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철학학교 역사학 콜로키움 1.
죽은 한국사의 부활.
-韓民族史硏究初
유대칠=(안현승+유지승) 지음
(토마스철학학교/허수서당)
2005년
대구/ 토마스철학학교 출판부
토마스 철학 학교 역사학 콜로키움 1
죽은 한국사의 부활.
-韓民族史硏究初
유대칠=(유지승+안현승)
(허수한국학연구회)
머리말.
역사학자는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정치적 견해를 가질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고구려를 두고 일어나는 중국과 한국 학자들의 경우가 그러하다. 결론적으로 필자의 견해에서 과거는 과거의 몫이다. 고려의 마지막 충신들은 조선의 체계를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하였다. 그들을 조선의 역사에 편입한다면, 그들은 과연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그렇다. 우리는 조선의 역사에 속한다라고 할 것인가? 동일한 차원에서 그들에게 대한민국의 역사에 그들이 속한다고 한다면 그들은 이를 인정하겠는가? 그들에게 우리는 외국인(外國人)이며, 단지 우리에게만 그들이 같은 국민으로 여겨지는 것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국사’라는 이름 아래 배우는 것은 대체 누구의 역사란 말인가? 대한민국의 역사라면, 그것에 고려의 충신이 포함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신라의 통일이란 누구의 관점에서 통일인가? 승자의 입장에서 역사가 서술되면서 패자인 고구려와 백제의 입장은 무시된 것이 아닌가? 이 모든 것의 이유는 우리의 역사 이해가 곧 민족의 역사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즉, 민족의 역사가 우리에게 곧 한 나라의 역사인 것이다. 과연 민족의 역사는 곧 나라의 역사가 될 수 있는가? 이것이 타당한 것인가? 나의 역사 이해는 바로 이러한 역사 이해의 의심에서 시작한다.
나는 이 글에게 민족의 역사를 다루려고 한다. 고구려와 부여는 한 민족이며, 서로 다른 국가이다. 이 국가는 한 뿌리이지만, 경쟁의 길을 갔으며, 최후에는 하나가 되었다. 고려의 충신 정몽주는 조선의 정도전과 다른 길을 갔고, 왕이 된 이성계를 인정하지 않은 채, 마지막 고려인으로 죽음을 자처했지만, 그와 정도전 그리고 이성계는 같은 한민족이다. 그러면 과연 한민족(韓民族)이란 무엇인가? 민족이란 특정지역에 동일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역사적 집단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국가의 개념을 넘어선 것이다. 게르만족은 게르만어를 사용하는 역사적 집단이지만, 국가의 차원에선 영국,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 등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 민족의 개념은 이렇게 공간의 개념을 넘어선 것이다. 또한 시간의 개념도 넘어선다. 고구려와 우리는 한민족이다. 고구려와 조선은 다른 국가에 다른 정치적 상황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일 민족이다. 고려를 사라지게 하고 새워진 조선은 어떤 의미에서 적대적 국가이지만, 하나의 민족이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국가의 역사가 아니라, 민족의 역사를 이곳에 정리하려고 한다.
또 하나 나는 최대한 기존에 고등학교 등에서 배운 ‘국사’라는 선입견을 떠나서 연구를 시도할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사관이 가진 많은 것이 소위 이병도 사관으로 대표되는 친일사관 혹은 황국사관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가 쉽사리 무시된 채로 정리되어 있다. 우리의 민족이 세계 최고의 민족이라고 하여 민족 우월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으며, 이것은 큰 잘못이지만, 민족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일 것이다. 기존의 교과서 역사에선 우리 민족은 4-5세기 이후에 이르러 고대국가를 이룬다. 이것은 로마가 이미 이스라엘을 식민통치 할 만큼의 국가 체계를 잡은 지 수 백년이 지난 후이다. 또한 이집트의 고대국가에 이미 오래 전에 이룬 것은 우리는 수 백년이 흐르도록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서인 ꡔ삼국사기ꡕ에는 그렇게 적혀 있지 않으며, 중국의 사서... 등에도 이는 분명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친일사학자들과 이병도의 선생 쓰다 소우키치와 같은 인물에 의하여 ꡔ삼국사기ꡕ 등에 등장하는 4-5세기 이전 우리의 역사 기록은 무시되었다. 그 이유는 임라일본부의 타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일본이 한반도에 들어와 식민통치를 했다는 4-5세기의 타당성을 위해서 그 이전에 한반도에는 어떤 강력한 국가 체계가 존재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에 관한 기록은 무시되어야했다. 이러한 임라일본부는 우리의 사학계에서 비판하는 거짓이야기라고 하지만, 이들이 임나일본부를 주장하기 위해서 만든 4세기 이전 한반도에는 고대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대로 받아져 교과서에 실리고 있다. 이 무슨 개탄할 일인가! 최근에 들어 국사 교육을 강조하지만, 이런 거짓 국사는 오히려 식민사관주의자를 양성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국사 교육은 중요하지만, 전제되어야할 것은 ‘바른 역사’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선입견을 떠나서 새롭게 사고하고 새롭게 정리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렇다고 극단의 민족주의자가 되어서 우리 민족만이 최고라고 할 생각은 없다. 우리 민족은 타민족의 지배를 받을 리가 없다고 하여 한사군(漢四郡)을 거부할 생각도 없다. 하여간 이런 일들이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지 않은 나와 같은 이에게는 무리한 일일 것이나, 틀에 박히지 않은 사고가 가능하기에 ‘재야사학자’로 나는 전공자보다 나은 유일한 점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아직 작고 약하고, 무지하다. 나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준 황현태님과 김충모님에게 그리고 이 글이 나오도록 도와준 도움이 서지영님과 응원의 힘을 실어 준 안현주님에게 감사함을 전하며 글을 시작하려 한다.
1. 한민족의 기준, 한민족의 언어.
언어는 단순한 대화수단을 넘어 사고의 수단이다. 인도유럽어족은 인도유럽어적 사고를 하고, 알타이어족은 알타이어적 사고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민족이란 개념을 구성하는 주된 요소가 된다. 한 민족을 구성하며, 서로 다른 언어를 사고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것이다. 게르만어족은 영어와 독일어 그리고 네덜란드어 등에 모두 공통되는 어떤 언어적 구조를 가진다. 단어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고대 영어에선 ic(나)가 현대 독일어에선 ich(나)이다. 그리고 현대 영어에선 book(책)이 현대 독일어에선 buch(책)이다. 또한, 현대 영어에선 all(모든)이 현대 독일어에선 alle(모든)이고, 네덜란드어에선 al(모든)이다. 이렇게 게르만어는 어떤 유사성을 가진다. 게르만어를 넘어 게르만어가 속하는 인도유럽어족으로 넘어가 살펴보자. 산스크리트어의 dewa(신)은 그리스어로 deos(신)이고, 라틴어로 deus(신)이며, 프랑스어로는 dieu(신)이다. 여기에서 자음의 공통성을 찾을 수 있다. 다른 단어를 살펴보자. 산스크리트어에선 pitr(아버지)이고, 독일어에선 vater(아버지)이며, 영어에선 father(아버지)이고, 라틴어에선 pater(아버지)이며, 네덜란드어에선 vader(아버지)이다. 여기에서도 유사한 발음을 읽을 수 있다.
이들 독일어와 라틴어 그리고 그리스어와 같은 언어는 ‘굴절어’이다. 이는 대체로 어미(語尾)의 변화로 그 형태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라틴어에서 탁자를 의미하는 mensa는 ‘탁자’이지만, mensae와 같이 그 어미가 달라져서 ‘탁자의’라는 의미의 소유격이 된다. 또한 mensam은 ‘탁자를’이란 의미로 목적격이 된다. 영어 등에선 이것이 덜해졌지만, 여전히 복수를 나타낼 때 보여진다. 예를 들어, boy와 boys가 그렇다. 이러한 굴절어는 아무리 다양하게 변화해도 변화하지 않은 언어의 의미체를 가정하게 된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언어를 공유하는 이들은 어떤 사고 공통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언어란 것은 인간이 객관적 실재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사상을 정식화하는 것에 기여하는, 즉 사고에 기여하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 사고는 언어 없이 발가능할지 모른다. 이러한 언어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는 수단이며, 의사를 교환하고 보존하게 하는 도구이다. 다시 말해, 언어 없이는 사고도 언어소통도 기억도 힘들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언어의 유사성을 사고의 유사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면 고구려인과 신라인 그리고 백제인과 가야인 등은 하나의 언어적 유사성을 가졌을까? 만일 그렇다면, 이들은 사고의 유사성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하나의 민족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과거의 언어가 가진 구조가 현재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우리의 언어가 가지는 구조와 어떤 유사성을 가진다면, 시간을 넘어선 민족이란 단일체를 구성할 수 있는 재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민족의 언어인 한국어는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한다. 그 가운데 알타이어족에 속하는데, 이러한 언어에는 한국어, 몽고어, 터키어, 일본어...등이 속한다. 하지만 알타이어족과 한국어의 관계는 쉬운 논의가 아니다. 그렇지만 교착어라는 점과 여러 면에서 다른 어족에 비하여 한국어가 알타이어족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된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 것 같다. 몽골문어와 한국어를 비교해 보자. 우선 어순이다. 몽골어는 교착어이며, 그 어순도 주어+목적어+동사이다. 한국어도 교착어이며, 그 어순도 그러하다. 다음의 예를 살펴보자. 1225년 세운 비석의 명문이다. “cinggis qan-i sartaγul irge daγuli-ju....”이 글은 다음과 같이 우리말로 번역되어진다. “징기스 칸이 사르타굴 백성을 항복시키고...” 우리말을 몽골문어와 비교하여 적어보자. “cinggis qan-i(징기스 칸이) sartaγul(사르타골) irge(백성을) daγuli-ju(항복시키고)....” 즉, 어순이 동일하다. 몽골인과 우리는 몽고만점이란 유사점과 함께 언어적 유사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이는 사고적 유사성으로 이어지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유사성은 알타이어족으로도 확대될 수 있다.
동사와 관련되는 몽고어의 ‘-ra’와 ‘-re’는 한국어의 ‘-러’와 유사하다. 몽고어로 ‘ide-re’는 한국어로 ‘먹으-러’이다. 그리고 ‘방향’ 혹은 ‘쪽’을 나타내는 한국어 ‘-로’는 몽고로 ‘-ru’와 유사하다. ‘이쪽’은 몽고어로 ‘ina-ru’이며, 한국어에서 ‘이쪽’이란 ‘이리-로’와 관련된다. 그뿐 아니라, 고대터키어에서 ‘-rü’도 그러한 맥락의 것이다. 고대터키어로 ‘내 집으로’는 ‘äb-im-rü'이다. 퉁구스어로 ‘저리’는 ‘tali’이며, 몽고어로 ‘그때에’는 ‘teli'이며, 여기에서 모두 사용된 ‘-li’는 중세국어의 ‘이리’의 ‘리’와 유사하다. ‘-에’ 혹은 ‘-로’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li’는 이쪽으로 오라는 의미의 ‘이-리-와’에서 ‘리’가 ‘이’라는 지시대명사에 붙어서 ‘이’ 가운데의 의미를 가지게 하는데, 그렇게 다른 언어에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알타이어족의 언어는 여러 유사성을 가진다. 이러한 유사성은 이들을 하나의 어군에 묶이게 한다.
신라어와 백제어 그리고 고구려어와 가야어 등은 이러한 유사성을 넘어 거의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들은 교착어였다. 즉 굴절어와 같이 어미의 변화로 그 용법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간에 어떤 문법적 요소가 더함으로 그 용법이 달라지는 언어란 말이다. ‘이리로’라는 말은 ‘이’라는 지시대명사에 가운데 속은 속이란 의미를 가진 ‘리’라는 접미사가 더해지고, 방향을 나타내는 격조어가 붙어서 만들어진 것으로, 어간에 어떤 문법적 요소가 더해져 만들어진 것이다. 목적어를 만들기 위해서는 명사의 어미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을’이나 ‘-를’이란 문법적 요소가 더하여 목적어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신라어도 교착어였다. 이들은 소유격을 위하여 衣라는 한문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지금에 이르러 ‘의’라는 음가를 가지는데, ‘의’는 지금 한국어에도 소유격을 만드는 것에 사용된다. ‘영철이-의’에서 ‘의’는 소유격을 만드는 문법 요소인 것이다. 주어에는 伊, 是 등을 사용하였는데, 이 가운데 현재 ‘이’라는 음가를 가지는 것은 지금도 주격을 만드는 요소가 된다. 또한 접속사에 사용된 果는 현재 ‘과’로 여전히 무엇‘과’ 무엇이라 할 때, 접속사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어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어와 어떤 유사성을 가진 것을 확인하게 해준다. 신라어 가운데 勿이라 표기된 것은 한국어로 ‘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발음은 ‘믈’이라 여겨진다. 고구려어에서 買로 표기된 것은 신라어로 勿로 표기된 것과 같은 것으로 현재 한국어의 ‘물’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표기가 다른 것은 신라어와 고구려어가 어떤 식으로든 발음의 차이를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즉 고구려어는 현재의 ‘물’을 ‘매’에 가깝게 발음하였고, 반면 신라는 이는 ‘믈’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 가야지방인 마산 지방의 것으로 ‘미더덕’라는 말에서 ‘미’는 가야어로 물이 ‘미’에 가까운 발음임을 보여준다. ‘미’가 더해짐으로 ‘미더덕’이란 말은 ‘물에서 나는 더덕’이란 의미를 가지는데, 이는 미가 물을 의미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마을이름 가운데 ‘널미마을’이란 마을의 뜻은 큰 못이 있는 마을이란 것이다. 이것은 넓은 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는 중세국어로 물인 ‘믈’에서 파생된 것일 수 있지만, 어쩌면 고구려어인 ‘매’에서 파생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고구려어가 어쩌면 가야어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하기도 한다. 백제어에 관하여 옛 사서에는 중국인이 백제인을 통하여 신라인과 대화가 가능하였다고 하는 것이 있어, 백제어와 신라어가 상당히 유사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붉은’(赤)이란 의미의 말이 고구려어에선 사비(沙非)이지만, 백제어에선 소비(所非)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고구려어와 백제어의 유사성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는 서로 다른 언어이지만, 이것은 어휘의 차이이지만, 기본적인 문법적 특징의 차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맑음’(淸)이란 의미의 말은 백제어로 ‘믈거’(勿居) 와 비슷한 발음인 듯하다. 이것은 ‘멀겋다’라는 현대 한국어와 관련되는 것은 아닐까? 차이는 백제어는 ‘맑다’이지만, 한국어는 ‘덜 맑은 것이지 더러운 것은 아니다’라는 강도의 차이일지 모르겠다. 현대 한국어의 ‘검음’(黑)을 나타내는 고구려어는 ‘그물’(今勿)이다. 이도 매우 유사한 발음을 가진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동예어는 고구려어와 유사하다. 동예(東濊), 즉 예란 동쪽의 예란 의미로 부여의 예맥족과 같은 종족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예와 고구려가 언어적으로 유사하다면, 자연스럽게 부여어도 그러할 것이다. 실상 고구려어는 부여어에서 나왔을 것이다. 옥저의 경우, 고구려와 부여 등의 강대국 사이에 있는 국가로 244년 고구려의 동천왕이 외국의 침입을 피하여 잠시 비난한 것이라 하며, 285년에는 부여가 선비족의 공격을 받자 왕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생겼으며, 그 식솔들이 옥저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이는 부여의 왕족이 옥저에 유입되어갔음을 의미하여, 또한 ꡔ후한서ꡕ에는 고구려에서 신하의 나라로 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치상황, 고구려와 부여의 강력한 영향 속에서 언어도 이들 국가와 유사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ꡔ위지ꡕ와 ꡔ후한서ꡕ에서도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온 것으로 그 언어도 유사하다하고 적혀있다. 그리고 ꡔ위지ꡕ와 ꡔ후한서ꡕ 그리고 ꡔ삼국지ꡕ는 옥저어와 고구려어가 유사하며 약산의 차이를 보인다고 하고 있다. 이들 역사서는 또한 예맥어도 고구려어와 유사하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부여어에서 고구려어가 나오고, 고구려어는 동예어와 옥저어 그리고 예맥어와 유사한 언어라는 결론이 귀결된다. 이들 언어는 부여계언어라고 할 수 있겠다. 부여계언어가 만주와 요동 등을 비롯한 한반도 북부에 사용된 것이라면, 한반도 아래의 언어는 어떠했겠는가? 이미 나는 고구려어와 백제어의 유사성을 지적하였다.
한반도 남부에는 진한과 변한 등이 있었다. ꡔ삼국지 위지ꡕ 동이전에 의하면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위치한 이민족의 국가로 그 언어가 마한과 다르다고 한다. 또한 변한에 대해서는 진한과 언어가 비슷하다고 했다. 하지만 또 다른 문헌인 ꡔ한서ꡕ의 기록에선 변한과 진한은 언어가 같다고 적고 있다. 왜일까? 왜 이렇게 기록이 다른 것일까? 마한어와 진한어가 다르고, 진한어와 변한어는 유사하다고도 하면서, 한편으로 다르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이후 마한의 위치 문제에 대한 논의가 도움이 될 것이지만, 지금은 그 자리가 아니다. 단지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마한은 우리가 알 듯이 전라도, 즉 서남부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서북부 지방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차후 다루겠다. 그렇기에 마한어는 부여계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반면 지금 경상북도 지방에 위치한 진한의 진한어는 북부 예맥과 접한 부분은 부여계언어의 영향이 드러나고, 남부는 변한어와 유사하다고 보여진다. 변한어는 남부언어이지만, 북부에서 내려온 김수로의 세력과 남부 해외 유입세력인 허왕후 세력 그리고 토착민 세력의 삼중 체제로 그 언어도 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논의하였듯이 가야어가 북부 고구려어의 영향이 보여지는 것도 마한에 유입된 북부 세력으로 그러한 것 같다. 한편 진한과 언어가 유사한 것은 그 토착 세력의 언어에서 바라보면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정리하면, 마한은 부여계언어를 사용하였으며, 이는 이후 백제어도 고구려어와 유사성을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반면, 진한은 북부는 부여계어를 사용하지만, 남부는 부여계가 아닌 남부한계언어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남부 변한과 경계한 진한이든 변한이든 한반도 남쪽 정착민은 남부한계언어를 사용하였지만, 변한 가운데도 북방계 유입 세력은 부여계어를 사용하였을 것이고, 이것이 변한 가운데 용해되면서 가야어를 이루었을 것이다. 이런 복잡한 관계를 역사는 다양하게 다룬 것으로 보인다. 즉, 같으면서 다른 것이다. 하지만 점점 부여계어와 남부한계어는 완전히 다른 언어는 아니며, 유사하였고, 이는 정치적 밀착성이 더해지면서 점점 더 그 유사성이 증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여간 이리 본다면 신라어와 고구려어 그리고 백제어와 가야어, 부여어, 동예어, 옥저어, 예맥어... 등은 서로 유사성을 가지며, 또한 이는 현재 한국어와도 어떤 언어적 유사성을 가진다. 어휘에서도 문법에서도 말이다. 즉 이들 국가들은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서로 다른 공간을 점유하며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언어적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다시 위의 논의를 참고하자면, 언어는 사고의 수단이며,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사고는 문화의 근거가 되고, 문화는 한 집단의 단일성을 유지하는 수단이 된다. 그렇다면, 오랜 시간 언어가 동일하다는 것은 매우 많은 것을 의미한다. 이리 볼 때, 언어는 민족을 정의하는 좋은 수단이며, 그렇다면, 신라, 백제, 고구려, 가야, 옥저, 동예 등은 시공간을 넘어 우리와 한 민족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이제 한민족이 지나온 길을 살펴보자.
