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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본질에 대하여
(哲學的 神論을 따라)
유대칠(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철학전공)
1.0 서론
서양의 철학사는 꾸준히 존재(esse)와 본질(essentia)에 대한 물음을 부여잡고 있었으며, 그것은 이미 철학이 태동하던 고대로부터 계속된 하나의 주된 흐름이었음이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필자는 이러한 논의를 플라톤에서 시작하여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는 여정을 살핌으로서 분명히 하고자하며, 아울러 존재와 본질에 대한 철학적인 理解의 폭을 넓이고자 한다. 또한 고대의 철학적 내용이 어떻게 수정되고 다듬어져서 중세 황금시대로 이어지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중요한 논의의 목적이다.
그러기 위해 플라톤에게 있어서 참으로 있는 것인 "이데아"(idea)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참으로 있는 것인 "실체"(substantia)를 비교하고, 이후에 이슬람철학의 존재에 대한 해석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와 본질에 대한 논의를 제시하는 것을 본 논의의 기본 구조로 삼고 글을 시작해본다.
2.0 존재와 본질의 역사와 이해
2.1 그리스철학에서의 존재와 본질
2.1.1 플라톤의 존재와 본질
플라톤은 자기의 후기대화편 『티마이오스』에서 "언제나 존재하지만 생성하지 않는 것"과 "언제나 생성하지만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중기대화편인 『국가』에서 자신의 철학은 "언제나 있는 것에 대한 것이지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에 대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또한 참된 슬기로움을 가지고자 하는 이는 그와 같은 것을 보아야만 한다( )고 한다. 여기에서 플라톤이 계속하여 말하는 것은 "이데아( )"를 봄( , sehen)이 철학의 주요과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아는 그에게 분명 "참으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스스로는 어떠한 변화를 가지지 않으며 소멸 또한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이데아는 "무엇임"을 부여하는 것이며, 지금 우리가 무엇이라고 아는 것 모든 것은 이러한 이데아에 의하여 한 몫 되어진 것이다. 즉 우리가 지금 감각으로 느끼는 "바로 이 책"이란 것은 바로 "책 그 자체"인 "책의 이데아"에 한 몫 되어진 것이기에 우리가 "책"이라고 알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여기에서 이데아와 감각의 대상인 현상계를 구분한다. 현상계는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와 소멸에 놓여있기에 이는 참된 존재가 아니며, 오직 생성이나 소멸에 놓여있지 않은 이데아만이 참된 존재이다. 즉 모든 것은 이데아에 의하여 무엇임이 되는 것이며, 이데아에 한 몫 되어지지 않은 것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무엇임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플라톤에게 참 있음은 바로 이데아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플라톤이 이데아를 "참존재"라고 이해한 것에 주목해 보아야한다. 그에게 "이데아"( )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임"을 부여하는 것이다. 즉 이는 무엇임의 근거인 본질(essentia)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플라톤에게 "참존재"란 본질을 부여하는 것이란 말이다. 이리 본다면 존재란 본질과 다르게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 의하여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런 의미에서 본질(essentia)이라 번역될 수 있는 그리스말 "우시아"( )를 말하고 이를 존재의 의미로 사용한다. 이는 『국가』에서 말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즉 "생성과 소멸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는 존재( )"란 것 말이다. 여기에서 그는 분명 이데아 즉 본질을 존재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질송(E.Gilson)의 말처럼 플라톤에게 "우시아"는 실재적인 존재자가 되도록 하는 특성을 지닌 것이다. 또한 존재자는 자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데아가 존재자를 가지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플리톤에게 존재자란 독자적인 위상을 가진 어떤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데아가 "참존재"라는 플라톤의 말은 본질을 우선적으로 하는 그의 철학적인 기본 태도를 보여준다.
