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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의자리

14세기 중세 철학의 지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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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중세 철학의 지형도

:신학적 논의에서 언어의 이해까지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1. 서론


과연 어디에서부터 14세기 중세 철학의 지형도를 그릴 것인가? 이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필자는 서슴없이 1270년과 1277년의 사건이 하나의 주된 사건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1270년과 1277년은 이후 철학과 신학 그리고 자연학에 이르는 모든 당시 학계에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본격적으로 14세기의 논의에 들어서기 전에 우선 1270년과 1277년에 관한 논의를 소개하며 시작해야할 것이다. 무슬림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거대한 원천을 등에 지고 아랍에서 유럽으로 전해진다. 이 무슬림 철학은 당시 새로움에 목마른 학자들에게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알베르투스 마뉴스(Albertus Magnus)와 그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등을 비롯하여 흔히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자라고 불리는 시제 브라방(Siger Brabant)에 이르기까지 당시 대표적 철학자들은 모두가 이 단비를 즐겼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움은 그리스도교의 오랜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에게 매우 급진적인 것으로 비추어졌다. 특히 모든 인간에 하나의 능동지성을 가정하여 윤리신학에 어려움을 주는 지성단일성에 관한 것이나, 창조론을 부정하는 우주의 영원성에 관한 것 그리고 신의 전능을 부정하는 신의 의지에 관한 제한, 신의 인식 능력을 제한하는 신은 개별자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논의 등은 대표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는 1277년에 이르러 대대적인 단죄로 이어진다.1) 물론 이들 단죄에 관한 정당성은 여전히 문제로 남았지만 말이다. 하여간 이러한 단죄로 인하여 이후 서양의 학계는 새로운 노선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노선이 13세기 후반기 철학에서 드러나기 시작하며 14세기 철학에 이르게 된다. 신은 개별자를 인식한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반작용은 직관적 인지와 개념론 그리고 유명론 등을 낳았다. 그리고 신의 의지를 제한하는 것에 대한 반작용은 주의주의를 낳았다. 이로 인하여 14세기 철학은 유명론과 개념론 그리고 주의주의가 확대되었고, 이에 관한 인식론적 논의가 다루어졌다. 

 단죄로 인한 이러한 철학적 흐름 가운데도 아베로에스주의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14세기 잔둔의 요한(Johann von Jandun)과 같은 학자에서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아베로에스주의는 사라지지 않고, 다루어졌다. 특히 파두아(Padua) 대학을 중심으로 이러한 현상은 북부 이탈라아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2) 이들은 형이상학의 문제에서 정치철학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에서 한 몫을 하였다.

 이러한 흐름 이외에도 토마스 아퀴나스와 실재론적 논의는 사라지지 않고 후기 중세 철학에 이르기까지 이어졌다. 종국에는 위클리프(Wyclif)와 같은 극단적 실재론자도 후기에 들어선다. 또한 엑하르트(Eckhart)와 같은 신비주의와 부정신학적 논의가 후기 중세철학에 등장하며 유명론적 논의와 함께 이후 루터(Martin Lutter)와 같은 이에 이르게 된다.

 이 길고 장황한 역사적 논의를 이곳에 자세히 소개할 수는 없다. 그저 그것의 개괄적인 내용을 소개할 뿐이다. 그리고 필자의 능력이 그 정도일 뿐이다.


2. 1270년과 1277년의 사건 그 이후


새롭게 유럽에 유입된 무슬림 철학은 유럽의 전통적 사상에 강한 반작용에 부딪친다. 파리의 주교 알베르니아의 윌리엄는 1241년 이어서 파리 대주교 에티엔 텅피에는 1270년 12월 10일에 라틴 아베로에스주의를 단죄한다. 그 단죄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인간의 지성은 수적으로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주장

2. 인간이 인식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거나 부정확하다는 주장

3. 인간의 의지는 필연적 방식으로 결단 또는 선택한다는 주장

4. 지구상에 벌어지는 모든 일이 천상 물체의 필연성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주장

5. 세상이 영원하다는 주장

6. 아담과 같은 첫 인간 따위는 없었다는 주장

7. 인간이 인간인 한에서 그 형상인 영혼은 육신이 소멸될 때 함께 소멸된다는 주장

8. 죽은 다음, 분리된 영혼은 물리적인 불의 고통을 겪지 않는다는 주장

9. 자유 의지는 수동적 능력이지 능동적 능력이 아니며, 욕구 대상에 의해 필연적으로 움직이게 된다는 주장

10. 신은 개별적 사물들을 알지 못한다는 주장

11. 신은 자신만을 알뿐이라는 주장

12. 인간의 행위들은 신의 섭리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는 주장

13. 신은 소멸적인 피조물에게 불멸성을 허용할 수 없다는 주장3)


이러한 논의의 몇몇 핵심을 요약하자면, 지성단일성 문제와 의지의 필연성 문제, 우주의 영원성에 관한 문제 그리고 개별자의 인식에 관한 문제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 가운데 몇몇 이후 14세기 철학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것을 골라 정리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ꡔ영혼에 관하여ꡕ(De anima)에 의하면 지성의 대상은 보편자이며, 감각의 대상은 개별자이다.4) 그런데 신은 감각을 가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신은 개별자를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이 위의 10번 단죄 명제의 그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은 ‘인간’은 인식하지만, ‘안현주’, ‘유영철’과 같은 개별자는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가 되는 것이다. 이런 논의는 전통적인 신학에선 허락될 수 없는 것이고 그렇기에 단죄의 목록에 올라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본적 논의 자체를 새롭게 해야할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둔스 스코투스의 ‘직관적 인지’(notitia intuitiva)라는 개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스코투스는 개별자에 관한 인식을 위해 직관적 인지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러한 스코투스의 논의는 옥캄에게로 이어져 옥캄의 존재와 사고에 관한 논의의 원천이 된다. 그리고 후기 중세 철학의 중심적 논의로 자리매김한다.