2. 고조선이란 어떤 것인가?
고조선은 의문 덩어리이다. 교과서 국사책에 간단히 나온 고조선은 정말 단순하게 정리하기 힘든 한민족사의 주된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위만조선(衛滿朝鮮)은 무엇이고, 기자조선(箕子朝鮮)은 무엇인가? 그리고 한나라에 의하여 멸망한 고조선의 땅에 세워졌다는 한사군(漢四郡)의 정체는 무엇인가?
일본의 역사 교과서는 한민족의 역사는 한사군의 등장, 즉 한나라의 식민지배와 왜국에 의한 임나일본부에서 시작한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이들 식민지배를 받던 시기에는 국가의 형태를 이루지 못하고, 식민지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들이 물러나는 4세기 이후에야 한민족은 국가의 형태를 이룬다고 적고 있다. 이는 우리의 역사 교과서에도 그러하다. 비록 고조선을 인정하지만, 이는 온전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부여 등도 온전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성읍국가나 연맹국가 정도의 수준에 그치는 듯이 간단히 다루고 있다. 그러면 정말 우리의 역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국가는 4세기 이후에야 등장하는 것인가?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것에서도 고조선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고조선은 과연 언제 시작하였는가? 고조선의 시작은 매우 난제이다. 단지 문헌적 차원의 것을 증거로 제시하자면, 우선 중국 문헌으로는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의 걸쳐 점차적으로 완성된 ꡔ산해경ꡕ와 기원전 7세기 경에 쓰여진 ꡔ관자ꡕ에 조선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그리고 ꡔ전국책ꡕ에선 기원전 4세기에 조선이 존재하였음을 증거하고 있으며, ꡔ사기ꡕ에는 진시황의 진나라는 고조선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진시황은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하였다면, 그 이전에 고조선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자가 조선에 와서 기자조선을 세웠다고 한다면, 그 기자는 중국 주나라 무왕 13년 왕에게 고한 9가지 정치적 도덕 법칙이란 ‘홍범구주’란 기록을 보면, 기자의 기자조선 시작은 적어도 기원전 12세기는 되어야할 것이다. 적어도 중국 주나라의 이전에 존재해야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이 고조선이 기원전 8세기에 세워졌다고 하는 데, 이는 기자조선과 모순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ꡔ상서대전ꡕ에 의하면 기자는 조선으로 망명하여 왕이 된 것이지, 동쪽으로 가서 새로운 국가를 세운 것은 아니다.
고고학적으로 청동기 문화의 시작은 국가의 형성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런데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는 적어도 기원전 10세기를 넘어간다. 거기에 요동지역은 기원전 1500년에서 1300년까지 올라간다. 거기에 발해 지역은 기원전 2000년에서 1700년까지 올라간다. 그러면 이러한 지역에 근거하여 발생한 고조선의 시작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삼국유사에서 이야기하는 기원전 2300년도 그리 무리는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우리 민족이 그렇게 빨리 국가를 이룰 수 없다고 하면서 역사의 시작은 상당히 수 천년을 뒤로 당기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청동기의 사용이라는 당시의 관점으로 상당히 급진적인 기술을 사용하는 사회에 이르도록 국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논리가 된다. 그리고 청동기의 유입으로 발달된 무기와 농기구가 등장함에도 상위 사회로의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논리가 등장해야한다. 기술의 발전은 전투 기술의 발달과 농업 생산품의 증가로 이어진다. 그러면 과잉생산물이 등장하게 되고, 이로 인한 여러 사회의 움직임이 일어나야 한다. 잉여생산물에 대한 약탈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보호를 전재로 한 군사조직이 등장하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기술의 발전은 원시 사회를 국가 사회에로 발전을 낳게 할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현상이 다른 모든 곳에 보편적으로 일어나지만 우리의 역사에서만 볼 수 없단 말인가?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오랜 시간 존속하다가 그 지배층의 변화를 겪는다. 즉 기자의 등장이다. 물론 기자의 실체에 관한 것은 많은 것이 의문이다. 기자의 존재는 여러 가지 문화적 조건에 따라 인정되기도 하고, 부정되기도 하였다. 정도전은 근조선을 건국하고, 기자 조선의 조선에 이름을 따서 조선이라고 새로운 국가의 이름을 붙였다. 또한 조선의 사림들은 은나라 말엽 주왕의 폭정을 말리다가 구금되고,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왕에게 도덕 정치의 원칙을 말해주고 조선으로 망명해왔다는 기자의 존재를 믿었다. 그것은 기자가 가지는 유학적이고 도덕적 측면에서 정통성 때문이다. 주왕의 부정을 그저 보지 않고, 정의를 이야기한 기자는 조선 사림에게는 선비의 표본 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16세기 사림파들인 기자에 관한 많은 글을 적었는데 윤두수는 ꡔ기자지ꡕ를 적었고, 이이는 ꡔ기자실기ꡕ를 적었다. 이는 조선이란 사회가 기자 조선을 인정한 것을 단정적으로 보여준다. 더욱이 대륙이 한족의 국가에서 만주족의 국가인 청나라로 그 판도가 넘어가고, 조선의 선비들은 이제 진정한 중화는 청나라가 아니라, 조선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소중화’라고 여겼다. 즉 조선을 중심 국가로 여긴 것이다. 이러한 자부심은 당시 북벌론이나 외부 사상에 관한 주체적 수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조선의 이익과 같은 이나 그 외 정약용 등과 같은 이들에 의한 주체적 수용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일제 시대에 이르러 기자의 존재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일제의 황국사국을 가진 일본인 학자와 그들에게 빌어 붙은 식민사관의 조선인 학자들은 단군 조선의 실재는 부정하고, 오직 기자 조선의 실재만 인정하였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가 자체적이고 자발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손에 의하여 일어난 역사로 서술하기 위해서 이다. 즉, 처음부터 우리의 역사는 식민지 역사로 시작한다는 논리를 만들고, 이로 인하여 그들의 식민주의를 타당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이런 이유에서 해방 이후 한국의 사학계는 그 반작용으로 기자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그런 이유에서 지금 ‘국사’ 교과서에는 기자 조선에 관한 논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기자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조선에 와서 단군 조선의 정치권을 이어갔다는 기자의 존재는 과연 주왕에게 홍범구주를 이야기한 그 기자일까? 어떤 이는 기자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고 한다. 기자란 ‘기국의 제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ꡔ춘추과씨전ꡕ에 의하면, ‘기국’이란 주나라 초기의 제후국이었으며, ꡔ국어ꡕ에 의하면, 기국을 정복한 이가 기씨라는 사실이 있다. 그리고 기씨 일족이 주나라 초에 북방 정복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기자와 기국을 정복한 기씨의 인물 그리고 기국은 어떤 관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기씨성을 가진 제후, ‘기후’의 존재는 여러 고고학적 성과에 의하여 증명되고 있다. 그의 존재를 보여주는 명문이 쓰여진 다양한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기자와 고조선은 어떤 관계를 가지는 것일까?
조선의 학자인 이규경은 기자 조선은 기자의 묘가 중국에만 여러 곳에 기자의 묘가 존재한다고 하며, 기자의 실재성을 의심하고, 기자 조선은 외부 세력에 의한 왕권 교체가 아니라, 고조선 내의 왕실 교체라고 보았다. 천관우는 기자족속을 우리 민족의 하나로 인정하고, 이들이 고조선으로 유입되었다고 보았다. 이어서 윤내현은 기자의 나라는 중국 변방의 소국가이며, 이는 고조선의 변경에 위치하였지만, 지도적 위치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보았다. 어쩌면 수세기 동안 이어온 단군 조선 내부의 왕실 교체 정도일지 모르며, 설사 외부에서 고조선의 부근에 유입되었다고 하여도 중심적 위치에 이르지는 못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모든 동북아의 국가가 자신에게도 기원한다는 중국적 사고에서 등장한 가상의 인물일지 모른다. 그러나 고조선의 위치가 한반도 북부에서 요동에 이르는 지역에 걸쳐있다면, 주나라 시절 북부 지역에서 정벌 활동을 한 기씨종족과 어떤 식의 만남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높다. 그렇다면, 주나라 시절 조선과 기씨종족은 어떤 식의 만남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높고, 그렇다면, 이러한 만남이 기자 조선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만일 당시 주나라의 시기에 기씨종족이 어떤 식으로든 정복활동을 하고, 유적을 남길 정도의 활동을 했다면, 그들의 일부가 당시 조선에 유입되지 않았을까? 비록 그들이 왕이 되거나 하지 않아도 말이다. 설사 그들의 세력이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하여도, 왕이 되었다는 기자란 인물이 중국인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기자는 대륙에서 활동한 한민족의 일부일지 모르며, 그들이 요동에서 활동을 하며 고조선에로 유입되어 고조선 자체의 어떤 왕조의 변화나 지배층의 변화를 낳았을지 모른다. 즉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조선이며, 단지 지배층의 변화가 일어났을 뿐일 수 있는 것이다.
기자의 존재는 여전히 어둠에 가려져 있다. 하지만 기자를 긍정한 일제의 잔재를 없애기 위하여 무조건 없다는 식의 논리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사실 기자의 존재는 삼한시대를 긍정하는 일제 식민사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니 말이다. 친일 행위를 하던 최남선은 해방 이후 1946년 ꡔ조선역사ꡕ에서 독립운동을 그 역사에 편입하여 역사책을 내어놓았다. 그 가운데 스스로가 참여한 3․1절 독립운동과 그 선언서를 포함하여 적어 스스로의 독립운동 활동을 적기도 한 듯 하다. 그러나 그는 일제 어용학자로 한민족 역사 왜곡에 앞잡이들이 모인 조선사편수회에 중심 된 인물이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의 친일 행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기자의 존재를 무조건 무시하는 것이 일제 식민사관에서의 벗어남은 아닐 것이다.
ꡔ삼국지ꡕ와 ꡔ한서ꡕ 그리고 ꡔ후한서ꡕ 또한 ꡔ사기ꡕ 등에 의하면 기원전 194년 기자의 후손이며 기자 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에 이르러 기자 조선의 시대는 접히고, 위만 조선의 시대가 열린다. 그러나 준왕은 왕의 지위를 상실하지는 않는다. 그는 배를 타고 한(韓)으로 넘어가 한왕이 된 것이다. 이것이 마한(馬韓)의 시작이다. 하지만 준왕은 더 이상 조선의 왕이 되지는 못했다. 이렇게 고조선은 세 번째 왕조의 문을 연다. 이것이 위만 조선이다. ꡔ삼국지ꡕ에 의하면, 위만은 본래 연나라 사람으로 준왕에게 항복하여 망명한 인물이다. 이에 준왕은 그에게 서쪽 변방을 지키는 임무를 주고, 백 리의 땅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한나라의 공격을 알리며 준왕을 만나 의논하기를 청하여, 준왕을 만나 공격하고 이로 정권을 잡았다고 한다. 사실 이 당시 한나라는 대륙을 통일하고, 연나라에 노관을 왕으로 봉하였으나, 노관이 흉노에게 도망함으로 연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이때 위만은 조선으로 넘어와 준왕의 정권을 무너뜨린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위만에 관한 논의를 두고 최남선은 위만의 도둑질이라고 평한다. 그러나 위만은 고조선의 정권을 잡고는 한나라와 외교관계를 정상화한 다음 주변의 소국들을 점령해간다. 그리하여 이 당시 위만 조선은 상당한 국력을 확보하게 된 것으로 ꡔ사기ꡕ 등의 기록을 통하여 엿 볼 수 있다. 이러한 고조선의 성장은 아무리 외교관계를 정상화하였다고 하여도, 한나라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한의 무제가 조선은 진시황의 시대에는 미약하여 신하와 같았으나, 이젠 군사력을 길러 한나라의 위협이 된다고 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에 이르러 본격화된다. 우거왕은 한나라에 대하여 상당히 적대적인 입장으로 태도를 변하여 갔다. 당시 강대국인 한나라와 대결 구조는 여러 모로 고조선에게 쉽지 않은 길이었다. 이는 한나라가 고조선을 견제하게 하였고, 내부적으로도 갈등을 야기하게 하였다. 이는 ꡔ후한서ꡕ에서 고조선에 속한 소국의 28만여 명이 우거왕을 배신하고 요동으로 갔다는 것에서 내부의 갈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당시 고조선에 속한 소국의 인구가 28만 이상이란 것으로 보여주며, 이는 고조선 자체의 인구가 이를 넘어섬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정도 인구의 소국을 거느리고 있다면, 한나라 역시 고조선의 성장을 그대로 볼 수 없었을 것이고, 고조선 역시 한나라의 영향력을 순순히 받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점점 성장하는 고조선과 중국을 통일하고 강대국의 위치에 선 한나라는 어쩔 수 없이 적대적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한나라의 왕인 무제는 전제 군주제의 국가를 이루었고, 기원전 110년 흉노와 남월을 정벌하였다. 또한 기원전 104년에는 대원국을 정복하였고, 푸젠과 광둥 지방까지 영토를 넓혀갔다. 그뿐 아니라, 동서 교통로를 열어서 서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균서법과 평준법 등으로 국가의 경제를 국가가 관리하고, 소금과 철 그리고 술 역시 전매 제도로 국가의 수득을 늘이는 등 무제는 왕권이 강한 그러한 강한 국가를 꿈꾸었다. 이런 시기에 자신의 나라 동쪽에 점점 성장해 가는 고조선은 눈의 가시였을 것이다.
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은 한나라에게도 쉽지 않았다. 처음 한나라의 장군 양복과 순체에 의한 조선 공격은 실패하였다. 당시 고조선은 한나라의 공격을 이겨낼 정도로 강한 군사력과 국력을 가졌었다. 이에 한나라는 고조선과 강화회담을 제한다. 하지만 이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 순체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양복 역시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수개월이 지나도 고조선의 함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한나라의 군대 내부에도 내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순체는 강력한 공격을 양복은 이에 반대한 것이다. 이렇게 내분은 점점 커지게 되었다. 이에 한나라의 무제는 공손수를 파견하여 군대를 지휘하게 하였다. 그러나 순체는 양복이 고조선 정부와 내통하고 있으며, 그를 제거할 것을 건의한다. 이에 공손수는 양복을 체포하고, 군대의 체제를 개편하였다. 그렇지만 무제는 군사체제의 변경에 불만을 가지고 공손수를 처형하였다. 순체의 의견대로 강력한 공격이 고조선을 향하여 이루어졌으나, 이러한 혼란 속의 공격이 성공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랜 전쟁은 고조선 내부의 분열도 야기하였다. 많은 이들이 한나라와의 강화를 제안하였다. 또한 한나라 역시 고조선 정부 내부의 혼란을 몰래 지원하였다. 강화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반대 세력은 한나라로 망명해버렸다. 이 가운데 기계상 참은 우거왕을 살해하는 것에 성공하고, 항복하려 하였으나 ‘성기’와 그 외 다른 이들이 왕을 대시하여 싸우는 바람에 실패한다. 그렇지만 한번 무너진 체계는 금새 무너지는 법이다. 이는 고조선의 마지막도 마찬가지이다. 고조선의 많은 이들이 한나라에 항복하려고 하였고, 성기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성기의 죽음으로 고조선은 오랜 역사를 마감한다. 즉 고조선은 한나라의 강력한 군대를 이겼으나, 그 스스로의 분열로 인하여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고조선 분열의 주역인 배신한 고조선의 실력자들인 니계상 참, 우거왕의 아들 장항 등은 한나라에서 귀족이 되었다. 이렇게 조국을 배신한 이들에 의하여 고조선은 오랜 역사를 역사책의 한 페이지로 남기게 된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오랜 시간 동북아 강대국으로 역사를 지속한 고조선, 즉 대륙에 여러 왕조가 변하도록 국가를 지탱한 고조선은 어디에 있었는가? 이병도는 고조선의 위치를 대동강 부근으로 한반도 내부에 한정하였다. 윤내현은 고조선을 요동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이를 위하여 갑골문자를 분석하고, 이를 통하여 기자 조선의 위치를 확인하고, 기존에 사용된 ꡔ삼국지ꡕ 동이전을 기본 자료로 삼은 것을 비판하고, ꡔ사기ꡕ 조선전을 근거하여, 이러한 고조선의 위치를 주장하였다. 그러면 현재 한국인이 아닌 이들의 주장은 어떠한 것인가? 우선 ‘유엔 부찐’은 중국사서들과 최근 북한의 연구들 그리고 동아시아지역의 다양한 유물에 근거하여 고조선의 위치를 추정하였다. 그는 고조선이 있던 지역은 고인돌로 대표되는 거석문화의 특징을 가진다고 가정하고, 이는 중국의 영향이 아닌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고조선은 현재의 요동지역에서 한반도에는 청천강 이북 지역을 고조선으로 추정하였다. 그 외 ‘리지린’은 난하에서 만주와 한반도 북부을 고조선의 위치로 가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많은 이들이 고조선의 위치를 만주와 한반도 북부와 관련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고조선이 사라지고, 한나라는 정복한 고조선의 자리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한사군의 위치는 곧 고조선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 이병도와 같은 이들은 낙랑군과 같은 한사군을 평양의 대동강을 중심으로 위치한다고 주장하면서 고조선을 한반도에 한정하려 하였다. 하지만 낙랑군의 위치를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할 수는 없다. 우선 역사서에 등장하는 낙랑 관련 기사를 읽어보자. 백제 온조왕 4년 백제는 낙랑과 화친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신라 남해차차웅 원년인 3년 낙랑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공격하였다고 한다. 이렇다면, 낙랑은 백제와 신라와 국경을 마주해야한다. 그렇다면 평양 부근에 한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낙랑의 위치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로맨스에서 멸망한 낙랑은 평양 부근에 위치한 것이라 보인다. 왜냐하면 낙랑의 왕은 옥저 부근을 여행하는 고구려의 왕자 호동을 자신의 나라에 데려온다. 그런데 최리는 고구려를 북국(北國), 즉 자신의 북쪽 국가라고 칭한다. 그렇다면, 낙랑은 고구려의 남쪽 평양 부근에 위치함이 분명하다. 낙랑은 호동왕자의 공격으로 약해지고, 이후 고구려의 대무신왕 15년(32년)에 고구려에 의하여 멸망하게 된다. 그런데 고구려 미천왕 14년(313년) 낙랑은 고구려에 멸망하게 된다고도 한다. 그러면 낙랑은 두 번, 그것도 300여 년의 차이를 두고 두 번 멸망하였단 말인가? 여기에서 낙랑이란 이름의 군과 국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즉 낙랑이란 이름은 역사상 하나가 아니라 둘이란 것이다.
