아퀴나스 노선의 또 다른 기준이 된 형상의 단일성을 거부하였다.
각각의 형상이 각각 그 나름의 존재를 가진다면, 하나의 기체 가운데 하나의 실체와 각각 나름의 형상 혹은 본질을 가지는 각각의 우유들도 저마다 존재를 가지게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담론은 기존 토미스트들에게 큰 오류로 보일 수 있다. 실재로 1277년 이후 옥스퍼드의 많은 토미스트 철학자들은 형상의 다수성을 논박하여 토마스 아퀴나스를 옹호하고자 하였으며, 이는 그 사람의 철학적 노선의 기준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나탈리스는 이를 큰 오류를 가진 논의로 여기지 않았다. 로마의 자일스와 같은 토미스트들은 하나의 실체 가운데 하나의 존재만을 가정한다. 나탈리스 역시나 실체의 단일성을 인정한다. 즉 실체의 다수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가장 종적인 실체의 존재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범주와 같은 것이 개별자 가운데 다수화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나탈리스의 논리에 의하면, ‘나의 실체’가 다수화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나의 실체의 존재’와 ‘나의 하양(albedo)의 존재’ 등으로 서로 다른 형상들이 다수화 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실체의 다수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15) 단지 형상이 여럿일 뿐이다.16) 그럼에도 이러한 나탈리스의 존재론적 담론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그것과 매우 큰 거리가 있다.
나탈리스는 인간 가운데 두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형상과 피부 형상이 각각 그 존재를 가진다.17) 이는 인간 형상 가운데 다수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인간 실체의 존재론적 단일성을 나탈리스는 나름의 방식에서 옹호한다. 또한 이것은 나탈리스 자신의 논리에선 매우 타당한 결론이다. 나탈리스는 이러한 자신의 견해를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의와 관련하여 무게를 더하려 한다.18)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나탈리스의 것일 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것이 아니다.
많은 해석가들은 그의 이론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 현실력(actus essendi)을 찾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19) 나탈리스의 이론을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론과 비교하여 부족하다고 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이 논의한다.
“확실히 나탈리스는 여러 점에서 토마스를 따르고 있다. 아퀴나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개체화 문제를 주로 동일한 종 내에서의 여러 개체들의 구분과 연관시켜 이해하고 있다. 한 사물의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비구분에 대해서, 나탈리스는 자기-동일적인 그 자체 이외에는 다른 어떤 원리도 필요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20)
이러한 헨닝거의 논의에 의하면 나탈리스는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에 집중하여 그 이상의 논의를 하지 못 했다. 즉 존재자 전체의 통일성을 논의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탈리스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이 자신의 전체 존재론을 위한 통합적 논리를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21) 오웬스에 의하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 현실력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동일성, 즉 비구분은 물론이고, 다른 것으로부터의 구분까지 다루고 있다. 하지만 나탈리스는 이러한 토마스 아퀴나스 존재론의 진의를 이해하기 못했고, 그렇기에 통일성이 결여된 존재론을 가지게 된 것이다. 즉 나탈리스의 존재론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론의 외부에 있는 것이다.
나탈리스는 본질을 가지는 것, 즉 형상은 존재를 가지며, 그 존재로 인하여 타자와 구분되는 자기 동일성을 유지한다.22) 그렇기에 나의 존재 가운데도 나의 영혼과 나의 피부와 같은 서로 다른 형상은 서로 다른 존재를 가진다고 본다. 이 가운데도 나의 동일성, 즉 나의 실체의 동일성은 그대로이다. 이러한 나탈리스의 존재론적 담론은 분명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에선 무엇인가 크게 부족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3.1 토마스 아퀴나스의 실체적 형상과 존재 그리고 반론
나탈리스는 어떤 식으로든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을 받았다. 비록 그것이 수정된 형태이든 변형된 형태이든 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모든 존재하는 형상은 하나의 현실성이며, 존재의 원인으로 ‘하나의 사물’을 ‘하나’이게 만든다. 어떤 실체적 형상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곳에서 그로 인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개별적이다. 이러한 실체적 형상의 경우 그 형상과 종은 실재 가운데 하나가 된다.23) 예를 들어 천사의 경우가 그러하다. 천사는 형상 그 자체에 의하면 개체화되어지며, 질료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는 사후 인간 영혼에도 적용된다.24) 천사와 개별적 인간의 영혼은 그 실체적 형상에 의하여 하나의 존재를 유지한다.25) 또한 특히 인간의 영혼에 있어서 실체적 형상은 그 생전이나 사후 존재의 동일성을 유지시키는 근거가 되어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비록 영혼의 개체화가 그 시작의 경우에선 육체에 의존하지만, 육체의 사후엔 그 개체화가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실체적 형상이 그 역할을 수행한다고 본다. 이로 인하여 인간 영혼은 육체의 소멸 이후에도 여전히 그 존재를 유지하고 있게 된다.
