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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존재론과 논리 철학에서 '관계' 개념
유대칠
(토마스 철학 학교)
1. 중세 철학에서 '관계'란
러셀(Bertrand Russell)과 프레게(Gottlob Frege)의 영향에서인지
'관계'(ralatio)에 관한 현대 논리/수학적 논의가 많은 학자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실상 '관계'에 관한 논의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다루어지는 존재론과 논리 철학의 대상이다. 플라톤을 비롯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Metaphysica)과
{범주론}(Categoriae), 중세 길베르투스(Gilbert of Poitiers), 토마스(Thomas Aquinas),
하클레이(Henry Harclay), 스코투스(Duns Scotus), 뷔리당(John Buridan) 그리고 옥캄(William
Ockham)과 아우레오리(Peter Aureoli), 근대 라이프니츠(Leibniz)와 19세기 이후 프레게와 레설 그리고
셀라스(Willfird Sellars) 등에 이르기까지 관계는 꾸준히 사라지지 않은 철학의 문젯거리가 되고있다. 이 가운데 필자가 본론에서 다룰
것은 서양 중세의 존재론과 논리 철학에서의 '관계' 개념이다. 서양 중세의 관계 개념은 하나의 것으로 단정하기 힘든 다양한 생각이 혼재되어
있다. 그 시대를 단지 토마스니 스코투스니 옥캄이니 하는 이름만으로 정리한다면, 그러한 "규정이란 부정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다"(determinatio est negatio). 즉 중세의 상이한 다양성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본 논의는 서양 중세
철학의 다양한 관계 개념을 정리하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중세 관계 개념을 다시금 이해함에 목적을 가지고 있다. 또한 본 논의는 필자의 다음
논의를 위한 하나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에 있으며, 다른 한편으론 중세 시대의 관계에 관한 논의의 역사 고찰을 통하여 중세 존재론과 논리 철학의
일면을 보이려 함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관계란 "대응하는 것과의 상응되는 가운데 이야기되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예는 주인의 노예이고, 주인은 노예의 주인이라 불린다. 두 배는 반의 두 배이고, 반은 두 배의 반이며, 큰 것은 작은 것의 큰 것이고, 작은
것은 큰 것의 작은 것이다"이다. 이렇게 관계란 어떤 것에 대해 있음(esse ad)이다. 또한 이러한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10가지 범주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즉, 실체(무엇인가), 어느 정도의 것(양), 어떤 것(성질), 무엇인가에 대하여(관계), 어디에(장소),
언제(시간), 놓여 있는 것(상태), 가지는 것(소유), 행하는 것(능동), 당하는 것(수동)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는
정신 외부의 실재성을 10가지로 분류하는 기능을 가진다. 관계는 양이나 질 등의 다른 범주에 의존하지만, 분명 실재성을 가지는 것이다. 단지
다른 범주에 비하여 덜 실재성을 가질 뿐, 분명 어떤 형태의 실재성을 가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관계는 범주 가운데 하나, 즉 우유적
존재(esse accidentale) 가운데 하나로 주체 가운데 있음(esse in)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계에 관한
논의는 이후 철학자들에게 강한 영향력과 의문을 제공한다. 우선 관계의 존재론적 위상에 관한 것이다. 이는 다음의 물음으로 요약할 수 있다.
관계란 실재성을 가지는 것인가? 역사 속의 많은 실재론자들은 관계의 실재성을 인정하지만, 다른 한편 유명론자와 개념론자들은 이를 부정하였다.
이와 같은 문제점은 한편 다음의 예로 정리될 수 있다. 영국의 철학자 브래들리(F.H.Bradley)는 그의 이름을 딴 브래들리의
소급(Bradlry's Regress)이란 예를 들고 있다. 그 내용은 A가 B의 옆에 있을 때, A와 B가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 제 3의
추상체, 즉 관계가 존재한다면, 이 추상체는 A와 B에 또 어떤 관계를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즉 관계가 어떤 실재성을 가진다면, 그 실재성을
가지는 것과 또 관계를 정립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관계의 실재성은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가진다. "안현주는 안주영의 언니이다." 여기에서
'언니'라는 관계항(terminus relativus)은 근거(fumdamentum)이며 주체(subiectum)인 안현주 가운데 있지만,
안주영에 의하여 서술되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안주영 없이 안현주를 언니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언니는 안현주 가운데 있는 것이다. 즉,
안현주 가운데 언니는 비록 다른 우유적 존재에 비하여 덜 실재성을 가진다고 하여도, 분명 어떤 식으로든 실재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또 "안현주는
안주영 보다 더 무게가 많다"라고 한다면, 더 무겁다고 하는 양적인 관계는 비록 양(quantitas)에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양만큼은 아니지만,
어떤 식의 실재성을 가진다. 여기에서 관계는 주체인 안현주 가운데 존재(esse in)하면서, 동시에 안주영에 대하여 있을 때(esse ad)만
가능한 것이다.
관계의 개념이 가지는 존재론적 위상의 문제는 중세인들에게 다양하게 다루어진다. 그리고 중세인들은 현대인이 가지지
않은 신앙이란 짐을 가지고 있었다. 삼위일체(三位一體)도 그러한 문제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셋이며, 하나이다. 이런 삼위일체의 문제에서 셋
사이의 '관계'는 쉽지 않다. 성부와 성자는 '부자 관계'를 가진다. 이는 성부가 없이 성자는 없으며, 성자 없이는 성부가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의존 관계로 성부와 성자를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부와 성자는 서로 다르지만 하나이다. 그렇기에 다른 것에
의하여 다른 것이 나온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중세인들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중세의 많은 삼위일체에 관한 논의들이 바로
이러한 문제의 합리적 해법을 구하고자하는 노력에 있다. 만일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우유적인 것이라면 이는 불합리하다. 왜냐하면 신성(神性)엔
우유적 존재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부와 성자 사이의 관계는 우유적 존재가 아니라, 신성 그 자체로 남게 된다. 만일 이러한 것을
여기게 된다면, 이는 삼신론(三神論)에 빠지게 된다. 성부와 성자의 경우에 부성과 자성이란 관계항은 성부와 성자 가운데 내재하면서 동시에 다른
것에 대하여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 여긴다면 삼위일체론은 완전해지지 않는다. 실상 길베르투스와 같은 이들은 삼신론에 빠진 인물로 여겼고,
{신학대전}에서 토마스로부터 비판받는다. 그뿐 아니라, 클라렘발트(Clarembald of Arras)와 같은 이는 길베르투스와 동일한 문헌인
보에티우스의 {삼위일체론}(de trinitate)을 주해하면서 길베르투스의 논의를 비판하고, 삼위일체론을 지키려 한다. 그 외에도
라이허스베르그의 게르호(Gerhoh von Reichersberg) 등과 같은 이에 의하여 길베르투스는 비판을 받는다. 신에 관한 관계항인
부성과 자성과 같은 것은 그 주체 가운데 실재성을 가지며, 결코 우유적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esse in으로 귀결되며, 동시에
esse ad이기도 하다. 만일 관계에 관한 이 두 가지의 것 가운데 하나를 제외한다는 삼위일체는 문제에 빠지고 만다. 이는 중세기 동안 줄곧
이 두 가지가 수용되는 이유가 된다. 길베르투스는 esse in을 거부하였고, 이것이 그 자신이 비판받은 이유가
되었다.
