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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캄 면도날의 진실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1.0 서론
흔히 옥캄이라고 하면 면도날을 떠올린다. 그렇지만 과연 옥캄 자신이 직접 면도날을 어떻게 이야기했는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에겐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만일 그 면도날이 왜곡이 되었다거나 그 내용이 옥캄 자신의 것과 어떤 점에서 상이하다면, 그러면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옥캄에게 다가가는 것은 한계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옥캄의 진정한 모습을 살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면도날, 그것도 옥캄 자신의 면도날에 관하여 고민해 보아야할 것이다.1)
볼러(J.Boler)가 이미 밝혔지만, 옥캄에 관하여 우리가 흔히 아는 면도날은 결코 쉽사리 지나칠 수 없는 많은 문제점을 가진다.2) 우선 ‘옥캄의 면도날’(Ockham's Razor)과 경제성의 원리(principle of Parsimony)를 관련하여 다루는 표현은 옥캄 자신에 의한 것이 아니다. 우선 옥캄 면도날의 근거가 되는 “존재자는 필요 없이 다수화되지 말아야한다”(entia non sunt multiplicanda praeter necessitatem)라는 관용적 표현이 옥캄 자신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표현은 옥캄의 초기 주해자들인 16세기의 알레산드로 아칠리니(Allesandro Achillini)와 17세기의 존 폰스(John Ponce of Cork) 등에게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러한 관용적 표현은 옥캄 사후 옥캄과 중세 후기 유명론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1670년 라이프니츠(G.W.Leibniz) 역시 존재자는 필요 없이 다수화 되지 말아야 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3) 그 이전에 리베르투스 프롬몬두스(Libertus Fromondus)는 '옥캄과 유명론자들의 면도날'(Novacula Occami et Nominalium)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이어져 18세기 콩디악(de Condillac)은 ‘유명론의 면도날’(le rasoir des nominaux)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또한 19세기 윌리엄 해밀턴(W.Hamilton)은 그의 저서 「철학과 문학에 관한 논의」(Discussions on Philosophy and Literature)에서 옥캄의 면도날을 경제성의 원리와 관련하여 논의했다. 분명 옥캄 이후 많은 이들은 옥캄과 유명론을 면도날과 관련하여 생각하였으며, 그 내용은 “존재를 필요 없이 다수화 되지 말아야한다”라는 관용적 표현으로 정의되었다.4) 물론 이러한 관용적 표현을 옥캄이 직접 구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유 없이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옥캄은 자신의 저서 여러 곳에서 “다수성은 필요 없이 놓여지지 말아야한다”라고 하였다.5) 하지만 레프(G.Leff)는 옥캄의 이러한 원리는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는 하나의 원리만은 아니지만, 면도날로써 불필요한 개념을 제거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고 레프는 지적한다.6) 사실 다수성이 필요 없이 놓여지지 말아야한다는 것은 옥캄만의 것은 아니라고 레프는 지적한다. 즉, 중세의 역사에 전문적인 연구서를 내어놓은 레프는 옥캄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 원리를 중세의 시대적 상황에서 이해하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소급되는 이 원리는 13세기 옥스퍼드의 로베르투스 그로세테스테(Robertus Grosseteste)를 비롯하여,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와 로저 바콘(Roger Bacon) 등에게서도 유사한 것을 볼 수 있다.7) 그런데 이 원리는 스코투스에게도 옥캄에게도 공유되는 것이라면 당장 유명론의 트레이드 마크와 면도날을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이다. 신의 권능을 제한하는 모든 명제를 거부한 1270년과 1277년의 단죄 이후 중세 후기에 유행하던 명제는 “신이 제이 원인을 통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신은 직접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의 절대적 권능은 어떠한 제한도 있을 수 없다. 이러한 것은 굳이 후기 중세 철학자들뿐 아니라,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도 종종 발견되어진다. 이들은 성체성사를 다루는 과정에서 빵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실체가 전환되는 것을 제이 원인 없이 신이 직접적으로 혹은 기적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또한 토마스는 『철학대전』에서 신은 제이 원인 없이 직접적으로 행할 수 있다고 했다.8) 이러한 중세 철학의 논의를 감안하자면, 필요 없이 많은 것을 가정할 필요는 없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코투스 역시 필요 없이 가정된 다수성은 하나로 줄려져야 한다고 한다.9)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왜 유독 옥캄에게만 경제성의 원리가 주어진 것인가? 그리고 옥캄의 이러한 경제성의 원리는 존재론적으로 필요 이상의 존재를 제거하는 것이었는가 아니면 그저 너무 많은 개념을 열거하는 것에 대한 중세 후기 중세 철학의 시대적 흐름에 의한 하나의 방법론적 사유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는가?
