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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이후 인식에서 명확성(evidens)의 문제, 근대의 여명.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1. 1277년 단죄는 신의 절대적 자유로 신의 이해를 변모하게 하였다. 신은 하나의 정해진 것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의 의지에 의하여 절대적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는 13세기를 걸쳐 14세기로 넘어가면서 옥캄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옥캄은 신은 그가 제이 원인의 중재로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것 없이 행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신은 그의 절대적 권능(potentia absoluta)으로 직접적으로(unmittelbar)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옥캄의 신학적 근거는 인식론으로 이어진다. 신은 인간 지성 가운데 직관적 인지(notitia intuitiva)을 야기할 수 있다고 하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여기에서 인과적 중재작용이나 전제없이 신은 스스로의 절대적 권능으로 그렇게 결과를 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신의 절대적 전능으로 인하여 다른 사물로 부터 장소적으로 주체적으로 구별되어지는 절대적 사물은 파괴된 절대적 다른 사물이 실존 할 수 있다. 즉 신의 절대적 전능에 의하여 인간은 사라진 별도 인간의 직관적 인지는 실존하지 않는 대상을 야기하지도 보전하지도 못한다. 인간은 사라진 별도 만일 신의 절대적 권능에 의하여 행해진다면, 그것을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옥캄의 논의는14세기 이후 중세 '회의론자'라 불린 옥캄학파의 사람들에게 이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순탄하진 않았다. 예를 들어, 옥스퍼드의 학장이었던 루터렐(J.Lutterel)은 아비뇽으로 간 뒤 이를 비판한다. "이에 의하면, 직관적 인지는 비-실존의 필연성보다 더 실존의 필연성이다" 라고 하면서 루터렐은 옥캄을 비판한다. 이는 이후 옥캄주의자를 따라다니는 가장 흔한 비판이 된다. 심지어 20세기 질송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과연 이러한 비판이 적당한 것인가? 그에 의하면, 이에 의하면, 신은 절대저 권능으로 우리 가운데 하나의 감각상(ein Wahrnehmungsbild)을 현존하는 대상 없이 야기할 수 있다. 그렇기에 루터렐은 이를 위와 같이 비판하는 것이다. 하지만 옥캄에 의하면, 신이 우리 가운데 "이 사물이 있다"라는판단을 야기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분명 그에게 사물은 이 경우 실존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직관적 인지는 단지 감각상이지, 판단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감각적 판단의 원인만은 아니며, 단지 부분적 원인이다. 즉 이러한 직관적 인지만이 아니라, 신의 권능이란 것이 있어야하며, 또한 감각 대상이 있어야한다. 그렇기에 직관적 인지는 판단에 이르지는 못한 감각적 판단의 원인이며, 인간이 행하는 판단의 부분적 원인이다. "나는 지금 내 눈앞에 책을 본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판단은 신의 절대적 권능에 의하여, 존재하지 않은 책을 직관적 인지로 수용하고 있는 것에서 비롯된 판단인지 모른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옥캄에 의한 신은 우리 가운데 대상적이지 않은 감각상과 함께 믿음을 야기할 수 있다고 귀결된다. 다시 말해, 여기에서 옥캄은 실존하지 않은 대상에 관한 확신(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확실하게 실존하지 않은 대상의 명확한 지식을 야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하여 명확한 지식을 준다는 것은 용어상 모순이다. 왜냐하면 용어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은 것에 관하여 존재한다고 명확한 지식을 가진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둔스 스코투스는 "참이 아니라면 명확하지도않다"라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옥캄의 인식론은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없으며, 진리의 기준을 제시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이는 14세기 이후 철학의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2. 중세 후기 철학자인 크래톤(W.Crathorn)은 그의 <명제집 주해> 1질문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신은 인간의 뇌 가운데 하양의 종을 만들수 있었고,... 지각자 그는 그가 그 자신의 외부에 실존하는 그 색을 귀결하는 충분한 이유일 수 없다." 여기에서도 옥캄 이후 다루어진 문제가 보여진다. 한 지각자가 하양을 지각하였을때, 신은 그의 절대적 권능으로 그 지각자의 뇌 가운데 이를 만들었을 수 있다. 그렇기에 지각자는 그의 외부에 하양을 귀결하는 충분한 근거 혹은 이유일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모든 인식되어지는 것은 의식 가능한 것이 된다. 그렇기에 크래톤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근거에서 어떤 이도 색의 실존에 관한 확실성과 무오류적인 것을 가질 수 없다. 이는 그 자체로 분명하다." 예를 들어, 사과를 지각할때, 우리는 사과를 봄이란 외부 사과를 봄이란 단순한 사실로 이 인식의 확실성 혹은 정당성을 보증할 수 없다. 이는 신이 인간의 뇌가운데 그것을 만들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모든 인간의 인식이 다 무오류적인 수 없는 것인가? 이에 관하여 크래톤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만일 어떤 이가 '나는 실존한다'와 같은 명제를 의심한다면, 이는 그가 실존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실존한다'는 것을 '나는 의심한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나는 실존한다'가 귀결되어지기 때문이다. 실존하지 않은 이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누구도 '나는 실존한다'라는 명제를 의심 할 수 없다."
