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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장의 고개넘기/허수한국학연구실의자리

인간, 우주를 담다. - 조선 성리학 입문

 


토마스철학학교 성리학 콜로키움 1.



인간, 우주를 담다.

:조선유학의 역사와 그 외곽선.





유대칠=(안현승+유지승) 지음

(토마스철학학교/허수서당)






















2005년

대구/ 토마스철학학교 출판부

 


ⓒ 유지승 2005

주소: http://blog.daum.net/ockham-thomas

펴낸 곳: 토마스철학학교 (http://blog.daum.net/ockham-thomas)

펴낸 이: 유지승

<비매품>



 

들어가기 전에...

이 땅에 살아간 우리의 선조들은 어떤 이데올로기 속에서 살아갔는가? 이것은 어찌 보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쓸데없는 질문으로 보여질지 모른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이 서구적 사고의 또 다른 대안 가운데 하나로 동양다운 사고의 가능성을 더듬어 본다는 과거 지향적 연구가 아니라, 현재 진행적 연구로 이 논의를 이해하는 것도 좋을 것이라 보인다. 한마디로 과거의 철학에 대한 어떤 역사적 연구가 아니라, 서구적 사유 속에 현대 철학에 대안으로 동양적 사유 속에서 현대 철학을 이루어갈 현재 진행적 의미에서 이 논의를 진행하는 것도 좋으리라 본다. 

20세기 서구인들은 중세 그들의 철학적 사유를 정리하면서 많은 성과를 제시하였다. 중세 스콜라 철학의 연구방법에서 스콜라 철학의 철학적 재료가 된 이슬람 철학과 이슬람에 의하여 전해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관한 연구와 같은 연구를 통하여 그 뿐 아니라, 그 당시 저서에 관한 문헌학적 연구를 통하여 그들은 많은 학문적 성과를 낳았다.

이러한 중세 철학을 전공하는 필자이기에 맘 한 구속에는 우리의 조선 성리학도 서양의 스콜라 철학과 같이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남아있었다. 사실 서구 스콜라 철학은 ‘스콜라’, 즉 학교에서 행해진 철학적 사유를 말한다. 스콜라 학자는 학교 내의 학자들로 사실 우리의 역사 속에 선비와 비견되어질 수 있는 인물이다. 스콜라 학자들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풀이함으로 그들의 철학적 사유를 마련하였다면, 우리 내 선비들 혹은 유림(儒林)들은 주자와 공자 그리고 ꡔ주역ꡕ 등의 풀이함을 통하여 그들의 철학적 사유를 마련하였다. 그뿐인가? 스콜라 학자들은 형상과 질료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중요하듯이 우리의 유림들은 리(理)와 기(氣)등과 같은 주자철학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모두 보편과 개체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개체화가 이루어졌는지를 이해하는 것도 공이 매우 중요한 학문적 임무였다.

그뿐 아니라, 필자는 이황에게서 서구의 근대 철학자인 칸트의 철학적 고민을 찾아 읽기도 하였고, 중세 보편자의 실재론적 입장에서 유명론적 입장에로의 전환을 우리내 조선 유학사에서 읽기도 하였다.

사실 이러한 것은 필자가 서구 중세 철학을 전공하여 필자의 눈에 안경은 중세 철학이란 색으로 칠해져있다. 그래서 인지 많은 경우 필자의 우리 유학의 독법은 중세 철학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하는 한계를 가진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러한 이해 속에서 필자는 조선 유학의 근본적 논의를 정리해 보려 한다.

필자의 논의는 충실한 유교의 입문서이기에 몇몇 한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대학에서 체계적으로 유학으로 학위를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서양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의도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문헌학적으로 조선 유학을 복위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말한 것이지만, 현재 진행형으로 조선 유학을 다루려는 것이기에 몇몇 한계를 두고도 건방지게 이 길을 가 본다.

이 길은 토마스철학학교 2005년도 2기 봄 철학 콜로키움이 계기가 되어 학부시절부터 시간이 나면 공부한 것을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필자에게 퇴계의 가르침을 일깨워주신 김시표 선생님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나를 믿고 항상 함께 하여준 사랑하는 안현주님과 이 세상에 몇 안 되는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러준 제자들과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세상에 태어난 것이 도움이 되길 바라며...

2005년 봄 지담 유지승

 

 

1. 조선에로의 주자학의 유입과 형성.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입이 스콜라 철학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듯이 한국유학에 있어서 주자의 유입은 새로운 주자학적 사유를 낳는다. 고려는 송나라의 서적은 상당수 수입하였다. 외교 경로를 통하여 김양감과 윤언이와 같은 대학자가 송에 가는 한편, 중국의 사신들이 고려에 들어오면서 그렇게 송나라와 고려는 지적 교류를 하게 된다. 특히 이러한 유입 가운데 두드러진 인물은 안향(1243-1306)과 그의 제자 백이정(1260-1340)이다. 백이정은 원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주자학 관련 저서들을 구해왔으며, 권보(1262-1346)는 주희의 ꡔ사서집주ꡕ들을 고려에 전하였다. 13세기 유럽이 새롭게 유입된 무슬림의 철학과 무슬림에 의하여 다시 유럽으로 전해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두고 전통적 사유와의 조화와 갈등을 고민하고 있을 때, 고려 말 학자들도 새로운 주자학적 사고를 고려에 전하였다.

 유입된 새로운 사상은 고려의 사회 속에서 새롭게 정리되고, 해석되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내재화의 시작에 선 인물이 이제현(1287-1367), 이숭인(1349-1392), 이색(1328-1396), 정몽주(1337-1392), 길재(1353-1419), 정도전(1337-1398) 등이다. 이들은 기존의 불교적 사유의 대안으로 주자학 혹은 성리학을 제시하였다. 사실 주자학은 불교적 사고와 깊은 관련을 가진다. 주자학은 우주의 보편적 법칙은 리(理) 혹은 성(性)을 연구함에 그 목적이 있다. 이로써 기존의 유학을 불교들의 영향 가운데 형이상학적으로 구성하고, 이로 인하여 기준의 불교적 사고를 넘어서 새로운 이년 체계를 구성하려 하였다. 사실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유학이란 단지 오경(五經, ꡔ시경ꡕ, ꡔ서경ꡕ, ꡔ주역ꡕ, ꡔ예기ꡕ, ꡔ춘추ꡕ)에 대한 해석에 그치고, 새로운 철학적 단계에로 나아가 발전하지 못했다. 지식인들은 노장의 사상과 불교에 몰입하였고, 중국의 주자학은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 대한 반작용이다. 이러한 주자학은 신라, 백제, 고구려의 시대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불교에로만 나아감으로 지적 욕구에 불타던 고려의 학자들에게는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백이정은 10여년을 공부하고 많은 서적을 가지고 고려로 돌아왔고, 이제현이나 박충좌와 같은 인물에게 가르침을 전하였다. 또한 안향과 백이정 이외에도 우탁(1263-1342)은 주자학과 역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는 정이의 ꡔ역전ꡕ이 고려에 전하여졌을 때, 아무도 이를 풀이하지 못하였지만 우탁만이 이를 풀이하였다는 기록을 통하여 익힐 수 있다. 그 외에도 안향을 제자인 권보는 주회의 ꡔ사서집주ꡕ를 간행하였으며, 주자학을 보급하였다. 권보의 사위 이제현과 그의 아들 권준은 그의 시편을 모아 ꡔ효행록ꡕ을 간행하였으며, 그의 저작으로는 ꡔ은대집ꡕ이 있다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권보의 사위이고, 백이정의 제자인 이제현은 경(敬)으로 덕을 쌓아 실천하는 것을 선비로 보며, 이는 주자학을 실천적인 것으로 여겼다. 실천적 학문으로 그는 주자학을 중심으로 불교와 대지주 그리고 탐관오리를 비판하였다. 이러한 이제현은 그의 스승이나 장인과 달리 주자학을 근거하여 고려의 현실을 개혁하려 하였다.

 14세기 후반 주자학을 통한 현실 개혁의 움직임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그 대표적 인물은 이색과 정몽주 그리고 정도전과 조준과 같은 인물이다. 이제현의 제자인 목은 이색은 원나라에 유학하여 3년간 주자학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고려 공민왕 16년(1367) 고려로 돌아온 그는 성균관 대사성이 되고, 정몽주와 박상충 그리고 이숭인과 같은 이들을 교관으로 임명하여 주자학이 본격적으로 흥하게 되는 시대적 흐름에 한 몫을 하였다.

 이러한 유입과 동시에 주자학은 현실의 개혁을 위한 수단이 되었지만, 현실 개혁이란 방법을 두고 학자들은 둘로 나뉘어진다. 그 대표적 갈림길에는 정몽주와 정도전이 있었다. 정몽주와 이색, 길재와 같은 이들은 고려 자체의 개혁을 통하여 고려의 왕조를 지키면서 동시에 개혁을 이루려 하였다. 반면 정도전과 권근 등은 고려의 왕조는 한계에 달했으며, 새로운 왕조를 통하여 주자학에 준하는 개혁을 이루여하였다. 그 가운데 정도전은 ꡔ불씨잠변ꡕ, ꡔ심기리편ꡕ, ꡔ심문천답ꡕ을 저술하였다. 이 책들은 불교와 도교에 비하여 주자학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저서였다. 그 외 그는 새로운 국가인 조선이 이론적 기초를 다지는 등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렇지만 이와 달리 권근은 ꡔ입학도설ꡕ이나 ꡔ오경천경록ꡕ등을 저술하면서, 순수한 주자학 연구에 힘을 썼다. 특히 그의 ꡔ입학도설ꡕ은 ꡔ중용ꡕ과 ꡔ대학ꡕ으로부터 출발하는 초학자들의 입문서이다. 이에 담긴 것은 그것을 모르고는 주자학의 기본을 다질 수 없는 것들이며, 이를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초심자를 위한 논의는 쉽지 않은 것으로 대가의 수준이 아니라면 쉽사리 도전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다. 서양 중세 철학의 빛나는 업적 가운데 하나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ꡔ신학대전ꡕ도 그러한 것이다. ꡔ신학대전ꡕ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초심자를 위하여 마련한 책이지만, 이는 그의 철학과 당시 스콜라 철학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길이 되고 있다. 권근의 ꡔ입학도설ꡕ은 주자학의 핵심적 논의를 정리하고 이를 도해를 만들어 도식화함으로 쉽게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은 주자학의 핵심인 천인합일(天人合一)에 대한 것이며, 이를 위하여 그는 사단칠정(四端七情)에 역점을 두었다. 이러한 논의는 중국의 주자학이 조선 성리학으로 되어짐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리(理)와 기(氣)로 설명함으로 리와 기의 이해에 준하는 조선 성리학의 핵심을 드러내기 시작하였고,1) 이러한 권근의 논의는 이후 이황의 논의에 영향을 준다. 한마디로 권근의 이러한 논의는 조선 성리학의 방향을 지시한 것으로 그 가치를 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권근의 ꡔ입학도설ꡕ은 그 후 300여년이 지나도록 조선 성리학의 논의에 있어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일본에서도 여러 차례 출판된 것으로 보아 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새로운 왕조를 거부하고 고려 왕조의 유지 속에서 주자학적 개혁을 도모한 정몽주와 길재 그리고 이색은 또 다른 의미에서 조선의 성리학에 매우 큰 영향을 준다. 조선의 이론적 틀을 만든 정도전이나 조선 성리학의 방향을 잡은 권근과 달리 조선 왕조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은 오히려 또 다른 방식으로 조선에 기여한다. 예를 들어, 조선왕조 동안 줄곧 정몽주는 추앙의 대상이 되었고, 길재의 제자들은 이후 조선 왕조의 새로운 정치적 힘이 되었다. 즉 훈구파에 대항하는 사림파로 등장한 것이다.

 이렇게 주자학은 고려에 들어와서 새로운 이념으로 조선이란 새로운 왕조를 이루는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주자학은 철저하게 조선이란 국가 속에 내재화되면서 조선의 성리학이 되어갔다. 즉 중국의 사고가 아닌 우리식의 사고가 되어간 것이다. 권근 등의 논의가 이황과 이이의 논의로 이어지고, 이들의 논의가 조선 후기 실학으로 또한 척사운동으로 이어지면서 근대화의 우리식 이론의 토대로 또 한편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이어졌다. 그 후 일제시대의 서구 철학의 교육은 이러한 흐름을 역사 속으로 묶어버렸다. 그리고 이젠 서구의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욱 더 이질적인 이론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처럼 이들은 답답한 인물이 아니며 서구의 철학과 같이 “인간 주체”를 두고 고민하였고, “자연과 인간” 그리고 “보편과 개체”를 두고 고민한 철저한 논리성을 가진 철학적 이론 체계였다. 이들의 논리성은 이황이나 기대승 사이에서 일어나는 논쟁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적어도 우리 철학은 논리성에서 서구에 비하여 약하다고 하는 이들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주자학을 두고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논쟁하며 그들의 논리를 발전시켜 나아갔다. 마치 서구의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인 논리성 속에서 서로가 서로와 논쟁하며 논리를 전개하듯이 말이다. 이 둘은 고전에 근거하며 논리적인 철학 체계를 완성해갔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조선의 선비들과 유럽의 스콜라 철학자들은 같은 작업을 한 것으로 보인다. 논리성이란 무기를 들고 있다는 점에서 이 둘은 같은 작업을 수행하였다.

 조선의 성리학적 사유를 다루기 전에 우선 주자학이 무엇인지를 정의할 필요가 있다. 다음의 논의는 바로 그것이 될 것이다.



