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의 『지성단일론』에 대하여 유대칠 (대구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1.0 문제제기 인간의 지성(intellectus)이 모든 인간에게 단지 하나일 뿐인가라는 논의는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이다. 이를 우리는 지성단일론이라 한다. 하지만 이는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알맞은 것일 수 없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이란 사후에 그리고 최후의 날에 자기에게 합당한 상벌이 주어지는데 만일 모든 인간에게 하나의 지성만이 존재한다면, 이는 개안의 사고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지성단일론은 처음부터 그리스도교사회에 마다되는 것이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이는 13세기 파리대학 인문학부 교수들 그 중에서 대표적으로 시저 브라방과 같은 이에게서 보여지며 그리고 14세기 요한 존던과 같은 이들에게서도 보여진다. 이들의 이러한 의견은 모두가 이슬람의 철학자 아베로에스에게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을 일반적으로 아베로에스주의자라고도 하지만 이들이 가지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존경과 그로 인한 이들의 사상이기에 이를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라고 부르기로 한다.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인 시저 브라방과 동시대의 인물인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의 스승 알베르뚜스 마뉴스는 이러한 지성단일론을 비판하기 위해 많은 글을 남겼다. 그중 토마스는 그의 초기 저작인 『존재자와 본질에 대하여』에서도 보여지며, 『신학대전』과 『철학대전』등에서 줄곧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 다시 그의 여행을 중단하며 파리로 돌아와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반론서인 『지성단일론』을 내어놓는다. 여기에서 그는 단지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문헌의 해석학적인 입장에서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잘못을 지적한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자기의 해석과 해결책을 내어놓는다. 이 글은 이를 소개하고자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2.0 지성단일론에 대한 토마스의 비판 토마스는 『지성단일론』의 서론에서 지성단일론이 어찌하여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맞는 것이 아닌지를 아주 간략히 소개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러한 이론이 단지 교리상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의 원리에도 반대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또한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에 있어서도 잘못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이론을 개진한다. 그는 영혼이 육체의 제일 현실태(actus primus) 혹은 실체적 형상(forma substantialis)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 2권의 정의를 가져온다. 그리고 이어서 영혼은 육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그것은 그것이 육체의 현실태이며 형상이기 때문이고, 영혼이 없이 육체는 살아있는 그 무엇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분명 영혼과 육체는 플라톤의 이야기하듯이 선장과 배와 같은 그러한 관계는 아닐 것이라고 한다. 토마스는 영혼은 생명의 원리라는 정식을 받아드린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성의 문제에 다가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 그의 『영혼론』에서 지성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고, 다른 것과 구분되는 것이라 했으며, 또한 영원한 것이라고 했다. 이를 두고 토마스는 주석가, 즉 아베로에스가 이를 왜곡하여 이를 영혼에서 분리된 다른 실체라고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토마스는 이를 영혼으로 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영혼의 다른 능력으로부터의 분리라고 한다. 그는 여기에서 지성단일론에서 지성을 영혼과 육체에서 분리된 실체라고 하는 것을 비판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성의 분리성과 단절성 그리고 영원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이 육체로부터 단절이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 그러면서 이는 존재론적으로 위치적으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 단지 사고적으로 혹은 이념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라고 한다. 토마스는 문헌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영혼을 정의하기를 식물적인, 지성적인, 감각적인 그리고 운동적인 부분들에 의하여 정의되어진다고 한 것에 중점을 둔다. 즉 해석상의 문제에 있어도 지성이 영혼의 부분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지성의 분리됨은 다른 능력과 분리됨이지 결코 이것이 영혼으로부터 분리됨은 아니라고 한다. 토마스는 지성작용의 주체로서 영혼을 이야기한다. 영혼은 우리를 이해작용 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며, 또한 우리를 이해작용 하게 하는 것은 육체의 형상이라 한다. 그리고 토마스는 지성을 영혼의 힘이라 한다. 식물적인 , 감각적인, 욕구적인, 운동적인, 지성적인 것을 영혼의 힘이라 하며, 지성을 영혼의 힘이라 한다. 하지만 토마스는 앞서서 지성을 육체의 형상이라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지성을 영혼의 힘이라 한 것이다. 즉 지성은 영혼의 형상이며 힘이라는 것이다. 이는 모순이라 여겨진다. 여기에서 토마스 해석의 난점이 드러나는 것이다. 토마스는 1장의 다른 뒷부분에서 지성은 영혼의 다른 부분과 분리된 것이라 한다. 