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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세철학" 10호 (2005)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국문초록》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지주의자인가
일반적으로 우리는 토마스의 도덕 심리학과 관련하여 그를 지성이 의지를 조절한다는 의미에서 ‘주지주의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 대부분의 철학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일반적인 정의이다. 하지만 1920년대 이후 로땡의 연구와 함께 이러한 정의에 또 다른 해석이 등장하게 될 가능성이 등장하였다. 로땡은 1270년 이전의 토마스와 그 이후의 토마스를 구별한다. 이는 이전의 토마스가 다소 극단적 형태의 주지주의, 즉 의지의 수동성을 주장한다면, 이후의 토마스는 이와 달리 의지의 능동성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토마스의 입장 전환을 의지의 필연성에 대해 이루어진 1270년의 단죄라는 배경 속에서 제대로 이해되어진다고 한다. 이러한 로땡의 연구는 ꡔ신학대전ꡕ I과 I-II 사이에 일어나는 의지에 관한 입장의 차이를 이해하는 좋은 노선이 되었다.
이러한 로땡의 견해에서 전제되는 것은 1270년 이전 토마스는 주지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로땡 이외에도 여러 학자들에게 인정되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된 논의는 당연하게 1270년 이전은 주지주의이며,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이후 토마스의 입장 변화 유무(有無)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논의의 전제부터 다른 시각에서 새롭게 다루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1270년 이전 토마스를 주지주의자도 주의주의자도 아니며, 의지에 관한 명확한 상을 가지지 못했다고 해석할 것이다. 그러나 1270년 이후 이러한 혼돈된 형태는 1270년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의하여 의지의 자발성을 가진 것으로 정리된다고 해석할 것이다. 그러면서 1270년 이전의 혼돈된 형태에서 ‘실행의 주의주의’라는 형태로 나아감을 증명할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필자는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토마스의 주지주의로의 해석에 새로운 대안적 가능성을 논하고자 한다.
주제어 : 토마스 아퀴나스, 의지, 자유, 주지주의, 주의주의.
《영문초록》
Was Thomas Aquinas a Intellectualist?
Yu, Dae-Chil
It has been widely alleged that Thomas’ moral psychology is fundamentally intellectualist to the extent that the will’s activities are under the intellect’s control. However, in the late 1920s, Lottin offered an interpretation that differs from intellectualist interpretations by arguing that Thomas significantly changed his account of the will around the condemnation of 1270. According to Lottin’s interpretation, even though Thomas understood the will as a passive power in his earlier works, he gave the autonomy to the will in his later works written after 1270. This leads us to find adequate evidence for taking Thomas to be a voluntarist who propounds that the will, and not any other power, controls its own activities. This thesis aims to examine whether a voluntarist reading of Thomas can be well justified.
There is no doubt that he upheld freedom of the will in Question 6 of De malo. Nevertheless, we encounter with a difficulty when we look at the first part of Summa theologiae and De veritate written before 1270, in which he seemed to consider the will as a purely passive power. If that is the case, it is proper to raise questions of why Thomas intended to hold the two divergent accounts and of whether or not they are compatible in his fuller moral psychology.
When comtemporary commentators elaborate on Thomas’ account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will and the intellect, their interpretations diverge sharply. It is this relationship that I explore in this thesis. In particular, I examine a challenging interpretation that Thomas significantly changed his account of the relationship over the course of his career, that Thomas’ later works contains his fullest, most mature presentation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will and the intellect.
Keyword: Thomas Aquinas, Will, Freedom, Intellectualism, Voluntarism
주제어 : 토마스 아퀴나스, 의지, 자유, 주지주의, 주의주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지주의자인가?1)
유 대칠
(대구가톨릭대학교)
1. 들어가는 말
토마스가 생각하는 의지(voluntas)와 지성(intellectus)의 관계에 관한 일반적 논의는 흔히 주지주의(主知主義)라고 불리는 것으로 대표되어진다. 그리고 그 내용은 지성의 조절 가운데 의지의 능력이 놓여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적인 논의로 토마스가 이야기하는 의지와 지성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온전히 파악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1920년대 로땡(Lottin)의 연구 이후에 많은 토마스의 연구가들은 이러한 단순한 일반화에 대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면서 서서히 토마스의 의지가 단지 수동적 능력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독립적 지위에 따른 능동성을 가진다는 해석이 등장하게 되었다.2) 다시 말해, 토마스에 관한 주의주의적 해석의 가능성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1277년 무차별하게 진행된 단죄 가운데 토마스에게 주어진 의지의 수동성에 관한 단죄로부터 토마스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토마스가 이야기하는 이러한 의지의 문제는 ꡔ신학대전ꡕ(Summa theologiae) I 저술 기간과 I-II의 저술 기간 사이, 즉 1270년을 기점으로 그 내용의 차이를 보이는 것도 그가 이야기하는 의지에 관한 분석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 즉, 1270년 전(前)에 의지는 수동적이지만, 이후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3) 이러한 토마스의 의지에 관한 논의들은 찬반을 거듭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이 분류될 수 있다. 첫째, 1270년을 기점으로 토마스가 이야기하는 의지는 수동적인 것에서 능동적인 것이 되었다고 하는 로땡류의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에는 로너간(Lonergan)4)과 크루버탄츠(Klubertanz)5)와 같은 이들의 해석이 포함된다. 또한 최근에 와서는 키넌(Keenan) 등에 의하여 이어지고 있다.6) 둘째, 초기의 극단적인 주지주의를 토마스 자신이 1270년 이후 중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이어서 셋째는 라미레즈(Ramirez)와 같은 이들의 해석으로서, 이에 의하면 토마스가 행하는 1270년 이후의 입장은 단지 후기에 강하게 드러나는 아우구스티누스적 영향이라 한다.7) 또한 넷째는 라우어(Lauer)와 같은 이의 견해로서 토마스는 초지일관 주지주의적 입장에서 지성이 의지를 조절하는 위치에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8) 이러한 입장들의 근본적 논의의 전제는 토마스가 1270년 이후 어떤 변화를 가지는가하는 것이며, 이에 관한 해석의 차이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의 또 다른 전제는 적어도 1270년 이전에는 토마스가 주지주의적 모습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다분히 극단적인 형태로 말이다. 하지만 과연 토마스가 1270년 이전 극단적 주지주의 혹은 주지주의적인 것‘만’을 이야기했다고 할 수 있는가? 만일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부정을 나타낸다면, 로땡 이후 의지의 자발성과 관련된 연대기적 논의는 새롭게 다루어져야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토마스의 의지에 관한 기존 해석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 이후 이들이 전제하는 1270년 이전 토마스에 관한 해석의 타당성을 살피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토마스의 의지 자체에 관한 정의와 이에 관한 연대기적 논의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이다.
