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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투스도 모른 스코투스의 자리
: 스코투스의 소비자로서 안토니우스 안드레에.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1.0 들어가면서.
토마스 아퀴나스, 스코투스 그리고 옥캄. 이들은 중세를 대표하는 삼인의 철학자라 할 수 있다. 대체로 철학사 중심의 철학적 교육이나 담론은 이 삼인의 논의로 중세 철학을 한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중세 철학자가 이들 세 명인 것은 아니다. 이들을 논박하고 혹은 이들의 입장을 지지한 다양하고 많은 철학자 더욱 이 이들의 철학적 사고에 영향을 준 철학자가 중세에 존재하였다. 그렇다면, 위의 세 명이 중세 철학을 대표할 만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 될 수는 있겠지만, 이들이 중세 철학의 모두는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중세 철학의 접근법은 중세 철학의 다양성을 부정하는 가운데 극히 획일화되고 도식화된 정의를 낳게 된다. 이러한 도식화된 논의는 철학사의 각 단락을 채우기에는 적당할지 모르지만, 그 시대의 다양한 고민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철학사적 담론은 10진법적 사고로 10년, 100년, 즉 1세기로 시대를 나누고 사고한다. 그 각각의 시대를 다른 시대와 구분하여 벽을 쌓고, 각각의 시대를 벽 속에 한정하는 식의 방법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벽이란 타자와의 구분으로 내부를 분명하게 구별된 채로 인식하게 하지만, 한편에서 그것은 구금이다. 이 구금은 대화의 단절 속에서 내부를 이해하게 한다. 그러나 진정한 철학사의 담론은 대화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철학사에는 시대의 벽이 있지만, 현실의 역사는 시대의 구분을 넘어서 사고하고 대화하고 있다. 중세 후기 철학자는 근대 철학자에 영향을 주었고 많은 경우 철학적 관심사를 공유하고 있다. 그렇지만 철학사에 의하면, 이들은 서로 달라야하고 서로 다른 시대와 논의 그리고 사상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쉽게 흔한 철학사와 역사 속의 철학사적 논의는 다를 수 있다.
스코투스는 중세를 대표하는 삼인 가운데 한 명이다. 철학사는 그의 이름 속에 스코투스주의자라는 집단을 정리한다. 그렇지만 스코투스주의자라는 이러한 도식화 속에서도 다양성이 존재할 수 있다. 스코투스주의라는 것은 하나의 사유 공간이다. 이 사유 공간은 외부의 옥캄주의와 토마스주의와 구별되는 벽을 가진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스코투스주의자는 벽 속에 안주하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벽을 넘어서지 않은 선에서 충실한 거주자가 되고자 했을 것이다. 이들은 스코투스의 철학적 산물에 대한 적극적 소비자로 철학사에 존재할 것이다. 이들의 철학적 산물은 철저하게 스코투스의 소비자로서의 자신의 위치에 충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 편의 스코투스주의자들은 스코투스주의라는 사유 공간에 거주한다는 점에서 위의 경우와 같지만, 이들은 벽을 넘나들면서 스스로의 철학적 사유를 진행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가진다. 이들은 간혹 벽 넘어 스코투스주의의 사유 공간을 넘보는 이들을 공격하면서, 근본은 스코투스주의라는 사유 공간에 거주하였다. 그러나 간혹 공격을 위하여 벽을 넘어서 타자의 지역에 까지 이르렀다. 벽을 넘어 가는 것은 사유 공간을 넘어 적의 지역에 들어감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이들 스코투스주의자들은 어떤 면에서 스코투스와 다른 면모를 가지기도 한다. 이렇게 스코투스주의자들은 두 가지 면을 가진다. 그리고 스코투스주의자라면 누구나 이 두 요소를 모두 어느 정도 가진다. 단지 한 쪽에만 물려서, 예를 들어, 스코투스의 사유 공간에 전적이고 완전하게 머물지만 한다면, 그는 스코투스 자체와 구별되지 못하는 존재일 것이다. 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누구나 어느 정도 차이를 가진다. 