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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장의 고개넘기/허수한국학연구실의자리

도덕경 1장 읽기

 

『도덕경』 1장 이해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도덕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1장의 이해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많은 현대철학에 근거한 해석가들은 이 1장을 포스트모더니즘에 근거한 해체론의 입장에서 읽고 있다.1) 1장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그 이후 『도덕경』 이해와 해석에 틀이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만일 왕필의 관점에서 1장을 본다면 왕필의 관점을 가지게 될 것이고, 데리다의 관점에서 1장을 읽는다면 데리다의 관점에서 『도덕경』을 읽게 될 것이다. 심지어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이이 역시 『도덕경』의 풀이인 『순언』에서 주자와 그에 근거한 역학의 관점에서 『도덕경』을 읽어 내려가고 있다. 그러한 근거도 1장, 즉 도(道) 자체에 관한 이해에서 이이가 주자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2)

『도덕경』1장엔 도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다. 근본적으로 이 도란 말은 외국어로 번역하기 힘든 것이며, 하나의 단어로 누군가에게 전달하기도 힘든 그러한 단어이다. 예를 들어 『도덕경』의 독일어 번역인 Laotse TaoTeKing에서도 도를 그냥 음역하며 Dao라고 번역하고 있다.3) 즉 실상 독일어로 도의 번역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면 우선 그 1장을 번역해 보자.4)


필자 역>

1.도일 수 있는 도는 언제나 도는 아니다. 이름일 수 있는 이름은 언제가 이름이 아니다.

2.이름이 없는 것은 천지의 기원이며,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3.그렇기에 항상 바라는 것이 없음으로 그 오묘함을 보는 것이다.

4.항상 바라는 것이 있음에서 (되돌아가려고 하는) 그 마지막을 보는 것이다.

5.위 두 가지는 같은 곳에서 나와 이름이 다를 뿐이다. 이 둘이 같음을 두고 아득하다고 한다. 아득하고 아득한 것은 모든 오묘한 것의 문이다.


김학목 역>

1.어떻게 표현하든지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항상 된 도가 아니고, 어떻게 명명하든지 이름이라 할 수 있는 이름은 항상 된 이름은 아니다.

2.이름 없음이 만물의 시작이고,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미이다.

3.그러므로 항상 어떤 것도 하고자 하는 것이 없음에서는 그것으로 사물이 시작되는 미묘함을 살펴서 헤아리고,

4.항상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것이 있음에서는 그것으로 사물이 되돌아가서 끝나게 되는 종결점을 살펴서 헤아린다.

5.위의 두 가지는 나온 곳은 같은데, (시작이 어미의 기반이 되기 때문에) 이름을 다르게 붙였으니, (둘은) 하나로 합쳐서 그것을 아득함이라고 이른다. 그러니 아득하고 또 아득함은 온갖 미묘한 것들이 나오는 물이다.


이러한 번역에서 우린 3,4번의 번역에서 한문 원문의 방점이 현대어 번역에 차이를 줌을 발견하게 된다. 한문원문에서 방문 위치의 차이를 보자.


o-1>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o-2>

故, 常無, 欲以觀其妙,

常有, 欲以觀其徼.


1에 의하면 위의 필자와 김학목의 번역과 크게 다르지 않은 번역문이 될 것이다. 그러나 2의 경우는 다르다. 필자는 “항상 바라는 것이 없음으로 그 오묘함을 보는 것이다”라고 한다. 여기에서 무욕(無欲)이 하나의 뜻으로 번역되지만, 2의 경우는 무(無)와 욕(欲) 사이 방점이 이 둘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러니 이러한 것에 근거하여 번역한다면, 다음과 같이 3,4를 번역할 수 있다.


3.1.그러므로 항상 없음에서 그 미묘한 것을 보고자한다.

4.1.항상 있음에서 그 마지막으로 보고자 한다.


참고로 이에 관한 독일어 번역에 준하여 우리말로 옮겨보자.


3.2. 그러므로 항상 바라는 것(begierden) 없이 미묘한 것(die Feinhieten)을 본다.

4.2. 항상 바라는 것을 가지고 그로부터(wonach) 돌아가기 원하는 것을 본다.


왕필에 준하는 김학목의 번역이나 독일어 번역도 o-1에 근거하여 번역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번역에 근거하여 그 뜻을 살펴보자.


1에서 도는 규정되지 않는 것이다. 규정됨이란 무엇으로 있음으로 규정됨이며, 무엇이란 이름으로 규정됨이다. 그렇기에 도는 도로 규정되지도 이름으로 규정되지도 않으며, 만일 규정된다면, 그것은 항상 도가 아니다. 이 도는 어떤 한정이나 규정을 넘어서 있는 그러한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도는 어떻게 인식되어지는 것인가.