이러한 크래톤의 해법은 어디에선가 본 듯한 것이다. 그렇다. 데카르트의 해법이다. 여기에서 데카르트가 크래톤의 이 명제를 도용하였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데카르트의 논의가 중세적 사유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필자의 논의는 결국 어느 면에서 중세과근대라는 시대적 구분, 즉 철학사적 구분의 타당성에 관한 논의가 되어질 것이다. 그러면 이제 위의 옥캄의 논의와 크래톤의 논의를 맘에 세기며중세 후기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아니 더욱 더 정확하게, 14세기 철학에서 17세기 철학으로의 여정을 따라가 보도록 하자.
3. 둔스 스코투스는 직관적 인지가 인식대상의 대상성과 실존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귀결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점에서 옥캄의 논의는 反-스코투스적이다. 옥캄은 둔스 스코투스의 '직관적 인지'란 전문 용어를 수용한다. 그러나 더 이상 이것은 스코투스와 동일한 의미는 아니다. 물론, 이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이는 이곳에서 다루진 않겠다. 하지만 옥캄은 이미 논의한 대로 신의 절대적 권능이란 신학적 논의에 의존하여, 실존하지 않은 것에 관한 직관적 인지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기존 아리스토텔레스적 진리관, 즉 사물과 지성의 일치에 의한 진리관과 그 길을 달리하는 것이다. 사물, 즉 대상이 실존하지 않아도 신의 절대적 권능에 의하여 지성은 그 가운데 대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옥캄의 <임의토론집>에 잘 드러나있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이 개연적인 것이 된다. 옥캄의 이러한 논의는 후대 철학자들에게 숙제를 남긴다. 과연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이는 뒤이어 오뜨르꾸르의 니콜라우스(Nicholaus von Autrecourt)에게로 이어진다.
