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기독교와 철학"으로 발표한 바 있습니다.>
강의 헨리와 1277년 이후 철학
유 대칠
(토마스철학학교)
1. 들어가기.
특정의 시기를 단지 한두 사람만으로 이해하고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만일 특정의 시기를 단지 한두 사람만으로 이해하고 규정해버린다면, 분명 그 시기는 매우 볼품없어져 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대가 담은 수많은 얼굴들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 현실 역사를 주도한 대부분의 힘은 그 수많은 얼굴 속에 감추어져있다. 그러니 이러한 다양성을 무시하고 단지 한두 명의 인물로 그 시대를 규정함은 여러 문제점을 가지게 된다.
중세 철학사 역시 다르지 않다. 중세 철학 또한 단지 몇 명의 얼굴만으로 그 시대의 모든 다양성을 지워서는 아니 된다. 분명 중세 철학이란 특정 시기의 철학도 수많은 얼굴에 의하여 형성되고 다듬어진 하나의 거대한 조각품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서로 논쟁을 통하여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주고받으며 만들어간 거대한 논쟁의 역사가 철학사라고 할 때, 철학사의 진정한 이해는 한두 사람의 역사가 아니라, 다양한 철학자들 사이에 오고간 그 수많은 논쟁들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중세의 어떤 한 명의 철학자도 이러한 관계성에 무관하여 홀로 철학을 하진 않았다. 모두가 다양성 속에서 서로 교류하며 논쟁하는 가운데 철학을 하였다.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6-1308)는 강의 헨리(Henry of Ghent 13세기 초-1293)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6-74) 그리고 아비첸나(Avicenna 980-1037) 등의 철학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때론 비판하고 수용하며 철학을 일구었고, 오캄(William Ockham 1287-1347) 역시 스코투스와 하클레이(Henry of Harclay 1270-1317), 아우레올리(Peter Auriol 1280-1322)와 레딩의 요한(John of Reading 1285-1346) 그리고 채톤(Walter Chatton 1285-1343)과 때론 비판하고 수용하며 그 자신의 고유한 철학을 일구었다. 그러니 스코투스 철학의 진정한 이해는 바로 이러한 논쟁의 흐름 속에서 파악되며, 오캄 역시 그와 같다. 물론 다른 중세 철학자 역시 다르지 않다. 만일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단지 몇 명의 인물만으로 이해한다면, 결과적으로 역사는 분절된 그 무엇이 되고 만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한 명이 등장하고, 세월이 흐른 뒤 또 다른 시대를 대표하는 또 다른 한 명이 등장한다. 그러나 실재의 역사 속에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다. 그 두 인물 사이엔 매개(媒介)가 된 수 많은 철학자들이 있었고, 전자의 이론은 수많은 철학자들에 의하여 논의되고 부정되고 긍정되는 가운데 또 다른 시대의 다른 인물에게로 이어져간다. 즉 역사는 하나의 연속체이지, 분절체가 아니다. 모든 철학자의 고민은 그 연속되어가는 역사 가운데 온전히 이해된다.
1277년 이전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과 1277년 이후 스코투스의 철학 사이엔 그 문제의식이나 논리의 전개에서 사뭇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왜인가? 더 넓게는 13세기 철학과 14세기 철학 사이에 존재하는 그 큰 간격은 무엇으로 생긴 것인가? 분명 그 간격의 사이엔 수많은 철학자들의 매개가 있었을 것이며, 그 매개들로 인하여 1277년 이전의 철학과 그 이후의 철학은 자연스럽게 이어졌을 것이다. 본 논의의 일차적 목적은 바로 그 매개를 통하여 이러한 간격을 채움이다.