호동왕자의 연인 낙랑공주가 살았고, 낙랑국왕 최리가 살았던 곳이며 32년 멸망한 곳은 ‘낙랑국’이다. 반면 313년 미천왕에 의하여 고구려에 속하게 된 곳은 ‘낙랑군’이다. 즉 전자는 하나의 군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인 것이다. 그것은 왕이 다스리고,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기도 하였던 낙랑국인 것이다. 이 낙랑국은 기원전 28년 신라 혁거세 30년 신라를 공격하였고, 기원전 4년엔 금성 즉 서라벌을 포위하기도 하였다. 또한 유리이사금 시대에는 신라의 타산성을 함락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낙랑국은 평양 주변을 기반으로 상당한 국력을 가진 국가로 보인다. 이 낙랑국은 최씨성의 왕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가운데 한 명이 낙랑공주의 아버지인 최리왕인 것이다. 이 낙랑국은 기록상 기원전 28년 존재하였던 것을 보아,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신라를 공격하고 백제와 외교관계를 가졌던 그 시대의 무시할 수 없던 국가로 보인다. 이러한 낙랑국의 세력은 온조왕 13년 백제의 동쪽에까지 낙랑국이 차지하였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것은 백제가 당시 서울에 위치한 것을 통하여 낙랑국이 서울의 동쪽인 춘천까지 세력을 확대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낙랑국은 신라, 고구려, 백제와 같은 시기에 건국되어 서로 살아남으려는 경쟁 가운데 사라진 국가인 것이다. 낙랑국은 고구려 대무신왕에 의하여 32년에 멸망하고 이후 44년 한나라의 광무제의 도움으로 재건되었다. 한나라에 의하면 고구려의 남쪽에 고구려를 견제할 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이후 낙랑국은 한나라의 영향 가운데 이후 국가를 유지한다. 그러나 그들의 국력은 과거와 같지 않았고, 대동강 이남의 일부에 머무른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낙랑국은 신라에 귀속되었다. 이로 볼 때 한사군으로 낙랑군의 위치가 대동강 유역이라는 설을 제고의 대상이 될 것이다.
대동강 유역 평양 유역의 낙랑국과 낙랑군은 구별되어진다. 낙랑군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음의 역사적 기록에서 유추할 수 있다. 부여는 2세기 7-8천여 명의 기병으로 낙랑을 공격하였으며, 이어서 현도를 공격하였다고 한다. 만일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면, 부여가 고구려를 가로질려 대동강 유역의 낙랑군을 공격하였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부여는 고구려의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낙랑군은 부여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야한다. 또한 낙랑군이 고구려에 의하여 멸망한 것을 통해 볼 때, 고구려와도 국경을 마주해야한다. 또한 고구려는 예맥과 마한과 연합하여 현도군을 공격하였다. 이에 한나라의 세력 속에 있던 현도군에 대한 공격에 대하여 부여와 한나라는 고구려와 예맥 그리고 마한 연합군과 전쟁을 하게 된다. 그러면 현도군도 낙랑군과 마찬가지로 부여와 고구려에 국경을 마주해야한다. 고구려가 공격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부여가 군대를 파견하였다면 말이다. 만일 이것이 고구려 남부 한반도에 한정된다면, 부여군과 한나라군이 고구려와 예맥 그리고 마한 연합군을 가로질러 현도군을 지원해야했다는 논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실상 대방와 낙랑이란 이름은 한반도 가운데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고조선의 패망과 그 자리에 들어선 한사군이란 한나라의 식민지배를 피하여 한반도에 내려와 정착한 이들로 보여진다. 그들은 원래 자신들이 있던 곳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스스로 국가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조선이란 이름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성계에 의한 조선에 이르기까지 그 명칭이 사용되었고, 지금도 북한은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란 명칭 속에 조선을 남겨두고 있다. 고구려 역시 그러하다. 고구려는 본래 고려와 같은 말이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고구려는 고려라는 동일한 이름의 국가로 새롭게 등장한다. 실상 ꡔ삼국유사ꡕ와 같은 역사서에는 고구려를 고려라고 기록하며, 이 둘의 같은 이름이다. 또한 고려는 이후 현대에도 1918년 상하이에서 결성된 공산주의 정당의 이름에서도 ‘고려공산당’이라 하여 이어졌고, 김일성이 1980년에 제안한 남북이 서로 독립된 사상과 제도를 유지한 채, 최고 민족 연방 회의를 구성하자는 연방국의 이름도 ‘고려민주련방공화국’이다. 또한 우리 나라의 영어 이름인 Corea도 사실은 고(구)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아직도 고(구)려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장소나 시간의 변화 이후에도 이전의 국호를 유지하고 이를 통하여 정당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낙랑국도 낙랑이란 이름을 유지함으로 낙랑군의 유민을 결집하고자 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하여간 한사군을 한반도 내부에 한정하는 것은 재고의 대상이 되어야한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영토 역시 한반도 내부에 한정되어지는 것이 재고의 대상이 되어야한다.
3. 부여, 동북아 힘의 균형자.
부여, 혹은 북부여는 국사 교과서에 깊이 다루지 못한 국가이다. 최남선이 적은 ꡔ조선역사ꡕ에는 부여에 관한 논의가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부여는 한민족고대사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나라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각각 부여에 자신의 기원을 두었으며, 그 외 많은 고대 한민족 국가가 부여와 관련되어있다. 교과서에 의하면 부여는 진정한 의미의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연맹국가나 성읍국가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국가로 표현되어있다. 과연 그럴까? 우선 이 문제를 다루고 부여를 다루어보자. 당시 대륙을 지배하던 한나라는 발해 지역의 맹주로 부상하는 고구려를 견제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나 그것에만 집중할 수만은 없었다. 대륙은 수많은 다른 민족이 변수로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나라는 다른 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견제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선택한 국가가 부여이다. 한나라와 부여는 정략적 결혼과 공수동맹, 즉 오늘날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같은 것을 맺었고, 이로써 국사적 협조체계를 가졌다. 물론 부여는 간혹 전쟁이란 수단으로 긴장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였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한나라가 고구려를 침입할 때 식량을 제공하기도 하고, 한나라 역시 부여왕의 장례에 참여하는 등 이들은 고구려에 대항하여 만주 지역의 힘의 균형을 위하여 연합군을 이루었다. 이러한 부여와의 관계를 부여에 대한 호의로 드러난다. 그리하여 중국의 역사서는 고구려를 흉악하고 급한 성격이라 하지만, 같은 민족인 부여는 후덕하고 노략질을 하지 않은 민족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부여와 한나라의 상호협약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부여는 일반적으로 한나라 위주로 외교가 치우치는 것은 견제였다. 즉, 일반적으로 한나라 위주로 부여와 한나라의 연합 전선이 흘려갈 경우는 한나라에 대한 공격을 통하여 서로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곤 하였다.
부여와 고구려는 언어적 유사성을 넘어서 하나의 민족 구성원을 가졌다. 초기는 고구려가 부여에서 떨어져 나간 국가로 부여에 비하여 힘이 약하였다. 그러나 2세기 경 이러한 힘의 균형을 깨어지고, 고구려가 부여를 능가하게 되었다. 초기 부여가 더 강성할 때, 부여와 고구려의 사이는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능가하면서 이러한 관계는 무너진다. 부여는 스스로 고구려에 대하여 대국으로서 소국인 고구려가 부여를 섬길 것은 주장한다. 그리하여 13년과 22년 고구려를 침략하기도 한다. 그리고 122년과 346년에는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부여는 자신에게서 파생된 국가인 고구려에 자신을 넘어서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부여의 오곡이 자라는 토양을 원했을 것이다. 이렇게 서로의 관계를 점점 멀어지게 된다.
부여는 285년 선비족에게 공격을 당하고, 수도가 함락 당한다. 이에 왕은 자살하고, 왕족은 북옥저로 도피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동부여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 동부여는 410년 고구려의 정복대왕인 광대토대왕의 정복에 의하여 멸망하게 된다. 그리고 북쪽의 북부여도 494년 고구려에 의하여 정벌당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700여 년의 부여사는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북부여의 유민들은 더욱 더 북쪽으로 올라가 ‘두막루’라는 국가를 세운다. 물론 이러한 역사서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아직 두막루와 부여의 관계는 많은 부분이 여전히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두막루는 이후 5-8세기까지 지속되어갔다.
부여의 시작은 탁리국(고리국)에서 일어난다. 탁리국의 시비(侍婢)가 하늘에서 내려온 기운을 받아 임신하였는데, 그로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 아이를 기이하게 여겨 짐승에게 던져주자 오히려 보호하였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동명’이다. 동명은 활을 잘쏘았고, 소와 말을 잘 치는 인물이었다. 탁리국의 왕은 그가 나라를 빼앗을까 두려워 그를 죽이려하는데, 이에 동명은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주는 도움으로 엄호수를 건너 도주한다. 그리고 나라를 세우는데 이러한 국가가 ‘부여’이다. 이 국가가 바로 광개토대왕비에 등장하는 ‘북부여’인 것이다. 여기에서 탁리국은 몽고족의 국가로 여겨지며, 부여 북쪽 지금의 몽고지역 부근 혹은 북부 만주 지역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탁리국은 지금의 몽고와 같이 유목이나 기마문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탁리국에서 부여의 시작이 일어나는 것이다. 부여도 탁리국과 마찬가지로 유목과 기마의 문화가 일반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부여의 초대 왕 동명왕이 말과 돼지와 같은 가축이 두려워하는 존재였다는 것과 말과 소와 같은 가축을 치는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활을 잘 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때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여의 시작을 비유하는 이러한 설화는 고구려의 주몽왕과 왜국의 시조라는 신무에게서도 보여진다. 이러한 설화의 유사성을 가지고, 몇몇 학자들은 북방 기마민족이 왜국으로 넘어갔다는 기마민족설을 주장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믿을 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왜국의 세력이 북방에서 한반도를 걸쳐 왜국으로 넘어가 국가를 세웠다는 것은 임나일본부의 근거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 왜와 백제 그리고 가야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더욱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하여간 부여는 북방 기마민족의 국가로 북방계 몽고족의 국가인 탁리국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부여는 약한 국가가 아니었다. 부여는 111년 당시 7-8천여 명의 기병으로 낙랑군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167년 보병 2만여 명으로 현도군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당시 이 정도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국가는 중앙집권이 이루어지지 않은 성읍국가나 부족국가의 수준으로 불가능하며, 진정한 의미의 국가를 이룰 때만 가능하다. 실제로 ꡔ삼국사기ꡕ 고구려 유리왕의 기사에서는 부여군대의 강성함이 기록되어있기도 하다. 121년 고구려가 예맥과 마한과 연합하여 한나라의 영향 아래 있던 현도성을 공격하자, 부여왕은 아들 외구태에게 2만의 군대를 주어 싸우게 한 기록이 있다. 이 정도의 군사력 동원은 도저히 국가의 형태를 이루지 못한 성읍국가가 행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교육은 어떠하였는가? 우리 한민족사를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왜곡한 황국사관의 그림자가 일제시대를 통하여 그대로 우리의 학계에 이어지고 이렇게 양성된 학자들이 다시 교과서를 적다보니 우리는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축소된 것으로 이해하고 교육당하게 된 것이다. 부여는 단지 연맹왕국이나 성읍국가 수준을 넘어선 국가이며, 그 역사도 매우 길다. ꡔ사기ꡕ 열전에는 ‘과’라는 상인이 주변국가를 다니며 상업으로 큰 부를 얻은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그가 열거하는 국가 가운데는 부여가 거론된다. 그런데 이때는 중국의 진시황의 시대(기원전 246-210)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기원전 3세기 이전에도 부여는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여는 왕의 아래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대사, 대사자, 사자와 같은 직책이 있었다. 이는 말, 소 그리고 돼지와 같은 동물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를 통하여 볼 때, 부여 사회의 유목과 기마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국가의 중대사는 귀족회의를 통하여 결정되어졌다. 물론, 기록에 의하면 부여의 왕은 국가에 일어난 재앙에 죽음으로 책임졌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은 부여가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논의의 증거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이 부여의 국가 중앙집권 부제를 의미한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당시 부여의 왕은 상당한 수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고, 수많은 청년을 전쟁으로 몰아놓는 권력이 있다는 것은 부여의 왕이 가지는 부여 사회에서의 위치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부여는 한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강성해짐을 견제하면서, 다른 한편 한나라도 견제한 외교능력을 가진 국가였다. 그들은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왜국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부여는 예맥족의 국가, 즉 한민족의 국가였다. 부여사는 부여의 패망으로 사라졌지만, 부여의 영향력은 이후로도 한민족사에 이어져간다.
부여는 한나라와 연합한 것이 한나라에 대한 사대정신이나 영향력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부여는 고구려의 성장을 억제할 필요와 고구려와 선비족이 연합할 가능성을 억제하기 위하여 한나라와의 연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한나라의 영향력에 놀아난 국가가 아니라는 것은 부여가 필요에 따라 한나라를 공격했던 국가라는 점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부여의 존재는 당시 동북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이후 백제와 왜국의 성립에서 다루겠지만, 부여의 문화적 영향력은 동북아에 큰 축이 되었다.
4. 삼국시대와 삼한시대에서 열국시대(列國時代)에로.
삼국시대란 존재하였는가? 다음의 표를 참고하다.
전3 |
전2 |
전1 |
후1 |
후2 |
후3 |
후4 |
후5 |
후6 |
후7 | ||||||
고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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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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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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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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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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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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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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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낙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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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낙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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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연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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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한반도에 여러 국가가 길게 혹은 짧게 존재하였었다. 고구려의 초기 동명성왕은 이미 백두산의 동남쪽의 행인국을 점령하였다. 그후 강대국을 꿈꾸던 고구려는 철기생산지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낙랑국을 멸망시킨 대무신왕은 함경도와 평안도의 어느 곳엔가 존재하던 개마국을 공격하여 왕을 죽이고, 26년 이를 고구려의 군현으로 삼는다. 또한 고구려는 그 부근의 작은 소국가들을 하나 하나 점령하여 간다. 이들 국가로는 갈사국와 구다국이 있다. 지금의 함경도와 평안도 등에는 고대에 다양한 국가가 있었다. 북옥저, 남옥저, 구다국, 갈사국, 개마국, 행인국 등이 있었고, 이는 고구려의 영향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일부는 독립국가이면서 고구려의 우산 가운데 들어가거나 아니면 구다국이나 갈사국 그리고 개마국과 같이 공격을 당하거나 스스로 항복하여 고구려의 한 군현이 되거나 하였다. 이들 국가들은 모두 우리 한민족의 국가로 존속하다가 사라진 국가들이다. 그 외에도 신라는 512년 지중매립간 시절에 이사부에 의하여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이 흡수되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우산국도 하나의 국가로 독립적 위치를 가졌었다고 할 수 있다. ꡔ삼국사기ꡕ에 의하면 이 당시 우산국의 국민들은 상당히 호전적이었으며, 쉬이 복종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도 이 당시까지 울릉도에는 신라의 통치를 거부한 세력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더 많은 한민족의 국가를 살펴보자.
이곳에서 필자에 의하여 다루어질 우리 민족의 국가도 한민족의 역사상 등장하는 모든 국가는 아니다. 그것은 필자의 역량이 그리 크지 않은 이유에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 하나 다루어보자.
1.이서국.
우선 ‘이서국’이다. 이서국은 지금의 청도 지방에 형성된 고대 국가이다. 이들은 신라와 대립 구조 속에 있었다. ꡔ삼국유사ꡕ는 이들이 신라 3대왕인 노례이사금(유리이사금) 14년에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공격하여 쳤었다고 적고 있다. 이들은 신라 초기 신라의 영향력이 커질 무렵 이들과 국력을 다투던 국가였다. 공격을 받은 신라는 노례이사금(유리이사금) 때에 이서국을 본격적으로 공격하여 이를 함락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사라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것은 이서국에 관한 기록은 그 이후로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신라 유례니사금 때 이서국이 다시 수도를 공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유례이사금은 신라의 13대 임금이다. 그러면 망한 나라가 다시 수백년이 흘려 다시 망하였단 말인가? 사실 이서국도 금성을 함락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신라는 망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서국도 공격을 당하였지만, 적어도 3세기 혹은 4세기 초기까지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서국은 가야 연맹과 신라 사이에서 국가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2.신라.
그러면 이서국의 라이벌이었고, 이서국을 결국 함락시킨 ‘신라’는 어떤 국가였는가? 많은 역사서에는 신라가 후진국으로 4세기 말에 이르러야 국가의 형태를 이루었다고 한다. 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그 이전을 삼한시대라고 주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삼한시대의 국가는 다들 부족국가 정도의 수준으로 진정한 국가의 체계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고고학적으로도 타당하지 않고, 문헌학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 그러면 이러한 주장이 20세기 식민주의 역사관을 가진 이와 그 외 많은 일본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일본의 임나일본부의 타당성을 위해서 이다. 일본이 한반도에 아직 국가의 형태를 가진 사회공동체가 등장하기 이전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였다는 임나일본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4-5세기 이전 한반도에는 국가의 형태를 가진 사회공동체가 있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ꡔ삼국사기ꡕ와 ꡔ삼국유사ꡕ 등의 기록이 무시되고, 그들의 추론에 의한 논리가 교육되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22대 지증왕때에 이르러 한문으로 신라(新羅)라는 국호를 정하고, 차차웅이나 마립간 그리고 이사금 등의 호칭을 대신하여 한문인 왕(王)을 지도자의 명칭으로 사용한 것을 통하여 이때에 국가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하는데, 이는 이 당시 한문이 적극적으로 유입되면서, 우리말 표현을 한문(漢文)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차차웅’은 지금의 ‘중’에 해당하는 것으로 종교의 사제(司祭)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순수한 신라언어로 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내용은 그대로 이고 그 표현은 한문이란 언어를 유입하여 사용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는 이미 1세기에 국가의 체계를 갖추었다. ꡔ삼국사기ꡕ에 의하면 신라는 3대왕인 유리이사금때에 국가의 관리를 13 등급으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관리 체계를 가진 사회공동체는 분명하게 국가의 형태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관리의 등급화는 권력의 단일화의 전제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1등급에서 13등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리의 체계를 가진 공동체는 분명하게 국가의 형태를 가져야한다. 그러면 삼한시대라고 우리가 생각하는 시대에도 엄밀하게 신라는 단지 부족국가가 아니라, 온전한 국가의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 즉 서라벌국은 당시 음즙벌국(안강), 압독국(경산), 실질국(삼척), 다벌국(대구), 비지국(창녕), 고타(안동), 굴아화촌(울주), 내이(영주), 초막국(초계)으로 이루어진 진한의 수장국가였다. 신라는 국가의 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소국가도 국가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지만, 서기 1세기에 신라의 영향력 속에 들어가면서 독자성을 서서히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기록에 의하면 1세기 초에 이미 진한의 소국을 대표하여 신라, 즉 사로국이 한군현과 교섭한 일이 있었다. 각각의 국가들은 서로 독립을 유지하였지만, 마치 지금의 사로국을 대표로 공동사안을 협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1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사로국이 진한의 대표국로 되어지면서 각각의 독립성을 서서히 사라지고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파사이사금 8년(88년)에 사로국이 백제와 가야에 국경을 접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이미 경주의 사로국이 대구의 다벌국과 경산의 압독국을 영향력 가운데 놓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사로국의 국경은 백제와 마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중간에 많은 소국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이들 소국가의 집중화는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이 시기에 철제농기구의 보급이 이루어졌고, 이는 생산력의 증대를 야기하였다. 이러한 생산력의 증대는 사회의 계급화를 야기한다. 빈부의 차이를 낳게 되고, 경제적 구조의 발전을 낳게 된다. 이러한 사회화 현상은 한 공동체 뿐 아니라, 국가 사이에도 발생하게 된다.