대부분의 중세 철학자들은 다른 많은 중세 철학의 문제에서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해라는 작업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많은 부분에서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중세 주해자들의 관계에 관한 논의는 현대의 것과 다르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관계를 '하나의 사물에
속하며,' '다른 것을 향함'이라 설명한다. 이러한 논의는 현대 존재론자들의 것과 다르며, 이미 이 차이는 콘포드(Francis M.
Cornford)와 올손(Kenneth Olson)과 같은 이들에 의하여 야기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중세 주해자들의 관계를 현대 철학의
용어로 풀자면, 관계에 관한 단원적 개념화(monadic conception of relations)라 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안현주는
안주영보다 크다"라는 명제는 단원적 속성 한 쌍에 의하여 설명되어지는 것이다. 즉, 안현주 가운데 내재하는 것과 안주영에 대한 것에 의하여
설명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존재론자들의 논의는 다르다. 몇몇을 제외한 많은 경우 현대는 이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다. 본 논의는 현대의
논의까지 모두 설명할 의무는 없다. 다만, 현대의 이러한 정리 방식이 중세의 관계를 이해하는 보다 빠른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중세 철학자의 대부분은 관계를 단원적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아우레올리에 이르러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벗어나 이를 떠나게 된다. 그러나 이도 알고
보면, 삼위일체론과 무관하지 않다. 이도 논의의 진행과정에서 차차 드러날 것이다.
분명, 관계에 관한 논의는 철저하게 논리 철학적이면서 동시에 그의 존재론적 위상에 관한 존재론적 논의이다. 그렇기에 이 관계에
관한 논의는 중세의 실재론과 유명론 그리고 개념론의 다양한 형태를 살필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이 글로 만족된
글이 아니라, 차후 이루어진 필자의 행로를 위한 하나의 이정표 정도에 지나지 않음을 다시 밝히면 이후 논의를 진행해가겠다.
2. 중세 철학에서 관계의 두 가지 구분의 문제
중세를 지배한 관계의 두 가지 구분은 '실재적 관계'(relatio
realis)와 '이성적 관계'(relatio rationis)이다. 실재적 관계에 의하면 관계는 어떤 식으로든 실재성을 가진다. 반면 이성적
관계에 의하면 관계는 이성의 작용에 의하여 만들어진 개념적 산물일 뿐이다. 이 두 가지의 구분은 중세 동안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토마스에
의하면, 피조물은 신과 관계를 가진다. 즉, 피조물이 가지는 창조주에 관한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는 실재적 관계이다. 그러나 역으로 신이 가지는
피조물에 관한 관계는 실재적 관계일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영원하고 완전한 존재이기에 피조물에 어떤 의존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실재적
관계를 인정한다면, 이는 신의 완전성을 간과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신이 가지는 피조물과의 관계는 이성적 관계이다. 이와 같은
논의는 13세기 중엽 이후 중세인들에게 일반적으로 수용되었다. 여기에서 두 가지 관계에 관한 구분은 중세 신학적 논의에 매우 유용하였다.
일반적으로 실재적 관계는 실재하는 두 사물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여기에서 관계는 어떤 실재성을 가진다. 비록 다른 우유들에 비하여 덜
실재적이지만 말이다. 이성적 관계는 어떤 것에 대한 '개념'에 의하여 의미되어지는 것이다. 일찍이 보에티우스에 의하면, 관계는 실존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없으며, 주체와 이에 상응하는 것과 분리된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상응하는 한 쌍이란 상황에서 이해되어지는 것으로, 여기에서 관계는
심적 활동에 의하여 만들어진 개념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이는 무슬림 철학자들에 의하여 더욱 더 정교해진다. 예를 들어
아비첸나(Avicenna)와 같은 이가 그러한 인물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교해진 이성의 관계는 무슬림 철학의 유입과 함께 유럽으로 유입된다.
그리고 이러한 유입이 실재적 관계와 이성적 관계의 구분을 더욱 더 분명하게 만들어 낸다. 이러한 구분은 중세에 이루어진 관계 개념의 논의를
이해하는 길이 된다.
3. 12세기 스콜라 철학에서 관계의 문제
아직 아랍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이전이다. 굳이 말하자면, 아랍의 다양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해들이 체계적으로 다루어지기 이전이란 말이다. 물론 그리스 철학이 없던 것은 아니다. 보에티우스(Boethius)라는 걸출한 인물에 의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 외 관계에 관한 논의에서도 아벨라르두스(Abelard)와 길베르투스와 같은 이들이 있었다.
3. 1 길베르투스의 범주론에서.
보에티우스의 {삼위일체론}에 관한 길베르투스의 주해는 관계에 관한 주목할 만한 논의를
담고 있다. 이에 등장하는 길베르투스의 삼위일체와 관련된 관계에 관한 논의는 후에 토마스에 의하여 비판받는다. 길베르투스는 esse in과
esse ad에서 후자만을 취한다. 주체 가운데 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떤 것에 대한' 것으로 관계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논의는 삼위일체론에서 문제점을 야기한다. 왜냐하면 부성과 자성과 같은 관계항이 주체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것에 대하여
이해되어지는 것이라면, 신적 관계들과 그 위격 그리고 그 같은 관계들과 신적 본성 사이의 실재적 구분을 긍정하는 결과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논의는 레멘세 공의회(1148)에서 철회되어졌고, 토마스와 같은 이들은 {신학대전}과 {권능론}(de potentia)에서 그리고
비판되어졌고, 이미 12세기 클라렘발트와 라이허스베르그의 게르호 등과 같은 이들에 의하여 비판되어졌다.