13세기와 14세기 혹은 1277년 이전 철학과 이후 철학의 매개 지점, 즉 가교에서 만날 수 있는 철학은 생각보다 매우 다양하다. 실상 역사를 단지 한두 명으로 규정하지 않겠다는 맘으로만 바라본다면, 철학사는 생각보다 더 다양하고 풍부해지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 본 논의가 집중해서 만나고자 하는 인물은 강의 헨리1)이다. 강의 헨리는 1277년 철학의 요람이던 인문학부를 향하여 가해진 금지령과 관련된다. 바로 그 자신이 그 금지령과 연계된 위원회의 일원이기도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시제 브라방 등의 철학이 논쟁의 대상이 되거나 금지령의 대상이 될 때, 강의 헨리는 강하게 이들의 철학이 오류임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그와 동시에 이들이 기본으로 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한계 속에선 근본적으로 그 오류를 해결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런 그이기에 수많은 비판 속에서도 1277년의 금지령을 ‘합리적인 것’으로 확신했다. 그리고 그의 삶 동안 한결같았다.2)
1277년의 금지령은 여러 가지 내용을 포함하였다. 예를 들어, 신학을 필연적 학문으로 규정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는 신학의 대상인 신의 자유 의지를 어떤 필연성에 구속시킬 가능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체 없이 우유가 잔존할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존재론의 근본적 입장에도 제동을 걸었다. 신은 주체 없이 우유를 존재하게 할 충분한 권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이외에도 매우 다양한 논의들이 1277년 금지되었다. 이러한 금지령의 많은 부분엔 신의 권능이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의 필연성과 조화되지 않는다는 점이 놓여있다. 당시 이성적 사유의 대명사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신앙과 조화되기 힘든 여러 면모를 가진다는 점이다. 이에 시제와 오캄과 같은 이는 신앙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 즉 ‘믿는다’의 영역과 ‘이해한다’의 영역을 구분함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3) 즉, 이성의 영역에선 실체 없이 우유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지만, 신앙의 영역에선 신의 권능으로 가능한 것으로 믿을 수 있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과 이성의 분리는 곧 합리적 신앙의 입장에선 적절하지 못한 것이 되었다. 이에 강의 헨리는 합리적 신앙, 즉 신앙에 대한 이성의 합리화를 시도하며, 분리를 주장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이성의 영역에 관한 논의들도 신앙과의 조화 속에서 얼마든지 설명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하여 강의 헨리는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상당 부분 떠난다. 신앙의 합리화에 방해가 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상당 부분 수정하거나 보완하기도 한다. 이렇게 마련한 강의 헨리 철학은 1277년 이후 철학자들에게 논쟁의 대상이 된다. 그가 새롭게 형성한 비-아리스토텔레스적 토대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후 세대의 철학자에게 큰 영향을 준다. 이후 철학자들은 그가 마련한 새로운 철학적 틀 속에서 그들 자신의 철학을 이어간다. 결과적으로 그는 1277년 이전 철학을 비판하며, 새롭게 1277년 이후 철학의 기본적 틀을 마련한 이가 되었다. 그 가운데 그 자신이 또 다시 비판의 대상이 되며, 논쟁의 중심에 서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은 1277년 이후 철학을 풍성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철학사적 위치는 1277년 이전과 그 이후를 매개하는 매개물로 그 간격을 이해하게 하는 좋은 수단이 될 것이다. 본 논의는 이러한 이유에서 강의 헨리를 근거로 1277년 이전과 이후의 간격을 좁히고자 한다.
2. 가능태(potentia) 개념의 새로운 이해.
강의 헨리의 눈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했다.4) 그대로는 결코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적절하지 않아 보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은 많은 부분 필연성에 근거한다.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을 필연성과 영원성에 근거하여 이해한다. 다음 글을 읽어보자.
“학문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러하다. 따라서 영원하다. 단적으로 필연적인 것들은 모두 영원하며, 영원한 것들은 생성되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으니까.”5)
학문은 필연적이다. 이러한 도식을 신학에 적용하여 보자. 그러면 신학 역시 필연적 학문이 되고 만다. 그것이 신학을 학문으로 존재하게 하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신학이 필연적 학문이라면, 그 대상도 필연성을 가져야만 한다. 그런데 신이란 존재는 필연적 존재인가? 필연적이라 함은 ‘다르게 될 가능성이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에 관한 정의는 곧 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꼴이 된다. 신은 분명 절대적 권능(potentia absoluta)을 가진 존재이며, 이에 근거하여 지금의 상황을 다르게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존재임이 분명하다.6) 물론 그리스도교의 내부에도 신의 필연성을 그의 합리성과 결부하여 이해하는 흐름이 있었다. 지금 신이 창조한 것은 가장 합리적인 것이며, 그 자신의 합리성에 근거하여 지금과 같이 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이다.7) 즉 지금의 행위는 필연성을 가진다는 말이다. 이러한 신의 이성에 근거한 주지주의적 발상은 신의 필연성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1277년 강의 헨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이러한 논의가 신의 절대적 권능에 적절하지 않았고 여겼다. 이들은 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떠한 것도 수용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1277년 이후는 주지주의가 아닌 신의 의지가 중시되는 주의주의의 시대로 전환된다.8)