 또한 3번 단죄 명제에서 보듯이 신의 의지를 제한하는 어떠한 것도 거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주의주의적 흐름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는 신의 ‘절대적 권능’(Potentia absoluta)을 철학사의 전면에 부각시킨다.5) 신은 그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 14세기 철학의 기본적 명제 가운데 하나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로 인하여 모든 철학적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개별자에 관한 직관적 인지에 의하여 개별자를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경험론적 사고와 신의 절대적 권능에 의하여 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언제든지 기존의 자연법칙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고가 만난다면 자연스럽게 회의주의적 사고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또 다른 단죄로 이어진다. 이러한 단죄는 14세기에서 15세기에로 옥캄주의를 향한 금지라는 내용으로 꾸준히 일어난다. 어찌보면 옥캄주의의 팽창은 이러한 단죄에로의 도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6) 당시 학자의 도시인 파리에선 1340년, 1346년 그리고 1347년에 걸쳐 옥캄주의에 관한 단죄와 금서조치가 행해졌다.7) 그렇다고 파리에서 유명론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명론적 사고에 관한 냉엄함은 독일에로 옥캄주의가 넘어가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단죄된 명제 가운데 하나가 “어떤 것의 원리는 믿어질 수 있지만, 결과를 알 수는 없다”고 하는 것에 대한 단죄이다. 그 외에도 많은 단죄가 옥캄주의의 인과론에서 보이는 개연성의 문제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8) 이러한 개연성의 문제는 옥캄 속에 녹아있는 신의 절대적 권능과 직관적 인지에 관한 사고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는 1277년 이후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시대적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질송은 옥캄의 의도가 선배들의 철학 가운데 비-아리스토텔레스적 요소의 제거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옥캄의 논의가 정작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것과도 다른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의 의도가 단지 비-아리스토텔레스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1277년 이후 시대적 상황의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9)

 1277년 이후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옥캄과 옥캄의 후계자 이외에도 다양한 해법을 가진 이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다양한 해법들이 후기 중세 철학의 지형도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는 요소들이 될 것이다.


3. 후기 중세 철학에서 존재론과 인식의 문제


중세 존재론의 대표적 논의가 보편자와 개별자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후기 중세 철학에도 이는 여전하다. 스코투스와 토마스의 지지자들과 같은 실재론자들을 비롯하여 또 다른 형태의 실재론자인 샤톤(Chatton) 그리고 후기 옥캄과 같은 개념론자들이 모두 후기 중세의 지형도 가운데 나름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논의도 1270년 이후의 상황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토마스는 보편자를 개체 속에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인간의 지성에 의하여 개체에서 추상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토마스의 실재론이다. 토마스에게 개체는 감각의 대상이며, 보편자는 지성의 대상이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감각으로 수용한 것에서 보편자를 추상함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위에서 이야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ꡔ영혼에 관하여ꡕ에서 본 것에 근간을 두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는 14세기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진행된다. 실재론은 보편자의 실재성을 확신하지만, 개별자의 우선성을 긍정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흐름이 시작되어간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새로운 존재론을 낳고, 또 이는 새로운 인식론적 논의로 나아간다.


3.1 아비첸나

 14세기 철학자들에게 무슬림 철학자인 아비첸나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원천이었다. 아비첸나는 개별자로서의 개별자에 대항 직접적 직관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에게 보편자는 철학적 직무로 인하여 전혀 무(無)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보편자는 개별자와 달리 충족된 존재가 아니라, 덜된 존재이다.10) 그는 어떤 의미에서 ‘이것임’(haecceitas)을 주장한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소크라테스성’이나 ‘플라톤성’과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 한 사물이 변화 가운데 자신의 동일성을 지속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실체적 형상의 물질적 현존으로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개별자로서의 개별자에 관한 직접적 직관이 가능하다고 한 것이다.11) 이러한 흐름은 1277년 이후 시대상에 적절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2 스코투스

 스코투스는 아비첸나에 주의를 기울인다.12) 그는 ‘직관적 인지’를 주장하면서, 개별성에 관한 직접적 직관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의 ꡔ강의ꡕ(Lectura)의 한 부분을 읽어보자.


우리는 인식의 두 종류 그리고 지성 가운데 사고함의 두 종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하나의 사고함은 모든 실존으로부터 추상하는 한에서 지성 가운데 있을 수 있다. 또 다른 사고함은 그것이 그의 실존 가운데 현존하는 한에서 사물에 대하여 있을 수 있다.13)


여기에서 전자는 추상적 인지를 그리고 후자는 직관적 인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직관적 인지는 한 사물의 존재 여부에 관한 것, 즉 실존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즉, 이는 단순하게 지각(知覺)과 관련하여 진술되는 것이다. 일반적 논의에서 개별적 소(牛)가 지금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아는 것은 감각을 필요로 한다. 감각, 즉 눈으로 봄으로 그 존재여부를 지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스코투스의 논의에서 놀라운 것은 지성이 감각 없이 그러한 정보를 가질 수 있다고 하는 것에 있다. 그는 이를 위한 두 가지 논의를 제안한다. 첫째, 가장 높은 인식능력인 지성은 가장 낮은 인식능력인 감각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둘째, 천상에서 축복 받은 이들은 신적 본질을 직관적 인지를 통하여 가져야한다. 감각을 통한 것이 아니다.14) 물론 이러한 논의는 철학적으로 매우 약한 논의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존재론에서 ‘이것임’은 각각의 개별자의 단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안주영 가운데 인간성은 안현주 가운데 인간성과 실재성에 따르면 다르다. 동일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인간성과 같은 공통본성은 단일성의 차원에서 덜된 것이다. 이는 없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의 사물 가운데 확정되어 존재함 없이 실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15) 스코투스에게 지성의 고유한 대상은 공통본성이다. 이러한 공통본성은 덜된 단일성(lesser unity)이다.16) 이로 볼 때 스코투스의 지성의 고유한 대상으로 공통본성은 이미 중세에 전통적으로 수용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다르다. 이러한 스코투스의 존재론적 논의에서도 개별자는 지성의 대상일 수 있다. 각각의 ‘이것임’으로 단일성을 유지하는 각각의 개별자는 그 자체로 가지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개별자인 ‘이 소’를 인식할 수 있다. 그것도 감각 없이 말이다. 그의 존재 여부에 관하여 인간은 ‘직관적 인지’에 의하여 지각할 수 있다. 그리고 각각의 이것임으로 단일성을 유지하는 각각의 개별자는 그 자체로 가지적이다. 벌써 여기에서 중세의 전통적 아리스토텔레스를 벗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 소’ 혹은 ‘저 소’가 각각의 ‘이것임’으로 각각의 단일성을 유지한다고 하여도, 그것의 우유적 조건이 일치한다면, 현재의 상태에서 우리의 감각과 지성은 이 둘을 서로 구별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스코투스는 현세에서의 우리의 직관적 인지가 완전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리스토텔레스적 논의로 양보한다. 즉, 개별자는 감각의 몫이고, 보편자는 지성의 몫이란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현세에선 완전한 인식의 상태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면서 그는 1277년 이후 단죄의 덧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을 유지하려 한 듯이 보인다. 그것은 그의 존재론과 그의 인식에 관한 논의에서 확인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는 귀납적 사고를 서서히 열어감으로 옥캄을 비롯한 이후 경험론적 사고의 문을 연 듯이 보인다.17)