2.1.2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와 본질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을 비판하며, 언제나 불변하는 이데아라는 것을 만들어서 그것을 개체와 구분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는 "이데아"에 상응하는 것으로 "형상"( )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플라톤의 말처럼 하나의 개물(個物)을 벗어난 초월적인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것을 아래로 가져온다. 그는 초월적인 이데아를 진정한 존재라고 보지 않는다. 그는 참존재를 우시아( ) 즉 실체라고 한다. 여기에서 우시아는 플라톤의 우시아와는 다른 것으로서 이데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존재가 아니라 형상과 질료로 이루어진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체를 "참존재"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실체는 두 가지 양상으로 이루어져있는데 그것은 질료( )와 형상( )이다. 질료는 무엇이 될 가능성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스스로는 무엇이 아니지만 무엇임을 받아드려 무엇이 되는 것이다. 이는 그저 스스로는 무엇이 아니라 단지 가능태이며, 형상을 통하여 무엇으로서 현실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러기에 질료는 가능태이고 형상은 현실태이다. 형상은 하나의 본질이다. 즉 형상은 무엇임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질료는 그러면 형상의 무엇임을 받아드림으로서 무엇임이 되는 것이다. 또한 무엇임을 가진 현실적인 것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형이상학』에서 변화 혹은 생성...등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이월이라한 것이다.
그에게 실체는 무엇임이 될 가능성의 질료가 형상으로 인하여 무엇임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태(potentia)에서 현실태(actus)로의 이월이 실체를 내어놓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스승 플라톤의 제자인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보게 된다. 다시 말해 그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지상으로 가져왔을 뿐 그 밖의 것은 스승의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하나의 사물을 즉 하나의 실체( , substantia)를 하나의 현실적인 것으로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형상이다. 그러면 형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본질(essentia)이다. 즉 그 역시 그의 스승인 플라톤의 학설과 같이 본질인 형상으로 인하여 하나의 것이 현실적인 어떤 것이 된다고 한 것이다. 결국 그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아래로 가져와서 그것을 하나의 개물(個物)에 놓음으로서 이데아론이 아닌 실재론의 입장을 가졌지만,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그는 단지 이데아를 아래로 가져왔을 뿐이다. 그는 여전히 스승 플라톤의 제자일 뿐 인 것이다.
2.2 그리스철학에서의 제작과 그리스도교의 창조
플라톤이 그리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따랐듯이 그리스에서는 무(無)에서의 창조를 부정하였다.(ex nihilo nihil est) 이는 고대 자연철학에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내려온 하나의 전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논리구조 가운데 "무에서의 창조"(ex nihilo)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역시 그의 원소는 파르메니데스식의 영향으로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니라 그것의 응집과 분산으로 세상의 만들어짐을 설명하였다. 그뿐 아니라 모든 자연철학자들이 한결같이 "아르케"( )를 가정하고 이를 통한 세상의 창조를 설명하였지 "무에서의 창조"를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것의 가장 대표적이고 발전적인 모습을 우리는 플라톤의 후기 자연철학적 대화편인 『티마이오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여기에서 재료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만드는 "장인"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이 장인은 언제나 같은 상태에 놓여진 것(즉 이데아)을 보고 이를 본으로 하여 세상의 카오스에 질서를 부여한다. 필자는 이를 본질론적인 차원에서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자 한다. 즉 이때 장인은 이미 존재하지만 무엇도 아닌 혼돈으로 있는 것에 질서 잡힌 무엇임을 부여한 것이다. 이는 무에서의 창조가 아니라, 하나의 "제작행위"이다. 무엇인가를 재료로 하여 그것을 자기가 본(本)으로 삼은 것의 모상으로 만드는 하나의 행위인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실재적인 것은 이데아이며, 우리가 느끼는 감각의 세계는 이러한 이데아에 한 몫 되어지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이데아에 의하여 감각 세계는 무엇임으로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설명에 있어서 방식이 다르고 그 정도가 다르며, 입장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이러한 플라톤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러한 문화에서 하느님이란 분명 그리스도교의 성서에 등장하는 그런 하느님이 아니다. 이는 어느 정도의 수정이 필요했으면 그렇게 그리스도교의 철학에 수용되어야했다.