강의 헨리는 신의 절대적 권능에 관한 어떤 식의 필연성도 수용하지 않으려 했다. 여기에서 그의 눈에 걸리는 것은 바로 가능태(potentia) 개념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 즉 dynamis에 준한 라틴 번역어이다. 그런데 이 가능태란 필연성과 관련된다. 씨앗의 가능태는 새싹이 될 필연성을 가진다. 지금 현실화된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그 이전 주체인 질료가 가진 가능태의 현실화이다. 가능태는 오직 현실태와 관련되어 이해되며, 모든 현실태는 가능태의 이행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기본적 입장이다.9)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면, 서방에 알려진 아비첸나의 논변과 같이 이 세계의 모든 것은 가능태로 존재하던 것이 필연적으로 현실화된 것이다. 즉 다르게 될 수 없었다.10)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도식을 창조 행위에 적용한다면, 창조 행위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필연적으로 이행되는 가운데 주어진 것이며, 피조물은 창조 이전 어떤 가능태를 가진 주체로 존재하고 있어야만 한다. 마치 지금의 새싹이 씨앗이란 질료, 즉 변화의 주체가 가진 가능태의 필연적 현실화이듯이 창조도 창조 이전에 어떤 질료 혹은 그 주체 가운데 가능태로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단 논리이다. 이에 의하면 우주는 영원한 것이 되고 말며, 창조 역시 필연적 행위의 하나일 뿐이게 된다. 이에 강의 헨리는 가능태 개념을 수정한다. 기존의 가능태는 창조 행위를 설명하지도 못하며, 무(無)로부터의 창조 역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주체의 가능태’(potentia subiectiva)와 ‘대상의 가능태’(potentia obiectiva)로 가능태 개념을 구분한다.11) 이는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시발점이 된다. 주체의 가능태는 질료의 가능태이다. 변화의 주체인 씨앗이란 질료는 하나의 형상을 수용할 가능태를 가진다. 또한 이는 자연학적 필연성을 가진다. 이런 ‘주체의 가능태’는 형상과 관련된 질료의 가능태이다. 하지만 ‘대상의 가능태’는 이와 다르다. 간단히 존재의 가능태와 관련된다. 신은 자신의 전지전능(全知全能)함으로 실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무(無) 조차 인식할 수 있다. 이렇게 인식된 것은 신의 의지에 의하여 그 동의 가운데 실재적으로 존재할 수 있고, 그저 신의 인식 대상으로만 남겨질 수도 있다. 여기에서 신의 인식 대상의 가능태가 바로 ‘대상의 가능태’이다. 이 대상은 실재적으로 존재하게 될 가능태를 가지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는 필연적이지 않다. 한마디로 이 대상의 가능태는 ‘가능성의 대상’(possiblie obiectivum)과 관련된 ‘존재의 가능태’(das Seinspotential)이다.12)
신은 하나의 대상을 존재하게 할 수도 있으며, 아니게 할 수도 있다. 이 세상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에 의하여 현실적 존재가 허락된 것이다. 즉 신의 동의 가운데 존재한다. 바로 대상의 가능태 개념이 적용된 것이다. 이러한 대상의 가능태 개념은 창조를 설명함에 있어서도 적절하게 사용된다. 만일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 개념만으로 창조를 설명한다면, 그것은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많은 오류와 비신앙적인 면모를 가지게 된다. 우주는 영원한 것이 되고, 신의 창조 행위 역시 필연적이게 된다. 그러나 대상의 가능태에 의하면 이는 달라진다. 우선 우주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질료의 가능태만을 생각한다면, 우주는 영원한 것이지만, 신은 먼저 그러한 질료에 존재를 부여해야 했다. 즉 대상의 가능태가 신에 의하여 현실적인 것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 이후에야 질료에 의한 주체의 가능태가 진행된다. 이에 따라, 창조, 즉 존재에 대한 신의 동의는 필연적이지 않으며, 우주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게 된다. 그 뿐 아니라, 이는 다른 신학적 문제에도 적용된다. 예를 들어, 적-그리스도의 문제를 보자. 적-그리스도는 지금 질료와 같은 주체의 가능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의 가능태로 설명 가능하다. 즉, 대상의 가능태로 설명 가능하다.13)
신은 아직 존재하지 않은 것마저도 인식의 대상으로 취한다. 이러한 인식 대상의 존재가 가진 가능태를 강의 헨리는 대상의 가능태로 정의한다. 이 가능태는 신에 의하여 현실화됨으로 실재적 존재를 가지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다. 이는 주체의 가능태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와 달리 필연성을 가지지 않는다. 오직 신의 창조 행위와 관련되며 신의 절대적 권능과 관련된다.
3. 새로운 존재의 토대 닦기.
가능태에 관한 강의 헨리의 논의는 새로운 존재론의 토대 형성 작업으로 이어진다. 회들이 논의하였듯이 강의 헨리에 의하여 제안된 존재론의 용어들은 분명 그 이전과 구분되는 새로운 존재론적 토대가 되었다.14) 이는 바로 앞서 다루어진 가능태와 관련된 그의 입장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논의의 귀결이다.