그렇기에 모든 스코투스주의자는 정도의 차이이지만, 이 두 가지 요소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안토니우스 안드레에(Antonius Andreae)는 충실한 스코투스주의자의 길을 갔다. 그에게서 필자는 스코투스의 사유 공간 속에 철저하게 머물려는 스코투스주의자의 일면을 발견한다. 우리가 흔히 스코투스의 표제어로 여기는 ‘이것임’(haecceitas)은 문헌적으로 스코투스에게서가 아니라, 안토니우스의 저서에서 보여 진다.1) 안토니우스는 스코투스의 사유 공간이 다른 것과 공간과 구별되는 벽을 가져야한다고 보았고, 그 벽을 통하여 차이를 드려내려고 하였다. 그렇기에 그가 ‘이것임’이란 개념을 사용함으로 스코투스의 논의를 정리한 것은 그의 의도에 매우 잘 부합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안토니우스와 또 다른 길에 리딩의 요한(John of Reading)이 있다. 그에게서 필자는 스코투스의 사유 공간을 넘나드는 스코투스주의자의 일면을 발견한다. 그는 스코투스로부터 직접 강의를 들은 제자였다. 또한 그는 스승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드렸으며, 이를 근거하여 자신의 철학을 일구었다. 이를 통하여 그는 당시 새롭게 등장한 옥캄과 아울레오리의 인식 이론을 스승인 스코투스의 논의에 근거하여 비판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철저하게 스코투스의 산물로 소비하는 범위에서만 그의 철학적 산물을 생산한 것은 아니다. 그가 주로 거주한 곳은 스코투스주의라는 사유 공간이었지만, 간혹 이를 경계 짓는 벽을 넘어 사유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비-실존에 대한 직관적 인식의 가능성에 관한 논의에선 옥캄을 따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는 인식 이론에서 species를 주장하는 등 스코투스의 사유 공간을 주된 거주지로 삼았음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는 스코투스의 산물을 소비하여 자신의 새로움이 더해진 새로운 철학적 사유를 생산한 생산자이기도 하였다.2)
안토니우스의 모습과 요하네스의 모습은 모두 스코투스주의자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그 형태는 다르다. 물론 이들의 스코투스주의가 다시 살아난 스코투스의 맘에 얼마나 들었는지는 여기에서 다루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룰 것은 안토니우스의 스코투즈주의이다. 그는 스코투스 사후 스코투스의 자리를 이어간 스코투스도 모른 스코투스의 사유 공간을 철학사에 마련한 인물이다. 스코투스 사후 많은 유럽의 철학자들은 그를 통하여 스코투스의 사유 공간으로 여행할 수 있었다. 비록 그의 이름이 철학사에 흔히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 그 이후 스코투스주의란 사유 공간을 마련한 인물 가운데 매우 중요한 인물임은 분명하다.
2.0 안토니우스는 누구인가?
안토니우스는 작은 스코투스, scotellus란 별명에 걸맞지 않게 영국과 먼 스페인 출신이다. 스페인동북부의 카탈로니아에서 생의 대부분을 소비한 그가 어떻게 영국의 철학자 스코투스의 사고를 접했을까. 그의 생애를 살펴보자. 하지만 그의 생애는 거의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1280년경에 태어났으며, 13세기가 마감되기 전에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가입하였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아마도 1295년일 것이다. 그는 1296년과 1299년 사이 철학을 공부하였으며, 그후 1300년에서 1304년까지 파리에 있었다. 이때 우리는 안토니우스와 스코투스의 만남을 추론할 수 있다. 스코투스는 이 무렵 파리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그의 강의에 출석하였다. 이렇게 스페인 사람 안토니우스는 영국사람 스코투스를 만나 직접적으로 그의 철학적 성과를 수용하였다. 그 이후 스코투스는 쾰른으로 가고, 그곳에서 1308년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스코투스는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3)54pt hei
