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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읽는 중세 철학/한글 토마스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자와 본질에 대하여 서론에서 2장까지

 이 글은 제가 학부 시절에 라틴어 공부를 하면서 정리한 것이고, 이후 라틴어 스터디를 이끌면서 강독한 것을 다시 정리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이미 몇 년이 지났는데, 완성된 번역이 아닙니다. 이후의 것은 토마스철학학교의 고전 읽기를 통하여 남은 부분을 완성할 생각입니다. 후훗...

이 글은 토마스철학학교 유대칠 학장에게 모든 권리가 있으며, 학문적 목적을 위하여 자유로운 이용할 수 있으나, 출처를 분명히 해야합니다. 후훗...

 

존재자와 본질에 대하여

<서론에서 2장까지>

(존재자의 통성 원리 혹은 존재와 본질에 대하여1))


유대칠 번역



서론 


 1. 철학자2)가 『천체론』 1권에서 이야기하듯이 “시작의 작은 실수는 결국 큰 실수”가 되어진다.3) 그리고 또한 존재자(ens)는 아비첸나4)가 『형이상학』에서 이야기하듯이 지성 가운데 가장 먼저 포착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선, 이들의 무지로 인하여 잘못을 범하기 않기 위해, 이들의 어려움을 드러내야하고, 그를 위해 본질(essentia)과 존재자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다루어야하며, 다양함 가운데 어떠한 방식으로 발견되는가의 문제와 그것이 유(類)들과 종(種)들 그리고 종차(種差)들과 같은 논리적 의미5)들로부터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를 가지는가의 문제를 논해야한다.


 2. 참으로 쉬운 것에서 시작함이 학문에 더 올바른 것이 되어지기에 복합된 것의 인식으로부터 단순한 것을 받아드리고, 후(後)의 것에서 전(前)의 것에 도달해야하며, 이와 같이 존재자6)의 의미에서 본질의 의미에로 진행되어야한다.7)


1장


 1. 철학자가 『형이상학』5권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존재자는 그 자체로 두 가지8)로 이야기됨을 알아야한다. 첫 방식은 10가지 류(범주, 範疇)9)를 통하여 나누어지는 것이고, 또 다른 방식은 명제들의 진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차이는 이러하다. 둘째 방식은 긍정적 명제가 형성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실제로 아무 것도 놓여있지 않은 것이라도 존재자라고 말한 수 있다. 결핌과 부정의 존재자들은 이러한 방식을 통하여 이야기되어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긍정은 결핍의 반대이고, 눈멈은 눈 가운데 있다고 한다. 그러나 첫 방식으로는 실재로 놓여진 어떤 것이 어떤 것이 없다면, 존재자인 것이라고 말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첫 방식에서는 눈멈이나 그와 같은 것이 존재자들이 아니다. 그리하여 본질의 이름은 둘째 방식에서 이야기된 존재자에서는 인정되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이 방식에서 존재라들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결핍 가운데 드러나는 것처럼 본질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첫 방식에서 이야기된 존재자에선 본질이 인정된다. 그러므로 주해자는 같은 곳에서, “존재자는 첫 방식으로는 사물의 실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10)고 한다.