새롭게 등장한 존재론의 용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본질의 존재’(esse essentiae)와 ‘실존의 존재’(esse existentiae)이다. 강의 헨리에게 신의 인식 대상으로 주어진 것은 ‘본질의 존재’를 가진다. 이러한 ‘본질의 존재’를 가지는 것이 취하는 가능태가 ‘대상의 가능태’이다. 이러한 ‘본질의 존재’는 현실적 존재를 가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대상의 가능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대상의 가능태’를 가진 ‘본질의 존재’는 비록 현실화되어 ‘실존의 존재’를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신의 인식 대상인 한에서 하나의 존재이다.
강의 헨리의 이 논변은 분명 그 이전 토마스 아퀴나스의 것과 구분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론은 기본적으로 존재(esse)와 본질(essentia)의 실재적 구분에 근거한다. 그렇기에 ‘본질의 존재’란 말 자체가 그의 존재론에선 설 자리가 없다. 한마디로 결코 수용할 수도 없다. 하지만 강의 헨리 역시 여기에서 약간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 만일 실재적 구분을 수용한다면, ‘본질의 존재’가 파기되며, 이에 근거가 된 ‘대상의 가능태’에 관한 논의도 그 토대를 잃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그는 실재적 구분을 수용하지 않으며, 그 대안으로 ‘지향적 구분’을 제시한다.15) 이러한 지향적 구분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가 가진 실재(res), 이성(ratio) 그리고 지향(intentio)에 관한 약간의 이해가 필요하다. 실재는 절대적 자기 존재를 가진다. 어떤 심적 작용에 의하여 생성된 것이 아니다. 이에 따라 실재에 의한 구분은 완전히 다른 절대적 실재 가운데 적용된다. ‘이성’에 의한 구분은 ‘실재’에 의한 구분과 다르다. 이성에 의한 구분은 ‘인간’과 ‘이성적 동물’ 사이의 구분과 같다. 이는 실재의 구분과 같이 대상이 실재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지향’이다. 지향은 동일한 대상에 관하여 그 지향의 상이함에 근거해 상이한 개념을 형성할 수 있을 때 주어진다. 예를 들어, ‘인간’을 지향하는 ‘이성적인 것’과 ‘동물’은 하나의 대상에 대한 서로 다른 지향이다. ‘이성적인 것’과 ‘동물’은 하나의 대상 가운데 상이한 두 가지 실재, 즉 실재가 아니다. 이러한 구분은 이성에 의한 구분과도 분명히 다르다. 이성에 의한 구분은 정의와 정의된 것, 즉 ‘이성적 동물’과 ‘인간’ 사이와 같이 동일한 것에 대한 상이한 이해 방식에 의하여 구해지는 것이지만, 동일한 본질을 가진 동일한 대상 가운데 서로 다른 근본적 요소에 독립적으로 사용될 순 없다. 예를 들어, ‘인간의 본질’을 가진 ‘인간’ 가운데 서로 다른 근본적 요소인 ‘동물’과 ‘이성적인 것’은 이성에 의한 구분으로 설명될 수 없다. 하지만 지향에 의한 구분은 동일한 대상 가운데 서로 다른 근본적 구성 요소가 독립적으로 파악되어지게 한다. 왜냐하면, 동일한 대상이지만, 지향에 따라 상이한 구성 요소로 지향될 수 있기 때문이다.16) 그런 이유에서 ‘동물’과 ‘이성적인 것’과 같이 상이한 요소들이 ‘인간’이란 동일한 대상에 대한 상이한 지향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지향적 구분을 강의 헨리는 본질과 존재의 문제에 적용한다. 지향의 구분에 의하면, 본질과 존재는 실상 동일하다. 강의 헨리는 본질과 존재가 대상의 측면에서 상이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대상에 대한 상이한 지향에 의하여 구분된다고 본다. 이처럼 그는 실재적 구분을 수용하지 않으면서 본질과 존재에 관한 논의를 전개한다. 그에게 실재적 구분을 수용한다는 것은 앞서 논의하였듯이 그의 존재론은 물론이고, 그 근간이 되는 가능태에 관한 논의도 설 자리를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17)
강의 헨리가 제시한 ‘본질의 존재’와 ‘실존의 존재’는 이후 많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준다. 그리고 때를 같이 하여, 1277년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의 실재적 구분은 강한 비판에 놓여진다. 이전에 이미 시제 브라방 등에 의하여 대안이 모색되었지만,18) 1277년 이후 이는 더욱 더 많은 이들에 의하여 확대되어진다. 비록 강의 헨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는 힘들지만, 1277년 이후 많은 철학자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론에 대한 강의 헨리의 비판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수용한다.