4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것도 그 보다 선행하는 것은 없으며, 동시에 그것은 다른 모든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다. 위의 논의를 풀어보자. 여기에서 그는모순율을 첫 원리로 제시한다. 이는 동시에 모순된 명제가 참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다른 모든 원리를 앞선 제일 원리이다. 또한 이는 자연의 빛에 의하여 논증된 것으로 절대적으로 검증됨 없이 명확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명백함의 확실성은 정도를 가지지 않는다. 셋째로는 신앙의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다. 위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다. 위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다. 위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다. 위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다. 위의 논의를 풀어보자. 여기에서 그는모순율을 첫 원리로 제시한다. 이는 동시에 모순된 명제가 참일 : 없다는 것이:. 이러한 원:는 다른 모든:원리를 앞선 :일 원리이다.:또한 이는 자:의 빛에 의하: 논증된 것으: 절대적으로 :증됨 없이 명:한 것이다. :한 이러한 명:함의 확실성은:정도를 가지지:않는다. 셋째:는 신앙의 는 것이다. 위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다. 위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다. 위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다. 위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ььΧȨ
그에 의하면, 명백성의 확실성, 이는 우리가 이성의 자연적 빛 가운데 가지는 것으로, 정당화 없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이 확실성은 제일 원리에 의하여 우리의 것이며, 참은 이에 반대되지도 될수도 없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것이 자연의 빛에 의하여 검증되어진다면, 이는 정당화 없이 검증된 것이다. 또한 명백성의 확실성은 단계를 가지지 않는다. 이렇게 명백성의 확실성은 검증 없이 확실하며, 이는 단계를 가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확실성은 그 가운데 거짓이 실재 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이러한 확실성은 비명제적 확실성과 명제적 확실성으로 나뉘지며, 이는 복잡하지 않지 않은 경험에 의한 확실성과 복잡한 경험에 의한 확실성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복잡하지 않은 것에 관한 확실성은 감각과 내적 경험에 의한 확실성이다.실상 인간이 감각과 정신활동 혹은 내적 경험의 대상을 확신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비명제적이다. 그러나 이는 명확하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는 "제일 원리"이다. 왜냐하면, 제일 원리란 그것의 부정이 명제를 구성한 용어들의 의미가 아닌 어떤 인식도 없이 자기 모순적인 것으로 알려지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것도 그 보다 선행하는 것은 없으며, 동시에 그것은 다른 모든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다. 위의 논의를 풀어보자. 여기에서 그는모순율을 첫 원리로 제시한다. 이는 동시에 모순된 명제가 참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다른 모든 원리를 앞선 제일 원리이다. 또한 이는 자연의 빛에 의하여 논증된 것으로 절대적으로 검증됨 없이 명확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명백함의 확실성은 정도를 가지지 않는다. 셋째로는 신앙의 확실성과 제일 원리 그리고 제일 원리로 환원되어지는 것 이외에 확실한 것은 없다. 이미 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인간은 감각과 정신활동의 대상을 확신하는 것을 사실이다. 그리고 이 확실성은 명제적이지 않으며, 모순율에 의하여 정당화되어질 수 있다. 물론 자기 존재에관한 확실성이 어떻게 성립되지는 직접적으로 이야기되기 않아도 추론을 통하여 이를 확신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영향과 옥캄의 영향 속에서 스스로의 사상을 일구어간 미르꾸르뜨의 요한(John of Mirecourt)은 우리들 자신의 존재에 관한 확실성이 모순율이 보장한 확실성에 포함된다고 한다.
니콜라우스의 출발점은 옥캄적이다. 그리고 그는 서서히 자신의 진면모를 드러낸다. 그것은 한 사물이 그 자체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순율의 측면에서 사실이다. 그는 감각 경험에 의한 것은 단지 서로 다른 경험의 연합 정도로 여겼다. 옥캄은 A라는 약초가 감기에 좋은 것은 절대적 필연성이 아니라, 단지 신이 그렇게 의지하는 한에서 사실이며, 그렇기에 신에 의하여 이는 다르게 될 수 있다. 그리고 니콜라우스는 A가 감기에 좋은 것은 각각의 A들에 관한 경험의 연합에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감기에 효력이 있으면서 동시에 없을 수없는 감각적 경험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제일 원리에 의하여 보증될 뿐이지, 우리가 한 사물이 다른 사물의 원인이란 것을 필연적으로 명증적으로 검증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미묘하게 옥캄과 니콜라우스의 차이를 읽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이 중세 일반적인 인과이론과는 차이를 두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니콜라우스는 원인이 결과의 필연적 관계의 부정이란 것을 수용하고, 이는 모순율을 통하여 자신의 논리 속에서 다르게 전개해 간다. 이러한 논의 속에서 데카르트의 탄생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5. 중세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의 논의를 위하여, 앞선 옥캄과 크래톤의 논의를 기억해보자. 옥캄에 의하면 신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며, 불이 없이도 산화를 야기할 수 있으며, 번개 없이도 천둥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이며, 존재하지않은 것에 관해서도 직관적 인지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 크래톤은 신은 뇌에 없는 것을 있게 할 수 있지만, 적어도 나는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한 사실이라 한다. 또한 니콜라우스는 모순율을 통하여 자기 인식이 확실한 것이라는 것을 보였다. 나는 없으면서 동시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는 신의 전능과 인과성 그리고 인식론과 관련된 문제들이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고민은 이러한 중세적 고민의 연장선에 있는 듯이 보인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신은 인간을 속일 수 있다. 옥캄에게 이는 당연하다. 신은 절대적 권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은 의심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은 참이라고 한다. 마치 크래톤과 같은 이들과 같이 말이다.
