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셀무스 철학에서 『진리론』의 위치
유 대칠
(토마스철학학교)
들어가는 글
중세 철학에서 안셀무스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라는 것은 매우 다양한 견해를 가진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많은 철학사가들이 그가 제시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란 명제가 중세 철학에 큰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향력은 또 다른 물음을 야기하였다. 중세 철학의 많은 고민들은 과연 철학인가 아니면 신학인가? 이러한 논의는 20세기 초 여러 학자들 사이 논쟁을 야기하였다. 바르트(K. Barth)와 슈톨츠(H. Stolz) 그리고 숄츠(A. Scholz) 등이 바로 이러한 논쟁에 나선 인물들이다.1) "바르트에 따르면, 안셀무스는 신앙보다 더 중요하고 신앙으로부터 독립적이며, 신앙의 신빙성을 제시할 어떤 종류의 철학적 신학(신론)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2) 이와 달리 슈톨츠는 안셀무스를 신비주의적 신학으로 규정하며 바르트와 길을 달리하였다. 또한 숄츠는 또 다른 방식에서 바르트와 슈톨츠와 길을 달리한다. 왜냐하면 안셀무스의 시도가 신학적이라면 그의 명시적 논의와 부합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분명히 안셀무스는 이성적 근거들만을 허용하였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논의들은 안셀무스를 신학의 영역에서 철학의 영역으로 그 논의의 마당을 달리 보게 하였다. 쿠르트 플라쉬(K. Flash)와 같은 인물은 종국에 안셀무스의 시도를 신학이 아니라 철학이라고 한다. 사실 안셀무스는 분명 베렌가리우스와 같이 신앙의 합리성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의 저서 『프로슬로기온』과 『모놀로기온』3) 가운데 시도된 신의 존재에 관한 증명이 이성을 가진 이라면 비록 비신앙인에게도 타당한 것이 되길 희망했다. 이러한 안셀무스의 태도는 성서와 교부들의 저서에 근거한 권위의 증명을 기대한 란프랑크의 책망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는 원칙적으로 권위의 증명이 아니라,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비신앙인 혹은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들에게도 자신의 논리가 수용되어 질 수 있길 기대하였다. 즉 그는 이성의 필연성에 의지하여 자신의 신앙이 아니라, 언어와 논리 그리고 합리성으로 신의 존재 문제를 다루었다. 결국 이러한 그의 태도는 신학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철학이라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4) 비록 이 둘을 완전히 분리하기 힘들다 하여도 말이다.
안셀무스는 순수한 이성에 근거한 사유를 희망했다. 그 이성의 사유엔 성서란 권위가 근거 되지 않으며, 비록 성서를 수용하지 않는 이라도 그 자신의 논리가 타당한 것으로 수용되길 희망했다. 이러한 그의 논리는 이후 스콜라 철학의 방법론이 된다. 비록 안셀무스가 중세 철학의 창시자는 아닐지라도 분명 방법론에 있어 하나의 이정표가 된 존재임은 분명하다.5) 그 이후 그의 이러한 방법론은 많은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신앙의 틀 가운데 많은 문제를 다루었지만, 그 문제가 신앙의 틀 외부에 선 이들에게도 합리성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 나름의 노력을 이어갔다. 예를 들어,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이교도대전』이나 쿠사누스의 『숨겨진 신에 관한 대화』 등이 그렇다. 이들 철학자들은 이성을 갖춘 이라면 그가 이슬람을 신앙으로 가진 인물이든 혹은 그리스도교이든 상관없이 합리적인 어떤 논리 체계를 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바로 이러한 방법론의 시원의 부근에 안셀무스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분명히 중세 철학사에서 나름의 분명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론』(De veritate)은6) 그러한 안셀무스의 한 부분을 보여준다. 이 대화편에서 그는 성서의 권위에 의존하여 자신의 논변을 진행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논의 근거를 순수 이성의 근거가 되는 철학적 사변에서 마련하고, 이러한 철학적 사변을 근거로 자신의 논리를 진행하여 나간다. 즉 그다운 방법으로 논의를 진행한다. 그르면 그의 논의를 따라가 보자. 우선의 그의 저서들의 개요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안셀무스의 저서들
『진리론』의 가치를 알기 위하여 우린 그의 저서들을 정리해볼 수 필요가 있다. 물론 이후 그의 저서 가운데 『진리론』과 더욱 더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몇 가지 대화편을 따로 다루겠지만, 우선 그의 저서 일반을 정리해 보자.