 홀코트(Robert Holcot)에 증언하듯이 스코투스에 의한 직관적 인지와 추상적 인지의 구분은 후기 중세 철학에 주된 논의이다. 이 문제는 이제 스코투스주의를 넘어 토마스주의 그리고 옥캄주의에 이르기까지 모른 후기 중세 철학자들의 과제가 되었다.18) 


3.3 하클레이의 헨리

 스코투스의 시기에서 옥캄의 시기로 넘어가는 시기, 우리는 또 한 명의 고유한 철학자를 찾을 수 있다. 하클레이의 헨리가 그다. 그는 영혼 밖의 것은 개별자라고 한다. 그리고 ‘인간’이라고 하는 보편 개념은 아무것도 아니거나 개별자에 대한 단순한 정의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또한 여기에서 보편 개념은 개별자에 대하여 막연하게 가지는 인식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보편 개념 가운데 각각의 개별적 인간은 판별되어지지 않는다. 역으로 ‘인간’은 각각의 개별적 인간에 대한 판별되어지는 인식이 아니라, 막역하게 인식된 것이다.19) 질송은 이와 같은 하클레이의 헨리의 논의가 아리스토텔레스적 논의에서 벗어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비록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을 거론하지만, 이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벗어난 것이다. 오히려 이는 1277년 이후 14세기로 들어서는 시대적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이라 보여지며, 옥캄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보여진다.


3.4 옥캄과 니콜라우스 그리고 뷔리당

 옥캄에게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저 개별자일 뿐이다. 그에게 그의 선배들이 그토록 열심을 낸 개별화의 원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개별자뿐이며, 보편자는 실재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후기 옥캄의 논의에 따라 개념론적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보편자 혹은 공통본성은 개념일 뿐이며 영혼 외부에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간단하게 그의 존재론을 정리해보자.

 옥캄은 개별자로부터 실재적으로 분리되는 어떤 것도 보편자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논의를 위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실재론을 논박한다. 우선 그는 수 가운데 하나로 있는 어떤 것도 다수의 개별자 ‘가운데’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가운데’는 여기에서 ‘부분으로 연합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것이 보편자와 개별자의 관계에 사용된다면, 이는 적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보편자는 개별자에 관하여 서술되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부분은 사물에 관하여 본질적으로 서술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20) 이러한 이유들로 옥캄은 보편자의 실재를 거부하고, 개별자로 이루어진 세계를 생각한다. 그렇기에 오히려 문제는 개별자에서 보편자라는 것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옥캄은 스코투스의 개별자에 대한 ‘직관적 인지’을 수용한다. 그러나 옥캄은 여기에 신의 절대적 권능을 적용한다. 그에 의하면 직관적 인지는 자연적으로는 실재하는 것에 대한 것이지만, 초자연적으로는 실재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가능하다. 신은 그의 절대적 권능으로 원인 없이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그렇기에 신은 실재하는 대상의 존재 없이도 직관적 인지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옥캄의 논의는 이미 당시 아레조의 베르나르두스(Bernard of Arezzo)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아레조의 베르나르두스의 논의는 옥캄주의자라고 여겨진 오뜨꾸르뜨의 니콜라우스에 의하여 비판받는다. 그런데 옥캄과 베르나르두스의 논의를 반대한 니콜라우스는 옥캄주의라는 이름으로 1340년에 단죄를 당한다. 니콜라우스에게서 우린 옥캄의 직접적 영향을 문헌학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데 말이다. 또한 이러한 단죄도 옥캄에게 영향을 받은 뷔리당에게 당한다.21) 이렇게 옥캄이란 사람, 즉 역사적 옥캄과 뷔리당의 옥캄 그리고 니콜라우스의 옥캄 그리고 베르나르두스의 옥캄은 상이한 것이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어찌 보면 1340년의 단죄가 역사적 옥캄을 향하는지 아니면 다른 누구의 옥캄을 향하더라도 상관없이 옥캄에 대한 경직된 분위기를 확인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옥캄은 분명 1340년 일반적 의미에서 옥캄주의자라 불린 니콜라우스를 향한 단죄와 같이 그러한 인물이 아니었다. 옥캄과 베르나르두스는 존재하지 않은 것에 관한 인지가 초자연적으로 일어나지만, 자연적으로 그러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니콜라우스는 초자연적이든지 자연적이든지 지각의 사실로부터 대상의 실존을 추론할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이 두 경우 사이의 차이를 인간은 분명히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22)