옥캄의 트레이드 마크인 면도날은 단지 사유의 경제성을 추구한 방법론적 사유인가 아니면 실재적 존재와 관련되는 존재론적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그리고 당시 시대적 흐름인 경제성의 원리가 옥캄 사후 유독 옥캄에게만 트레이드 마크로 여겨진 것은 타당한 것인가?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필자는 옥캄에 대한 우리의 첫 인상인 면도날과 경제성의 원리와 옥캄의 관계를 논의하려 한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옥캄 논의의 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 경제성의 원리
옥캄은 『논리학대전』에서 “소수의 것을 통해 얻을 수 것을 여러 가지 것을 통해 얻는 것은 헛되다”10)라고 했다. 그 외 이미 위에서 밝혔듯이 그는 다른 곳에서도 필요 없이 많은 것을 가정하여 논의를 전개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경제성의 원리는 후기 중세인들에게는 하나의 근거가 되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세 무슬람 철학을 경유하여 다시 중세 사회에 유입될 때 시작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자연철학은 자연의 필연적 법칙을 인정하였다. 그는 성서의 기적과 같은 것을 믿지도 알지도 못하였다. 그의 자연철학에는 처녀가 성교 없이 임신을 한다거나 바다가 갈라진다거나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것에 관한 논의가 없다. 그렇지만 성서를 믿는 중세 철학자들에게는 기적이란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모든 자연의 현상은 신이라는 제일 원인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며, 이 제일 원인이 자연의 법칙인 제이 원인을 통하여 자연의 일정한 법칙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시간이 지나면서 속속 예외 것인 것과 마주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예수의 탄생에서 일어나는 처녀의 성교 없는 임신이라거나 성체성사에서 빵이 실재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철학적 논의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에 관하여 알베르투스와 토마스는 기적적 현상으로 간주하며, 제이 원인 없이 신이 직접적으로 행한 일로 이해하였다. 이는 성체성사의 논의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빵이 축성 이후에 빵의 외형은 남았지만, 그 실체가 빵의 실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빵의 우유는 빵의 실체라는 원인에 의하여 존재한다. 즉 빵의 우유는 빵의 실체라는 원인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축성 이후 빵의 실체는 그리스도의 실체가 되었다. 즉 빵의 우유는 그 원인인 빵의 실체를 상실하게 된다. 그렇지만 빵의 우유는 그리스도의 몸의 우유가 아니라, 빵의 우유로 여전히 남아있다. 실체 없이 우유가 남아있게 된 것이다. 이것을 두고, 토마스는 실체라는 제이 원인 없이 신이 제일 원인으로 행한 기적으로 간주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논의는 이성의 사유가 아니라, 오직 신앙에 의하여 믿어지는 대상이라고 한다.11) 이렇게 기적의 논의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법칙은 무너지게 되고, 제이 원인이라는 것도 필요 없게 된다. 그것은 오직 신이 제일 원인으로 직접적으로 작용한 것이 된다. 그렇기에 이러한 논의에서 다른 많은 것을 가정하는 것은 필요 이상의 것을 가정하는 것에 귀결된다. 이는 성체성사에서뿐 아니라, 처녀가 성교 없이 임신했다는 논의나 그 외 성서의 기적들에 적용되었다. 그렇다면 굳이 기적에만 이러한 것인가? 만일 기적에서 신이 제이 원인 없이 행할 수 있다면, 신은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제이 원인 없이 행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논의는 신의 절대적 권능에 대한 어떠한 제한도 단죄한 1270년과 1277년의 단죄 이후 중세 철학의 근본적 흐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12)
3.0 경제성의 원리는 단지 방법론적 원리인가, 존재론적 원리인가?