여기에서 실체적 형상은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인가? 형상이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모든 존재하는 것의 현실성이다. 이것은 존재의 원인이며 그 존재를 하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형상이 주어진 것은 어떤 식으로든 하나의 존재를 가진다. 형상은 그 존재를 규정함으로 이것은 다른 것과 구별되는 하나의 개별자로 규정 가능하게 한다. 이는 『영적 피조물에 관하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형상에 의하여 현실적으로 하나의 존재자가 된다고 진술하며, 그 각각의 형상은 각각의 현실성이며, 그것은 어떤 것은 하나의 것으로 묶는 단일성의 근거(ratio unitatis)라고 한다.
나의 피부와 나의 머리색과 같은 우유들은 나를 이루는 이 동일성 혹은 단일성의 원리인 실체적 형상에 의하여 여럿이 아니라, 하나의 것이 된다. 다음의 글을 읽어보자.
“인간 영혼은 능력에 있어서 감각혼과 생장혼을 포함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다른 모든 하위의 형상들도 포함한다.”26)
인간 영혼이란 하나의 실체적 형상은 그 하위에 있는 모든 능력과 관련된 감각혼이나 생장혼을 포함한 것을 하나로 만드는 근거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 영혼으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의 존재이게 된다. 다음의 글을 읽어보자.
“그 자체 가운데 현실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다수의 실체로부터 하나의 실체가 성립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두 가지는 결코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이지 않기(nunquam sunt unum actu) 때문이다.”27)
토마스 아퀴나스는 실체적 형상에 의한 단일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실체적 형상에 관한 논의는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많은 비판을 받는다. 당장 1277년 파리대학과 옥스퍼드대학에서 실행된 금지령에 한 몫을 한다. 옥스퍼드대학의 금지령 12번은 “생장혼과 감각혼 그리고 지성론이 하나의 단순한 형상이다”라는 논의를 금지한다.28) 그러면서 떠오는 것이 형상 다수성에 관한 논의이다.29)
사후 인간의 육체는 영혼이 실체적 형상을 가지듯이 그렇게 하나의 실체적 형상을 가진다. 만일 이를 부정한다면, 육체는 어떤 것도 아닌 것이 되며, 존재론적으로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하지만 육체, 즉 생명이 사라진 육체는 분명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은 어떤 단일성을 유지하며 존재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육체가 하나의 존재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본다. 비록 그것이 과거 영혼과 하나를 이루고 있던 때의 것과 동일하지 않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이제 남겨진 육체는 그 질료의 측면에서 과거 영혼과 함께한 살아있던 육체와 동일하지만, 그 형상에선 차이를 가지기 때문이다.30) 그러면 남겨진 육체의 형상은 어떻게 된 것인가? 영혼과 함께 있었을 때는 인간 영혼의 실체적 형상 속에서 그 단일성을 상실하고 있다가, 사후에 그 단일성을 가지게 된 것인가? 남겨진 육체는 나름의 형상을 가지며 존재하고, 이것의 실체는 생전의 육체, 즉 이성혼이란 실체적 형상과 같던 때의 그것과 다른 실체이다. 그렇다면, 생전의 육체와 사후 육체는 수적으로 다른 것이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실체적 형상 이론은 영혼의 개별성에 집중하여 육체의 수적 동일성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 이에 많은 철학자들은 육체와 영혼에 각각 나름의 형상을 부여함으로 육체와 영혼이 처음부터 각각의 형상으로 존재한다는 형상의 다수성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와 같은 논의는 그리스도의 사후 육체의 문제와 연관되어 중세 신학과 철학의 화두가 된다.