 다음의 논의를 통하여 니콜라우스의 논의를 정리해보자. 심적 행위 혹은 외부 대상에 대한 감각적 우유는 영혼의 행위 혹은 실체의 우유로 알려진다면, 행위 혹은 우유로부터 영혼과 질료적 실체에로 추론이 가능하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니콜라우스는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의 사물 혹은 어떤 사물의 실존은 동일한 사물의 또 다른 사물 혹은 또 다른 부분의 지식에서 귀결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사물에 관하여 직관적 인지가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이 그 사물의 실존으로 귀결된다고 보지는 않는다.23) 그러한 논리에서 그는 영혼의 실존 역시 그러하다고 본 것이다. 이런 흐름에서 호흐스테터(Hochtetter)와 비뇨(Vignoux)가 이야기하듯이 니콜라우스가 인간은 직접적으로 우리 영혼의 실존을 인지한다고 하는 것은 쉽사리 수용하기 어려운 것 같다.24) 이러한 니콜라우스는 단죄를 당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의는 1340년 단죄를 당한다. 하나의 사물에게 다른 사물의 실존을 이끄는 것에 대한 명제도 그 단죄의 목록에 올라간다. 그러나 옥캄은 이와 다르다. 이미 논의하였듯이, 존재하지 않은 것에 관한 직관적 인지는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초자연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1340년의 단죄는 옥캄의 옥캄주의가 아니라, 그저 니콜라우스의 옥캄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뷔리당은 옥캄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니콜라우스의 옥캄과는 다르다. 그는 직접적 감각지각으로부터 모든 개념이 일어난다는 니콜라우스의 추론을 비판한다. 그리고 그는 역사상 1340년 파리 대학의 교수로 니콜라우스를 단죄한 주역 중에 하나이다. 뷔리당 역시 옥캄의 시대, 즉 1270년대 이후의 인물이다. 그리고 옥캄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그렇기에 동일한 문제를 공유하였다. 그는 1270년의 영향 속에서 니콜라우스의 회의주의를 피할 길을 찾아야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논의한다. A와 B가 구별되는 사물이라면, 실존하는 A와 실존하지 않은 B에 의한 것을 모순이 아니다. 그러므로 “A가 실존한다. 그러므로 B가 실존한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명확한 추론이 아니게 된다. 그런데 결론은 전자의 부분이거나 전자와 실재적으로 동일하지 않으면, 결론의 반대와 전제가 동일한 시간에 참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동일한 사물에 의하여 하나의 사물이 긍정되고 부정되어지지 않을 것이다. 분명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미에선 모순이란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것에 대하여 긍정과 부정을 함에서 일어난다.25) 이러한 논리에서 뷔리당은 니콜라우스에 반대하여 하나의 사물의 실존이 다른 사물의 실존을 통하여 검증되어지는 것에 관한 것을 해결하려 했다.

 옥캄은 존재하지 않은 것에 관한 직관적 인지는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신의 절대적 권능에 의하여 초자연적으로 가능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자연학의 필연성은 가정적 필연성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베르나르두스에게도 이어졌다. 또한 뷔리당에게도 이어진다. 옥캄, 베르나르두스 그리고 뷔리당은 가정적 필연성을 수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으로 자연학을 설명한다. 뷔리당에게 신에 의하여 초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기적은 자연학의 대상이 아니다.26)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낳았다. 그리고 모세는 갈라진 바다를 가로질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초자연적으로 가능한 것으로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니콜라우스는 여기에서 의문을 가질 것이다. 인간의 측면에서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말이다. 이리 본다면, 뷔리당은 니콜라우스보다 역사적 옥캄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이며, 그런 그이기에 당당하게 니콜라우스를 단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1340년의 단죄가 옥캄을 향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1340년의 논의가 어떤 식으로든 역사상의 옥캄은 아니지만, 일반적 의미의 옥캄적 흐름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옥캄은 개별자의 세상을 구상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개별자의 인식을 인정하였고, 그로 인하여 지성의 대상은 보편자이고, 감각의 대상은 개별자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벗어난다. 또한 그는 존재하지 않은 것이 초자연적으로 신의 절대적 권능에 의하여 직관적 인지가 가능해진다고 한다. 이것이 회의주의라는 이름으로 철학사에선 피해야할 것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이는 1270년과 1277년에 이루어진 단지의 자연스러운 결실이 아닐까?

 신은 단지 보편자만 아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의 의지는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학문을 회의론으로 이끌고 간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리고 그러한 회의론의 중심에는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직관적 인지라는 논의가 놓여있다. 그러나 역사적 옥캄에게 존재하지 않은 것에 관한 직관적 인지는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은 이미 토마스 아퀴나스나 알베르투스의 실체변화이론이나 성모의 무흠잉태에 관한 논의에서도 보여진다. 신은 자연적 인과법칙을 넘어 자신의 절대적 권능으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옥캄과 베르나르두스 그리고 뷔리당은 이러한 초자연적인 것이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니콜라우스는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사이의 차이가 인간에게 인식될 것인가를 의문할 것이다. 만일 불가하다면, 우리의 인식은 딜레마에 빠지게 될 것이다.

 개별자의 직관적 인지는 개별자를 지성의 대상으로 가정하게 했다. 즉 개별자는 스스로 가지적인 것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 가운데도 실재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13세기 유명론이나 개념론은 대세가 아니었다. 그 시대는 실재론의 시대이다. 그러나 14세기에 이르러 13세기와 같이 그렇게 강력한 위력을 가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분명하게 역사 속에 한 몫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유명론-개념론적 논의와 논쟁하며 철학적 이론을 풍부하게 하였다.


3.5 위클리프와 후기 실재론자들

 옥캄과 뷔리당에게 어떤 식으로든 논의의 대상이었던 반-유명론자이며 실재론자인 버얼리(Walter Burleigh)는 “모든 보편자는 영혼의 개념이 아니다”라고 한다. 그 외에도 아베로에스에 의존한 인물로 토마스에 반대하면서도 동시에 유명론적 흐름을 거부한 요한의 바콘토르프(Johann Baconthorp)와 파리에서 신학을 익혔으며 ꡔ명제론ꡕ을 주해한 스트로스베리의 토마스(Thomas de Argentina, Thomas von Strassbury)도 그 시대의 반 유명론자이다. 그 외에도 요하네스 카프레올루스(Johannes Capreolus)와 파루데의 페트루스(Petrus de Palude) 등이 이 시대의 반 유명론자이며, 실재론 옹호가들이다.27) 그 가운데 극단의 실재론을 주장한 위클리프와 같은 인물도 있다.