안토니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논리적 소품들을 주해하였으며, 자연학 저서인 『자연의 세 가지 원리에 대하여』(De tribus princibiis naturae)를 적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 『자연의 세 가지 원리에 대하여』는 그의 주된 저서이다.4) 이 저서는 그가 스코투스가 하지 않은 자연학의 논의를 스코투스의 학문이론과 존재론에 준하여 그의 사유 공간에 알맞은 자연학을 체계적으로 논의한 것이다. 이 저서는 스코투스도 모른 스코투스의 자리를 마련한 이로서 안토니우스를 확인하게 해 준다. 또 다른 저서인 『형이상학 주해』 역시 매우 의미 있는 저서이다. 어쩌면 이는 가장 오랜 시간 그리고 아마도 가장 영향력을 가진 그의 저서라 할 수도 있겠다. 안토니우스는 이 저서를 통하여 자신의 야심을 드러낸다. 그것은 토마스의 것을 대체하는 주해이다. 그는 토마스의 주해에서 보여지는 문헌 방식을 따르는 주해를 적는다.5) 안토니우스는 스코투스의 사유 공간 속에 『형이상학』에 관한 주해의 장소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여러 재료를 가져다가 스코투스주의의 논리로 구성된 주해에 착수한다. 하지만 문헌이란 이러한 의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헌의 방식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토마스의 문헌 방식을 가져온다. 현재 우리가 접하는 『형이상학에 관한 질문들』(Quaestiones super libros metaphysicorum)은 스코투스의 것이지만, 그의 전집(ed. Wadding)에 속한 『형이상학 주해』(Expositio super libro metaphysicorum aristotelis)는 스코투스의 것이 아니라, 바로 안토니우스의 것이다.6)
『자연의 세 가지 원리에 대하여』는 당시 안토니우스의 면모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뛰어난 소비자만큼 뛰어난 광고인은 없을 것이다. 안토니우스가 그렇다. 그의 논의는 자신에게서만 멈추어 있지 않았다. 예를 들어 볼로냐의 아베로에스주의자로 우리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막데부르그의 테오도리쿠스(Theodoricus of Magdeburg)의 『자연학에서의 질문들』(Quaestiones in libros physicorum)에서도 『자연의 세 가지 원리에 대하여』의 수용이 보여 진다.7) 그리고『자연의 세 가지 원리에 대하여』는 스코투스 이후 스코투스의 자연철학 교과서로 읽혀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교과서는 유럽 전역으로 펴지기 시작하였다. 이미 14세기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이 교과서가 읽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음 세기에도 이 교과서는 사라지거나 그 영향력이 약해지지 않았다. 후에 에어푸르트에서 강의를 하게 될 아렌도르프의 헬름홀트(Helmhold von Arendorp)와 같은 이에 의하여 이 교과서는 옮겨 쓰여 졌기도 했다. 이렇게 쓰여진 수사본이 지금도 에어푸르트에 남아있다. 당시 에어푸르트는 프라그와 가까운 관계에 있던 대학이었다. 그렇기에 이 교과서는 프라그에도 전해졌을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지금도 프라그에는 이 교과서의 수사본이 남아있다.8) 이렇게 안토니우스에 의하여 스코투스도 모르게 만들어진 스코투스의 사유 공간은 유럽 전역으로 펴져갔다.
안토니우스는 누구인가? 정리하자면, 그는 스코투스가 떠난 자리에서 스코투스로 모든 스코투스의 자리를 마련한 인물이다. 하지만 철학사는 오랜 시간 그를 철저하게 외면하였다. 그의 이름은 19세기에 들어서야 교회사와 프란치스칸 수도회의 역사서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 이후 중세 철학에 대한 연구들이 일어나면서 그의 이름을 건 이차연구문헌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연구의 결과는 그에게 ‘스코투스주의의 두 번째 설립자’란 이름을 붙였다. 이제 그에 대한 소개는 접기로 한다. 이제 다음의 논의는 안토니우스가 마련한 사유 공간을 살펴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유 공간을 스코투스 자신이 얼마나 맘에 들어 했을까 하는 것을 살피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그가 사유 공간을 마련해가는 과정과 그 내용을 살피려고 하는 것이다.
