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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의자리

옥캄 존재론의 기반작업

옥캄 존재론의 기반작업

- 『논리학대전』 이해에 준하여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1. 들어가는 글.

 옥캄의 존재론은 어떤 것인가? 그가 구상한 보편자에 관한 존재론적 사고는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는가? 단지 철학사에 나온 옥캄에 관한 단편적이고 획일적인 지식만으로 그를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일 것이다. 뵈너(Ph.Boehner)의 연구 이후 옥캄의 존재론적 사유를 단지 유명론에만 묶어 두는 것이 옥캄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은 이제 옥캄에 관한 논의에 있어 하나의 상식이 되었다. 뵈너에 의하여 진행된 옥캄의 연대기적이고 문헌학적 분석은 옥캄의 초기를 보편자에 대한 개념을 단지 주체적 존재 없는 대상적 존재이라 정의하며, 『논리학대전』과 같은 후기 저서에서는 주체적 존재를 적용하여 실재론적 개념론이 등장한다는 것을 밝혔다. 이러한 연구 이후 뵈너의 연대기적 논의의 몇몇 한계가 지적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옥캄을 단지 유명론자로만 몰아놓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하나의 상식이 되었다. 왜냐하면 옥캄은 보편자를 단지 이름이 아니라, 개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옥캄 존재론의 맥을 따라가기 위하여 그가 사용하는 전문 용어들을 이해하는 기반작업은 매우 절실하다. 실상 이러한 기반작업은 단지 옥캄의 이해를 넘어서 중세 후기 철학자들의 이해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작업이 될 것이다. 그것은 중세 후기 철학에 있어서 옥캄의 위치를 감안하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뷔리당에서 루터에 이르기 까지 옥캄의 사고는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러한 이유에서 옥캄의 『논리학대전』에 등장하는 기본적인 전문 용어들을 정리하고, 이를 통하여 옥캄 존재론 이해의 기반작업을 수행하고자 한다. 우선 이와 같은 작업은 옥캄 ‘논리학’의 몇몇 개념 정리에서 시작해야할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논리학이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철학의 부분이며, 또한 그 본질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철학의 수단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문제를 다루더라도 그 문제의 ‘논리적 타당성’을 살피곤 하였다. 그리고 이는 그가 생각한 논리학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는 보편자의 문제라는 다분히 존재론적 문제를 다루는 경우에도 철저하게 논리적 차원에서 이를 고려하고 있다. 이는 논리학의 개념 정리에서 시작하여 보편자의 문제를 해결해가는 옥캄의 논의 전개 방식을 보면,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필자도 논리학의 개념 정리에서 시작하여 종국에는 그의 존재론적 논의에로 다가갈 것이다. 결국 논리학이란 그의 존재론에 있어서 하나의 기반작업이기 때문이다. 본 논의의 주된 목적은 옥캄 존재론의 기반작업이지만, 그 시작은 논리학의 기반작업에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이다.

 실상 옥캄의 논리학은 쉽사리 정리하고 개요화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것은 여타의 다른 철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중세 후기로 넘어오면서 서서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늘을 벗어나 근대적 사유의 시작을 보인다는 점을 감안해야한다. 그는 스스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로 스스로의 논의에 타당성을 부여하려 하지만, 실상 그의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이상 역사적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다. 이는 후기 중세 철학자들에게서 흔히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연학의 문제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이상 중세 후기 철학자들에게 힘을 가지지 못했다. 무슬림 철학자들에게서 유입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플라톤적 사고에서 다소 귀납적 사고에로 그 틀을 넘겼지만, 옥캄 등의 중세 후기 철학자에 이르면, 개별자에 대한 경험론적 사고로 넘어간다.1) 이는 개념론이나 유명론적 사고에 기반 한 이들 철학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이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서려는 당시 학자들의 노력으로 보여 진다. 물론 옥캄의 저작에서 우리는 완전하지 않은 넘어섬을 보게 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른 존재론적 견해를 가지지만,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개념을 정리할 경우, 이러한 그의 사상사적 위치를 감안하여 접근해야한다.

 그는 범주(praedicamenta)를 이해하는 경우에서도 기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에서 시작하지만, 그 결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결과에 다다른다. 이러한 그의 사상적 위치에 따른 특이점은 그의 존재론과 논리학 전반에 걸쳐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그 이전의 전통적 논의와 동시대의 논의와도 구분되어진다. 예를 들어, 그 당시 토마스주의자와도 구별되어지며, 스코투스주의자와도 구별되어졌다.2) 이와 같이 구별되는 그의 위치로 인하여 그는 스스로의 이름을 건 하나의 학파를 이루게 된다. 그렇기에 이를 감안하지 않으면 그에게 다가갈 수 없다. 그렇기에 이를 감안하여 논의를 진행해보자.


2. ‘명사’(名辭)에 관한 이해.

2.1 명사(名辭)의 정의와 의미론적 논의.

 옥캄의 논리학 뿐 아니라, 그 시대의 논리학 이해를 위하여 반드시 이해해야할 것이 ‘명사’(名辭, terminus)3)에 관한 이해이다. 모든 논리학은 명제를 다루며, 명제는 명사에 의하여 이루어진다.4) 옥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론전서』를 인용하며 명사를 정의한다. 그 내용은 명사는 명제의 요소이며, 이는 서술되어지거나 서술되는 것이며, 이 양자는 ‘이다’로 연결되어나 ‘아니다’로 분리되거나 하는 주어와 술어라는 것이다.5) 사실 ‘명사’라고 번역하는 이 말의 라틴어 원어는 terminus이다. terminus란 ‘끝’, ‘한계’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명사’는 실제 한 명제 가운데 양쪽 끝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서술되어지는 것(주어)과 서술하는 것(술어)라는 양쪽 끝을 말하는 것이다. 즉, homo est animal에서 양끝은 주어와 술어이며, 이는 명제를 구성하는 명사인 것이다. 이는 당시 중세 논리학에 있어서 하나의 일반적 개념 정리였다. 이렇게 명사는 원소적 단위의 의미 단위이며, 복합된 표현들은 이러한 명사에 의하여 구성되어진다.6) 위-옥캄의 저서인 『논리학 소논고』에선 이러한 명사에 대하여 명사(名詞, nomen)와 동사라고 하는 것도 바로 주어와 술어를 말하는 것이다.7) 그렇지만 명사는 단지 명사(名詞)와 동사를 넘어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명사(名辭)에는 공의어적 명사’(syncategoremata)과 ‘단의어적 명사’(categoremata)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단의어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반면 공의어는 단의어에 더해질 경우에 한하여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과’는 단의어이지만, ‘어떤’은 그 스스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사과’라는 단의어에 더해져 ‘어떤 사과’가 될 때 의미를 가진다.8) 그러면 연계사인 est는 명사(名辭)에 속하는가? 사실 샤우드(Shyreswood)와 같은 이는 est를 그저 주어와 술어와 연결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그 다음에 등장하는 것에로 규정되어지는 술어로 보곤 했다. 그리고 샤우드는 그의 『공의어에 관한 논구』에서 이를 명제 가운데 제 삼의 요소(tertium adjacens)라고 하면서 이를 공의어의 하나로 취급하였다.9) 그러면 옥캄은 est를 어떻게 여겼을까? 옥캄주의 논리학이 스며들어있는 『논리학의 기초』는 명사는 주되게 명사와 동사로 구성되지만, 덜 중요하게는 대명사, 부사, 분사, 접속사, 전치사, 감탄사와 같은 것도 명사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것에 의하여 명제가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는 주어, 동사 그리고 연계사도 관련된다고 한다.10) 즉, 여기에서 연계사도 명사에 속한다고 한다. 실재로 명제의 구성 요소를 명사라고 정의한다면, 분명 연계사도 포함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명사들은 명제를 구성하는 단지 양쪽 끝을 넘어 명제를 구성하는 모든 부분이라 할 것이다. 옥캄은 명사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위해서 명사의 구분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제 그 구분을 살펴보자.