"안현주는
안주영의 언니이다"에서 '언니'는, 단원적 차원에 의하면, 안현주 가운데 내재하면서, 동시에 안주영에 대하여 진술되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길베르투스는 esse in을 거부하고, esse ad만을 수용한다. 이와 같은 논리에서 길베르투스는 삼위일체도 다룬다. 그에 의하면, 삼위일체
가운데 수(numerus)는 그 본질에 의한 것이 아니며, 그로 인하여 그 위격들 가운데 완전한 무차별 혹은 차이 없음이 있다. 삼위일체 가운데
수를 가능하게 하는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 사이의 관계는 그 주체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것에 대하여 진술되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본질에서 차이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관계는 다른 우유들과 같이 존재에 의하여 의미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존재를
수반하거나 부과되어진 것이다. 실체, 양, 질은 길베르투스에게 다른 범주와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실체와 함께 질을 가지는
것(quale)으로 있음 혹은 양자(quantum)로 있음은 있음이다. 예를 들어 하얀 것(albus)으로 있는 인간 혹은 긴
것(lungus)으로 있는 인간 그리고 그의 하얀 것으로 있음 혹은 긴 것으로 있음은 있음이다. 그러나 대구에 있음은 아무리 대구에 있다고 해도
있음이 아니다. 이렇게 양과 질 그리고 실체는 다른 우유와 다르고, 관계는 그 가운데도 다르다. 이는 '어떤 것을 향해' 서술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여섯 범주와 같이 그 주체 가운데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존재에 수반하거나 부과되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길베르투스의 논의는 중세 철학에서 이단적 논의로 여겨졌고, 삼위일체-존재론에 근거한 이들에게는 항상 비판의 대상에
머물렀다. 하지만 단순한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실재론자로 그의 이러한 관계에 관한 논의는 더욱 더 많은 연구를 요구함에 틀림이 없다.
3.2 아벨라르두스의 '관계' 개념
아벨라르두스에 관계에 관한 논의도 13세기 이전에 다루어진 주목할만한 성과물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관계도 단원적이다. 그도 관계의 문제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의 논의를
살펴보자.
이에 관하여, 관계라는 이것은 그에 의하여 종속하는 존재인 이것 자체인 것이다. 즉 다른 것에 대한 것을 가짐(habere)이며, 이는 이러한 방식의 본질의(essentiae) 어떤 것에 대한 것이며, 이는 다른 본질에 대하여 가져지는 존재이다... '어떤 방식으로'(quodammodo) 관계는 다른 것에 대한 것이며, 그 자신의 본질 가운데 고려되는 것에 의하지 않았지만, 다른 것에 대한 주체로 고려되어짐이 일어난다. 동일하게 '어떤 방식으로' 고려되어짐이 일어난다.
아벨라르두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면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다. 그에게 관계는 '어떤 것에 대한 것'일 때 가능하다. 한편 그의 관계는
'어떤 방식으로'(quodammodo) 가능하다. 그는 관계를 어떤 것에 대한 것으로 실체 가운데 존재하는 우유로 본다. 예를 들어, "로미오는
줄리엣의 남편이다"에서 '남편'은 로미오라는 근거 혹은 주체 가운데 있는 것이며, 줄리엣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관계는 일차적
의미에서 관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차적 의미에서 관계되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겐 관계의 주체가 일차적으로 관계되어질 수 있는 것이며,
관계 그 자체는 다른 것에 대한 주체로 인하여 고려되어질 수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이차적 의미에서 관계되어지는 것이다. 즉 관계의 주체인
로미오가 일차적으로 관계되어지며, 그의 관계는 이차적으로 관계되어진다는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사이의 관계는 로미오가 남편이라는 방식에서
관계적이다. 로미오는 남편이며, 그것이 남자를 남편으로 만든다는 파생적이고 이차적인 의미에서 남편이다. 물론 남편으로 존재하는 로미오는 일차적
의미로 관계적이다. 여기에서 관계는 우유이다. 이는 주체 가운데 내재하며 혹은 그 가운데 알려짐으로 관계적인 사물을 가능하게 한다. 반면
로미오는 실체이다. 이는 그 가운데 내재하거나 그 가운데 알려짐으로 남편이 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남편이 야기됨에 의하여 그러하다.
여기에서 관계란 관계되어지는 두 개 이상의 상태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면 그의 관계에 관한 논의를 정리해 보자. 우선 관계는 단원적 속성의
어떤 형태이다. 즉 이는 주체 가운데 내재하면서 다른 것에 대한 것이다. 또 한편 이는 관계적 상황을 만드는 단원적 속성의 어떤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중세 무슬림 철학에서 관계의 문제
중세 철학의
심화에서 중세 무슬림에 의한 철학적 성과를 간과함은 이후 중세 철학의 무지로 이어진다. 이미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범주론}에
등장하는 관계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알고 있었다. 아베로에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계에 관한 논의에서 관계에 관하여 다른 우유들에 비하여 덜
존재성을 가진다는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이미 이들 중세 이슬람의 무슬림 철학자들은 관계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알고 있었고, 이제 남은
것은 그들의 논의를 이어가는 것이다. 이들은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과는 그 상황이 달랐다. 예를 들어 이들은 삼위일체와 같은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즉 하나의 짐과 같은 것에서 자유로웠다.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은 또한 이들의 지적 유산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중세 무슬림
철학자에 관한 이해와 비판이 적당한 것인가 하는 것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들이 중세 스콜라 철학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
된 것은 분명하다. 중세 유럽의 알베르투스 마뉴스(Albertus Magnus)는 자신의 저작에서 이슬람의 철학자들을 관계에 관한 반-실재론적
해법을 가진 인물로 여긴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반-실재론적 해법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왜냐하면 알-파라비(Al-Farabi)나
아비첸나와 같은 이들의 문헌에서 이들이 실재론을 진정 반대하였는지를 논하기는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비첸나의 관계에 관한
사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과 {형이상학}에서 시작한다. 그에 의하면 관계는 실체-우유 존재론에 따른 것이다. "로미오는 줄리엣의
남편이다"라는 명제에서 관계항인 '남편'은 로미오에 속하는 것이며, 줄리엣에 대하여 논하는 것이다. "줄리엣은 로미오의 아내이다"에서 관계항인
'아내'는 줄리엣에 속하면서 로미오에 대하여 논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관계는 사물 가운데 객체적으로 존재하며, 이는 우유적인 것으로 실존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관계란 마음 가운데 객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즉 대상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러한 아비첸나의 발견 혹은 무슬림 철학자들의
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길과 구분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계를 우유적 존재의 하나로 실재적 존재로 단지 다른 것에 비하여 덜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아비첸나와 같은 이들은 이를 '이성적 존재'로 마음 가운데 주어진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실재성
가운데 있는 것'(실재적 관계)과 '마음 속에 있는 것'(이성적 관계) 사이에 존재론적 구분에 관해서도 논의한다. 우리는 과거에 실존하는 것에
대하여 현재 실존하는 것을 관계하지 않는다. 우리는 실존하는 것을 실존하지 않은 것 관계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러한 시간적 관계에서 관계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우리가 실재적으로 관계하는 것은 현재 실존하는 것의 개념에 과거에 실존했었던 것의 개념을 관계시키는 것이다. 이렇다면,
마무라(M.Marmura)가 논의하였듯이 마음 가운데 실존하는 추상적 관계와 구체적 사물 가운데 존재하는 관계 사이의 구별이 아비첸나에게
필수적인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가 주체 가운데 존재하는 것으로 관계적 개념을 이야기할 때, 이러한 진술은 어떤 구체적 사물에 대하여
논의되어야만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개념론적 모양을 갖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알베르투스는 이슬람의 철학자들을 개념론적으로
이해하였다. 하여간 이러한 중세 무슬림의 논의는 중세 스콜라 철학으로 이어지면서, 이성적 관계와 실재적 관계는 구별은 명확하게 하였으며, 더욱
더 논의를 정교하게 만들었다.