3.0 안토니우스의 존재론적 사유 공간
안토니우스의 존재론적 사유 공간은 그의 개별화 이론으로 우선 살피자.9) 안토니우스는 실체와 마찬가지로 개별자를 자주적인 것 혹은 자립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이는 개별자가 그 자체로 작용하며 생성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동의한 것이다. 또한 어떤 것이 개별자라면 그것은 그 자체의 본성에 의한 개별자이며, 이는 동어반복과 같다. 이러한 그의 논의는 『명제집 주해』에서 종적 본성(natura specifica)라고 부르는 것에 이르러 확인할 수 있다. 이 용어는 『자연의 세 가지 원리에 대하여』와 『형이상학에 관한 질문들』(Quaestiones super metaphysicam)에서 본성(natura)과 종적 통성원리(quidditas specifica)라 불린 것이다.
여기에서 종적 본성은 ‘단수적 단일성’보다 덜한 존재이다. 하지만 종적 본성이 비록 수적 단일성보다 덜한 것일지라도, 여전히 실재적 단일성을 가질 수 있다.10) 이것은 스코투스의 소비자로서의 그의 모습이다. 그도 스코투스와 마찬가지로 개별자와 종은 그들 자신의 실재적 단일성을 가진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논의를 위하여 스코투스와 마찬가지로 그도 아비첸나로 돌아간다.
아비첸나에 의하면, 보편자는 중요한 철학적 위치로 인하여 완전한 무(無)일 수 없다. 그러나 보편자는 개별자와 달리 덜 충족된 존재이다. 아비첸나는 이러한 보편자를 단일성의 등급이 아니라. 존재의 등급으로 이해한다. 이로 인해 보편자 즉 공통본성은 여럿인지 하나인지에 관한 논의가 허락되지 않는다고 한다. 즉, 마성은 아무 것도 아니라, 단지 마성이며, 그 자체로 일자도 아니고, 다자도 아닌 것이 되며, 보편자도 단수자도 아닌 것이 된다. 스코투스는 마성과 같은 종적 본성을 그 자체로 단수자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떠한 개별화의 원리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적 본성은 스코투스에게 그 자체로 실재적 단일성을 가지지만, 특수자의 수적 단일자보다는 덜한 것이다.11) 이러한 결론을 안드레아스는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는 개별자와 종적 본성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 실체와 제이 실체로 이해한다. 전자는 자체적이지만, 후자는 그렇지는 않다. 전자는 더 실체적이고, 후자는 덜 실체적이다. 즉 어떤 식으로든 종적 본성은 실재적 존재성을 가진다. 그는 개별자와 종적 본성을 단일성의 차원이 아닌 존재의 차원으로 이해한다는 이비첸나의 논의를 스코투스를 통하여 수용한다. 그리하여 비록 종적 본성이 수적 단일성 보다 못하다고 하여도, 이는 실재적 단일성을 가진다고 본다. 그의 이와 관련된 많은 그는 많은 점에서, 아닌 전적으로 스코투스의 소비자였다. 그리고 그는 스코투스가 비쳐 마련하지 못한 한 용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바로 ‘이것임’이다. 이리 볼 때, 그의 존재론적 사유 공간은 철저하게 스코투스가 마련한 대지에서 일구어진 것이 분명하다.
4.0 안토니우스의 자연학적 사유 공간
안토니우스의 자연학적 사유 공간은 이미 논의한 대로 매우 중요하다. 스코투스는 자연학에 관한 체계적인 작업을 완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14세기 자연학적 논의는 하나의 대세였다. 안토니우스는 스코투스의 입장과 의도에 따라서 자연학을 체계화하려 한다. 이것이 『자연의 세 가지 원리에 대하여』이다.