 옥캄은 보에티우스(Boethius)의 『명제론 주해』를 빌러 표현(oratio)의 세 가지를 말한다. 이는 문자적 표현(scripta)과 발화적 표현(prolata) 그리고 사고적 표현 혹은 심적 표현(concepta)이다. 이와 유사하게 명사도 세 가지라고 한다. 표현이란 단어(dictio)의 모임(aggregatum)이다. 적어도 후기 중세 논리학에 의하면, 불완전한 표현은 어떤 의미를 가지지만, 명제는 아니라고 한다. 오직 완전한 표현만이 명제라고 한다.11) 이렇게 본다면, 표현은 명제보다 폭이 넓은 개념이다. 명사가 명제를 구성하는 것이라면, 동일하게 표현을 구성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표현이 세 가지라면, 명사도 세 가지라는 것은 당연하다. 보에티우스의 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론』에 기인하는 것이다.12) 보에티우스의 논의에 의하면 심적 표현은 인식 대상을 직접적으로 의미한다. 문자적 표현은 심적 표현의 기호이며, 발화적 표현은 문자적 표현의 기호이다. 문자적 표현과 발화적 표현은 심적 표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대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논의는 스코투스(Duns Scotus)와 옥캄에 이르는 동안 중세 언어 이해의 기초가 되었다. 여기에서 보에티우스는 발화적 표현은 사물의 개념을 의미하며, 동시에 대상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만’ 개념이고, 이차적으로‘만’ 사물을 의미한다고 한다. 토마스(Thomas Aquinas)는 보에티우스를 따른다. 그는 인간과 같은 단어는 직접적으로 대상을 의미하지 못하며, 개별자로부터 추상하는 가운데 본성을 의미한다고 한다.13) 하지만 스코투스는 이와 다른 길을 간다. 그에 의하면 우선적으로 어떤 실재적인 것의 기호인 보편적 단어로 의미되어지는 것은 개별자가 아니라, 그의 본질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에게 본질은 실재적이기 때문이며, 이것은 단어의 제일 의미 대상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옥캄은 보편적 단어는 직접적으로 개념의 기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성의 기호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 실재성은 개별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스코투스에 의하여 파악되어진 공통 본성이나 본질은 아니다.14) 이는 옥캄이 스코투스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비판하는 그의 일반적 모습의 하나이기도 할 것이다.

 옥캄에 의하면, 심적명사는 대상에 대하여 자연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문자명사는 이런 심적명사에 종속되어진다. 또한 발화명사는 문자명사에 종속되어진다. 문자명사와 발화명사는 대상에 대하여 규약적 의미를 가진다. 여기에서 옥캄의 논의는 보에티우스나 토마스와 같이 문자명사는 심적명사의 기호이며, 이차적으로 사물을 그리고 일차적으로는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에 의하면, ‘사람’과 같은 심적명사는 일차적으로 사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로 부터의 추상 가운데 본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옥캄은 심적명사가 영혼 외부의 개별자를 직접적으로 지칭한다고 본다. 그렇기에 그는 기존에 내려온 개별자들로부터 보편자의 추상에 의한 종(species)라는 이론을 거부한다. 기존의 이론은 우선적으로 개별자는 지성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에 의존해 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에 근거하여, 중세 많은 이들은 보편자만을 지성의 대상으로 받아드렸다. 그러나 스코투스와 옥캄은 직관적 인지(intuitiva notitia)를 주장함으로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있다. 이 직관적 인지는 바로 개별자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15) 이렇게 옥캄은 기존과 다르게 명사의 세 가지 관계를 해석한다.

 이제 『논리학 대전』을 따라 명사의 분류와 이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자. 필자는 이를 위하여 위-옥캄의 저작을 『논리학 대전』 이해의 병행문헌으로 삼을 것이다. 그것은 『논리학의 기초』와 『논리학 소논고』와 같은 위-옥캄의 저작들이 상당 부분 『논리학 대전』의 전개와 관련되어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논리학 대전』이란 교과서를 위한 거의 동시대의 뛰어난 참고서의 형식을 가지기 때문이다. 또한 비록 이것이 옥캄 자신의 저작은 아니지만, 적어도 옥캄의 영향을 받은 인물에 의한 것임 분명하기 때문이다.16)


2.2 고유명사와 공통명사

 명사(名辭)는 크게 명사(nomen, 名詞)와 동사(verbum)로 나뉘어진다. 그 가운데 옥캄이 우선 주목하는 것은 명사(nomen)에 관한 논의이다. 그런데 명사는 고유명사(propria nomen)와 공통명사(communia nomen)로 나뉘어진다. 고유명사는 하나의 명칭 혹은 이름으로 오직 하나의 것을 의미하는 것, 즉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은 것이 그러한 것이다. 공통명사는 하나의 명칭으로 여럿을 의미하는 것이며, ‘돌’, ‘동물’과 같은 그러한 것이다.17) 또한 명사란 아리스토텔레스적 언어 이해에서 시제를 포함하지 않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18) 이러한 명사는 시제에 상관없이 하나의 개체를 향한 것과 여럿을 향한 것으로 구분하고, 이를 고유명사와 공통명사라고 정의한 것이다.