ꡔ삼국사기ꡕ 파사이사금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음즙벌국와 실질국이 서로 국경을 두고 다투었다. 이때 파사이사금에게 이 두 왕이 결정을 요청한다. 이는 당시 진한의 구성국가들이 사로국의 종주권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이에 다시 사로국의 왕인 파사이사금은 이 문제를 금관가야의 수로왕에게 해결책을 맡긴다. 이는 당시 경상도 지방의 신생국 가야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임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소국들은 문제를 자신의 대표인 사로국에게 넘기고 이를 다시 사로국왕은 금관가야의 수로왕에게 넘긴 것이다. 이에 수로왕은 다투던 영토를 음즙벌국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에 사로국의 경주를 여섯 구역 대표인 6부(급량부, 사량부, 본피부, 점량부 혹은 모량부, 한기부, 습비부)의 대표들이 모여서 수로왕에게 향연을 베풀었다. 이에 모든 부는 최고의 지위에 이른 이들이 참여하였는데, 오직 한기부만이 지위가 낮은 자가 향연에 참여하여, 이에 수로왕이 진노하여 ‘노 탐하리’에게 명하여 한기부주 ‘보제’를 죽이고 돌아갔다. 그 후 보제를 죽인 ‘노’는 읍즙벌국의 타추간(타추왕)의 집에 도망하였는데, 이에 사로국의 왕은 응징하기 위하여 읍즙벌국을 정벌한다. 그것은 사로국의 사람을 죽인 수로왕의 편에 서서 그 살해법을 보호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읍즙벌국은 금관가야와 모종의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읍즙벌국은 금관가야과 어떤 이익관계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읍즙절국은 지금의 ‘안강’ 지역으로 사로국과 국경을 마주하였으며, 동해안 진출이 용이하여 해상으로 금관가야와 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이를 통하여 금관가야 협조로 대외무역을 하였다. 특히 금관가야와 읍즙벌국이 이러한 관계 증진은 읍즙벌국와 국경을 마주한 사로국에는 위협이 되었을 것이고, 금관가야에는 사로국을 압박할 수 있는 전초 기지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한 사로국은 읍즙벌국의 이러한 독립적 행위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응징한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 응징은 소국의 독립성을 점차적으로 부정하면서, 이들을 신라의 한 지역인 군이나 현의 형태로 몰고 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로국, 즉 신라의 팽창은 단지 연합체제의 대표가 아니라, 이들을 하나의 국가로 묶으려는 시도로 보여진다. 이러한 신라의 단일화 정책과 통합화는 지방의 세력을 물어내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파사이사금의 정책에 의하여 파사이사금 29년에 다벌국, 비지국 등도 신라에 합병된다. 또한 파사이사금의 아들 지마이사금에 이르러 압량국 등이 신라에 의하여 멸망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ꡔ삼국유사ꡕ에 등장하는 연오랑과 세오녀의 사건을 이해할 수 있다. 파사이사금의 이러한 적극적 정체 이후 8대 왕인 아달라 4년(157년)에 연오랑과 세오녀가 왜로 넘어간 사건이 있었다. 이것은 당시 신라의 통합 정책에 대한 반대세력의 왜로의 이민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 본다면, 신라는 4세기말에 이르러야 진정한 국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참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신라는 1세기에 체계적인 관리 체계를 가진 국가를 갖추었고, 1세기 초에도 진한의 대표국으로 있었고, 1세기 후에 이르러서는 파사이사금 이후부터는 신라가 사실상 다른 소국을 직접적으로 지배하며 하나의 국가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1세기에 이미 진한의 패권 국가로 존재하였고, 다른 소국을 신라의 한 변방이나 지방으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신라와 같은 국가가 존재한 이상 한반도 남부를 일본이 지배하였다는 일본의 임나일본부는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신라는 탈해이사금 시대에 낙동강 하류에 있던 우시산국(부산)과 거칠산국(동래)을 영향력 가운데 둔 것으로 보인다. 즉 신라는 1세기 중반 이후에 낙동강 하류에 이르는 교역권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신라는 당시 소국들은 자신의 영향 가운데 두고 그 영향력을 유지한 국가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결론적으로 신라는 4세기 말에나 국가의 형태를 가졌다는 것은 이로 인하여 말이 되지 않는다.
3.백제.
이어서 ‘백제’를 살펴보자. 현재 교과서적 지식에 의하면, 백제는 3세기 중엽에야 국가의 형태를 갖추었다. 하지만 이는 위의 신라와 경우와 마찬가지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것은 문헌적으로도 당연한 것이지만, 고고학적 성과에서 분명해졌다. 그렇기에 이병도와 이기백 그리고 김원룡 등에 의하여 주장되어진 백제의 시작과 국가형성에 의한 논의는 재고되어야한다. 이들은 삼한시대, 즉 원삼국시대를 주장하면서 이 당시에는 백제가 아직 국가의 형태를 가지지 못하고, 3세기 중엽에 이으러 주변의 소국을 정리하며 삼한시대가 마감되고, 비로소 진정한 국가로 형성되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1-3세기에 이르는 동안 백제는 마한의 한 부족국가 정도로 온전한 국가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풍납토성의 발굴이라는 고고학적 성과는 이러한 결론을 파기하는 결과를 낳았다.
풍납토성은 탄소연대 측정이라는 과학적 방식에 의하면 이 토성은 서기 200년경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 성의 규모나 그 유물에 의하면 이 토성의 주인공은 대단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바로 백제인 것이다. 그러면 백제는 3세기 이전에 이미 국가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고, 이로 인하여 절대적 권력을 가진 이가 등장하였다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가 부여에 그 근거를 두고 건국하였듯이 백제도 부여와 고구려와 같은 맥에서 자신을 이해하였다. 실재로 백제는 고구려계 유민이 남하하여 중심이 된 국가가 백제이다. 실재로 이들의 왕조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뿌리를 부여에 두고 스스로의 성씨를 ‘부여’라고 하였다. 또한 이 백제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남부여’이다. 이들은 지금의 서울을 근거로 하여, 철기와 농업문화에 근거하여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그들의 북방에 있던 최씨왕조의 낙랑국과 신라와 국경을 두고, 발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낙랑국과는 처음에는 친선의 관계를 가지기도 하였으나 백제의 강성함 이후 이들은 적대적 관계가 된다. 실재로 온조왕 17년(기원전 2)에 낙랑국이 백제의 위례성을 공격하였다고 ꡔ삼국사기ꡕ는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 전인 온조왕 11년에는 낙랑국이 말갈을 시켜 백제의 목책(木柵, 나무벽을 가진 성)을 공격하게 하고, 백 여명을 죽이고 인질로 데려갔다고 한다. 이에 같은 해 가을 백제는 목책을 강화하여 낙랑국의 남하를 저지하였다고 한다. 낙랑국은 경기도에 위치한 백제를 지나 남하하는 것은 실패하고, 강원도를 통한 신라로의 남하는 어떤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혁거세 시대에 신라의 수도인 금성(경주)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실재로 백제 온조왕의 시대에 백제의 남쪽 즉 강원도의 춘천까지 낙랑의 영토라고 ꡔ삼국사기ꡕ는 기록하고 있다. 당시 백제의 부분에 있던 말갈은 낙랑국의 지배 가운데 있던 공동체로 보인다. 실재로 이들은 낙랑국의 명령에 의하여 백제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들 말갈도 백제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온조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서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다. 왕이 참여하는 등 이러한 백제의 적극적 방어는 낙랑국의 남침을 저지한 것으로 보인다. 북쪽의 공격을 막으면서 백제는 서서히 스스로의 세력을 확고한 것으로 보인다. 낙랑과 말갈의 남하와 공격에 대한 백제의 적극적 맞대응은 낙랑의 영향력에 있던 강원도 부근과 그 외 북부의 낙랑의 영향력을 흔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온조왕 22년(40년) 말갈의 공격에 의하여 백제인 백 여명이 사망한 것에 온조왕은 당시 최정예 부대인 기병을 파견하여 이를 막고 응징하게 하였다. 그리고 3년 뒤 백제의 북동쪽에 위치한 남옥저의 유민들이 백제에 유입된 것이 ꡔ삼국사기ꡕ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낙랑국은 대동강 유역에 위치하였고, 이는 동으로는 강원도 지역에 이르렀고, 이러한 확장은 당시 함경도 지방의 남옥저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남옥저의 유민이 낙랑국에 대응할 세력으로 백제를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상 낙랑국은 신라의 수도의 공격도 시도할 만큼 강성한 국가였다. 하지만 유독 고구려와 백제에 대해서는 강력한 입장을 가지지 못했다. 분명 백제는 초기 온조왕부터 강력하게 군사적 입장을 가지고 국가의 기반을 다져간 것으로 보인다. 온조왕 때 이미 15세 이상의 남성으로 하여금 성을 수리하게 하고, 정예의 기병을 가졌으며, 낙랑국과 외교관계를 가질 수 있는 그런 국가였던 것이다.
그 외에도 백제는 상당한 국력을 가진 국가였음을 보여주는 것은 많은 기록에서 볼 수 있다. ꡔ일본서기ꡕ는 백제가 부남국(지금의 캄보디아지역)의 재물과 노비를 백제에 하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외 ꡔ일본서기ꡕ는 일본이 백제를 거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왜와 교류하려한 곤륜(지금의 베트남, 타이, 미얀마, 캄보디아, 남부 말레이반도 지역)의 사신을 처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백제가 일본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에 어떤 영향력을 가짐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한 흑치상치(630-689)도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1929년 10월 발굴된 묘에서 흑치상치의 묘지석이 발굴되었는데, 이곳에선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라고 하고 있다. 이는 흑치씨가 백제의 왕족임을 보여준다. 또한 흑치는 최근 중국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여 지금의 필리핀을 가리키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ꡔ삼국지ꡕ에선 일본열도에서 먼거리에 흑치국이 있음을 적고 있다. 그렇다면, 흑치국, 즉 필리핀과 흑치상치는 어떤 관계인가? 그리고 이 흑치상치의 본래 성이 백제 왕족인 부여씨의 일원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백제가 어떤 식으로든 동남아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여진다.
3.1.대륙백제.
위에서 백제는 한반도에 존재해야한다. 그렇지만 ꡔ삼국사기ꡕ는 백제와 북위의 전쟁을 보여주고 있으며, ꡔ송서ꡕ에서도 이 두 국가의 전쟁을 전해주고 있다. 488년 일어난 전쟁은 그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여러 가지 의문을 남긴다. 5세기 후반 북위는 남쪽에 송나라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북위가 고구려로 가로막힌 백제를 배를 타고 가서 공격한 이유는 무엇인가? 북위는 왜 굳이 힘든 전쟁을 한 것인가? 바다를 건너 순전히 배로 군수물자를 운반하며 수행한 이 전쟁은 결국 북위의 패배로 끝났다. 이렇게 힘든 조건 속에서 북위가 백제를 공격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은 백제가 중국 대륙에 존재하였다면 해결되어질 수 있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공격한 것이 아니라, 옆에 있던 대륙의 백제를 공격한 것이다. 북위는 자신의 해변을 차지한 ‘대륙백제’와 전쟁을 한 것이다.
ꡔ송서ꡕ는 백제를 고구려와 함께 요동에 있던 국가라고 하고 있다. 또한 ꡔ자치통감ꡕ은 백제가 부여를 공격하였다고 한다. 만일 여기에서 말한 백제가 한반도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의 백제라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백제가 부여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고구려라는 강력한 세력을 가로질러야한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ꡔ송서ꡕ의 기록과 같이 백제가 대륙에 위치한다면 문제를 달라진다. 그러면 백제는 북위와의 전쟁도 부여의 공격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서(ꡔ주서ꡕ, ꡔ수서ꡕ, ꡔ한원ꡕ)는 ‘구태’라는 사람에 의하여 백제가 건국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구태라는 인물은 부여계 인물이라고 하였다. 실재로 한반도의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도 자신의 성을 부여씨로 하는 등 부여계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백제의 온조왕이 고구려 주몽왕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고구려를 걸쳐 부여에서 남하하였다고 하지만, 구태는 그저 부여에서 남하하였다고 한다.
온조의 백제는 분명 한반도에 존재하였다. 그러나 구태의 백제는 대륙에 위치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부여에 뿌리를 둔 국가로 동일한 국호를 사용할 정도로 어떤 관계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백제란 국가는 건국에 있어서 세 가지 주류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구태계열의 대륙백제와 지금의 인천에 위치한 비류계 백제 또한 신라와 당나라에 의하여 멸망한 한반도의 온조계 백제이다. 이들은 부여계 유민으로 ‘부여’씨의 왕족이 지배한 국가이다. 일차적으로 비류계 백제는 온조계 백제에 병합되고, 이후에 구태백제가 온조계 백제에 병합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구태계의 대륙 백제는 지금도 중국 가운데 ‘백제’라는 지역으로 남았다. 마치 부여라는 지명이 백제의 역사를 말해주며 현재 한반도에 존재하듯이 말이다.
대륙백제는 북위의 해안 진출에 걸림돌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대륙백제를 북위는 공격한 것이고, 이에 한반도의 형제국인 동성왕은 대륙백제에 지원을 하였을 것이다. ꡔ삼국사기ꡕ 동성왕에 관한 기록에서 나오는 북위와의 전쟁은 이러한 것일지 모른다.
4.마한.
‘마한’은 어떤 나라인가? 백제는 마한의 일부이고, 마한은 백제가 지금의 전라도를 통일하기 전까지 여러 소국으로 존재한 연합국가였는가? 그렇다면, 마한은 백제가 국가의 정비를 갖추었다고 하는 3세기까지 존재하고, 그 이후 그 패권을 백제에 넘기고 사라진 국가인가? 이미 위에서 백제는 이미 1세기에 국가의 체계를 갖추었다고 하였다. 백제 개국 초기부터 당시 강대국이던 낙랑국의 공격도 막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ꡔ삼국사기ꡕ에 의하면, 온조왕 26년(8년)에 온조왕은 마한을 공격하였고, 다음해 마한을 병합하였다. 그렇다면, 하지만 ꡔ삼국사기ꡕ에 의하면, 신라의 탈해이사금시대 마한의 장수 맹소가 신라에 투항하였다고 하며, 고구려 태조대왕 70년(122년) 고구려는 마한, 예맥과 연합하여 요동을 공격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온조왕이 마한을 함락하였다는 기록 이후에도 꾸준히 마한이란 이름의 국가가 존속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미 망한 나라가 100여년이 지나서 고구려와 연합을 이루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렇게 마한은 많은 점에서 역사의 수수께끼 속에 있다.
마한은 초기 한반도의 중심국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ꡔ삼국사기ꡕ와 ꡔ삼국유사ꡕ는 모두 마한이 진한과 변한의 대국(大國)으로 존재하였으며, 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도 대국의 위치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ꡔ삼국유사ꡕ에 의하면, 마한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이 위만을 피하여 한반도에 들어와 세운 국가이다. 이와 같은 마한은 곧 한국(韓國) 혹은 진국(辰國)의 중심 국가이다. 한국이란 마한과 변한 그리고 진한의 상위 개념의 국가로 마한 54국 그리고 진한과 변한 24국으로 이루어진 국가이다. 마한은 중국 진나라의 횡포를 피해 내려온 유민에게 자신의 동쪽을 내어주고 이것이 진한이 된다. 마한은 남하한 세력과의 전쟁이 아닌 공존을 선택하였지만, 스스로의 속국으로 이해하였다. 이렇게 마한은 한반도의 중심 세력이었다.
마한은 신라와 백제 그리고 진한과 변한 등에 대해서도 대국으로 공물을 요구하며 대국와 소국의 예의를 지키라고 한다. ꡔ삼국사기ꡕ에 의하면, 신라는 시도 혁거세 거서간 38년(전20년)에 사신을 보내어 마한의 왕에게 보내었다. 이에 마한의 왕은 진한과 변한의 대국이며, 이들은 마한의 속국에 지나지 않기에 공물을 바치는 것은 국가 사이의 예의라고 한다. 이에 신라의 사신인 호공은 신라는 이미 낙랑국과 변한 그리고 왜인이 쉽게 여기지 못하는 국가가 되었으며, 그러한 국왕이 사신을 마한의 왕에 보낸 것은 대국에 대하여 예의를 다한 것이라고 하였다. 신라의 신하들은 기원전 19년 마한왕의 죽음을 때로 여겨 마한을 공격하자고 하나, 혁거세 거서간은 이를 거부한다. 즉, 왕의 죽음을 틈타서 공격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왕이 거절한 이유는 당시 신라의 국력이 마한을 공격하기에는 무리라고 여긴 이유에서 일 것이다. 신라는 건국 초기 보다 낙랑국의 공격으로 수도를 유린당할 지경이었다. 낙랑국의 공격에 신라가 함락 당하지는 않았지만, 국가의 위기였던 것이다. 이런 시기에 마한을 공격한다는 것은 신라의 건국 초기 큰 무리였을 것이다. 반면 마한은 그렇게 국력이 약하지 않았다. 혁거세 시대에 신하들이 마한을 공격하자고 하였지만, 마한은 그리 약하지 않았다. 마한은 그 후 20여 년이 지나 낙랑국의 공격을 막아낸 백제조차 쉽게 탐하지 못한 그런 강대한 국가였다. 낙랑국에 수도를 유린당할 지경이 신라가 낙랑국의 공격을 훌륭하게 막은 백제도 쉬이 공격하지 못한 국가를 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백제와 마한의 관계를 더욱 더 분명히 해보자. ꡔ삼국사기ꡕ에 의하면, 백제와 온조왕이 마한을 두고 견제하려 하자, 마한왕은 백제를 두고 백제의 건국에 있어서 마한이 땅을 떼어주고 살도록 하여 국가를 이루게 해주었는데, 이제 와서 강성하여 마한을 견제하니 이는 예의가 아니라고 하며 경고하였다. 이에 온조왕은 마한을 두고 쌓은 목책을 헐었다. 하지만 온조왕은 마한왕의 이러한 경고에 순순히 목책을 헐은 것은 아직은 백제가 마한의 적이 되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온조왕은 마한과 진한을 탐한 인물이었다고 ꡔ삼국사기ꡕ에 기록되어 있으며, 실상 사냥을 위장하여 군사를 일으켜 마한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온조왕이 마한을 공격하고 함락하였다는 온조왕 27년(9년)은 마한의 국력을 분명하게 약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완전히 마한을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마한은 기원전 194년 기자조선이 위만조선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이 배를 타고 한반도에 들어와 세운 국가이다. 배를 타고 들어왔다고 하는 것은 여러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이다. ꡔ후한서ꡕ와 ꡔ삼국지ꡕ에 배를 타고 갔다는 기록이 등장하며, ꡔ삼국유사ꡕ에도 바다를 건너갔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만일 기존의 학설과 같이 고조선이 평양이 위치한다면, 그리고 마한이 전라도라면, 배를 탄다거나 바다를 건너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역사서의 공통된 기록은 고조선이 한반도의 밖에 위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한반도 밖에 요동에 위치한다면, 배를 탄다거나 바다를 건너 한반도에 마한을 세웠다는 것이 설명되어질 수 있다. 마한은 고조선의 유민이 주가 되어 세워진 국가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한은 쉽게 체계화된 국가의 형태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한은 한반도의 국가들인 한국의 대국이 쉽게 되었다. 마한은 신라와 백제 그리고 가야가 한반도에 각각의 위치를 점유하기 이전에 한반도의 중심 국가로 즉 대국으로 있었던 국가였던 것이다. 마한은 기자조선의 왕족을 비롯한 많은 지배자들의 유입으로 세워진 국가로 쉽게 전진 문화를 가지고 한반도에 진출하여 대국으로 쉽게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와 백제는 1세기 초부터 이미 국가의 형태를 가진 국가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가야도 1세기 후반에 철강생산에 근거하여 발전하였다. 마한은 기원전 2세기부터 신라와 백제 그리고 가야의 성장 이전까지 한반도의 중심 국가, 즉 한국의 대국이었다.