2.3 이슬람철학에서의 존재와 본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곧 이슬람으로 전해지고 그곳에서 위대한 스승으로서 자리잡히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종의 수정을 받게 된다. 그것은 그의 이론이 이들의 종교에 알맞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의 지방에서 나타난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한결같이 창조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하느님이 우리의 세계를 현실적으로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교리에 알맞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약간의 수정을 받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비체나(Avicenna)를 살피기로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화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무엇도 아닌 질료'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러한 질료가 무엇임을 받음으로서 현실적인 어떤 것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에는 당장 문제가 드러난다. 사실 이러한 것은 플라톤의 이론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형상은 자기의 존재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만일 형상이 자기의 존재를 가지고 질료를 통하여 무엇으로 있는 것이 된다면 그는 플라톤적인 것일 뿐이다. 그리고 만일 형상이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리하여 단지 사고에만 존재하는 것일 뿐이라면, 어떻게 현실적인 것이 가능한 것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어떠한 답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서 구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것은 질송의 말처럼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그리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에 대한 문제는 바로 존재(esse)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이슬람에서는 이를 해결하려 한다. 즉 형상과 질료를 현실적이게 하는 존재라는 것을 구상한 것이다.
아베첸나는 존재와 본질을 구분한다. 그리고 창조물(創造物)은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 존재되어지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기에 창조물은 스스로 존재하며 영원히 존속하는 하느님에 의하여 현실적으로 있게 되는 것이다. 즉 가능성에 놓은 것을 현실화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이다. 이런 관점에서 존재하는 하나의 존재자는 우연히 현실화되는 하나의 가능자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존재는 본질에 우연히 발생하는 우연자"(quod esse sit accidens eveniens quidditati)라고 정의한다. 결국 그는 사물을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무엇임이라 할 수 있는 것(즉 형상과 같은 것)은 "존재"(esse)를 통하여 현실적인 존재자가 된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무엇임은 존재를 수용함으로서 존재자라 불리어진다. 여기에서 본질 그 자체는 존재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존재를 가짐으로서 존재자가 된다. 이러한 것을 아비첸나는 알았고 그 관계를 그리 설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존재자는 오직 하느님의 필연성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은 유럽에 들어오면서 수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음으로 토마스를 살피며 이를 알아보기로 한다.
2.4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와 본질
플라톤주의계열의 아우구스띠누스는 "우시아"( )를 옮기면서 이를 "본질"(essentia)라고 했다.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달리했다. 그는 이를 "실체"(substantia)라고 옮겼다. 사실 이들 단어의 관계는 언어학적으로도 상당히 복잡한 관계를 가진다. (예를 들어 퀸띨리아누스(Quintilianus)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를 "에쎈씨아"로 옮겼다.) 분명한 것은 의 현재분사 에서 파생한 를 플라톤의 것인 "이데아"가 아니라, 토마스는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라고 이해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일방적인 모방이나 무조건적인 추종이 아니라 비판적인 수용이라는 사실을 숙지해야한다. 그것은 그가 하나의 사물을 현실적으로 있게 하는 것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와의 견해차이에서 비롯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적어도 플라톤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며 여전히 스승 플라톤의 제자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토마스는 달랐다. 물론 이슬람에 전해진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그 점에 있어서 다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는 그의 초기 저작인 『존재자와 본질에 대하여』(De ente et essentia)에서 존재(esse)와 본질(essentia)을 구분하며, 다음과 같이 논한다.
"각각의 본질이나 각각의 본체성은 그 본질의 존재에 대하여 알 지 못하더라도 생각될 수 있다. 즉 나는 인간이 무엇인지 그리고 불사조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이 실재성의 영역에서 존재를 가지는가는 알 수가 없다."-<De ente et essentia c.4>
즉 그는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분명하게 존재(esse)와 본질(essentia)을 구분하고 있다. 존재는 토마스에게 모든 형상과 본성에게 현실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존재가 없는 것으로서 형상과 본질 혹은 통성원리는 단지 생각되어질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의 현실적인 것으로 드러나지는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존재는 하나의 사태 혹은 사물을 현실적이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actus)인 것이다. 그러기에 존재와 본질은 분명히 구분되어야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 자체는 어떠한 모든 것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것이고, 존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토마스는 또 다시 이리 말한다.