2.3 절대명사와 내포명사 그리고 구체명사와 추상명사

 또한 명사는 절대명사와 내포명사로 구별되어진다. 내포명사는 명목적 정의(quid nominis)를 가진다.19) 예를 들어, “‘흰 것’은 흼을 가지는 것이다”(album est habens albedinem)라고 정의되어진다. 여기에서 ‘흰 것’은 내포명사이며, 이는 명목적 정의를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흰 것’과 ‘뜨거운 것’(calidum) 그리고 ‘영혼을 가진 것’(animatum)과 같은 것이다.20) 이것들은 각각 명목적 정의를 가진다. 하지만 실재적 정의가 아니라, 단지 명목적 정의라는 사실을 주지해야한다. 이러한 내포명사에는 관계명사(名詞)(관계명사(名辭))도 포함한다. 관계명사인 ‘유사한 것’(simile)이란 “다른 것과 같은 종류의 성질을 가지는 것”이란 명목적 정의를 가진다. 이렇게 관계명사는 내포명사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절대명사는 우선적으로 하나의 사물을 정의하지 않으며, 그것이 의미하는 모든 것에 동일하게 의미되어지는 것이다. ‘흼’(albedo)이나 ‘영혼’(anima)과 같이 말이다. 그렇지만, 내포명사는 어떤 하나의 사물과 관련되어진다.21)

 또 다시 명사는 구체명사와 추상명사로 구별되어진다. 이 구분은 그의 존재론적 사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며, 옥캄은 이러한 구분을 무시함으로 많은 철학자들이 실수를 범한다고 본다.22) “구체명사는 아주 고유하게 긍정적 내포명사이다”라고 『논리학 소논고』는 적고 있다. ‘영혼을 가진 것’은 간접적으로 영혼을 의미하며, 바르게는 영혼을 가지고 있는 어떤 사물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영혼을 가진 것’(animatum)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 ‘어떤 구체적 사물’이기 때문이다.23) 추상명사는 말 그대로 추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색(color)과 지식(scientia) 또한 인간성(humanitas)이 그러한 것이다. 구체명사와 추상명사는 서로 구별되어 사용되지만, 신학적 경우에와 같이 종종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신(deus)과 신성(deitas)은 같은 대상을 지칭한다는 의미에서 동의어이다. 반면, 지식을 가진 ‘지식인’(知識人)은 ‘지식’과 서로 구별되어진다. 이렇게 구체명사와 추상명사는 서로 구별되기도 하고, 종종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옥캄은 “인간이 달린다”(인간은 달리는 것이다)는 옮지만, “인간성이 달린다”(인간성은 달리는 것이다)는 옮지 않다고 한다. 이는 동일한 것을 지칭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명제에서 ‘달리는 것’이란 개별자 인간이지 인간성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분명하게 신학의 논의에서도 ‘인간’과 ‘인간성’은 동의어가 될 수 없다. “신의 아들은 인간(인자)이다”라고 할 수 있지만, “신의 아들은 인간성이다”라고 하는 것은 옥캄에게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성’이란 추상명사로 그 본성의 지속하는가에 지시함 없이 육체와 지성혼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성’은 단지 실존하는 것으로부터 추상된 것일 뿐이다. 반면 ‘인간’은 그 자체로 실존하는 인간 본성을 포함하는 개별자 인간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신의 아들은 예수이고, 이는 인간이지만, 인간성은 아닌 것이다.


3. 제일 명명과 제이 명명 그리고 제일 지향과 제이 지향.

 명사, 동사, 격 등과 같은 문법용어는 명사들에 명칭이다. ‘사과’라는 단어의 명칭은 명사이며, ‘사랑한다’라는 단어의 명칭은 동사이다. 이러한 문법용어는 이런 의미에서 명사의 명칭이다. 이러한 경우에서 ‘명사’와 ‘동사’ 등과 같은 것을 제이 명명(secunda impositio)의 단어라고 한다. 이러한 제이 명명에 의한 단어는 어떤 상응하는 개념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명사와 동사 등과 같은 제이 명명의 것이 영혼 가운데 ‘사과’나 ‘인간’ 등과 같은 것과 관련되지만 말이다. 이에 반하여 제일 명명(prima impositio)은 다르다. 간단하게 제일 명명은 제이 명명이 아닌 모든 단어들이다. 이러한 것에는 ‘단의어’와 ‘공의어’가 모두 속한다. 하지만 고유하게는 단의어가 제일 명명의 단어이다. 이러한 제일 명명의 단어들은 류(genus), 종(species), 돌, 나무, 인간 등과 같은 것들이다.24) 이 제일 명명은 제일 지향(prima intentio)의 단어와 제이 지향(secunda intentio)의 단어 모두를 포함한다.25) 제일 지향이란 외부의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인간과 동물 그리고 당나귀와 같은 것이다. 반면 제이 지향의 것은 다른 사물의 자연적 기호인 영혼의 제일 지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의되어진다. 이러한 것으로는 보편자와 종 그리고 류 등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간단하게 제일 지향은 그 자체로 기호가 아닌 영혼 외부의 어떤 사물의 기호이며, 제이 지향은 그러한 제일 지향의 기호이다.26)

 “이순신은 장군이다”라고 할 때, 이순신은 영혼 외부의 개별자를 지칭하는 것이며, 즉 이는 외부 개별자에 대한 기호이다. 그렇지만, 이와 달리 이러한 이순신과 원균 그리고 권률 등은 모두 장군이다. 여기에서 장군은 각각의 개인을 넘어선 하나의 종개념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장군이라고 함은 제일 지향의 명사에 대한 기호이다. 또한 제일 지향은 외부의 것을 지시하는 단의어이지만, 제이 지향은 발화, 문자, 사고적 화법의 부분을 지칭하는 그러한 것에 상응하는 개념이나 단의어이다. 이러한 제이 지향의 단어로는 ‘명제’, ‘명사’(名辭), ‘주어’, ‘술어’, ‘류’, ‘종’ 등과 같은 것이다. 옥캄에게 자연학(scientia naturalis)은 실재에 대한 실재학(scientia realis)이며, 그렇기에 제일 지향에 의한 명제만이 자연학을 구성하는 것이다. 반면 제이 지향의 단어들과 이로 이루어진 명제는 논리학과 같은 것은 구성된다. 이러한 제이 지향과 제일 지향은 그의 존재론적이고 의미론적인 관점을 이해하는 좋은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 제이 지향의 명사들은 어떤 개념도 상응하는 것이 없는 순수하게 규약적인 것과 관련되며, 그 외에 사물에 대한 자연적 기호인 개념에 의하여 규정되어지는 것은 제일 지향의 것과 관련되어진다. 그렇기에 결과적으로 이러한 논의는 후에 제일 지향의 것은 개별자와 관련되어지고, 제이 지향의 것은 보편자와 관련되어지게 된다고 귀결될 것이다.27) 왜냐하면 제이 지향은 자연적 기호인 제일 지향을 의미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즉, 제이 지향은 영혼 외부에 실재하는 것의 자연적 기호와 관련되는 제일 지향의 자연적 기호란 말이다.28)


4. 옥캄의 범주론.

