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글로 읽는 중세 철학/한글 토마스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이교도대전" 3권 65장 신은 존재 가운데 사물을 보존한다.

대이교도대전 3-1 CP. 65
신은 존재 가운데 사물을 보존한다.

n.1 한편 신이 그의 섭리로 사물을 지배한다는 것으로부터 그가 존재 가운데 사물을 보존한다는 것이 귀결된다.

n.2 왜냐하면 그러한 모든 것은 어떤 것들의 지배와 관계하며, 이를 통하여 자기 목적을 달성한다. 왜냐하면 이에 의하여 목적 가운데 질서 지워지는 것은 통치되고 지배되는 것 어떤 것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신이 의도하는 궁극 목적 가운데, 즉 신적 선성 가운데, 작용되어지는 것을 통한 것뿐 아니라, 존재하는 것을 통하여 사물은 질서 되어진다. 그 이유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사물의 목적은 신적 선성의 유사성을 지닌다. 그럼으로 존재 가운데 보존되는 사물은 신적 섭리와 관계한다.

n.3 게다가, 사물의 원인과 그 자신의 보존의 원인은 같은 것이어야 한다. 이유는 사물의 보존은 자기 존재의 지속이 없으면 안 된다. 그런데 모든 사물의 존재 원인이 신이 자기 지성과 의지를 통한 것이 위에서 명백했다. 그럼으로 자기 지성과 의지를 통하여 존재 가운데 모든 사물을 보존한다.

n.4 게다가, 어떤 개별적 동의어적 작용자는 간단하게 종의 원인일 수 없다. 예컨대 이 인간은 인간 종의 원인 일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원인이어야 하고, 그리고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의 〔원인이기도 해야하는데〕 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이 인간은 당연하게 말되어지는 것에 의하여 이 인간의 원인이다. 그런데 개별화의 원리인 이 질료 가운데 있는 인간 본성에 의하여 이 인간이다. 그럼으로 이 인간은 이 질료 가운데 행하는 인간의 형상인 원인이라는 것이 아니면 인간의 원인이 아니다. 그런데 이는 이 인간의 생성의 원리인 것이다. 고로 본성 가운데 이 인간도 어떤 동의어적 작용자도 아니라는 것은 이 사물 혹은 이것의 생성을 제외하는 어떤 것의 원인이라는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인간 종 그 자체의 자기 작용인을 통한 어떤 것이어야만 한다. 그 합성체가 증명하는 것은, 그리고 모든 것 가운데 같은 방식으로 있는 부분들의 질서는 우유적으로 방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이유가 본성적 사물의 다른 모든 종들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원인은 직접적이든 직접적이지 않든 신이다. 왜냐하면 위에서 보인바 모든 사물의 제일 원인이 그이기 때문이다. 고로 그 자신은 이 방식으로 생성에 이 본성 가운데 이 생성의 작용자와 같이 사물의 종과 관계해야만 하는 것이며, 그에 의하여 그는 직접적 원인이다. 그런데 신적 작용이 그지게 되면, 생성도 그치게 된다. 그리고 고로 사물의 모든 종들이 그치면 신적 작용도 그친다. 그러므로 그 자신은 자기의 작용에 의하여 존재 가운데 사물을 보존한다.

n.5 더욱이 운동이 어떤 실존을 일으킨다면, 그러면 운동은 사물의 존재부터 벗어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육체적인 것이 움직여지지 않는 한에서 어떤 것의 원인이며, 그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하듯이 어떤 육체도 운동에 의하지 않는 한에서 움직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떤 육체도 존재인 한에서 사물의 원인이나, 그러나 사물의 생성이 향해지는 것인 존재에로 움직여지는 것이 원인이다. 그런데 어떤 사물의 존재는 한 몫된 존재이다. 왜냐하면 이닌 이미 논의한 바와 같이 신을 제외하고는 자기 존재인 사물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존재인 신 그 자신은 우선적으로 그리고 그 자체에 의하여 모든 존재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신적 작용은 움직여지거나 만들어지는 사물의 수동적 움직임과 생성인 육체적 운동자의 운동으로서 사물의 존재와 관계한다. 그런데 운동자의 운동이 그친다면, 사물의 생성과 수동적 움직임도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고로 신적 작용을 제외하고 사물의 존재가 지속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n.6 더욱이 만일 기술의 작품이 자연의 작품을 전제한다면, 그러면 자연의 작품은 신의 창조의 작품을 전제한다. 이유는 예술작품의 재료는 자연으로부터 나오며, 참으로 자연물은 신에 의한 창조물로 인하여 있다. 그런데 예술작품은 자연의 능력으로 존재 가운데 보존되어진다. 예컨대 집은 돌의 단단함으로 있다. 그럼으로 자연물들은 신의 능력이 없다면 존재 가운데 보존되지 못한다.