이러한 경제성의 원리는 철학에 있어서 하나의 방법론이 되었다. 스코투스 역시 필요 없이 많은 것을 가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경제성의 원리는 정말 필요 없이 존재하는 것을 자르는 면도날로 여겨졌는가 아니면, 단지 필요 없이 많아진 개념을 제거하는 방법론에 지나지 않은 것인가? 여기에서 벡크만(J.Beckmann)과 같은 일부 연구가들은 옥캄의 경제성의 원리는 단지 개념이나 명제에만 관련되는 것으로 존재론적 논의가 아니라고 한다. 이들은 옥캄의 경제성의 원리는 존재론적 가치를 실재성을 제거하는 면도날이 아니라, 단지 방법론적 가치를 가진다고 한다.13) 만일 경제성의 원리가 필요 없는 다수를 제거하려는 것이라면, 이것은 단지 필요 없이 늘어선 개념이나 명제를 제거하려는 목적인가 아니면 필요 없이 가정된 존재자를 제거하려는 면도날인가? 우선 필자는 옥캄의 경제성의 원리는 면도날의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즉 단지 방법론을 넘어서 존재론적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즉 경제성의 원리는 ‘방법론적 원리’일 뿐 아니라, ‘존재론적 원리’라는 것이다.
3.1 방법론적 원리로 경제성의 원리
르네상스 옥캄주의자들의 전통적인 방식에 의하면, “존재자는 필요 없이 다수화되어지지 말아야한다”는 옥캄을 대표하는 하나의 명제이다. 이 글을 그대로 받아드리면, 옥캄의 경제성의 원리는 필요 없이 많아진 존재자에 대한 면도날로 보인다. 그렇지만 많은 이들은 이 글에 표현된 옥캄의 면도날은 방법론적 원리에 의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이들은 경제성의 원리를 모든 존재자의 극단적 단수성과 일반적인 우연성의 세계를 위한 방법론적 대응물이라고 보았다. 이 경제성의 원리는 제이 원리라는 개념을 제거함으로 필연성의 세계에서 신의 절대적 권능에 의한 우연성의 세계로 사고의 세계를 넘어가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보편자라는 개념도 잘라내서 결국 극단적 개체만을 인정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러한 경제성의 원리는 개념이나 명제의 영역 가운데 그 필요성이 있으며, 존재의 영역은 아니라고 하였다.14) 이렇게 본다면, 경제성의 원리는 결국 학문함에 있어서 합리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필요 이상의 것을 늘어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존재의 영역이 아니라, 개념의 영역에 머무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문제를 가진다.
3.2 존재론적 원리로 경제성의 원리
방법론의 원리만에 머무르지 않고, 그 논의가 존재론의 원리에 이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논의의 시작은 옥캄과 동시대 인물인 샤톤(Walter Chatton)은 옥캄의 논의에 반대하는 반-면도날을 주장한다.15) 샤톤은 그의 저서에서 만일 세 가지 사물이 사물에 관한 긍정적 명제를 증명하는 것에 충분하지 않다면, 네 번째는 더해져야만 한다고 한다.16) 이러한 샤톤의 논의는 면도날과 달리 필요에 따라 더 늘어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A는 B를 생산한다”는 명제를 살펴보자. 샤톤에 의하면, 신은 기적적으로 A와 B가 실존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들은 “A가 B를 생산한다”는 명제를 증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 A는 존재하지 않지만, B를 생산하는 신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 명제를 증명하기 위하여 제 삼의 존재자 혹은 요소가 요구되어진다는 귀결에 이르게 된다.17) 그런데 이는 옥캄의 논의와 다르게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서 논의의 중점, 즉 샤톤과 옥캄의 논쟁거리는 개념이 아니라, 존재론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단지 개념을 줄이는 경제성이 아니라, 필요 이상 존재하는 존재자를 면도날로 자를 것인가라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경제성의 원리와 대조적으로 샤톤의 논의는 서양 철학사에 ‘충분성의 원리’(principle of plenitude)라는 전통으로 이어진다. 칸트는 그의 대표작인 『순수이성비판』에서 이 원리를 “이유 없이 다양을 감소시켜서는 안 된다”라고 적고 있다.18) 그 외에도 20세기 초 수학철학자인 멘거(K.Menger)도 이러한 원리를 전하고 있다.19) 그리고 이러한 충분성의 원리는 현대에도 여전히 옥캄으로 대변되는 경제성의 원리와 함께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옥캄과 샤톤의 논의는 분명하게 단지 필요 이상의 개념이 아닌 존재성과 관련되고 있다. 즉, 이는 존재론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명제를 참으로 증명하기 위한 존재성을 두고 이루어지는 논의이기 때문이다.