3.1.1 토마스 아퀴나스의 지지자들.
강의 헨리와 파라코의 페트루스는 인간 영혼의 실체적 형상과 육체의 실체적 형상을 구분한다.31) 이리 된다면, 이미 위에서 말한 사후 육체에 관한 문제가 보다 쉽게 해결된다. 강의 헨리를 필두로 이러한 논의는 토마스 아퀴나스 비판에 있어 큰 역할을 행한다. 또 역설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옹호하려는 이들이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한 것도 바로 이 형상 단일성론이다. 예를 들어 킬와르드비와 리카르두스는 감각적 영혼은 육체적 부모에게 받은 것이며, 지성적 영혼은 신의 개입으로 얻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 둘을 각각의 형상으로 인식한다.32) 즉 형상 단일성론을 부정한다. 이에 토미스트인 크냅웰(Richard of Clapwell/Klapwell)을 비롯하여 레신의 자일스(Giles of Lessine) 등이 이를 논박하며 형상 단일성을 방어하려 하였다.33) 여기에서 형상 다수성을 주장한 둔스 스코투스의 논의를 읽어보자.
“영혼의 형상이 남아있지 않을 때도 육체는 남아있다. 그러므로 어떤 생명체 무엇이나 그 가운데 보편적으로 그것에 의하여 육체가 육체로 존재하게 되는 형상은 그것에 의하여 생명을 가지게 되는 그 형상과 다르다.”34)
둔스 스코투스의 글에서 보이듯이 문제의 발단은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 관한 담론이다. 이 문제는 사실 1277년 단죄에 한 몫을 하였으며, 파리대학 단죄 명제 가운데 215번이 이와 관련된다. 둔스 스코투스의 논의는 매우 간단한다. 남겨진 육체 역시 육체로 존재하는 이상, 육체가 육체로 존재하는 형상과 육체가 살아있게 있는 형상, 즉 영혼과는 다른 형상이란 논리이다. 이런 논리에 의하면 형상 다수성은 자연스럽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노선에 의하면 하나의 실체적 형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형상이며, 이 가운데 여럿의 실체적 형상이 공존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철학적 오류이다. 즉 하나의 인간 존재 가운데 생장혼이 실체적 형상으로 하나로 존재하고, 감각혼이 실체적 형상으로 따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철학적 잘못이다.35) 그러나 둔스 스코투스는 위의 경우 등을 들어 형상의 다수성을 합리적인 대안으로 주장한다. 사실 형상 단일성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나의 존재, 즉 나의 영혼이 분해 해체되어 여럿으로 있다는 논리는 아니며, 그것은 나름의 동일성과 개별성을 가지기에 나의 존재가 여럿이 하나가 되는 것과는 다르다고 본다.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도미니칸 철학자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노선에 따라 실체적 형상의 단일성을 옹호하고자 하였다. 라 마레의 윌리엄(William de la Mare)이 주장한 형상 다수성을 영국의 초기 토미스트인 크랩웰이 논박을 하고 나섰으며, 단일성론이 그리스도론에 문제없이 사용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하였다.36) 그 외에도 도미니칸 철학자이면서도 형상의 단일성을 논박한 킬와르드비를 상대로 영국의 토미스트 레신의 자일스가 논박을 시도하였다. 그는 생명체 가운데 본질적 활동의 상이한 종류들에 각각 실체적 형상을 부여하여 다수성을 가정하는 것은 필요 이상의 것이라 지적하였다.37)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이 토마스 아퀴나스를 향한 공격으로부터 형상 단일성을 방어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형상의 단일성과 다수성은 당시 철학계에 있어 하나의 화두였다. 영국 태생으로 파리대학 신학부 교수가 된 호툰의 윌리엄(William of Hotun) 역시나 형상의 단일성에 관한 글을 남겼으며,38) 파리대학에서 수학하고, 이후 옥스퍼드에서 활동한 맥클필드의 윌리엄(William of Mackfield) 역시나 강의 헨리 등과 같이 토마스 철학을 논박하던 이들을 향하여 형상의 단일성 등을 비롯한 토마스 철학을 옹호하였다.39) 로베르투스 오르포르디우스(Robertus Orphordius) 역시 토마스의 철학을 옹호하며, 강의 헨리, 로마의 자일스 그리고 비테르보의 제임스 등의 철학을 논박하였다. 이러한 이들에 대하여 또 다시 페캄과 같은 인물이 등장하여 크넵웰과 대립하였으며, 그 외 여러 철학자들이 이들과 논쟁하여 후기 중세철학을 풍요롭게 하였다.40) 이외에도 맥클필드의 윌리엄의 스승이자 옥스퍼드 교수 선임자인 수톤의 토마스와 같은 이 역시나 반-토마스 철학에 맞서 진지를 구축하던 인물이다.41)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토마스 아퀴나스에 관한 비판들이 강의 헨리, 둔스 스코투스 그리고 하클레이 등에 의하여 마련되었고, 이 모든 것에 대하여 당시 토미스트 철학자들은 대항해야만 했다.
