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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보기/이야기 중세철학

중세 철학에 대한 작은 단상들 1


<이 글의 모든 권한은 토마스 철학 학교 유대칠에게 있습니다. 무단 인용을 금합니다.> 


중세 철학에 대한 작은 단상들

 

유대칠

(Thomas Philosophia Schola)

 

서론

 

중세 철학, 그 가운데 논리학이나 의미론을 전공한다고 말했더니, 한 목사가 중세 철학 시기에 그런 것이 있냐고 했다. 그 목사는 그리 많이 신학이나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고, 그저 신학교를 다니던 시기에 전공자도 아닌 이에게 들은 중세 신학사 혹은 중세 철학사나 이와 관련해 읽은 책 몇 권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중세'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에 광적으로 의존된 신앙에 의하여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모두 화형을 해 버린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의 잔혹한 독재 사회 정도라고 해야하나. 그러나 중세는 그러한 공간도 시간도 아니다. 중세는 생각이 다르다고 죽이거나 화형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일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다. 또한 중세 신학자나 철학자들은 통일된 하나의 입장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나의 입장만을 가진다면, 논쟁이 있을 수 없다. 논쟁이란 생각이 서로 다른 사람들 끼리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중세 철학은 논쟁으로 가득하다. 중세 철학사 혹은 신학사는 그 자체로 논쟁의 역사다.

 

그런데 앞서 말한 그 목사는 그런 논쟁은 필요가 없다고 했다. 대부분 탁상공론이며 현실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물든 잘못된 신앙이라고 한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참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중세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의 글을 진정 깊이 읽는다면, 어느 누구도 성서의 권위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더 앞에 더는 이는 없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뿐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생각도 저마다 달랐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라는 범주 속에 많은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이 포함될 수 있지만, 그 범주 속의 철학자들은 서로 너무나 다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근거한다면, 둔스 스코투스나 오캄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풀이하며 자기 철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들의 철학이나 신학은 많은 부분 다르다. 이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저 자신의 신앙을 인간의 귀에 보다 더 합리적으로 알아듣기 좋은 소리가 번역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학자들은 대부분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한 인물이었다. 이들과 대화하기 위해 성서의 이야기를 알아 들을 수 있다는 언어, 즉 인간의 귀와 정신이 적절한 합리적 체계 속에서 이야기 하기 위한 수단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활용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를 두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종속되어 성서를 이해했다고 하는 것은 사실 확인을 하지 않은 이야기다.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성체 성사와 삼위일체의 용어들에 등장하는 많은 용어들이 그리스 철학의 용어임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순수한 신앙만을 위해 이것을 모두 제거해야 하는가? 그러면 신학이란 학문이 과연 성립될 수 있는가? 루터의 글에 등장하는 그 많은 개념들은 실상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철학의 전통에서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이는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신학자들은 이 시대 철학자들의 담론을 활용한다. 그것은 이 시대의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 이 시대의 철학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합리성을 완전히 배제한 신학이라며, 그것은 인간의 합리적 사고를 배제한 맹목적 종교가 되고 말지 모른다. 인간의 신의 모상(imago dei)이다. 인간의 지성은 쓸데 없는 것이 아니라, 신이 자신의 모상으로 인간에게 선물한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종교는 대화해야 한다. 불교든 이슬람교든 아니면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그것이 어떤 종교이든 대화해야 한다. 대화하지 않고, 자신만이 바르고 다른 이는 모두가 악이라고 한다면, 그 종교 자체가 전쟁과 분란을 일으킬 수 있다. 왜 믿어야 하는지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 알아들으려는 노력 자체가 종교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신이 얼마나 존귀하게 창조하였는지를 확인하는 여정일 수 있으며 신을 만나는 여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엇이고, 인간은 무엇을 해야하는가, 인간은 어떤 것을 알 수 있는지 알아가는 것은 창조물의 본질을 알아가는 여정이며 그 여정의 결실은 인간을 온전히 바라보게 할 것이며, 그렇게 인간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을 때 인간은 신을 온전히 볼 수 있으며, 신이 보기 좋았다고 하는 바로 옆의 누군가에 대해서도 열린 맘으로 다가서서 그와 하나되어 그 아픔과 슬픔을 알아줄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은 그런 역할을 한다. 철학은 종교가 옆의 사람과 대화함을 용이하게 한다. 그리고 철학을 수용하여 이를 통하여 대화하는 종교는 누군가에게 종교를 강요하며 믿지 않는다고 하여 그를 화형하는 악행을 행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역사 속 철학 없는 선교사들이 행한 수많은 악행을 기억해야 한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하여 죽이고, 그 죽음의 공통 속에서 먹을 것을 주며 선교하던 이들의 행위는 자신의 이기적 종교관에선 선행이지만, 전지구적 관점에선 악행이다. 남미 아메리카의 유럽 식민지민의 인권을 옹호하고, 그들에 대한 잔혹함을 반대한 예수회의 선교사들은 스스로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것도 아리스토텔레스에 근거한 철학을 공부하고 일부는 확고한 자기 견해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남미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동아시아에 와서 <천주실의>를 적은 마테오 리치를 보자.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 근거한 철학을 익인 인물이다. 그는 동아시아에 와서 동아시아 사람들이 가진 철학을 익히고, 그들의 철학을 수용하고 익혀 자신의 종교를 설명한다. 설득하려 한다. 설득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종교를 이해하게 하여, 그의 영혼 속에 종교를 녹아들게 한다.

 

말이 길었다. 종교에서 철학은 이러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가장 활발히 확인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중세'다. 그래서 나는 중세 철학의 시기에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이 수용되고 활용된 것이 중세 철학이나 신학의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지금 맹목을 지향하여 목회자와 성직자 등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성추행과 성폭행 그리고 각종 비리와 교회 성장주의에 대항하여 중세의 철학과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당장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수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시대를 고민하고, 동시대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다가가며 현실의 고민을 하는지 확인하라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적어가면서 내가 아는 한에서 단순히 이론에 그친 것이 아니라, 중세 철학자들의 이론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었으며, 그들이 삶 속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어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는지 소개하려 한다. 학자들이 아니면, 관심도 없는 이야기로 가득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아마 그 시대의 그들도 학자들만을 위해 철학을 하진 않았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공간적으로 나는 서유럽에만 그치지 않고, 가능하면 동유럽과 아랍 그리고 유대지방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다루고자 한다. 그것은 지중해 연안을 두고 진행된 철학은 그저 독불장군 처럼 있지 않았다. 서로 대화하면서 존재해갔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슬람 철학자들인 아베로에스와 아비첸나와 대화했고, 유대철학자인 마이모니데스와 대화했다. 동유럽에 정교회 학자인 다마쉐누스와도 대화했다. 둔스 스코투스나 오캄 역시 그렇다. 중세 철학자들의 철학은 대화의 산물이다. 대화를 통하여 얻어진 것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대화 한 편이 아니라, 양쪽을 모두 알아듣는 것이 좋다. 그렇기에 나는 대화에 참여한 이들을 나의 작은 능력이 허락하는 한에서 최대한 나의 대화 상대자로 초대할 생각이다.

 

시간적으론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스콜라 철학과 관련된 논의들을 모두 논의의 영역에 포함할 생각이다. 데카르트가 살던 시기에도 여전히 스콜라 철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을 철학사의 고아로 만들 순 없다.

 

나는 작은 사람이다. 나의 능력이 작지만, 이 작음에도 큰 그림을 그리려는 맘을 비판말고, 응원해 주기 바란다. 이것도 욕심인가 싶다.

 

<2013년 3월 2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