철학사적으로 그의 대표작은 당연히 『모놀로기온』과 『프로슬로기온』이다. 물론 그 유명한 신존재증명이 바로 이들 저서에 체계적으로 등장함으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본 논의에선 이들 저서가 『진리론』에 앞서 저술되었으며, 상당 부분 『진리론』의 개념들이 정리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려 한다. 예를 들어, 진리의 성질에 관한 논의, 진리란 어떠한 것인가에 관한 논의는 『진리론』의 첫 부분에서 이야기하듯이 그것은 단연 『모놀로기온』에서 출발한 발상이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둘 두 저작은 단지 신 존재 증명의 측면뿐 아니라, 안셀무스의 철학이 시작하는 출발점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겠다.
다음 저작은 의미론적으로 무척이나 중요한 『문법가에 관하여』이다. 이 저서는 grammaticus가 성질인지 실체인지를 다루는 무척이나 난해한 의미론적 논의라 담긴 저서이다. 다음으로 이어질 『진리론』, 『자유결단론』, 『악마의 타락론』은 이후 다시 더욱 더 자세히 다루어지겠지만, 안셀무스의 고백과 같이 이 셋은 하나의 동일한 논리적 틀 속에서 진행되는 셋이 하나인 그러한 대화편이다. 바로 이 셋의 논리에 틀이 되는 시작에 『진리론』이 있다.
이후 안셀무스의 저서들은 『말씀의 육화에 대하여』가 있다. 이는 안셀무스의 실재론적 사유를 확인할 수 있는 저서로 로스켈리누스의 유명론에 맞서고 있다. 이후 등장하는 안셀무스의 저서는 바로 그 유명한 『왜 신은 인간이 되었는가』이다. 이 저서에서 다시 『진리론』에서 등장하던 문제들이 중심된 위치를 차지하며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다음 저서들은 그의 신학적 견해와 입장을 확인할 수 있는 저서들이다. 예를 들어, 『동정녀 잉태론』과 『성령의 발출론』 등이 그러한 것이다. 전자의 것은 현대 가톨릭의 그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 이후 신학적 논의에 영향을 준 저작이며, 후자의 것은 동교회와 서교회의 분열 시기에 핵심적인 문제가 된 성령의 발출에 대한 안셀무스의 입장이 등장하는 신학 저작이다. 이 가운데 앞으로 진행될 논의에 등장하는 저서들은 대체로 앞의 것들이다. 후가에 있는 두 권의 신학 저서들은 논의에서 배제하기로 한다. 그러면 앞선 저서들 가운데 안셀무스의 『진리론』이 어떤 위치를 가지는지를 확인해 보기로 한다.
