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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보기/이야기 중세철학

르네상스의 시작

이야기 중세철학

 

르네상스의 시작...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르네상스는 원전으로 돌아가라는 모토에서 시작된다. 고대인의 지식으로 들어가 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지식의 합리성과 놀라움을 감상하기 위함이며, 또한 이는 자신의 전 시대인 중세 시대에 대한 반론이기도 하다.
중세인들에겐 원전이 그리 중시 여겨지지 않았다. 그것은 성경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성경이 본격적으학의 영역 속에서 다루어진 것은 카를 대제 시대 그의 궁정 신학자인 알퀸(Alquin)에 의해서 이다. 그는 각종 차이를 가지는 성경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시 유럽에 있던 정화된 성경을 모았다. 그리고 이는 모든 제국에 보내어, 다시 사본을 만들어 성경을 통일화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정도의 것을 문헌학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인들이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보여준다. 이러한 질서 잡는 작업 이후 12세기 초 테오둘프(Theodulf)는 본격적인 문헌학적 입장에서 성경에 대한 작업을 시행한다. 즉 그는 비판적인 정신으로 성경을 분석한 것이다. 그는 개종한 유대인의 도움으로 히에로니무스의 번역판을 읽으며, 히브리 텍스트까지 동원하며 자신의 성경을 원문에 가깝게 하려고 하였다. 또한 12세기 중반 슈테판 하르딩(Stethan Harding)은 테오둘프와 같은 방식으로 성경을 분석했으며, 언어적 지식을 가진 유대인의 자문을 구하며, 비교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성경 필사본에서 많은 시구를 제거해 버렸다. 이러한 성경에 관한 문헌학적 접근은 13세기 파리를 중심으로 절정에 달한다. 이들 13세기 성서문헌학자의 문헌적 작업은 오늘날에도 이들의 불가타(Vulgata) 성서를 달리 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에 관한 12세기 13세기 중세인들의 열정이 중세이늘의 원전에 관한 문헌학적 열정을 전하지는 못한다. 이들은 그리스어와 아랍어에서 많은 문헌을 라틴어로 옮겼지만, 이들의 문헌학적 정당성은 의심스러운 것이다. 비판적으로 문헌을 읽고, 문헌학적으로 원문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중세인들에게는 희박했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로 인하여 많은 문헌이 훼손되었다. 베네딕토회의 수사 라드베르투스(Radbertus)는 고대의 베르길리우스의 유명한 시구를 인용하지만, 이는 엉터리이다. 베르길리우스는 '악명 높은 노동'(labor imporobus)라고 한 것을 그는 '경전한 노동'(pius labor)라고 인용한 것이다. 이러한 문헌학적 발전의 결핍으로 인한 중세인들의 오류는 허다하다. 랭스의 힝크마르는 "육체의 결속"이라 결혼을 정의하면서, 5세기 교홍 레오의 문서를 인용한다. 그런데 그라 슬쩍 원문에 없는 non(아닌)을 삽입하였으며, 이를 그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것이라고 인용한다. 이로 문장의 뜻은 본래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야기한 것과 반대가 되어 버린다.
중세인들에게 문헌학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없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큰 힘을 가지지는 못했다. 그 예로 중세에 만연한 위조문서를 들 수 있다. 그 가운데 중세 절정기 주요 교회법인 "그라티아누스 법전"의 5분의 1정도는 위조문서를 포함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문헌학적으로 잘못된 문헌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으며., 실재로 13세기 중세의 학자인 보베의 빈센트는 "위조문서의 옹호론"이란 저서를 적기도 하였다. 설사 위조된 것이라고 해도 영혼에 유익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15세기 니콜라우스 쿠사누스는 상당수 당시 중요한 교회의 문헌이 위조임을 알아냈지만, 그는 이러한 위조문서들이 교회의 성스러움과 위대함은 여전하다며, 위조문서에 의하여 지배되는 세상에 관하여, 위조문서는 현실을 변화할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진다. 이렇게 중세 시대에는 위조문서가 공공연히 인정되었다.
그것이 교회와 신 그리고 성경의 논리에 적절하다면, 위조인지 아닌지를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중세의 흐름에 반론을 제기하고, 원전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등장한다. 성경도 철저한 원문 비평을 받아야했고, 고전의 원문에 직접적으로 접근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한다. 바로 르네상스의 시작인 것이다. 중세인들은 성경이란 원전을 보기 위하여 많은 교부와 철학자의 논리를 인용하지만, 르네상스와 그 이후 신학자들은 원전으로의 직행을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루터이다. 원전에 관한 비평적 논의가 약하던 시대에서 문헌학적 논의의 반기가 어떤 면에서 르네상스인 것이다. 성경에 관한 강력한 문헌학적 호기심은 문헌학의 위상을 높이고, 이들의 호기심은 성경을 넘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것에 이른다. 그러면서 고대 그리스시대을 중시하는 르네상스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 당시 학자인 로렌조 발라는 "신약성경 논평"을 적었고, 에라스무스는 문헌학을 순수한 원전을 만드는 것으로 보고, 이것이 야만적인 이들에 의하여 훼손되지 않기를 바랬다. 또한 15세기와 16세기의 많은 학자들이 성서의 원전비판을 시도하였고, 원전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이는 19세기에 까지 이르러 역사적-비판적 방법론을 낳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르네상스는 원전을 비판적으로 보존하려는 문헌학적 태동에서 그 시작을 찾을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