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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의자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와 무한에 관한 13세기 영국 학자들의 연구

아리스토텔레스의 수(數)와 무한(無限)에 관한 13세기 영국 주해가들의 연구

유대칠
(토마스 철학 학교)


1.0 수(數)란 어떠한 것인가? 지금의 우리에게 매우 자명해 보이는 수라는 관념은 오랜 시간 사유를 추상화한 결과로 얻어진 것이다. 즉, 이것은 오랜 인류의 노력에 의한 결과물이다. 이와 같은 수는 고대 철학자들에게도 매우 흥미 있는 논의 거리였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피타고라스와 그의 학파이다. 그 뿐 아니라. 플라톤의 논의에서도 수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드러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다룰 것은 수의 존재론적 위치에 관한 논의와 무한성에 관한 것이다. 이 제목만으로 몇몇의 고전적 자리가 생각날 것이다. 그 가운데 제일 우선된 것으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생각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수에 관한 논의를 검토하고, 이어서 무한성에 관한 논의를 다룰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가능적 무한성에 관한 논의에 다가가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그의 논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세의 철학자들에게로 가져와 그들은 어떻게 아리스토텔레스를 이해하고, 해석하였으며, 또한 수와 무한성에 관한 어떤 입장을 가졌는가를 논할 것이다.

2.0 유클리드는 1을 계속하여 더 한 것을 수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수의 정의는 지금의 자연수(自然數)에 관한 정의에 그치는 것이지만 나름의 의미를 지닌 수에 관한 논의이다. 이러한 논의에 한정에서 본다면, 수는 끝없이 더해질 경우 무한한 것이 될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시작해보자. 그는 '운동의 수'를 시간의 정의라고 한다. 이러한 시간에 관한 논의는 다른 논의를 낳는다. 첫째, 시간이라는 것은 인간의 영혼에 의존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시간은 수의 일종으로 정의되고 있으며, 따라서 만일 그러하다면, 수란 것은 영혼이 없다면, 없는 것인가? 이어서 둘째, 시간 가운데 동일성와 차이는 수 가운데 동일성과 차이와 유비적인 것으로서 이해되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수와 영혼의 관계와 수 가운데 동일성과 차이성의 문제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수의 존재론적 위치에 관한 물음을 물을 수 있게 된다. 수는 영혼이 없이 존재하는 것인가? 즉, 헤아리는 이가 없이 존재하는 것인가? 이 논의를 위하여 우리는 {형이상학}으로 접근해야한다.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수가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이 분할된 존재라고 보지는 않았다. 그는 수라는 것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다룬다.

 만일 같은 수가 몇몇 사물에 고유한 것이라면, 이것은 하나의 다른 것으로 같은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에 관하여 같은 형상을 가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태양과 달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왜 수들이 원인이 되는 것인가? 모음(母音)은 7개가 있다. 일곱 현으로 화음이 구성되고, 플레이아드도 일곱이며, 동물은 일곱에 이빨을 잃으며, 테베스에 대항하여 싸운 승리자도 일곱이다.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라는 것이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수는 분명 감각적 대상에서 분할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즉,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수는 감각적 대상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며, 실재적 존재나 분할된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헤아리는 현실적 행위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2라는 말은 다의적으로 2개의 돌과 2명의 사람에 적용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위에서 이야기한 동일성과 차이의 문제를 다룰 수 있다. 수는 항상 무엇에 관한 수이다. 그리고 2라는 수는 다의적으로 다른 집합에 사용된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중세 13세기 영국의 몇몇 주해가들은 이에 관하여 깊이 있는 논의를 전개한다. 위의 예에서 사람의 집합과 돌은 집합은 다르다. 그리고 이들이 같은 수를 가진다고 하여 이들이 가지는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들이 가지는 차이에 관하여 수를 고려하는 두 가지 방식에 의하여 설명되어질 수 있다. 그것이 구별된 양(discreta quantitas)과 척도(mensura)이다. 10이 구별된 양을 의미할 때, 그것은 다의적으로(equivocally) 인간과 돌의 집합을 진술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 두 집단은 분명히 다른 것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10이 두 집단의 척도를 의미할 때, 그러면 이것은 이들에 관하여 일의적으로(univocally) 진술하는 것이 된다. 이 경우 수의 동일성은 10명의 사람과 10마리의 말에 관한 우리의 헤아림의 결과의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혹은 10이란 대상의 다른 집합으로부터 추상하는 과정을 통하여 찾아진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무한에 관한 논의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3.0 그러면 여기에서 다음의 논의인 무한(無限)에 관하여 다루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무한에 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무한인 것의 밖에는 어떤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항상 그 밖에 어떤 것이 있다. 이것은 무한한 것으로서 서술되어지는 끝없는 반지의 경우에서 드러난다. 왜냐하면 항상 이것은 주어진 부분의 밖에 있는 부분을 위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현실적 무한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 밖에 다른 것이 있는 이상 그것은 무한이 아니다. 마치 10이라고 하면 11이 그 밖에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그는 현실적 무한을 부정하고, 가능적 무한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중세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며, 가능적 무한을 인정한다. 그런데 연속적 양(continuous magnitude)은 무한 가운데 분할된다. 그리고 수는 무한 가운데 감소하는 양의 분할된 부분의 집합과 연관된다. 따라서 수의 무한의 문제는 양의 무한한 분할의 것으로 환원된다. 그리고 이러한 환원은 그의 수의 존재론적 위치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일반적 것과 일치한다. 그리고 만은 주해가들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수는 항상 가능적 무한이다. 굳이 수식으로 표현한다면, n+1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몇몇 영국의 주해자들은 수 가운데 현실적 무한이 있다고 하고,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벗어남이 없이 되어질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주해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 함께 수의 현실적 무한을 화해되어질 가능성의 가장 좋은 예를 연속적 양의 무한한 분해성이라 한다. 분해의 과정을 양이 당할 때, 두 가지 부분의 종류는 그 가운데 구별되어진다. 즉 이미 구분되어진 현실적 부분과 아직은 분해되어지지 않은 가능적으로 분해되어질 가능적 부분이다. 그리고 분할의 어느 상태에서 현실적 부분은 유한한 집합을 형성하며, 이 집합은 가능한 부분의 현실화에 의하여 감소되어질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연속체(continuum)의 분할로부터 결과되는 부분의 집합은 가능적으로 무한하다. 그러나 이러한 열거를 형성하는 수적 열거가 현실적 수와 가능적 수 가운데 구별되어지지 못할 때, 이러한 결론은 더 이상 명확한 것이 아니다. 영국의 주해자들이 찾은 해법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들이 논의한 수의 존재론적 위치에 관한 논의의 적용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가능성 가운데 실존하는 사물들과 현실태 가운데 실존하는 사물은 ...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수들이다. 예를 들어, 이에 의하면 세어진 현실성은 자기 단일성의 구별이고, 현실성 가운데와 같이 가능성의 수 가운데 단일성의 구별이다.