2. 1270년 이전과 이후에 관한 다양한 논의
로땡은 1270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의 작품과 이후의 작품을 대조한다. 그에 따르면, 1270년 이전에는 지성이 의지를 조절하는 것이며, 의지는 지성에 비해 수동적인 것이다. 한편 그 이후의 작품에선 의지의 자발성, 즉 능동성이 드러난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위하여 다루어지는 이전의 작품은 ꡔ신학대전ꡕ I와 ꡔ진리론ꡕ(De veritate) 그리고 ꡔ철학대전ꡕ(Summa contra gentiles) 등이다. 그리고 이후의 작품으로는 ꡔ신학대전ꡕ I-II과 ꡔ악론ꡕ(De malo) 질문 6을 든다. 그 가운데 특히 그가 주목하는 것은 ꡔ악론ꡕ 질문 6에 등장하는 논의이다. 그는 ꡔ악론ꡕ에 등장하는 여타 질문과 달리 질문 6은 1270년에 작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9) 그것은 그곳에 드러나는 논의와 그 논의를 통하여 논박하고자 하는 심리결정주의(determinisme psychologique)는 1270년이라는 배경 속에서 제대로 이해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10) 하지만 이러한 이유만으로 1270년을 기점으로 의지에 관한 생각의 변화를 설명하기에는 무엇인가가 부족하다. 그것은 1270년 이전의 저서에는 과연 그러한 논의가 드러나 있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로땡은 이에 관하여 이전 저서 속에선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필자가 여기에서 우선 다룰 것은 이러한 로땡류의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의지의 연대기적 논의이다.
로땡이 주시하는 ꡔ악론ꡕ 질문 6은 토마스의 의지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고전적 자리(locus classicus)에 있다.
일부 철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의지는 무엇인가를 선택함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움직여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의지가 강제되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모든 필연적인 행위가 강제되어지는 것은 아니며, 오직 외부로부터 시발점을 가지는 행위만 강제를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하다면, 일부 필연적 운동은 본성적이지만, 강제되는 행위는 그러한 것이 아닌데, 그러한 이유는 강제되는 행위는 의지적인 행위와 본성적인 행위에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원리는 그 안에 있는 것인데, 강제되는 행위는 그 이유가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와 같은 의견은 이단적인 것인데, 그 이유는 인간적 행위 가운데 벌과 상에 대한 근거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피할 수 없는 것으로 필연적으로 행하는 사람에 대하여 벌과 상을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철학 가운데 그 연고가 없는 의견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뿐인데, 그 이유는 신앙에 반대될 뿐 아니라, 도덕철학의 모든 원리를 전복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능력 가운데 아무 것도 없는 것이고, 필연적으로 의지에 의하여 움직여진다면, 숙고, 권고, 훈시, 벌, 찬미, 비난이 도덕철학에서 논의되는 것은 필요 없는 짓이다. 철학의 일부 원리를 파괴하는 종류에 대한 이러한 의견은 연고가 없는 상태이며, 자연학의 원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이다.11)
여기에서 토마스는 분명히 심리결정론자들에 관하여 강력한 비판을 행하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의 행위는 인간의 내적 원인에 의한 자발성에서 이루어져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고, 외부의 것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행해진다면, 이는 도덕 철학의 내용과 모순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스승인 알베르투스의 논의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알베르투스는 다음과 같이 인간 자유의 조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의지는 우리 가운데 자유롭다. 그리고 하나의 것에로 정해진 것이 아니며, 반대되는 것의 양자(兩者)에로 나아갈 수 있다.12)
이러한 의지에 관한 생각은 토마스에게도 이어진다. 토마스는 ꡔ악론ꡕ 질문 6에서 인간의 의지가 단지 하나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반대되는 두 경로의 선택 가능성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고 본다. 그로 인해 인간의 행위는 상과 벌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하나의 가능성으로 정해져 필연적으로 움직여지는 의지라면, 그러한 의지에 의해 행위 하는 인간에게 죄를 묻기는 어렵다는 것이다.13) 토마스는 이러한 의지가 무엇에로 필연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자발성을 가지며, 심지어 그러한 의지에 의하여 다른 모든 영혼의 능력이 현실력을 가진다고 한다. 아래의 문장을 읽어보자.
나는 의지하기 때문에 이해하며 그리고 비슷하게 나는 그것을 행하기를 의지하기 때문에 모든 나의 다른 힘과 습성적 상태를 사용한다.14)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우리가 의지함으로써 지성과 같은 영혼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물론, 그가 여기에서 의지가 영혼의 힘을 조절한다고 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게 이해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의지가 지성의 조절을 받지만, 그러한 지성을 실행하는 것은 의지라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위를 규정하는 대상의 부분으로부터 영혼이 가진 힘의 움직임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의미에서 움직임의 원리〔시발점〕는 지성로부터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식에 따르면 선을 이해하는 것이 의지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행위의 실행의 부분으로부터 영혼이 가진 힘의 움직임을 고려한다면, 움직임의 원리는 의지이다.15)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이후 다시 다룰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의지와 지성의 관계에서 단지 의지가 지성에 의하여 조절된다고 하는 것에 한정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적어도 ꡔ악론ꡕ 질문 6에서 토마스가 극단적 주지주의를 주장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면 이러한 ꡔ악론ꡕ 질문 6과 달리 ꡔ진리론ꡕ은 주지주의적 색채에 따라서 의지의 수동성만을 주장한다고 로땡은 해석한다. 이에 의하면, 토마스는 의지가 영혼의 한 능력인 지성에 의해 조절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지성이 의지에게 목적을 제시함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6) 그렇다면, 의지는 스스로 목적을 가질 수 없는 것인가? 이에 관하여 ꡔ진리론ꡕ의 또 다른 논의에선 의지는 지성을 앞서지 못하며, 지성에 의하여 움직인다고 한다.