3.3 옥캄의 경제성의 원리 VS. 샤톤의 충분성의 원리
결론적으로 옥캄과 샤톤은 완전히 다른 길로 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 둘은 같은 길을 가는 서로 다른 방법론을 선택한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은 모두 명제의 증명을 위한 적절한 존재성의 수를 인정한다. 다만 옥캄은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샤톤은 긍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차이를 가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옥캄의 논의를 살펴보자.
“명제가 대상에 대하여(pro rebus) 증명되어질 때, 만일 두 가지 대상으로 그 진리가 참인 것이 충분하다면, 세 번째 것은 불필요한 것이다”20)
이것은 필요 없이 존재자를 다양하게 하지 말자는 옥캄의 경제성의 원리를 보여준다. 하지만 옥캄의 이러한 논의는 근거 없이 무조건 대상을 줄여야한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명제를 증명하기 위한 적절한 수의 대상이 있어야하며, 너무 많이 있는 것은 필요 없이 다수화 된 것이다. 옥캄은 여기에서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무리하게 작은 수의 대상을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수의 대상을 전제해야한다고 볼 수 있다. 샤톤은 옥캄의 위 표현과는 반대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명제가 두 가지로 증명되기 충분하다면, 세 번째 것은 필요 없다고 말한다.21) 이러한 샤톤의 표현도 다분히 적절한 수의 대상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근거 없이 대상을 줄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리 본다면, 이 둘의 근본적 논의에는 큰 차이가 없을 수 있을 것 같다.
더욱 자세하게 샤톤의 충분성의 원리를 검토해보자. 샤톤은 “시각은 그 대상의 지각에 의존한다”라는 명제가 단지 ‘지각’과 ‘대상’만으로 증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즉 두 가지 대상만으로 이 명제의 참을 증명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세 번째 대상이 요구되어진다. 우선 전능한 존재인 신은 지각이나 대상 없이 시각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즉 대상도 없고, 대상에서 비추어진 빛이 눈에 지각되어지는 것 없이도 시각적 인식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 인하여 위의 명제는 항상 참일 수 없다. 그렇기에 위의 명제가 참이기 위해서는 시각이 지각에 의존한다는 실재적 관계 혹은 관계적 실재성이 요구되어져야한다. 이러한 것이 더해지지 않으면, 시각은 신에 의하여 일어날 수도 있으므로 위의 명제가 참임을 증명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옥캄은 무엇이 다른가? 옥캄은 신이 기적적으로 대상이나 지각 없이 시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하지만, 이것으로 인하여 명제에 제 삼의 대상이 더해져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일 신이 이를 야기했다면, 위의 명제는 거짓이 된다. 왜냐하면 지각이니 대상은 없으며 오직 신이 시각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적을 제외한 자연의 일반적 과정 속에서 위의 명제는 두 대상만으로 참을 증명하게 충분하다. 그렇기에 옥캄은 필요 이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여기에서 『임의토론집』의 한 구절을 읽어보자.