 옥캄의 범주론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른 길을 가는 많은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옥캄은 범주의 논의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하지만, 주된 존재론적 입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토마스 등의 논의와 구분되어지는 길을 간다. 『범주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 양, 질, 관계, 장소, 시간, 자세, 소유, 능동, 수동으로 범주를 분류한다.29) 이것들은 존재하는 것을 서술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분류된 것이다. 이러한 범주는 주어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는 것이며, 실재 영혼 외부에 존재하는 것의 분류가 아니라는 것이 옥캄의 기본적 생각이다.30) 예를 들어, 관계(relatio)의 문제를 살펴보자. 옥캄 시기의 많은 이들은 ‘관계’를 ‘관계된 것’과 구별하였다. 간단하게 ‘유사함’이나 ‘언니’라는 것은 ‘유사한 것’과 ‘언니로 있는 사람’ 가운데 있는 것이거나 구별되어지는 존재로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이것들은 관계명사 혹은 관계명사가 아닌 절대명사로 단지 내포명사의 명사혹은 개념일 뿐이다. 이러한 명사 혹은 개념은 어떤 외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 가운데 개념을 의미할 뿐이다. 이렇게 열 범주 가운데 관계는 제이 지향의 것에 속하는 것이다. 옥캄에 따르면, 관계가 어떤 식으로든 존재를 가지는 우유적 존재라면, 이는 “안현주는 안주영의 언니이다”라는 명제에서 안현주와 안주영 이외에 제 삼의 것(tertium)을 가정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안현주라는 존재는 안주영의 언니인 존재와 같다. 그런데 여기에서 ‘언니’라는 제 삼의 요소를 더하여 설명하는 것은 옥캄의 구미에 맞지 않았다.31) 옥캄의 트레이드 마크인 면도날에 있어서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옥캄은 필요 이상으로 존재를 더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는 당대 많은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유행과 같은 사고였다.

 예를 들어 보자. 낙랑공주와 낙랑국왕 최리의 딸은 동일한 인물이다. 낙랑공주와 최리의 딸은 실재적으로 동일하다. 그리고 상호 관계되는 것은 영혼 외부에 실재하는 것 사이의 것이 아니라, 단지 영혼 가운데 명사(名辭) 혹은 개념들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다. 분명 딸과 아버지라는 내포명사인 관계명사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지 추상명사 사이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부성’과 ‘자성’ 사이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자성은 부성의 자성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32) ‘딸’, ‘아들’ 과 같은 것은 내포명사이며, 내포명사는 관계명사(名詞) 혹은 관계명사(名辭)를 포함한다. 이들은 실재적 정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명목적 정의를 가진다. 이는 낙랑공주에 더해진 또 다른 존재가 아니라, 동일한 존재에 대한 지향의 차이 혹은 지칭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관계는 실체와 구별되어지는 존재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낙랑공주는 딸이다”라고 할 때, ‘딸’은 내포명사이며, 내포명사는 이미 살펴보았듯이 어떤 하나의 사물과 관련된다. 즉 ‘딸’은 낙랑공주라는 하나의 인물(사물)과 관련되어진다. ‘낙랑공주’는 영혼 외부의 개별자에 대한 제일 지향의 단어로 고유명사이다. 그리고 ‘딸’은 외부의 개별자에 대한 제이 지향의 단어이며, 내포명사이고 구체명사이다. 그렇지만 이 둘은 동일한 하나의 존재자를 지칭한다. 그렇기에 이 둘은 실재적으로 동일한 존재에 관한 것이다.

 낙랑공주는 실체이다. 반면 관계적 진술인 최리의 딸에서 딸은 우유이다. 이것이 기존의 중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유는 우유적 존재로 실체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우유적 존재는 실체적 존재와 구별되어지며, 같은 것이 아니다. 옥캄에게도 낙랑공주는 실체이고, 최리의 딸에서 딸은 우유이다. 그렇지만 이 둘은 실재 가운데 구별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사물에 대하여 지칭된 두 명사(名詞) 혹은 명사(名辭) 또한 개념이다. “낙랑공주는 딸이다”라고 할 때, 낙랑공주는 딸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존의 학설에 의하면 이는 거짓이다. 왜냐하면 낙랑공주는 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옥캄에게 위의 명제에서 딸은 내포명사이다. 이는 하나의 개별자에 대한 것이다. 결국 낙랑공주란 한 개별자에 대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둘은 구별되어지지 않으며, 실재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이러한 실체와 우유에 관한 이해는 분명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물론 옥캄 자신은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말이다.

 성질(qualitas)과 양(quantitas)에 관하여 알아보자.33) 이에 관한 중세적 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이 근거가 되었지만, 근본적으로 그리고 심각하게 다루어진 것은 철학적 관심보다는 신학적 관심에서 시작된 것이다. 즉 성체성사에서 실체변화(transsubstantiatio)에 관한 논의가 그러한 것이다.34) 토마스와 그 외 많은 이들은 축성 이후 빵의 양은 신의 능력에 의하여 지속되어지지만, 빵의 실체에 의하여 지속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우유와 실체의 관계에 관한 신학적 예외 조항은 실체와 우유에 관한 존재론적 사고의 깊이를 더하게 하였다.

 이 신학적 문제에도 그가 논의한 논리학적 논의는 그대로 적용된다. ‘양’과 ‘양자’(quantum)는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의 개별자를 지칭할 때 동일한 것이 된다. 물질적 개별자는 곧 물질적 실체이며, 이는 또한 양자이다. 양자가 아니면서 물질적 개별자를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양자는 장소적 제한 가운데 존재한다. 이는 물질적 존재 혹은 물질적 실체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실체는 동일한 장소에 두 개가 존재할 수 없다고 할 때, 이는 실체가 양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일한 장소를 점유한다는 것은 부피를 점유한다는 것이고, 이는 양(양자)과 관련되기 때문이다.35) 『임의토론집』에서 옥캄은 “이성에 의하면” 양은 실체와 성질과 구분되어지지 않는다고 한다.36) 왜 이성적으로 양은 실체와 구별되어지지 않는 것인가? 예를 들어, “하얀 것은 양자이다”라고 할 때, 하얀 것과 양자가 지칭하는 바가 동일하다. 하얀 것은 분명 장소적 제한을 가진 채로 존재하는 물질적 실체이기 때문이다. 분명하게 자연계 가운데 모든 양을 가진 것, 즉 양자는 어떤 물질적 실체이다. 그리고 이들은 한 명제 가운데 하나의 동일한 것을 지칭할 수 있다. 이럴 경우 이는 동일한 것이 되는 것이다.