이제 마한의 위치 문제이다. 마한은 흔히 한강 남부 지금의 전라도 지방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많은 의문을 가진다. 고구려의 태조대왕은 마한과 예맥을 동원하여 요동을 공격하였고, 이에 한나라와 부여의 연합군과 전투를 하였다. 기원 후 121-122년에 일어난 일이다. 이는 마한이 백제의 온조왕에 의하여 기원 후 9년에 멸망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고구려가 마한과 예맥과 연합하기 위해서는 마한이 전라도가 아니라, 이보다 북쪽에 위치해야한다. 실재로 최치원과 일연은 진한은 신라이지만, 마한은 고구려라고 한다. 그리고 변한은 백제라고 한다. 즉 마한은 고구려의 땅에 있었다는 것이다.
마한은 고조선의 유민에 의한 국가이고, 이는 아직 대동강 유역에 낙랑국이 건국되도 전이며,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백제가 건국되기도 전이다. 마한은 당시 한반도의 소국을 스스로의 속국으로 여기고 스스로를 대국으로 여겼다. 마한은 한반도 전반을 자신의 영역으로 이해하였으며, 이 가운데 동쪽을 진한에 할애하였으며, 한강 유역을 백제에 할애하였다. 그렇다면, 진한과 같은 국가가 성립하기 이전에 마한은 한반도 전체를 스스로의 영역으로 이해하였다. 하지만 온조왕 9년에 백제는 마한으로부터 전라도를 자신의 영역에 두었다. 하지만 온전한 것은 아니었고, 미처 백제에 속하지 않은 세력은 탈해이사금 7년(61)에 신라에 투항하였다. 이는 당시 신라에 투항하였다는 마한의 장군 맹소의 이야기가 뒷받침해준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한반도에서 마한의 세력을 북부로 한정하게 하였다. 한강의 백제와 대동강의 낙랑국 그리고 경상도의 진한과 신라는 마한을 지금의 평안도 인근의 작은 국가로 몰아놓은 것으로 보인다. 우선 백제와 낙랑국의 성장은 마한의 허리를 끊었고, 이는 백제가 쉽게 전라도의 마한 세력을 합병한 이유가 되는 것 같다. 평안도 인근에 한정되어 버린 마한은 고구려에 영향력 가운데 있는 소국으로 명맥만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청에 의하여 고구려와 함께 한나라와 부여 연합군과 전쟁을 하였다. 하지만 고구려, 마한, 예맥 연합군은 한나라와 부여 연합군에 대패한다. 이러한 대패는 마한에게 큰짐이 되었고, 서서히 고구려에 합병되어간 것으로 보인다.
5.왜국.
여기에서 ‘왜국’은 지금 일본열도의 일본과 구별되어지는 한반도 전라도 나주를 중심으로 한 국가이다. 신라는 건국 이후 줄곧 왜의 공격을 받는다. 왜는 어떤 세력이기에 바다를 건너 신라를 공격할 수 있었을까? 과연 여기에서 말하는 왜 혹은 왜국은 과연 일본열도에 있던 국가였는가? ꡔ삼국지ꡕ는 한반도 내 국가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한국은 대방군의 남쪽이며, 그 동과 서는 바다로 적고 있다. 그리고 변진의 독로국이 왜와 마주한다고 한다. 그리고 ꡔ후한서ꡕ의 기록은 삼한의 남쪽, 즉 한반도의 남쪽에 왜국의 위치를 정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3-4세기 이전의 중국 기록이다. 반면 그 이후의 기록인 ꡔ송서ꡕ에선 왜국이 고려(고구려)의 동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고 적고 있다. 이는 그 이전에 접해있다고 하는 표현과 달리 왜가 한반도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록만을 문헌학적으로 보자면, 적어도 3세기까지 왜국은 한반도 내에 있었으며, 그 이후엔 바다 건너 일본열도에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상 일본사 연구가들은 4세기 후반까지 일본엔 통일된 정권을 가지지 못하였다고 한다. 당시 고구려와 같은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에 존재한 일정의 세력이 4세기 이후 일본열도로 들어간 것은 아닌가?
일제시대 일본은 나주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유물조사가 있었지만, 일본은 예외적으로 이에 대한 발굴보고서를 내지 않았다. 왜 일까? 나주에서 발굴된 고분의 특징은 하나의 무덤에 여러 개의 옹관이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수십 개의 옹관이나 석실이 합장의 형식으로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의 분묘방식은 한반도의 어디에도 볼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이것은 일본 천황릉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1990년 발굴에서 발견된 장식용 토기는 일본 천황릉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다. 이러한 나주의 무덤은 최근 발굴 결과에 의하면 3세기 경의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의 건국 초기 신라는 왜국으로 부터의 다수의 공격을 받았다고 기록되어있다.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399년에서 404년에 이르기까지 5만의 대군으로 신라를 도와 왜국을 물리쳤다. 이러한 공격 후 428년 이후 180여 년 동안 왜국의 신라 공격이 없었다. 갑자기 공격의 횟수가 줄어든 이유는 무엇인가? 아니 200여년 동안 공격이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반도 가운데 즉 나주에 있던 왜국이 일본열도로 그 세력이 이동되면서 일어난 결과는 아니겠는가?
왜국은 한민족의 국가로 전라도 나주를 중심으로 독자적 세력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이르는 고구려의 공격으로 사라지게 되고, 그 중심 세력이 일본열도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왜국은 전라북도와 경기도에 있던 백제와 친하였고, 반면 신라와 대립적 구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신라에 대한 그것의 많은 공격을 통하여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는 왜국에게 방패와 같은 국가였다. 백제는 북쪽의 낙랑국이나 말갈 그리고 고구려로부터 왜국의 독자적 발전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백제는 왜국에게 사라져서는 안 되는 국가였다. 하지만 신라는 달랐다. 신라는 왜국의 경쟁 대상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왜국의 동쪽으로의 팽창은 신라와 고구려의 연합으로 무산되고, 결국 패망에 이르게 된다.
왜국이 사라진 자리는 고구려의 것이나 신라의 것이 되지 못했다. 당장 고구려가 왜국의 공격을 목적으로 신라에 주둔한 것은 신라에게 짐이 되었고, 백제 역시 고구려의 남쪽 진출이 짐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신라와 백제의 연합으로 이어진다. 또한 고구려가 왜국을 물리쳤지만, 지배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고구려는 백제를 건너 왜국을 지배할 수 없었고, 적대적으로 변한 신라를 통하여 왜국을 지배하지도 못하였다. 이때 백제는 전라남도로의 남하를 시도한다. 5세기 말 백제의 남하는 이러한 정세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백제의 영산강 지배가 이때 이루어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영산강은 나주와 같은 왜국의 자리를 지나는 강이다. 백제는 이에 왜국의 자리를 지나 경상남도 하동에 이르게 되고, 가야에 군대를 진출시키게 된다. 백제 이러한 남하는 왜국의 이러한 상황을 통하여 이해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왜국은 한반도의 한민족 국가였다. 이는 고구려에 의하여 망하고, 그 지배층은 일본열도에 도망하여 주된 세력을 이루게 된 것이다.
5.1.기원 후 3세기까지 일본열도의 상황
: 당시 일본은 한반도에 식민지를 가질 능력이 있었는가?
ꡔ삼국지ꡕ의 왜는 위와 같이 한반도에 등장하는 것과 함께 일본열도의 것도 다루어진다. ꡔ삼국지ꡕ와 ꡔ후한서ꡕ에 등장하는 일본열도는 하나의 단일 국가 체제나 아니라, 백여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국가로 소개되고 있다. 즉 지금의 일본열도에 존재하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백여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국은 연합국가의 형태로 그 가운데 중심국가로는 사마대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를 ꡔ삼국지ꡕ는 한국(한반도)을 지나, 그 남동쪽에 구사한국에 이르게 되고, 다음에는 ‘대마국’이며, 이 다음에 말노국에 이르게 된다. 이 기록에 의하면 한국은 마한이라 할 것이다. 마한과 구사한국을 지나 바다를 건너면, 지금의 대마도에 해당하는 대마국이 등장한다. 이 대마국은 쌀을 남북에서 사들인다고 하는데, 이 남북은 북의 가야와 남의 일본열도로 여겨진다. 이 대마국은 ‘비구’라는 관리에 의하여 다스려졌고, 그 부관으로는 ‘비노모리’가 있었다.
이러한 대마국을 지나면, “말노국”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말노국은 일본열도에 있던 소국가였다. 그리고 동남쪽 육지에는 “이도국”이 있으며, 이곳의 관리는 ‘이지’라고 불렸으며, 부관은 ‘설모고’, ‘병모고’ 등이라 불렸다. 그 동남쪽으로 백 리 거리엔 “노국”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의 관리는 ‘시마고’였고, 부관은 ‘비노모리’라고 불렸다. 또 동쪽엔 “불미국”이 있었고, 그것의 관리는 ‘다모’라 불렸고, 부관은 노국과 같이 ‘비노모리’라 불렸다. 그 남쪽에는 “투마국”이 있었으며, 이곳의 관리는 ‘미미’라 불렸고, 부관은 ‘미미나리’라고 불렸다. 또 남쪽에는 “사마대국”이 있었다. 이곳의 관리는 ‘이지마’라 불렸고, 그 다음을 ‘미마승’이 위치하였고, 그 다음 지휘는 ‘미마휘지’가 있었고, 마지막에는 ‘노가제’라 불리는 이가 있었다. 이들 소국은 “여왕국”으로 여왕이 다스렸다. 여왕은 사마대국에 거하였다. 여왕이 다스리는 국가는 이 외에도 귀노국, 궁신국, 읍리국, 지유국 등이 있었다. 이들 국가는 여왕을 중심으로 연방국가의 형태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각각의 소국은 왕(王)이 아닌 관(官), 즉 관리가 다스렸다고 한다. 이것은 여왕을 중심으로 이들이 하나의 연방제 국가를 이루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남쪽에는 “구노국”이 있었다. 이곳은 남자 왕이 있었다고 한다. 왕은 이곳에 ‘구고지비구’라는 관리를 두었다. ꡔ삼국지ꡕ는 이곳이 여왕의 영향력 밖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구노국와 여왕국이라 불리는 여왕의 연합국은 먼 거리를 떨어져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노국 이외에도 여왕국의 남쪽에는 “주유국”이 있었다. 하지만 이 주유국에 관해서는 ꡔ삼국지ꡕ도 ꡔ후한서ꡕ도 많은 기록이 없다.
이들은 모두 왜의 종류이다. ꡔ삼국지ꡕ는 일본열도를 왜의 땅이라고 한다. ꡔ삼국지ꡕ는 이들 여왕국은 본래 남자로 왕을 삼았으나, 서로 전쟁이 있은 이후 여자를 왕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남편이 없고, 남동생이 있어 정치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여왕은 큰 정치적 힘을 가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당시 일본열도의 풍습을 통하여 볼 때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열도에선 여성을 남성보다 낮은 존재라고 보았다. 경범죄를 지은 인물은 그 자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처자를 죽인다고 하는 것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아내 혹은 여인의 생명 가치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이들이 여성을 왕으로 내세운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간의 권력의 균형을 위해서일 것으로 보인다. 남자왕에 비하여 여성왕은 단지 상징적 의미의 왕으로 존재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실상 왕을 전쟁 이후 서로 간의 평화를 위하여 세웠다는 것은 어느 한 소국의 승리가 아니라, 서로의 세력을 인정하면서 최고 통수권자를 허수아비로 만들기 위해서 일 것이다. 허수아비가 아니라면, 권력을 가진 왕은 하나의 권력 체계를 위하여 노력할 것이고, 이것은 소국의 지배자들에게는 좋지 않은 것이었다. 이것은 실상 소국 사이의 관리, 즉 지배자의 호칭이 서로 다른 것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서로의 독립성을 인정하면서, 형식적으로 여왕을 내세워 연합국가를 이룬 것이다. 시집을 가지 않은 여왕은 어떤 남성적 권력과도 결탁하지 않은 형식적 국왕으로는 좋은 예가 되었을 것이다.
이에 여왕은 한나라의 영향력에 있던 대방군에 사신을 보내어 강대국으로 부터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여왕은 자신의 측근을 파견하여 공물과 남자 4명 그리고 여자 6명 등을 바친다. 이에 의하여 한나라로부터 여왕은 왜왕으로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왜왕은 한나라와 서로 사신을 주고받는다. 이러한 정치적 행위는 여왕의 힘을 더욱 더 강화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운데도 일본열도에는 여왕국의 여왕 비미호와 구노국의 남왕 비미공호소는 서로 불화를 반목하였다. 이에 한나라 조정은 그들의 사이의 분쟁을 억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열도 내분은 꾸준히 이어지고, 여왕 비미호가 죽음으로 남왕이 등장하지만, 정치적 혼란을 계속 유지되었다. 이런 혼란은 다시 비미호 계열의 여정인 대여가 정권을 잡음으로 해결되었다. 이것은 다시 여왕을 선택함으로 서로의 이익을 보장받고 상징적 왕을 내세우기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대여는 다시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그것은 여왕 대여가 다시 스스로의 세력을 위하여 한나라의 힘을 빌린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일은 3-4세기 이전까지 일본열도의 일들이다. 이들이 일어나는 동안 한반도에는 이미 신라와 백제 그리고 고구려 그리고 가야가 힘을 겨루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 일본 자체 내의 이러한 상황에서 4세기 중엽까지 한반도를 지배하였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이들은 아직 하나의 세력을 이루지도 못했다. 이들은 여러 소국이 있었고, 어느 하나로 세력이 집중되지 못하는 시대였다. 이러한 상황은 4세기 후반에 막을 내리고 권력의 집중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고구려가 왜국을 공격한 시기와 때를 같이 한다. 사실 고구려가 왜국을 공격하였다면, 혼란 속의 왜는 더욱 더 혼란에 빠져야하지만, 일본열도는 더욱 더 체계적인 국가의 체계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고구려의 공격에 의하여 한반도 내의 왜국이 일본열도로 진출하면서 일어난 것은 아니겠는가?
5.1.1.비미호는 누구인가?
여왕인 비미호, 즉 신공왕후에 대하여 살펴보자. 비미호는 일본의 최초 통일 세력인 야마토 정권의 1대 왕이다. 그녀는 어떻게 늙은 나이와 결혼을 하지 않은 몸으로 왕이 될 수 있었겠는가? 이에 위하여 필자는 ꡔ삼국유사ꡕ의 연오랑 세오녀의 이야기로 넘어가려 한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157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비미호의 생존 시기는 한나라의 환제(146-167년)와 영제(168-189년) 재위 기간과 때를 같이 한다. 그리고 비미호가 173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었다는 기록은 이러한 그녀의 생존연대를 더욱 더 분명하게 하고 있다. ꡔ위지ꡕ에 의하면, 신공왕후는 247년에 죽었다. 그런데 ꡔ일본서기ꡕ는 그녀가 100세를 살았다고 한다. 이를 사실로 그대로 받아드리지 않더라도, 그의 생존 연대는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열도로 진출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이들이 넘어가 일본에서 왕이 되었다는 것은 더욱 더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또한 비미호란 이름은 일본어로 ‘히미코’이고, 이는 ‘히’(日)가 태양을 의미하고, ‘이코’가 여자를 의미한다는 것을 본다면, 태양의 여자라는 의미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녀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일을 맡은 인물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실재로 ꡔ삼국지ꡕ는 비미호를 귀신을 부리는 ‘신녀’(神女)라고 했다. 그런데 연오랑과 세오녀는 해와 달과 관련된다. 신라에게 이들이 일본으로 가자 해와 달의 정기가 일본열도로 넘어갔다고 ꡔ삼국유사ꡕ를 전하고 있다. 이들은 신라가 소국의 자립성을 부정하고, 이들은 신라라는 하나의 국명으로 합병해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라의 확장을 거부한 영일만의 세력이 일본열도로 넘어갔고, 이들의 대명사가 연오랑과 세오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일본열도로 들어가 비미호라는 인물로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일본열도 내의 내전을 종식하기 위한 형식적 왕은 어느 한 국가의 인물이 되기 보다 신라에서 유입된 제 삼의 세력이 더 적절했을 것이다.
6.개마국, 갈사국, 구다국, 행인국.
남방에 이서국과 왜국 그리고 백제 및 신라 등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이러한 한반도 남부의 국가들과 함께 한반도 북부와 만주 그리고 요동 지방에는 고구려, 낙랑국, 동예, 읍루, 옥저, 부여 등이 있었다. 그 외에도 일찍이 고구려의 세력에 속해버린 ‘개마국’과 ‘갈사국’ 그리고 ‘구다국’과 ‘행인국’등이 있었다. 이들은 각각 한민족의 국가로 북방에서 나름으로 활동하다가 고구려라는 거대 세력이 유입되었다.
개마국와 갈사국 그리고 구다국과 행인국은 개마고원과 함경도 그리고 평안도 일대에 존재하였던 국가이다. 가장 먼저 고구려에 속하게 된 국가는 행인국이다. 행인국은 기원전 32년에 고구려의 시도인 동명성왕의 시기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ꡔ삼국사기ꡕ에 의하면, 고구려는 태조대왕 20년까지 행인국, 개마국, 갈사국 그리고 구다국 등을 정벌하였다. 대국으로 고구려의 많은 부족과 소국은 ‘나’와 ‘노’자가 더해진 것이 많은 데, 이는 만주어로 ‘나’자가 물가의 땅을 의미하는 것과 관련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많은 문명이 물가에서 일어났듯이 이들 소국도 물가에서 일어난 것이며, 이를 국가나 부족명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나’나 ‘노’가 붙은 소국들은 동가강 유역의 소국들이다. 반면 개마국이나 갈사국 그리고 구다국은 동가강 유역의 국가가 아니다. 고구려의 중심 세력이 된 계루(부) 역시 나 혹은 노가 붙지 않는다. 고구려의 5부족 혹은 세력인 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가운데 오직 계루부 만이 그러한 것이다. 이는 계루부와 개마국 그리고 갈사국과 구다국만이 동가강 유역의 물가에 있는 지역에 근거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계루국은 고구려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또한 이들은 고구려의 정통성이 되었다. 후에 고구려의 뒤를 이어간 발해의 왕도 계루군왕이라 불린 것도 이러한 것이다.
부여에서 남하한 고구려의 계루부는 다은 4부에 달리 지금의 동가강 유역이 아니라, 회령이나 함경북도 지방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계루부의 지역은 개마국, 갈사국 그리고 구다국의 지역과 유사하다. 갈사국은 압록강 유역에 근거한 국가로 부여왕 ‘대소’의 동생이 세운 국가이다. 또한 개마국은 함경도일대의 개마고원 일대에 있던 국가이다.
초기 고구려의 패권은 소노족이 잡고 있었다. 소노족은 동가강 유역에 기반한 세력이다. 이에 계루부는 자신의 근거와 유사한 함경도 부근의 세력을 결집한 것으로 보인다. 대무신왕에 의하여 개마국이 그리고 태조대왕에 의하여 갈사국이 고구려에 정복당하였다. 그리고 개마국이 정복당하자, 이에 구다국은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이러한 것은 계루부가 함경도, 백두산 그리고 압록강 유역의 세력을 결집하여 소노족의 기반인 동가강 유역의 세력을 지배권 가운데 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그리 큰 전쟁 없이 고구려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ꡔ삼국사기ꡕ에 의하면 개마국이 고구려에 병합되자, 구마국 역시 고구려가 두려워 투항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고구려의 계루부가 고구려의 주체로 부각되면서 같은 기반의 세력이 힘을 모은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특히 개마국, 갈사국, 구마국 그리고 계루부의 세력권은 철기 생산에 있어서 고구려에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7.예국과 동예 그리고 옥저.