“명제가 대상에 의하여 증명되어질 때, 만일 세 대상 혹은 두 대상이 이 명제의 참을 위해 충분하며, 네 번째 대상은 불필요한 것이다.”22)
여기에서 옥캄은 두 개나 세 개의 대상으로 참이 증명될 경우라는 가정에서 네 번째 것은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옥캄은 동시대인인 샤톤의 논의를 비판한다. 이 둘은 한 명제를 이해하는 서로 다른 길을 제공한다. 이는 위에서 살핀 “시각은 그 대상의 지각에 의존한다”에서 확인하였다. 샤톤은 신의 절대적 권능에 의하여 대상과 지각 없이 시각이 일어날 수 있기에 대상과 지각이 시각과 가지는 실재적 관계라는 또 다른 대상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지만, 옥캄은 일상적으로 자연 가운데는 대상과 지각만으로 명제의 참을 증명하기에는 충분하며, 신의 절대적 권능에 의한 것은 기적이고, 이는 예외적인 것이라고 본다. 그렇기에 만일 신에 의한 것이라면, 위의 명제는 거짓이 되고, 자연의 일상적 상황이라면, 참이 되기에 충분하다.
옥캄은 동시대인인 샤톤과 같은 논의를 이미 알고 있었다.23) 즉, 샤톤의 충분성의 원리를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모든 요소가 긍정되어지는 명제를 증명해야만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취해진 것으로 이는 거짓이라고 한다. 옥캄에 의하면, 기적이 아닌 자연적 상황에서는 두 가지로 충분하며 세 가지나 네 가지의 대상은 불필요하다. 그리고 만일 기적의 상황이라면, 백 가지의 것이 더해져도 기적에 의한 명제를 참을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24) 그것은 다른 철학적이고 신학적 문제이다.
여기에서 옥캄과 샤톤의 논의는 단지 학문의 방법론으로 경제성의 원리와 충분성의 원리일 수도 있지만, 또한 존재론적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옥캄은 방법론으로 경제성의 원리를 존재론에 가져와 필요 이상으로 가정 될 수 있는 대상을 제거하려 한다. 한 명제의 참을 증명하기 위한 최소한 대상의 존재만을 가정하고, 그 이상의 것은 거부하였다. 이는 필요 이상의 개념을 제거하려는 옥캄의 경제성의 원리도 있지만, 필요 이상의 존재자를 제거하려는 면도날도 있는 것이다. 즉 경제성의 원리란 필요 없이 복잡한 것 없이 학문적 합리성과 동시에 최소한의 존재자로 명제의 참을 증명하려는 면도날도 있는 것이다. 샤톤에 대한 옥캄의 불만은 샤톤의 논의가 필요 이상으로 복잡한 논리체계를 가지며, 또한 이로 인한 필요 이상의 대상을 가정하는 것에 있다.
4.0 청소부 옥캄의 빗자루
옥캄의 경제성의 원리는 존재론적 제거를 의미하는 면도날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고의 방식이 보다 선명하고 합리적이기를 바라는 학문의 방법론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방법론이 존재론적 의미를 가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만일 사고의 경제성에 의하여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존재자라면 존재론적으로 제거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옥캄의 경제성의 원리는 면도날과 동일하지 않으며 차라리 빗자루 정도에 비유될 수 있을 것 같다. 옥캄은 청소부이다. 필요 없이 다수화 된 것은 버리고, 어지럽게 있는 것은 가지런히 정리하려고 한다.
“번개가 치면 천둥소리가 난다”라는 명제는 옥캄에게 참이다. 자연의 질서에 의하면 이 명제는 참인 것이다. 그렇지만 기적에 의하면 거짓이다. 그것은 신의 절대적 권능에 의하여 번개 없이 천둥소리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명제는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연의 질서 가운데 이 명제는 언제나 참이다. 굳이 여기에서 번개와 천둥사이의 실재적 관계를 가정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빗자루로 쓸어버려야할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하나의 명제가 자연 질서 속에는 거짓이지만, 기적에 의한 것이라고 참일 수 있다고 하면서 제 삼의 요소 없이 각각의 진리치에 적당한 장소에 정리해 둔다. 옥캄의 정리법은 다른 요소 없이 각각의 몫에 정당한 곳에 두는 것이다.
샤톤은 다르다. 그는 제 삼의 것을 둔다. 그러면서 필요한 것을 없애는 것이 청소가 아니라, 필요한 것을 필요한 곳에 두는 것을 청소라고 옥캄에게 말할 것이다. 그에게 “번개가 치면 천둥소리가 난다”는 것은 거짓이다. 신이 번개 없이 천둥소리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명제를 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 둘의 실재적 관계를 가정해야한다고 한다.