5. 13세기 스콜라 철학에서 관계의 문제
13세기에도 관계에 관한 논의는 이어진다. 오히려 중세 무슬림 철학의 유입으로 논의는 더욱 더 다양하고 풍부해진다. 그 풍부한 논의를 여기에선 알베르투스와 토마스의 논의에 집중하여 다루어 보려고 한다.
5.1 알베르투스의 관계 문제
알베르투스 역시 그의 관계가 극을 달리는 것은 삼위일체와 같은 신학적 논의에서이다. 그리고
그의 관계에 관한 논의도 길베르투스 등과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에 관한 그들의 논의를 이해함에서 시작함이 바르다 하겠다. 알베르투스는 중세의
전통에 따라 어떤 것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한다. 그 가운데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알베르투스는
실체(substantia)와 양(quantitas) 그리고 질(qualitas)을 든다. 우선 단순하게 어떤 것에 대하여 서술되어지지 않는 것은
실체이며, 내재하는 것은 양과 질이다. 그런데 어떤 것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면서, 내재하는 것으로 관계를 든다. 이렇게 된다면, 알베르투스도
단원적 속성으로 관계를 이해한 듯 하다. 즉, 관계는 근거(fundamentum)로 혹은 관계의 주체로 실체를 전제해야한다. 그리고 그러한
실체에 내재하면서, 동시에 다른 것에 대한 것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이다. "안현주는 안주영보다 더 키가 크다"에서 관계는 관계항인 '더 크다'에
의하여 의미되어지는 존재자이며, 이는 우리가 관계적 술어라고 부르는 것의 의미 대상(significata)이다.
만일 관계적
술어가 의미를 가지는 것이면, 이 의미를 가지는 술어는 개념을 의미하며, 그러면 관계적 술어는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개념들은 그
자체로 관계인데, 그 이유는 알베르투스에 의하면 관계는 그저 관계적 술어의 의미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의미를 가진 항은 개념을 의미할 뿐
아니라, 외부의 실재성 가운데 이들 개념에 의하여 표상되어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알베르투스는 실재론의 편에서 극단의
실재론도 극단의 개념론도 피하려 한다. 이러한 와중에도 분명하게 그는 실재론을 고수한다. 그는 관계를 어떤 것에 대한 것이고, 이는 가장
일반적인 유(generalissimum)라고 하며, 우유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것 가운데 하나(unum de primis generibus
accidentis)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외부적 존재를 가지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문헌상 분명하다. 그에게 관계는 존재자의
우유적 범주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는 것이며, 이는 다분히 실재론적 입장을 가진다. 그러나 그도 신의 문제에선 다른 입장을 보인다. 왜냐하면, 신
가운데 우유적인 것이 있다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신 가운데 관계는 신적 실체 이외 아무 것도 아니며, 이는 결코 우유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볼때, 알베르투스의 관계에 관한 입장은 관계를 단원적으로 이해함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2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계 문제
토마스는 관계적인 것을 그 관계의 상대되는 것과의 상응됨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 즉, 남편이란 개념은 아내라는 상대되는 것 속에서 사고될 수 있단 말이다. 또한 이러한 관계항 혹은 관계적인 것은 이와 동시에 주체에
내재하는 우유적 존재이다. 토마스는 몇몇 논의에서 우유적 존재(esse accidentale)의 고유한 존재성을 부정하는 듯이 보인다. 즉
우유는 존재를 가지지 않는다(accidens vero non habet esse)고 한다. 그러나 토마스의 본뜻은 '존재'의 본래적 의미는 그
자체로 존재이며, 이것은 오직 실체에만 속한다는 것이다. 토마스는 분명히 우유적 존재에 있어서의 존재를 배제하지 않는다. 관계도 우유의 하나에
속하며, 단지 다른 우유에 비하여 덜 실재적이라고 토마스는 본 것이다. "안현주는 안주영 보다 키가 크다"라고 할 때, '보다 키가 크다'라는
관계적 논의는 '키'라는 다른 우유적 요소에 의존하여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키'와 같은 것은 우유들은 실체에 비하여 덜 실재적이며, 관계는
또 다른 우유에 비하여 덜 실재적이며, 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안현주 가운데 내재하면서, 동시에 안주영에 대하여 있는 것이다.
이렇게 토마스는 관계에 관한 esse in과 esse ad 둘을 수용한다.