『진리론』의 위치
안셀무스는 『진리론』을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지난 여러 번 나는 성서 연구에 속하는 세 가지의 논고를 적었으며, 이들 논고들 가운데는 어떤 유사성이 있는데, 그것은 이들 논고가 질문과 답변으로 구성된 것이며, 질문을 하는 이를 ‘제자’discipuli로 표기하고 답변을 하는 이를 실로 ‘스승’magistri이라 표기하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방식에서 편집되어진 것은 내가 고려하였듯이 변증술을 위한 소개되어야 할 것에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문법가에 대하여』(De grammatico)가 그 시작인 네 번째 것은 다른 세 가지로부터 상이한 것에 속하기에 이것은 다른 것과 같이 헤아려 지길 나는 원하지 않는다. 이 셋 가운데 하나는 『진리론』이다. 즉 진리veritas가 무엇인지? 어떤 실재 가운데 진리가 있는 것이라고 흔히 이야기되는지? 그리고 정의iustitia란 무엇인지? 또한 다른 것은 『자유 결단론』이다. 그것은 무엇이고, 이것은 인간이 항시 가지는지? 그리고 의지의 정당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이성적 피조물에게 <자유 결단이> 주어진 것이라면, 의지의 정당성을 가지는 혹은 가지지 않는 가운데 그것의 차이는 어느 정도인지? 그 가운데 수용된 합당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오직 의지의 자연적인 강도를 말하지, 의지를 정당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 은총이 뒤따르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세 번째는 의문은 진리 가운데 머물지 않으므로 악마는 어떤 죄를 지었는가라고 물어지는 물음에 대한 것이다.”7)
안셀무스는 스승과 제자의 대화편의 형식을 기본으로 한 몇 편의 저작을 남겼으며 『진리론』도 바로 이러한 저작의 하나이다. 이미 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이 가운데 셋은 바로 성서 연구와 관련된 것으로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진리론』이다. 그 이외 다른 것으론 자유 결단에 관한 『자유결단론』(De Libertate Arbitrii)과 악마에 관한 신학적 논의를 다루는 『악마의 타락론』(De Casu Diaboli)이 있지만, 이러한 논의는 안셀무스의 이야기와 같이 그의 의미론적 논의가 담긴 『문법가에 대하여』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후자의 것을 앞선 3가지 것과 같은 범주에 속해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8)
사실 앞선 3가지는 하나의 맥락 속에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예를 들어, 『자유결단론』은 그 논의의 주제가 『진리론』의 마지막 논의를 이어간다. 그 마지막에서의 논의는 바로 의지의 정당성과 바름의 관계와 인간 의지의 본성에 관한 논의였다.9) 그리고 바로 이러한 논의는 『자유결단론』의 논의로 이어진다. 이러한 『자유결단론』의 논의와 『진리론』의 논의는 또 다시 『악마의 타락론』으로 이어진다. 이 대화편에서 안셀무스는 앞선 논의보다 더 긴 분량을 두고 매우 중요한 철학적 주제를 다룬다. 그 주제는 바로 악과 부정(negatio)의 본성과 의지의 복잡함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악마는 그의 죄에 대하여 책임을 가지는 것인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신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없다. 그렇다면 악마가 가지는 것도 신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만일 이와 같이 가정 가능하다면 악마의 행위, 즉 그 죄는 악마에게 그 책임의 소지를 따질 수 있는 문제인가. 이와 같이 『진리론』과 『자유결단론』 그리고 『악마의 타락론』은 하나의 흐름 속에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위에서 안셀무스 자신이 스스로 이야기하였듯이 이와 같은 대화편은 『문법가에 대하여』와는 그 주제 면에서 사뭇 구분되기에 같은 맥락에서 헤아려 질 수 없다. 그것은 『문법가에 대하여』가 다루는 주제는 다분히 의미론적 논의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등에서 다루어진 ‘파생어’와 우유에 대한 논리적이고 의미론적 논의를 그 주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10)
안셀무스는 이와 같이 『진리론』의 첫 머리에서 그의 저작들의 성격을 정리하고, 이에 따라 그의 세 대화편과 이와 구분되는 『문법가에 대하여』를 나누었다. 그리고 『진리론』은 이러한 논의에 따른 위치상 앞선 세 대화편의 첫 머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그 논리를 큰 흐름 속에서 정리해 보자.
『진리론』1장의 기본적 개요
『진리론』에 등장하는 안셀무스 논의의 시작은 앞서 선배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리에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 교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적 전리에 관한 논의를 제시한다.11) 이러한 논의는 그의 또 다른 저작인 『자유결단론』에서도 발견된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진리는 불변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영원하며 신과 관련되어 이야기될 수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논리구조는 안셀무스에게로 이어진다. 우선 그의 대표적 저작인 『모놀로기온』에서 그 논의의 시발점을 찾을 수 있다. 다음의 글을 읽어보자.