 2. 그리고 이미 이야기한 것과 같이 존재자는 이 방식으로 이야기되어진 것으로 10가지 범주를 통하여 나누어지므로 본질은 모든 본성에 공통되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구별되는 존재자들이 구별되는 류들과 구별되는 종들 가운데 놓여지는 것이다. 마치 인간성이 인간의 본질이며, 다른 것에 대해서도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고유한 류 혹은 종 가운데 구성되어지는 사물로 인한 것은 우리가 사물이 무엇인지(quid)를 지시하는 정의를 통하여 의미되어지는 것이다. 그로 인해 본질의 이름은 철학자에 의하여 통성원리(quidditas)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것은 철학자가 『형이상학』7권에서 자주 언급하는 것으로서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그것”(quod quid erat esse)인 것이다. 동일하게 이것은 어떤 것이 그것에 의하여 어떤 존재를 가지는 것이다. 또한 아비첸나가 그의 『형이상학』 2권에서 이야기하듯이 형상이라고 불리는 것은 각각의 사물의 완전성 혹은 확실성이 형상을 통하여 의미되어지는 것에 따른 것이다. 또한 이는 다른 이름으로 본성(natura)이라 불리며, 이는 보에씨우스는 『두 가지 본성에 대하여』에서 나타내는 4 가지 방식들 가운데 첫 방식에 따른 본성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즉 이에 따르면 본성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지성에 파악될 수 있는 것은 존재라 불리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정의와 본질을 통하여서만이 지성적인 사물이기 때문이다.11) 그리고 또한 철학자가 『형이상학』5권에서 모든 것의 실체는 본성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수용된 본성의 이름은 사물의 고유한 작용으로부터 질서 혹은 배열을 가지는 것에 따른 사물의 본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지며, 진실로 고유한 사물이 고유한 작용을 떠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참으로 통성원리라는 이름은 정의함을 통한 것으로 인하여 의미되어지는 것임이 수용된다. 그러나 본질은 그것을 통한 것으로 인하여 그리고 그 가운데 사물이 존재를 가지는 것이라고 불린다.


2장 


n.1 그런데, 존재자는 절대적으로 그리고 앞서서 실체에 대해서 이야기되어지는 것이고, 뒤서서 그리고 그에 따라서12) 우유적인 것에 대하여 이야기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질은 실체 가운데 고유하고 참된 것이며, 우유적인 것 가운데는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어떤 것에 따라서 있는 것이다.


n.2 참으로 실체들 가운데 어떤 것은 단순하고 합성된 것의 어떤 것이고, 본질은 그 양자 가운데 있다. 그런데 더 고상한 존재를 가진다는 것에 따르면 단순한 것13) 가운데 더 참되고 더 고상한 방식으로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신(神) 즉 단순실체이며, 제일실체는 합성된 것들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n.3 그러나 이들 실체들의 본질은 우리에게 더 가리워진 것이기에, 합성된 것의 본질에서부터 시작해야할 것인데, 이는 더 쉬운 것에서부터 학문이 더 적당하게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인간 가운데 영혼과 육체가 있듯이 복합실체 가운데 형상과 질료가 알려진다. 또한 전체의 것 가운데 어느 하나만이 본질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단지 질료만이 본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질을 통하여 사물은 가지(可知)적인 것으로 되며, 그 종과 류 가운데 질서 지워 진다. 또한 질료는 인식의 원리가 아니며, 그 자체를 통하여 종이나 류로 규정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에 의하여 어떤 것은 현실적인 것 가운데 있다. 물론 어떤 이들이 이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형상만이 복합실체의 본질이라고 이야기될 수도 없다. 이미 논의된 것에 의하여 본질은 사물의 정의를 통하여 의미되어지는 것이라고 말되기 때문이다. 또한 자연적 실체들의 정의는 형상뿐 아니라, 질료를 포함한다. 왜냐하면 자연의 실체와 수학의 실체와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또한 질료를 자연적 실체의 정의 가운데 마치 이들 본질에 더하여진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또한 마치 이들 본성과 본질의 외부에 존재자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 방식은 완전하게 본질을 가지지 않는 우유적인 것의 고유한 것이다. 이리하여 (우유적인 것은) 자기의 정의 가운데 이들 류의 외부에 있는 실체 혹은 주체에 받아드려야 한다. 고로 질료와 형상을 본질이 포함하는 것이라고 이야기된다.


n.4 또한 본질은 질료와 형상 사이에 있는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거나 혹은 이들에 첨가된 어떤 것이라고 이야기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14) 필연적으로 우유이거나 사물로부터 외부에 있는 것이기에, 결코 이를 통하여 사물이 인식될 수는 없다. 이 모든 것은 본질에게 알맞은 것이다. 즉 질료의 현실태인 형상으로 인하여 질료는 현실적으로 존재자가 되어지며, 이 어떤 것이 된다. 그리하여 첨가된 것은 존재를 현실적으로 단순하게 질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우유가 행하는 것처럼 그렇게 존재를 현실적으로 그러한 모양으로 준다. 마치 하양이 현실적으로 하얀 것이 되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것이 이러한 형상이 획득되어지는 것이며, 단순히 생성된다고 하지 않고, 그에 따라서 그러하다고 한다.