의지는 직접적으로 지성적인 것을 선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혼의 본질상 그러하며, 지성적인 것은 선행된 것이다... 오직 지성은 본성상 의지에 우선되기에 원천의 질서가 알려진다.17)
이렇다면, 마치 의지는 지성에 종속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그것이 영혼의 본성에 충실한 것이라고도 보여진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그의 다른 초기 저작인 ꡔ명제집 주해ꡕ에서도 드러난다. 그곳에서 토마스는 의지의 행위인 의도(intentio)를 우선적으로 의지의 행위이지만, 그것은 지성의 질서 지워짐 가운데 놓여진 것이라고 한다.18) 그리고 ꡔ철학대전ꡕ에선 보다 강력하게 지성은 의지를 움직이는 것이며, 의지는 단지 우유에 의하여 지성을 움직인다고 한다.
움직임에 의하면, 의지가 지성보다 더 우월한 것이라는 다섯 번째 논의에서 제기된 것은 확실하게 거짓이다. 왜냐하면 우선적으로 그리고 그 자체에 의하여(primo et per se) 지성이 의지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즉 의지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선으로 파악된 자기의 대상에 의하여 움직여진다. 그런데 의지는 지성을 우유에 의하여 움직이며, 사고함은 그 자체가 선으로 파악되어지고, 그렇게 의지에 의하여 욕구되어지며, 이에 의하여 의지가 현실적으로 사고함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지성은 그 자체에 의하여 의지를 선행한다. 왜냐하면 의지는 우선 지성 그 자체가 선으로서 이해함을 파악하는 것 없이 결코 사고함을 욕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의지는 작용자가 움직이는 것이라고 불리어지는 방식에 의하여 그의 운동이 현실적으로 지성을 움직인다. 지성은 목적이 움직이는 방식에 의하여 의지를 선행한다. 왜냐하면 이해된 선이 의지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작용자는 운동함의 측면에서 목적보다 후에 온다. 왜냐하면, 작용자는 목적을 통하지 않고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단순히 지성은 의지보다 높으며, 다른 방식에선 우유적으로 그리고 어떤 측면에서 지성보다 높다고 이야기된다.19)
의지는 지성을 작용인으로 움직이며, 지성은 의지를 목적의 측면에서 움직인다. 그런데 목적이 있은 후에 작용인이 오기에 지성이 의지를 앞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성의 조절 가운데 의지를 둔다. 이는 다분히 주지주의적 논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근거에서 로땡은 초기의 저작들은 의지의 수동성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하며, 이를 1270년 이후의 것과 구별시킨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것이 ꡔ악론ꡕ 질문6과는 상당한 차이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로땡의 해석은 라우어와 같은 이의 비난을 받는다. 라우어는 토마스의 문헌을 전체적으로 해석할 경우 토마스가 줄곧 주지주의를 주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결코 1270년을 기점으로 그의 의지에 관한 생각이 변화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라우어의 입장은 의지의 자발적 능력을 주장하는 ꡔ악론ꡕ 질문 6과 같은 저서에 의하여 논박되며, 또한 실제로 그렇게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듯 하다. 오히려 로땡의 해석은 로너간에 의해 다시 채택된다. 그는 후기에 토마스는 ‘의지의 자유’(libertas voluntatis)를 주장한 인물이며, 이는 1270년 이전의 것과 확연히 구분된다고 하면서 로땡의 해석에 힘을 더한다.20) 그리고 크루버탄츠는 이러한 로땡과 로너간의 해결책이 토마스의 초기 ꡔ명제집 주해ꡕ와 1270년 이후 ꡔ신학대전ꡕ II가 가지는 중요한 사상적 발전을 해결한 것이라고 하며, 로너간에 이어 다시 이와 같은 해석에 힘을 더한다.21) 그리고 사실 이는 토마스의 의지에 관한 연구의 중요한 전환점을 제시하였다는 것을 대체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22)
3. 로땡식 해석의 타당성
그렇다면, 이러한 로땡식 해석은 진정 타당한 것인가? 필자가 로땡을 논박하는 출발점은 그가 이해하는 1270년 이전 토마스에 관한 해석이다. 로땡은 1270년 이전 ꡔ진리론ꡕ등에서는 ꡔ악론ꡕ 질문 6에서 보여지는 것이 찾아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 무엇이 보이지 않다는 것인가? ꡔ악론ꡕ 질문 6과 ꡔ신학대전ꡕ II에서 보여지는 '행위의 실행'에선 의지가 우선되며, '행위의 규정'에선 지성이 우선된다는 논리가 1270년 이전 초기이론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23) 그러나 필자는 1270년 이전에도 의지에 관한 수동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능동성도 보인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그러면 초기에 의지는 수동적이며, 후기에는 능동적이라는 일반적인 해석이 초기에도 의지가 능동적 요소를 가짐을 보임으로 자연스레 재고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초기의 이론이 의지의 수동성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하려는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필자의 해석은 초기의 토마스는 아직 의지에 관한 온전한 상을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의지의 수동성과 능동성에 관련된 주지주의적이며 주의주의적인 것이 정돈된 것이 아니라 혼돈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혼돈이 주지주의로 해석될 가능성을 강하게 부각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하여 1270년 이후에 토마스는 의지에 관하여 초기에 비하여 다분히 정리된 형태를 보인 것으로 필자는 해석하려 한다.
토마스는 초기의 저작들에서 이미 위에서 살핀바와 같이 주지주의적 논의를 전개하였다. 하지만, 그는 지성과 의지 가운데 어느 것을 행위의 원인, 즉 상과 벌의 원인이라 여겼겠는가? 만일 지성이 의지를 조절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그 원인은 지성이 되어야한다. 토마스는 ꡔ신학대전ꡕ I-II에서 의지가 목적을 향하는 행위의 자발적 현실력으로 의도(intentio)를 정의하지만, 반면, 초기 저작인 ꡔ명제집 주해ꡕ에서는 의지의 고유한 현실력만이 아니라, 지성에 의하여 질서 지워진 것이라고 달리 정의한다.24) 이에 의하면 의지의 고유한 목적도 지성에 의하여 주어진다고 해야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위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죄의 원인을 의지라고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지성이 되어야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토마스는 분명히 1270년 이전 초기의 저작에서 죄의 원인을 전적으로 의지에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해, 죄의 주체, 즉 악한 행위의 주체는 의지라고 했다.25) 그런데 같은 저작인 ꡔ명제집 주해ꡕ의 다른 논의에선 자유의 원인은 지성적 본성이라고 정의한다.26) 과연 이 두 가지 논의가 조화될 수 있는 것인가? 그는 죄의 주체가 의지인 까닭을 다음과 같이 저술한다.