이는 위치적으로 그리고 크기에 의하여 그리 분리되는 것 즉 존재론적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개념적으로 분리되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영혼이 육체와 분리된 것이 아니듯이 지성도 육체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도대체 이해작용은 어떻게 일어나는 지를 의문하며, 지성이 영혼과 단절되어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영혼의 일부분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지성은 영혼의 힘이며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지성이 그러면 어떤 점에서 다른 영혼의 능력과 분리되는가? 토마스는 다른 능력이 육체의 기관을 사용하는 것인데 반하여 지성은 기관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성을 비혼합적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것이라고 한다. 즉 기관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란 말이다. 여기에서 감각과 지성의 차이가 드러난다. 감각은 반드시 육체의 기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성은 욱체의 기관으로부터 분리된 것이지만 분리된 실체는 아니라고 한다. 이는 지성이 육체의 현실태이며 형상인 영혼의 일부분이며 능력(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토마스가 생각한 지성의 위치는 어디인가? 이 역시도 토마스의 해석을 난해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영혼은 육체의 형상이지만 지성은 육체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인간은 이해한다라는 모토를 가지고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바른 해석을 위해 자기의 해석을 주장한다. 즉 지성이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지성이 분리되어있고 영원하다 하여도 이는 육체로부터 그러한 것이 아니라 영혼의 다른 능력으로부터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지성은 토마스에게 영혼의 일부분이며 힘이기에 영혼이 육체의 형상이므로 지성이 육체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토마스는 분명 아베로에스와 같이 지성을 비물질적인 것으로서 육체의 기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를 영혼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을 해석하여 이를 생명을 가지게 하고 이해작용 하게 하는 제일의 원리이며 육체의 형상이 혹은 종이라 한다. 그리고 지성은 이러한 영혼의 일부분이며 힘인 것이다. 그가 비난한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의 잘못을 크게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하나는 지성이 인간영혼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성의 단일성에관한 것이다. 이러한 잘못을 비난하며 그는 온갖 수단으로 이를 비판한다. 토마스는 어디까지나 "이 인간이 이해작용 한다"는 명제를 가지고 작업한다. 그는 이해작용의 주체인 지성이 존재론적으로 분리되어있으며 이것이 단지 작용의 측면에서 결합한다는 지성단일론의 생각을 받아드릴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이해하고 느끼고 감각하는 모든 작용의 주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고의 주체가 한 인간임을 계속적으로 주장하며 지성이 분리된 실체임을 마다한다. 즉 소크라테스를 움직이거나 생각하거나 느끼거나 하는 모든 작용은 바로 소크라테스가 한 것이다. 그가 행위의 주체이다. 그러기에 그는 지성에 의한 지성적인 행위의 주체이지, 분리된 실체가 주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지성이 분리되었고 그럼으로써 그가 질료로부터 자유로움으로서 개별화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단일한 것으로 있다는 지성단일론의 이론을 마다한다. 만일 그러하다면 행위에 대한 주체는 무엇이며, 도덕철학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즉 행위의 책임성 문제가 야기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작용의 측면에서만 서로 만난다는 지성단일론의 이론을 거부하고 토마스는 존재론적 결합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과 대안에도 문제가 있다. 토마스는 줄곧 지성을 비물질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성은 영혼의 일부분이며 힘이라고 한다. 그리고 영혼은 육체의 형상이라 한다. 반면 지성은 어떤 육체의 기관도 사용하지 않으며 육체와 무관한 것이라 한다. 이러한 토마스의 해석을 정리하자면 우리는 곧 모순에 빠진다. 그 이유는 지성이 영혼의 일부분이며 힘으로서 존재하며, 영혼이 육체의 형상으로서 존재하기에 지성이 한 육체와 영혼 안에 있다고 한다면 지성이 어떤 육체적 기관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해석과 모순이 된다. 토마스는 "지성은 육체 안에 있지 않고 영혼에 안에 있는 힘이기에 분리되지 않는다. 더구나 영혼은 육체의 형상이다."라고 한다. 과연 이러한 해석이 논리적으로 가능한가? 이를 정리해보자. 지성은 영혼의 일부분이다. 영혼은 육체의 형상이다. 지성은 육체 안에 있지 않다. 그러면 지성이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이러한 난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토마스의 해석이다. 하지만 토마스의 해석은 도덕철학적으로 의미가 있다. 분명 어떤 한 인간의 지성과 의지에 의한 행위는 그 인간의 책임이다. 그런데 지성이 그 인간과 분리되어 모든 인간에게 하나이라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그리고 인간의 영혼에서 지성이 외부에 분리된 것이라면 인간이 가진 영혼이 동물과 다른 것은 무엇인가? 인간에게 지성이 없다면 말이다. 그러기에 토마스는 지성의 분리성을 비판하고 지성의 단일성을 철학적인 오류라 생각하고 비판하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둘 다 완전한 해결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라 여겨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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