 위클리프는 모든 창조물은 신 가운데 영원하고 절대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지성상을 가진다고 한다. 즉, 이는 신 가운데 원형으로부터 물질적 세계 가운데 개별자로 존재자의 고리를 가진다는 논리이다. 개별자의 실존은 그저 신 가운데 영원하게 속하는 존재에게 부수적으로 혹은 우유적으로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모든 창조된 존재는 신 가운데 가지적 존재(esse intelligibile)에 의존한다. 그러면서 위클리프는 모든 존재의 영원성을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존재론적 사고에 의하면, 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과거든지 현재든지 미래든지 상관없이 무시간적이며 영원하다. 그렇기에 모든 존재는 신 가운데 원형을 가지며, 그 개별적 상황은 단지 우유적이고, 그러한 모든 존재는 영원하다는 것이다. 신은 무시간적으로 과거의 것과 미래와 동일하게 존재를 가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연성은 그에게 필연성이 되어진다. 그러나 필연성이 우연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연성은 존재자 가운데도 창조물 가운데도 신의 의지 가운데도 없다. 이것은 모두 필연적이게 된다. 이러한 논의는 옥캄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극단적 실재론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다.28) 이는 그의 저서인 ꡔ보편자에 관한 논구ꡕ(Tractatus de universalibus)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옥캄에게 이러한 위클리프의 논의는 신의 절대적 권능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신은 초자연적으로 그의 절대적 자유와 권능에 의하여 번개 없는 천둥을 만들 수 있으며, 인식대상 없이 인식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신 가운데 모든 것이 무시간적이며, 그리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신 가운데 영원한 법칙으로 ꡔ성경ꡕ을 예로 들 것이다.

 실재론과 유명론 그리고 개념론은 이와 같이 다양한 문제가 서로가 서로에게 엮여있다. 유명론자들과 개념론자들은 보편자는 단지 단어이거나 개념이라 한다. 특히 개념론자들은 보편자는 없는 것이 아니라, 영혼 가운데 주체적으로 존재하는 개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두 흐름은 모두 보편자가 영혼 외부에 실재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개별자의 세계를 믿었다. 개별자는 그 자체로 하나의 단일성을 가지며, 그 자체로 가지적이다. 그리고 개별자에 대한 직관적 인지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논의는 1270년대의 상황 이후에 흐름이라고 할 것이다.


4. 14세기 학문의 정당성 문제와 본성지칭(suppositio naturalis)의 문제

-유명론과 개념론 그리고 실재론의 경계선에서


위에서 논의하였듯이 1270년대의 시대적 상황은 유명론적 혹은 개념론적 상황으로 시대의 정신을 이끌고 간다. 이러한 시대적 정신은 개별자에 관한 인식과 신의 절대적 권능에 근거한 존재론적 사고를 낳았다. 하지만 이미 보았겠지만, 이와 같은 논의는 학문의 정당성을 흔들게 된다. 보편성은 인간 지성의 대상이다. 또한 보편성은 학문이 가져야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기본 명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미 보았지만, 유명론적 사유에선 학문의 보편성을 보장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예를 들어, “번개는 천둥을 야기하는 것이다”라는 명제에서 ‘번개’라는 보편자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은 개별자일 뿐이기에, 모든 개별자를 다 살피지 않는 한에서 이 명제는 참이 되기 힘들다. 그렇다면, 보편성에 근거하는 학문은 성립할 수 있는가? 이에 의하여 뷔리당과 잉겐의 마르실리우스(Marsilius of Inghen) 등은 ‘본성지칭’을 통하여 보편성을 긍정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은 분명 실재론자들이 아니다.29) 그렇지만 이들은 학문의 보편성을 지키려하였고, 동시에 보편자의 실재성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1270년의 시대적 흐름은 본성지칭을 14세기의 주된 문제가 되게 하였다.30) 즉, 지칭이 하나의 철학적 문제로 전면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중세 논리학과 존재론은 13세기 새로운 아리스토텔레스의 번역이 통용되면서, 논리학의 내용은 더욱 더 다양해진다. 즉 혁신논리학(logica modernorum)이 시작한 것이다.31) 새롭게 다루어진 것은 다음의 것들이 있다.32)


1. de suppositione (항(terminus)의 외연(denotatie)과 내포(konnotatie)를 다룸)

 1.1 de copulatione (술어의 특별한 관계를 다룸)

 1.2 de ampliatione (항의 외연과 확장을 다룸)

 1.3 de restrictione (항의 외연과 제한을 다룸)

 1.4 de appellatione (존재하는 사물의 외연을 다룸. 이후엔 특별한 내포를 다룸)

 <1.5 de relactione (관계 대명사와 관련되어 다루어짐. 레이크(Rijk)는 포함하지 않으나 뵈너(Borhner)는 suppositio 논의의 하나로 포함시킴.)33)>

2. de syncategorematibus

3. de veritate et falsitate propositionis

4. de insolubilibus

5. de obligatione


여기에서 지칭(suppositio)은 명제와 상관없이 단어의 뜻을 문제로 삼는 의미(significatio)와 달리 명제 가운데 사용될 때 그것의 의미를 문제삼는다. ‘번개’의 ‘의미'는 번개란 단어가 가지는 뜻이다. 그런데 “번개는 두 자(字)이다”라고 하는 명제에서 번개는 우리가 하나의 독립된 단어로 생각하는 번개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이때 번개는 문자라는 질료적 측면의 것을 지칭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의미의 문제와 지칭의 문제는 구분된다고 할 것이다.