2. 주자학이란 무엇인가?  

-주희 철학의 기본적 이해


 주자학은 중국의 송나라 시기 성림된 새로운 유학의 사조이다. 이는 주돈이와 정호 그리고 정이 및 정호 등에서 비롯되어 주희가 집대성한 것이다.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유학이란 단지 오경에 대한 해석에 그치고 새로운 철학적 사고에로의 발전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불교와 도교로의 지식인이 편향되는 것에 대한 유학의 발작용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이와 정호 형제 즉 이정에 의하여 주자학적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주희에 의하여 체계화된 주자학은 고도의 체계성을 가진 철학적 사유로서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에 걸쳐 관학으로 중국의 지도이념이 되었으며, 고려에 유입되어 이황과 이이 등에 의하여 철저하게 내재화되어 조선시대의 성리학으로 집대성된 것이 바로 주자학이다. 주자학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개념은 성(性), 리(理), 기(氣)가 있다. 플라톤은 우주를 이해하기 위하여 모든 존재자를 넘어서는 모든 개별적 존재자를 존재자이게 하는 하나의 절대적 보편 존재자를 가정한다. 예를 들어, 꽃의 이데아는 모든 개별적인 꽃을 꽃이게 하는 모든 꽃의 원형이며, 그 판단의 기준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사유는 서양 고대의 보편자와 개별자를 설명하는 하나의 길이 되었다. 주자학은 변화하는 우주의 단일하고 보편적인 원리를 가정하고, 이 가정을 통하여 변화하는 우주의 내적 원리를 설명한다. 이 보편적 원리를 주희는 리(理) 혹은 이치(理致)라고 한다. 이러한 리는 형이상(形而上)의 것, 즉 형태를 갖춘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단일한 것이다. 반면 기(氣)는 형이하(形而下)의 것, 즉 형태를 갖춘 구체적인 것과 관련되는 것이다. 보편적인 리가 개별자에 깃들게 되면 그것의 본성(本性), 즉 성(性)이 된다. 우주의 원리인 리가 질료적 혹은 재료적 요소인 기가 모인 개별자로 말(馬)과 인간에 주어지면서 개별적 원리인 마성(馬性)과 인간성(人間性)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자학의 논의에게 우주의 보편적 원리인 리는 결국 존재론적으로 성과 실재적으로 구별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기’라는 요소와 관련되어 개별화되어 있다는 차이를 가진다. 즉 실질적 구분이 아니라, 개념적 구분만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주희의 말을 통하여 살펴보자.


 “하늘과 땅 가운데 리가 있고, 기가 있으며, 리라는 것은 형이상의 도(道)이며, 살아있는 것의 근본이다. 기라는 것은 형이하의 그릇이며, 살아있는 것이 갖춘 것(具)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사물의 살아있음은 반드시 리를 받은 이후에 성(性, 본성)이 있는 것이며, 반드시 기를 받은 이후에 형태가 있게 된 것이다.”2)


이 글에서 주희는 리와 기에 대한 위의 설명을 잘 정리하여 요약하고 있다. 그러면 리와 기 가운데 어느 것이 앞서는 것인가? 주희는 어느 것이 앞서거나 뒤에 선다고 보지는 않으나 리 우선의 입장에 서있다. 즉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는 리가 앞선다고 본다. 하지만 이러한 리도 개별자로 모여든 기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기에 기 없이 있지 않는다. 그러나 기가 모여든 개별자가 어떤 본성을 가진다는 한에서, 즉 무엇이라 불린다는 한에서 리가 없이는 될 수 없다. 쉽게 우주 만물의 원리인 리는 각각의 개별자에 내재해 있는 것이며, 이는 기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기가 모여 개별자가 된 것은 무엇이든 리가 주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희는 리가 강조점을 둔다. 그것은 리는 사물이 존재하기 전부터 있었으며, 사물이 생성된 후에도 존재하고, 우주의 보편적 원리라고 하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주희의 우주론적 논의는 윤리학적 논의로 자연스레 넘어간다. 왜냐하면 우주의 보편적 원리인 리와 인간의 성(본성)은 존재론적으로 같으며, 그렇기에 개별적 상황을 넘어서 우주의 보편적 원리와 하나가 될 때 도덕적으로 완성이 된다고 보았다. 즉, 성은 곧 리이며(性卽理), 인간 가운데 우주의 보편적 원리인 리가 있고, 이것이 성으로 깃들어 있으며, 이를 우리가 현대 말하는 이성(理性)이란 말이다. 

 ‘기질지성’(氣質之性)은 리와 기를 합하여 말하는 것이다. 기질의 성, 즉 우주의 보편적 원리가 기질 가운데 하나의 성으로 되어진 것으로 이는 ‘리’와 ‘기’를 함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본연지성’(本然之性)은 본질적인 본성으로 이는 ‘리’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질 가운데 본연의 성이 함께 있는 것이 ‘기질지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주자 윤리학의 핵심은 기질을 잘 다스려 리에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정욕은 기의 소산인데, 이러한 정욕이 인간의 이성을 방해함으로 악이 생긴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정욕을 넘어서 이성적인 것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그렇기에 악을 행한 이는 기질이 탁하여 인간 본연의 본성인 리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논리가 가능할 것이다. 주희의 논리에 의하면 본연지성은 순전히 선한 것이며, 기질지성은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는 것이다.

 인간의 성(본성)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이며, 정(情)은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이다. 여기에서 성은 마음의 리 혹은 이치이며, 정은 마음의 용(用) 혹은 작용이다. 마음의 이치와 그 작용은 인으로 측은하여 사랑하고, 의로 미워하며, 예로 사양하고, 지로 시비를 아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성정(性情)의 주체이다. 도심(道心)은 하늘의 리 혹은 이치(天理)에서 나오는 인의예지를 받은 것이기에 이는 위에서 말한 작용으로 인하여 선이 된다. 이러한 도심은 인심(人心)에 의하여 안착되어진다. 주희에게 이러한 하늘의 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없애는 과정을 극기복례의 과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희는 이를 인간이면 마땅히 지켜야하는 윤리적 도덕의 예의를 천리의 기준으로 삼았다. 군자와 신하 그리고 부모와 자식이 그 기준에 따라 행위함으로 천리를 보존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주희의 주자학은 형이상학적 우주론과 인간학 그리고 국가 정치이론과 윤리학이 하나의 논리 속에서 체계화 되어간 현실적 철학임을 확인할 수 있겠다.  


《보론: 주희의 「태극도설」 이해》

 앞으로 다루게 될 조선 성리학의 많은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주희와 주자학에 「태극도설」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이를 보론으로 더한다.

 많은 유학의 학파가 분파 되어 가는 것은 ꡔ주역ꡕ(周易)에 관한 이해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이러한 역학에 관한 이해를 유학자들은 도식화하여 도설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도식화 가운데 필자가 살피는 것은 우주의 존재론적 근거를 규명한 「태극도」에 관한 것이다. 그 가운데 주희의 「태극도설」이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희는 태극(太極)을 음양(陰陽)이란 두 가지 기(氣)가 혼돈 되어 아직 분화되지 못한 상태라고 하였다. 태극이 동(動)하면 양이 생하고, 정(靜)하면 음이 생한다. 이러한 정이 극에 달하면 동하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한번 정하고 한번 동하는(一動一靜) 순환은 끝없이 계속된다. 음양이 변화하여 상호 배합되어 수,화,목,금,토의 오행(五行)을 낳는다. 이들 오행의 기가 이치에 따라 진행될 때 1년 사시사철이 운행된다. 그리고 음양 오행이 혼합되어 남성다운 기와 여성다운 기가 이루어진다. 이 두 기운이 교감하여 만물이 생겨나게 된다. 그 가운데 가장 정한 기를 받은 것이 인간인 것이다. 이렇기에 만물의 근원을 소급하여 올라가면 태극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주돈이의 「태극도」와는 구별되어지는 것이다. 주돈이는 무극(無極)으로부터 태극이 나온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무극이란 허무실체(虛無實體)를 가리키는 것인데, 이는 태극의 근원인 것이다. 이는 사뭇 도교의 존재(存在)는 비-존재(非-存在), 즉 유(有)는 무(無)에서 나온다는 논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주돈이 이후 주희는 주돈이의 「태극도설」을 흠모하여 이를 정리하고 풀이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무극에서 태극’이 나온다는 것을 ‘무극이면서 태극’이라고 바꾸어버린다. 단지 태극 위에 무극을 둔 주돈이의 의도는 태극의 이치가 형이나 극한이 없으며, 그 위의 어떤 별도의 것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

 주희는 이러한 태극의 이해를 자신의 리와 기로 설명한다. 태극은 리(理)로 이해한다. 그리고 태극에서 나온 음양을 두 가지 기(氣)로 이해한다. 그리고 오행은 인간의 심성론에 등장하는 오상(五常), 즉 인,의,예,지,신에 준한다. 이와 같이 주희의 존재론적 사유는 심성론적 사유로 귀결되어지는 것이다.    


 

3. 14세기 고려의 철학자들.

 

포은 정몽주의 철학

들어가는 말.

 정몽주는 조선에 반대한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며, 조선 유림(儒林)의 모범이 된 인물이다. 그의 집안은 영천 등에 거주하며 무신정권에서 무신정권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중앙에 진출한 적이 없는 평범한 사족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뛰어난 정치가이며, 외교관으로 고려 말기의 마지막 충신으로 역사 속에 기록되어있다.

 조광조, 류성룡, 송시열 등이 입을 모아 칭송한 동방 성리학의 시조가 바로 정몽주이다. 그의 절개는 그를 죽인 조선의 초기 세력들에게도 칭송의 대상이었으며, 이는 조선 태종 1년에 정몽주에게 '문충공'의 시호를 내리고 높이 평가한 것을 보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고려 말기 신진 개혁 세력으로 스스로의 조국을 주자학의 이념으로 새롭게 구축하려 하였지만, 그 근거는 국가 자체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것에는 반대하였다. 그는 개혁은 인정하였지만, 혁명이나 쿠테타를 인정하지는 않은 것이다.

 정몽주는 특별한 스승 없이 독학으로 주자학을 익혔으며, 그 가운데 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ꡔ대학ꡕ과 ꡔ중용ꡕ이었다. ꡔ중용ꡕ은 ꡔ심성ꡕ 수양에 대학은 실천에 의미를 두고 이에 깊이 공부하였다. 그렇다고 다른 경전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삼봉 정도전은 그의 ꡔ대학ꡕ, ꡔ중용ꡕ 그뿐 아니라, ꡔ논어ꡕ와 ꡔ맹자ꡕ 등에 깊은 지식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는 ꡔ역경ꡕ에 대해서도 탁월한 이해를 가졌다는 기록이 여럿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주자학에 관한 직접적인 문헌은 그리 많이 많아 있지 않으며, 지금의 우리는 그의 몇몇 글 속에 녹아든 철학적 조각을 모아 다시 맞출 수밖에 없다. 필자 역시 그 정도에서 마칠 뿐이다.  


사상.

 정몽주는 당시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불교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보였다. 그에게 유학의 가르침은 일상의 것이며, 일상을 떠난 것은 아니다. 정몽주의 철학은 철저하게 현실 참여적인 것이다. 그는 현실의 문제를 벗어나서는 진정한 철학적 논의에 다가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학문이란 앎을 실행하는 것이며, 이러한 앎은 현실에 관한 앎이어야했다. 『대학』에서 정몽주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읽었을 것이다. ‘격물치지’에서 ‘격물’이란 인식대상인 ‘물’(物)에 인식주관인 마음이 이르러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치지’란 사고의 끊임없는 과정을 통해 유추해서 인식대상인 사물의 진리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를 볼 때, 『대학』에서 이야기하는 인식론의 지식은 사물에 다가가는 것이며, 그 이후에야 그 사물에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론은 행위에로 이어져야한다. 주자는 『대학혹문』에서 『대학』과 『소학』의 관계에 관하여 논의하면서, 『소학』을 익힌 이후에 『대학』을 익혀야하는데, 그것은 청소와 같은 일상의 일에서 분명한 답을 얻고 그 후 육예(六藝), 즉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익히고 나서 『대학』을 공부해야한다고 한다. 이도 격물치지에서 사물에 대한 다가감에서 사물의 지극함이 나오듯이 일상과 인간사의 알고 그에 다가감이 먼저이고 이후 앎이 가능하기 때문은 아니겠는가? 사소한 것에서 시작하여 우주의 궁극적인 것을 다루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주자가 생각하는 교육의 방법이기 때문은 아니겠는가? 마치 사물에 먼저 다가가고, 이후 그것에 진리를 얻을 수 있듯이 말이다. 정몽주도 이와 하나의 맥에서 유학자는 일상의 지식을 다룬다고 한다. 그렇기에 산 속으로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는 불교의 실천적 모습은 부정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의 주자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역경』에 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는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이 실체(體)와 작용(用)임을 『역경』을 통해 알았다고 고백한다. 실제로 우리는 그의 『포은집』에서 그가 생각하는 『역경』에 관한 작디작은 조각들을 볼 수 있다. 정몽주는 하륜과 김구용에게 적어준 글에서 『역경』을 읽기를 권하며, 그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3) 이를 통하여 볼 때, 정몽주는 주자학과 유학의 근본에 매우 익숙한 인물이며, 그 재료가 되는 경전에 매우 뛰어난 인물로 보인다. 이러한 정몽주를 조선의 학자들은 ‘동방 성리학의 시조’라 하며 평하였다.