적어도 도는 서구 논리학의 정의 혹은 이름이 주어질 수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서구의 학문적 인식의 수단인 논리학에 의하면 도는 도가 아닌 것과 차이를 가짐으로 이해되어진다. 인간은 일반 짐승이란 타자와 이성이란 차이를 통하여 규정되어지며, 그러한 제한된 틀 속에서 사고되어진다. 그리고 이 제한된 틀 속의 개념은 동일률 속에서 학문의 기본적 틀을 구성하게 된다. 하지만 적어도 『도덕경』의 도는 이러한 가운데 사고되지 못한다. 오히려 “도일 수 있는 도는 언제나 도가 아니다”라고 함으로 서구 논리학의 가장 기본적인 틀인 동일률마저 벗어나고 있다. 도는 도가 아닌 것이 되어야하며, 도가 도라면 그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라는 논리 속엔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도와 非-도의 동일률마저 엿보이게 한다. 1장의 첫 머리에서 노자는 도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도를 정의의 틀 속에 가두는 것은 도가 아니라는 의미심장한 말로 역설적이게 도를 논한다.

이와 같은 1의 논의는 2의 논의로 이어진다. 도가 마냥 한정되어 있는 도이기만 하다면, 그것은 항상 도가 아니다. 하지만 유명(有名), 이름 있음도 무명(無名), 이름 없음도 도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둘도 전적인 도는 아니지만, 도가 아닌 것은 아니다. 이러한 도는 만물의 시작이고 어머니이다. 왕필은 그의 주해에서 “도는 무형과 무명으로 만물을 시작하고 완성 한다”고 한다.5) 무형과 무명뿐 아니라, 2에 의하면 유명으로도 도는 만들의 어머니이다. 무명의 도는 모든 사물의 규정되지 않은 오묘한 도이며, 유명의 도, 즉 규정된 도는 그 오묘한 도를 받아 잉태하여 낳는 어머니와 같다. 결국 도는 유명도 무명도 아니며, 무명이고 유명이기도 하며, 모든 것의 시원이며 어머니이다. 이 역설적 논리 속에서 다루어지는 도는 분명 서구 논리학의 틀 속에서 규정되지 못하는 것이며, 그것을 넘어서 있다. 그러면 이러한 도는 어떻게 우리 인간에게 다가오는가. 이는 3,4의 논의에서 다루어진다.

바램 없음에서 우린 오묘함을 보며, 바램 있음에서 그 끝을 본다고 한다. 3,4에 관하여 왕필은 다음과 같이 풀이를 한다. 본문에서 ‘오묘함’은 ‘은미함의 궁극’이며, 만물은 바로 이러한 은미함에서 기인한 후에 이루어진다.6) 이러한 왕필의 논의를 수용하자면,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바로 이러한 오묘함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마지막’을 왕필은 ‘되돌아가서 끝남’이라 풀이했다. 독일어본 역자 역시 ‘돌아가기 원하는 것’이라 번역했다.7) 그러면 이 말의 뜻은 무엇인가. 왕필은 “항상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것이 있음에서는 사물이 되돌아가서 끝나게 되는 종결점을 살펴서 헤아려야 한다”고 풀이한다. 모든 바램 있는 것은 그 가운데 뿌리 박힌 도를 만난 다음에 구제된다. 그렇기에 바램이 있는 것은 도로 되돌아가서 끝나는 종결점을 본다는 것이다. 도란 인간에게 바램 없는 무욕 가운데 오묘함으로 보이며, 바램 있는 유욕 가운데 그 안에 뿌리 깊은 도란 끝을 볼 수 있다. 즉 마음의 비움 속에서 그 있는 모습인 오묘함을 본다. 그리고 바램이 있을 땐 그 오묘함의 실체가 아닌 그것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을 본다.

결국 도는 동일한 것의 서로 다른 이름일 뿐이다. 모든 것이 이 가운데 나오는 문이며, 아득함이다. 둘은 둘이 아니다. 둘은 하나이며, 서로 다른 이름이다. 그렇기에 분별과 한계지움 가운데 정의될 수 없다. 그것의 실체는 논리학의 틀을 벗어난 물아일체의 단계에서 체득될 수 있는 것일 뿐일지 모른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것은 그것이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이후 논의에서 세밀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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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니체에 근거한 데리다의 해체론이 『도덕경』 이해에 있어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이 역사적 『도덕경』의 내용에 얼마나 충실한가라는 문제는 『도덕경』의 문헌학적 접근을 시도하는 이들에게 의문의 대상으로 되어 있다.

2) 그러나 불행히도 이이의 저작엔 1장에 관한 직접적 해석은 없다. 그러나 『순언』1장 등의 논의를 통하여 그가 생각하는 도가 주자에 근거함을 읽을 수 있다. 이이를 제외한 다른 조선의 철학자로 『도덕경』을 풀이한 인물로는 박세당과 홍석주 등이 있다.

 

3) Laotse, Laotse TaoTeKing- Die Seidentexte von Mawangdui 500 Jahre aelter als andere Ausgaben, Hereaus. Hans-Georg Moeller (Frankfurt am Main:Fischer,1995). 이 독일어 번역은 1973년 Mawangdui에서 텍스트를 원본으로 번역한 것이다.

4) 이 곳에서 필자가 사용하는 도덕경의 사본은 다음의 것이다. 왕필, 『노자 도덕경과 왕필의 주』김학목 옮김 (서울:홍익출판사,2000).

5) 왕필, 『노자 도덕경과 왕필의 주』, 29.

 

6) 같은 책, 30.

 

7)Laotse, Laotse TaoTeKing, 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