 옥캄은 ‘인간은 종이다’에서의 인간은 개별적 인간을 지칭하지 않고, 심적 명사를 지칭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를 단순지칭(suppositio simplex)이라고 한다. 또한 위에서와 같이 “인간은 두 자이다”와 같은 것은 질료지칭(suppositio materialis)이라고 한다. 이러한 두 지칭은 옥캄 지칭이론의 핵심이 아니며, 그의 핵심은 인칭지칭(suppositio personalis)이다. 인칭지칭은 영혼 외부의 개별적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칭지칭은 오직 하나의 대상을 지칭하는 확정지칭(suppositio discreta)와 그렇지 않은 공통지칭(suppositio communis)...등이 있다.34) 이러한 지칭의 구분은 옥캄을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는 사뭇 다르다. 예를 들어, 뷔르당과 같은 이는 ‘본성지칭’을 상정한다. “번개는 천둥을 야기하는 것이다”의 명제에서 번개는 본성지칭과 관련된다. 위의 명제에서 번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모두에 무차별적으로 사용된다는 내용이 이 가운데 담겨있다. 즉 지칭되어지는 주어가 시제에 연연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35) 이러한 본성지칭은 이미 13세기부터 다루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스페인의 페트루스도 이를 다룬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실재론적 입장을 지지한 인물이다. 즉, 그는 존재론적 입장에서 뷔리당과 구별되어진다. 페트루스는 “본성지칭은 서술되어지는 것으로 정해진 모든 것에 의한 일반항(common term)의 수용”이라고 한다. 즉, 그 자체로 고려되어지는 ‘인간’은 그의 본성에 의하여 있었고, 있고, 있을 모든 인간을 지칭하는 것이다.36) 그런데 뷔리당은 이러한 본성지칭의 정의를 수용한다.37) 뷔리당은 그러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존재하는 보편자로 번개라는 것을 인정하였는가? 분명 뷔리당은 개별자의 세계를 꿈꾼 인물이다. 하지만 그도 검증 과학을 위하여 본성지칭을 인정해야했다. “번개는 천둥을 야기하는 것이다”라는 명제가 참이 되기 위해서는 무차별적으로 모든 시간에 모든 장소에 존재한 번개를 지칭해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제의 번개는 천둥을 야기했지만, 내일의 것을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은 절대적 권능으로 어제의 것을 내일은 다르게 할 수 있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는 신의 절대적 권능을 제한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이는 뷔리당도 옥캄도 니콜라우스도 인정하는 바이다. 하지만 이미 보았듯이 뷔리당과 옥캄은 니콜라우스와 그 관점이 달랐다. 뷔리당과 옥캄 그리고 베르나르두스는 “번개는 천둥을 야기하는 것이다”는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번개 없이 천둥이 야기된다”라는 것은 자연적으로는 일어나지 않으며, 초자연적으로 일어난다고 한다. 즉 자연학의 법칙은 자연적으로는 필연적이지만, 초자연적으로는 다르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뷔리당은 초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것, 즉 기적은 자연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성교는 임신을 야기하는 것이다”라는 명제는 자연학에서 참이다. 그러나 “처녀가 임신한다”라는 명제는 자연학에서 거짓이다. 또한 “바다 위를 걷는다”라는 명제 역시 자연학에선 거짓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신의 절대적 권능으로 행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자연학의 대상이 아니다.

 “성교는 임신을 야기하는 것이다”에서 성교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성교를 무차별적으로 지칭한다. 물론, 여기에서 성모의 처녀 잉태와 같은 기적은 제외된다. 그렇게 위의 명제는 자연적인 필연성을 가진다. 비록 신의 절대적 권능에 의하여 다르게 될 수 있다고 하지만 말이다. 뷔리당은 이러한 지칭을 위해 전통적인 본성지칭을 가져온다. 이를 통하여 자연학의 타당성을 지키려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분명 보편자의 실재를 인정한 것은 아니다.

 옥캄은 처녀가 아기를 낳는 것은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신의 절대적 권능으로 가능하다고 한다. 자연 가운데는 오직 성교를 통한 임신만이 필연적인 것이다. 옥캄은 이렇게 신의 절대적 권능에 의한 것이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니콜라우스는 옥캄과 달랐다. 니콜라우스는 옥캄의 구분이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니콜라우스의 논의는 자연학의 보편성을 위협하게 된다. 뷔리당은 이러한 논의에서 참여하여, 자연학의 타당성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본성지칭을 수용한 것이다.

 지칭이란 시제와 깊은 관련을 가진다. “이 사람은 여기 있다”에서 ‘이 사람’은 지금 여기 있는 현재시제와 관련된 영혼 외부의 이 사람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는 과거나 미래의 것에 관하여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즉 술어는 동사의 시제에 의하여 한정되는 시간 동안 주어와 관련된다는 것이다.38) 하지만 페트루스와 뷔리당 등과 같은 일부 중세 논리학자들은 본성지칭을 말하면서, 이러한 일반적 지칭이론과 구별되는 논의를 전개했다. “번개는 천둥을 야기하는 것이다”의 술어는 현재형 동사의 시제에 의하여 한정되는 시간 동안 주어를 지칭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주어인 ‘번개’는 모든 시간의 번개를 지칭한다. 현재시제의 동사가 주어지는데도 말이다. 그렇지만, 자연학의 타당성을 위하여 자연학의 명제들은 동사의 시제 한정될 수 없다고 뷔리당은 여겼다. 

 옥캄은 본성지칭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는 지칭이론에서 동사의 시제에 의하여 한정되는 동안 주어는 대상과 관련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인칭지칭’이 그렇다. “이 사람은 백인이다”에서 ‘이 사람’은 지금 지칭 대상과 관련된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번개는 천둥을 야기하는 것이다”에서 주어는 ‘이’ 혹은 ‘저’와 같은 지시 대명사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 지시 대명사는 주어의 개별성을 지칭하게 된다.39) 즉, “‘이’ 번개는 천둥을 야기하는 것이다”라고 함으로 개별자를 지칭하거나 ‘모든 번개’라고 해서 모든 개별자를 지칭할 것이다. 옥캄의 지칭이론은 동사의 시제와 공의어(syncategoremata) 등에 의하여 제한되는 한에서 사용한다. 그렇기에 그에게 본성지칭의 자리는 없다. 그러면 그는 보편성과 관련되는 자연학을 어떻게 다루었겠는가? 그도 자연계의 법칙은 신이 그렇게 의지한 ‘질서 잡힌 권능’(potentia ordinata)에 의하여 필연성을 가진다고 보았다. 즉 가정적 필연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번개는 천둥을 야기하는 것이다”라는 것은 현재 사실이고, “과거의 모든 번개는 천둥을 야기하는 것이었다”라는 것도 경험적으로 과거의 사실이며, 미래의 것은 신의 질서 잡힌 권능에 의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여간 옥캄은 본성지칭을 가정하지 않는다.