이러한 토마스의 입장은 관계를 단원적
속성으로 이해함이 분명하다. "안현주는 안주영 보다 키가 크다"에서 관계는 안현주 가운데 내재하면서, 안주영에 대하여 말되는 것이다. 신의
문제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삼위일체에서 토마스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논의하면서 우유적 존재로 관계가 아닌 신의 본질로
관계를 정의한다. 성부와 성자 사이의 관계는 자연계의 관계와 같이 우유일 수 없다. 왜냐하면 신 가운데 어떤 우유가 있다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삼위일체에서의 관계는 성부 가운데 있으며, 성자에 대하여 논의되지만, 성부 가운데 우유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신 가운데 관계는 우유적 존재가 아니라, 신의 본질과 실재적으로 같으며, 오직 이성에 의하여 구별될 뿐이다.
토마스의 해법은 다분히 실재론적이다. 그리고 그 이후 막클레스필트와 같은 그의 지지자들에 의하여 관계에 관한 실재론적 해법은
이어진다. 물론, 이러한 실재론적 해법은 분명 중세 철학에서 관계에 관한 주된 흐름의 하나임은 분명하며, 토마스는 그 가운데 한
명이다.
6. 13-14세기의 분기점에선 철학자들의 고민
막클레스필트(Wilhelm von Macclesfield)와 하클레이는 토마스 이후 '관계'의 문제를 고민한 영국의 인물들이다. 막클레스필트는 도미니칸 출신으로 토마스 사후 토마스를 옹호한 영국의 철학자였다. 그는 서톤의 토마스(Thomas von Sutton)와 옥스퍼드의 로베르트(Robert von Oxford) 그리고 스트라톤의 니콜라우스(Nikolaus von Stratton) 등과 동시대의 철학자이다. 우리가 그에 관하여 아는 것은 거의 없지만, 필자는 펠스터(F.Pelster)의 수사본 연구를 통하여 그의 관계 개념의 흐린 외곽을 살피고자 한다. 또한 하클리에는 스코투스에서 옥캄으로 넘어가는 사상적 노선에서 독자적인 존재론적 논의를 가진 이 당시의 주된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러나 이 시기를 두고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철학자는 다분히 둔스 스코투스이다. 그는 하클레이와 동시대 인물이며, 토마스의 사고와 다른 또 다른 형식의 관계에 관한 사고를 개척한 인물이다. 필자는 이와 같이 세 사람을 이곳에서 다룰 것이다.
6.1 막클레스필트의 삼위일체론에서 관계의 문제
필자가 여기에서 다룰 막클레스필트의 논의는 그의 삼위일체론에 한정할
것이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토마스의 영향력 아래 실재론의 전개를 확인할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아버지가 아들을 생성하게 함에
근거한다. 여기에서 관계의 근거가 되는 것은 생성함이란 능동성, 즉 행위(actio)이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에 의하여 생성되어짐이란
수동(passio)에 근거하여 아들이란 관계항이 주어진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와 같이 성부와 성자의 경우도 그렇게 이해되어지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삼위일체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삼위의 셋은 다른 것에 의하여 생성되어지고, 그러한 생성되어짐과 생성함에 근거하는 관계로 삼위를
설명한다면, 삼위의 셋은 일체가 될 수 없다.
나는 말한다. 신성 가운데 부성은 생성함(generacionem) 위에 근거하며, 이는 <능동적> 행위(actio)가 아니다. 그리고 자성은 생성됨 혹은 태어나짐(generari et nasci)에 근거하며, 이는 수동(passio)이 아니다.
여기에서 생성함과 생성됨에 근거하지만, 이는 능동이나 수동에 근거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막클레스필트는 관계항이 자연계에선 우유적 범주들(능동, 수동, 양, 질)에 가운데 근거하지만, 이는 신성 가운데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신성 가운데 우유적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부라는 관계항은 생성함에 근거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성자에 대하여 능동에 근거하여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러한 그의 관계에 관한 사고는 어떤 다른 범주의 우유들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관계는 근거를 가지며, 어떤 것에 대한 것이다. 그는 토마스의 실재론적 해법을 이어가는 13세기 후반기의 한 면을 볼 수 있다.
6.2 둔스 스코투스의 새로움
13세기의 말을 일반적 철학사는 둔스 스코투스라는 걸출한 인물로 설명한다. 둔스 스코투스는
토마스와 다르게 관계에 관한 실재론을 구사한다. 그러면서 그는 독창적인 관계 이론을 전개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존한 실재론적 해법에서 또
다른 관계에 관한 존재론적 사유의 가능성이 등장함을 의미한다. 그는 관계가 우유이지만, 모든 관계가 우유는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초월적
관계'란 것을 말한다. 즉 '범주적 관계'와 '초월적 관계'를 말한 것이다. 그 가운데 창조물과 신의 관계가 가장 일반적인 초월적 관계의 예가
된다. 초월적 관계는 그들 주체의 필연적 형태이며, 이는 실재적으로 그들의 주체와 동일한 것이다. 이들 관계는 형식적으로 그 주체와 구별되어지는
것이다. 또한 범주적 관계는 그에게 매우 강하게 실재적이다. 스코투스는 관계를 두 개의 비-관계적 항 사이 실재적 관계라고 하면서, 이는 주체
가운데 내재하는 우유라고 한다. 스코투스는 여러 곳에서 반복하여 주체 없이 관계적 속성이 존재함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긍정한다. 이렇게 스코투스는
관계에 관하여 주체에 내재하는 실재론의 입장을 보인다.
한편 관계는 어떤 것에 '대한' 진술로 정의되어진다. 스코투스는 '절대
항'과 '비-절대 항'을 구분한다. '절대 항'은 다른 것에 대한 상응됨 속에서 진술되어지지 않는 것이다. 즉 인간과 같은 것이다. 반면,
'비-절대 항'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이는 다른 것과의 상응됨 속에서 이해되어지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줄곧 예를 든 아내와 남편과 같이
말이다. 이는 상응되는 것 없이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스코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 가운데 실체, 양(quantitas),
질(qualitas)를 '절대 항'의 범주라고 한다. 그리고 남은 7개의 범주는 '비-절대 항'의 범주라고 한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플라톤 보다 키가 크다"고 가정하자. 소크라테스 가운데 '더 키 큼'의 관계는 그 자체로 개별적 우유이며, 이는 그의 근거 혹은 주체와
실재적으로 구별되어진다. 소크라테스의 높이가 플라톤 보다 더한 것이라면, 그러면 개별적 우유는 소크라테스 가운데 실존한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의
높이는 관계의 근거(foundation)라고 한다. 그런데 스코투스는 관계가 그 근거와 같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소크라테스 가운데 소크라테스의
개별적 높이의 내재함은 필연적이지만, 관계가 실존함에 있어서 충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그보다 더 크게 자라는 동안
같은 높이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즉, 소크라테스의 키는 플라톤보다 크다고 함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이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란 말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키가 더 커지게 자라는 동안 소크라테스의 키는 그대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더 크다고 하는 관계적인 것은 남아있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존재론적으로도 당연하다. 스코투스는 높이란 우유 속에 더 키 큼이란 관계라는 우유가 내재할 수 없다고 한다. 즉
우유는 우유 속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스코투스는 관계에 관하여 실재론자이다. 관계가 높이와 같은 것이 아니라, 관계 그 자체가 소크라테스
가운데 내재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더 키 큼'이란 것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사이의 것이지, 그들의 우유들 사이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비록
그것이 하나의 근거 가운데 그리고 다른 것 가운데 상응자에게 주어져 실존하지만 말이다. 스코투스 역시 토마스와 같이 관계의 문제에서 실재론을
보인다. 물론, 이들은 서로 분명히 다른 길을 간다. 그러면서 관계에 관한 실재론의 새로운 차원이 전개된다.