만일 의지의 명령 아래에 놓여진 것이 아니라면, 다른 능력의 행위는 죄의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죄의 제일 주체는 의지라고 할 것이다.27)
그리고 이러한 논의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의지와 자유 결단의 명령에 의하여 자기 행위 가운데 다른 능력이 움직여진다. 그러므로 움직여지는 것을 명령하는 것이기에 욕구 하는 능력은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 불린다.28)
여기에서 의지는 인간의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이로 인하여 죄의 원인은 의지가 된다. 그런데 이미 논의하였듯이 토마스는 지성이 의지를 움직이는 것이라고 같은 저서에서 분명히 정의했다. 이렇게 초기 저작인 ꡔ명제집 주해ꡕ 가운데 의지는 다분히 혼돈된 모습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다른 저서들에도 마찬가지다. 같은 초기 저작인 ꡔ권능론ꡕ에선 더욱 더 의지에 관하여 혼돈된 모습을 보인다.
의지는 사고되는 어떤 것에로 지성을 움직인다. 그렇지만, 의지는 선이해(preintellectum) 없이 어떤 것을 의지할 수 없다... 지성은 본성적으로 의지의 명령 없이 어떤 것을 사고하지 않는다.29)
그렇다면, 로땡이 이야기하듯이 초기의 의지가 단지 수동적이며, 의지와 지성의 관계가 온전하게 지성에 우월성으로 설명될 수만은 없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의지와 관련된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도 이러한 혼란스러움을 볼 수 있다. 그는 의지의 행위를 통해 결단(arbitrium)을 이야기한다. 즉, '의지의 결단'(arbitrium voluntatis)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중세적 전통에서 결단은 분명 지성의 행위로 이해되어진다.30) 심지어 ꡔ베르첼렌에게 보내는 서신ꡕ에서 토마스는 지성과 의지는 구별되지 못한다고 하며, 지성은 결코 의지의 주제 없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31) 이상의 논의로 볼 때, 1270년 이전 토마스가 가진 의지에 관한 논리가 그저 주지주의적 관점에서 의지가 지성의 조절 가운데 있고, 단지 수동적인 것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필자는 크레츠만(N. Kretzmann)의 해석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는 지금 행하는 논의에 또 다른 견해를 제시해 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크레츠만은 진정 자유에 관한 문제를 의지의 문제라고 본다.32) 그러면서 그는 의지에서 자유의 근거를 찾으려 한다. 그는 지성이 의지에 선(善)을 제시하지만, 그보다 의지가 지성을 움직인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리고 이러한 의지의 자발성을 크레츠만은 ‘자기-지시’(self-directed)라고 한다.33) 이러한 논의는 스툼프(E. Stump)에게도 이어진다. 그녀는 크레츠만과 같이 토마스가 ꡔ신학대전ꡕ I34) 등에서 주장하는 의지가 성장혼을 제외한 모든 영혼의 능력에 명령한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것은 다른 영혼의 능력은 개별적 선을 향하지만, 의지는 선 그 자체, 즉, 보편적 선을 향하기 때문에, 다른 영혼의 능력에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보편적 선을 향하는 것이 있어야 만이 개별적 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35) 맥도널드(S.MacDonald)는 토마스의 인간 행위에 관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근거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의지, 즉 욕구는 인간 행위 배후의 인과적 능력이라 하고, 토마스 역시 이러한 것이라 한다. 그러면서 맥도널드는 크레츠만이 이야기하는 의지의 자발성에 관한 해석에 힘을 더한다.36)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크레츠만의 해석이 로땡이 전거로 삼는 ꡔ신학대전ꡕ I에 근거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크레츠만이 지적하는 ꡔ신학대전ꡕ I만이 아니라, ꡔ명제집 주해ꡕ나 ꡔ권능론ꡕ 등에도 의지가 다른 영혼의 능력을 움직이는 것으로 정의되어진다. 그렇다면, 과연 로땡이 이야기하는 1270년을 기점으로 의지의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변천되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 이에 관하여 필자는 1270년 이전의 의지는 단지 수동성인 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혼돈된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때로는 의지의 자발성, 즉 능동성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필자는 분명히 1270년 이전의 것을 의지의 능동성이라고 주장할 맘은 없다. 다만, 혼돈된 형태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혼돈 가운데 의지에 관한 논의는 꾸준히 의지가 영혼의 생장혼을 제외한 다른 ‘모든’ 능력을 움직이며, 동시에 지성에 의하여 움직여진다는 것이다. 이는 혼돈된 형태이다. 그러면 왜 이러한 혼돈이 존재하는 것인가? 그것은 토마스 자신이 의지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에 목적을 두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리하여 그 자신은 주지주의니 주의주의니 하는 것에 자신을 규정하는 것에 관심이 없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1270년 이후 심리결정론자들이라는 논박의 대상이 생기면서 의지에 관하여 보다 확연한 정의를 시대로부터 요청 받았으며, 또한 이로 인하여 스스로의 입장을 가지게 된 것이라 여겨진다.
4. 의지의 자발성과 지성과의 관계
필자는 1270년 이전 토마스가 가졌던 의지에 관한 생각이 한 가지 논리로 묶기 어려운 혼란 속에 있다고 규정했다. 그러한 혼란 가운데 의지는 영혼의 다른 능력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며, 또한 영혼의 한 능력인 지성에 의하여 움직인다는 두 가지 상으로 공존했다. 또한 악한 행위, 즉 죄의 주체는 의지라고 하면서, 한편으론 자유 행위의 주체는 지성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의지는 ‘분명한 하나의 상’없이 혼돈된 상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1270년 이후 저서들인 ꡔ악론ꡕ 질문6이나 ꡔ신학대전ꡕ I-II 그리고 ꡔ윤리학 주해ꡕ에선 보다 논리적이고 정돈된 의지에 관한 상을 보여준다. ꡔ윤리학 주해ꡕ에서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행위의 시발점이라고 한 선택(electio)을 분석한다. 그러면서 선택은 근본적으로 지성의 몫이 아니라, 의지의 몫이라 한다. 이를 위해 토마스는 의지의 대상과 지성의 대상을 분리한다. 의지의 대상은 선(善)이며, 지성의 대상은 진(眞)이다.37) 그리고 선택의 대상은 진이 아니라, 선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선택’이란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그리고 토마스에게도 행위의 시발점이라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한다.38) 선택이 의지의 몫이라면, 행위의 시발점 역시 의지의 몫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말이다. 그는 이미 초기 저작에서부터 의지의 대상과 지성의 대상을 구분하였다.39) 그러나 그는 진, 즉 가지적 대상이 의지의 대상인 선 보다 앞선다고 주장하였다.40) 하지만, 맥도널드의 주장과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선 의지하기에 행동하는 것이 근본 전제이며,41) 이는 ꡔ영혼론ꡕ에서 욕구의 대상, 즉 의지되어지는 것이 행위의 진정한 시발점(principium)이라고 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42) 그렇다면, 인간의 행위는 선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이고, 이러한 선과 관계하는 인간 영혼의 능력은 ‘바랄 수 있음’이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의지와 관련된다. 이러한 논리 속에서 토마스는 초기 그가 혼돈되게 주장한 의지의 자발성과 관련된 논의에 새로움을 보여주는 논의를 전개한다.