‘옥저’와 ‘동예’는 한민족의 국가로 우리의 역사 가운데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국사책의 지식에 의존하는 이들은 옥저와 동예 그리고 읍루와 같은 국가는 권력의 중앙집중화나 체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알 것이다. 하지만 이미 철기 시대에 이른 정치적 공동체가 아직 체계적인 국가의 형태를 가지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ꡔ후한서ꡕ에 따르면 동예는 북쪽으로 고구려와 옥저와 국경을 마주하며, 동쪽으로는 동해바다이고, 서쪽으로는 낙랑국과 국경을 마주한다고 한다. 또한 이는 과거 고조선의 영향력 가운데 있던 영토라고 하였다. 하지만 과연 동예가 동해안의 강원도 지방에 위치하였을까? 그것은 고조선의 왕 ‘우거’를 배반하고, 동예의 지도자인 ‘남여’가 28만호를 거느리고 요동의 한나라에 투항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 동예를 압박하던 고조선을 피하여 동예는 요동으로 투항해가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예는 우리의 생각보다 북부에 위치해야한다. 또한 한나라 초기에 한나라에 큰 난이 있어서 연나라와 제나라 그리고 조나라의 사람들이 동예로 피난을 왔다고 하는데, 만일 이들이 동예로 피난을 왔다면, 고조선과 부여를 걸쳐 동예까지 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를 보아도 우리의 생각보다 동예는 북쪽에 위치해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동쪽이란 의미가 더해진 동예라는 표현보다는 ‘예국’으로 부름이 더 나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ꡔ후한서ꡕ와 ꡔ삼국지ꡕ는 이를 ‘예’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ꡔ후한서ꡕ와 ꡔ삼국지ꡕ는 모두 ‘예국’을 온전한 국가가 아니며, 권력의 집중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지만, ꡔ후한서ꡕ는 28만 호를 거느리는 수장은 있지만, 군장은 없었다고 하며, ꡔ삼국지ꡕ는 사람을 죽이면 사형으로 죄 값을 하며, 읍락 사이의 다툼은 소와 말로 갚는다고 적고 있다. 이를 ‘책화’(責禍)라고 한다고 한다. 즉 법령을 가졌단 말이다. 거기에 동예가 고구려의 식민지로 되자 한나라가 이를 수복하는데, 이에 한나라에 투항한 ‘불내’를 예의 왕에 임명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군장은 없지만, 자체 법령을 가지며 왕은 존재한다는 논리가 되는가 말이다. ꡔ삼국사기ꡕ에서도 동예의 ‘왕’이란 칭호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동예는 예족의 국가로 부여와 그 맥을 같이 하며, 여러 면에서 고구려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언어와 법 그리고 풍습이 고구려와 유사하다는 것은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를 통하여 동예가 부여와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하며 가까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나라와 고구려가 주도권을 가지고 다툼을 하였다면, 한나라와 고구려와 가까운 북부에 위치해야한다. 그런데 예국이 우리가 아는 것처럼 동해안에 위치한다면, 한나라와 고구려가 주도권을 가지고 다투었다는 것은 이루어지기 힘은 일이다. 거기에 고조선을 피해서 28만 호가 한나라로 투항하기 위해선 우리가 아는 것 보다 더 한나라에 가까워야한다.
동예는 고조선의 시대에서 고구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한반도의 북부지방에서 부여와 한나라 그리고 고구려와 고조선이란 강대국 사이에서 어느 때는 고구려의 편에 어느 때는 고조선의 편에 그리고 어느 때는 한나라의 편에 들며 국가를 유지하였다. 이를 종합하여 볼 때, 동예는 진정한 국가의 형태를 가지지 못한 부족한 국가가 아니었으며, 왕권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예국은 고구려나 부여 그리고 한나라 등의 당시 기마부대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약한 보병 위주의 전력을 가졌다는 표현은 이들이 군사적으로 그리 강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드러낸다. 그렇지만, 이들의 보병은 창과 칼에 매우 능했다고 한다.
그런데 ‘예’로 기록되는 것을 강원도 지방의 것과 북부 지방의 것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내용상 필자는 예를 한반도의 북부에 위치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면 동예라고 흔히 아는 것은 무엇인가? 예족의 국가로 북부의 것과 구별되어지는 또 하나의 예족 국가로 보여진다. 가야 지방의 철이 한국, 왜국 그리고 예에 수출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가야의 철을 수입했다고 하는 ‘예’는 거리 상 동해안의 예족 국가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동해안의 예족 국가는 북부 예족 국가보다 국력이 약했다고 보여진다. 낙랑국은 백제의 초기에 이미 강원도 지방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신라 역시 강원도 삼척의 실질국은 세력에 포함하였다. 그렇다면, 동해안의 예족 국가는 1세기 전후 반에 국운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북부의 예족 국가는 강대국 사이에서 오랜 시간 약하나마 국력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남부 예족 국가를 ‘동예’라고 부르며, 북부의 예족 국가를 ‘예국’이라 부르기로 한다.
이어서 옥저에 대하여 알아보자. 옥저 역시 동예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국가가 아니라고 알고 있다. ꡔ삼국지ꡕ는 옥저를 ‘동옥저’와 ‘북옥저’ 그리고 ‘남옥저’로 구분하여 다룬다. 동옥저는 고구려의 땅인 개마고원의 동쪽이며, 읍루와 부여와 국경을 마주하는 길림지방과 함흥지방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북옥저, 즉 ‘치구루’는 읍루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북옥저는 길림연변지역으로 추정된다. 244년 한나라 관구검의 침략을 피하여 고구려의 동천왕이 북옥저로 피하였다고 하며, 285년 선비족의 공격으로 부여의 왕족이 대피한 곳이 또한 북옥저이다. 이러한 사실은 북옥저가 부여와 고구려의 영향 가운데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동옥저는 남옥저와 북옥저와 구별되어지는데, 남옥저는 함흥지방이며, 북옥저는 길림지방으로 보인다. 이 남북옥저는 그 문화적 배경의 차이가 없으며, 소와 말을 많이 기르지는 않지만, 오곡과 밭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한다. 이들의 음식과 의복 그리고 예절은 고구려와 같다고 한다. 이들은 고산지대에서 고산지 농사를 지으며 산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기마전보다는 창병이나 보병에 강했다고 한다. 보병 중심이란 점은 예국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당시 정예부대인 기마전을 가진 고구려나 부여에 비하여 약한 군사력을 가진 보병 중심으로 군사조직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낙랑국의 왕 최리가 옥저에서 호동왕자를 만났다는 사실에서 옥저는 남옥저로 보이며, 이는 대동강의 동쪽인 함흥지방일 때 이 이야기는 가능해진다. 그리고 북옥저 역시 길림에 위치할 때, 고구려와 옥저의 피난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읍루가 연해주에 위치하고, 그 남쪽 길림에 북옥저가 위치해야지 만이 배를 타고 읍루가 북옥저를 공격했다는 것이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물이 얼면 읍루가 공격하지 못했다는 기록을 보아 이 물은 바다가 될 수 없다. 이는 두만강으로 보인다. 연해주에서 두만강을 타고 길림을 공격하였다는 것으로 이들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옥저는 고조선시대에서 고구려의 시대까지 고구려와 고조선 그리고 부여의 사이에서 국가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8. 말갈, 읍루, 예맥.
‘말갈’은 만주족의 선조로 뒤에 7부로 나뉘었으며, 속말말갈(粟末靺鞨)을 중심으로 발해를 세웠는데,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이에 대립하여 나중에 금(金)나라를 세운 민족이다. 흔히 우리는 이들을 고대에 ‘물길’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숙신과 물길 그리고 말갈과 발해는 하나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라고 한다. 또한 어떤 기록에 의하면 읍루의 후신이 물길이다. 그런데 읍루는 숙신족이 주되게 건국한 나라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하나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ꡔ후한서ꡕ는 분명하게 읍루는 숙신의 나라라고 적고 있다. 또한 ꡔ삼국지ꡕ에서도 읍루는 숙신씨의 나라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읍루의 후신이 물길, 즉 말갈이다. 그리고 ꡔ후한서ꡕ와 ꡔ삼국지ꡕ에 의하면, 이들은 부여와 언어적 차이를 가지지만, 고구려와는 언어적으로 유사하다고 한다. 그러나 부여와 깊은 관계를 가진 나라로, 신하의 국가였다고 한다. 또한 신채호에 의하면, 숙신은 조선의 어원이다. 조선은 본래 있던 고대 한민족어로 된 나라이름에 대한 한문을 통한 표현이다. 신채호는 ꡔ만주원류고ꡕ를 통하여 조선의 옛 이름은 ‘주신’이라 하고, 이는 ‘숙신’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말갈=물길=읍루=숙신=주신=조선이라 할 수 있겠다. 조선의 유민인 숙신은 연해주 부근 토착민과 함께 ‘읍루’라는 나라를 이루었다.
읍루는 부여의 동쪽에 있었으며, 남쪽으로는 옥저와 국경을 마주하며, 동쪽으로는 동해를 접한다. ꡔ후한서ꡕ와 ꡔ삼국지ꡕ에 의하면, 읍루는 소와 말을 기르고, 가죽으로 옷을 입는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한나라의 힘이 약해지는 말기에 부여의 신하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부여의 압력이 당해지자 부여를 배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부여 역시 이를 쉽게 무너뜨리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 고구려가 강성해지고, 고구려가 있는 이상 부여가 쉽게 읍루를 공격하지는 못 했을 것이다. 한나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고, 선비족이 부여를 압력을 가할 무렵, 부여는 더 이상 고구려를 넘어서는 강대국이 아니었다. 부여는 고구려와 읍루 등에 대국으로 있으려 했지만, 이것도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것이다. 읍루는 북옥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읍루는 북옥저를 공격하여 많은 노획물을 얻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북옥저는 매년 계속되는 읍루의 침탈이 두려워 동굴이 숨었다고 한다. ꡔ삼국지ꡕ와 ꡔ후한서ꡕ는 모두 읍루는 법이나 권력의 중앙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미성숙의 국가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260년에서 263년에 읍루가 위나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점과 위나라의 왕이 읍루의 왕에게 닭과 비단 그리고 모직물 등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은 이들이 단지 부족국가의 차원을 넘어서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이미 철기문화가 존재하던 시기의 국가이며, 스스로 외교권을 가진 국가였다. 거기에 때때로 지도권이 세습되었다고 하는 부자세습 역시 읍루가 권력의 집중화가 이루어진 체계적 국가임을 보여준다. 권력의 집중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국가란 공동체의 외교권의 집중화나 권력의 세습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인류학적으로 청동기 문화는 국가의 성립과 때를 같이 한다. 그런데 철기가 통용되던 시기에 아직도 체계적이고 온전한 국가의 형태를 가지지 못한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역사의 역행일 것이다.
말갈은 낙랑국과 같이 평안도 부근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읍루와 동일한 민족 구성원을 가진 말갈은 읍루와 달리 고구려와 낙랑국에 의존하여 있던 것으로 보인다. 낙랑국은 백제를 공격할 때 말갈을 시켜 공격하였고, 고구려도 수나라의 대전에서 말갈을 시켜 먼저 공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것은 말갈이 평안도 부근에 존재할 때 가능하다. 이들은 연해주에 거주하는 읍루와 달리 한반도 가운데 있다가 이후 고구려의 유민과 함께 발해를 이룬 것이다.
‘예맥’은 고구려와 마한이 요동을 공격할 때 함께 연합군은 형성한 나라이다. 이는 예맥이 고구려의 영향 가운데 있음을 의미한다. 예맥에 관한 많은 자세한 것은 다른 고대 한민족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의문으로 남아있다. 예맥은 고조선과 깊은 연관을 가지며, 그 영향 가운데 있던 공동체로 보인다. 많은 역사서에 의하면 부여는 본래 ‘예’의 지역에 근거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예’ 지역 가운데 하나를 ꡔ삼국지ꡕ는 ‘예성’이라 하고, 이는 본시 ‘예맥’의 땅이라고 한다. 이는 예족과 예맥이 서로 깊은 연관을 가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특히 ꡔ사기ꡕ와 ꡔ한서ꡕ는 예맥조선이니 조선예맥이니 하면서 예맥과 조선을 함께 칭하였다. 어떤 때는 북에는 예맥 그리고 남으로는 조선이라고 하였다. 예맥은 고조선의 영향력 가운데 있었으며, 중국인들에게 항상 함께 있던 개념인 듯이 보인다. 그런데 ꡔ후한서ꡕ는 고구려를 맥족이라고 한다. 그러면, 고조선=예=부여=예맥=맥=고구려라는 식이 가능해질 수 있겠다.
ꡔ후한서ꡕ에 의하면 고구려의 남쪽에 조선과 예맥이 있다고 하는 것은 고구려의 남쪽에 고조선이 존재했었다고 반도사관 혹은 황국사관의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면서 고조선의 대륙 역사를 부정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고구려의 남쪽 평양에 조선과 예맥, 즉 과거 중국인들이 예맥조선이라고 부른 이들의 후손이 살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재로 역사적으로 평양 부근 고조선의 유민들은 항상 단군의 후손이며 단군과 관련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예맥의 정확한 위치를 확정하기는 힘들지만, 이들이 고조선의 유민으로 읍루와 함께 고조선에 스스로의 뿌리를 정하고 존재한 나라로 보인다. 단지 이들이 고구려와 마한과 연합하여 요동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을 통하여 이들이 북방지역에 위치함을 유추할 수 있겠다. ꡔ후한서ꡕ는 예맥의 위치를 옥저와 같이 단단대령의 동쪽이라 하는 것을 보아 옥저와 같이 북부지방에 위치하며, 동옥저의 남쪽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 동옥저의 남쪽에 위치한 듯 하다.
9.탐라국.
많은 이들은 한민족의 역사에서 ‘탐라국’을 잊고 있다. 비록 소국가지만, 수 백년 간 국가의 자립성을 유지하였다. 고씨의 정권이 오랜 시간 유지된 탐라국은 476년 백제에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498년 8월엔 조공을 중단하여 동성왕이 압력을 가하게 되고 다시 사신을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친 백제 성향은 이후로 200여년을 유지되었으나 662년에 신라에 투항하여 신라의 영향권 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680년과 686년엔 일본열도와도 사신의 교류가 있었으며, 고구려와도 교류가 있었지만, 백제의 영향력에 들어가면서 두절되었다. 925년 고려 태조 8년에 신라의 국운이 다하고, 고려가 강대국으로 부상하자, 탐라국은 신라가 아닌 고려와 우호관계를 가지고 국가를 유지하였다. 938년엔 태자를 고려에 파견하여 고려로부터 성주와 왕자의 작위를 받았으며, 고려의 영향력 가운데 소국으로 독립체제를 유지하였다. 1105년 숙종 10년에 고려의 지방을 군으로 개편되자, 탐라군이 되었고, 1153년에 고려의 한 군인 탐라군에서 탐라현이 되었다. 이로부터 고려 정부로부터 파견된 이에 의하여 탐라의 행정적 업무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탐라국의 성주와 왕자는 행정적 권한이 제한되었으나 계속 유지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 1404년 조선에 이르기까지 탐라국의 성주와 왕자는 각각 좌도지관과 우도지관으로 명칭이 달리하여 존속되어졌다. 하지만 세종대인 1445년에 탐라국의 전통적 귀족계급은 사라지고 완전한 조선의 한 지역이 되었다.
탐라국은 적은 인구와 섬에 한정된 국가라는 점으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강대국인 신라와 백제의 영향력 가운데 국가의 자립성을 유지해야했다. 그렇게 탐라국은 소국이나마 지도자의 실용주의적 외교정책에 의하여 적어도 500여 년 이상 비록 간섭을 받았지만, 독립된 국가의 형태를 유지하였다.
10.전동부여와 후동부여.
일부는 ‘동부여’를 동예라고 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우선 동예는 고조선 시대에서 존재하였지만, 동부여는 고구려와 거의 같은 시기에 등장한 국가라고 ꡔ삼국유사ꡕ는 적고 있다. ꡔ삼국유사ꡕ에 의하면, 어느 날 부여의 시조인 해모수가 꿈에 나타나 부여의 땅에 고구려의 건국을 예언하며, 부여를 동쪽으로 옮기라고 하는데, 그렇게 동쪽으로 이동한 부여가 동부여이다. 이것을 필자는 부여 내부의 전통적인 부여인 북부여와 고구려라는 하나의 신흥 부여와 동부여라는 또 하나의 부여가 내분을 일으킨 것으로 본다. 이것은 고구려의 또 다른 이름이 졸본부여라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즉 고구려는 부여의 연장이다. 부여는 우리 고대사에서 하나의 큰 뿌리이다. 온조백제 역시 남부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왕족의 성씨는 ‘부여’였다. 구태백제 역시 그 뿌리를 부여에 두고 있다. 고구려는 스스로를 하늘의 중심으로 여기고 북쪽의 부여를 부여 혹은 북부여라고 했으며, 자신의 동쪽에 있는 것을 동부여라고 하였다. 그 외 동예라는 표현이나 남부여라는 표현도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동부여는 이러한 내분에서 실패하고 동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부여왕족으로 ‘해’씨의 국가로 왕족 내분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해부루는 아들이 없어 양자인 금와를 태자를 삼는데, 여기에서 금와는 해부루가 부여에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집안의 인물로 여길 수도 있겠다. 해부루 이후 이들에 의하여 왕위에 세습되었으며, 금와 이후 대소가 왕위를 받았으나 고구려 대무신왕에 의하여 22년 멸망하게 된다. 이 무렵 대무신왕은 부근의 개마국을 점령하였다는 것을 보면 동부여도 이 부근 그 가운데 그 북부에 위치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북)부여는 285년 선비족에게 공격을 당하고, 수도가 함락 당한다. 이에 왕은 자살하고, 왕족은 북옥저로 도피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동부여를 세웠다. 이때 세운 동부여는 해부루의 동부여가 사라진지 200여 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서 세워진 동부여이다. 이를 해모수의 것과 구분하여 후동부여라 하고, 전자를 전동부여라고 필자는 임의로 불려본다. 이때 북부여의 왕족이 복옥저로 대피하여 세운 후동부여는 다시 고구려에 의하여 국운을 다하게 된다. 410년 후동부여는 광개토대왕에 의하여 고구려에 속하게 된다.
5. 고구려와 수나라의 대전(大戰)을 다시 읽자!
‘다시 읽자’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여기에서 ‘다시 읽자’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상황을 다시 분석하는 차원에서 다루어보자는 것이다. 최근에 어떤 이는 고구려가 이 당시 패권국가라는 것은 민족주의자들의 과장에 지나지 않으며, 그 사실은 다르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이는 고구려가 수나라를 이긴 것은 단지 기후정도의 예외 변수 때문이라고 하며 고구려의 승리를 과소평가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ꡔ삼국사기ꡕ에 근거하여 이 전쟁의 중요성을 약화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읽어보자는 것이다.