4.1 자연학의 대상에 관하여
이 저서에서 그는 전통적으로 다루어지던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주의의 자연학과 다른 길을 간다. 일찍이 13세기 새롭게 유입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도교 사회에 문제를 야기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도교 철학자가 아니며,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이다. 그의 이러한 철학은 상당히 많은 점에서 비-그리스도교적인 것임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를 두고 중세인들은 고민하였다. 그들에게 이교도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지성의 최고봉이었기 때문이다. 즉 이성의 극에 달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보나벤투라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많은 논의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를 ‘나쁜 형이상학자’(pessinus matephysicus)나 ‘나쁜 자연학자’(pessinus naturalis)로 보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변론하려 했다. 즉, 그가 신앙을 가지지 않아서 그럴 뿐이란 것이다.12)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다르게 접근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주의에 의하면 자연학의 대상은 운동하는 것 혹은 운동하는 존재자(ens mobile)이다. 이에 안토니우스는 반대한다. 그러면서 자연학 대상의 형식적 근거는 운동성(mobilitas)라고 한다. 왜인가? 운동하는 것의 근거를 제공하는 물체(corpus)를 대상으로 보지 않는 이유에서 이다. 그는 운동하면서 물체와 연관되지 않은 비-물체적이고 실재적 실체를 감안해야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천사가 그러한 존재이다. 이러한 존재를 감안한다면, 움직이는 것은 모두 물체라는 것은 제고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자연학 이해는 잘못이 된다. 이를 근거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나쁜 자연학자라 부른다.13) 이제 시대는 무조건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추종하는 것을 넘어 시대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발전이 바로 안토니우스에게서도 보여진다.
안토니우스는 분명 물체가 자연학의 대상일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것은 위에서 말했듯이 비-물체적이고 실재적 실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안토니우스의 논의는 스코투스의 소비자로서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이러한 논의는 스코투스가 『명제집 주해』에서 신학의 대상을 다루는 것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14)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스코투스가 모른 스코투스의 자리를 자연학의 논의 가운데 마련했다.
4.2 ‘장소’에 관하여
‘장소’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 가운데 하나이다. 이에 관하여 중세인들은 많은 고민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는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이어졌다.이 당시 유행하던 장소에 관한 담론의 공간에는 스코투스주의와 토마스주의가 있었다. 당시 토마스주의자들은 장소를 두 가지로 나누었다. 그것은 질료적 장소와 형상적 장소이다. 질료적 장소는 우유적으로 운동적이다. 형상적 장소는 본질적으로 비-운동적이다. 예를 들어, 물이 배 주변을 흐를 때, 배는 전체 강의 측면에서 형상적으로 장소가 불변적이다. 장소의 비-운동성과 불변성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초기 중세인들의 이해와 맥을 같이 한다.15) 그러나 스코투스주의자들은 이를 거부한다. 그들은 장소를 내포된 물체의 측면에서 내포하는 물체와의 관계라 정의한다. 즉 장소란 간단하게 육체 혹은 물체들 사이의 관계일 뿐이다. 내포하는 물체와 내포된 물체 양자의 변화와 함께 관계도 변한다. 그렇기에 물체의 장소는 동일한 장소에 머물수 없다. 물체란 여기에서 가변적 중계자이다. 이때, 물체는 특정의 경우에 한 장소에 있지만, 다른 경우에는 다른 장소에 있게 된다. 그렇기에 장소가 구분되고, 본질적으로 형상적 장소가 불변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러한 논의는 17세기 스콜라 철학자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다루어졌다. 톨레투스(Toletus)는 스코투스를 떠나 토마스의 편에 선다. 반면 에우스타치우스(Eustachius)는 토마스를 떠나 스코투스의 편에 선다. 그리고 라코니스의 아브라(Abra de Raconis)는 에우스타치우스와 유사한 결론에 이르렀다.16)
그러면 안토니우스의 경우는 어떠한가? 안토니우스 역시 장소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이는 그의 『여섯 원리에 대한 논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장소와 움직인 내포된 물체 사이에 직접적인 획득된 장소가 있다면, 유사하게 버려진 것도 있다고 한다. 그는 토마스주의자들의 장소에 관한 형상적 장소와 질료적 장소의 구분을 알았다. 그는 장소는 장소적 운동을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생성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한다고 한다. 이러한 논의는 또 다른 스코투스주의자인 요하네스 칸노니쿠스(Johannes Canonicus)의 결론과 유사한 것이다. 안토니우스와 칸노니쿠스 등에게 장소에 관한 논의는 스코투스의 그것에 다가가는 여정에서 나온 것이다.17) 이러한 장소에 관한 관점은 스코투스에게서 안토니우스와 칸노니쿠스와 같은 초기 스코투스주의자를 걸쳐 3백년이 흘려 17세기에 이르게 된다. 안토니우스와 칸노니쿠스 등의 초기 스코투스주의자들이 머물던 사고 공간은 17세기에도 여전히 그 가운데 사람을 모을 만큼 유혹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초기 스코투스주의자들은 스코투스주의의 사유 공간을 후대에 남기고 체계화한 임무를 가졌으며, 다들 나름의 자리에서 충실하였다. 이는 장소에 관한 논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이 생각한 스코투스와 역사 속의 스코투스가 동일한 얼마만큼의 사유 공간을 공유하는가의 문제는 남아있지만 말이다.