“진리가 시작과 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침내 만일 진리가 시작을 가졌고 끝을 가질 것이라면, 그것은 시작하기 이전에 진리가 없었다는 것이 참이었다. 그것이 끝난 후에는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참일 것이다. 그렇지만 참된 것은 진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진리가 있기 이전에 진리가 있었고, 진리가 끝난 후에도 진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불합리하다. 진리가 시작과 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되거나 또는 그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이해되더라도 진리는 결코 시작과 끝으로 한정될 수 없다. 최고 본성이 최고 진리이기 때문에 같은 사실이 최고 본성에 대해서도 귀결된다.”12)
이와 같은 안셀무스의 논리는 다분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력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최고 본성, 즉 신을 영원성 가운데 사유하였고, 이는 진리의 문제와 관련지어 이해하였다.13) 이 같은 논리는 안셀무스의 『진리론』에서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다음을 읽어보자.
“제자 : 우리는 신이 진리임(deum veritate esse)을 믿으며, 또한 다른 많은 것 가운데 진리가 있다고 이야기하기에 내가 언제나 신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곳이면 어디에나 신이 그것(진리)이라고 이야기해야만 하는가의 여부를 알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의 『모놀로기온』에서 진술의 진리를 시작도 끝도 가지지 않는 최상의 진리로 증명하였습니다.”14)
이미 앞서 보았지만『진리론』의 이와 같은 입장은 이전 저작인 『모놀로기온』과 연관성을 가지며 진행되며, 기본적인 전제는 『모놀로기온』에서와 같이 진리는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한 것이며, 바로 이러한 신, 즉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최고 본성’은 곧 진리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하여 안셀무스는 어떠한 성서적 논의의 구체적 권위 없이 오직 이성(sola ratio)에 의하여 진리에 관한 자신의 이러한 입장을 논리적으로 구체화하려고 한다. 어디에도 그는 성서의 종교적 권위를 통하여 자신의 고민거리, 즉 신과 진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저하게 이성의 논변에 근거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그의 오직 이성, 즉 순수 철학의 이면에 그의 힘이 되어주는 그 철학은 누구의 철학인가? 슈미트는 안셀무스 논변의 토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발견하였으며,15) 반면 플라쉬는 플라톤적 노선에 선 아우구스티누스를 발견하였다. 플라쉬는 안셀무스 철학의 곳곳에서 플라톤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16)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진리는 주관과 객관의 일치 속에서 가능하다. 플라톤에 의하면 참된 것은 진정한 참, 즉 진리 그 자체에 한 몫을 함으로 가능하다. 신은 가장 합리적인 것을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을 행한다. 신은 절대 불합리한 것을 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행해지는 우주의 모든 것은 신에게 가장 합리적이며 적절한 것이다. 이는 다르게 될 수 없는 것이었다.17) 그렇기에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에게 객관이며, 이 객관들은 신의 주관에 일치된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별적 진리들, 즉 참된 것은 신의 지성 가운데 그 진리의 근거를 가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논리에서 가능하다.
진리는 안셀무스에 의하면 영원한 것이다.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것은 시작도 끝도 가지지 않는다. 만일 진리가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면, 진리는 시간 이전엔 진리가 아닌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안셀무스에게 이러한 것은 허락할 수 없는 논리이다. 그것은 안셀무스에게 신앙에 위배되기에 허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성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진리론』의 이러한 진리의 영원성에 관한 논리는 앞선 논의인 『모놀로기온』의 논의에 근거한다.
여기에서 안셀무스의 진리 이론에 매우 중요한 개념인 합당성(rectitudo)이 등장한다. 다음의 글을 읽어보자.