의지의 대상인 목적의 근거로 인해 다른 힘을 움직이는 것은 의지에 속한다. 즉 이미 진술하였듯이, 이러한 방식에 의하면 가지적인 것(intelligible) 가운데 원리(principium)가 있듯이, 가욕적인 것(appetibile) 가운데 목적(finis)이 있다. 또한 〔행위의〕 결과를 인식함에 있어서 그 자체로 가능태〔능력〕에서 현실태〔현실력〕로서 귀결하는 원리를 인식하는 것을 통한 것은 지성임이 명백하다. 그리고 그와 유사하게 목적을 욕구 하는 한에서 의지는 그 자체로 목적을 의지하는 것을 통하여 목적을 향한 것을 의지하는 것에로 움직인다.43)
여기에서 토마스는 가지적인 것, 즉 ‘진’에서 행위의 시발점을 찾고, 가욕적인 것, 즉 ‘선’에서 행위의 목적을 구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가 행위의 목적인 선 그 자체를 지성의 몫이 아닌 의지의 몫으로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즉 토마스는 의지가 향하는 고유한 현실력이 궁극적 선을 향한 의도(intentio)라고 하는 것이다.44) 그런데 필자는 여기에서 초기 그가 의도를 지성에 의하여 ‘질서 잡힌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려 한다.45) 그러한 초기 견해에 따르면 행위의 목적은 지성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행위의 목적은 선이며, 이는 의지의 몫이기에 후기에 이르러 토마스는 이를 의지의 고유 행위라고 단언한다. 초기 ꡔ철학대전ꡕ에서 토마스는 의지가 본성적으로 지성에 의하여 움직여지며, 단지 우유적으로만 지성을 움직인다고 한 것에서 논리적으로 떠나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러한 방법에 의하면 의지는 ‘지성에 의하여’ 그리고 ‘그 자체에 의하여’ 움직여진다. 지성에 의하면 대상의 근거에 의하여 움직인다. 그리고 그 자체에 의하여 행위의 실행에 따라서 목적의 근거에 따라 움직인다.46)
분명 여기에서 토마스는 의지가 ‘그 자체’로 움직인다고 한다. 그리고 의지는 목적을 의도하며, 이와 동시에 그 자체로 움직인다. 또한 의지는 단지 그러한 궁극 목적을 이룰 대상 혹은 수단을 부여받는다는 측면에서 지성에 의하여 움직여질 뿐이다. 이러한 것은 목적을 부여받음으로 움직인다는 초기의 견해와 분명한 차이를 가진다. 이는 이미 ꡔ악론ꡕ 질문6을 논의하며 필자가 소개한 것이다. 크레츠만의 해석은 토마스 자신에게서 더욱 더 분명히 드러난다. 토마스는 의지가 보편적 선을 의도하여, 지성은 그러한 보편적 선 가운데 개별적 선을 판단한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개별적 선 가운데 진이 있다고 한다.
의지는 행위의 실행에 의하여 지성을 움직인다. 왜냐하면 지성의 완전성인 그 진(眞) 그 자체는 개별적인 선으로서 보편 선에 포함되기 때문이다.47)
그렇다면 초기 저작들에서 보여지는 ‘진’이 ‘선’을 앞선다는 것도 재고되어야한다. 왜냐하면 의지가 의도하는 보편적 선이 없이는 개별적 선으로 진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ꡔ악론ꡕ 질문 6의 논의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의지가 목적을 향하고, 지성이 그러한 목적에 적당한 선, 즉 진정한 선을 판단함으로써 자유 결단에 의하여 행위가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그가 의지를 죄의 원인이며 주체라고 한 것이 논리적으로 온전히 이해 될 것이다.48) 그렇다고 토마스가 지성은 의지에 의하여 목적을 부여받음으로만 움직이는 것으로 의지에 비해 수동적인 것이라 주장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여기에서 행위의 실행, 즉 현실화의 측면에 있어서 의지가 지성을 앞서지만, 어떤 행위로 규정된다는 점에선 지성이 의지를 앞선다고 하기 때문이다. 의지는 자신이 의도하는 선을 위하여 지성의 조력이 필요하며, 지성은 이렇게 의지에 조력함으로써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49) 그리하여 그는 엄밀하게 지성이나 의지 하나만의 우월성 속에서 인간의 행위를 분석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논리를 전개한다.