5.0 나가면서
-철학사에서 안토니우스의 자리
위의 논의에서 필자는 안토니우스가 이룬 스코투스도 모른 스코투스의 자리를 살펴보았다. 그가 이룬 자연학적 논의의 일부는 스코투스가 하지 않은 사유 공간을 마치 스코투스가 일군 듯이 보이게 하였다. 그리고 이는 스코투스의 자연학 교과서가 되어 스코투스의 저서를 대신해 유럽 전역에 전파되었다. 이렇게 전파가 되었지만, 그의 이름은 철학사에 매우 작은 것이었다. 겨우 그의 초기 추종자의 한 명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그러한 추종자들이 철학사 속의 스코투스를 만들어갔다. 안토니우스의 스코투스도 그러한 것이다.
그의 존재는 14세기로 이어지는 스코투스의 스코투스주의로의 전파와 관련된다. 스코투스는 초기 그의 제자들의 활동한 공간 확보가 아니었으며, 또 다른 역사 속의 인물이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안토니우스와 같은 초기 그의 제자들은 그의 전파에 온힘을 다했고,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철학함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스코투스의 관저에서 자연학의 대상에 관하여 논의하고,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과 다르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 정도로 당시 안토니우스와 같은 이에게 스코투스의 무게감을 대단한 것이었다. 이러한 무게감은 안토니우스와 리딩의 요하네스 등을 걸쳐 17세기와 18세기에 이르도록 스코투스를 서양 철학의 담론 공간에서 한 몫을 하게 한 것이라 하겠다.
이미 위에서 안토니우스의 저작이 그의 고향 스페인을 넘어 이탈리아와 영국 그리고 독일에 이르도록 읽혀졌다. 이러한 전파는 곧 스코투스주의의 영역 확대라고 할 수도 있다. 지금 남은 그의 수사본들이 여러 유럽에 있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확신하게 해 준다. 거기에 『형이상학 주해』에서 그가 행한 것. 스코투스의 의도에 의한 주해와 토마스의 주해를 대신한다는 그의 뜻. 이 뜻도 그가 가운데 스코투스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확인하게 해 준다. 이러한 그의 뜻에 의한 주해는 또 많은 이들에게 읽혀져 갔다. 이러한 것도 스코투스주의의 영역 확대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역사를 영웅 중심의 역사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를 영웅으로 만든 이들의 노력과 희생은 진정 그 시대를 이끄는 또 하나의 영웅의 모습이라 하겠다. 영웅을 만든 영웅이니 말이다. 철학사는 어떠한가? 토마스, 스코투스, 옥캄. 이 셋의 이름 아래 각각의 ‘-주의’가 붙는다. 이는 마치 그의 사유 공간 속에서 사유하고 타자와 구별되는 벽을 지어라는 의미의 어미(語尾)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그들의 사유 공간을 지켜나가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등의 개보수를 한 것은 ‘-주의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누구 누구)의 사유 공간 속에서 사유하고 타자와 구별되는 벽을 짓는 자”라고 정의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간혹 개보수가 초기 스코투스가 처음 개척한 곳에 지은 집과 달리 보여질 수 있지만, 분명 이들은 스코투스가 초기에 개척한 땅을 근거로 거주하며, 살아간 이들이다. 비록 몇몇 지점에서 스코투스를 간혹 비판하더라도, 이들은 결코 그의 근본적 존재론의 가치를 거의가 버리지 않았다.