옥캄과 샤톤은 모두 학문의 합리성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1270년 이후 신의 절대적 권능이란 요소를 무시하지 않는 상황에서였다. 샤톤은 필요한 것은 필요한 곳에 두자고 하였고, 옥캄은 필요 없는 것은 버리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면도날은 존재론적 의미에서 등장한 것이다. 이것은 ‘제거’란 것에 무게가 놓여진 것이다. 실재로 옥캄 이후 많은 이들은 필요 이상으로 놓여진 존재자를 제거하는 것으로 면도날을 이해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옥캄이 미처 모른 옥캄의 자리이다. 옥캄은 필요 이상의 다수성을 경계하였지만, 존재자를 제거해야한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즉 철학사에 등장하는 “존재자는 필요 없이 다수화되지 말아야한다”라는 옥캄을 표현하는 관용적 공식은 옥캄의 것이 아니다. 이는 옥캄 이후 일어난 옥캄의 이해에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옥캄의 경제성의 원리는 단지 자르는 것에 목적을 둔 것은 아니다. 그가 구상한 것은 복잡하지 않아도 되는 사고과정의 단순화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단순화의 과정 속에서 사라져야할 것은 물론 면도날로 잘라내야 할 것이다.
자연학의 한 명제가 신의 기적적 행위에 의하여 거짓이 될 것을 감안하여 실재적 관계를 두는 것은 사고과정을 복잡하게 하는 것이다. 자연 상황에서 자연학의 명제는 참이다. 그렇지만 신이 만일 원인 되어 자연 법칙을 넘어서는 일이 있었다면, 이 상황에서 그 명제는 거짓이 될 것이다. 이렇게 기적적 상황과 자연적 상황을 구분하여 사고하면 그만이지, 굳이 거기에 실재적 관계를 가정할 필요가 있는가 하고 옥캄은 여길 것이다. 그것은 이미 필요한 만큼 충분한 방에 불필요한 것을 가져오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5.0 나가는 글.
옥캄의 면도날은 존재론적 가치를 가진다. 하지만 이것이 곧 경제성의 원리인 것은 아니다. 경제성의 원리가 곧 면도날은 아닌 것이다. 경제성의 원리는 옥캄의 철학이 가지는 철학적 방법론이다. 그렇기에 옥캄의 철학적 방법론은 곧 면도날이 아니다. 그렇다고 옥캄이 면도날을 가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면도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경제성의 원리라는 옥캄의 방법론의 수단으로 혹은 하나의 도구로 사용될 뿐이다. 옥캄은 다수성을 제거하려고 하였지만, 이것인 존재성을 제거하는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개념의 다수성 혹은 사고의 복잡함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자연스럽게 필요 이상의 존재자가 논의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자연히 면도날로 제거되어야할 것이 될 것이다. 옥캄은 필요 없이 늘어선 다수성에 반대했다.25) 그렇지만 옥캄의 사후 그리고 칸트의 이해와 같은 그러한 존재자를 제거하는 면도날이 곧 경제성의 원리인 것은 아니다. 옥캄의 면도날은 옥캄의 전체를 보여지는 적당한 이름은 아닐지 모른다. 면도하는 이발사가 옥캄의 철학사적 위상이라고 하기보다, 어쩌면 청소부 옥캄이 더 적절한 것일지 모른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것은 경제성의 원리는 존재자의 제거가 아니라, 사고의 단순화와 합리화이며, 이로 인한 면도날이 수부적으로 요청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하려는 것은 절당한 것을 적당한 곳에 두는 청소이다.
샤톤과의 논쟁에서 옥캄과 샤톤의 궁극적 지향은 동일하다. 단지 청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차이를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가 서로 다른 청소 방식을 놓으며 결과도 다르게 한다. 그렇지만 사고에 있어서 혹은 학문에 있어서 적절한 수의 대상이 요구된다는 것은 둘 다 인정하였다. 그 적절한 수의 대상에 관한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인 것이다. 이렇게 샤톤과의 논쟁을 통하여 그의 경제성의 원리에 의한 학문함은 면도날질이 아니라, 청소라고 여겨진다.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옥캄에 주어진 면도날의 진실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경제성의 원리에 의하여 요청되는 수단이며, 존재론적 의미를 가진다. 즉 경제성의 원리라는 방법론적 논의에 의하여 요청되는 수단으로 존재론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이제 면도날질을 하는 옥캄이 아니라, 청소하는 옥캄의 상을 가져봄 직도 할 것이다.
