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옥캄 간단 정리
유대칠 정리
윌리엄 옥캄(1288-1348)의 이름은 문헌학적으로 다양하게 기술된다. occam, okkam, ockham... 이와 같이 그의 생애에 관한 것도 그렇게 쉽게 정리되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프란치스칸 수도원에 있었고, 후기 교황과 서간을 주고 받으며 교황권에 관하여 논의하였다는 것, 그리고 여러 가지로 그가 중세 후기 이단시되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는 스코투스 이후 중세 철학계에 하나의 폭풍이었다. 그의 철학은 젊은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동시대에 뷔리당 등을 비롯한 다양한 논의에서 그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그의 논의는 흔히 유명론으로 알려지지만, 20세기 초 뵈너의 연구로 인하여 이러한 간단한 옥캄에 대한 정의가 문제를 가진다고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뵈너는 옥캄의 문헌적 연구를 통하여 전기와 후기로 옥캄의 사고를 구분하고, 전기는 보편자를 단지 대상적 존재를 가진 혹은 표상적 존재를 가지는 만들어진 것(ficta)으로 이해하지만, 후기에는 이를 주체적 존재를 가지는 사고 행위(intellcetio)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재 옥캄에 관한 많은 연구가들은 그의 이론을 초기에는 유명론이라고 하지만, 후기는 개념론적 사고 그 가운데도 엄밀하게 실재론적 개념론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물론 옥캄에 관한 뵈너의 해석이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러한 논의의 큰 틀은 수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옥캄의 다양한 이론 가운데 그의 보편자 이론을 정리하자. 그의 보편자 이론은 그의 지칭이론(suppositio-theory)에 기반하고 있다. "김태희는 인간이다"라는 명제에서 김태희는 한 개별자를 지칭한다. 그러면 술부의 '인간'은 보편자를 지칭하는 것인가? 아니다. 옥캄은 이 역시 개별자를 지칭한다고 본다. 만일 위의 명제에서 김태희는 개별자를 지칭하고, 인간은 보편자를 지칭한다면, 이 명제는 거짓이 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이러한 보편자 이론은 그의 이론의 단면이다. 하지만 그의 존재론적 사고가 스코투스와의 대립구조 속에서 성립되어지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스코투스 보편자이론에 대한 옥캄의 비판이 그의 지칭이론에 근거한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의 지칭이론과 보편자 이론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옥캄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단수적(singuralis)이다. 즉 개별적이다. 그렇기에 그는 개체화의 원리에 관한 중세 많은 철학자들의 논의를 필요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의 면도날로 도려내었다. 개체화의 원리란 '인간'이란 보편자가 실재하고, 이러한 실재 가운데 각각의 개별자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고민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옥캄은 처음부터 보편자를 단지 영혼 가운데 개념 정도로 여기기에 영혼 외부의 개별자에 대한 개체화 이론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
그의 인식이론도 중세 많은 이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서 인간의 인식은 보편자를 향한다는 것에 반기를 들고, 개별자에 대한 인식을 주장한다. 이는 스코투스의 영향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거기에 그는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직관적 인식의 가능성을 주장한다. 만일 신이 원한다면, 전능한 신이 원한다면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한 직관적 인식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스코투스의 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이러한 옥캄의 논의는 스코투스주의자들인 마이론의 프란치스와 같은 이들에 의하여 비판받는다. 또한 옥캄주의 자체에서도 많은 변형을 받는다. 옥캄은 이러한 존재하지 않은 것에 관한 직관적 인식이란 것이 일상적인 자연 법칙에서는 불가능하고, 신의 절대적 권능에 의한 초자연적 상황에서만 가능하다고 보면서 회의주의의 길을 피해간다.
옥캄은 당시 프란치스칸 수도회에 따라서 청빈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은 교황의 사유재산에 관한 논의로 이어지게 되고, 이는 옥캄 정치철학의 근간이 된다. 그는 교황의 파면 가능성을 주장하기도 하고, 교황의 사요재산권에 관한 강한 비판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비판은 당시 교회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져 옥캄은 이단시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단화는 그의 존재론적 사유마저 터부시 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막상 그의 이론을 파리에서 이단시한 뷔리당 역시 옥캄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역사상 처음 등장하는 '옥캄주의자'라는 단어 역시 부정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시대상에서 옥캄은 역사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실재적으로 인용되어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지 못하는 터부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20세기 뵈너의 문헌 연구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론을 유명론이며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개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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