 옥캄과 달리 뷔리당은 자연학의 명제를 위하여 본성지칭을 주장한다. 이를 통하여 뷔리당은 가정적 필연성의 논의를 지칭이론으로 까지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뷔리당은 학문의 보편성과 관련하여 자연학의 명제는 동사의 시제에 한정되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우선, ‘이해한다’, ‘안다’, ‘파악한다’, ‘의견을 가지다’, ‘의미하다’와 같은 동사는 현재에서 같이 과거, 미래 동안 지칭하고 관련되는 그들을 항과 결합시킨다.”40)


 여기에서 뷔리당은 우리가 ‘이해한다’와 ‘안다’라고 하는 동사는 시간의 제한을 넘어서서 지칭하는 것과 관련된다고 한다. “존재했던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라고 <지금> 이해되어진다. 그러므로 사람이 <지금> 이해되어진다. 유사하게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존재할 사람이 반-그리스도라는 것이 <지금> 이해되어진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해되어진다.”41) 이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과거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한다. 그리고 미래의 반-그리스도가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한다. 즉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을 인간이라고 이해한다. 이렇게 이해한다라는 동사를 통하여 우리는 시간의 제한을 넘어서는 지칭의 가능성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뷔리당은 ‘영원하게’, ‘지속적으로’와 같은 말을 통하여 본성지칭을 옹호한다. 그러한 단어는 일상언어에서 시제의 제한에서 벗어난 것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항상 동물이다”에서와 같이 말이다.42) 이와 같이 뷔리당에 의하면 인간 지성은 인간과 동물과 같은 항은 시간의 차이 없이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심적 명제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시제에 무차별하게 있다고 한다.43)

 뷔리당은 본성지칭을 통하여 자연학을 옹호한다. 1270년 이후 이루어진 학문의 보편성에 관한 위기에 대하여 자연학을 옹호한 것이다. 이 길은 옥캄과 그 방법론이 달랐다. 이 둘은 학문의 가정적 필연성을 인정하였다. 그렇기에 자연학 내부의 필연성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니콜라우스와 같은 인물은 이러한 옥캄과 뷔리당의 면도날을 무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신의 절대적 권능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옥캄은 지칭이론에서 본성지칭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시제의 제한에 준하여 본성지칭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뷔리당은 시제의 한정을 넘어서 언어의 분석과 일상언어의 경우를 통하여 본성지칭을 수용하였다. 이러한 길에서 기본적 입장은 같지만, 그 지칭이론은 서로 다른 길을 간 것이다.


5. 결론


1270년 이후 14세기 철학의 과제는 1270년대에 이루어진 단죄의 그늘을 피하면서 매우 논리적인 이론적 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은 스코투스와 옥캄, 뷔리당과 베르나르두스 그리고 니콜라우스 등과 같은 이들의 철학적 사변을 낳았다. 그러한 철학적 사변은 개별자에 관한 직관적 인지의 가능성과 신의 절대적 권능의 옹호로 이어졌다. 이는 개념론적 사유 혹은 유명론적 사유로 귀결되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위클리프와 같은 인물은 유명론에 관한 강한 거부감과 동시에 신의 영원성과 초월성을 강조하며, 이러한 신학적 논의에 근거하여 더욱 더 급진적인 실재론적 사유를 낳기도 하였다. 위클리프는 성서의 변화하지 않은 도덕성과 같은 것을 들어 변화하지 않는 필연적 세계를 주장한다. 이는 신의 절대적 권능을 강조한 옥캄이나 뷔리당 그리고 니콜라우스와 같은 개념론자나 유명론자와 다른 길이다. 

 신의 절대적 권능과 개별자에 관한 직관적 인지는 학문의 보편성과 필연성에 문제를 야기하였다. 여기에서 많은 역사가들은 옥캄주의를 곧 회의주의로 귀결시켰다. 그러나 그 당시 회의주의로 직접적으로 논박된 인물은 니콜라우스였다. 그는 가정적 필연성과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옥캄과 뷔리당은 이와 달리 자연학의 법칙을 위한 가정적 필연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면서 자연계 내부의 법칙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뷔리당은 특히 자연학의 명제를 위하여 13세기 실재론자들이 언급하던 본성지칭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옥캄은 동사의 시제에 제한되어지는 지칭이론의 기본에 준하여 본성지칭을 거부하며 자신의 지칭이론에 본성지칭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다.

 이상으로 14세기 철학의 일면을 정리하여보았다. 물론 이것으로 다 담지 못한 것이 이곳에 담긴 것보다 많은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많은 것을 남겨진 숙제로 여기고 여기에서 글을 줄인다.


1) cf. 방 스텐베르겐, ꡔ토마스 아퀴나스와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ꡕ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2000); 이재경, ꡔ토마스 아퀴나스와 13세기 심리철학ꡕ (하양: 대구가톨릭대출판부, 2002); 유대칠, 「의지의 형이상학」 (하양: 대구가톨릭대석사학위청구논문, 2003).


 

2) M. De Wulf, Geschichte der mittelalterlichen Philosophie (Tuebingen: Verlag von J.C.B.Mohr, 1913), SS.393-396.


 

3) J.와이스헤이플, ꡔ토마스 아퀴나스 수사-생애, 작품, 사상ꡕ (서울: 성바오로, 1998), 423쪽.


 

4) Aristoteles, De anima II, c.5, 417b 20이하. 이에 관해서는 다음의 우리말 역본을 사용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ꡔ영혼에 관하여ꡕ 유원기 옮김 (서울: 궁리. 2001); cf. 에티엔트 질송, ꡔ존재와 사유ꡕ, 박영도 옮김 (대구: 이문출판사, 1985), 71쪽.


 

5) cf. E.Grant, "The Condemnation of 1277, God's Absolute Power and Physical Thought in the Late Middle Ages" Viator 10 (1979), pp.211-244.