우선 지금도 그렇지만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그 이유가 단순하지 않다. 전쟁이란 정치적이며 경제적이고 외교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우선 ꡔ삼국사기ꡕ를 살펴보자. 문제의 시작은 고구려의 왕 장수왕에서 시작된다. 고구려 장수왕 42년(454)에 장수왕은 신라를 공격하였다. 또한 장수왕은 56년(468)에 정예부대인 고구려군이 아닌 고구려에 예속된 말갈의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다시 공격하였다. 그리고 실직주성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63년(475)년에 고구려는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개로왕을 죽이고, 한성을 차지한다. 그뿐인가, 77년(489)에는 고구려는 신라를 공격하여 호산성을 함락시켰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ꡔ삼국사기ꡕ에선 내물이사금38년(393)에 내물이사금은 고구려의 강성함을 보고 이찬 대서지의 아들을 불모로 보냈다고 하며, ꡔ삼국유사ꡕ에선 눌지왕 시절에 고구려 장수왕에 의하여 419년 왕자가 볼모가 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는 고구려의 남침과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즉위하곤 진나라와 송나라 그리고 위나라와 외교를 맺고,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긴다. 그리고 남하 정책을 실시한다. 즉 북방으로 외교로 안정을 추구하고,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도모한 것이다. 그는 위에서 말했듯이 백제의 한성을 정벌하고 개로왕을 죽여 백제에 큰 타격을 준다. 그로 인하여 백제를 수도를 옮겨야했고, 왕을 잃었다. 그뿐 아니라, 신라를 공격하기도 한다. 이 당시 신라는 그리 백제에 비하여 약한 국가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인지 장수왕은 정예부대인 고구려군이 아닌 그에 비하여 약한 말갈의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며, 신라에서 불모를 데려갈 지경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와 신라는 공동의 적이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고구려였다. 그런 이유에서 백제는 433년 사신을 신라에 파견하여 선물을 주었고, 신라도 이에 대하여 선물을 주었다. 백제는 이미 고구려에 의하여 왕을 잃은 기억으로 고구려에 대한 강한 복수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는 신라에 연합을 건의하고, 신라 역시 고구려의 남하와 그 영향력을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백제와 신라는 공수(攻守)동맹을 맺는다. 이러한 동맹은 한성을 고구려에서 다시 찾는다. 그러나 찾아놓은 땅에 두 주인이 있을 수는 없을 것이며, 백제를 버리고 신라가 한성을 차지한다. 장수왕은 남하는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을 낳고, 이는 다시 고구려의 역습으로 이어진다. 이 역습은 처음에는 백제와 신라의 역습이었지만, 이후에 신라는 백제를 버리고, 한성을 차지한다. 이러한 신라의 상승분위기는 진흥왕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신라의 진흥왕의 북진은 고구려의 영토를 앗아갔고, 그로 인하여 자존심을 건드렸다. 이때 고구려의 평원왕(559-590)이 즉위한다. 그는 약화된 고구려에서 다시 강성한 고구려를 꿈꾸었다. 이때 고구려에게는 대륙의 수나라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수나라는 581년 건국하여 589년 혼란 시기의 대륙을 통일하였다. 그리고 고구려는 그 해 12월에 수나라와 외교를 맺는다. 그러면서 평원왕은 수나라와 전쟁을 준비하였다. 중국의 ꡔ수서ꡕ 고구려전에 의하면, 평원왕이 대륙을 차지한 수나라가 두려워 전쟁을 준비하였다고 하며, 군비를 확충하고 군사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평원왕은 강성한 고구려의 또 다른 위협 대상의 등장을 직감한 것이다. 하지만 전쟁 준비를 하던 중 590년 그는 죽게된다. 이의 과업은 영양왕(590-618)에 의하여 이어져간다. 영양왕은 평원왕의 전쟁 준비를 이어가며, 재위 이후 2-3년뒤에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수나라의 상황을 살핀다. 사실 수나라가 대륙을 통일하기 이전 수나라는 평원왕의 사신을 군빈의 예로 대했다. 그러나 통일 이후 수나라는 태도를 바꾼다. 그는 영양왕 8년(598)에 고구려가 수나라에 대하는 태도에 불만을 토로한다. 그 불만의 내용은 고구려가 말갈과 거란을 지배하는 것과 전쟁을 준비하는 것 그리고 수나라의 국경에 사람을 죽이는 것이었다. 이러한 불만은 대륙의 주인이 된 수나라가 스스로의 위상을 고구려에게 인정받으면서 동시에 고구려가 행하는 전쟁 준비에 대한 경고의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영양왕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ꡔ삼국사기ꡕ에 의하면 영양왕은 즉위 9년에 고구려 정예부대가 아닌 말갈군대 1만을 이끌고 수나라를 공격했다. 이것은 수나라를 크게 자극하였다. 그런데, 왜 영양왕은 정예부대를 두고 거대제국인 수나라의 전투에 말갈군대를 이끌고 간 것일까? 사실 이것은 국내용으로 보여진다. 어차피 영양왕의 관점에선 수나라의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고 보았으며, 오히려 수나라가 더 강성해 지기 전에 공격하여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 시간이 지난 뒤 더욱 더 강성해진 수나라와 전쟁을 하는 것 보다 났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격으로 인하여 고구려 국내 정세를 전시(戰時) 체제로 돌릴 수 있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실재로 통일 전쟁 이후 곧 고구려와 전쟁을 하는 것이 수나라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고구려는 평원왕 때부터 이미 수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한 상태인 것이다. 수나라의 황제를 양과 왕제적에게 육군과 수군을 맡겨 전쟁에 돌입한다. 결론적으로 이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난다. 김부식은 ꡔ삼국사기ꡕ를 작성할 당시 중국의 문헌을 인용하기에 이 전쟁의 패배가 단지 기후로 인한 군대의 철수라고 하며, 영양왕이 사과하여 철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 사서에 의존한 것으로 실상 그러하였는지는 의문이다. 우선 이 공격이 이루어진 9월은 그 지방에 있어서 장마와 폭풍이 이미 지나간 시기이다. 오히려 활동하기 적절한 시기이다. 그리고 수나라는 이미 통일 전쟁을 마친 나라이기에 전쟁의 시점을 장마 때나 폭풍 때를 선택했을 리가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도 병법에서 수나라의 패배를 인정하게 하는 요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수나라가 그렇게 경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채호는 ꡔ대동운해ꡕ와 ꡔ서곽잡록ꡕ 등을 인용하여 이 당시 수나라의 공격을 방어한 고구려 장수로 ‘강이식’이란 인물을 등장시킨다. 그는 수나라 군대의 출발지인 임유관에서 싸워 이겼다는 것이다. 수나라는 많은 전투의 경험을 가진 대륙을 통일한 국가이다. 그런 나라가 공격의 시기를 함부로 정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심채호의 논의도 생각해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여간 1차 수나라의 공격에서의 승리는 고구려에 심리적으로 긍정적 효과를 낳았다. 이러한 고구려와 달리 수나라 조정은 혼란에 빠진다. 그 이유는 604년 수나라의 문제가 태자 광에게 살해당하고 태자 광이 즉위하여 양제가 된 것이다. 양제는 국가의 통치자로써 도덕적 문제를 가지고 정권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는 왕권 강화에 나선다. 그는 엄청난 자금이 동원되는 강북과 강남을 잇는 대운하를 건설하고, 고구려의 남하를 견제하는 만리장성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국가적 차원의 대규모 공사는 왕권의 강화를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수나라는 왕권의 강화와 그로 인한 대규모 공사로 국가의 혼란을 씻어버리고자 하였다. 이때 고구려도 걱정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남쪽의 백제와 신라 때문이다. 사실 백제의 혜왕은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길안내를 자처하였으나, 이미 수군이 대패한 뒤라 현실화되지 않았다. 즉 백제와 고구려의 사이를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미 위에서 말한 바이다. 고구려는 한성을 앗아갔고, 자신의 왕을 죽였고, 남하를 한 국가였다. 영양왕때 고구려는 백제를 공격하였으며, 607년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송산성을 함락하고, 석수성을 공격하여 3천명을 포로로 삼았다. 또한 신라의 북한산성을 탈환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물론 이는 신라의 진평왕이 직접 나서 막는 바람에 좌절되었지만, 고구려에게는 수나라와의 전선 이외에도 남쪽의 신라와 백제라는 전선이 있었다.
607년 돌궐왕 계민가한의 장막에서 수나라의 양제와 고구려의 사신이 우연히 만나게 된다. 양제는 이때 고구려의 사신에게 고구려에 대한 불만과 이런 저런 고구려에 대한 요구를 전하였다. 이때 고구려는 수나라가 신라와 백제로 가는 길을 막았으며, 자신이 주도권을 가진 곳에서 수나라의 간섭이나 영향력 행사를 용인하지 않았다. 이렇게 수나라와 고구려는 서로 좋지 않은 사이를 유지하였다. 결국 이러한 관계는 611년 2차 대전으로 이어진다.
ꡔ삼국사기ꡕ는 근래 보지 못한 대군이라 표현한 대군이 고구려를 공격해 온다. 이때 백제의 왕은 양제에게 연합고역을 제안하였고, 양제는 공격의 시기를 알려주기도 하였다. 백제에게도 이 전쟁은 무시할 수 없는 대전이었다. 이 대전은 당시 동북아의 질서를 새롭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수나라와도 고구려와도 연결되어진 백제에게는 더욱이 이 대전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ꡔ수서ꡕ에선 백제가 고구려와 화통하면서 간사한 맘으로 중국을 엿본다고 하였으며, 수나라를 돕는 척 하면서 양단책을 사용한다고 적고 있다. ꡔ삼국사기ꡕ에도 백제를 속임수를 쓰며, 반복이 심하다고 한다. 이는 백제가 고구려와 수나라 등 강대국 사이에서 당시 국제 정세의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한 것으로 보이며, 그로 인한 외교의 다양성을 보인 것으로 보인다. 즉, 실용주의적 외교를 실행한 것이다. 즉 실재적으로 대군을 파견하여 수나라를 지원하지 않아도 전쟁의 후를 도모한 것이다.
수나라의 수군은 바다를 건너 평양성을 60리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유인술로 인하여 수나라를 다시 패배한다. 양제를 우문술과 우중문에게 자신이 요동성을 포위하는 동안 평양성을 공격하라고 명한다. 하지만 문제를 보급이었다. 장거리인데다 수군이 바다를 건너가는 것을 생각해보면, 대군에 적당한 보급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배편으로 꾸준히 대군에 적당한 보급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양제는 각각의 병사가 100일의 식량을 지니고 전쟁에 참여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양제의 해결책은 먼길을 떠나 오랜 시간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의 입장에선 적당한 것이 아니었다. 현대의 전투에서도 군인은 최대한 간편하고 이동이 용이한 것이 좋다. 그런데 무거운 식량을 가지고, 장거리 전투를 떠난다는 것은 이미 패전의 우려가 있는 것이다. 이에 을지문덕은 이러한 보급의 문제를 알고, 수나라군대를 살수를 넘어 최대한 내륙으로 유인한다. 보급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내륙으로 너무 들어온 수나라 군대의 우중문은 이러한 계략을 알아차리고 살수를 다시 넘어 빠져 나아가려 한다. 이에 을지문덕은 살수를 공격하여 수나라 군대에게 패배를 안긴다. 마치 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군이 소련의 영토 깊이 들어가 결국 패배하였듯이 수나라 군대 역시 고구려의 내륙으로 너무 깊이 들어간 것이다. 처음의 승리감으로 계속 진격한 것이 결국은 화를 자처한 것이다. 이것이 수나라에게도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3차 대전도 고구려의 승리로 마감된다.
3차 공격은 수나라의 내란으로 재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예부상서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양제는 고구려가 문제가 아니라, 당장 내란을 수습해야했다. 그렇기에 613년의 공격은 큰 성과 없이 끝난다. 이러한 연이은 공격은 수나라의 천운을 다하게 하였다. 왜국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에 실패하자. 곧,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추종자를 제거하고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하듯이, 큰 전쟁의 실패는 한 국가의 운명을 다하게 하는 것이다. 수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패배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망한 것은 아니지만, 고구려와의 전쟁에 집중하면서 스스로 소멸되어 가는 국운을 보지 못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이 전쟁으로 고구려는 국가를 유지하고, 대륙의 주인은 다른 이에게도 넘어가게 되었다. 수나라의 왕 양제가 신하인 우문화급에게 살해됨으로 이 오랜 전쟁을 마감되게 된다.
6. 해동성국 진국(발해)과 그의 광복운동.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에 의하여 성립된 국가이다. 고구려라는 강력한 국가가 내분으로 사라지고, 고구려의 자존심을 가진 유민과 한민족의 한 갈래이며, 과거 고조선에서 고구려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한민족의 한 갈래로 우리 역사에 한 몫을 한 말갈이 구성한 국가인 것이다. 고구려는 말갈을 자신의 지배권 가운데 두었다. 수나라와 전쟁에서 고구려는 말갈을 동원하여 수나라를 공격하게 하였고, 낙랑국 역시 백제의 공격에서 말갈을 동원하였다. 또한 이들은 한민족의 국가인 읍루를 이루었다. 이들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우리 한민족과 동질적이었고, 하나의 문화권 속에서 살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만일 이렇지 않았다면, 소수의 고구려유민과 다수의 말갈에 의하여 이루어진 국가인 발해는 다수 말갈의 반란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이 당시 말갈과 고구려의 유민은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 민족의 과거 모습인 숙신과 물길이 하나라면, 물길과 말갈은 같은 것이 된다. 그렇다면 발해는 큰 의미에서 하나의 민족으로 구성된 민족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말갈=숙신=한민족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학자인 유득공은 이미 ꡔ발해고ꡕ에서 통일신라시대가 아닌 남북국시대를 제안한다. 박제가는 고려의 왕씨가 압록강을 넘지 못한 것을 지적하였고, 유득공은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 반도국가가 되어 버리면서 약한 국가가 되었다고 한탄한다. 그러면서 우리 민족이 반도국가를 넘어서 존재하던 마지막 시기인 발해를 돌아본다.
대조영은 고구려의 유민으로 국가를 세운다. 그가 세운 국가의 이름은 ‘진국’이며, 왕이 되어 홀한성을 세웠다. 그리고 이 국가는 동으로는 동해에 이르고, 남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서로는 거란에 이르렀다. 당나라의 현종은 대조영을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에 임명한다. 이때 발해란 사실 말갈과 같은 개념이며, 대조영을 말갈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고, 이 말갈은 이미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 민족의 한 갈래이다. 다만 하나의 민족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표현에 하나일 뿐이다. 단지 발해란 당나라의 왕이 준 국명이며, 대조영 스스로는 진국이란 국호를 사용하였다.
고왕 대조영이 죽자, 당나라의 사신이 조문을 하였다. 이어서 무왕이 왕위를 이어간다. 그는 인안(仁安)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연호의 사용은 서서히 당나라를 벗어나 독자적 노선을 나아감을 의미한다. 무왕에 의한 발해의 세력이 커지자 북부의 이민족이 복속되어 왔다. 무왕은 발해 내의 세력을 자신의 권력 가운데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하였다. 즉, 대조영이 국가의 건국에 만족한다면, 무왕은 소국이 아닌 대국으로 발해를 이끌고 가는 역사적 사명을 가졌던 것이다. 이러한 무왕의 시기에 말갈의 한 파인 흑수말갈이 진국의 동의 없이 당나라와 연락하고 그의 세력과 연합하려 하자, 진국은 흑수말갈을 공격한다. 이는 진국, 즉 발해 내의 세력이 당나라와의 유착을 차단한 것이다. 그럼으로 그는 스스로 당나라의 소국에서 벗어나 스스로 주체성을 가진 국가로 서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무왕의 행동은 당나라와 진국의 사이를 멀게 하였다. 이러한 무왕의 행동은 종국에 진국 사람 장문휴의 당나라 공격으로 이어진다. 이에 당나라의 현종은 진국을 공격하게 되고, 신라왕에게 북쪽의 진국을 공격하게 하여, 서쪽과 남쪽에서 진국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종이 중심되어 당나라의 의도를 따르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무왕을 이어 ‘대흥’이란 연호와 함께 문왕이 등극하였다. 755년 문왕의 시기에 당나라에는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며, 이는 762년에 평정된다. 다음해 다급해진 당나라를 도와 진국은 763년 당나라로부터 독립국가로 인정받는다. 이 당시 당나라의 현종은 촉나라로 망명할 정도로 위기를 느꼈으나, 반군의 나체 분열로 평정되었다. 당나라의 이러한 국가적 위기는 당나라의 중앙집권을 흔들게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진국이란 동쪽의 강성한 세력을 적으로 둘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스스로 대국으로 존재한 당나라를 스스로 소국으로 생각한 진국이 도왔다는 사실도 당나라에게는 큰 자존심의 상처였을 것이다. 이러한 문왕의 시기에 진국의 많은 인물이 당나라에 진출하였고, 사실 당나라의 외국인 상대의 과거시험인 빈공에서 30여 년 사이에 10여명의 발해인이 합격하였다. 또한 이러한 시기에 진국, 즉 발해는 해동성국이라 불리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발해는 서서히 문화적으로도 성숙해갔다. ꡔ구당서ꡕ와 ꡔ북적발해말갈전ꡕ에는 발해가 문자와 서기가 있었다고 하며, 이는 독자적 문자와 그 문자를 구사하는 서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스스로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국가관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이에 그에 적당한 문자와 국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성장하던 발해도 거란에 의하여 국운이 다하게 되었다. 흔히 우리의 역사 이해에서 발해는 926년 거란족에게 멸망한 나라이다. 그러면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간 발해가 그렇게 단기간에 소멸되어가고 말았던 것인가? 국가가 사라지면, 그 국가의 광복운동은 그 국가의 애국자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대한제국이 왜국에 의하여 국치를 당한 후에 일어난 한국의 독립운동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인가? 백제의 소멸이후에도 많은 이들이 여전히 자신의 조국을 그리워하며 광복운동을 하였다. 발해 역시 그러했다. 거란의 태조 아보기는 발해의 왕에게서 항복을 받아내었지만, 단번에 발해의 전 영역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우선 아보기는 발해의 자리에 자신의 맏아들 ‘배’로 왕을 세우고, 괴뢰국가인 ‘동단국’을 세운다. 이 국가는 하나의 독립국가라기 보다 거란의 요나라에 의하여 조정되는 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배로 하여금 동단국의 왕으로 세우고, 아보기는 남은 발해의 저항 세력을 진압하여 갔다. 그러나 그는 이를 다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고, 이로 인하여 그의 부인인 술율왕후에 의한 수렴청정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요나라의 권력 공백기에 발해의 광복운동은 큰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 동단국의 정부구성원은 옛 발해의 유력자와 거란인 유력자를 조화롭게 구성되었는데, 이는 발해 유민을 안으려는 요나라의 정책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발해의 멸망은 단지 왕의 항복을 받은 것이지, 국민에게 항복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부분에 있어서 거란은 과거 발해의 영토에 세력을 넓히지 못하였다. 특히 발해의 남부 지역이 그러했다. 발해의 남부 지역은 아보기의 사망후 거란의 권력 공백기에 발해왕을 자처하는 이의 등장하기에 이르렀으며, 그의 동생이라는 이에 의하여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부여성 혹은 동단국의 수도인 천복성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은 ꡔ오대회요ꡕ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발해의 남부는 요나라와 동단국의 입장에선 거의 무정부 상태에 들어갔으며, 발해광복세력에 입장에선 발해의 독립상태에 있었다. 또한 발해가 이미 멸망한 929년 발해의 사자인 ‘고정사’가 후당에 가서 입공(入貢, 들어가 바침)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그 외 여러 나라에 사자가 파견된 기록이 있는 것은 발해 남부에 독립상태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보기의 사망 이후 둘째 아들인 덕광이 즉위한다. 하지만 그는 동단국의 왕인 형 배와 사이가 애매해 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생 덕광은 형 배의 권력을 제거해간다. 그러면서 동단국의 수도를 발해유민의 광복운동을 구실로 삼아 요나라의 상경과 가까운 요양으로 옮긴다. 이것은 동단국에 대한 세력을 크게 하고, 그로 인하여 동단국의 왕인 형 배의 힘을 죽이려는 맘에서 행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광덕의 정책은 동단국의 수도가 옛 발해의 중심지에서 멀어짐으로 그 지배력이 약화되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광복운동을 하던 이에게는 힘을 더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때 발해국 이름으로 사신들이 오대조 -후량(後梁), 후당(後唐),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 에 파견되었다. 이는 수도가 옮겨지고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현상들이다. 이때 새롭게 세력화된 발해를 ‘후발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후발해국은 10년도 안되어 대씨 정권이 물러난다. 그리고 대씨의 세자와 많은 유민이 고려에 망명한 것이 이때 일일 것이다. 그리고 열씨 정권에 의하여 이끌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열씨 정권은 오씨 정권에 의하여 찬탈당하게 된다. 그리고 오씨 정권은 정안국이란 이름으로 국가를 연다. 오씨 정권의 왕은 오풍명이 있으며, 그는 후발국의 사신으로 송나라에 간 오제현의 후손으로 보여진다. 오풍명에 의하여 열씨 정권을 무너졌으며, 또 다른 왕으로는 기록에 오현명이란 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발해국의 광복을 꿈꾸던 정안국은 985년 8월 요나라의 정안국 정벌로 사라진다. 이러한 정벌이후 요나라는 991년경에는 고려를 공격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즉 그 지방의 발해광복군의 힘을 누른 것이다. 이렇게 60년 정도의 광복운동은 우선 일단락 된다.