n.5 그러므로 복합실체 가운데 본질의 이름인 것은 질료와 형상에서 복합된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남게 된다. 그리고 『범주론주해』 1권 가운데 우시아15)는 복합된 것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하는 곳에 보에씨우스의 말은 이러한 입장에 부합된다. 사실 그리스인들에게 우시아는 (보에씨우스) 그 자신의 『인격과 두 본성에 대하여』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본질과 이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아비첸나는 본합실체들의 통성원리은 형상과 질료의 합성 그 자체라고 말한다. 주해자16) 역시 『형이상학』 7권에서 풀이하면서 “생성하는 사람들 가운데 종을 가지는 본성은 중간자라고 하며, 즉 질료와 형상에서 복합 된 것이라 한다. 더욱이 복합실체의 존재는 그러한 형상만도 그러한 질료만도 아니라, 그렇게 복합된 것들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이러한 근거에 적당한 것이다. 또한 본질은 그것에 따라서 사물이 존재라고 불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사물이 존재자라고 불리어지는 본질 같은 것은 그렇게 형상만도 아니고, 그렇게 질료만도 아니며, 둘 모두이다. 아무리 형상만이 홀로 자기 방식으로 이러한 방식의 존재 혹은 본질의 원인이라 해도 말이다. 사실 만약 우리가 다양한 원리들로 구성되어진 다른 방식 가운데서도 사물들은 그렇게 이러한 원리들 가운데 하나에 의하여 불리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의하면 양자를 포함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는 맛에 의하여 명확해 진다.  왜냐하면 습한 것을 열로 소화하는 자의 행위에서 단맛이 야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 방식으로 볼 때 열이 단맛의 원인이지만, 그럼에도 육체라고 불리는 것은 열로 인하여 단맛이 되는 것이고, 더운 것과 습한 것을 포함하는 것에 의하여 단맛이 되는 것이다.


n.6 그러나 개체화의 원리는 질료이기에 그 자체 가운데 형상과 함께 질료도 포함하는 본질은 이러한 능력에 의하여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만일 본질이 정의를 통하여 표시되어지는 그러한 것이라면, 이로 인하여 보편은 정의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귀결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알려져야만 한다. 즉 질료는 어떠한 양식으로든지 개별화의 원리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한정된 질료17)일 때 만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본인이 한정된 질료를 이야기하는 것은 일정한 차원 하에서 고려되어진 것이다. 또한 인간의 정의 가운데 인간의 경우 이 질료가 놓여지는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정의 가운데 놓여지는 것이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정의를 가진다면 말이다. 또한 인간의 정의 가운데 한정된 질료가 놓여지는 것이 아니다. 즉 인간의 정의 가운데는 이 입과 이 몸이 아니라, 인간의 질료는 한정되지 않은 입과 몸이 절대적으로 놓여진다.


1) 프톨로메우스 루켄시스(Ptolomacus Lucensis)는 이를 “통성원리와 존재에 대하여”(De quidditate et esse)라고 하며, 베르나르두스 귀도니스(bernardus Guidonis)는 이 작품의 제목을 “존재자의 통성원리 혹은 존재자와 본질에 대하여”(De quidditate entium seu de ente et essentia)라고 하였다.


2) 중세에서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도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리키는 것이다.


3) Aristoteles, De Caelo et Mundo, I, 5, 271b 8-13 ; 참조 Thomas, In I De Caelo et Mundo, Lect. 9, § 4


4) Avicenna, Metaph., I, c.6, 이슬람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의사로서 서양 중세철학에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주저로는 『의학전범』이 있다. 토마스의 존재와 본질의 분리도 그의 영향이 두드러진 것이며, 그 외 에도 알베르투스, 로저 베이컨, 기욤 도베르늄, 둔스 스코투스...등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5) 여기에서 “의미”라고 역자가 옮긴 것은 라틴어 원어로 intentio이다. 이는 아랍철학의 말마디로 “개념”을 번역한 것으로 이를 감안하여 역자가 이를 “의미”라고 했다. “개념”이라고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본시 토마스는 이를 그의 인식론에서 심적 단어 혹은 개념으로 사용하며, 이는 지성이 그의 대상을 향하는 것이다. 지성이 무엇을 향할 때 개념과 의미가 형성되기에 이 둘을 다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참고 ; Qu. Disp. De Potentia, 7


6) 존재자는 존재를 가지는 어떤 것(id quod habet esse)으로서 본질과 존재의 행위 양자를 가지는 것이다. 즉 본질을 가지며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란 말이다.