자유의 근거는 주체로서 의지이다. 그러나 그것의 원인은 이성이다. 왜냐하면 의지는 자유롭게 다양한 대상을 지향하지만, 이성이 선에 관한 다양한 개념을 가질 수 있음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자유 결단은 이성에 의하여 일어난 자유 결단인 것으로 자유의 원인은 이성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50)
여기에서 자유의 주체는 의지이며, 원인은 이성 혹은 지성이다. 의지가 의도를 통하여 보편적 선을 지향함으로써 행위의 주체이지만, 이러한 보편적 선 가운데 지성의 판단의 자유를 통하여 인간 행위가 자유를 누리기에 말이다. 이러한 토마스의 의지에 관한 1270년 이후의 모습은 초기의 것에 비하여 상당히 정리된 듯한 느낌이 든다. 또한 이는 로땡이 이야기하듯이 의지의 자발성 혹은 능동성의 영역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5.0 주의주의적 해석 가능성
하우제(J. Hause)는 자신의 논문에서 주의주의와 주지주의를 정의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주지주의는 넓은 의미에서 영혼의 다른 능력에 비하여 지성이 우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지가 지성에 종속된다는 것을 내용으로 가진다. 그리고 주의주의는 영혼의 다른 능력에 비하여 의지가 우월하며, 엄밀한 의미에선 의지가 영혼의 다른 능력을 조절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51) 또한 주의주의는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진다. 그것은 의지가 영혼의 다른 것에 규정되지 않고, 의지가 행위의 양자 택일 가운데 하나를 고른다는 ‘규정의 주의주의’(Voluntarism of specification)와 단지 실행과 관련된다는 ‘실행의 주의주의’(Voluntarism of exericise)이다.52) 어윈(T.Irwin)이나 도나간(A.Donagan) 그리고 웨스트버그(D.Westberg) 등과 토마스 사후 옥스퍼드의 서툰(Thomas Sutton)이나 트리벳(Thomas Trivet)과 같은 이들은 전통적인 입장에서 토마스에 관한 주지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위의 논의를 통하여 필자는 토마스가 주지주의와 주의주의 양자 가운데 하나로 묶이기 힘든 것이며, 굳이 묶어보자면, 실행의 주의주의일 가능성을 보이고자했다. 비록 그가 극단적인 주의주의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의지가 다른 모든 영혼을 움직인다고 주장한 것은 초기에도 후기에도 공통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보니 켄트(B. Kent) 역시 토마스를 극단적 주의주의자로 볼 수는 없으며, 주지주의의 모습을 가지지만, 그것만으로 묶을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를 ‘실행의 주의주의자’로 해석한다.53) 필자 역시 이러한 켄트의 해석이 상당한 문헌적 근거를 가지는 것이라 인정하고자 한다. 초기 ꡔ신학대전ꡕ I 등에서도 토마스는 분명히 의지가 다른 영혼의 모든 능력을 움직인다고 했다.54) 그리고 후기에는 말할 것도 없이 그러하다.55) 하지만 초기에 토마스는 의지가 영혼의 다른 모든 것을 움직이지만, 그 목적인 선 그 자체를 지성에 의하여 부여받음으로 움직인다고 했고, 후기에는 지성은 의지에 의하여 주어진 보편적 선 가운데 행위로 실행될 현실적 행위의 모습인 목적을 향한 수단을 판단한다고 했다. 그 후 토마스는 후기 저서인 ꡔ윤리학 주해ꡕ에서 지성과 의지는 그것이 관계하는 대상의 차이로 인하여 다르다고 했다.56) 하지만 초기 토마스의 견해는 지성이 의지의 대상인 선을 이해함으로써 의지를 움직인다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선이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바래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초기 토마스의 지성에 관한 우월적 사고는 의지의 영역을 넘어오는 월권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지성의 월권’은 1270년 이후에 이르러 지성과 의지의 몫을 분명히 구분함으로써 해소된다. 후기에 토마스는 더 이상 선 그 자체를 향하여 나아는 의지의 고유한 현실력인 ‘의도’를 지성에 의하여 질서 잡힌 의지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의도를 의지의 고유한 영역으로 두며, 의도에 의하여 주어진 보편적 선 가운데 지성이 개별적 선을 판단함으로 현실적 행위가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실행의 주의주의를 완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토마스가 ꡔ신학대전ꡕ I-II에서 이야기하듯이 자유로운 행위의 주체는 의지이지만, 그러한 행위의 원인은 지성이 되는 것이다.57) 이렇게 초기 지성의 월권에 의하여 일어난 의지에 관한 혼돈된 개념이 정리되는 것이다.
6. 맺는 말
로땡 이후 최근 키넌이나 웨스트버그에 이르기까지 많은 해석가들이 1270년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그의 의지에 관한 생각의 변화를 논하였다. 혹은 라우어와 어윈과58) 같은 이들은 이러한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토마스를 주지주의자로 해석하고 있다. 후자에 관하여 필자는 토마스가 주지주의나 주의주의 어디에도 확연히 포함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 후, 의지가 지성에 의하여 규정되지만, 행위의 실행에선 의지가 앞선다는 실행의 주의주의를 내세워 해석함으로 거부하였다. 그리고 전자의 경우 필자는 그 논의의 시작인 의지에 관한 논의를 연대기적 논의에 따라 1270년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여 다루었다. 그리고 이 두 시기 모두 실행의 주의주의로 해석될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다만 초기에는 지성이 월권을 행사할 뿐이며, 후기에 이르러 지성과 의지가 지성의 월권 없이 논리적으로 다루어짐으로 실행의 주의주의를 완성하고 있다고 정의하였다. 그렇다면, 논의의 근거가 되는 1270년 이전 의지는 수동적이며, 이후 의지는 능동적이라는 것은 충분한 것이 아니라 여겨진다. 초기에도 토마스는 의지에 관하여 많은 부분 능동성을 인정하고 있다. 로땡류의 해석이 이야기하듯이 그렇게 초기에는 그러한 논의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렇기에 결국 논의의 근거는 의지의 수동성과 능동성이 아니라, 지성의 월권에 있어야한다고 여겨진다. 1270년 이전 의지가 수동적으로‘만’ 해석되어질 많은 요소를 가지는 것은 지성의 월권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이후의 것은 그러한 월권이 논리적으로 사라짐으로 얻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성의 월권이 사라진 역사적 배경은 1270년에 일어난 단죄와 심리결정주의에 관한 토마스의 논리적 논박에 있다고 여겨진다. 그는 논박을 위하여 자신이 가진 초기 혼돈된 의지에 관한 논의와 그러한 혼돈함을 야기하는 지성의 월권을 정리해야했을 것이다.