그렇다고, 발해의 광복운동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때 두드러진 인물은 ‘대연림’이다. 거란군에 있던 그는 1029년 그의 임지를 중심으로 ‘흥요국’이란 나라를 일으킨다. 흥요국은 지금의 중국 농안에서 동남으로는 암록강의 보주에까지 이치는 대규모의 국가였다. 대연림이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었던 시대적 기반은 우선 당시 이 지역이 오랜 기근이 있었고, 주민들이 가지는 국가 정책에 대한 강한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연림이 그 원흉이 되는 호부사 한소훈을 죽인 것에 힘을 얻어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국명을 ‘흥요’라고 하고, 자체 연호로 ‘천경’을 사용하였다. 그는 그 당시 거란군에 속해있던 발해유민을 규합하고, 고려에게 건국을 알리고 대연림은 대조영의 후손이라 하고, 또한 지원군사를 요청하며 거란의 요나라와 대립하였다. 대연림은 당시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옛 발해의 유민들과 옛 발해인으로 거란의 군대에 속한 이들, 그리고 고려와 거란의 미묘한 관계를 이용하여 국가를 연 것이지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거란군에 속한 발해유민이 대연림의 뜻을 따르지 않았고, 고려 역시 몇 차례의 거란과의 전쟁 이후 외교적 신중론이 힘을 얻어 신중론을 주장하는 문하시중 최사위 등이 대연림의 뜻에 협조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또한 거란의 요나라는 대연림의 뜻이 이루어지기에는 너무 강성해져버렸다. 그 시기는 요나라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연림의 흥요국은 그 이후 수차례 고려에 지원군을 요청하였으며, 마지막 이광록이 와서 요청하였을 때 흥요국은 거란에 의하여 망하게 된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당장 국경선을 지키는 것을 선택하였지 흥요국과 연합하여 요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흥요국은 1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발해유민은 더욱 더 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에 요나라는 발해의 유민은 전국 각지에 흩어지게 한 것이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1115년 발해유민인 고욕이 대왕을 자처하며 요나라의 심장부에서 난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그 1년 전인 1114년에는 요나라와 북송을 멸망하게 한 여진족의 국가인 금나라의 아쿠타로 하여금 요나라를 일부 지역을 공격하게 하고, 또한 황제를 칭하게 한 이는 바로 발해유민의 한 사람인 양박이었다. 또한 요나라의 고려 공격에서 고려로 유입된 발해의 유민은 고려를 지키는 것에 한 몫을 하렸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렇게 발해의 유민은 오랜 시간 동안 요나라에게는 힘겨운 존재였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어려움이 결국 요나라의 국운을 다하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시대 안정복이 이미 말했듯이 통일신라시대란 호칭은 잘못이다. 하지만 안정복 이후로 한참이 지나서야 우리는 통일신라시대란 호칭에서 남북국시대란 호칭으로 우리의 역사를 이해하게 되었다. 자체적 문자와 자체적 연호를 구사한 해동성국 발해에 대하여 우리는 더욱 많은 숙제를 지고 있음은 사실이다. 발해는 분명 한민족의 국가였다. 물론 그들은 고려사에도 한국사에도 편입되지 않는 발해사에 속하는 국가이지만, 민족사에 있어서는 우리와 같은 민족사에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나친 과장이나 지나친 왜곡 없이 발해를 바라보아야 하는 숙제를 가져야할 것이다.
7. 동이족은 변방 오랑캐 일 수밖에 없는가?
일군의 사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일제시대 사라진 우리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하여 노력한다고 한다. 이들은 소외 황국사관이나 강단사학과 다른 길에서 자유롭게 역사서를 이해하고 연구하고 있다. 이들을 우리는 흔히 재야 사학자라고 한다. 재야 사학자들의 많은 경우는 ꡔ한단고기ꡕ와 ꡔ규원사화ꡕ와 같은 고조선과 고조선 이전의 기록들을 우리의 역사서로 인정한다. 하지만 강단사학은 이들을 결코 수용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역사서를 바라보는 관점은 이 둘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하나의 분기점이라 할 수 있겠다. 강단 사학자들은 우리 역사의 시작을 고조선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조선도 어떤 이는 제대로 된 국가가 아니며, 그저 체계화가 덜 이루어진 어설픈 국가 정도라고 한다. 간혹 어떤 이는 고조선을 신화 정도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고조선은 평양중심의 한반도 가운데 존재하던 국가이며 대륙에 존재하던 강성한 국가가 아니라고 한다. 그렇지만, 재야 사학자들은 단군의 고조선 이전에도 국가가 존재하였으며, 그렇기에 우리의 역사는 우리가 아는 것 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중국의 사서와 ꡔ한단고기ꡕ 그리고 ꡔ규원사화ꡕ 등의 문헌을 근거로 고조선을 대륙의 국가로 믿는다. 이렇게 이들은 서로 다른 길에 서 있다.
ꡔ한단고기ꡕ는 거짓 역사를 담은 소설책인가 아니면, 역사서인가? 강단 사학자들의 많은 경우 ꡔ한단고기ꡕ의 많은 단어가 근대어로 이 책이 과거에 적혀진 것이 아니라고 한다. 예를 들어, 문화, 인류, 전세계, 구가 등의 과거 우리가 사용하던 것이 아니라, 20세기 이후에 사용한 단어가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들 용어 가운데 ‘삼성품설’이란 용어는 마테오리치가 동양에 소개한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에서 나온 것으로 이것이 과거 사용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렇지만, 조선의 ꡔ세조실록ꡕ에 이미 환인, 환웅 그리고 단군을 가리켜 ‘삼성’(三聖)이라 한다. 그렇기에 마테오리치의 소개 이전에 이 용어는 이미 우리의 역사에 등장하는 것이다. ꡔ한단고기ꡕ는 20세기 초에 ‘계연수’라는 인물이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ꡔ삼성기ꡕ, ꡔ단군세기ꡕ, ꡔ북부여기ꡕ, ꡔ태백일사ꡕ 등을 수집하여 이를 가지고 ꡔ한단고기ꡕ를 편찬하였다. 이들 저서는 계연수에게 온전한 형태로 전해졌다고 볼 수는 없다. ꡔ삼성기ꡕ는 ꡔ세조실록ꡕ에 등장하는 것을 보아서 그 이전에 쓰여진 책이며, ꡔ단군세기ꡕ는 고려 시대 이암에 의하여 적혀진 책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ꡔ북부여기ꡕ는 ꡔ단군세기ꡕ와 유사한 시기에 범장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저서들은 전란과 오랜 시간에 의하여 많은 부분이 소실된 형태로 계연수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두고 계연수가 편찬한 것이라면, 그는 많은 부분 자신의 견해를 더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ꡔ한단고기ꡕ의 내용이 거짓임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ꡔ한단고기ꡕ와 그 외 재야 사학자들이 인정하는 역사서가 단군과 관련되어 대종교적 색채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ꡔ한단고기ꡕ가 소설책이라고 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는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사실을 더 부각시켰거나 더 강조할 수 있을 수 있지만, 거짓을 이야기한다는 이유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ꡔ한단고기ꡕ는 한민족의 문자에 관한 기록이 등장한다. 이에 의하면 고조선 시대에도 우리만의 고유한 문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발해에도 문자가 있었다고 나온다. 한글의 창제의 구성원이었던 신숙주의 18대손인 신경준은 ꡔ훈민정음운해ꡕ에서 한글은 과거 민간에서 사용하는 글자가 있었는데, 그 수가 다 갖추지 못하여 나라의 말을 적기 모자랐다고 했다. 그런데 ꡔ한단고기ꡕ에 등장하는 가림토문자는 38자이다. 그렇기에 이 문자는 수가 모자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ꡔ훈민정음운해ꡕ에서 한글 이전에 문자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ꡔ한단고기ꡕ와 ꡔ규원사화ꡕ에 등장하는 38자의 가림토문자와 동일한지는 의문이라도, 분명 한글 이전에 문자가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또한 이덕무의 ꡔ청비록ꡕ에는 고려때 ‘슬’이란 악기의 바닥에 쓰여진 글을 중국 사람이 읽지 못하여 그가 한문으로 옮겨 주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것은 고려 시대에도 우리 민족의 문자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공식화된 문자의 형태는 아니지만 말이다. ꡔ세종실록ꡕ엔 한글이 옛 전자를 본떠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를 재야의 사학자는 가림토문자의 본을 떠 만들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도, 과거 우리의 문자 역사가 더욱 더 소급될 수 있는 가능성은 있는 것이다.
가림토문자는 한글과 그 모양도 유사하며, 한문과 같은 표의문자가 아니라, 한글이나 영어와 같은 표음문자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들 글자의 유사한 모양의 것이 요녕성에서 발굴된 고조선의 토기에서 나왔으며, 평안북도 용천군에서도 나왔다. 그리고 가림토문자는 대마도에 전해지고 있다는 아비루문자와도 그 모양이 유사하다. 일본의 ꡔ훈석언문해ꡕ에는 한글이 옛것과 새것이 있는데, 그 가운데 옛것은 고조선 시대의 것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논의도 재야 사학자들의 논의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볼 때, ꡔ한단고기ꡕ와 ꡔ규원사화ꡕ에 등장하는 고조선의 문자에 관한 논의가 그저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ꡔ한단고기ꡕ와 ꡔ규원사화ꡕ에 등장하는 치우천황에 관한 논의도 우리의 국사책에는 나오지 않는다. 재야 사학자들은 치우천황을 단군조선 이전에 존재한 ‘배달국’ 혹은 ‘환국’의 14대 환인인 자오지 환인이라고 한다. 그 뿐 아니라, 그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왕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많은 사학자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ꡔ한단고기ꡕ를 인정하지 않는 이에게는 너무나 당연할 것이다. 그들은 치우천황은 상상이 만들어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렇게 단정해버려야만 하는가? 그러면 ꡔ한단고기ꡕ가 아닌 다른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것을 중심으로 치우천황에 관하여 다루어보자.
중국 측 문헌인 ꡔ사기ꡕ에는 치우를 천자라 하며, 이 치우가 천하를 제패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치우는 구려(九黎, 동이족)의 임금이라 한다. 그 뿐 아니라, 그는 ‘노산’의 쇠로 병기를 만든 이라고 한다. 또한 그가 무서워 헌원은 사망할 때까지 편안하게 잠을 이루지 못했고 한다. 이러한 치우의 묘는 동평군 수장현 함양성 가운데 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문헌인 ꡔ산해경ꡕ에는 “치우가 군대로 하여금 (중국) 황제를 정벌하였다”라고 기사가 등장한다. ꡔ한서ꡕ엔 진나라와 한나라 때에는 치우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러한 논의에서 치우는 강력한 군대를 가진 한민족의 왕이라고 할 수 있다.
‘구이’(九夷)와 ‘구려’는 동쪽의 민족을 이르는 말이다. 치우는 그에 왕이며, 그는 초기 중국의 한족(漢族)과 동이족의 세력 다툼에서 한족에게 두려움의 상대였다는 것이다. 일본은 임진왜란에서 자신들에게 큰 패배를 준 이순신과 거북선(龜船)을 ‘훗카이셋’이란 괴물로 드러내고 있다. 거북선 모양의 괴물로 이순신을 화하여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의 한족들에게 치우 역시 괴물로 드러나 있다. 대한민국 축구팀의 상징으로 드러나는 도깨비 모양의 그림이 바로 치우의 모습으로 알려진 것이다. 많은 이들은 우리 민족이 중국의 한족에 버금갈 만한 세력을 가진 적이 없다고 하며, 이것은 어떠한 가능성도 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한다. 그렇지만 동아시아는 처음부터 한족이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고 볼 수만은 없다. 과거 동이족, 즉 우리의 한민족은 한반도와 요동 그리고 산둥반도에 지역에 거주하였으며, 많은 중국의 문헌은 과거 동이족의 세력에 관하여 사뭇 다른 면을 보이고 있다.
ꡔ산해경ꡕ은 동이(東夷)를 군자의 국가라고 하고 있다. ꡔ후한서ꡕ의 「동이열전」에 의하면, 동방에 ‘이’(夷)가 있으며, 이 ‘이’가 뿌리라고 하고 있다. 또한 이 뿌리는 유순하고, 도로써 다스려 군자의 나라라고 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동방에 ‘이’라는 민족이 살며, 이를 ‘동이’라고 하고, 이렇게 불리는 민족은 군자의 국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즉 夷를 두고, 한나라 허신의 이야기에 의하면, 동방의 거주하는 민족의 명칭이며, 이를 대(大)와 궁(弓) 자를 합성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우리 민족을 활과 관련하여 생각하는 것은 고구려와 동예가 맥궁(貊弓)과 단궁(檀弓) 등을 생산하였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이는 곧 활과 관련되며, 이러한 ‘이’는 곧 ‘동이’이며, 동방에 거주하는 민족이다. 그리고 ꡔ후한서ꡕ는 ‘동방’을 ‘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동이’ 혹은 ‘이’ 그리고 ‘동방’은 중국 문헌의 또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ꡔ후한서ꡕ와 ꡔ두씨통전ꡕ엔 동이의 9종류를 우이(嵎夷)라고 한다. 그리하여 신라와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는 신라의 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 당시 한족은 우리를 ‘우이’로 생각하였고, 이 ‘우이’는 ‘동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족, 혹은 동이족, 혹은 우이족은 중국의 역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ꡔ여씨춘추ꡕ에선 태공망(강태공)은 동이(東夷)의 선비라고 한다. 강태공은 문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하게 하고 서주왕조를 건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리고 ꡔ명현씨족언행유편ꡕ에 의하면 전국시대 송나라 사람인 ꡔ묵자ꡕ의 저자인 묵적은 본래 고죽국 사람이라고 한다. 이 고죽국은 ꡔ삼국유사ꡕ에 등장하는데, 고구려가 본래 고죽국이었다고 한다. 즉 이는 동이족의 국가란 말이다. 또한 ꡔ사서석지ꡕ엔 맹자가 추나라 사람인데, 추나라는 춘추시대의 주나라(?)인데, 이 주나라는 본래 동이의 국가였다고 한다.
ꡔ명의고ꡕ에선 구이(九夷)는 동이이고, 이 동이는 공자가 살기 원한 곳이라고 나온다. 또한 ꡔ주례전경석원ꡕ엔 동이의 국가는 공자가 살고 싶었다고 곳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ꡔ논어ꡕ에도 공자는 구이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는 것이 나온다.
과거 동이족의 국가는 공자가 가고 싶어한 나라이며, 군자의 나라였다. 그리고 묵적과 강태공 그리고 맹자는 동이족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과거 동이족, 즉 우리 민족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조선이나 고려와 달리 상당히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한족과 한민족은 과거 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전쟁을 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한민족은 한족에게 강력한 이미지를 주었을 수 있을 것이다. 큰 활을 쏘며 철재 무기로 무장한 동이족이 그들에게는 위협이 되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한족은 대륙을 오랜 시간 차지하였다. 그러면서 중화사상을 만들어갔다. 그리고 스스로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였다. 동쪽에 사는 이는 동이, 서쪽에 사는 이는 서융, 남쪽에 사는 이는 남만, 북쪽에 사는 이는 북적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중화사상은 동아시아에 인류가 거주하면서 바로 생겨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는 서서히 한족이 대륙을 점유하면서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5호 16국 시대에서 원나라와 금나라 그리고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한족은 대륙을 두고 많은 민족과 대립하여 존재하여 왔다. 가까이는 고려말기의 원나라와 조선 말기의 청나라는 몽고족과 만주족의 국가이며, 이때 대륙은 한족의 국가가 있지 않고 다른 민족의 국가가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오랫동안 유지되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한민족도 한 몫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만일 그렇다면, 고구려의 존재가 그러하였고, 고조선이 그러하였을 것이다.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하였고, 스스로를 천자의 국가로 이해하였다. 이들은 한나라와 수나라 그리고 당나라와 꾸준히 세력 다툼을 하면서 국가를 유지하였다.
일본의 식민사관에 의하여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우리에게는 구석기 시대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믿었다. 이들은 많은 사서에 등장하는 우리 민족의 국가에 관한 기록은 우리 스스로가 믿지 않게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우리 자신이 한족과 세력을 다툴 정도가 강성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우리 스스로를 평가하게 해 버렸다. 우리는 처음부터 한족에 비하여 열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필연적 사실로 받아드리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극단의 민족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중국과 우리의 역사서에 등장하는 많은 사실을 무시하고, 그저 약하고 무능한 민족으로 우리를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ꡔ한단고기ꡕ의 내용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 그 가운데 많은 것은 필자에게 사실로 받아드려지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이 저서가 거짓인 이유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말했기 때문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중국의 고대 백과사전인 ꡔ박물지ꡕ엔 우리는 ‘군자국’이라 표현하고 있으며, 공자는 이 우리 민족의 나라에 살고자 하였다. 이러한 모든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와 달리 고대 중국인들이 우리를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도 거짓인가? 그러면 우리 민족에 관하여 긍정적으로 서술하는 모든 문헌은 거짓이 되어야할 것이다.
유대칠=(안현승+유지승)은?
지방대 출신으로 석사를 마치고 지금은 박사 공부를 하고 있다. 지방대 출신에다 철학을 하다 보니 이런 저런 불이익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그렇게 힘들게 생존을 위하여 매일 매일을 아슬아슬 하게 살아가고 있다. 무력함을 조금이라도 자위하기 위하여 혼자서 이런 저런 책을 읽으며 혼자서 웃고 글 쓰고 그렇게 살아가는데, 이것도 그러한 자위의 결과물에 다름 아니다. 다음엔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역사의 가짜 우등함을 생각해보고, 극단의 민족주의자들을 공격하는 글을 적을 생각이지만, 그것도 아마 자위의 결과물에 그칠 것 같다. 그래도 그렇게 자위라도 않으면 사라져 갈 생명인지라 자위는 생존을 위한 발버둥일 수 있다고 하겠다.
학력은 지방대 출신이고, 그나마 ‘토마스 철학 학교’를 모교라고 생각하고 있다. 꿈이 있다면, 작은 공부방 하나 잘 차려서 길거리의 노숙자가 되지 않는 것이고, 자유사학자 정도로 불린다면 몸둘 바를 모르겠다. 자위의 결과물을 누가 책을 만들어 주지도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내 돈으로 만들려고 하기에는 돈이 없고, 그래서 책을 낼 생각은 현재 없다.
마지막으로 건방지게 이런 글을 적어 죄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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