 정몽주가 이집에서 준 「호연권자」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황천(皇天)이 사람에게 생명을 주었으니

그 기(氣)는 크고도 굳세다.

사람이 스스로 이를 살치지 않으면,

심상하게 여겨 버려두더라.

고유한 도를 기른다면

호연한 기를 누가 감당하겠는가.

...

이 말을 아는 자 드무니

그대를 위해 이 글을 짓는다.4)


여기에서 황천은 태극(太極)의 개념에 상응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몽주는 태극에서 파생한 ‘기’가 인간을 생성한다고 한다. 이 기는 지고지선(至高至善)한 것으로 이를 잘 배양하는 것이 인간이 지향해야할 것이라 한다. 이색은 이를 본연지선(本然之善)이라 표현하지만, 포은은 이를 ‘고유한 도’(固有道)라고 표현한다. 포은은 위의 글에서 많은 이들이 이를 알지 못하여 고유한 도를 살피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실상 주자학의 것과 매우 깊은 연관을 가진다. 주자학은 “성즉리”(性卽理)와 이기성(理氣性)을 다루고 있다. 성즉리라고 함은 대우주 가운데 조화된 리(理)가 있고, 그것이 인간의 본성(性)에도 깃들어 이성(理性)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주자학은 리(理)와 기(氣)를 구분한다. 리는 형이상(形而上)의 것이며, 기는 형이하(形而下)의 것이라 보는 것이다. 또한 인간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정욕은 기의 소산이며, 이러한 정욕이 이성을 가릴 때 악(惡)이 생긴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정욕을 이성으로 지배해야한다고 하면서 강한 윤리적 성향을 가지는 윤리학적 내용을 가지게 된다. 정몽주도 이러한 흐름에서 인간의 본성(性)에 충성하여, 우주의 원리인 리(理)에 상응하는 삶, 즉 고유한 도를 일굼으로 인간의 본성이 우주의 원리인 리와 상응하는 삶, 즉 도덕적 완성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본래적인 선으로 돌아가야만 하고, 이러한 본래적인 선이 바로 ‘고유한 도’이다. 정몽주는 하늘에서 받은 기를 양(陽)의 기라고 하고, 땅에서 받은 기를 음(陰)의 기라고 한다. 여기에서 정몽주는 양의 기가 음의 기에 의하여 약해지면 고유한 도를 상실한다고 한다. 그렇기에 그는 양의 기에 의하여 지배받는 인간과 사회 그리고 국가를 희망하였다. 그는 자신의 한 시 구절에서 “양은 하늘의 마음이며, 나의 마음”이라고 한다. 이는 정몽주 철학의 중심에선 명제이다. 이때 ‘하늘의 마음’(天心)이란 지고지선한 양의 기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때 ‘나의 마음’(吾心)이란 이 지고지선한 양의 기를 받은 인간의 ‘고유한 도’를 말한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일면을 따르는 것이다. 우주의 원리인 지고지선한 ‘리’가 주어진 ‘성’, 그렇기에 인간의 인간성은 우주의 원리와 같이 선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인간의 본래적 모습이다. 이는 분명 맹자의 성선설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실상 정몽주는 그의 시에서 맹자의 가르침이 가지는 중요성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에 준하여 그는 인간은 본시 하늘의 기를 받아 선한 고유한 도를 가지며, 이를 잘 보전해야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그의 다른 시에서도 보여 진다.


물 위에 땅이 있으니, 땅에서 샘이 나네.

시내로 바다로 흠을 남기지 않는구나.

마음이 본디 비었으니 곧고 맑구나.

서리와 눈에 견디어 내니 너를 훌륭히 이루었는데 상인(上人)이 여기서 무엇을 취하려나.

한편 물리(物理)의, 묘함을 보고 한편 도행(道行)의 곧음을 나누려는가.5)


 ‘마음이 본디 비었으니’라는 구절과 ‘곧고 맑구나’라는 구절은 ‘도행’, 즉 고유도에 준하는 행을 말한다. 고유한 도의 근본은 마음을 비우고, 곧고 맑음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을 비음과 곧고 맑음’은 서리와 눈을 견디어 이겨야하며, 이를 통해서 고유한 도를 지킬 수 있다. 여기에서 서리와 눈은 음의 기를 암시하는 것이며, 이러한 음의 기가 양의 기를 넘어서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인간이 고유한 도를 회복하고 유지하는 길이다. 이것이 포은 성리학의 핵심에 선 것들이다.

 또한 그는 국가의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그렇기에 그는 사대주의적 사고를 가진 인물이 아니다. 그에게 외교는 사대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일 뿐이다. 중국, 세계의 중심인 나라는 지역의 개념이 아니라, 스스로의 문명을 이루는 사람, 즉 스스로의 주체성을 자각하는 국가와 개인은 누구나 중화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중심과 오랑캐의 구분은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주체성 각인의 여부라고 보았다. 이러한 주체성의 자각은 조선 후기 성리학에서 다시 전면에 등장할 것이다.


 

4. 14세기 조선의 철학자.


양촌 권근의 철학

들어가는 말.

 권근(1352-1409)은 조선 건국에서 이성계의 편이 되었고, 왕권의 확입을 위하여 사병 폐지에 동참하였다. 그는 대제학이 되어, ꡔ동국사략ꡕ을 저술하기도 하였으며, 그가 지은 ꡔ입학도설ꡕ은 조선 성리학에 있어서 하나의 교과서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철학은 이후 이황 등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사상.

 양촌 권근의 철학적 위상은 매우 큰 것이다. 특히 그의 ꡔ입학도설ꡕ은 그 이후 조선 성리학의 방향을 잡은 저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그의 학문적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천인심성합일도설」이라 할 수 있다. 「천인심성합일도설」은 천도에서 어떻게 인도가 출현되며, 인도는 어떻게 천도에 합일되어질 수 있는가를 다룬 우주론적이며, 심성론적이고 도덕학적인 논의이다. 이는 주자(주희)의 「태극도설」과 ꡔ중용장구ꡕ를 근거로 ‘리’와 ‘기’ 그리고 선과 악의 다름을 분명히 하여 학문을 시작하려는 초심자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권근이 마련한 주자학 입문서이다. 그리고 이 입문성은 조선 성리학의 문이 된다. 주희는 「태극도설」에서 만물의 본성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사물의 리(이치) 혹은 원천이 나온다고 하였다. 권근은 「천인심성합일도설」에서 인간과 사물의 성(본성)의 근원을 따라 올라가면, 모든 사물의 이치의 원천 나오며, 이를 천명(天命)이라 하고 있다. 마음(心)은 기와 리의 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리의 원천과 기의 원천 모두와 관련되는 것이다. 권근은 이를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연관지어 다룬다. 사단은 리의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성의 발현으로 본다. 리는 우주 원리 혹은 이치이며, 이러한 리가 개별자에 주어짐 것이 개별자의 본성, 즉 성이다. 그러니 사단이 리에서 흘려 나온 것이라면 분명 성의 발현이 될 것이다. 이러한 성의 발함을 정(情)이라고 한다. 그리고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을 기의 원천에서 유래한다고 하여 정으로 표하지 않는다. 또한 마음이 발하여 의지(意)가 되고, 이것이 선악으로 갈라진다고 한다. 그리고 선악이 갈라지면서 인간 사회의 모든 문제가 드러난다고 권근은 보았다.

 리가 주어진 성에서 발해진 정이라 하여, 측은, 사양, 시비, 수오, 시비와 같은 사단은 선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정은 리와 기의 원천이 함께 마음에서 발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렇기에 선악의 나누어짐과 인간 만사의 일이 칠정인 희노애구애오욕과 관련되며, 사단과는 관계되지 않는다. 이는 사단이란 인간 본성에서 발한 것이니 순수하게 선하며, 칠정이란 (인간 실체로 리만이 아니라, 리와 기의 합성체로)마음에서 발한 것이니 성악으로 갈라지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이리 본 것인가? 권근은 우주 만물의 리치를 받은 인간의 본성은 발한 것이 사단이며, 이러한 사단은 리가 그렇듯이 악한 것이 아니며, 순전히 선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칠정이란 마음에서 발한 것으로 선악으로 구분된 것이며, 그렇기에 이는 리와 기의 합으로 이루어진 것 마음에서 발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마음은 곧 리라는 양명학의 원리가 아닌 마음은 리와 기의 합이라 보았다. 리와 기의 합인 인간 마음에서 발한 기의 원천에서 발한 칠정은 선악의 구분이 있다고 보았으나, 리 혹은 인간 본성에서 발한 것은 선악의 구분을 떠나 순수하게 선하다고 보았다.

 권근에게 마음이란 하늘에서 주어진 명덕(明德)이며, 이것이 물욕에 가리우면서 그 작용(用)의 발함이 어두워진다. 그렇기에 학문을 통하여 경(敬)으로 바르게 해야한다. 이러한 권근에 의하면 마음의 실체(體)는 성과 리의 원천이며, 성이 발하여 정이 된다. 이러한 정은 마음에서 발한 것, 즉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이 발하여 의도(意)가 되고, 이도 심의 작용이다. 이렇게 심은 두 가지 작용을 가진다. 그 가운데 마음의 실체에서 발한 작용이 도심이며, 이는 순수하게 선하다. 그리고 이는 경을 중심으로 확고히 해야한다. 그리고 의도에서 일어난 것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경으로 인욕 속에 싹트는 것을 제거하고, 하늘의 이치(理)를 따라야한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도심이 주가 되고, 인심이 도심을 따르게 된다고 한다. 결국 권근은 마음의 실체는 하나이지만, 그 작용은 두 가지로 이해한 듯이 보인다. 즉 성리(性理)에 의한 인간 본성에서 기인하는 작용인 순수하게 선한 도심과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인심이다.

 권근에게 우주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각각의 개별자는 각각의 본성을 가진다. 예를 들어, 말은 마성을 마지고, 꽃은 화성을 가진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성을 가진다. 이러한 본성 즉 성은 하늘의 이치인 리가 각각의 개별자에 줌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기는 존재하는 모든 개별자에 따라 막히고, 뚫리고, 치우치고, 똑바름의 차이에 따라서 다르다. 이러한 4가지의 차이에 의하여 각각의 개별자는 기의 차이가 있고, 하늘의 리(이치)는 이러한 기의 차이에 적당한 성(본성)을 준 것이다. 이러한 개별자의 원리인 각각의 본성으로 성은 실재적으로 우주의 원리인 보편적 이치로 리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성은 우주의 원리가 주어진 것으로 그 가운데는 선하지 않은 것이 없고, 모든 이치를 담고 있음은 이러한 논리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왜냐면 성이란 결국 하늘이 명한 적, 즉 천명(天命)이고, 이는 리가 개별자에 주어진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늘과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병행구조에 놓인다. 천명의 관점에서 성의 논리에 따르면 하늘과 인간은 다른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함께 병행구조를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늘에서 주어진 성은 인간 마음의 실체이고, 이러한 하나의 실체는 두 가지 작용을 가진다. 하나는 인간 본성 그 자체의 작용이고 이는 도심이다. 다른 하나는 기의 발현이고, 이는 인심이다. 리와 기의 원천을 가진 마음이 리에서 발한 것과 기에서 발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도심은 결국 실체 그 자체인 리의 발현이고, 인심은 기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리를 중심으로 인간의 본성에 충실하려는 것이 권근의 논리이다. 

 결국 권근은 도심이 주가 되고, 인심이 도심을 따르는 것이 우주의 한 개별자로 인간이 우주의 질서에 편입하여 존재하는 원리라고 보았고, 이것이 도덕적 완성, 즉 우주론적 차원의 윤리가 실현되는 것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권근의 논리는 조선 성리학의 시초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즉 성리의 개념을 중심으로 우주론적 윤리학으로 존재론적, 인식론적, 윤리학적, 우주론적 사고가 하나의 논리 속에서 해소되어지는 사고의 형태가 마련된 것이다. 이는 이후 정지운이나 이황에 이르러 그리고 그 이후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발전해 나아간다.


 

5. 15세기 조선의 철학자들.


일두 정여창

들어가는 말.

 정여창(1450-1504)은 조선 유학의 빛나는 18현의 한 명으로 문묘에서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형과 함께 국가적 차원에서 모셔진 인물이다. 그는 삶의 태도나 학문에 있어서 조선 선비들의 모범이 된 인물이었다. 또한 정여창은 김굉필과 조광조 그리고 이언적과 이황과 함께 동방오현의 한 명으로도 불린다. 그가 살아간 조선조의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수양대군(세조)의 왕위찬탈 연산군 시대의 혼란이 그의 삶 동안 있었던 사건들이다. 그는 점필재와 김종직에게서 학문을 익혔으며, 당시 역학에 달인이었던 율정 이관의의 문하에서 역학을 익히기도 하였다. 또한 지리산에 입산하여 사서오경을 비롯한 유교의 경전을 익혔다. 연산군 4년(1498)년 사초 문제로 야기된 무오사화에 의하여 김종직이 부관참시 당하고, 정여창은 장형 100대에 9년 동안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연산군 10년(1504) 음력 4월 1일 유배지인 종성에서 별세하였으며, 같은 해 갑자사화로 인하여 부관참시 당하였다. 하지만 중종 원년(1506)에 중종이 연산군을 물리치고 등극하여, 김굉필과 조광조 그리고 이언적과 함께 동방사현으로 유생들과 선비들에 의하여 추대되었으며, 이는 후에 이황이 더해져 동방 오현이 된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이들의 신원이 복원되면서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우의정경영경연감춘추관사’에 봉해졌다.