“만일 불이 그로부터 그것의 존재를 가지는 그로부터 가열성을 수용한다면, 그러면 그것이 가열될 때 그것은 해야 하는 것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불이 해야 하는 것을 행할 때 참되고 합당성을 가진 행함(facere veritatem et rectitudinem)이 부적적한 것이란 어떤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18)
‘합당성’이란 어떤 것이 그것의 마땅히 해야 하는 것에 부합될 때 서술될 수 있다. 불이 해야 할 것을 행할 때 불은 진리를 행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은 것은 행위의 진리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해야 하는 것을 행하는 자는 선하게 행위하며 합당성을 가지며 행위 한다는 명제는 일반적이다.”19)
인간의 행위가 합당하기 위해선 그것이 해야 하는 것과 일치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해야 하는 것은 물론 신에게 있는 것과 같은 그러한 것이다. 여기에서 신의 원형, 즉 그러해야하는 것과 일치되는 한에서 행위는 진리로 작용하게 된다.20) 이 합당성은 진리를 구분하고 판단하는 진리의 척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합당성이란 개념은 안셀무스의 진리에 관한 논의에서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루어진다.21)
안셀무스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진리는 신과 함께 영원하며 보편타당하고 절대적이다. 만일 이와 같지 않다면, 진리는 진정한 진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개별적 진리들도 그 근원으로 올라가면 신이 있다. 그것은 이미 신이 그의 목적에 의하여 가장 이성적이라 여겨진 모양으로 창조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영원 전부터 그리되어 있었다. 불은 지금과 불과 다르게 될 수 없다. 만일 다르게 된다면, 그것은 합리성을 가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지금 불이 뜨겁고 가열성을 가지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기에 신이 그 목적에 가장 적합하게 창조한 것이기에, 지금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은 그 합리성의 영역 외부에 있는 비합리적인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신은 결국 비합리적인 것을 행하지 않다.22) 그러니 신의 이성에 따라 불의 진리는 영원성과 필연성을 가진다. 이 영원성과 필연성의 근거는 신의 합리성이 놓여있다.
이와 같은 진리에 관한 안셀무스의 생각에 의하면 진리는 영원하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와 관련된 이성의 기능은 구분하고 판단하는 것이다.23) 정당한 것과 정당하지 못한 것을 구분하고 판단하며, 선한 것과 그렇지 않은 악한 것을 구분하거나 판단한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과 판단이 이성의 기능이라면 어떤 척도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척도 없이 불의 진리성을 판단하지도 구분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간이 진리를 구분하고 판단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 앞서 논의한 ‘합당성’이다. 앞에 안셀무스의 논의와 같이 불은 뜨겁고 가열성을 가지는 것으로 행할 때 진리이며, 이 진리와 합당성을 가진 것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린 이와 같은 『진리론』의 논의가 이후 등장하는 인간 행위의 문제와 깊은 연관을 가짐을 추측할 수 있다. 다음의 글을 읽어보자.
“불은 필연성에러 합당성과 진리를 행하는 반면에 인간은 필연성에서 합당성과 진리를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24)
인간의 행위는 불의 행위와 다르다. 불의 행위는 그냥 있는 그대로 합당성 가운데 존재하고 있다. 다르게 되지 못한다. 물론 이러한 논의는 『진리론』 8장에 다시금 ‘해야만 한다’와 ‘할 수 있다’ 등의 의미론적 논의를 전개하는 것으로 세밀하게 다루어지지만, 그 논의의 시작은 이미 책의 첫 부분에서부터 등장한다. 그리고 이 같은 논의는 사실 중세의 깊은 신학적이며 철학적인 주제였다. 인간 행위의 진리치를 예정된 것인가 아닌 것인가? 에리우게나의 논의에서 멀리 고대엔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보에티우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오캄에 이르는 많은 고대와 중세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두고 고민하였다.