나탈리스가 철학을 하던 시기는 바로 이러한 논쟁의 시기이다. 많은 토미스트 철학자들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옹호하며, 이를 위한 이론적 체계를 만들어가고자 하던 시기이다. 더욱이 나탈리스가 도미니코 수도회의 중책을 맡던 시기는 수도회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성을 위하여 노력하던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 나탈리스는 드러나게 반-토마스의 노선을 갈 수도 없었으며, 오히려 이러한 길을 가려는 이를 논박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와 같이 그는 반-토마스주의에 관하여 비판을 견지하며, 나름으로 새로운 길을 마련한다. 이것은 반-토마스주의라기보다 차라리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탈-토마스주의 정도일지 모르겠다.
3.2 외도(外道)의 길에선 나탈리스
한 철학자의 철학을 판단함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하는 것은 그의 철학을 그의 철학적 관점에서 보지 않고, 다른 철학자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철학자의 고유한 면모를 제거하고, 비판의 대상으로 보게만 하는 빌미가 된다. 나탈리스에 관한 여러 비판의 근거들.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 이론에 대한 결핍과 실재론적 구분에 대한 부정 그리고 형상 다수성에 대한 옹호. 이러한 논의들이 토미스트로 그의 위상에 대한 비판의 근거라면 가장 쉬운 방법은 그를 토미스트의 범주에서 벗어나 보는 것이다. 그저 그를 그의 철학으로 보는 것이다.
필자는 나탈리스를 토미스트로 규정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는 적어도 토미스트라면 갖추어야하는 기본적인 당시의 조건들에 맞지 않는다. 펠스터와 같은 문헌 연구가들이 전하는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초반 당시 사상계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둘러싼 논의는 대부분 형상의 다수성과 실재론적 구분 등에 관한 문제와 관련되어 다루어진다.42) 하클레이와 둔스 코투스 그리고 강의 헨리와 같은 당시 토마스 아퀴나스에 관한 주된 반박자들은 거의가 바로 이 지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논박하였고, 역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옹호자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토마스를 옹호하였다. 그러나 나탈리스는 달랐다. 그는 이 지점에서 오히려 비판가들의 견해에 가까이 다가가 있다. 이 결정적인 이유는 그에게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실체적 형상이란 장치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당시 토미스트 옹호자들은 하나의 존재 가운데 다양한 실재성이 있다는 것은 말 그 자체로 모순이며, 실체적 형상으로 하나의 형상, 즉 하나의 존재가 된다고 보았다.43) 그러므로 나의 피부와 같은 것이 독립된 어떤 실재가 아니게 된다. 그러면 하나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 다양한 것의 형상은 어찌되는가. 질료로 존재하는 것의 형상, 즉 그 실체성은 상위의 실체적 형상에 의하여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위의 실체이 가지는 실체는 엄밀한 의미의 실체가 아닌 것이 되는가. 분명 실체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실재로 형상이 무(無)로 사라진다는 것도 금지령이 되었던 논의이다.44) 비록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이들이 이는 무가 아니라, 가능태로 남겨진다고 하지만, 이것도 후기 중세철학자들의 논의를 만족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와 같은 극히 이론적 담론 뿐 아니라, 이미 논의한 바와 같이 남겨진 육체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라는 그리스도론과 관련된 논의에서도 형상 단일성론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비판이 더할수록 형상 다수성론을 강성하게 되었다. 