사상.

 그의 성리학적 사고는 그의 저서인 ꡔ리기설ꡕ을 통하여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정여창은 주자학의 전통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하였다. 그는 리 없이 기가 있을 수 없으며 기 없이 리가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리가 있는 곳에는 기 또한 모이고, 기가 움직이는 곳에는 리가 드러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리라는 것은 개별자마다 차이를 가지는 것이 아니며, 어떤 한정된 것으로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반면 기는 개별자마다 차이를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리와 기가 함께 만물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리와 기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라고 정여창은 말한다. 그에게 리와 기는 나누어지지 않은 것이었으며, 그렇기에 이황과 같은 이원론의 입장과 정여창의 입장은 달랐다. 차라리 그의 입장은 이후 이이에게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정여창은 리와 기를 존재론적으로 하나인 것도 아니며 둘인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이 둘의 관계를 묘한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특유의 표현은 이이에게 이어져 율곡 성리학이란 이름으로 조선 성리학의 한 흐름이 된다. 권근과 이황은 리와 기를 분리하여 사고한다. 그렇지만 정여창은 이러한 분리를 회의한다. 이에 의하여, 권근과 이황은 리를 사단과 기를 칠정과 관련하여 사고하였다. 그리고 리와 기가 분리되듯이 이것들도 분리하여 사고하였다. 그렇지만 정여창은 이러한 리와 기의 관계를 의심하였고, 율곡 이이는 사단과 칠정에 관한 이황계의 논의를 의심한다.

 리와 기는 둘이면서 하나이다. 리가 없이 기가 모일 수 없으며, 기가 없이 리가 정착할 수 없다. 즉 보편적 원리인 리도 어떤 구체 없이는 정착할 수 없으며, 구체적인 것은 리로 인하여 어떤 구체적인 것이 된다. 그렇기에 이 둘은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리와 기는 서로가 서로를 기다림으로 만물을 낳는 것이다.

 이러한 리기론은 그의 심성론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하지만, 그 기질로 인하여 선악으로 구별된다고 정여창은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이루는 방법론으로 경(敬)을 중심에 두라고 한다. 이와 같은 논의에서 정여창은 기보다 리가 한층 높은 가치를 가진다. 왜 정여창은 리 중심의 사고를 하였는가? 그것은 도덕적 실천과 무관하지 않는다. 리를 실천함에 있어 방해가 되는 것이 기이며, 리가 기질 속으로 떨어져 더려워지지 않도록 인심이 항상 도심을 따르게 하는 것이 수양함의 목적이라고 하는 그에게 리가 기보다 더 가치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정여창의 저서는 그의 생애가 평탄하지 않았듯이 온전히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무오사화때 그의 부인이 불 속에 모두 던져 사라진 그의 저서로 인하여 우리는 그의 철학을 온전히 구현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한계를 가진다. 하지만 그는 율곡 이이의 철학을 준비한 이이며, 실천 철학자임을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리와 기에 관하여 이황과 같이 이원론적으로 접근하지 않았으며, 이 둘은 하나이면서 둘이라고 하면서 이 둘의 관계는 묘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도덕론이나 수양론을 볼 때 그는 주리론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리를 중심으로 경으로 인심이 도심을 따르게 하라고 한다.  


6. 16세기 조선의 철학자들.


퇴계 이황

들어가는 말.

 이황(1501-1570)은 연산군(1501년)에 태어난 조선 성리학의 절정에 선 철학자이다. 그 이후 철학은 거의 가 그의 철학적 논의와 무관할 수 없었으며, 이는 20세기 대한민국의 성리학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이다. 그는 조선 성리학의 절정이었으며, 그 이후 그는 하나의 권위로 이해되었으며, 그의 철학은 철학함에 기초였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일찍 아버지를 여이고 홀로 농사와 누예치기로 생계를 일군 홀어머니와 성장하였다. 6살에 이웃 노인에게 ꡔ천자문ꡕ을 익혔고, 그 후 숙부에게 ꡔ논어ꡕ 등을 배웠다. 그는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길로 나선다. 충청도어사와 사헌부장령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학문을 위하여 중앙 관직이 아닌 풍기군수과 단양군수와 같은 외직을 지냈으며, 신병을 이유로 벼슬을 떠나 학문에 힘썼다. 이후로도 여러 번 정부는 그를 불러 들렸지만, 그는 은퇴하고 학문에 힘썼다. 그는 주자학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ꡔ주자서절요ꡕ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는 ꡔ성학십도ꡕ 등을 비롯하여, ꡔ계몽전의ꡕ 그리고 ꡔ자성록ꡕ 등을 남겼으며, 김성일, 류성룡, 조목 등과 같은 뛰어난 제자들을 남겼다.


사상.

 이황의 철학은 주자학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완성시킨 의의를 가진다. 그는 리를 기의 수장(氣之帥)이며, 기는 리의 병사(理之卒)라고 하였다. 이것은 리가 기를 주재하며, 기는 리에 순종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리는 동하게 하는 것이고, 기는 동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그에게 리기의 구별은 동정하게 하게 하는 것과 하는 것의 차이에 있다. 여기에서 기의 동정은 리의 동정에 근거한다. 이러한 논리는 리는 기를 낳고, 만물을 생성하게 하는 우주의 보편적 원리라는 것을 인정하는 리의 주재적 작용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주희의 주자학이 가진 문제를 조선 이황의 성리학이 해결한 한 부분이다. 주희는 리는 동정이 없으며, 단지 정하다고 하였는데, 또 다른 부분에는 리에 동정이 있으므로 기에도 동정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리에 대한 서로 다른 정의가 주어진 논리적 문제를 가진다. 이러한 문제 가운데도 주희는 대체로 절대적 원리로써 그리고 절대자로써 리는 운동하는 것일 수 없다고 보았다. 즉 절대자가는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황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이황은 운동과 존재를 반대 개념으로 보지 않으며, 리의 운동을 긍정하였다. 이로써 주회의 주자학과 이황에 의하여 극에 달한 조선 성리학은 차이를 가지는 것이다. 이황은 리의 운동을 긍정하면서, 리가 운동하여 기를 낳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존재론적 입장은 이황의 철학이 중국에서 유입된 철학이 조선의 고유한 철학적 사고로 발전해 나아감을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황의 리와 기에 관한 논의는 고봉 기대승과의 논쟁 속에서 더욱 더 체계화되며 그의 진면모를 드러낸다. 기대승은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씨인 ꡔ맹자ꡕ에서 유래한 사단, 즉 인(仁)에서 우러나오는 측은지심, 의(義)에서 우러나오는 수오지심, 예(禮)에서 우러나오는 사양지심, 지(智)에서 우러나오는 시비지심과 칠정을 같은 것이라고 한다. 칠정이란  기쁨(喜), 노여움(怒), 슬픔(哀), 즐거움(樂), 사랑(愛), 미움(惡), 욕심(欲) 혹은 기쁨(喜), 노여움(怒), 근심(憂), 생각(思), 슬픔(悲), 놀람(驚), 두려움(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이 종국에는 같은 것이라고 한다. 사단이란 칠정 가운데 선한 것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칠정이란 선한 것과 악한 것 모두는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칠정만 외부의 감각에 의하여 내부에서 응함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단도 그러하다고 한다. 그렇기에 칠정과 사단은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추만 정지운과 같이 리를 사단과 기를 칠정과 관련시켜 분리하여 이해하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황은 이러한 기대승의 논변의 논리성을 상당히 인정하면서 사단과 칠정을 분리하여 설명하려는 마지노선(Maginot線)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분명 기대승의 논박은 상당한 논리성을 가지고 있다.

 타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측은지심)과 옮고 그릇을 아는 마음(시비지심)과 겸손한 마음(사양지심) 그리고 거짓을 가려 아는 마음(시비지심)이란 사단은 기쁨과, 노려움, 슬픔, 즐거움, 사랑, 미음, 욕심이라는 칠정과 다른 것인가? 기대승은 칠정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면 하면서 그 가운데 선한 것만을 끄집어 말하는 것이고, 칠정은 선악 모두를 싸잡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만일 이러한 논변이 타당하다면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로 분리하여 설명하려는 것은 한계를 가지게 된다.

 이황은 기대승의 반론에 영향을 받아 리와 기를 사단과 칠정으로 나누어 설명하던 것을 포기하고, 사단이나 칠정을 모두 리와 기가 발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미 논의한 대로 그는 사단과 칠정을 분리하여 설명하려는 마지노선을 사수한다. 즉 사단은 리와 기가 다 함께 발한 것이지만 리가 주된 것이라고 반면 칠정은 기가 주된 것이란 것이다. 또한 사단은 그 근본이 인간 본래적 본성에 있으며, 칠정은 그 기질의 본성에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이황은 사단이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란 것을 수정하여, 사단이란 리가 발하고 기가 따른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고 리가 따른 것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왜 이황은 기대승의 논변에 마지노선을 정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사단과 칠정이 그 근본이 서로 다른 이유이다.

 인간에게 경(敬)이란 인간의 선한 본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는 개별자의 본성인 성은 곧 우주의 보편적 원리인 리와 같다고 보았다. 즉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하였다. 인간이란 순수하게 선한 리로부터 성을 받은 존재이다. 그리고 성과 리는 존재론적으로 같은 맥락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기질이란 상황을 넘어서 인간의 이성, 즉 그 선한 본성에 돌아가야 하며, 그러한 돌아감의 수단이 ‘경’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철학은 경의 철학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사람이면 누구나 경의 맘으로 수양을 하면,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사단으로 자신의 행동을 이끌 수 있으며, 이로 인하여 각각의 사람이 가지는 개별적 차이인 기질의 차이를 넘어서 성인의 경지, 즉 인간의 이상향인 완전한 인간이 되어 질 수 있으며, 국가적 차원에서는 대학에 등장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가 가능해진다고 보았다.

 근대 칸트는 ꡔ실천이성비판ꡕ을 통하여 도덕의 문제를 다룬다. 도덕의 당위성을 위하여 그는 왜 해야하는가의 문제를 넘어서 당연히 해야하는 것으로 도덕을 본다. 왜 도덕을 지켜야하는가? 그것은 칸트에게 행복하기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도덕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황은 어떻게 이를 볼 것인가? 그는 도덕을 지키는 것이 인간 본성에 적당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이 우주 속에 사는 인간이 혹은 우주의 원리를 받아 사는 인간이 우주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이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철학적 확신은 기대승의 논변에서 결코 물러 설 수 없는 마지노선을 긋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이황은 개별자의 차이는 기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정한 기는 인간을 편하고 색한 기는 사물 그리고 그 사이에 금수가 있다고 했다. 서양 중세 철학에선 보편자가 어떻게 개별자로 드러나는가의 문제가 핵심적 문제였다. 모든 인간을 인간으로 불리게 하는 그 인간이란 보편자가 어떻게 각각의 차이를 가진 개별자가 되어지는가의 개별화의 원리에서 많은 철학자는 질료를 이야기했다. 간단하게 각각의 인간은 인간이라는 보편자의 관점에서 같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질료(재료)의 측면에서 서로 달라진다는 것이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모든 우주의 보편적 원리인 ‘리’가 각각 다른 기에 주어져 각각의 개별자의 ‘성’이 된다고 보았다. 그러면 모든 개별자는 그것의 보편적 원리인 ‘리’의 측면에선 동일하지만, 그 기의 차이로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이황은 돌, 말 그리고 인간이 가지는 각각의 본성(性)인 석성(石性)과 마성(馬性) 그리고 인간성(人間性)은 보편적 원리인 리가 색하고 편한 기에 주어진 것이 석성이고, 편하고 색한 것 가운데 정한 기에 주어진 것이 마성이고, 가정 정한 기에 주어진 것이 인간성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이황이 개별자가 보편의 관점에선 같지만, 개별자로 서로 다른 것은 기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황에 의하면, 리는 보편화의 원리이고, 기는 개별화의 원리로 이해될 수 있다. 간단하게 리에선 같고, 기에서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논의는 이후 이재와 김창흡 등에 의하여 다루어진 조선 성리학의 주된 논의 가운데 하나인 인간과 사물의 성이 같은가 다른가를 다루는 논쟁으로 이어진다.            


화담 서경덕

들어가는 말.

 서경덕(1489-1546), 흔히 화담선생이라 부르는 서경덕은 사실 그의 이름보다 화담이란 별호가 더 유명하다. 그의 집은 대대로 양반이기는 하지만, 벼슬을 하지 못해 궁핍하였다. 조선의 양반들은 벼슬만이 생존의 길이기에 벼슬을 하지 못하였기에 궁핍은 어찌 보면 피할 수 없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 가운데 서경덕은 어려서는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을 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그는 높은 벼슬을 차지하지는 못했으며, 사화가 연이은 조정을 떠나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비록 52세에 대제학 김안국이 그를 조정에 추천하였지만, 그는 이 때에도 이를 마다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이로 볼 때, 그는 벼슬이나 권력 그리고 경제력보다 학문의 정진을 통하여 얻은 것이 더 크다고 여긴 인물이라고 여겨진다. 그는 학문의 즐거움을 배고픔이나 현실적 아픔보다 더 소중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한 그의 학문됨을 두고 이이는, “스스로 깨달음 바가 많아서 문자만으로 익히 이와는 다르다”라고 하며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의 철학은 조선 철학사에서 주류의 논의와는 사뭇 다르다. 그렇기에 그의 제자들은 조선 철학자에의 외곽선에 선 이들이 많다. 예를 들어 ꡔ토정비결ꡕ을 적은 토정 이지함(1517-1578)과 그 외 허엽(1517-1580), 박순(1523-1589), 서기(1523-1591)가 있다.