안토니우스를 통하여 우리는 초기 스코투스 사후 스코투스의 사유 공간을 개척한 이를 살필 수 있었다. 이런 초기 개척자들이 없었다면, 후기 18세기에 이르는 스코투스이 사유 공간이 존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스코투스가 미쳐 하지 않은 자리를 마련하여,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도록 하는 것, 스코투스가 미쳐 모른 스코투스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 이것은 분명 스코투스를 살리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자연학적 논의의 요청, 형이상학적 논의의 요청을 스코투스가 직접 행한 사유 공간 가운데 사유하고, 이를 통하여 새로운 개척을 시도하는 것, 이를 행하는 이를 우리는 진정 스코투스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안토니우스는 스코투스주의의 첫 머리에 서는 이라고 할 것이다. 스코투스도 모른 그렇지만 철학사에 스코투스를 만들어간 첫 인물인 것이다.
물론 안토니우스에 관한 세밀한 논의에 관하여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스코투스주의의 한 흐름을 정리하고, 이를 이곳에 담았다면, 이것으로 필자의 몫을 다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글을 마친다.
2005.06.09.
1) 알랜 B. 볼터, 「둔스 스코투스」『스콜라철학에서의 개체화』, 이재룡, 이재경 옮김 (서울: 가톨릭출판사, 2003), 505.
2) K.Georgedes, "John of Reading" In A Companion to Philosophy in the Middle Ages, ed. J.Gracia et al. (Oxford: Blackwell, 2003), 390.
3) M.Gensler, "The Making of a Doctor dulcifluus. Atonius Andreae and his Position and Scotism" (http://). 안토니우스에 관한 겐스러의 논문은 http://에서 읽을 수 있다. 그는 안토니우스에 관한 여러 연구를 하고 있으며, 이를 홈페이지를 통하여 소개하고 있다.
4) M.Gensler, "Antonius Andreae's de tribus principiis naturae: The Spanish Handbook of Scotism" (http://).
5) M.Gensler, "Antonius Andreae's opus magnum: The Metaphysics Commentary" (http://), 2-3.
6) Th.Williams, "Introduction: The Life and Works of John Duns the Scot"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Duns Scotus, ed. Th.William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9.
7) M.Gensler, "Antonius Andreae's de tribus principiis naturae: The Spanish Handbook of Scotism", 15-16.
8) Ibid., 17.
9) M.Gensler, "The Concept of the Individual in the Sentences Commentary of Antonius Andreae" In Individuum und Individualitaet im mittelalter, ed. J.Aertsen et al. (Berlin: Walter de Gruyter, 1996), 305-312.
10) Ibid., 307.
11) S.Dumont, "John Duns Scotus" In A Companion to Philosophy in the Middle Ages, 359-360; T,Noone, "Universals and Individuation"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Duns Scotus, 100-128.
12) E.Mahoney, "Aristotle as The worst Natural Philosopher and The worst Metaphysician: his Reputation among Some Franciscan Philosophers and Later Reactions" In Die Philosophie im 14. und 15. Jahrhundert, ed. O.Pluta (Amsterdam: Verlag B.R.Gruener, 1988), 261-262.
13) Ibid., 272.
14) M.Gensler, "Antonius Andreae's de tribus principiis naturae: The Spanish Handbook of Scotism", 7.
15)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초기 주해자들의 견해와 아베로에스의 견해를 위해서는 C.Trifogli, Oxford Physics in the thirteenth Century (ca.1250-1270) (Leiden: Brill, 2000), 133-202을 참조하기 바라며, 중세 전반의 장소에 관한 이해를 위해서는 P.Duhem, Medieval Cosmology, trans. R.Ariew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5), 139-294를 참조하기 바란다.
16) R.Ariew, "Aristotelianism in the 17th century" In Routledge Encyclopedia of Philosophy Version 1.0 (London: Routledge, 1998); R.Ariew, Descartes and the last Scholastics (Ithaca and London: Cornell University, 1999), 48-53. 이 글들은 17세기 스코투스주의자들과 토마스주의자들의 논쟁을 찾아 읽을 수 있다.
17) P.Duhem, Medieval Cosmology, 203-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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