6.3 하클레이의 대안적 방안
토마스, 막클레스필트 등의 실재론적 해법은 13세기말 적수를 마주한다. 바로 영국 학자
하클레이이다. 마우러(A.Maurer)의 연구에 의하여, 그는 누군가의 추종자나 아류를 넘어 독자적인 철학자로 알려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인물이다. 이런 그 자신의 철학 가운데 중심적 개념이 바로 '관계'에 관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의 해법은 중도적이다. 그가 의도한 관계는
실재론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단지 지성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러면 관계에 관한 존재론적 위치는 무엇인가? 우선 그에게
실재론은 올바른 해법이 될 수 없다. 스코투스는 "a는 b와 관계를 가진다"에서 a와 b는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정신 외부의 사물이며, 그리고 a
가운데 b에 관한 R을 위한 실재적 근거가 있다고 보았다. 즉 이미 필자가 위에서 소개하였듯이, 스코투스의 이러한 관계는 우유 가운데 놓여있지
않으며 주체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는 강한 실재론적 해법이다. 하클레이 역시 이러한 것을 그의 {명제집 주해}에서 소개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것이라 볼 수 없다. 그는 관계를 '연합'(associatio)이란 개념으로 해결하려 한다. '유사성'이란 관계를 두고 설명해보자.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 하얗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하자. 이 유사성이란 것은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에게 정립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단지 다른 것에 대하여
그것의 조건을 확인하는 차원의 것이다. 실재에서 하양의 성질이 다른 하양의 성질과 함께 있을 때, 여기에서 유사성이 일어난다. 이러한 유사성이란
관계는 주체 가운데 어떤 것을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것에 관하여 그것의 조건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는 하클레이에 의하면 지성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의 하양이 다른 하양과 유사하다고 할 때, 전자의 하양은 절대적으로 말해질 수 있다. 즉 다른 것과의 비교나
상응함 없이 이야기되어지는 하양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양은 다른 것과 상응되거나 비교될 때의 하양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서 후자의 하양, 즉
상응되어짐과 관련되는 하양은 색의 유사성과 관련된다. 이는 단지 그 하얀 사물의 조건이다. 이러한 조건, 정신으로부터 독립된 조건이 존재할 때,
관계가 가능하다. 두 하양의 연합은 주체 가운데 무엇을 정립하지도 않으며 지성에 의하여 만들어지지도 않은 것이다. 유사성이란 하양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며, 단지 다른 하양과 함께 있을 때, 그때 일어나는 것이며, 이는 절대적이지 않은 것이다. 상관적이다. 그리고 이는 관계를 가지게
되는 하양과도 다르지 않다.
하나의 하양은 절대적으로 하양이라 불리지만, 동시에 다른 것과 있을 때, 관계적 의미에서, 즉
유사성에 의하여 하양이 된다. 하양이란 점에서 유사하다고 할 때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 항으로 하양은 유사성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하양이
유사성과 같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절대 항으로 하양은 분명 유사성과 다르다. 관계란 단지 다른 하양과의 연합과 동시발생의 조건 속에서
이해되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지성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는 관계가 주체 가운데 있다고 하는
강한 실재론도 피하고, 또한 단지 지성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도 아니라고 한다. 이러한 하클레이는 스코투스와 옥캄 사이의 과도기에 선 인물이며,
실재론과 유명론 혹은 개념론적 사고의 사잇길을 가려고 한 인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잇길이 그를 독자적인 철학자로 만들어 놓았다.
토마스의 사후 그의 관계에 대한 실재론적 해법은 막클레스필트와 서톤 등에 의하여 옹호되기도 하지만, 한편 스코투스와 같은 이에
의하여 또 다른 식의 실재론적 해법이 주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하클레이와 같은 이에 의하여 실재론적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복잡하여 다양한 사상적 움직임은 불과 1300년을 기점으로 좌우 10여 년을 두고 다양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어느
하나 가치 없지 않은 논리적 무장을 통하여 서로를 논박한다. 그리고 이러한 논박의 핵심에는 관계의 존재론적 위치에 관한 의문이었다. 그것은
토마스식인가, 스코투스식인가, 아니면 하클레이식인가? 이러한 다양한 논의의 중심에는 esse in과 esse ad이라는 두 가지 정의가 어떻게
논리적으로 무리 없이 조화되어지는가 하는 것이 있었다. 이러한 논의 가운데 관계의 실재성은 필요 이상 가정된 것이라며 면도날로 잘라버리려는
일련의 움직임이 일어난다. 이미 브레들리의 고민에 답을 주려고 한 것이다. 바로 아우레올리와 옥캄과 같은 인물이 그런 인물이다.
6. 14세기와 그 이후 스콜라 철학에서 관계의 문제
변화의 시기가 열렸다. 이제까지 중세 철학의 논의가 검증의 도마 위에 올라서면서 새로운 형태의 철학적 사유가 근대적 사유를 준비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면도날을 든 철학자들이 기존의 이론에 필요 없이 더해진 존재자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관계에 관한 논의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에는 옥캄과 아우레오리 등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6.1 아우레오리의 탈-아리스토텔레스적 발상, 유명론적 이해
아우레오리는 esse in과 esse ad이라는 두 가지
길에서 과감하게 전자의 것을 포기한다. 즉, 스코투스와 토마스 등에 의하여 주장된 마음 외부의 사물 가운데 내재하는 우유적 속성으로 실재적
관계에 관한 이해를 파기한 것이다. 이러한 아우레오리의 관계에 관한 존재론적 사유는 더 이상 아리스토텔레스적이지 않다. 그에게 실재적 관계는 두
가지 사물 사이에 얻어지는 상태이다. 즉, 아우레오리에게 관계는 중간에 존재하는 것 혹은 두 사물을 연결하는 것의 속성으로
중간자(medium)이다. 이러한 관계는 주체 가운데 근거되어지는 것, 즉 esse in에 의하여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간단하게 그는 더
이상 관계의 문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우유의 존재론에 근거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그의 관계는 단지 두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상태일
뿐이다.