옥캄에 영향 가운데 중세 후기 철학자들은 인과성과 인식에 관하여 많은 것을 회의하였다. 그 가운데 중세 후기 철학자인 니콜라우스와 같은 이들은 자연의 빛으로 모순율을 이해하고, 제일 원리에 의하여 명확성을 인식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제일 원리는 다른 그 보다 앞서는 것을 가정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회의 가운데 어떤 명확성을 구하였다. 크래톤 역시 자기 존재라는 것을 구하였다.
데카르트는 그의 저서 <철학의 원리>에서 수학적 증명 역시 신이 오류를 범하도록 창조함으로 항상 오류를 참이라고 인식하고 있을 지 모른다고 의심한다. 사실 신은 이러한 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하지만 그렇게 오류를 범하는 나(ego)는 존재해야만 한다. 또한 <방법서설>에서와 같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되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며,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며,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것이 나오게 된다.
여기에서 데카르트의 '의심'은 중세 후기 다루어진 논의의 연장선이 아닐까? 신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하여 인간은 존재하지 않은 것을 인식할 수도 있다는 중세 후기 옥캄 이후의 논의가 인간이 가진 모든 지식의 의심 가능성을 열어둔 것은 아닐까 말이다. 여기에서 데카르트는 한 가지 명석판명한 지식으로 자기 인식을 이야기한다. 이는 이미 중세 후기 더 위로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기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논의의 전개 양상으로 보아 이는 아우구스티누스보다 차라리 중세 후기 철학자들의 논의와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이 중세 철학적 논의에 스스로의 답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신은 선(善)하다는 것이다. 신은 절대적 권능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만, 그는 선신이기에 인간은 속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인간을 속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지만 말이다. 이러한 논의의 결과로 인간은 선신으로 신이 부여한 인식 능력(cognoscendi facultas)으로 단지 참된 대상에만관여한다고 한다. 옥캄의 눈으로 읽어보자면, 신은 절대적 능력으로 번개없이 천둥을 야기할 수 있지만, 그는 선신이기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며, 신은 존재하지 않은 것을 직관적으로 인지하게 할 수 있지만, 마찬가지로 선신이기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크래톤의 예를 들자면, 신은 인간의 뇌 가운데 외부에 없는 하양의 상을 만들 수 있지만, 선신이기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크래톤은 신의 절대적 권능에 의하여 인간이 자신의 시력으로 실존하는 외부의 것을 모오류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고 한다.그렇게데카르트는 신은 선신이기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할것이다. 과연 데카르트의 이러한 논변이 정당한 것인가?
할 수 있지만, 선신이기에 할 수 없다는 것은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없단 것인가? 중요한 것은 또 선에 관한 개념이다. 신은 선을 의지하는 것인가 아니면 신이 의지하는 것이 선인가? 만일 신이 의지하는 것이 선이라면 인간을 기만한다거나 속인다는 것이 악이란 것은 지금 이곳에 있는 인간의 시야에서 신을 판단하는 것이 아닌가? 신이 A라는 화초를 감기에 효력을 가진 것이라고 의지하여 그렇게 되어가지만, 이는 신이 그렇게 원한 것이기에 신에 의하여 다르게 될 수도 있다. 그러한 권능은 신에게 고유한 것이다. 또한 설사 다르게 되어지기를 원한다고 해도, 중세적 그것이 악은 아니다. 적어도 옥캄과 같은 이들에게 그랬을 것이다. 신은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를 다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완전한 신이 의지한 이곳은 신의 완전성에 의지하여 스스로의 규칙성을 유지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이것도 신에 의하여 바로 다르게 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세계이다. 만일 신에게 이러한 자유를 박탈한다면, 신은 규칙성을 가진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나 1277년 이후 많은 서구의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신의 절대적 자유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데카르트 역시그 이후 인물로 이에 관하여 답을 제시할 의무를 가졌을지 모른다. 신의 절대적 자유와 인간 인식의 명확성을 보증하는 길을 찾으려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데카르트가 선택한 길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이는 생각의 여지를 담고 있다.