나탈리스도 다르지 않다. 그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트레이드마크인 존재와 본질의 실재론적 구분은 포기한다. 나탈리스에 의하면 존재(esse)는 하나의 본질에 직접적으로 속한다. 다시 말해 형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를 가진다. 이 존재는 그 스스로 자기 동일성을 가지며 다른 것과 구분된다. 여럿이 다른 것과 구분되며 하나로 존재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그것과 달리 나탈리스는 하나의 것이 하나의 것으로 존재하며 다른 것과 구분되는 것으로 존재를 취한다. 그리고 이 존재는 자연스럽게 그 형상과 같이 놓이게 된다. 실체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라는 실체는 그 자체로 다른 것과 구분되는 본질로 존재한다. 그것은 그 가운데 단일성을 가진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피부라는 타자와 구분된다. ‘나의 피부’는 ‘나’가 아니다. ‘나’라는 실체 가운데 하나의 본질이 구분되어 존재하듯이 ‘나의 피부’ 역시 ‘나’와 구분되어 존재한다. 이리 본다면 나탈리스는 하나의 ‘실체’ 가운데 다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실체는 오직 하나로 존재한다. 즉 실체적 형상은 하나이며, 이것은 실체에 한정되어 적용된다. 이 형상은 다른 우유적인 것 모두에 적용될 수 없다. 이처럼 나탈리스는 나의 존재가 가지는 단일성을 보장한다. 하지만 이것이 나의 피부와 같은 것에 적용될 순 없다. 즉 나의 피부 존재와 나의 (인간) 존재는 각각 두 존재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실체 가운데 두 존재가 아니다.45) 왜냐하면 하나는 실체이고, 다른 하나는 우유이며 서로 다른 형상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문제가 등장한다. 실체 가운데 여럿은 아니면서 개별자 가운데 여럿이란 가능한 것인가? 이는 단지 나탈리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형상 다수성론을 지지하는 모든 이들의 문제일 것이다. 저마다 서로 상이한 논리를 전개하지만, 대표격으로 둔스 스코투스의 다음 글을 읽어보자. 앞뒤 상세한 논의가 앞서고 뒤따르지만, 우선은 간략하게 다음의 것만 읽어보자.
“하나의 존재자에 하나의 실존이 있다는 것은 동의한다. 그러나 하나의 실존이 하나의 형상을 요청한다는 두 번째 명제는 거부되어야 한다... <중략> ... 이러한 방식에서 전체 복합체 가운데 하나의 실존이 있고, 이는 많은 부분적 존재성을 가진다.”46)
여기에서 둔스 스코투스는 하나의 존재자, 즉 하나의 개별자가 여럿이 아니라, 부분적 형상의 존재성이 여럿일 수 있다고 한다. 모두가 이러한 것은 아니다. 더욱 더 극단적인 논리를 구사하는 인물들도 있다. 예를 들어, 하클레이가 그러한 인물이다. 하클레이는 하나의 인간은 몇 개의 존재자로 구성되며, 이 각각의 것을 실체적 형상이라 부른다. 그리고 심지어 이 각각의 형상들을 개별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종국에 주어진 형상이 이 모든 부분적 형상에 하나의 통일성을 부여한다고 주장하며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47) 여기에서도 하나의 복합 존재는 여러 존재성을 가지며, 그 각각의 형상은 나름의 존재론적 지위를 가진다는 기본적인 논의는 유지되고 있다. 방식이나 정도는 다르지만, 대부분의 형상 다수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적어도 이러한 논의의 큰 흐름에선 일치점을 가진다. 이러한 고민은 이후 오캄에게서도 보인다.48) 이들 형상 다수성을 주장한 이들의 대부분은 질료가 완전히 가능태이며, 형상에 의하여 현실적인 것된다고 보지 않았다. 즉 질료도 나름의 현실성을 가진다고 보았다. 그러니 합성실체에서도 질료와 형상은 각각 어느 정도의 현실성을 존재하며, 형상이 다수화된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이미 스코투스와 같은 이들은 변화의 기체로 제일 질료를 긍정적으로 해석하였으며, 그것이 그 자신의 현실성을 가진다고 보았다. 즉 질료 나름의 현실성을 인정한 것이다. 오캄 역시 이러한 논의에 동의한다.49) 이러한 존재론적 입장을 가진 이들은 복합체를 기본적으로 다양한 형상으로 구성되며, 그 각각의 형상이 나름 자신의 존재를 유지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발상은 형상 다수성의 가능성을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다수성은 신학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여겨졌다.