로마의 자일스(Giles of Rome 1243/7-1316)와 폰데인의 고트프리(Godfrey of Fontaines 1250?-1306/9) 그리고 비테르보의 제임스(James of Viterbo 1255-1307/8) 등도 토마스 아퀴나스와 다른 길에 접어든다. 이들은 분명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강의 헨리가 마련한 새로운 존재론의 판에서 철학을 구사하였다.19) 적어도 그가 제시한 철학의 용어를 사용하였다.20) 로마의 자일스는 비록 실재적 구분을 수용하였지만,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것이 아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본질의 존재’란 용어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본질의 존재’와 ‘실존의 존재’를 수용하고, 이것 사이를 실재적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실재적 구분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물론 강의 헨리와도 다르다. 다시 말하자면, 그 역시 기본적으로 강의 헨리와 다른 길에 있지만, 강의 헨리가 마련한 존재론적 장에서 철학을 구사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의 자일스는 독자적 철학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강의 헨리 사이에서 자신의 고유한 입장을 마련한 독자적 철학자란 말이다. 이 같은 철학의 방법론을 가진 철학은 1277년 이후 매우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폰데인의 고트프리역시 토마스 아퀴나스에 근본적으로 반대하며, 동시에 강의 헨리에도 반대한다. 하지만 그 역시 그 시대의 이러한 흐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다. 1277년 이후 이러한 흐름은 종국에 실재적 구분에 대한 매우 다양한 방식의 반론들을 양산하였다. 이는 프라이베르그의 디트리히(Dietrich of Freiburg 1250-1310)에서도 발견된다. 그는『존재자와 본질에 대한 논구』(De ente et essentia)와 『존재자의 무엇임에 관하여』(De quidditatibus entium)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실재적 구분을 비판한다.21)
1277년의 금지령을 배경으로 강의 헨리는 새로운 존재론을 마련했다. 이는 그와 동시대 혹은 직후 철학자들 사이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종국에는 그를 벗어난 더욱 더 다양한 반-실재적 구분의 논의를 양산하게 하였다. 실재로 우린 1277년 이후 역사에서 반-실재적 구분의 다양한 대안들. 예를 들어, 지향에 따른 혹은 논리에 따른 구분들을 마주하게 된다. 강의 헨리는 왜 이러한 다양한 논의들이 1277년 이후 그토록 활발하게 진행되어지게 되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자신이 그 변화의 중심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강의 헨리의 존재와 본질에 관한 철학적 입장은 아비첸나로부터 많은 세례를 받는다. 아비첸나는 대상의 가지성과 관련하여 ‘속성의 존재’(esse proprium)를 제안했다.22) 그리고 이는 강의 헨리에 의하여 ‘본질의 존재’가 된다. 실상 강의 헨리는 자신의 가능태 이해와 호환되는 존재론을 위하여 아비첸나의 존재론을 상당수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이것도 바로 그러한 경우 가운데 하나이다.23) 그런 의미에서 1277년의 금지령을 반-아비첸나로 이해하거나 반-이슬람 철학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란 것도 강의 헨리의 철학은 보여준다. 그 이후에 이들 철학은 후기 중세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4. 존재론적 사유에 근거한 개체화의 문제.
1277년 이후 존재론적의 핫이슈는 개체화의 문제이다. 강의 헨리 역시 이 문제에 한 몫을 한다. 1277년의 금지령은 기본적으로 질료에 의한 개체화에 문제를 지적했다. 분명 신은 질료 없이 개별적 실체를 야기할 수 있다. 신의 창조 능력과 그의 절대적 권능은 충분히 그렇게 행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질료가 굳이 개체화의 원리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영향에 의하여 1277년은 질료의 개체화에 관한 여러 가지 반론들이 등장한다. 이는 강의 헨리, 둔스 스코투스 그리고 오캄에 이르기까지 예외가 아니다. 이들은 질료가 아닌 곳에서 개체화가 충분히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혹은 경우에 따라 개체화에 관한 논의 자체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의 헨리는 질료의 개체화가 아닌 곳에서 충분히 신앙과 조화되는 합리적인 개체화의 설명의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강의 헨리의 논의는 기본적으로 가능태와 ‘본질의 존재’에 관한 논의와 관련되며, 이에 따른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다.