결론을 지어보자. 웨스트버그의 논문 “Did Aquinas Change his Mind about the Will?”의 제목은 연대기적 논의의 요점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필자는 초기에도 후기에도 그 강도의 차이는 가지지만 실행의 주의주의로 보여질 요소를 가진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초기의 것이 고티에(R.Gauthier)가 이야기하듯이 극단적 주지주의나 로땡이 이야기하듯이 의지의 수동성만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까닭은 지성의 월권으로 인한 것이며, 후기에 이러한 것이 해소되는 것도 지성의 월권이 정리됨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지의 수동성과 능동성과 관련된 연대기적 변화의 논의는 의지 자체의 변화보다는 지성에 관한 토마스의 생각이 변화한 것에 달린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기에 문제는 ‘의지가 변화하였는가’를 다루는 것보다 차라리 ‘의지에 관한 지성의 영향력이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를 다루는 것이 더 근본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필자는 지성이 의지에 행하는 영향력이 초기에는 다소 월권을 가지며, 후기는 이것이 정리됨으로 초기에 가진 의지에 관한 논의가 후기에 더 논리적으로 분명해진 것이라 결론짓는다. 이렇게 지성이 의지에 행하는 영향력의 변화가 의지에 관한 생각의 변화처럼 보일 뿐, 지성과 상관없이 의지에 관한 생각만이 변화함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닌 듯이 보인다. 분명 초기의 혼돈함에서 지성의 월권만이 정리되면, 후기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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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에 사용된 약호는 다음과 같다. 우선 토마스의 저서로는 Quaestiones disputate de malo (Marietti) = QDM; Summa Theologiae (Ottawa) = ST; Scriptum super libros Sententiarum (Busa) = In Sent; Summa Contra Gentiles (Marietti) = SCG; Quaestiones disputate de veritate (Marietti) = QDV; In arisitotelis ethicorum expositio (Marietti) = In NE; De principiis naturae (Marietti) = DPN;. Nichomachean Ethics = NE 그리고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의 저서로는 Super ethica, commentum et quaestiones (Monasterii Westfalorum in aedibus Ascendorff) = Ethica I이라 표기한다.
2) O. Lottin, "La date de la Question Disputatee De Malo de Saint Thomas d'Aquin" Revue d'histoire ecclesiatique 24(1928), pp.372-388; Th. Belmans, "Le voluntarisme de saint Thomas d'Aquin" Revue Thomiste 85(1985). pp.182-196.
3) J. Flannery, Act Amid Precepts (Washington D.C.: CUA, 2001), p.112.
4) B. Lonergan, "St. Thomas' Thought on gratia operans" Theological Studies 3(1942). pp.533-578.
5) G. Klubertanz, "The Unity of Human Activity" The Modern Schoolman 27(1950). pp.78-103.
6) J. Keenan, Goodness and Rightness in Thomas Aquinas's Summa Theologiae (Washington D.C.: Georgetown University Press, 1992), pp.38-56.
7) 와이스헤이플, 『토마스 아퀴나스 수사』, 이재룡 옮김 (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998), 392쪽.
8) R. Z. Lauer, "St. Thomas's Theory of Intellectual Causality in Election" New Scolasticism 28(1954), pp.297-319; J. Westberg, "Did Aquinas Change his Mind about the Will" Thomist 58(1994), p.45.
9) 와이스헤이플, ꡔ토마스 아퀴나스 수사ꡕ, 543쪽, 546쪽. 로땡 이후 많은 이들이 ꡔ악론ꡕ 질문 6을 1270년의 작품으로 인정하고 있다.
10) R. Hissette, Enquete sur les 219 article condamnés à Paris le 7 Mars 1277 (Louvain-Paris ; Pulications Universitaires-Béatrice-Nauwelaerts), p.51. 1270년경 중세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신의 행위와 강제의 필연성 사이가 결코 조화되지 않음을 주장하였고, 이것이 후에 의지의 자유를 강조하는 주의주의적 학풍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시대상은 1270년 의지는 외부의 강제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행위한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하여 의지가 필연적으로 움직여진다는 심리 결정주의에 관한 거부에서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심리 결정주의는 당시 우주 영원성과 지성단일성과 함께 주된 논의 대상이었다.
11) QDM., q.6, a.1, c.a ; responsio. dicendum quod quidam posuerunt quod uoluntas hominis ex necessitate mouetur ad aliquid eligendum. nec tamen ponebant quod uoluntas cogeretur set : non enim omne necessarium est uiolentum, set solum illud cuius principium est extra. unde et motus naturales inueniuntur aliqui necessarii, non tamen uilenti : uiolentum enim repugnat naturali sicut et uoluntario, quia utriusque principium est intra, uiolenti autem principium est extra.
hec autem opinio est heretica. tollit enim rationem meriti et demeriti in humanis actibus : non enim uidetur esse meritorium uel demeritorium quod aliquis sic ex necessatite agit quod uitare non possit.
est etiam annumeranda inter extraneas philosophie opiniones, quia non solum sed contrariatur fidei, set subuertit omnia principia philosophie moralis. si enim non sit aliquid in nobis, set ex necessitate mouemur ad uolendum, tollitur deliberatio, exhortatio, preceptum, et punitio et laus et uituperium, circa que moralis philosophia consistit. huiusmodi autem opiniones que destruunt principia alicuius partis philosophie dicuntur positiones extranee ; sicut nichil moueri, quod destruit principia scientie naturalis.
12) Ethica I, L,3, l.6, p.170. 16.
13) 신창석, 「인간의 운명, 숙명인가 자유인가?」 ꡔ인문과학연구ꡕ (대구: 대구가톨릭대학교 인문과학 연구소, 1998), 85-94쪽; 장욱, 「왜 토마스 아퀴나스인가? - 윤리학」 ꡔ중세철학ꡕ 7권(2001), 95-178쪽.
14) QDM., q.6, a.1, c.a ; intelligo enim quia uolo, et similiter utor omnibus potentiis et habitibus quia uolo.
15) Ibid, q.6, a.1, c.a ; si ergo consideremus motu, potentiarum anime ex parte obiecti specificantis actum, primum principium motionis est ex intelletu ; hoc enim modo bonum intellectum mouet etiam ipsam uoluntatem. si autem consideremus motis potentiarum anime ex parte exercitii actus, sic principium motionis est ex uoluntate. 이와 같은 논의는 후에 다루어질 것으로 그에 관한 실행의 주의주의로의 해석에 가능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다.
16) QDV., q.22, a.12, ad 3.
17) Ibid, q.22, a.11, ad 6.
18) In Sent., d.38, q.1, a.3, c.a.에서의 논의는 후에 의도가 의지의 고유한 몫이라고 하는 ST., I-II, q.12, a.1과 대조하여 읽을 수 있겠다.
19) SCG., III, c.26, n.21.
20) B. Lonergan, "St. Thomas' Thought on gratia operans", p.534.