만일 실체적 형상의 단일성만을 주장한다면, 그리스도론에서 문제가 발상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당시 추종자들에 의하면 가정된 인간 본성은 제일 질료와 지성적 영혼의 실체적 형상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사후 이 복합체는 더 이상 존립하지 않는다. 영혼은 실체적 형상으로 독립되어 그 개별성과 본질성을 유지하며 존재 가능하지만, 남겨진 육체는 더 이상 그 형상이 과거 살아있던 당시 그 형상이 아니다. 단지 시체의 형상 정도가 된다. 그러면 수적으로 생전과 사후 육체라는 이 둘은 하나의 동일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생전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 형상으로 가지지만, 사후엔 그저 남겨진 시체의 형상으로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유사한 방식으로 성인의 육체는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이 동일한 것이 아니라면, 그러면 자연스레 죽은 시체를 성인의 몸으로 공경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인은 결국 이 몸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50)
남겨진 육체에 관한 이러한 신학적 논의들은 더욱 더 형상 다수성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물론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자신의 철학이 가진 이와 같은 신학적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절대적 동일성은 아니지만, 부차적으로(secundum quid) 동일한 것이라 주장하며, 형상이 아닌 질료의 동일성에 있어 사후의 육체와 생전 육체는 동일하다고 한다.51) 그러나 이는 많은 이들에게 그리 설득력을 가지지 못했다. 형상이 아닌 질료에 근거한 수적 동일성 역시 근본적으로 현실적으로 서로 다른 둘이란 비판을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킬와르드비와 페캄이 이러한 신학적 문제를 제기하였고, 오캄 등이 이를 강조하였다. 이들 다수성을 주장하는 이들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육체는 그 자체로 그리스도교의 육체라는 형상으로 존재한다. 수적으로 생전과 사후는 동일성을 유지한다.
나탈리스가 살아가던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노선을 지지하는 이들은 위에서 이야기하는 이러한 이들과 논쟁하였다. 형상의 다수성은 특히 핵심적 논의의 대상이었다. 실체적 형상에 의하여 주어진 하나의 본질과 그 가운데 다양성을 하나의 존재로 묶어 주는 ‘존재 현실력’을 무기삼아 그들은 형상의 단일성과 그 연장선에서 존재와 본질의 실재론적 구분을 옹호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당시 토미스트들의 기준선이었다.52) 그렇다면, 나탈리스는 토미스트가 아니다. 이들 기준에 모두 미달이거나 아예 다르다. 이미 논의한 대로 그는 형상 다수성을 옹호한 인물이며, 존재와 본질에 관한 실재론적 구분에 있어서도 질송의 맘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는 오히려 둔스 스코투스와 오캄 등과 그 길을 달랐지만 문제의식을 같이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많은 부분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수용은 자기 철학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수용이며, 토마스 노선에 충실하기 위한 수용이라 보기는 힘들다. 그리고 그가 여러 토마스 아퀴나스의 반대자들에 대한 반론으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옹호하기는 했지만, 문헌의 성격은 어디까지만 방어를 위한 사용에 그쳤다. 즉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토마스의 입장에서 진술된 논의에 그쳤다. 즉 메츠의 제임스에 대한 논의에서 그가 토마스 아퀴나스를 옹호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 그 자신의 철학적 입장이라기보다 차라리 옹호를 위한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의 차용 정도였다.