개체화의 논리는 1277년 이후 천사의 개체화에 관한 논리와 함께 문제의 전면에 등장한다. 천사는 기본적으로 비-질료적 실체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들은 질료에 의하여 개체화되지 않는다. 분명 이는 불합리하다. 이러한 까닭에 강의 헨리는 각각의 개별자는 그 자체로 개별자일 뿐이며, 그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하여 개체화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즉 개별자의 형상은 그 자체로 개별적 형상이지, 질료와 같은 것이 더해져 그러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일차적으로 형상 그 자체가 하나의 개체화의 원리일 수 있다. 하나의 개별자가 다른 것과 구분되는 것은 바로 그 형상이 다르기 때문이니 말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강의 헨리는 각각의 형상을 가진 각각의 개별자는 그 자체로 다른 것과 구별되는 독립된 하나의 것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개별적 형상의 단일성은 곧 타자의 부정, 달리 말해 그 자체가 타자가 아님을 내포한다. 이런 이유에서 형상의 단일성, 즉 개별자의 단일성을 사유할 때, 우린 자연스럽게 다수성을 생각하며, 그 다수 가운데 구별되는 하나의 단일성 혹은 단일자를 인식하게 된다.24) 예를 들어, ‘이 인간’이란 하나의 단일성을 가진 형상을 사유할 때, 우린 자연히 ‘그 인간’과 ‘저 인간’이 아닌 ‘이 인간’을 사유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그 하나의 ‘이 인간’이 그 자체로 타자와 구분되는 하나의 단일성을 가진 개별자이기 때문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같은 강의 헨리의 논리는 그의 가능태 이론과 ‘본질의 존재’와 관련된다. 신에 의하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대상의 가능태’, 즉 ‘존재의 가능태’를 가진 ‘본질의 존재’가 현실화됨이다. 만일 신이 이를 현실화하지 않았다면, 이는 ‘실존의 존재’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고, 그저 ‘대상의 가능태’로 남아있어야만 했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이 인간’과 ‘저 인간’도 신의 현실화 행위가 없었다면, 그저 ‘대상의 가능태’로 머물러야만 했다. ‘이 인간’과 ‘저 인간’은 처음부터 신의 창조 행위에 의하여 그 존재를 달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강의 헨리는 신을 개체화의 또 다른 원인이라 지적한다. 한 마디로 신이 처음부터 각각의 것을 다르게 창조하였단 말이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대상의 가능태’가 신의 창조 행위에 의하여 각각 다른 현실적 존재로 존재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강의 헨리의 다음 글을 보자.
“이들 두 개별자의 최초 원리이며, 작용자는 바로 신이라 말 되며, 결과적으로 신은 이들 양자에 그 가운데 자립(subsistentiam)을 부여한다.”25)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자립’은 신의 창조 행위에 의하여 부여되며, 이 자립, 즉 존재 혹은 실존에서 각각의 개별자들은 서로 구분된다. 이러한 존재의 구분은 결국 각각의 존재가 부여된 형상의 차이로 이어지며, 이 형상의 차이는 타자와 구분되어 존재하게 하는 개별자의 근거가 된다. ‘자립’에 관한 강의 헨리의 논변을 더 읽어보자.
“자립을 통하여 주체는 다른 것과 구분되며, 이 자립은 하나의 주체가 다수화 되지 않고 하나이게 하며, 다른 개별자와 구별시키는 기능을 행한다.”26)
이에 따라 강의 헨리는 서로 다른 천사들은 서로 다른 존재 혹은 자립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27) 이렇게 본다면, 강의 헨리가 주장하는 개체화 이론을 그저 이중부중으로 한정짓는 것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수반한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강의 헨리가 주장하는 개체화 이론을 이중부정으로 이해하였다. 즉 개별자는 그 자체 가운데 구분을 결여하지만, 다른 모든 타자와 구분된다는 의미에서 개체화된단 것이다.28) 그러나 이중부정에 의한 강의 헨리 이해는 강의 헨리 개체화 이론의 결과론에 한정된다. 즉 그 모두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강의 헨리에 의하면 모든 개별자들은 그 존재에서 구별되며, 그 존재를 현실화하는 창조 행위에서 구별되고, 그 존재를 가지는 형상에서도 구별된다. 각각의 개별자는 타자가 아닌 자기 존재와 자기 형상 가운데 단일성을 가지며, 그 가운데 다른 것과 구분된다. 이런 논리에서 이중부정은 단지 결과론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강의 헨리가 이야기하는 개체화의 핵심은 아니다.
