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철학사의 알파벳
유 대칠
(토마스 철학 학교)
도서관에 앉아 중세 철학사를 검색하면 생각보다 많은 책을 검색할 수 있다. 왜일까? 우선 각 대학 철학과에서 저마다 중세 철학 강좌를 개설할 것이고, 그 강좌에 가장 유용한 교재가 중세 철학사이기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이란 공간에서 강의를 해 본 적이 없는 나와 같은 이에겐 그리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지만, 대학 공간에서 강의를 하는 이들에게 중세 철학사는 매우 유용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만일 내가 누군가와 중세 철학사를 공부한다면, '절대' 중세 철학사와 같은 한권짜리 책으로 중세 철학을 이야기하진 않을 것이다. 차라리 한권의 중세 철학자의 글을 읽는 편 같이 공부하는 이의 머리 속에 진정한 중세 철학를 복원하는 길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교양 과좡의 철학이 암기과목이 되어 버린 상황에서 나와 같은 대학 강좌 비경험자가 이러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 나라의 철학사는 상당 부분 마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보는 것 같다. 생애와 저서 사상이 차례대로 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난 철학사를 사전용으로 사용한다. 모르는 철학자가 등장하며 간략하게 그 철학자의 정보는 얻는 공간으로 사용한단 말이다. 난 단 한권의 철학사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 그 이유는 철학사는 철학이 아니라는 의미있는 이야기라기 보다 철학사의 철학은 항상 왜곡되어 있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때문이다. 한 철학자에 대하여 수많은 논문들이 나오고 지금도 연구중인데, 어떻게 그 철학자의 사상을 몇 페이지로 정리한단 말인가! 설사 그렇게 정리된 것은 분명 철학사가의 개인적 관점에 의하여 이리 저리 잘려진 것이 분명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철학사를 읽지 않는다. 또 하나 내가 철학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바로 기존의 철학사는 영웅 중심의 철학사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영웅으로 중세 철학사를 이해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우선 그 시대는 그 영웅 이외에도 수많은 철학자들에 의하여 수많은 철학적 생산물들이 생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들 개별적인 철학은 서로 간에 끝없이 논쟁을 이어갔을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 그 시대의철학의 다양성을 유지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웅 중심의 철학사는 이러한 다양성을 죽이고, 누구는 토마스주의자 누구는 스코투스주의자 그리고 또 누구는 오캄주의자로 불리게 한다. 그러나 단 한명의 철학자도 그렇게 간략하게 누군가의 아류로 정리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철학사적 소신이다. 또한 어느 철학도 누군가의 입장에 의하여 정리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예를 들어, 알베르투스 마뉴스의 철학은 우선 그 자신의 입장에서 정리되어야만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와의 관계 속에서 그의 철학이 정리되거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기준으로 그의 철학이 평가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이것은 알베르투스 마뉴스뿐 아니라, 모든 철학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많은 철학사가들은 영웅 중심으로 중세철학사를 기술하며 그 몇몇 영웅을 중심으로 다른 철학자들을 평가하곤 한다.
한 사람의 철학이 온전히 골방에서 구성된 것이 아닌 것이라면, 항상 다른 이들과의 교류 속에서 완성되기 마련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철학 속엔 수많은 다른 철학자들과의 교류의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강의 헨리의 철학 속엔 아비첸나의 철학이 녹아있으며, 다른 많은 철학적 주름들이 가득히 채우고 있다. 이러한 강의 헨리와 논쟁한 스코투스의 철학 속에도 강의 헨리와 아비첸나 그리고 다른 많은 철학자들의 주름이 가득히 채우기 마련이다. 이러한 주름들이 없는 철학자는 논쟁 할 줄 모르고, 골방에서 혼자서 도를 터득했다고 소리치는 꼴이 될 것이고, 매우 경직된 , 남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 극히 교조적인 철학일 뿐일 것이다.
중세 명제집 주해를 보자! 이 하나의 택스트를 풀이하면서 수많은 철학자들은 누구 하나 동일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러면서 서로간에 치열하게 논쟁하고 서로간에 치열하게 수용한다. 이것이 중세 철학사의 진정한 모습이다. 오직 몇 명의 영웅에 의하여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철학자들이 저마다 한소리씩 하는 시끄러운 철학판이 중세 철학판이다.
유럽의 언어를 익히기 위해선 알파벳을 익혀야 한다. 알파벳은 유럽 언어, 그들의 문자언어를 그래도 표현하는 혹은 재현하는 수단이다. 잘못된 알파벳은 온전히 재현하지도 못하고, 그 원래 뜻을 복원하지도 못한다. 중세 철학사의 알파벳! 그것은 잘 되어 있는가! 지금 우리의 중세 철학사는 온전히 중세 철학의 다양성을 복원하고, 그 시간들을 순간순간 채워간 수많은 중세 철학사의 그 아우성을 온전히 표현하고 있는가! 혹시 몇몇의 영웅의 관점만을 승리자의 관점으로 이야기하며, 다른 많은 아우성들을 무시하고 아예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중세 철학사의 온전한 복원, 적어도 지금보다 나은 복원을 위해 우린 다시 그들의 원전으로 들어가 그들 하나 하나의 소리에 귀를 기울려야 할 것이다. 그렇게 중세 고전, 그 가운데 고민하고 사고함으로 우리도 온전히 그들의 사유를 이해하고, 그들이 왜 그런 문제를 두고 논쟁하고 고민하였는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헤겔의 정반합이란 도식에 실재 살아있던 수많은 철학사를 가두는 일 없이, 누구의 철학이 더 합리적이라는 지금 시점에서의 성급한 판단 없이,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중세 철학사, 아마 고전의 연구가 가장 좋은 길은 아닌가 생각한다.
굳이 라틴어 원문을 두고 읽지 않아도, 우리말이나 영어 혹은 불어나 독어라고 해도, 그들의 글을 읽고 고민하는 것, 전체를 읽지 못한다면 발췌된 부분이라고 읽어 보는 것, 직접 그들의 고민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그저 간략하게 이리 저리 잘려나간 중세 철학사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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