사상.

 서경덕은 ꡔ대학ꡕ에 등장하는 ‘격물’(格物)을 읽고 학문함에 우선을 격물에 있다고 하면서, 이것이 없다면, 독서가 소용없다고 한다. 그는 격물을 통하여 ‘리’의 본원(本源)에 통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성현의 경전을 읽기 보다 우선 격물을 통하여 깨닫고 그 이후에 성현을 경전을 읽어야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그의 학문함의 방법론이 되었다.

 서경덕 철학의 핵심어는 ‘기’(氣)이다. 이에 의하여 많은 연구가들은 그를 기론자, 기일론자 혹은 유기론자라고 정의하였다. 그에게 ‘기’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정이나 주희가 주장하듯이 기의 생명을 그는 거부하였다. 그는 이러한 그의 입장은 촛불의 예로 설명한다. 촛불이 타서 사라지지만, 그것은 엄밀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기가 연기로 변하여 사라지는 것이란 것이다. 그렇기에 연소란 초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기의 형태가 변화되어지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렇기에 그에게 기의 무화(사라짐)란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이렇게 기의 영원성을 주장하기에 그는 리가 앞서도 기가 뒤쳐진다고 하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성을 앞선다는 것은 불가능한 논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는 영원하면서 우주에 하나뿐인 단일성을 가진다. 그에게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기이며, 개별자의 존재 여부는 단지 이러한 기의 취산 여부일 뿐이라고 그는 믿었다. 기가 모여있으면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흩어지면 사라진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위의 촛불의 예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눈앞에 저 나무는 존재의 여부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엄밀하게 기가 모여서 나무의 형태를 이룬 것이고, 이것이 흩어지면 우리가 사라진다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서경덕은 기의 실체(體)와 작용(用)을 말한다. 기의 실체는 고유한 본래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것이고, 그 작용은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다. 그는 그의 실체를 초감각적인 것이라고 하며, 이를 선천(先天)이라 하고, 또 태허(太虛)라고도 한다. 이는 작용이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어떠한 감각도 넘어서 있다. 이는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에 하나 뿐인 그러한 기이다. 그리고 삼라만상은 이러한 기의 작용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삼라만상으로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세상, 즉 감각 세상을 후천(後天)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선천에서 후천으로의 전환을 그는 개벽(開闢)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이는 누군가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그 자체로 일어난 것이다. 기의 실체가 그 작용으로 모이고 흩어져 어떤 것을 이루는 것은 누군가에 의하여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인하여 그렇게 되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후천이란 선천의 내적 법칙에 의하여 다양하게 전개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추만 정지운     

들어가는 말.

 정지운(1509-1561)은 김정국과 김안국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익혔으며, 이들이 죽자 다른 스승을 모시지 않고, 스스로 독학하였다. 그의 문하에는 자신의 동생인 정지림과 처남이 안홍 등이 있었으며, 안홍이 그의 학통을 이어 받아갔다. 그의 학문적 수준은 이미 넓리 알려져 이황과 이항 그리고 김인후 등의 학자와 교류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중종 38년(1543)에 작성한 「천명도」와 「도해」가 있다. 


사상.

 정지운의 철학은 후에 이황에게도 영향을 주었으며, 권근 이후 그는 체계적으로 다시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규명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의 「천명도」이며 「도해」이다. 이는 권근이 「천인심성합일도설」를 작성한 이유와 같이 인간이 어떻게 하늘과 합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선행 작업으로 하늘의 존재론적 위상을 유명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천명도」이다. 정지운에게 하늘은 곧 리(理)이다. 리는 네가 덕을 가지는데, 그것은 원(元), 형(亨), 이(利), 정(貞)이며, 이는 각각 ‘시작함’과 ‘자라남’ 그리고 ‘여물음’과 ‘이룸’이며,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며 만물을 생성하게 한다고 정지운은 보았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천도(天道)인 것이다. 이러한 하늘의 운행을 통하여 하늘은 각각의 개별자에게 그 고유한 본성(性)을 받게 된다고 보았다. 간단하게 그도 전통에 따라서 성을 보편적 원리인 리가 개별자에 주어진 것으로 본 것이다. 성이란 하늘의 논리에선 개별자에 명한 것이고, 개별자로서는 하늘로 받은 것이다. 그러니 성과 개별자는 각각의 명칭은 다르지만, 모두의 이치는 하나의 리이다.

 하늘의 실체(體)는 모든 개별자에 성을 부여하는 리이며, 하늘의 작용(用)은 만물의 형태를 이루게 하는 기(氣)이다. 이와 같은 논리에 의하면, 리는 기의 실체이고, 기는 리의 작용이다. 그는 이렇게 리와 기의 관계를 실체와 작용의 관계로 설명한다. 이 세상의 모든 상이한 개별자는 하나의 실체인 리가 있으며, 이러한 하나의 실체의 상이한 작용인 기의 차이에 의하여 일어난 것으로 정지운은 이해했다. 그리고 인간과 다른 사물의 차이도 기의 차이로 설명하였다. 인간은 바른 사물 혹은 존재자보다 더 정하고 통한 기를 가졌으며, 다른 것은 편향되고 막힌 기를 가진 것이라 한 것이다.

 그에게 마음은 리와 기의 합성체이다. 그리고 리는 하늘의 네 가지 덕인 원(元), 형(亨), 이(利), 정(貞)을 네 가지 인간의 성과 함께 배열하여 이해한다. 즉 ‘인(仁)과 시작함’, ‘예(禮)과 자라남’, ‘의(義)와 여물음’ 그리고 ‘지(智)와 이룸’을 함께 두었다. 그렇기에 사덕은 리와 관련되는 것이다. 반면 칠정은 기와 관련된다. 이는 칠정을 태극의 오행과 병행하여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우주의 모든 개별자는 보편적 원리인 리로부터 그 고유한 본성을 받은 것으로, 존재론적으로 우주의 보편적 원리인 리와 개별자의 원리인 성은 병행한다고 보았다. 태극은 우주의 원리인 리이며, 이러한 리가 개별자에 부여한 것이 성이라면 이들은 존재론적으로 구별되어지지 않으며 단지 논리상 구별되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태극 가운데 어떤 규정이 없듯이 성 가운데 그러한 것이 없게 된다. 하지만 태극에서 음과 양 두 기가 나오듯이 선악이란 규정은 마음이 발한 후에 가능하며, 이 이전에 인간의 본성은 선악으로 규정되어질 수 없다. 마음이 발한 후에 기가 작동하여 인간 본성, 즉 성을 가로막음으로 선악의 규정이 가능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선악의 문제는 기의 문제이다. 마치, 태극과 음양이란 양기의 관계와 같이 말이다.

 이러한 논리 속에서 그는 경(敬)을 강조한다. 경으로 우주의 보편적 원리인 리에 준하여 행함에 인간 수양의 목적이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논의는 이황에게 영향을 준다. 이황은 리와 기의 관계에 관한 논의에서 정지운과는 다른 논리를 전개한다. 정지운은 리와 기를 실체와 작용의 관계로 이해함으로 일원론적인 면을 강조하였지만, 이황은 리는 장수와 같고, 기는 그 졸개와 같다고 하여, 이원론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황의 논의를 참조하기 바란다.


율곡 이이

들어가는 말.

 이이는 이황만큼이나 조선의 유학사를 논함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다. 그의 어머니는 조선사의 여인 중에 가장 두드러진 인물인 사임당 신씨이다. 그는 어려서 6년 간 어머니에게서 사서(四書)와 유학을 익혔으며, 13세의 나리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21세에 한성시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다음에 결혼하였다. 그는 대선배이며, 시대의 스승인 이황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서신을 주고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학문적 성과는 이후 이황계열의 성리학과 이이계열의 성리학으로 조선 성리학을 양분할 수 있을 정도로 역사의 중심에 머물게 된다.


사상.

 그의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이곳에선 성리학사에 주된 자리에 있는 리기론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황은 리와 기를 마음 가운데 하나의 사물(一物)과 같이 여긴다고 이이는 본다. 리와 기는 서로 다르고, 이것이 서로 사단과 칠정과 따로 관련된다. 이이는 이황의 논의가 리와 기의 실재적 구분에 근거하여 사단과 칠정을 구분하였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이에 대한 반론을 전개한다. 이러한 이황의 사고는 리기 이분법에 근거하여 인심과 도심을 철저하게 구분한다. 그리고 인심은 인욕과 관련된 것으로 버려야할 것으로 여겼으며, 오로지 도심으로 돌아가야 함을 주장하였다. 즉, 이는 철저한 이분법적 사고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권근에서 이황에 이르는 노선의 주장이며, 흔히 주리론이라 불리는 사유형태의 내용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이는 리와 기의 이황적인 구분을 의심한다. 이이는 이황의 리와 기의 구분은 리의 기가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리기불상리(理氣不相理)라는 성리학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이는 만일 주자 역시 이황과 같다면 그도 틀렸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리과 기에 관한 이황의 반대는 리와 기에 관한 실재적 구분의 반대이고, 이는 '사단'과 '칠정'의 논의에도 적용될 수 있으며, 인심과 도심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러면서 그는 인심과 도심, 즉 리와 기에 의한 인심과 리인 도심은 오직 하나의 마음의 가변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둘은 서로 완전히 구별되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러한 것은 도심을 강조하며, 리를 강조하는 주리론과 대조하여 주기론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이황의 노선이 리와 기를 구분하여 리를 강조한 것에 비하여, 이들은 리와 기의 구분에서 이황의 노선과 다른 길을 간다. 도심의 강조인 주리론과 달리 이들은 인심과 도심을 하나의 마음이라고 한다. 이러한 논의는 주리론에 비하여 기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기에 이들을 주기론이라 한다. 하지만 이이의 논의를 ‘기’만을 강조하는 주기론이라고 이해하는 것을 잘못이며, 이황에 비하여 기를 강조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바를 것이다.

 그는 이황과 달리 인심이든 도심이든 리와 기로 되어있는데, 마음이라는 구체적 경험 사실로 발용하는 것은 어느 경우에나 ‘기’라는 것, 즉 기의 드러남이 선의 방향이라면 도심이고, 그렇지 않으면 인심이라고 한다. 즉 기의 드러남에 의하여 인심과 도심이 구분되어지는 것이지 인심과 도심이 존재론적으로 혹은 실재적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이의 논의는 이후 이이의 노선에 선 자들에게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7. 17세기 조선의 철학자들.


농암 김창흡

들어가는 말.

 김창흡(1651-1708)은 “인물동이성론”의 첫머리에 선 인물이다. 이 문제는 우주의 보편적 원리인 리(理)가 기(氣)에 주어져 개별자의 성(性)이 되어진다는 성리학의 논리에 따르면 인간과 사물의 성은 동일한 것이 된다. 단지 개별적 차이가 기에만 한정된다면, 인간과 사물의 본질적 차원에선 차이가 없다는 논리가 되는 것이다. 이황은 인간과 사물 사이에서 리의 측면에서 차이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인간과 사물의 차이는 어떻게 생기는 것인가? 이것이 조선 성리학의 핵심 문제 가운데 하나인 인물동이성논쟁의 내용이 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에서 김창흡은 시작에선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노론과 여러 가지로 관련되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핵심인물인 김수항이었다. 또한 그의 형 김창집은 임인사화에서 희생된 노론의 인물이었다. 그리고 노론의 인물인 송시열을 만나 수 십 년 간 교류하였지만, 많은 영향을 받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 자신은 자신의 장인인 이단상의 문인이라 한다. 그는 낙론의 문을 연 인물이며, 그의 논의는 이재에 의하여 계승되어 낙론의 문이 본격적으로 열였다. 하지만 그 자신의 논의는 난론의 논의와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에 대하여 다루어보자.


사상.

 낙론(洛學)은 인간과 사물의 성이 동일하다고 보았으며, 호론(湖學)은 인간과 사물의 성이 다르다고 보았다. 그러면 낙론의 시작에 영향을 준 김창흡의 입장은 무엇인가?