양은 실체일 수는 없다. 그렇지만 자연계 가운데 양을 가지는 것이라는 명목적 정의를 가지는 양자는 물질적 실체일 수 있다. 하지만 양자와 실체를 동일하다고 단언하기에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데카르트(Descartes)는 우주 가운데 존재하는 자연물은 연장을 가지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를 하나의 실체로 이해했다. 그는 두 가지 실체를 가정하며, 이는 사고라는 속성을 가지는 정신적 실체와 연장이라는 속성을 가지는 물체, 즉 물질적 실체를 논한다.37) 옥캄은 양자가 실체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양자는 장소의 점유와 관련된다.38) 옥캄의 존재론적 입장이 데카르트와 엄밀하게 동일하다고 할 수 없지만, 중세에게서 근대 사고에로 넘어가는 기로에 섰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필자는 옥캄의 영향이 데카르트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시대의 흐름이 변해가고 있는 시점에 서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로 볼 때, 관계를 가지는 것과 양자는 영혼 외부의 구체적 개별자를 지칭할 수 있으며, 이는 동일한 것일 수 있다. “낙랑공주는 딸이며, 45㎏일 수 있다”에서 낙랑공주는 영혼 외부의 한 물질적 실체, 즉 물질적 개별자이다. 이는 아버지의 여성 자녀라는 명목적 정의를 가지는 딸이며, 동시에 일정한 양을 가지는 것일 수 있다. ‘관계’는 어떤 존재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와 여성 자녀의 관계인 ‘딸임’과 같은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이는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개별자에 관한 것이 아니다. 단면 아버지의 여성 자녀라는 명목적 정의를 가지는 내포명사로 관계명사인 ‘딸’은 구체적 개별자를 지칭한다.

 이러한 옥캄의 범주론적 논의는 그의 논리학적 의미론적 논의에 근거한 것이다. 내포명사나 추상명사 등과 같은 옥캄의 논리학적 의미론적 논의가 그의 존재론적 논의의 기반이 되어주는 것이다.


5. 다섯 개의 보편자.

 다섯 개의 보편자, 즉 류, 종, 차이, 속성, 우유는 포르피리우스의 『이사고게』 이후 중세 철학자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것이었다.39) 그리고 이는 중세인인 옥캄에게 수용되어야만 할 것이었고, 한편 탈-중세인을 꿈꾸는 옥캄에게는 넘어야할 것이었다. 근대 철학자인 데카르트에게 이들 보편자는 유사한 개별자들 모두를 한꺼번에 사유하기 위하여 동일한 하나의 관념을 사용함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그에게 이러한 것은 실재하는 존재자가 아니라, 사유의 양태에 불과하다.40) 그러면 옥캄에게는 이들 보편자가 어떤 것이었을까? 이 가운데 류(genus)와 종(species)에 집중하여 다루어보겠다.41)

 포르피리우스에게 류란 하나의 종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종들에 대해서도 서술되어지는 것이라고 정의한다.42) 인간과 고양이 그리고 개는 서로 다른 종이다. 각각은 스스로 하나의 종을 이루는 것이다. 그 종 아래에는 다시 개별적 개들이 포함되어질 것이다. 류는 이 모두를 포함하여 서술되어지는 것이다. 즉 한번에 이들 서로 다른 모두를 싸잡아 사유하고 서술되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류는 영혼 외부에 존재하는 것인가? 즉, 인간, 개 그리고 고양이를 한번에 사유하게 하고 서술되어지게 하는 ‘동물’이라는 류 개념은 영혼 외부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옥캄은 이에 관하여 단호하다. 그는 『논리학 대전』1,20에서 류에 관하여 세밀하게 다루면서, 류란 영혼 외부의 어떤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논의를 전개한다.43) 하지만 여럿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는 류라는 이 영혼의 지향(intentio animae)은 영혼 가운데의 어떤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 외부의 어떤 것을 지칭한다. 옥캄은 다음의 예를 든다. “인간은 동물이다.” 여기에서 ‘인간’이란 단어가 지칭하는 것과 동물이라는 것이 지칭하는 것은 동일해야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이 명제는 거짓이 될 것이다. 이 둘의 지칭대상이 동일하다면, ‘동물’이라는 단어의 지칭대상은 영혼 내부의 것이 아니라, 영혼 외부의 어떤 것이 되어야할 것이다. 이 명제에서 ‘인간’이란 단어가 지칭하는 것은 단어 그 자체가 아니라, 의미되어지는 사물을 지칭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주어(인간)가 표시하는 것은 술어(동물)가 표시하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44) 그러면 주어와 술어가 동일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옥캄이 말하려는 것은 주어와 술어인 ‘인간’과 ‘동물’이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지칭대상의 동일성에서 명제의 진위를 가려내자는 것이다.

 옥캄은 그의 『범주론 주해』의 서론에서 류, 종, 차이, 속성, 우유와 같은 술어들에 관하여 세밀하게 다룬다. 그는 이들 5개의 보편자, 즉 5개의 술어들은 제이 지향의 단어라고 한다.45) 제이 지향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이미 논의한 바 있다. 그것은 간단하게 개별자를 향한 제일 지향에 대한 지향이다. 종에 의하여 의미되어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류에 의하여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류는 종의 상위 개념이며, 공통된 존재이다.46) 그것은 이들 개별자에 대한 제일 지칭의 기호로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인간이다”라고 할 때, ‘플라톤’은 개별자를 향한 제일 지향의 단어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이러한 제일 지향에 대한 지향, 즉 제이 지향이다. 제이 지향으로 종은 개별자의 부분이 아니라, 개별자의 기호이다.47) 그렇게 이 두 단어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지만, 동일한 대상을 지칭하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위의 명제는 참이 되는 것이다.

6. 새로운 시작에서.