강의 헨리를 필두로 본격적인 1277년 이후 체계가 시작되면서 많은 철학자들은 질료의 개체화를 비판하며, 다른 측면에서 새로운 대안을 요구한다. 스코투스와 강의 헨리 뿐 아니라 철학자들이 실재론적 존재론을 유지하는 가운데 질료의 개체화를 넘어서고자 하였다. 또 다른 일군의 철학자들, 즉 오캄과 뷔리당과 같은 철학자들은 아예 실재론적 존재론이란 판세의 대안으로 개념론 혹은 유명론적 존재론을 제시한다. 하지만 모두가 공통으로 1277년 이후 강의 헨리를 필두로 시작된 고민의 서로 다른 해법이었다.
강의 헨리가 1277년이란 배경 속에서 이야기하는 가능태 이론은 이미 보았듯이 ‘본질의 존재’와 관련되며, 또한 개체화 이론과 관계된다. 하지만 이 같은 논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바로 존재의 유비성과 일의성에 관한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역시 1277년을 배경으로 강의 헨리가 주장하는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다.
5. 존재의 유비성과 일의성 문제.
강의 헨리는 신과 피조물의 관계를 유비적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이러한 답안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비론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미 논의한 바와 같이 강의 헨리가 기본으로 삼고 있는 존재론의 틀이 이미 토마스 아퀴나스의 그것과는 상당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1277년 금지령을 주도한 인물들은 신의 절대성과 절대적 권능을 지지하던 이들이다. 그런 그들이기에 신과 피조물의 존재를 동일한 차원에서 서술한다는 것은 결코 용인할 수 없었다. 강의 헨리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존재의 유비성을 지지한 인물이다.
강의 헨리에 의하면 인간의 인식 능력은 결코 신과 피조물의 간격을 좁힐 수 없다.29) 쉽게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 신을 있는 그대로 진술할 수 없다. 이는 불가능하다.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신의 절대성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다. 이러한 강의 헨리의 기본적 입장에 의하면 신과 피조물 사이엔 어떤 실재적 공통성도 있을 수 없다. 만일 공통성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 역시 신의 절대성에 관한 도전이다. 어떠한 공통성도 없다면, 공통성에 근거한 일의성이 설 자리도 없다. 설사 우리가 존재와 같은 단어를 신과 피조물에 적용한다하여도, 이는 대상의 실재적 공통성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명칭의 공통성일 뿐이다.30) 명칭의 차원을 넘어서 그 어떠한 공통성도 아니다. 피조물은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그 존재를 신에게 의존하고 있다. 신의 동의 없이 피조물의 존재는 현실적일 수 없으며, 그저 ‘대상의 가능태’로 존재할 뿐이다. 그런 맥락에서 신의 존재와 피조물의 존재는 그 존재의 등급이 다르며, 이 둘은 어떠한 공통된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런 강의 헨리이기에 해법은 오직 유비론 뿐이다.
유비론은 1277년 직후 강의 헨리 뿐 아니라, 많은 철학자로부터 지지를 받는다. 하지만 이 시기의 유비론은 저마다 매우 상이한 형태를 가진다. 예를 들어, 토마스 수턴(Thomas of Sutton 1250?-1315)의 유비론은 강의 헨리와는 분명히 다르다. 강의 헨리는 신과 피조물의 존재의 등급에 근거하여 유비론을 다룬다. 존재의 등급이 다르기에 그것에 대한 인식의 거리를 좁히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발상에 근거한다. 기본적으로 강의 헨리는 존재의 등급에 근거한 유비론이다. 반면 수턴의 유비론은 인간 인식의 한계성과 관련되어 진술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무엇인가 인식함은 그 대상을 하나의 범주 가운데 규정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은 그러한 규정함에 의하여 한정되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인간의 인식 능력은 신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그러니 그저 유비적으로 신에 관하여 서술할 뿐이다. 이것이 수턴의 유비론에 기본적 발상이다.31) 비록 그 종착지가 유사할 지라도, 분명 이 둘의 출발지는 상이하다.
1277년 이후 그 방식에서 차이를 가지지만 다양한 유비론이 다루어졌다. 그 가운데 강의 헨리는 가장 논쟁인 것 가운데 하나였다. 대표적으로 그의 논변은 둔스 스코투스를 위시한 존재의 일의성을 주장하는 이들의 가장 주된 논박의 대상이었다.32) 그리고 이러한 논박에 의하여 강의 헨리의 노선에 선 많은 철학자들은 자신의 철학을 수정하기도 하고, 때론 영향을 주며 후기 중세 철학을 풍성하게 하였다.
6. 강의 헨리의 후기 중세 철학적 문제의 탄생.