신이 가진 명제적 진리가 참, 즉 진리라면 신이 가진 모든 명제, 즉 그 명제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르는 모든 명제가 참이라면, 그 명제에 준한 대상이 참으로 그리 되어야 한다. 그것 인간의 자유 의지 혹은 자유 결단의 문제를 고민한 중세인들에겐 심각한 고민거리였다. 이러한 고민은 사실 신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신이 현재 행하고 있는 가장 합리적이며, 다르게 될 수 없는 것이라면 신 자신도 다르게 할 수 없는 존재, 즉 필연성을 가지는 존재가 된다. 즉 의지의 자유를 가지지 못한 것이 되고 만다. 이러한 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떤 방식의 시도들도 1277년 파리대학과 옥스퍼드대학에서 금지되고 만다. 그것은 신앙적 논리와 모순하기 때문이다. 안셀무스 역시 이러한 논의를 고민한다. 그 역시 논의의 시작은 신이 가진 명제적 진리이다. 신이 가진 명제적 진리는 참된 진리이며, 모든 개별적 진리는 바로 이 진리와 관련되는 한에서 진리일 뿐이다. 불의 그 본질이 신에 의하여 주어지며, 그 진리는 신 가운데 존재한다. 그것은 신의 진리 가운데 있는 것과 달리 되지 못하는 가운데서 존재할 뿐이다. 즉 불은 항상 합당성을 가지며 그 외부로 나갈 수 없다. 그런데 안셀무스는 인간은 이와 다르다고 한다. 그리고 그 행위가 합당성을 가지는 경우 선한 행위이며, 그것이 합당성을 상실한 경우 악한 행위라고 한다. 인간 가운데 존재하는 합당성을 가진 의지는 선한 의지가 된다. 그런데 인간은 바로 이러한 선과 악의 사이에서 자유를 가진 존재이다.
『진리론』에서 정의된 합당성의 개념은 이후 『신은 왜 인간이 되었는가』와 같은 저서에 등장하는 신학적 고민으로도 이어진다. 각 사물에 주어진 합당성, 즉 신적 조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정하며, 신은 바로 이렇게 재정된 합당성만을 원하기에 최종적으로 결코 실패가 없다는 논의로 이어진다. 즉 합당성의 논의는 안셀무스 철학의 곳곳에 등장하는 다양한 논의들에 있어서 기본적인 개념으로 신과 인간 그리고 진리의 문제를 매개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안셀무스에 합당성의 논의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고 이것이 정의되는 『진리론』는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저서이다.
나가는 글
『진리론』은 안셀무스의 논의 가운데 독특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이 저서는 안셀무스의 철학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개념인 ‘합당성’을 논리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 개념은 안셀무스의 철학적 논의, 즉 그 이후 진행되는 인간의 자유에 관한 논의와 선과 악에 관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논의가 모두 바로 이 정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안셀무스는 합당성 속에서 신이 우리에게 준 필연적 근거를 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안셀무스와 같은 논의는 이후 13세기에 들어 많은 도전을 받게 된다. 신의 전지함 속에서 신이 아는 모든 것, 즉 모든 진리는 그 자체로 필연적 법칙성을 가질 수 있다는 논리는 자칫 중세 무슬림 철학의 유입 이후 문제시된 행위의 필연성 논의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요셉 피퍼와 같은 중세철학사가는 안셀무스의 이와 같은 논리들이 13세기 금지령의 당사자가 된 필연주의와 관련하여 논의하기도 한다.
이러한 안셀무스를 두고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결국 『진리론』에 등장하는 진리의 문제와 합당성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안셀무스 자신이 어떻게 그것을 구사하였는가의 문제로 환원되는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안셀무스의 『진리론』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그 저서가 우리들에게 그의 다른 대표적 저작인 『모놀로기온』이나 『프로슬로기온』에 대하여 중시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말이다. 그것은 더욱 더 거시적 차원에서 안셀무스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무척이나 중요한 개념 합당성이 바로 『진리론』에서 그 틀을 마련하고 본격화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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