"존재 자체(ipsum esse)는 모든 사물의 현실성이며, 또한 형상(forma) 자체들의 현실성이다."-<S.Th., la, q.4, a.1, c.a>
그는 형상이 실체를 현실적이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것이라고 이해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존재에 의하여 모든 것은 현실적인 어떤 것이 되는 것이라 이해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존재를 독자적으로 있지 못하고 형상 혹은 이데아라는 것에 의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즉 그는 존재를 본질에 우유적인 것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는 존재가 다른 우유적인 것을 오히려 현실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그는 아비첸나의 이론을 받아드리지 않는다. 그에게 존재는 본질을 현실적이게 하는 것이며, 하나의 존재자 즉 있는 것은 존재에 의하여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라 믿었다. 예를 들어보자. "몽화"라는 한 인간 곧 한 존재자가 있다. 몽화의 키와 외모 그리고 피부색과 그가 있는 자리 또한 그의 머릿결은 몽화라는 실체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실체는 존재에 의하여 현실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만일 몽화가 있지 않으면 어찌하여 그녀의 키나 외모나 성격 그리고 그의 머릿결이 현실적인 것으로 드러나겠는가. 그것은 적어도 토마스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면 그에게 신은 그리스의 형상부여자로서 신 그리고 카오스에서 질서를 부여하는 것으로서 신과 다른 것이 확연해진다. 토마스의 신은 존재의 원인, 즉 모든 존재를 야기한 존재이다. 여기에서 그의 저서인 『존재자와 본질에 대하여』를 다시 열어보자.
"제 1 원인이면서 신(causa prima que Deus)인 제 1 의 존재자로부터(a primo ente) 존재를 가지게 된다."-<존재자와 본질에 대하여 4장>
즉 토마스는 신을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와 같이 카오스 상태에 놓인 것에 질서를 주고 무엇임으로 자리 잡아준 신이 아니라 존재를 가지게 한 그런 존재의 제 1 원인인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그의 신 존재증명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그의 신존재증명에도 그의 존재론적인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자신이 다른 무엇에 의하여 존재를 받은 것이 아니다. 그는 다른 모든 것의 존재원인이지만 스스로는 다른 것에 의하여 원인 받지 않은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느님을 존재자라고 이야기할 때 그 말마디는 우리가 사물을 두고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명칭은 다의적(多義的)이지도 일의적(一義的)이지도 않으며 단지 유비적이라는 토마스의 입장에도 알맞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존재자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존재를 야기하는 원인으로서 만물 가운데 존재한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러기에 그는 하느님에 의한 "창조(創造)"를 그리스의 데미우르고스에 의한 제작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위치에 놓아둔다.
그는 존재자를 『형이상학주해서』에서 그리고 『존재자와 본질에 대하여』에서 열 가지 범주도식으로 진술되는 것(uno modo per decem praedicamentum)이라 한다. 이는 그것이 실재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만을 존재자라 불리게 하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는 현실적인 존재를 인정한다. 참존재 즉 진실로 있는 것은 이데아가 아니라 현실적인 여기의 것이라 한다. 그러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를 통하여 실체를 받아드린다. 실체는 형상과 질료의 합성체이며, 이데아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의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그리스철학의 입장을 받아드리지만 온전히 수용만을 한 것은 아니다. 그의 철학은 플라톤의 것과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것과 구분되는 자기의 자리를 가진다. 그것은 플라톤처럼 이데아를 가장 바르고 옮은 존재라 여기지 않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를 받아드리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에서와 같이 하나의 실체를 현실적이게 하는 것을 단지 형상이라 보지 않고, 이를 존재라고 이해하였다. 그러기에 그의 존재는 "제일 현실태로서 존재"(das Sein als ersten Akt)이며, 존재자의 가장 근원적인 행위는 바로 존재행위이며 이로서 그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다른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존재는 모든 행위의 현실성을 부여하는 가장 근원적인 것이다. 그러기에 존재는 존재자의 제일 현실태(das Sein ist Akt des Seienden)이기도 하다. 그리고 존재는 모든 형상의 완전성이기도 하다. 그것은 모든 형상의 현실성이며 완전성인 까닭이다.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의 역사는 존재망각의 역사라고 했다. 그것은 매우 타당한 것이다. 고대와 중세말엽 그리고 근대에 있어서 그러한 하이데거의 비판은 충분히 납득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중세 중기의 토마스에게 그러한 비판은 쉬이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그 역시 존재와 본질을 구분하고 존재의 위상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현대의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뜨르(J.P.Sartre)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하였다. 사실 이러한 그의 대답은 아비첸나의 것에 반대되는 것이며, 비판하는 것이다. 아비첸나에게는 실존(existentia) 즉 존재(esse)가 본질에 우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토마스는 이러한 존재와 본질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이슬람철학자들의 존재와 본질의 구분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존재에 대한 그러한 입장은 마다한다. 그리고 존재에 의하여 본질이 현실적인 것으로서 존재자가 됨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하느님의 존재와 그의 위치를 그리스철학의 신 혹은 제작자와 구분시킨다. 즉 그의 하느님은 데미우르구스와 같이 질료를 가지고 무엇을 만드는 신이 아니다. 이러한 그리스의 하느님은 질료가지고 무엇을 만든 제작자이지 존재의 원인일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성서적인 의미에서 창조주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존재의 원인으로서 하느님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로서 창조를 설명한다.
