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빈(Wien) 대학에서 점성술과 대학의 관계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15세기 빈 대학에 들러난 대학과 정부의 관계에 관한 논의이다. 최근에 들어서 산학협동이란 것이 하나의 화두로 한국 학계에 다가오고 있다. 학문이란 것은 시대적 요구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어야한다. 즉 어떤 식으로든 학문은 시대에 한 몫을 해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협동이 중세 서양에도 그것도 후기 중세 서양에도 있었는가? 물론 그렇다. 토마스는 이교도들에 대해 그리스도교를 사수해야 하는 시대적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옥캄의 정치철학과 존재론적 사유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시대적 결과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옥캄은 이미 그 시기 교황에 대항하여 근대적 정치철학을 구축해 가는 시대적 사명을 가지도 있었다. 그러면 15세기 빈 대학은 어떤 식으로 당시 시대적 요구와 협동하였는가? 이것이 본 논의를 통하여 필자가 정리하려 하는 것이다. 이 당시 빈 대학은 당시 빈 정부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빈 대학의 설립 배경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빈 대학은 파리 대학과 많은 점에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1365년 대학이 설립될 때 파리 대학의 선생인 작센의 알베르투스가 와서 이곳에서 강의하였다. 또한 빈과 파리는 태생적으로 유사한 근거를 가진다. 이 둘은 옥스퍼드 대학과 달리 도시이며, 이 도시는 스스로의 법을 가지고 법정을 가진 도시였다. 그렇기에 이 두 대학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법정과 마을 그리고 학자들 사이의 적절한 관계를 개발했었다. 파리의 경우 프랑스의 왕은 대학의 존재에 관하여 약간의 권리를 가질 분이었다. 그러나 빈은 파리보다 왕(정부)의 권리가 더 강했다. 당시 빈의 지도자들은 합스부르그가(Habsburg)는 1365년 대학의 설립에 직접적 책임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은 대학의 직접적인 후원자였다. 이러한 관계는 자연스레 대학이 정부의 학술적 조언가의 구실을 하게 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대학의 학문적 영역이 제한을 당한 것은 아니다. 이곳에는 유명론자인 롱엔슈타인의 헨리(Henry of Longenstein)와 오이타의 헨리(Henry of Oyta)와 같은 뛰어난 학자들이 교수로 있었다. 하지만 분명 이 시기 빈 대학은 왕이나 정부 혹은 법정의 학문적 조언가였다. 실재로 1390년대에 이르러 빈 시의회는 대학에게 조세 등과 같은 문제의 조언을 요청하였고, 이로 인하여 롱엔슈타인의 헨리와 오이타의 헨리 그리고 요한네스 로이터(Johannes Reuter)란 세 교수가 법적 계약서에 관한 몇몇 논구를 적게 하였다. 즉, 요즘 말로 정부가 대학에 연구 프로젝트를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13세기 초에 일어난 일을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당시 프레데릭 2세의 법정 점성술가는 젊은이인 합스부르그의 루돌프가 프레데릭 2세의 후계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리고 이는
이루어진다. 이로 인하여 합스부르그가에게 점성술을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점성술은 법정에까지 진출한다. 그런데 위에서
이야기한 랑엔슈타인의 헨리와 같은 이들에게 점성술이 법정에서 다루어진다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이리로 보았겠는가? 당연히 아니다. 그는 행성은
자연적으로 달 아래 물리적 세계에 야기된 결과일 뿐이라는 자연학적 근거에서 이를 회의한다. 그뿐인가, 그는 인식론적 근거에서 점성술의 명확성을
부정하였다. 실재로 면도날을 든 유명론자들에게 점성술이 법정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타당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1368년과 173년 사이
그는 오렘과 마찬가지로 우주론적 결정론을 거부하였다. 여기에서 오렘의 논의란 천체의 운동 측정 불가능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그는 이미 점성술적
사고와는 맞지 않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빈 대학에 몸담고 있던 기간에도 빈 대학에서 점성술사가 있었다. 그들에 관하여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몇몇 의학적 점성술사가 법정과 랑엔슈타인 시절의 빈 대학과 관련되었다. 드로센도르프(Drosendorf)의 프레데릭은 프라그 출신으로
인문학부 교수이며, 1390년대 빈에서 가르쳤고, 한편 의학학위에 종사하였고, 후에 문헌에서 그는 '위대한 점성술사'라 적혀있으며, 다른
곳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점성술사'라고 적혀있다.
그 외에도 당시 빈에는 점성술사들이 활동하였다. 그문덴의
요한(John of Gmunden)이 그러하다. 그는 신학학위를 시작하였으나 마치지는 못한 인문학의 스승이다. 그는 수학과 점성술을 강의했다.
그리고 1440년에 이르도록 프레데릭 3세의 손에 그의 수사본이 있었다. 프레데릭 3세에게는 니힐리(Nihili)라는 점성술 조언자가 있었다.
피콜로미니(Piccolomini)는 당시 니힐리를 탁월한 점성가라고 했다.
이 시기 빈의 지배자인
합스부르그가의 개인 자연학자 사이에는 점성술사가 있었고, 그들은 의학부의 구성원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강의실보다 법정에서 더욱더
두드려졌다.
실상 14세기 이후에도 점성술은 그 맥을 이어갔다.
크라카우 대학 역시 빈 대학과 일반적으로 유사한 형태를 취했다. 15세기 크라카우에서도 점성술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크라카우의 학자인
토마스(Thomas of Strzewpino)는 천체(Corporia celestia)는 그 자체로 자유 결단의 행위의 원인일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천체가 직접적으로 지성과 의지에 작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더욱 이 로 인하여 자유 결단이 필연성으로 가진다는 것은 더욱 더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쾰른에서 1454년 기상학에 관한 글을 적은 페터(Peter Gaszowiec)는 이승의 현실성에 천체의 3중의 영향을
소개한다. 그것은 운동과 빛과 영향(Bewegung, Licht und Einfluss)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별한 법칙성은 태양에 어울린다고
한다. 거기에 15세기 말 지오반니 밧티스타 압비오소(Giovanni Battista Abioso)는 점성술은 의학에 필요하며, 점성술적
지식없이 건강을 유지할 수 없다고 한다. 실재로 이러한 사고는 흔하여 중세 많은 점성술가들이 의학부에서 활동하였다. 이미 이를 위의 빈
대학에서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점성술은 근대에 이르러 새로운 위치를 가지게 된다. 예를 들어 쿠페르니쿠스는 이 학문은 가장 고귀한
것이며, 수학에 근거한 것으로 자유기예 가운데 절정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는 신적인 학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인과적으로 수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의미에서 이는 점성술이 아니라, 천문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당시 빈 대학에서는 점성술이 대학에서 발전하였고, 이는
실상 매우 실용적인 목적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점성술은 대학과 당시 사회의 관계에서 활성화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사실 빈 대학에서의
점성술의 융성은 분명 13세기 초 이루어진 합스부르그가의 사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 점성술가들은 대학의 강의실에서 보다 외부에서 더욱
더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이들은 시대의 조언자였다. 그리고 이들은 오늘날의 눈에는 비과학적 사유이지만, 쿠페르니쿠스와 근대적 사유로 이어지는
사상사의 중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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