 『논리학 대전』 초반부의 논의에서 옥캄은 존재론의 기반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옥캄은 류와 종과 같은 보편자를 영혼의 지향 혹은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단지 보편자를 ‘만들어진 것’(fictum)이 아니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초기 옥캄은 보편자를 ‘만들어진 것’ 혹은 ‘상’이라고 했다. 이는 영혼이 지성 가운데 외부의 것과 유사한 것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 주체적 존재(esse subiectivum)를 가지지 못하며, 단지 대상적 존재(esse objectivum, 표상적 존재)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후기에 이르러 옥캄은 보편자를 영혼 가운데 주체적 존재를 가지는 사고행위(intellctio)라고 규정한다. 이 사고행위는 바로 제일 지향과 제이 지향과 같은 지향을 말한다.48) 이러한 근거에서 뵈너는 초기와 구분하여 후기 옥캄을 실재적 개념주의라고 정의한다. 개념론이란 보편자가 영혼 가운데 있으며(esse in anima), 영혼 외부의 것(extra anima)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단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주체적 존재를 가지는 것으로 있다. 그렇기에 그는 유명론자와 구분되는 개념론자이다. 개념론은 개념론인데, 뵈너는 그를 관념론적 개념론이 아니라, 실재론적 개념론이라 한다. 왜냐하면 보편적 개념의 내용은 개별적 감각 대상 가운데서 인지되며, 심적 대상 가운데 인지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다룬 바와 같이 “유대칠은 인간이다”에서 ‘인간’은 심적 대상에 대한 것일 수 없다. ‘유대칠’은 개별적 감각 대상 가운데 인지되는 것으로 영혼 외부의 것을 지칭한다. 그런데 ‘인간’이 이러한 것이 아닌 심적 대상과 관련된다면, “유대칠은 인간이다”라는 명제는 거짓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옥캄의 존재론적 입장은 관념론적 개념론이 아니라, 실재론적 개념론이 되는 것이다.49)

 옥캄은 『논리학 대전』에 이르러 이러한 그의 존재론적 입장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리고 이는 그의 논리학이 더욱 더 체계적으로 발전하였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논리학 대전』에서 옥캄은 그의 논리학에서 다루어진 다양한 용어를 정의하고, 이러한 논리학적 입장에서 존재론적 입장의 타당성을 주장한다. 특히 내포명사와 추상명사 등과 같은 명사에 관한 옥캄의 이해는 그의 존재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명사’(terminus, 名辭)는 옥캄에게 모든 언어적 논의의 시작이다. 즉 논리학의 시작인 것이다. 이는 중세 후기 논리학자에게는 누구나 그러했을 것이다. 이러한 명사가 모여서 표현(oratio)을 이루며, 이 표현 가운데 완전한 표현이 명제(propositio)가 된다. 이 명제는 삼단논법(syllogism) 그리고 생략삼단논법(enthymeme)과 같은 것을 이루기도 하고, 공의어와 결합되어 귀결(consequentia)의 형식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모든 논리학적 논의의 시작이 명사의 이해에서 시작된다. 그렇기에 명사의 속성은 논리학에 관심을 가진 중세 후기 철학자들에게는 일반적으로 다루던 분야였던 것이다. 또한 옥캄에게는 이 명사가 존재론의 시작에 서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그의 존재론적 논의 가운데 보편자의 이해와 실체와 양자 등의 논의는 명사에 관한 논의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기에 그가 13세기 많은 철학자와 구별되어지는 분기점도 바로 이러한 명사의 이해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는 명사의 이해에서 실재에 다가가는 다양한 방식을 나누고, 그에 따른 다양한 명사들을 구별한다. 인간과 인간성에서 인간은 구체명사이며, 인간성을 추상명사이다. 그리고 구체명사는 내포명사에 속하며, 이는 하나의 개별자를 향한 것이다. ‘양’과 ‘양자’도 마찬가지이다. 양은 추상명사이며, 또한 절대명사이다. 절대명사는 하나의 사물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며, 추상명사 역시 추상에 의한 명사이다. 그렇기에 “하얀 것은 양이다”는 거짓이지만, “하얀 것은 양자이다”라고 하는 것은 참이 된다. 왜냐하면, ‘하얀 것’이란 하양의 성질을 가진 것이라는 명목적 정의를 가진 것으로 장소를 차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양은 어떤 존재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 가운데 하나의 명사, 그 가운데도 추상명사나 절대명사 정도일 뿐이다. 반면 양자는 양을 가지는 것으로 어떤 개별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양이란 것이 우유적 존재를 가진다는 기존의 존재론과 옥캄의 존재론은 다른 길을 간다. 그리고 이러한 길의 차이는 바로 그의 명사에 관한 이해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얀 것’이란 하얀 성질(qualitas)을 가지는 것으로, ‘양자’와 같은 것일 수 있고, 이는 실체와 같은 것일 수 있다. 여기에서 같은 것일 수 있다는 것은 양자가 곧 실체라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이 동일한 하나의 개별자를 지칭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대칠은 인간이다”에서 ‘유대칠’은 하나의 개별자를 향한 제일 지향이다. ‘인간’은 ‘유대칠’과 동일한 개별자를 지칭하지만, 동시에 ‘유대칠’이란 개별자의 기호, 즉 제일 지향의 지향인 제이 지향이다. ‘인간’은 류개념이다. 류개념은 여럿에 대하여 하나의 것으로 사고하게하고 서술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에 의하여 이순신도 권율도 서술되어진다. 이것이 이 ‘인간’이란 류개념이 각각의 개별자에 대한 기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명제 가운데 사용되어질 때, 그것은 유대칠과 이순신 그리고 권율과 같은 개별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래야지 만이 “유대칠은 인간이다”란 명제가 참이 되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제일 지향은 명제 가운데 의미되어지는 것을 자연적으로 지칭하는 심적 명사이다. 즉, 개별자를 향한 ‘유대칠’이란 심적 명사는 명제 가운데 자연적으로 의미되어지는 것이 지칭하는 것이다. 반면, ‘인간’은 제일 지향의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유대칠이란 명사를 의미하는 기호이다. 결국 이 둘은 하나의 것을 명제 가운데 지칭한다.50)

 사실 ‘인간’은 ‘인간성을 가지는 것’이라는 명목적 정의를 가지는 내포명사이며, 구체명사이다. 이는 하나의 개별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유대칠은 인간성이다”는 거짓이다. 왜냐하면 ‘인간성’이란 추상명사이며, 절대명사인데, 이는 하나의 개별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여럿이 의미하는 것을 동일하게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성’에 지시 대명사가 더해져 하나의 개별자에로 한정될 때, 참이 될 수 있다. 즉 “유대칠은 이 인간성이다”는 가능한 것이다.51)

 이 모든 존재론적 논의는 그의 논리학적 논의의 이해에서 시작되고, 더욱더 탄탄한 체계를 가지게 된다. 이렇게 그의 실재론적 개념론의 체계는 그의 논리학의 발전과 함께 더욱 더 체계화되어가며 존재론적 내용의 발전을 이루어간다.