강의 헨리는 1277년 금지령을 위한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이제 갓 신학부의 교수가 된 강의 헨리는 금지령의 정당성을 위하여 소집된 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스스로도 10여년이 지난 1286년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 위원회의 활동을 증언하고 있다.33) 그리고 그는 그의 삶 동안 줄곧 그 금지령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주장하였다. 앞선 논의를 통하여 우린 그의 철학이 1277년의 금지령과 깊은 연관을 가짐을 확인하였다. 그는 신의 절대적 권능에 도전하는 필연주의를 거부했고, 이를 위하여 가능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벗어난다. 또한 이러한 벗어남을 통하여 신의 절대적 권능에 근거한 새로운 존재론을 구성한다. 또한 이러한 새로운 존재론에 근거하여 질료에 의한 개체화를 주장하는 이들에 대한 금지령의 합리적 입장 혹은 해법을 찾는다. 그 뿐 아니라, 신의 절대성에 근거한 그의 철학은 그의 존재론에 근거하여 존재의 유비론을 주장한다.
그가 1277년 이후 형성한 이러한 철학적 논의는 이후 철학적 담론의 근간이 된다. 흔히 철학사의 작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1277년 이후 그의 철학사적 위상을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역사적으로도 Gandavistas라고 불리던 강의 헨리 노선에 선 인물들이 있었고,34) 니그리는 직접적으로 1277년 이후 그의 철학적 노선을 따르던 이들이 상당수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35) 또한 그가 마련한 ‘본질의 존재’와 ‘실존의 존재’ 그리고 ‘대상의 가능태’와 ‘주체의 가능태’라는 새로운 존재론의 개념들은 그 이후 매우 널리 통용되어 사용되었다. 카프레올루스는 다음과 같이 그 상황을 진술한다.
“강의 헨리가 이야기한 바와 같이... 본질은 두 가지 존재를 가진다. 즉 본질의 존재와 실존의 존재이다”36)
이러한 그의 영향력은 멀게는 15세기에 이르며,37) 가깝게는 동시대의 인물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38) 1277년 이후 새롭게 강의 헨리에 의하여 마련된 존재론은 이후 중세 철학의 기본적 틀이 된다. 많은 이들은 이 틀에서 갑론을박하였다. 이미 살핀 바와 같이 유비론에 관한 논의도 다르지 않다. 그의 유비론은 둔스 스코투스를 자극하고, 이는 이후 강의 헨리 노선과 스코투스 노선 사이의 새로운 논쟁을 낳았다. 이 새로운 논쟁은 다양한 이론을 양산하는 기회가 되었다. 동일한 유비성이지만, 서로 다른 논리적 구조를 낳게 하였고, 일의성을 주장하는 이들도 서로 다른 다양한 논리적 구조를 낳게 하였다. 이러한 강의 헨리 이후 촉발된 논리는 이후로 하클레이와 오캄 걸쳐 후기 중세 철학의 한 부분을 장식한다.39)
정리해보자. 강의 헨리는 1277년 이전 질료에 의한 개체화, 존재와 본질의 실재적 구분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에 근거한 자연학 등이 결코 신의 절대적 권능에 근거한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적절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새로운 존재론을 구상한다. 이는 1277년 이후 후기 중세 철학이 고민한 많은 문제들의 틀이 된다. 비록 그의 철학이 항상 긍정적으로 수용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가 던진 고민과 물음 그리고 그의 입장들은 이후 세대 철학자들에게 하나의 도전 대상이 되었다. 그 도전은 또 다른 도전을 만들고 또 만들면서 후기 중세 철학을 풍부하게 하였다. 1277년 이전의 철학이 ‘체계의 철학’이라면, 그 이후 철학은 ‘비판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40) 만일 이러한 이해가 사실이라면, 강의 헨리는 처음으로 비판의 칼을 든 인물이다. 그는 1277년 이전 철학과 그 합리성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추구하였다. 물론 그 자신의 철학도 다른 이의 비판 대상되었지만 말이다.
본 논의는 강의 헨리를 통하여 1277년 이전과 그 이후의 간격을 좁히고자 하였다. 본 논의를 통해 볼 때, 강의 헨리는 1277년 이후 첫 세대의 철학자, 즉 후기 중세 철학의 첫 머리가 선 철학자이다. 그는 1277년 이전의 체계를 비판하고 1277년 이후 철학의 틀을 닦았다. 그를 통하여 후기 중세 철학의 고민들이 역사 속에서 혹은 사상사 속에서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흐린 윤곽선을 그려보았다. 더 분명한 정밀화를 위해선 강의 헨리를 비롯한 더 많은 인물의 상이 그려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본 논의는 강의 헨리에 한정하고 흐린 윤곽선을 그리는 것으로 만족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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