 

6) 유대칠, 「옥캄의 진격로」(근간)


 

7) 1340년의 단죄와 옥캄의 관계는 쉬운 것이 아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과제로 남겨둔다. 과연 1340년 단죄와 금서 조치된 옥캄은 어떤 옥캄이며 옥캄 그 자체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관한 논의는 차후에 다루기로 한다. cf. E.Moody, "Ockham, Buridan, and Nicholas of Autrecourt" In Studies in Medieval Philosophy, Science, and Logic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nia Press, 1975), pp.127-160.


 

8) G.Leff, Heresy in the Later Middle Ages Vols.2 (New York: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67), p.296.


 

9) 에티엔트 질송, ꡔ존재와 사유ꡕ, 70쪽.


 

10) P.스페이드, 「중세철학」 ꡔ서양철학사ꡕ 채이병 외 옮김(서울:EJB, 2004), 155쪽.


 

11) 알란 백, 「이슬람적인 배경: 아비첸나와 아베로에스」 ꡔ스콜라철학에서의 개체화ꡕ 이재룡, 이재경 옮김 (서울: 가톨릭출판사, 2003), 130쪽.


 

12) 박우석, 「공통본성의 귀환: 아리스토텔레스를 원용한 스코투스의 현묘한 논변들」 ꡔ중세철학의 유혹ꡕ (서울: 철학과 현실사, 1997), 152-183쪽.


 

13) Scotus, Lectura 2, d.3, pars 2, q.2, n.285 (Vatican).


 

14) R.Pasnau, "Cognition"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Duns Scotus, ed. Th. William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p.297.


 

15) Scotus, Ordinatio l.1, d.36, q. un., n.9 (Vatican).


 

16) A.Matteo, "Scotus and Ockham: A Dialogue on Universals" Franciscan Studies 45 (1985), pp.83-96; 박우석, 「스코투스의 개체화 이론」 ꡔ중세철학의 유혹ꡕ, 121-148쪽.


 

17) cf. A,Vos, "Knowledge, Certainy and Contingency" In John Duns Scotus-Renewal of Philosophy, ed. E.P.Bos (Armsterdam-Atlanta:Rodopi, 1998), pp.76-88. 여기에서 보스(A.Vos)는 스코투스의 문헌을 통하여 확실한 인식의 두 양태를 들면서, 연역적 인식과 경험적 인식을 들고 있다. 그리고 경험적 인식의 분석 가운데 1.현상적 혹은 유형적 단계 2.관찰 단계 3.인과적 단계를 들고 있다고 소개한다. 이를 통하여 스코투스의 개별자에 관한 인식이 또 다른 면에서 그의 철학의 한 축이 됨을 확인할 수 있겠다.  


 

18) A.Maurer, "Defense of Epistemological Realism" In Being and Knowing (Toronto: PIMS, 1990), p.312.


 

19) 에티엔트 질송, ꡔ존재와 사유ꡕ, 71쪽.


 

20) Ockham, Reportatio l.1, d.2, q.4 (OTh. II, pp.108-122).


 

21) E.Moody, "Ockham, Buridan, and Nicholas of Autrecourt", p.129.


 

22) A.Maurer, "Defense of Epistemological Realism", p.333.


 

23) J.Weinberg, Nicholaus of Autrecourt - a study in 14th century thought (New York: Greenwood Press, 1969), p.108.


 

24) E.Hochstetter, Studien zur Metaphysik und Erkenntnislehre Wilhelms von Ockham (Berlin-Leipniz: Walter de Gruyter, 1927), S.141, n.1.


 

25) E.Moody, "Ockham, Buridan, and Nicholas of Autrecourt", p.151.


 

26) J.Zupko, John Buridan - Portrait of a Fourteenth-Century Arts Master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2003), p.200.


 

27) A.Stoeckl, Geschichte der Philosophie des Mittelaters 2Bd. (Mainz: Verlag von Franz Kirchheim, 1865), SS.1042-1055.


 

28) G.Leff, Heresy in the Later Middle Ages Vols.2, pp.500-511..


 

29) A.Stoeckl, Geschichte der Philosophie des Mittelaters 2Bd., SS.1042-1055. 슈틱클과 같은 오랜 이론들은 마르실리우스를 실재론으로 보기도 하지만, 현재의 연구는 이것이 거짓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30) cf. L.M.de Rijk, Middeleeuwse wijsbegeerte (Assen: Van Gorcum, 1981), p.246.


 

31) 중세 논리학과 문법학의 역사적 흐름에 관해서는 다음의 것을 참고하기 바란다. 박승찬, 「중세 언어철학의 발전」 ꡔ중세철학ꡕ6호 (2000), 125-152쪽.


 

32) L.M.de Rijk, Middeleeuwse wijsbegeerte, p.120.


 

33) Ph.Boehner, Medieval Logic an outline of its development from 1250 to c.1400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52), p.11.


 

34) 박우석, 「중세철학 또는 함께 하는 철학의 방법」 ꡔ중세 철학의 유혹ꡕ (서울: 철학과 현실사. 1997), 55쪽.


 

35) J. Zupko, John Buridan - Portraint of a Fourteenth-Century Arts Master, p.66.


 

36) Ph.Boehner, Medieval Logic an outline of its development from 1250 to c.1400 , p.33.


 

37) Buridan, Jean Buridan's Logic, trans. P.King (Dordrecht-Boston-Lancaster-Tokyo: D.Reidel Publishing Company, 1985), p.125.


 

38) E.Moody, "The Medieval Contribution to Logic" In Studies in Medieval Philosophy, Science, and Logic, p.384.


 

39) Ockham, Summa logicae pars 1, c.4 (OP.1, p.15). 옥캄에게 공의어(syncategoremata)는 매우 주된 개념이다. 공의어인 ‘이’, ‘저’, ‘모든’, ‘~없이’와 같은 것은 그 자체로 무엇인가 의미 대상을 가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단의어’(categoremata)에 더해서 ‘이 인간’, ‘저 인간’과 같이 의미 대상을 한정하는 역할을 행한다.


 

40) Buridan, Jean Buridan's Logic, p.126.


 

41) Ibid.


 

42) Ibid.


 

43) Ibid., p.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