 본 논고에서 이루어진 모든 논의는 옥캄에 관한 새로운 무엇이 없을 수 있다. 이것은 그저 옥캄 논리학과 존재론의 시작을 위한 작은 참고서 정도이다. 아니 옥캄의 『논리학 대전』이란 교과서를 두고 고민하고 기록해간 노트 정도이다. 노트란 아는 만큼 그리고 들리는 만큼 적혀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곳의 논의도 결국 한계를 가진다. 이 한계는 필자에게 다시 짐이 될 것이다. 이 짐의 무게를 덜어갈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하여 여기에서 우선 접어둔다.


1) A,Maier, "Achievements of Late Scholastic Natural Philosophy" In On The Threshold of Exact Science, trans. S.Sargent (Philadelphia: 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 1982), 145-146.


2) P.Vignaux, Philosophie au Moyen Age, ed.R.Imbach (Paris: Vrin, 2004), 233-235; P.Vignaux, "Occam et Duns Scot", In Dictionnaire de de Theologie Catholigue 11 (Paris: Librairie Letouzey et Ane, 1931), 882. J.Weinberg, Abstraction, Relation and Induction (Madison&Milwaukee: The University of Wisconsin, 1965), 44-47. 이들 논의는 옥캄이 가지는 보편자에 관한 사고와 구분(distinctio)이 스코투스의 것과 토마스의 것과 구별되어짐을 보이고 있다.


3) 필자는 이곳에서 terminus는 명사(名辭)라고 옮기고, nomen은 명사(名詞)로 경우에 따라선 이름으로 옮긴다. 전자는 사전적 의미에서 논리학의 용어로 명제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정의되며, 후자는 문법학의 용어로 품사의 하나를 의미한다. 옥캄은 전자의 명사를 후자의 명사와 동사 그리고 그 외 여러 품사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렇지만 옥캄 자신은 명사(名辭)를 다루면서 명사(名詞)에 집중하여 다루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당시 옥캄주의자들에 의하여 적혀진 위-옥캄문헌이나 그 외 다른 옥캄의 문헌을 통하여 볼 때, 많은 경우 이 둘은 같이 사용되곤 한다. 예를 들어, 관계명사(名辭)는 종종 관계명사(名詞)로 사용되곤 한다.


4) Ockham, Summa logicae 1,1 (OP.1, 7.3-4).


5) Ibid., (OP.1, 7, 6-8); cf. Aristoteles, Prior analysis 1,1.


6) P.King, "William of Ockham: Summa logicae" In Central Works of Philosophy (vol.1) Acumen (2005), 251.


7) Ps-Ockham, Tractatus minor logicae 1,1 (OP.7, 4,2); Ps-Ockham, Elementarium logicae 1,1 (OP.7, 63-63). 이 저작이 옥캄의 것이라는 점에는 많은 것이 의문으로 남아있으며, 의심스러운 저작이라 필자는 위()-옥캄이라고 칭하였다.


8) Ockham, Summa logicae 1,2 (OP.1, 9-10).


9) William of Sherwood, Treatise on Syncategoremata, trans. N.Kretzmann (Miineapolis: University of Miineasota Press, 1968), 90-91; E.Moody, Truth and Consequnece in Mediaeval Logic (Amsterdam: North-Holland Publishing Company, 1953), 33.


10) Ps-Ockham, Elementarium logicae 1,1 (OP.7, 63.28-33).


11) A.Broadie, The Circle of John Mair (Oxford: Clarendon Press, 1985), 10.


12) Boethius, In librum de interpretatione, ed. prima 1 (PL.64, 298D-299A).


13) Thomas, Expositio libri peryemenias 1.2. 토마스에게 과연 관념이 일차적으로 인식대상이며, 이차적으로 외적 세계를 인식대상으로 삼는가의 여부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즉 그를 그저 표상주의적 실재론라고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필자는 당시 토마스주의자들에 대한 일반적 해석 경향을 따른다. cf.B.Lonergan, Verbum: Word and Idea in Aquinas, ed. D.Burrell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69); A.Kenny, "Intentionality: Aquinas and Wittgenstein" In The Legacy of Wittgenstein (Oxford: Basil Blackwell Publisher Ltd., 1984), 61-76; 이재경, 「토마스 아퀴나스와 실재론의 안팎」.


14) A.Maurer, The Philosophy of William of Ockham in the Light of Its Principles (Toronto: PIMS, 1999), 16-17.


15) Ockham, Ordinatio 1, prol.1 (OT.1, 15.14-38.10); Ockham, Quodlibeta 6,6 (OTH.9, 606.61-607.66). 직관적 인지에 관한 옥캄의 논의도 옥캄에 대한 논의에서 매우 중요하고 또한 많은 개별적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부분이다. 아울러 이는 중세 후기 철학의 핵심적 문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며, 어떤 면에서 중세 후기 철학의 성격을 살필 수 있는 논의이기도 하다.


16) C.Panaccio, "Semantics and Mental Language" In Cambridge Companion to Ockham, ed. P.Spad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54-56.


17) Ps-Ockham, Tractatus minor logicae 1.1 (OP.7, 6.49-52); Ps-Ockham, Elementarium logicae 1,8 (OP.7, 67.1-68.18).


18) Aristoteles, Poetica, c.20, 1457a 10 이에 대한 우리말 역본은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천병희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 1990)참조, Thomas and Cajetan, On Interpretation, trans. J.Oesterle (Milwaukee: Marquette University Press, 1962), p.37. Ps-Ockham, Tractatus minor logicae 1,1 (OP.7, 4.3-7) 명사에 관한 이러한 정의는 옥캄 이외 뷔리당과 같은 당시 이들에게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것이었다.


19) Ockham, Summa logicae 1,10 (OP.1, 35-38); P.King, "William of Ockham: Summa logicae", 253.


20) 우리말로 ‘흰 것’은 하나의 명사가 아니다. 그러나 라틴어로 이는 하나의 단어인 album이다. album은 여기에서 중성 형용사가 아니라, ‘흰 것’이라 의미의 명사인 것이다. 라틴어가 굴절어이고, 우리말이 교착어라는 서로 다른 언어의 한계로 쉽사리 번역하기 힘들다. album이 라틴어로는 하나의 명사이지만, 우리말은 ‘흰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21) Ps-Ockham, Tractatus minor logicae 1.1 (OP.7, 6.53-69); A.Maurer, The Philosophy of William of Ockham in the Light of Its Principles , 20.


22) P.King, "William of Ockham: Summa logicae", 253-254.


23) Ps-Ockham, Tractatus minor logicae 1.1 (OP.7, 6.70-7.80).