그에게 마음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개체일 뿐이다. 보편자는 단지 심리적 과정에서 형성되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보편자는 실존의 어떤 실재적 양태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실존하지 않으며, 단지 마음 가운데 사고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이는 실재적
존재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단지 지향적 존재 혹은 객체적 존재일 뿐이다. 즉, 보편자는 현실적으로 대상인 개념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그의 존재론적 논의가 관계에 관한 논의로 이어진다. 보편자와 마찬가지로 관계는 영혼의 활동성으로부터 실재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안현주는
안주영의 언니이다"에서 '언니'라는 관계항은 안현주 가운데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주영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는 것으로 이를 진술하는 이의 마음
속에 영혼의 활동성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아우레오리의 관계에 관한 논의는 근대 철학자인 로크(J. Locke)의 관계에 관한 논의로
이어진다. 로크는 "관계의 본성은 두 사물을 진술하고 비교하는 가운데 구성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사물의 실존 가운데 구성되어지지
않는다"라고 한다. 물론, 이 두 철학자의 연관에 관한 논의는 더욱 더 많은 논의를 요구하지만, 적어도 아우레오리와 로크가 이어지는 하나의
다리가 가능함을 알 수 있다. 로크뿐 아니라, 라이프니츠 역시 아우레오리와 어떤 다리가 가능 할 수 있다. 아우레오리는 중세 동안 많은
철학자들을 힘들게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짐, 즉 관계의 두 가지 정의 가운데 하나를 포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포기는 이후 근대 철학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아우레오리의 등장에 의하여 비-단원적 속성으로 관계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6.2 옥캄의 개념론에 따른 관계 이해
옥캄의 논의는 그의 보편자의 이론이 그렇듯이 생애 여정에 따라 변화를 가진다.
옥캄은 초기에 보편자는 하나의 상(fictum)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객체적 존재(esse obiectivum)로 등장한다. 아우레오리가
말했듯이 초기 옥캄은 보편자를 단지 대상으로 영혼 가운데 주어지는 상, 즉 객체적 존재로 이해한다. 그런데 후기 옥캄은 이러한 길을 달리한다.
이는 보편자가 영혼 가운데 주체적 존재(esse subjectivum)로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자에 관한 그의 존재론적 입장은 관계에 관한
입장과 맥을 같이 한다. 그의 이러한 입장 전환은 그렇기에 아우레오리의 그것과 구별되어질 수밖에 없다. 관계에 관한 옥캄의 논의도 유명론에서
개념론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보다 옥캄에게 관계에 관한 논의는 보다 더 복잡하다. 관계의 범주 가운데 항(terminus)은
구별되어지는 사물들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물을 의미하는 이름이다. 그러나 어떤 것에 의하여 말되어지는 것이지만, 절대적으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언니'나 '두 배'와 같은 관계항은 언니로 존재하는 이 가운데 그리고 이중으로 있는 것 가운데 있는 구별되어지는 실재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간단하게 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이름(명사, nomen)일 뿐이다. 이러한 '관계'라는 이름 혹은 개념은 어떤
사물을 의미하지 않고, 단지 이름과 개념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옥캄은 분명하게 '관계'와 '관계적인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 제이
지향(secunda intentio)의 개념으로 믿었다. 옥캄은 이러한 관계에 관한 논의를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한때 옥캄은
관계를 실재적으로 하나의 사물이며, 절대적 사물로부터 전적으로 구별되어진다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라 믿었다. 그러나 옥캄은 {논리학
대전}(Summa theologiae)에서 입장을 전환한다. 사실 옥캄의 시기에 대부분의 철학자는 관계를 실재적으로 관계되어지는 것으로부터
구별되어지는 사물로 보았다. 예를 들어, 스코투스 학파의 구성원들은 관계에 관한 실재론적 입장의 대표적 예가 되어준다. 물론, 이미 논의한
아우레오리와 샤톤과 같은 유명론적이고 개념론적인 해법을 가진 인물들도 있었다. 옥캄은 아우레오리와 같은 유명론적 사유에서 {논리학 대전}에
이러면서 개념론을 선보인다.
후기 옥캄의 개념론적 사유에서 관계는 단지 대상적으로 영혼 가운데 존재하는 '객체적 존재'로써가
아니라, 영혼 가운데 '주체적 존재'인 개념 혹은 이름으로 존재한다. 옥캄에 의하면, 실재론적 해법, 즉 관계의 실존은 부조리한 것이다.
왜냐하면, "안현주는 안주영의 언니이다"라고 할 때, '언니'가 어떤 실존을 가지는 것, 즉 안현주와 안주영이 아닌 제 삼의
것(tertium)이고, 이로 인하여 위 명제를 설명하는 것을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옥캄은 자신의 면도날도 필요 이상으로 실존이 가정된 관계를
단지 지성의 활동에 의하여 만들어진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언니'라는 것은 제 삼의 존재자에 의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현주는 동생을
가지는 또 다른 존재자가 존재하게 될 때, 언니라고 불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언니는 안현주 가운데 근거하는 하나의 실재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의 영혼 가운데 개념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분명 후기에 이르러 옥캄은 개념론자이지 유명론자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관계이론을 유명론이라 해석한 이들의 해석은 근거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막클레스필트의 논의에서
아버지가 아버지인 이유는 아들을 '생성함'이란 것에 근거를 가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관계는 근거를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근거가
되는 것은 실체의 우유 가운데 하나인 능동이며, 그렇기에 관계란 다른 우유들 혹은 범주들에 비하여 덜 실재적이다. 이러한 논의가 일반적인
실재론적 해법이다. 그러나 신학적 논의에 의해서도 이는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는 신의 절대적 권능에 어울리지 않는다. 신은 그의 절대적
권능에 의하여 근거 없이 이를 만들 수 있다. 또한 경제성의 원리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관계에 어떤 실재성을 부여하는 것은 필요 이상으로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옥캄은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명서 둔스 스코투스, 겐트의 헨리 등 다양한 철학자에 의한 관계에 관한 논의를 비판한다.