 그는 기본적으로 이이의 노선에 선 철학자이다. 그도 기호학파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호학파의 한계를 김창흡은 피해야했다. 이이의 노선은 리의 주재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리가 어떤 형태든 기에 의존한다는 논의는 마치 기대승의 논의와 같이 리가 그저 기의 단순한 법칙이 되어버릴 위험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황의 노선에선 이이의 논리를 결코 수용하지 않았다. 이이의 노선, 즉 기호학파에 선 김창흡에게도 이러한 한계는 극복의 대상이었다. 이런 김창흡은 부분적으로 이황의 논의를 수용한다. 이러한 김창흡의 논의는 사단칠정의 논의에서 드러난다. 그는 사단과 칠정을 각각 주리와 주기로 해석했다. 이이는 맑은 기에서 발한 것은 선이며, 탁한 기의 발은 악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선악에 관한 이러한 이이의 논의에서 선악은 기에 의하여 결정이 되며, 리는 단지 수동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여기에서 리의 역할은 상실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김창흡은 리가 규정되지 않은 것이기에 규정됨에서 기를 타지만, 기도 리의 명령을 필요로 하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그는 이이에 온전히 기울어지지 않으며, 이황의 논의를 부분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그는 성은 리가 기에 부여될 때 나타나는 것이라 한다. 보편적 리가 개별자 가운데 주어질 때, 즉 성이 가능한 것이다. 개별자는 리와 기의 합에서 가능한 것이며, 기가 없다면 개별자는 사라지고, 개별자에 주어진 리인 성도 사라진다. 이것은 단순한 논리이다. 여기에서 인물동성은 인간과 사물의 성이 같다는 것이다. 성이 리에 개별자에 주어진 것이라면, 성은 존재론적으로 리와 병행하는 것이고, 이렇다면, 리가 각각의 개별적 차이를 가지는 기에 따라 주어진 성도 리와 같이 같다는 것이 귀결될 것이다. 인간성(人間性)과 물성(物性)은 보편적 원리인 리가 차이를 가지는 각각의 기에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기의 차원에선 서로 다르지만, 리의 차원에선 같은 것이며,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인물동성론의 핵심이다. 반면 인동이성론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전개한다. 리가 부여될 때, 그것을 수용받은 기는 그것을 제대로 구현할 수도 있지만, 구현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러한 차이는 성의 차이로 이어진다. 성이란 기가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 아닌가. 그렇다면, 기의 차이는 곧 성의 차이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호론, 즉 인물이성론은 성은 곧 기에 내재한 리라고 하면서, 기의 차이에 따른 성의 차이를 말한다. 반면 낙론, 즉 인물동성론은 성은 곧 리라고 한다. 이러한 차이에서 호론은 인간성과 물성을 그리고 중화와 오랑캐 그리고 성인과 범인은 존재론적 차이를 가진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낙론은 성인과 범인의 본질적 본성은 차이가 없다고 본 것이다. 낙론의 논의는 남인과 소론 그리고 소북의 인물들이 수용하여, 탕평을 논의하는 기초가 되었다. 낙론에 의하면 모든 인간의 본성은 동일하게 선하다.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인간 본성의 회복을 통하여 사회의 평화가 가능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평등으로 이어지고, 타인에 대한 포용으로 이어져 탕평이란 정치적 행위의 존재론적 근거가 된 것이다.

 김창흡에서 이러한 논의는 그저 동일한 문제의 상이한 측면에로의 다가감의 차이뿐이다. 기질의 차이에서 보면, 인간 본성은 다르다고 여겨지지만, 리의 통일성이란 관점에서 볼 때 인간성과 물성은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인간성과 물성의 논의는 이중적인 관점을 가진다고 보았다. 이는 오랜 시간 그가 초지일관 유지한 태도이지만, 그 강조점에 있어서 초기의 「상우재문목」을 제외하면 리의 통일성에 의한 관점에 더 무게를 두었다. 이러한 논의는 이후 호론의 한원진과 낙론의 이간등의 논의에서 더욱 더 분명하게 갈라져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8. 18세기 조선의 철학자들.


남당 한원진

들어가는 말.

 남당 한원진(1682-1751)은 호론의 대표적 인물이다. 경기도와 황해도 남부 그리고 충청북도 북부, 즉 기호 지역에서 일어난 호락논쟁에 있어서 한원진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그를 통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된 논의 가운데 하나인 인물동이론에 대한 논의, 즉 호락논쟁을 이해해보자.


사상.

 한원진은 인간과 사물은 서로 다른 성을 가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에서 인간 사이의 인간성도 서로 다르게 이해하였다. 여기에서 중화와 오랑캐의 인간성이 서로 다르고, 성인과 일반 백성의 인간성이 서로 다르다. 반면 낙론은 리가 주어진 것이 성이라면, 리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보편적인 것이기에 그것이 주어진 성도 차이가 없어야한다고 본다. 즉, 하나의 리가 서로 다른 것에 주어진다고 해도 리이며, 이러한 주어진 리가 성이라 부른 것을 감안한다면, 모든 존재하는 것의 성은 존재론적으로 동일하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한원진의 생각은 달랐다. 그렇지만 호론의 관점에서 성의 동일성은 부정될 수 없기에, 한원진은 전혀 다른 근거에서 시작한다. 즉 마음은 기질(氣質)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호론이 마음은 기의 정상(精爽)이라고 한 것과 분명히 다른 것이다. 호론은 기의 근원이 되는 것이지 마음이 기질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렇지만 한원진은 마음은 기질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한원진에 의하면 마음은 기이며, 그 기의 차이에 의하여 인간의 다양성이 가능하게 된다. 한원진과 같은 호론에 의하면 만물의 본질적 성인 리는 동일하지만, 그 기질의 성은 서로 다르다. 그러한 기질의 본성에 다른 이유에서 서로 다른 개별자들이 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질이란 부여받은 기가 서로 같지 않고 다르기에 그 가운데 리도 동일할 수 있으며, 서로 다르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즉 서로 간의 리는 절대 동일할 수 없다는 것이고, 성이란 것이 부여받은 리라고 한다면 성도 결코 같은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니 일반인과 성인의 성이 같은 수 없고, 중화인과 오랑캐가 같은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왜 한원진과 같은 호론의 인물들은 서로의 본성이 다르다고 한 것인가. 그것은 그 당시의 사회상을 이해해야한다. 낙론이 평등에 의한 ‘탕평’을 기반으로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려 했다면, 호론은 반상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이를 통한 사회의 기강을 통하여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려 한 것이다.


성호 이익

들어가는 말.

 이익(1681-1763)은 조선 후기 실학 사상의 태동에 선 인물이다. 그는 성리학적 논의를 가지고, 공리론적 논의를 구사해간다. 이익은 실생활에 있어서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의 철학적 근거를 마련하고, 이를 학문으로 구현하려 하였다. 이러한 그의 논의는 후기 주자체적인 서구 학문의 유입으로 이어진다. 그런 역사적 흐름에서 그의 이해와 그의 위치는 결코 작은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상.

 이익은 리는 장수와 기는 병사라는 것을 수용한다. 여기에서 리는 형이상의 존재이다. 그리고 기의 작동 행위의 원인이다. 그렇기에 그는 리의 능동성을 강조하였으며, 주리론적 논의를 구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기의 재질과 리의 재질을 동등한 차원에서 다루었다. 여기에서 기의 재질이란 모이고 흩어지고 맑고 탁하고 한 편으로 쏠이고 아니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의 재질만으로 질적이고 양적으로 서로 다른 개별자의 구체적 차이를 설명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이익은 기의 논의를 더욱 더 심화시킨다. 기는 물(物)과 형(形) 그리고 질(質)로 구별되어진다. 물은 하나의 그릇(器)으로 이는 형이상의 것인 도(道), 즉 리가 있어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릇은 질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질은 사물의 재질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형이 있다. 형은 눈이 사물을 볼 때 드러나는 것이다. 즉 외형을 규정하는 것이다. 인간을 설명함에 있어서 형은 그 한 몸을 구성하는 기로써 대기(大氣)이며, 질은 각각 기관의 기능과 그 작용을 규정하는 기이며, 이는 소기(小氣)이다. 대기와 소기는 종의 상위와 하위의 차이가 아니라, 그 기의 작용 범위의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는 우주론적 논의로 이어진다. 대기는 사물이 소멸하면 태허로 돌아가는 것이며, 소기는 사물의 소멸과 동시에 소멸되어지는 것이다. 이익은 이렇게 기의 논의를 매우 분석적으로 들어간다. 한 사물(物)이란 기는 리 혹은 도가 주어진 그릇이다. 이러한 사물은 그 재질을 규정하는 성질(質)이란 기와 그 외적 형태를 규정하는 형태(形)이란 기를 가지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기의 차이로 각각의 사물이 가지는 차이를 설명한다. 그리고 리는 장수이며, 기는 병사와 같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리의 작용을 인정한다. 이는 곧 성의 작용을 인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성이란 개별적 상황에 주어진 보편적 법칙인 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精)은 성의 발이다. 또한 사단과 칠정은 모두 정이다. 그러면 논리적으로 어떻게 되는 것인가? 사단과 칠정이 다 성의 발현이라면, 성은 리와 관련되고, 리는 순선한 것이다. 그렇다면 칠정이 순선하다는 귀결이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이익은 이를 거부한다. 그도 칠정은 순수하게 선한 것이 아니다. 그러면 칠정은 어떻게 정의 하나이며, 성의 발이면서 순선하지 않을 수 있는가? 사단을 이익은 공(公)이라 하면서, 이는 나의 입장에서만 보지 않고 공공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칠정은 사(私)라고 한다. 이는 나의 사사로움과 관련된 것이다. 여기에서 칠정이 순선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본래적으로 불선한 것이라서가 아니라, 정의 근거인 성이 발하여 움직일 때, 그것이 ‘사’, 즉 나의 사사로움과 관련되어 그곳으로 치닫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익은 전통적으로 맹자가 말하는 이득(利)을 구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을 사사로운 이득만을 구할 것은 아니지만, 이득 자체를 멀리해서는 안 된다고 해석한다. 그러면서 이득과 정의(義)를 모순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오히려 ꡔ주역ꡕ을 인용하며, 정의의 화(和)가 곧 이득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그는 사사로운 이득은 멀리할 것이고, 공공의 이득은 정의의 화이라 한다. 이는 사단을 ‘공’(공공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칠정을 ‘사’(개인의 관점)로 이해한 존재론적 논의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리와 관련된 인간의 성이 순수하게 발하면, 이는 개인의 사사로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공공의 이로움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는 이익을 공리주의자라 불릴 이유가 되는 것 같다. 


윤지당 임씨

 서양 역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을 주해하고, 그들의 역사에 해박한 여인을 찾기란 힘들 것이다. 거기에 당시 철학적 주된 문제에 참여하여 스스로의 독자적 견해를 가진 여성을 찾기란 더욱 더 힘들다. 우리의 역사에 그러한 여인이 있다. 그녀가 함흥판관 임적의 딸인 윤지당 임씨(1721-1793)이다. 그녀는 살아 생전에 조선의 여인으로 평범하게 살았지만, 밤에는 철학적 문제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업적은 사후 ꡔ임지당유고ꡕ로 정리되었다. 그녀는 당시 철학계의 핵심적인 문제인 리(理)와 기(氣)의 문제뿐 아니라, 성(性)과 심(心)의 문제에 한 몫을 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학문적 성과는 그녀의 저서인 「인심도심사단칠정설」과 「심성리기설」에 담겨있다. 그뿐 아니라, 당시 사마 광의 역사관을 주희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논사마론공」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그 외 ꡔ대학ꡕ 7조와 ꡔ중용ꡕ 27조에 대한 경의(經義, 주해)를 적기도 하였다. 그녀는 이러한 철학자의 면모뿐 아니라, 효성에 지극하였으며, 일찍 남편을 여의고 가사를 도맡았다. 이에 낮에는 가사에 힘쓰고 밤에만 학업에 정진하였지만, 성리학에 있어 당시 대학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성과를 얻었다. 이런 의미에서 윤지당 임씨의 위상은 더욱 더 깊이 연구되어야할 것 같다.

 그녀는 성이란 마음(心)에 갖추어진 리(이치)이고, 마음은 성에 붙어있는 그릇이라고 한다. 즉, 성은 리이고, 마음은 성에 붙어있는 그릇이란 논리가 된다. 그리고 마음과 리를 두고 변화불측(變化不測)하는 것은 마음이고, 변화불측하게 하는 것은 리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마음과 성의 분리를 주장하는 이들에 반론을 제시하였다.


 

9. 19세기 조선의 철학자들.


화서 이항로

들어가는 말.

 이항로(1792-1868)는 비록 정계에서 활동하지 않았지만, 기호 노론의 후예이며, 그에 따라서 공자의 가르침은 주자를 걸쳐 송시열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그는 공조참판과 도총부부총관 등에 재수되었으나 현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힘썼으며, 후에는 조선 말기에 외세에 대항하여 국가의 정체성을 지키려한 척사운동에 참여하였다. 19세기 철학자로써 기정진, 이진상과 함께 주리론의 삼대가로 이후 조선과 대한제국의 철학에 영향을 주었다.


사상. 

 이항로는 호남의 기정진과 영남의 이진상과 함께 주리철학의 삼대가이다. 그는 태극에 대하여 단지 존재의 원인으로만 이해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하고, 태극의 능동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리는 기보다 앞서며, 리는 귀하고 기는 천하며, 리는 주인이고 기는 다스려지는 것이다. 이러한 리는 기에 명령하는 것이며, 기는 명령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리는 순수하게 선한 것이며, 기는 선하지 않은 것을 겸하는 것이다. 이러한 리는 그에게 존재의 원인이며, 동시에 도덕의 법칙이며, 도덕의 근거이다. 그러나 리와 기는 동시성을 가지는 것으로, 동시에 인식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치론 혹은 도덕론의 입장에서 리가 기에 앞서며, 근원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몸의 주체로써 인식의 주체인 ‘마음’(心)을만 보는 것도 거부하고, 기만으로 보는 것도 거부하고, 리와 기의 합성체로 이해한다. 그렇지만 그는 기에 비하여 리를 전체적으로 더욱 더 강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에게 리는 조선의 전통적 윤리 도덕과 정체성과 직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항로는 리를 명덕(明德)이라 하였다. 주희의 ꡔ대학중구ꡕ에 의하면,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어온 것으로 신령하고 어둡지 않아 모든 이치를 갖추고 모든 일에 응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명덕은 완전히 갖추어진 덕성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리는 존재의 근거이며, 도덕의 근거이다. 이러한 명덕을 이항로는 리라고 여겼다. 그의 리 강조의 철학은 자연스레 조선의 도덕적 정체성의 강조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리를 강조함으로 그는 조선 후기 일어난 외세에 의한 국가의 위협을 국가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철학적 입장은 척사운동으로 이어졌으며, 양헌수, 김평묵, 유중교, 최익현, 유인석과 같은 후기 척사운동의 주도자와 의병장들이 그의 제자이다.