24) Ockham, Summa logicae 1,11 (OP.1, 38-41); Ps-Ockham, Elementarium logicae 1,3 (OP.7, 64.5-8).


25) 옥캄을 포함하여 중세 지향에 관한 논의는 중세 무슬림 철학자 아비첸나에게서 연원된다. 이에 관한 연구서는 이재경, 「아랍철학자 아비첸나와 지향성 이론」『서양고전학연구』23 (2005), 177-205; K.Gyekye, "The Terms 'prima intentio' and 'secunda Intentio' in Arabic Logic" Speculum 46 (1971), 32-38를 참조하기 바란다. 옥캄 역시 근본적으로 제이 지향과 지일 지향에 관한 논의를 아비첸나에게서 구하기에 아비첸나의 지향성 이론에 관한 논의는 옥캄의 논의를 이해함에 도움이 될 것이다.


26) Ibid. 1,12 (OP.1, 41-44); Ps-Ockham, Elementarium logicae 1,3 (OP.7, 64.20-65.27). 제이 지향가 제일 지향에 관한 논의는 C.Panaccio, "La philosophie du language Guillaume d'Occam" In Sprachtheorien in Spaetantike und Mittelalter, ed. S.Ebbesen (Tuebingen: Gunter Narr verlag, 1995), 192-194를 참조하라.


27) E.Moody, The Logic of William of Ockham (New York: Russell&Russell, 1965), 43-45.


28) Ibid., 112; G.Leff, William of Ockham (Rowman and Littlefield: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75), 129.


29) Aristoteles, Categoriae 4, 1b 25-27. 이에 관한 우리말 역본은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론­명제론』, 김진성 옮김 (서울: EJB, 2005)참조,


30) Ockham, Quodlibeta 5,21-23 (OT.9, 559-574).


31) Ockham, Summa logicae 1, 49-54 (OP.1, 153-179).


32) E.Moody, The Logic of William of Ockham , 160.


33) Ockham, Summa logicae 1, 44 (OP.1, 132-139); Ockham, Quodlibeta 4, 26 (OT.9, 426-434); Ps-Ockham, Elementarium logicae 1,16 (OP.7, 75.1-76.15).


34) 중세 신학에서 실체변화와 옥캄의 논의는 G.Buescher, The Eucharistic Teaching of William Ockham (Washington, D.C.: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50)을 참조. 


35) G.Buescher, The Eucharistic Teaching of William Ockham , 72-74.


36) Ockham, Quodlibeta 4, 26 (OT.9, 432).


37)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원석영 옮김 (서울: 아카넷, 2002), 1부 53 ; D.Garber, Descartes' Metaphysical Physics (Chicago-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63-64. 데카르트의 많은 논의는 중세 철학과 비교되며 다루어지고 있다. 사실 필자의 눈에도 데카르트의 많은 논의는 중세 후기 논의의 연장선에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데카르트는 어떤 의미에서 중세 철학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가 고민한 많은 논의의 대상에 있어서 많은 경우는 중세 철학자들의 고민과 일치되어지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데카르트와 중세 후기 철학 사이의 많은 논의에 관한 연구와 그 결과물을 계획하고 있는 중이다.


38) G.Buescher, The Eucharistic Teaching of William Ockham , 73.


39) 포르피리우스와 보에시우스 「포르피리우스의 “이사고게”와 보에시우스의 “두 번째의 주해”」, 이재룡 옮김,『가톨릭 신학과 사상』26호 겨울 (1998), 166-207. 5개의 보편자는 근대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1부 57 참조.


40)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1부 58-59.


41) Ockham, Summa logicae 1, 18-26 (OP.1, 62-89); Ockham, Exoositio on librum porphyrii de praedicabilibus 1 §§ 1-16 (OP.2, 17-131); Ps-Ockham, Elementarium logicae 1,9-14 (OP.7, 68-74); Ps-Ockham, Tractatus minor logicae 1.2 (OP.7, 7-8).


42) 포르피리우스와 보에시우스 「포르피리우스의 “이사고게”와 보에시우스의 “두 번째의 주해”」, 171.


43) Ockham, Summa logicae 1, 20 (OP.1, 68.6-7).


44) Ibid., (OP.1, 68.8-19); Ockham, Expositio on librum porphyrii de praedicabilibus 1, § 8 (OP.2, 27.10-15).


45) Ockham, Exoositio on librum porphyrii de praedicabilibus 1, prooemium (OP.2, 8-16).


46) Ibid., § 8 (OP.2, 27.21-23).


47) Ockham, Summa logicae 1, 21 (OP.1, 70.25-28).


48) Ockham, Quodlibeta 4, 35 (OT.9, 475). 옥캄의 연대기적 논의에 대하여 Ph. Boehner, "Relative date of Ockham's Commentary on the Sentences" In Collected Articles on Ockham ed. E.M.Buytaert (New York: The Franciscan Institute, 1992(2ed)), pp.99-100 ; W. Courtenay, "The Accademic and Intellectual World of Ockham"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Ockham, ed. P.Spad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17-30. 참조.


49) Ph.Boehner, "The Ralistic Conceptualism of William of Ockham" In Collected Articles on Ockham, 157-174. 이 뵈너의 연구와 다음의 연구서를 비교하며 읽는 것도 옥캄의 개념론을 연구하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다. E.Hochstetter, Studien zur Metaphysik und Erkenntnislehre Wihelms von Ockham (Berlin: Gruyter,1927). 호스스테터의 연구 성과는 많은 점에서 뵈너의 연대기적 연구의 선구적 해석을 보이고 있다. 그 외에도 다음의 것을 참고하기 바란다. M.Adams, "Ockham's Nominalism and Unreal Entities" The Philosophical Review vol.86 (1977), 144-176; F.Kelley, "Some Observations on the 'Fictum' Theory in Ockham and Its Relation to Hervaeus Natalis" Franciscan Studies 38 (1978), 260-282.


50) Ockham, Summa logicae 1, 12 (OP.1, 41-44).


51) Ibid., 1, 7 (OP.1, 27.135-136). 옥캄의 지시 대명사에 관한 것은 C.Panaccio, "Guillaume D'Occam et les pronoms demonstratifs" In Sprache und Erkenntnis im  Mittelalter, ed. A.Zimmermann (Walter de Gruyter: Berlin, 1981), 465-470.을 참고하라. 가리키는 대상의 현존은 일상적 언어 사용에서 지시를 포함한다. 그리고 옥캄에게 보편자는 사물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이는 단지 공통 명사일 뿐이다. 그런데 이 공통명사에 직접적은 지시가 주어지며, 이는 개별자와 관련되게 된다. 이는 하나의 개별적인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