21) G. Klubertanz, "The Unity of Human Activity", p.94.
22) M. Wittmann, Die Ethik des HL. Thomas von Aquin (Muenchen: Maxhueber, 1962), SS.4-5.
23) O. Lottin, "La theorie du libre arbitre depuis S.Anselme jusqu'a S.Thomas d'Aquin. Saint-Maximin" Revue thomiste 34(1929), p.153.
24) In II Sent., d.38, q.1, a.3, c.a.
25) Ibid, d.41, q.2, a.2, c.a.
26) Ibid, d.25, q.1, a.4, ad 3.
27) Ibid, d.41, q.2, a.2, ad 3.
28) Ibid, d.25, q.1, a.3, c.a.
29) QDP., q.10, a.4, ad 17.
30) 결단(arbitrium)은 교부 이후 중세적 전통에 의하며, 지성의 행위로 이해되어졌다. 예를 들어, 성 빅또르 위고(Hugo of St. Victor)와 안셀무스(Anselmus) 그리고 포와티에의 페르투스(Peter of Poitiers) 등이 그렇게 정의한다. 특히 포와티에의 페트루스는 그의 저서에서 “자유(liberum)는 의지와 관련되어진다. 의지는 참으로 자유롭다. 그리고 인식함은 그럴 수 없다. 그러므로 의지는 필연성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리고 결단은 참으로 이성(혹은 지성)과 관련된다”고 정의한다.(PL.211, 1031c) 그리고 성 빅또르 위고 역시 그의 저서에서 “자유 결단은 두 가지 가운데 구성되어지며, 이는 의지와 이성이다. 그리고 확실하게 자유는 의지와 관련되어 이야기되어지고, 결단은 이성과 관련되어 이야기되어진다”고 한다.(PL.176, 101c) 이러한 중세적 전통에 의하면 결단은 지성의 행위이다. 그런데 토마스는 ꡔ권능론ꡕ에서 ‘의지의 결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매우 독특한 표현이다. 하지만 결단은 궁극적으로 지성의 몫이다. 이는 토마스 역시 인정하는 바이다.(ST., I-II, q.1, a.1; QDV., q.24, a.5, ad 1.) 그렇기에 liberum arbitrium을 영어로 free will, 즉 우리말로 자유 의지나 free choice 우리말로 자유 선택으로 번역하는 것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그리하여 케니(A. Kenny)와 보니 켄트(Bonnie Kent)와 같은 이들은 이러한 번역, 즉 liberum arbitrium을 자유 의지라고 하지 않고, 영어로 free decision이라는 번역어를 선택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서 본문은 liberum arbitrium을 자유 결단이라 옮긴다. 케니, ꡔ아퀴나스의 심리철학ꡕ, 이재룡 옮김 (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999), 105쪽; B. Kent, Virtues of the Will (Washington D.C.: CUA, 1995), p.98; J. Kolorec, "Free Will and Free Choice", In The Cambridge History of Later Medieval Philosophy, ed. N. Kretzmann et al.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p.630.
31) Responsio ad lectorem vercellensem de articulis 108, q.22.
32) N. Kretzmann, "Goodness, Knowledge and Indeterminacy in the Philosophy of Thomas Aquinas" The Journal of Philosophy 80(1983), p.362.
33) E., Stump, N. Kretzmann, "Absolute Simplicity", Faith and Philosophy 2(1985), p.360.
34) ST., I, q.83, a.4, c.a.
35) E. Stump, "Wisdom", In Aquinas's Moral Theory, ed. S. MacDonald et al. (Ithaca-London: Cornell University Press, 1998), p.33.
36) S. MacDonald, "Practical Reasoning and Reasons - Explanation", In Aquinas's Moral Theory, pp.133-160.
37) In NE., L.6, l.2, n.1137.
38) NE., VI, c.3, 1139a 32-34.
39) In II Sent., d.25, q.1, a.2, c.a.; ST, I, q.5, a.4, c.a.
40) QDV., q.24, a.1, c.a.
41) S. MacDonald, "Practical Reasoning and Reasons - Explanation", pp.133-160.
42) DA., III, c.10, 433a 15-20.
43) ST., I-II, q.9, a.3, c.a : Respondeo dicendum quod, sicut supra dictum est, ad voluntatem pertinet movere alias potentias ex ratione finis, qui est voluntatis obiectum. sed sicut dictum est, hoc modo se habet finis in appetibilibus, sicut principium in intelligibilibus. manifestum est autem quod intelletus per hoc quod cognoscit principium reducit seipsum de potentia in actum, quantum ad cognitionem conclusionum : et hoc modo movet seipsum. et similiter voluntas per hoc quod vult finem, movet seipsam ad volendum ea quae sunt ad finem.
44) Ibid.., I-II, q,12, a.1.
45) In II Sent., d.38, q.1, a.3, c.a.
46) ST., I-II, q.9, a.3, ad 3.
47) Ibid, I-II, q.9, a.1, ad 3 : ad terium dicendum quod voluntas movet intellectum quantum ad exercitium actus : quia et ipsum verum, quod est perfectio intellectus continetur sub universali bono ut quoddam bonum particulare.
48) QDM., q.6, a.1, c.a.
49) 이러한 지성과 의지의 관계는 흔히 중세적 전통에선 지성은 의지의 하인이나 시녀로 묘사되곤 했다. 예를 들어, 포와티에의 페트루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의지는 주인(dominus)이며, 이성은 시녀(pedissequa)이다”라고 했으며,(PL.211, 1031d) 오베르뉴의 윌리엄(William of Auvergne)은 "의지, 즉 명령의 힘은 그의 왕국의 왕과 같은 것이며, 이성은 신하이다"라고 했다. Cf. The Soul, trans. R. Teske (Milwaukee: Marquette University Press, 2000), p.126.
50) ST., I-II, q.17, a.1, ad 2.
51) J. Hause, "Thomas Aquinas and Voluntarist" , Mediaeval Philosophy and Theology 6(1997), p.168.
52) Ibid, p.171.
53) B. Kent, Virtue of the Will, p.120.
54) ST., I, q.83, a.4, c.a.
55) QDM., q.6, a.1, c.a.
56) In NE., L6, l.2, n.1137.
57) ST., I-II, q.17, a.1, ad 2.
58) T. Irwin, "The Scope of Deliberation : A Conflict in Aquinas", Review of Metaphysics 44(1990), pp.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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