그 가운데 유명론적 논의도 포함된다. 보드리(L.Baudry)에 의하면, 아마도 Reportatio 2권 2질문에 등장하는 2번째 논박의 대상은
분명히 이름이 거론되지는 않으나 아우레오리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옥캄에게 모든 관계는 영혼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한편 그것은
영혼에 의존되어지지 않는 실재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안현주가 안주영의 자매이다"에서 자매라는 것은 영혼에 의한 탓이 아니다. 여기에서 옥캄은
자매라는 제 삼의 것으로 인하여 이 두 사람이 관계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 둘은 그들 자체에 의하여 관계되어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 둘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것에 의하여 안현주는 안주영의 자매인 것이다. 옥캄의 관점에서 관계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 사이의
차이는 사물들 사이의 것이 아니라, 개념 혹은 명사(이름) 사이에 있는 것이다. "안현주는 자매이다"라고 할 때, 이는 절대적 개념을 가지는
것이다. "안주영은 자매이다"라고 할 때, 이도 절대적 개념을 가지는 것이다. 이어서 "안현주와 안주영은 자매이다"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관계적 개념으로 포현되어질 수 있다. 즉, "안현주는 안주영의 자매이다"라고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이야기하는 경제성의 원리, 즉
면도날로 관계의 실재성을 도려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개념론의 일면을 관계의 문제로 확인할 수
있다.
7. 나가면서.
: 관계, 존재론적의 고유한 영역.
중세 철학의 논의는 옥캄 이후에도 이어진다. 예를 들어, 토마스
데 비오 카예탄(Thomas de Vio Cajetan)과 수아레즈(Suarez) 등이다. 카예탄은 토마스의 {존재자와 본질에 대하여}(de
ente et essentia)를 주해하면서, 관계의 본질은 '어떤 것에 대함'이며, 우유의 본질은 '내재'라고 한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우유는
주체에 의존한다고 한다. 카예탄에 의하면, 실체는 직접적으로 관계의 근거이다. 이렇게 토마스의 길을 따라간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로크 등에
이르면 유명론적 논의가 다시 전면에 등장한다. 현대의 어떤 연구가들은 라이프니츠의 관계에 관한 논의에서 아우레오리의 것과 어떤 연결점이 있음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렇게 관계에 관한 논의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 중세 철학자들을 걸쳐 근대 철학에로 이어진다. 이렇게 본다면, 관계는
존재론의 고유한 논의 대상으로 이어진 듯이 보인다.
카르낲(R.Carnap)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경험론자들은 성질, 모임, 관계, 수, 명제 등과 같은 임의의 종류의 추상실체들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약간의 의구심을 가진다. 흔히 그들은
(중세적인 뜻으로의) 실재론자에게서보다도 휠씬 더 유명론자에게 동조하고 있다. 가능하면, 그들은 추상실체에 대한 언급을 피하려 하고, 때때로
유명론적 언어라 불리는 것, 즉 그러한 언급을 포함하지 않은 것으로 그들 자신을 제한하려 한다" 적어도 위에서 진행된 논의를 두고 보면, 이러한
카르낲의 포현은 적당한 것이다. 중세의 실재론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 계열에 서 있었고, 이러한 논의 속에서 관계에 관한 esse in과 esse
ad이란 두 가지를 포기하지 않고, 부여잡았다. 또한 이러한 것은 삼위일체를 위한 수단이 되기도 했다. 성부과 성자와 같은 것은 다른 것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며, 그 주체 가운데 있다. 즉 esse ad이며 esse in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우유는 아니다. 신 가운데
우유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는 신의 본질 그 자체이다. 이렇게 우유란 요소만을 제거한다면, 이 두 논의는 삼위일체 가운데 하나의 대안이
되어지는 것이다. 하나의 주체 가운데 있으면서 (혹은 신의 경우 그 자체와 동일하면서) 다른 것에 대하여 서술되어진다는 이러한 관계의 존재성
혹은 실재성 긍정은 중세 실재론자들에게서 흔히 보여지는 것이다. 그리고 관계에 관한 두 가지 요소 가운데 하나를 제거한다는 것은 삼위일체론의
관점에서나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이란 관점에서나 적당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예를 들어, 길베르투스와 같이 말이다. 이러한 실재론 우위의
사고 속에 이슬람에서 발전한 '이성적 관계'과 개념론적 논의의 유입은 더욱 더 논의를 풍부하게 한다. 하지만 삼위일체 가운데 개념론적 논의는
타당하지 않았다. 성부라는 관계항은 개념적으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실재적으로 주체 가운데 혹은 그와 동일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슬람
철학자들에게는 삼위일체란 벽에 없었기에 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의 다양성은 아우레오리에 이르러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벗어나기에 이른다. 즉 실체-우유 존재론 속에서 관계를 이해하려 하지않은 것이다. 관계는 실재성을 가지지 않으며 단지 대상으로 영혼에
주어지는 하나의 상일 뿐인 것이다. 또 옥캄의 개념론이 실재론과 유명론의 논의를 사이에 두고 비판적으로 등장한다. 즉 관계란 실재도 아니고,
단지 대상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개념이란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 셀라스와 같은 이는 관계와 같은 것은 그저 순전한
단어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며, 반-실재론을 제시할 것이다. 그의 논의에서 토마스와 둔스 스코투스와 같은 이는 불합리한 것이다. 그러나 러셀과
같은 이는 셀라스에 비하여 중세 실재론자들과 할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관계에 관한 논의가 다분히 실재론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분명하게 단원적 속성으로 관계를 거부한다. 일반적으로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은 단원적 속성으로 관계를 거부한다.
관계는 분명 이와 같이 존재론의 고유한 영역이며, 이는 철학사를 두고 꾸준히 다루어져왔다. 그 가운데 중세는 특히 삼위일체와
신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에 관한 논의로 집중되어 다루어져왔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는 실재론과 유명론 그리고 개념론 나름으로 자신의 논리 속에서
이를 다루었다. 그리고 이를 필자는 위에서 고찰하였다. 이는 남은 것은 이들 사이의 보다 논리적 논쟁과 이러한 중세의 관계에 관한 논의가 현대
철학자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숙제를 남긴 채 여기에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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