한주 이진상

들어가는 말.

 이진상(1818-1886)은 기본적으로 퇴계학파에 속한다. 그렇지만 그 스스로 새로운 학파를 연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조선의 전운이 다하던 혼란의 시기를 살아간 인물이며, 중국의 주자학이 조선의 성리학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독자적 노선으로 이해되어가는 시기의 마지막을 살아간 인물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주리론은 후에 의병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졌으며, 학문적으로도 후기 성리학의 많은 학자들, 예를 들어 곽종석과 이승희 그리고 허유 등이 그의 제자이기도 하다. 그는 후기 조선 성리학의 독자적 노선의 하나로 조선 후기 성리학 이해의 필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상.

 이진상에게 리는 주인과 같고 기는 동정의 밑천(資)과 같은 것이다. 이는 마치 사람이 말을 타고 문을 들어오면, 사람이 주가 되고 그 말이 그것의 밑천 혹은 재료가 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리는 선후(先後)가 없으며 생멸도 없지만, 기는 선후도 있고 생멸도 있다. 그리고 리는 무형이며, 리를 존재하게 하고, 기에 의탁하여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리가 앞서 있고 기가 뒤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선 리가 기를 존재하게 하면 혹은 생하게 하면 리는 기 가운데 있지만, 리와 기는 분리될 수 없으며, 서로 썩이지도 못한 채로 있게 된다. 그렇기에 함께 있지만 이 둘은 두 개의 사물(二物)인 것이다.

 그리고 리가 기를 생하면 음양이 합하고 변하여 수화목금토의 오행(五行)을 낳는다. 리가 오행의 기 가운데 있데 되면 양(陽)에서는 건(建)으로 음에서는 순(順)으로, 목에서는 인(仁)으로 화에서는 예(禮)로 금에서는 의(義)로 수에서는 지(智)로 토에서는 신(信)으로 달라진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인의예지가 하늘에 있으면 원형이정, 즉 하늘의 근본 원리 혹은 하늘이 가지는 네 가지 덕이라 본 것이다.

 하늘이 음양오행의 네 가지 기로써 만물을 화생하여 리가 주어지면, 이 개별자에 주어진 리가 성이 된다. 따라서 성은 곧 리이며, 리가 음양오행에 주어질 때 인의예지가 있기에 리가 성이 되면다면, 성을 가진 만물은 인의예지의 성을 가지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은 맹자가 성선설의 성이 되며, 본연지성, 즉 본질적 본성이 된다. 성이 발하지 않고서는 기와 관련됨이 없기에 순수하게 선하며, 이미 발하면 기질과 관련되어 그것의 맑고 탁함 등의 차이를 가지게 된다. 본연지성은 이러한 것이며, 반명 기질지성이란 본연지성이 기질의 개별적 차이에 의하여 달라져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본연지성, 즉 우리의 본질적 본성은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기질을 떠나서 있지 못하기에 논리적으로 본연지성은 아직 발하지 않은 본체이며, 기질지성은 이미 발한 작용이라 할 수 있겠다. 

 개별적 사람은 형기(形氣), 즉 어떤 형태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사(私), 즉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자신만의 상황에 적당한 대상을 생기게 된다. 마치 귀의 사가 소리이고, 눈의 사가 색이며, 코의 사가 냄새이고, 입의 사가 맛이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에 마음의 외부에서 일어나 마음의 영(靈)이 이를 쫓아, 지각함이 형기를 따르면 인심(人心)이다. 그러나 군신(君臣)과 부자(夫子)와 장유(長幼)와 부부(夫婦)와 붕우(朋友) 등과 같은 천성, 즉 리를 따라 마음이 동하여 지각이 리를 쫓아가면 이는 도심(道心)이다.

 그리고 그는 마음의 실체를 인의예지라고 한다. 즉 인간 마음은 곧 리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리가 없이는 마음이 다른 것에 비하여 귀할 것이 없으며, 사람과 금수의 차이가 없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심은 곧 기라고 하는 것을 거부하고 심은 곧 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황의 「심통성정도」에서 이황이 심을 리와 기의 합이라 한 것을 심을 리라고 해석하는 것이 이황에 대한 바른 해석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리와 기가 함께 있음은 옥과 돌이 같이 있음이며, 리만이 진정한 마음이고, 리가 아직 발하지 않은 성과 리가 이미 발한 정을 주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도덕 철학에서 정직(直)이란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인간이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인간성에 충실해야하고 이것은 곧 리에 충실해야한다는 것, 즉 이성에 충실해야한다는 것이 성리학의 기본이다. 그것이 이것이 바로 정직의 정립과 관련된다. 리는 존재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도덕의 근거, 즉 당위의 근거이다. 당위, 마땅히 해야할 것을 하는 것, 즉 리를 따라 행위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 정직이 이루어진다. 이진상은 정직을 존재론적 근거 위에 정의한다. 인간이나 자연만물이 존재의 근거인 리로 존재하게 되며, 이것은 자연의 법칙인 리에 마땅히 수긍하며 살아가야하며, 이로써 그 본성에 충실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정직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정직이란 바로 인간 본성에 충실함에 일어나는 것이다.


만구 이종기

들어가는 말.

 만구 이종기(1827-1902)는 이황 이후 리기론의 정통적 흐름을 심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유치명과 이상정의 아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어려서부터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가진 이로 평가받았다고 한다. 또한 조선 말기 영남에서 일어난 척사운동에 한 몫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조선 말기 대표적인 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김흥락은 임종시 그를 한번밖에 보지 못한 것을 탄식했다고 한다. 그의 제자는 200여명에 이르며, 그의 제자로는 안현제, 허채, 이병희, 조용섭과 김병린, 그리고 문박 그 외에 조용섭과 오인순 등이 있다. 또한 독립운동가인 신규식과 김창숙 등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그는 의문부도사로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허명(虛名)으로 임금을 속일 수 없다고 이를 거부하였으며, 서락서당을 지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리고 도산서원의 원장이 되어 200여명의 제자들을 길렀다. 이로 볼 때, 그는 우리가 그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보다 조선 후기 더욱 더 뛰어난 위상을 가진 철학자임을 확인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상.

 그는 글을 남기기 좋아하지 않아 그리 많은 글을 접할 수는 없으나 그의 문집을 통하여 그의 성리학적 논의에 접근할 수 있다. 그의 리와 기에 관한 이해는 「사칠기발이승지변」과 「이기선후주종현전설」 등의 글을 통하여 접근할 수 있다. 그는 주리론과 주기론에 의하여 나누어지는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려고 하였으며, 이러한 논의를 회의하였다. 그런 그의 철학이 근거하는 것은 이황의 리발기승(理發氣乘), 즉 리가 발하면 기가 그 위에 탄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리와 기가 다 같이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다만 리가 기에 앞설 뿐이란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리만을 강조하여 기를 무시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이런 주리론적 사고의 극단을 회의하면서, 절대적으로 리와 기의 선후가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대적으로 그 선후가 가려진다고 보았다. 그는 리만을 오로지 강조하여 사고하는 학문의 경직성을 회의하며 그렇게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성리학적 논의만큼이나 그의 사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가 당시 바라보는 조선이란 국가의 주체성 문제이다. 그는 미국에 의존하여 러시아를 방비하자는 논의에 대하여 국가의 방비는 본질적으로 자체적 부국강병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부국강병은 재용(財用)을 아끼고, 군가를 기르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현실의 구체적 문제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일본과 강화한 뒤 부산에 화륜선(火輪船)이 들어와 우리와 무역을 한다고 하면서 우리를 농락한다고 적고 있다. 무역의 결과 영남은 경제적으로 궁핍해지고 있다고 하였다. 이로 볼 때, 그는 조선이 혼란한 국제 정세에서 국가의 주체성을 강조한 듯이 보인다. 사실 성리학은 우주론적 사고를 통하여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풀어 가는 것이다. 그리 본다면, 성리학은 곧 정치철학이며 윤리학이고, 철학적 인간학이다. 이러한 논의가 하나의 논리 속에서 다루어지는 것이다. 우주론적 논의는 결국 인간의 문제로 이어지고, 인간의 문제는 종국에 국가 가운데 스스로의 위치에 충실함으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스스로에게 충실하기 위해서는 보편적 리에 충실해야하고, 이러한 충실함의 기준은 왕에게 충심(忠心)을 그리고 부모에게 효심(孝心)을 다하는 것이기에 말이다. 그러니 인간의 문제는 자연스레 국가의 문제로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귀결은 성리학을 우주론에서 시작하여 인간학을 걸쳐 국가학으로 이어지게 한다. 역으로 국가가 무너지면, 인간학이 도덕을 완성을 터가 사라지는 것이 되고, 이리 된다면, 우주 가운데 스스로의 역할에 충실하기 힘들게 될 것이다. 이리 본다면,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이 독립운동을 하고, 척사운동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애국심 이전에 스스로의 학문에 충실한 지식인의 모습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종기도 이러한 조선 후기 철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간재 전우

들어가는 말.

 전우(1841-1922)는 조선의 마지막에선 가장 뛰어난 철학자 가운데 하나이며, 그는 조선의 마지막에 스스로의 이름이 붙은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이이와 송시열을 이은 기호학파의 학맥을 이어갔지만, 그것을 넘어서 간재학파라 불리는 학파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그가 살아간 시기는 조선의 국운이 마지막을 향하여 나아가던 시기이며, 조선의 성리학이 한반도에서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존재하던 것도 서서히 마감되던 시기이다. 헤겔의 변증법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주리론이란 테제에 성립하여, 그것의 안티테제인 주기론이 등장하였다면, 조선의 마지막엔 이것에 대한 합(合)이 등장해야한다. 그리고 그러한 논의는 실재론 조선의 마지막 그리고 대한제국의 시기와 대한민국의 성리학에서 볼 수 있는 흐름이 된다. 전우는 주리론과 주기론의 절충을 모색한다. 즉 전우는 ‘합’을 모색한 것이다. 그는 권순명과 같은 제자가 있었으며, 그 외 많은 그의 제자들이 그 이후 한국학 연구에서 활약하였다.


사상.

 전우는 이황이 이야기하는 리의 능동성을 부정한다. 그러면서 그는 리는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다고 한다(理無爲). 그는 리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것은 리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이 및 기정진은 이와 달랐다. 기정진은 동정하는 것은 기이고, 동정하게 하는 것은 리라고 보았다. 그는 기가 동정하게 하는 작용인으로 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우는 리의 동정을 부정하며 그 무위성을 강조한다. 그에게 리는 존재의 근원이며, 가치의 근원이다. 즉 리는 사물이 생하게 되는 혹은 존재하게 하는 근원이다. 반면 기는 생하는 것이다. 전우의 생각에 따르면, 리는 순수하게 선한 것이며, 악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 세계에선 절대적 선이나 보편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차별적 모습을 가지며, 선과 악이 있는 세계이다. 그런데 리는 절대적 선이며, 기는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만약 리가 작용하는 것이라면, 이 현실 세계는 선만이 가득해야한다. 그렇기에 그는 현실 세계를 넘어선 리의 부동성과 보편성을 강조하며, 현실 세계는 기로 인하여 선도 악도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유에서 리의 절대성에 근거하여 무위성을 주장한다.

 전우는 성존심비설을 주장한다. 즉 성은 귀하고 마음은 천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음을 비천하다 하는 것은 성에 비하여 낮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에게 성은 무위하며 순선한 것이며, 존귀한 것이다. 이러한 성은 인의예지의 덕목과 관련되는 것이다. 반면 마음을 몸의 주체라고 하는 것은 이항로나 이진상과 같이 마음을 리와 관련하여 그렇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주제되는 것을 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고 한다. 마음이란 성을 근본으로 하여 기를 주제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성을 근거로 한 몸의 주체가 되는 것이 마음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성존심비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면우 곽종석

들어가는 말

 면우 곽종석(1846-1919)은 조선 말 탁월한 성리학자이다. 그는 19세 대구감영에서 열린 향시에서 급제하였고, 다음해 서울에 올라가 회시(會試)에 응시하기도 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이진상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제자이기도 하다. 이진상에 대한 그의 존경은 그가 직접 지은 이진상의 행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조선의 비참한 상황과 국권의 회복을 염원하는 장서를 적어 만국회의에 전달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왜국 헌병에게 잡혀 대구지방법원에서 2년형을 받았다. 

 그는 학파에 매이지 않고 많은 이와 교류하였으며, 천 여명에 달하는 많은 제자를 남겼다. 그 가운데 그의 영향을 받은 이인재는 서양 철학을 우리 민족에 처음 체계적으로 전한 ꡔ철학고변ꡕ의 저자이다. 그는 서양 사고에 대하여 무조건 거부하지 않고,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이 그의 제자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상.

 곽종석의 학맥을 우선 살펴보자.


이황-김성일-장홍효-이현일-이재-이상정-유치명-이원조-이진상-곽종석


 여기에서 곽종석은 영남에서 이황의 영향 가운데 철학을 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퇴계의 학파는 리는 순수하게 선한 것이며, 기는 선악이 혼재한다고 하는 측면에 강조점을 두었다. 곽종석도 리의 주재성을 강조하며, 리는 단순히 존재의 근거만이 아니며, 기를 주재하는 능동성을 가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한 리는 이황 이후의 논의와 같이 존재의 근거 혹은 원리(所以然)이며, 또한 당위의 근거 혹은 도덕의 근거(所當然)이라 본 것이다. 그러한 곽종석은 순선하지 않은 기가 아닌 리를 학문의 중심에 두었다.