니콜라우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모순율을 통하여 하나가 참이며 동시에 거짓일 수는 것은 자명하다고 한다. 즉 의심할 수 없는 제일 원리를 찾은 것이다. 데카르트도 자기 존재를 찾았다. 자신의 존재는 존재하면서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않는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러한 자기는 존재해야한다. 이를 데카르트는 철학을 할때 인식하는 최초의 것이라고 한다.즉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확실한 인식이란 것이다. 마치 니콜라우스의 모순율과 같이 말이다. 이는 제일 원리인 것이다.
6. 나가면서.
중세 철학은 어디까지인가?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필자는 근대 시작에선 데카르트의 사유가 중세적 논의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을 보이려 했다. 또한 옥캄과 이후 니콜라우스와 같은 이들의 철학이 단지 근대 철학자인 흄과 관련되는 것을 넘어서 근대 합리론적 사유에도 어떤 영향력을 가지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실상 영국에서와 같이 중세 대륙 즉 파리 대학에도 강력한 유명론적 전통이 흐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대륙의 많은 대학에서 유명론은 깊이 있게 다루어져왔었다. 그런 전통이 과연 근대 대륙의 철학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채, 역사속으로 죽어갔을까? 중세 후기 철학의 눈에서 어쩌면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와 같은 저서는 그 연장선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저서일지 모른다. 예를 들어, <철학의 원리>에서 데카르트는 모든 보편자는 사고의 양태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의 양태는 이성이나 상상 혹은 기억과 같은 것을 부르는 명칭이다. 그렇다면, 모든 보편자란 이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보편자에 관한 태도에서도 필자는 후기 중세 철학자들을 떠올린다. 이렇게 데카르트 역시 중세 후기 논의된 문제들을 자신의 철학 속에 담고 있었다. 또한 데카르트는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 3성찰에서 지성의 작용에 의한 관념과 지성의 작용에 의해 표현된 것으로 사용되는 관념을 설명하고 있다. 전자는 완전성의 등급이 없으며, 후자는 그 차이가 있다. 그러면서 사유의 양태로서 관념은 그 기원이 사유이기에 차이가 없는 것이지만, 후자의 것은 실재성의 등급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그 이유를 적고 있다. 또한 관념 가운데 실재성은 객체적 실재성(realitas obiectiva)라고 하고, 관념 가운데 있지 않은 그러나 외부 사물 가운데 있는 실재성을 현실적 실재성(realitas actualis)이라 한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관념의 객체적 실재성은 관념 가운데 있는 한에서 관념에 의하여 표현된 실재성이라 이해할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관념 가운데 인식하는 모든 것은 모두 관념 자체 가운데 객체적으로 있는 것이기에 그러한 것이다. 초기 옥캄은 관념을 객체적 존재(esse obiectiva)라고 했다. 그렇게 관념은 관념 가운데 객체적으로 있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중세 후기 철학과 데카르트 사이의 어떤 만남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접하는 철학사적 이해 속에 근대와 중세의 확연한 구분은 다시금 생각되어질 것이다. 또 한편으론 근대적 사유의 시작이 1277년 이후 성립된 어떤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 당시 단죄에 의하여 성립도니 후기 중세 철학이 근대 철학의 성립에 어떤 영향을 준 것은 아닌가 말이다. 이에 관한 더욱 더 자세한 논의는 차후의 기회를 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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