 이는 무슨 말인가? 집합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여 보자. 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한 상태에서 어느 수는 현실적 상황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10이다. 그런데 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수란 것은 가능적 무한이다. 그런 의미에서 10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면, 가능성의 10과 현실성의 10은 수에서 같은 것이 된다. 마치 인간 10명과 개 10마리와 같이 말이다. 집합의 개념에서 생각하자면 말이다. 그러면 다시 수에 관한 논의를 상기해보자.

4.0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수는 헤아림과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혼에 의존하는 것이다. 구별된 양으로 보자면, 10은 사람에게도 개에게도 다의적(多義的)으로 적용된다. 그런데. 척도로 보자면, 10은 일의적(一義的)이다. 사람에게도 개에게도 10이라는 척도로 일의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수의 존재론적 위치는 영국의 주해가들에 의하여 무한에 관한 논의에 잘 인용된다. 그들이 이야기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근본에 크게 어긋나지 않고 말이다. 무한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에 따르면, 첫째는 수의 무한은 연속된 양의 '무한한 분할'로 인한 것이다. 둘째는 무한은 '가능적 무한'이라는 것이다. 이 두 테제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현실적 무한을 규정해야하는 것에 중요한 것이 있다. 그들의 논변을 더 들어보자.

 가능적으로 존재하는 수의 크기는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것에 일치하는 것으로 같은 것이다. 그러나 수의 크기는 같은 의미에서 수 그 자체의 현실성이다. 그러므로 가능적으로 실존하는 것의 수는 현실성 가운데 수이며, 마치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것의 수와 같이 말이다.

 10이란 수의 크기는 열이며, 이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의 집합 가운데 부여된다. 그리고 이는 가능적으로 실존하는 것의 집합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은 가능적으로 실존하는 사물의 수는 현실적 수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우리는 열거를 형성하는 수적 열거가 현실적 수와 가능적 수 가운데 구별되어지지 못할 때, 현실적 무한의 부정적 입장은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위의 논의에 의하면 가능적 수와 현실적 수는 차이를 가지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면 진정 현실적 무한을 가능한 것인가?

 무한한 것의 부분의 수가 가능성 가운데 그리고 현실성 가운데 동일하다면, 그러면 가능성의 한계(혹은 무한)은 현실성의 무한한 수이다.

 만일 가능성 가운데 그리고 현실성 가운데 동일하다면, 사실 현실적 무한인 인정되어야한다. 10은 현실적 사물의 집합이다. 그리고 이것은 가능적 상황에 있다. 그렇다면 10이라는 수를 두고 보자면, 가능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이 같은 것이 아닌가 말이다. 적어도 이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가지 무한의 조건을 충족하려고 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과연 이들의 생각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수학의 철학에 얼마나 조화스러운 것인지는 더욱 더 생각해 보아야한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수의 존재론적 위치에 관한 논의에서 무한의 문제를 해결할 초석을 다진다. 그리고 이를 가지고 적용하여, 가능적 무한과 현실적 무한을 모두 만족시키고자 하였다. 물론, 이들의 이러한 논변의 논리적으로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를 더욱 더 살펴보아야 하지만, 이들의 이러한 수학의 철학은 그 자체로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이후 논의를 기약하며 우선은 여기에서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