역사적으로 그는 당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성을 위한 실질적 실무진이였기에, 두란두스 등과 같이 자기 수도회 내부 토마스 아퀴나스 비판에 대하여 단속할 뿐 아니라, 외부에 대해서도 단속해야 했다. 그것이 그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공적일이며, 그의 철학은 아니었다.
그는 강의 헨리나 두란두스 그리고 둔스 스코투스나 킬와르드비 그리고 페캄과 같이 공개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논박하지 않는다. 아니 논박을 시도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고유한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토마스 사유의 외부로 나아간다.
그는 분명 많은 부분 토마스 아퀴나스와 구분되며, 토마스 아퀴나스와 강의 헨리 등 당시 유행한 많은 철학적 논의에 영향을 받으며 탈-토마스 아퀴나스적 노선에서 철학을 한 인물이다. 물론 이 둘은 많은 유사점이 있지만, 그 만큼 이 둘은 핵심적 견해의 차이, 즉 존재와 본질에 관한 논의, 형상의 다수성에 관한 논의, 실재론적 구분에 관한 논의 등에서 차이를 가진다. 이 논의들은 한결같이 당시 역사적으로 토마스 노선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논의들이었다. 그러면 왜 그는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자신의 이러한 존재론적 입장에 근거하여 당시 강의 헨리와 둔스 스코투스 그리고 두란두스 등과 같이 토마스 노선을 논박하지 않은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그가 서 있던 그의 여러 가지 시대적 위치 때문일지 모른다. 혹은 그의 수도회 선배에 대한 존경심에 의하여 직접적인 논박을 피한 것일지 모른다.53) 아니면 이 둘이 복합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토마스의 길을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다.
4.0 나가는 길
우리가 아는 나탈리스는 단편적이다. 여전히 많은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 20세기 초 충직한 토미스트 철학자에서 이젠 비-토마스적 논의를 가진 절충적 토미스트 철학자로 그 해석이 달라지고 있지만, 더 많은 것이 알려진다면, 그는 아예 토미스트의 범주에서 제외되어 버릴지 모른다. 사실 그러한 경우는 철학사에서 허다하다. 과거 철학사는 잉겐의 마르실리우스를 실재론자로 보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철학사는 더 이상 그를 그렇게 규정하지 않는다. 또한 오캄 역시 뵈너 등의 연구 이후 그에 관한 많은 잘못된 선입견이 단지 선입견에 그치고 있음이 밝혀였다. 이와 같이 나탈리스 역시 앞으로 더욱 더 많은 연구들이 그를 독자적 철학자로 자리 메기게 할지 모른다. 적어도 필자는 현재 엄밀한 의미 혹은 존재론적 의미의 토미스트에서 그를 제외한다. 이 둘의 유사점은 이 둘의 차이에 비하면 적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철학자를 토미스트의 입장에서 덜 토미스트적이라는 이유로 평가 절하하고자 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는 토미스트의 틀을 벗어나는 곳에서 당시 신학적 문제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론이나 성사론적 사유의 방법론을 구하고자 한 인물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린 그를 누군가의 철학적 사유의 범주에 속하는 이로 규정하고, 그 기준으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해법에 귀를 기울려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시대가 요구한 조건 속에서 그가 얼마나 충실한 철학자였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
그는 당시 둔스 스코투스 등에 의하여 제기된 직관적 인식과 추상적 인식에 관한 논의를 비롯하여 그 시대 첨단의 고민들을 한 인물이며, 이를 위하여 여러 철학을 종합하고 나름의 입장을 가지기 위하여 노력한 인물이다. 하지만 아직도 파편적이다. 그에 대한 이러한 몇몇 파편으로 그를 이야기하기 아직은 시기상조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를 통하여 후기 중세철학의 또 다른 고유한 철학적 구성물을 만나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 차후를 기대하며 이 정도 본 논의를 접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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