 곽종석은 인간의 마음을 리라고 했다. 이로써 그는 마음이 리와 기의 합이라고 하여, 동시에 순선하며, 동시에 선악의 가능성을 가진다는 모순을 극복하려 하였다. 마음의 지각은 사물로서가 아니라 능동성으로 기를 통재하는 리라고 보았다. 그리고 성은 리가 아직 발하지 않은 것(정)이고 정은 이미 발한 것(종)이고 마음은 리라고 하면서 리의 개념으로 동과 정을 관통하여 이해했으며, 이는 곧 마음으로 이를 관통하여 이해했다는 말이 된다. 마음은 기와 논리상 구분되며 순수하게 리적 존재이며, 이러한 마음이 본질적인 마음이다. 즉 순수한 마음은 리이며, 사단과 칠정은 모두 리의 발현이라고 했다. 그는 사단과 칠정 모두 하늘의 리가 발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사단과 칠정이 구분되는 것은 사단은 리가 기를 타고 발한 것이고, 칠정(곽종석은 이를 더욱 더 나누어 십정이라고 함)은 리가 기를 타고 생긴 것이기는 하지만 그 곁에서 생긴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리라는 개념을 중시여겼다. 마음은 곧 리이며, 이러한 리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마음이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어야했다. 이러한 곽종석의 존재론적 사유와 도덕론적 사유는 강한 실천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강한 실천적 논의가 그의 조선 독립의 욕구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10. 20세기 조선(대한제국)의 철학자들.


심재 조긍섭

들어가는 말

 심재 조긍섭(1873-1933)은 곽종석과 이종기와 장복추 그리고 김흥락 등을 찾아가 학문을 익혔다. 1910년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학문과 저술에만 종사하였다. 그리고 그해 동서의 사상을 비교하여 적은 ꡔ곤언ꡕ을 적었다. 1914년 허원식의 ꡔ삼원당집ꡕ 서문에서 최익현을 비난하자, 이에 논쟁을 하였고, 1919년 3월 일본총독과 동포에게 보내는 글을 적다가 적발되어 17일간 구속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후 1928년 구계서당을 지어 학문을 전하며 남은 일생을 지냈다.


사상

 조긍섭은 곽종석에게서 배우기는 하였지만, 심즉리(心卽理), 즉 마음(心)은 곧 리라는 것을 논박하며, 심을 리와 기의 합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이러한 그의 성리학적 입장은 이진상의 심즉리설을 조목조목 논박한 ꡔ독심즉리설ꡕ을 통하여 익힐 수 있다. 마음은 리와 기의 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논리상 기가 없이는 마음도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다고 그는 리와 기라는 두 가지의 것에 의하여 더해진 것으로가 아니라, 리와 기의 합을 마음이라고 할 때, 마음의 통일적 파악을 강조하였다. 즉 두 가지의 것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하나의 것으로 파악해야한다는 것이다. 또한 전우가 성을 존귀하고, 마음은 비천하다고 하는 성존심비설을 논박하며, 마음은 온 몸의 주인이고, 모든 이치의 오묘함이라 하여 왕에 비유하였다. 그는 사단과 칠정에 관하여 사단은 정서(情緖)와 관련해서 그리고 칠정은 감정(感情)과 관련해서 이해하였다. 그는 사단이 있기에 인간이 귀하다고 하며, 그렇기에 인간의 정(情)이 칠정과 다르지 않다면, 금수와 구별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이성의 작용인 사단이 없다면 도덕이 근거할 수 없다고 하면서, 사단은 리와 관련된 정서이고, 칠정은 기와 관련된 감정이라고 하면서, 인간의 정서와 그 감정을 구분하여 사고하였다. 리는 선하며, 이러한 리(理)가 개별자에 주어진 것이 성(性)이며, 이러한 이성(理性)은 그렇기에 선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이성의 작용인 사단, 즉 측은, 사양, 시비, 수오, 시비은 논리적으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인간성의 작용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단은 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사단은 리와 관련되어 사고되어질 수 있으며, 이는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는 기질에 근거한 칠정과는 구별되어야한다는 생각이 조긍섭의 내면에 있었던 것이다.   


양재 권순명

들어가는 말.

 권순명(1891-1974)은 고부출신의 20세기 성리학자이다. 그는 전우의 제자이며, 그의 철학을 이어갔다. 또한 그는 일제시대 왜경(倭警)에 의하여 장발이 삭발 당할 위험에 처해지자, 스스로 장도로 목을 찌르매 왜경이 그의 의지에 감복하여 건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성리학을 연구하여 후진을 양성하는 것에 힘을 기울였다.


사상. 

 그는 조긍섭 등이 성심구존설(성과 마음이 함께 귀하다는 것)으써 전우의 성존심비설(성은 귀하고 마음은 이에 비하여 천하다는 것)을 비판한 것에 대하여, 전우의 입장에서 다시 비판하였다. 그 내용은 성과 마음은 동시에 근본이 되지 못하며, 하나에 기울이면 다른 것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진상이나 이항로 등이 주장하였으며, 조선 후기 철학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마음은 곧 ‘리’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또한 인물성동론에서 그는 인간과 사물의 성이 동일하다는 낙론의 견해를 지지하였다. 그의 존재는 조선 성리학이 역사상 어디까지 진행되어졌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11. 조선의 철인 정치가, 인간에 우주를 담는다.


철저한 철인 정치의 시대, 조선.

 플라톤은 그의 ꡔ국가ꡕ에서 철학자에 의한 국가의 경영을 주장하였다. 철학자는 우주의 근본 원리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인물이며, 이러한 철학자에 의한 국가 경영을 주장한 것이다. 플라톤의 이러한 논의와 비록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조선은 철저한 철인 정치자, 즉 철학자이며 정치가인 이들의 시대였다. 이황과 이이 그리고 정몽주와 정도전 그뿐인가 조선의 많은 경우는 철학자이며, 동시에 정치가이다.

 조선은 우리 민족에 주자학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이에 근거하여 성립한 국가이다. 즉 주자학 혹은 성리학이란 철학적 사유로 무장한 이들에 의하여 성립한 국가인 것이다. 이는 정도전과 권근과 같은 철학자는 조선 건국의 주력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정도전은 성리학에 기초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권근은 조선 성리학의 기본적 흐름을 마련하였다.

 예를 들어, 영조 시대 등장하는 탕평책(蕩平策)이 그러한 것이다. 이 시대는 조선의 철학적 사유인 성리학도 중국의 틀을 넘어선 독자적인 색을 분명히 한 시대이다. 이미 이황과 이이와 같은 거장이 조선의 성리학을 최고봉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대에 낙론과 호론이 등장한다. 이러한 논의는 철학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이다. 이 논의의 핵심은 모든 인간(사물)의 본성이 동일한 것인가 차이를 가지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즉 인물동이성론이 그 핵심에 있다.

 낙론은 인간과 사물의 성(成)을 동일하다고 한다. 이미 논의하였듯이 성이란 기에 의하여 ‘개별화된 리’일 뿐이다. 그렇다면 낙론에 의하면, 성이란 리와 존재론적으로 다르지 않다. 리란 우주의 보편적 원리이다. 이러한 리가 모든 것에 주어진 것이 성이라면, 리와 성은 차이가 없게 되고, 결국 성은 리가 된다. 그런데 리는 보편적 원리이며, 그렇기에 인간과 사물은 차이를 가지지 않는다. 이는 이미 위에서 논의한 바의 것이다. 그렇지만, 호론은 다르다. 이들은 비록 성이 개별화된 리일지라도, 그것에 기에 의하여 차이를 가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역시도 이미 위에서 다루었다. 낙론의 논리에 의하면 양반과 천민, 중화와 오랑캐는 그 본성에 차이가 없다. 하지만 호론의 논리에 의하면 양반과 천민, 중화와 오랑캐는 그 기질(氣質), 즉 기에 의하여 차이를 가진다. 한마디로 호론에 의하면 천민과 오랑캐는 기질이 좋지 않은 것이고, 양반은 좋은 것이다. 낙론은 사회의 평등과 열린 맘으로 사회와 국제 사회를 보려할 것이다. 반면 호론은 상당히 보수적인 눈으로 세계를 이해할 것이다. 일면 호론이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당시 임진왜란 이후 일어난 사회적 혼란에 대하여 호론은 강력한 국가적 위계를 분명히 함으로 평화를 유지하려 한 것이라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낙론은 전쟁 이후 신분 사회에 일어난 혼란에 적절한 것이 아닌가? 아니다. 낙론은 존재론적으로 모든 것의 성이 동일하다고 함으로 모든 것에 대하여 열린 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낙론은 탕평책의 철학적 기반이 되었다.

 호론은 위계를 강조하고, 이를 통하여 기준의 질서를 강조하는 정치적 성향을 가진다면, 낙론은 열린 맘으로 탕평의 입장을 가진 것이다. 호론은 신분 사회로 조선의 전통을 강조하였지만, 낙론은 이와 다른 길을 간 것이다. 이들이 조선 영조 시대에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조선 영조 시대에 탕평책이 존재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조선은 철인 정치가 구현된 국가였다. 그들에게 플라톤의 이데아를 대신하는 ‘리’가 있었으며, 그 리를 구현할 집단, 즉 우주의 도덕 법칙을 구현할 집단, 즉 선비집단에 의한 국가를 이루었다. 아마 인류의 역사상 조선만큼이나 강력한 철인 정치의 국가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조선의 근대화를 막았다고 일부는 말한다. 하지만 근대화의 의미가 서양 근대 시대에 대한 막연한 희구라고 한다면, 이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조선의 선비들은 서서히 자기 사고의 발전 가운데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였다. 예를 들어, 이들은 서양의 지식에 대한 고민하였고, 실재 처음으로 우리에게 서양 철학을 소개한 인물은 선비 집단에서 이룬 사실이다. 이들은 주체적 관점에서 서양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우리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타자를 통한 자기 긍정, 즉 타자를 통한 자기의 실현을 꿈꾸는 이들은 서양을 이상향을 보았다. 근대를 향한 계몽이란 이들에게 서구화된 사회의 실현이었다. 아마 이러한 논리가 일부 친일파의 논리가 될 것이다.

 철인 정치에 의한 조선은 철저하게 철학적 원리에 의하여 국가를 경영하였고, 이러한 하나의 철학에 대한 경직화는 새로운 변화에 흔들리고 말았다. 마치 13세기 이슬람에서 유입된 새로움이 서양의 사상계를 흔들었듯이 말이다. 서양과 달리 조선은 철인의 국가였고, 철학의 흔들림은 곧 국가의 위기였다.

 하지만 분명 조선은 몇몇 단점 가진다. 리의 강조, 즉 우주의 원리를 강조하고, 이 원리에 의한 인간과 국가를 강조하는 그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리는 곧 도덕적 법칙이었다. 도덕적 우주가 담긴 인간은 곧 도덕적이어야만 하며, 국가 역시 도덕적이어야 한다. 이 도덕은 과거 지향적이다. 도덕이란 인간 관계의 전통이며, 이 전통이란 과거의 유산이다. 그렇기에 너무나 도덕적인 국가는 너무나 과거 지향적인 국가이게 된다. 이것이 조선의 한계이다.

 조선의 철인 정치는 우리에게 조선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하여 줄 것이다. 그들은 우주의 원리를 인간에 담고 이로 인하여 국가를 경영하려 하였다. 인간은 작은 우주이며, 국가란 그러한 우주가 더불어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주, 인간, 국가가 하나의 범주 속에서 이해되고, 사고되고, 논의되었던 시대와 그러한 국가가 조선이다. 이것이 조선의 한 모습이 될 것이다.




글을 접으며...

2005년은 나에게 괴로움의 한해로 시작했다. 말못할 괴로움이 나의 손에 수갑이 되었다.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수갑... 누군가를 향한 믿음이 주는 수갑이라서 입에 문 열쇠가 있지만, 쉽사리 풀고 나서지 못했다. 이제 이 수갑을 푼다. 금새 풀어서 무엇을 할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난 수갑을 푼다. 당당하게 그리고 서서히 나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말이다. 이 글은 대학 시절 고민한 몇몇 단상을 해결하기 위하여 시작한 작은 메모들의 모음이다. 더 큰 무엇을 하기 위하여 당장 묶여진 손을 풀고 아직은 피가 통하지 않아 얼얼한 손으로 적은 작은 글이다. 이 글은 그래서 미완성이다. 왜냐면 내 손에 수갑의 흔적이 더욱 더 사라질 때, 그때로 완성을 미룰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스스로도 답답한 수갑의 흔적에 매일이 힘든 삶을 살면서...

우선 여기에서 다음을 기약한다. 


















【토마스 철학 학교 콜로키움은 현재 청소년과 대학생을 비롯한 관심 있는 이들과 함께 철학과 논술 그리고 학문의 역사를 공부하는 모임이다. 틀에 박힌 교육으로 일관하는 곳의 밖에서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오랜 시간 여운으로 남은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맘으로 학생들과 함께 하는 모임이다.】


토마스철학학교 콜리키움 총서

1. 토마스철학학교 성리학 콜로키움 - 인간, 우주를 답다.

2. 토마스철학학교 역사학 콜로키움 - 한민족사연구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