7)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본적으로 제시한 가르침의 방법을 따른다. 이에 따르면 더 쉬운 것에서 더 어려운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Phy., I, c.1, 184a22-24) 존재자는 존재와 본질로 이루어진 것이다. 본질은 존재자의 구성요소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존재자의 진술 이후에 그 개념을 다룰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가르침의 방법에 알맞은 것이다.


8) 여기에서 “그 자체로”는 Per se를 가르키는 것이다. 이는 Per accidens(우유적으로)와 구별된다. 예를 들어 하양과 인간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얀 사람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유적으로 있는 것이다. 하얀 사람은 피부병으로 이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Per se는 실체로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Sokrates is blind라고 할 때, 실명은 없는 것인데, 이것에 esse를 표시한다. 그러나 이때는 사실명제일뿐 존재를 나타내는 서술어는 아니다. 단지 계사일 뿐이다.

   Cajetan은 이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1> 첫 방식에서 존재자는 십 범주 가운데 실존하는 것에 대한 서술어이지만, 둘째 방식에서는 명제(계사)를 나타내는 것일 때문이다. 2> 첫 방식에서는 본질과 존재의 행위를 포함하지만, 둘째에서는 본질을 가지지 않는다. 3> 이에 따르면 본질이라는 이름은 오직 첫 방식에서만 취해지는 것이다. 참고 ; Cajetan, op. cit., c.1, n.9, pp.21, 22 ; Thomas , In V Meta., Lect. 9, ed. Cathala, no. 885-896 


9) 여기에서 토마스가 열 가지 류들이라고 하는 것은 실상 아리스토텔레스의 십 범주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론』 1권 9장 103b 20-25에 등장하는 것으로서 “실체, 양, 질, 관계, 장소, 시간, 상태, 소유, 능동, 수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범주는 칸트의 범주와 달리 선험적인 것이 아니다. 이는 그가 지성의 백지설(Tabula Rasa)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의 논리적 범주는 곧 실제적인 것에 주어진 존재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여기에서 십 범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가리킨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실제적인지 않은 것은 존재의 방식인 십 범주로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0) Averroes in 5 Metaphysica, text. 14.


11) 보에씨우스, Liber de person et duabus naturis cap.i 1341b (PL.64)“사물의 것인 본성은 어떤 형태로든 지성에 파악되어질 수 있는 것과 함께 한다. 이 가운데 정의의 우유 그리고 실체들이 정의된다. 그러므로 이는 지성에 잡히는 모든 것이다.”


12) secundum quid 는 단지 문법적으로는 “그에 따라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상대적으로” 혹은 “어떤 의미에서” 그리고 “어떤 관점에서” 등으로 옮겨질 수 있다.


13) 원문에는 in simplicibus라고 한다. 이는 직역하자면 단순한 것 가운데인데, 여기에선 전체적인 내용 상 “단순실체”라고 하야할 것이다.


14) 형상과 질료를 나타낸다.


15) 그리스말 ουσια를 우리말로 음가대로 옮긴 것이다.


16) 주해자, 라틴말로 commentator는 이슬람의 철학자 아베로에스를 부르는 스콜라적인 전통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소,중,대 주해로 나누어 일일이 주해한 것으로 중세에 큰 영향을 끼치며, 주해자로 불린다.


17) 토마스에게 이 한정된 질료는 특정한 연장과 크기를 가진 질료로서 분할이 가능한 그러한 질료이다. 이러한 개별화에 대한 토마스의 견해는 그의 체계 가운데 가장 취약한 부분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