1) R.Ariew, "Did Ockham Use His Razor?" Franciscan Studies 37 (1977), 5-17; C.K.Brampton, "Nominalism and the Law of Parsimony" The Modern Schoolman 41 (1963-1964), 273-281; A.Maurer, "Ockham's Razor and Chatton's Anti-Razor" In Being and Knowing. Studies in Thomas Aquinas and Later Medieval Philosophers (Toronto: PIMS, 1990), 403-421; A.Maurer, "Ockham's Razor and Chatton's Anti-Razor" In Being and Knowing, 431-443; J.Beckmann, ontologisches Prinzip oder methodologische Maxime? Ockham und der Oekonomiegedanke einst und jetzt" In Die Gegenwart Ockhams, ed. W.Vossenkuhl et al. (Weinheim: VCH Acta Humaniora, 1990), 191-207.
2) J.Boler, "Ockham's Cleaver" Franciscan Studies 48 (1985), 119-144.
3) G.W.Leibniz, Dissertatio de stylo philosophico Marii Nizolii (1670). "...entia non esse multiplicanda praeter necessitatem"
4) J.Beckmann, ontologisches Prinzip oder methodologische Maxime? Ockham und der Oekonomiegedanke einst und jetzt", 203, n.1.
5) Ockham, Expositio in libros physicorum 1,11 (OP.4, 118.2-7); Ockham, Reportatio 2,18 (OT.5, 404.4-10); Ockham, Ordinatio 1,7,2 (OT.3, 134.3-5).
6) G.Leff, William of Ockham. The metamorphosis of scholastic discourse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75), 35.
7) Ibid., 17.
8) cf. W.Courtenay, "The Critique on natural Causality in the Mutakallimun and Nominalism" Harvard Theological Review 66 (1973), 92.
9) Duns Scotus, Ordinatio 1,7,2 (Vatican ed. Opera Omnia 2: 305.14-15).
10) Ockham, Summa logicae 1,12 (OP.1, 43.34-35). "frustra fit per plura quod postest fieri per pauciora"
11) Thomas, Summa theologicae III, q.75, a.1, c.a.
12) G.Leff, The Dissolution of the Medieval Outlook (New York, Hagerstown, San Franciscan, London: Harper Togchbooks, 1976), 1-31. 레프는 이 글에서 후기 중세 철학을 조망할 있는 간단한 설명과 후기 중세 철학이 1270년과 1277년의 단죄와 가지는 관계를 정리하고 있다.
13) J.Beckmann, ontologisches Prinzip oder methodologische Maxime? Ockham und der Oekonomiegedanke einst und jetzt", 202; G.Leff, William of Ockham., 35.
14) Ibid., 198.
15) Chatton, Reportatio et lectura super sententias-Collatio ad librum primum et prologus ed. J.Wey (Toronto:PIMS, 1989).
16) Ibid., prol.2,1 (85.252-254).
17) A.Maurer, "Ockham's Razor and Chatton's Anti-Razor", 432.
18)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B684. 우리말 역본은 다음의 것을 참고했다. 전원배, 『순수이성비판』, (서울: 삼성출판사, 1990).
19) K.Menger, "A Counterpart of Ockham's Razor in Pure and Applied Mathematics: ontological Uses" Synthese 12 (1920), 415.
20) Ockham, Quodlibeta 4,24 (OT.9, 413).
21) Chatton, Reportatio et lectura super sententias, prol.2,1 (85.252-254).
22) Ockham, Quodlibeta 7,1 (OT.9, 704.17-19).
23) Ibid., 6,12 (OT.9, 629).
24) Ibid., (OT.9, 632-633).
25) Ockham, Summa logicae 1,12 (OP.1, 43.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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