n.7 게다가 결과물의 본성 가운데 변화되지 않는 한에서 작용자의 행위가 그치면, 작용자의 새김이 결과물 가운데 남아있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성물의 형성들 그리고 그 자체의 고유성, 목적에까지 생성 이후 그들 가운데 남아있는데, 그 이유는 이 자연물은 결과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사하게 습성은 어렵게 운동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 가운데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태와 수동 혹은 육체 혹은 동물은 작용자의 행위 이 후에 어떤 것을 남긴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에 이르는 길 가운데와 같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월적 류의 본성과 관계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도 작용자의 행위 이후에 남기지 않는다. 예컨대 빛은 투명체 가운데 남지 않는다고, 조명은 떠나가진다. 그런데 존재는 창조된 사물의 어떤 본성 혹은 본질이 아니지만, 그러나 1권에서 이야기했듯이 신의 독자적인 것이다. 그럼으로 신의 작용이 그친다면, 어떤 사물도 존재 가운데 남을 수 없다.

n.8 더욱이 사물의 기원에 대한 두 자기 입장이 있다. 신앙에 의한 하나는 사물은 새롭게 존재 가운데 신에 의하여 생산된 것들이다. 그리고 철학자들의 입장은 영원으로부터 신에 의하여 사물이 유출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입장은 사물이 신에 의하여 존재 가운데 보존되어진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유는 만일 행하지 않았던 이후에 신에 이하여 생산된 것들인 사물이 존재 가운데 있다면, 사물의 존재는 신의 의지로부터 귀결되어지는 것이며, 그리고 유사하게 비 존재도 그러하다. 그 이유는 그가 그렇게 의지할 때, 그는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허락했고, 의지함과 함께 사물의 존재도 생겼다. 그럼으로 그가 그렇게 의지할 때, 그는 존재하는 사물을 만든다. 그럼으로 그의 의지가 사물의 보존이다. 그런데 만일 사물이 신의 의하여 영원으로부터 유출된 것이라면, 시간을 줄 수 없고, 혹은 우선적으로 신으로부터 유출되어진 것 가운데 현재를 줄 수 없다. 그런데 혹은 신으로부터 생산된 것들이 아니고, 신으로부터 앞서서 흘려나온 존재이다. 그름으로 그는 그의 작용에 의하여 존재 가운데 사물을 보존한다.

n.9 이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라고 말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 주해서 4에서 "창조자의 힘 그리고 전능 그리고 또 모든 것을 지탱하는 능력은 모든 창조물의 실존의 원인이다. 창조된 것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능력이 만일 그친다면, 일제히 그들의 종도 그칠 것이고, 모든 자연도 몰락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집을 짓는 사람이 사라진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가 일하지 않는 동안 그리고 부제한 동안 그의 작품은 서있다. 왜냐하면 신은 그로부터 그의 법칙을 거둔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세상은 서일 수 없게 된다"라고 한다.

n.10 그런데 이에 의하면 마우리의 법 가운데 말되는 입장은 신의 보존이 필연적 세상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과 관계하여 거절되며, 그들은 모든 형상을 우유적이라고 하고, 어떤 우유도 두 가지 예로 지속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 관점에 의하면 사물은 지속적 과정 가운데 있는데, 마니 사물의 생성의 과정 가운데 작용인은 제외되어 필요 없는 것처럼 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일부는 (그것으로부터 그들은 모든 실체는 합성체라고 하며, 그들에 따르면 오직이는 안정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분리된 신체가 만약 신이 이것으로부터 그의 지배를 거둔다면 한 시간 정도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하여 이야기한다. 그럼으로 그들의 일부는 사물이 신이 중지의 우유 가운데 그칠 지라도 존재가 그칠 수 없다고 한다. 즉. 이 모든 것은 분명하게 거부되어야한다.

 

<대학4학년때 번역이네요. 옛생각이 납니다. 후훗...세월이란...그래도 이 글은 토마스철학학교 유대칠에게 모든 권한이 있으며, 자유로운 사용은 허락하나 출처를 분명히 명시해야합니다. 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