이처럼 그의 존재에 대한 생각은 그의 존재론을 넘어서 그의 신학과 인간학의 중요한 근원이 됨을 알 수 있다.
3.0 존재와 본질 그리고 하느님과 창조
그리스철학에서는 존재하는 것은 언제나 존재하며 이는 무(無)에서 기인하지도 무로 돌아가거나 변하지도 않는 것이라 믿었다. 파르메니데스가 그러하였고, 데모크리토스나 엠페도클레스 그리고 아낙사고라스 역시 그러한 그리스 자연철학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이 나오지 결코 없음에서 있음이 나오지는 않으며, 이들의 창조자란 이미 있는 것이지만 무엇임을 가지지 않은 혼돈한 것에 무엇임 혹은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것에게 창조란 그런 것이었고, 엄밀히 이것은 단지 제작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들은 존재하는 것 즉 존재자만을 보았지 그것의 근거인 존재를 보지는 못하였고, 그런 그들이기에 창조 역시 단지 제작에 머무르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성서의 하느님은 그런 하느님이 아니라 없음에서 있음을(ex nihilo) 즉 무(無)에서 유(有)를 야기하는 그런 하느님이다. 이러한 하느님은 질료를 가지고 무엇임을 부여하는 그런 하느님만이 아니라, 그러한 질료에 존재마저 부여하는 그런 하느님이다. 즉 성서의 창조는 단지 그리스철학의 제작과는 매우 구별되는 그런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의 철학이 그대로 그리스도교화 된 유럽에 수용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때 우리는 토마스를 만난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극단적인 추종자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물론 그는 가능태와 현실태라는 그리스철학의 유산을 수용하는 가운데 자신의 철학을 성립한다. 하지만 토마스 자신의 소리가 전혀 없는 그런 수용은 아니었다. 그는 존재와 본질을 구분한 아비첸나와 같은 이슬람의 철학자들을 수용한다. 하지만 이것도 그대로 받아드림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그는 형상을 제일현실태로 보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도 구별되고 존재를 우유적인 것이라고 말한 이슬람의 철학자와도 구별된다. 하지만 이들을 받아들인다. 그는 실체를 현실적이게 하는 것은 존재이며, 이 존재에 의하여 본질은 현실적인 것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창조주인 하느님은 이러한 존재의 원인이며, 창조는 이러한 존재의 야기됨이다. 즉 모든 것은 하느님의 존재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단지 무엇임이나 질서의 부여와는 다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하느님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이 되며 그러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존재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모든 것 가운데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느님은 존재의 원인으로서 모든 것을 처음에 존재하게 한 것 뿐 아니라 그것을 존재하게 유지시켜주는 원인이기도 하다. 즉 그는 존재의 원인이다. 이러한 그의 신론은 분명 그의 존재론적인 근거 가운데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그리스에서 토마스에 이르는 존재와 본질의 역사를 다루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 가운데 토마스의 종합을 알아보았다. 이제 우리는 토마스가 단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종자도 아니며 이슬람의 모방도 아님을 알았다. 그는 그 이전의 철학을 깊이 탐구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자기의 철학을 이루어낸 한 사람의 철학자인 것이다. 존재와 본질은 이러한 그의 입장을 알아보기 좋은 하나의 소재라 여겨진다.
<본글은 2001년 대구가톨릭대학교 1학기 철학과 세미나 "지혜사랑"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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