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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의자리

중세 크라카우 철학의 이해: : 15세기 후기 크라카우와 크라카우의 헷세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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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크라카우 철학의 이해

: 15세기 후기 크라카우와 크라카우의 헷세의 철학.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1. 15세기 크라카우에선.


 쓸데없는 짓을 한다. 어쩌면 15세기 크라카우(Krakau, Cracow) 지방의 철학을 정리하고 소개하려는 필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후기 중세 철학에 관심이 많은 필자에겐 이 논의는 매우 중요하다. 우선 그 당시 그곳은 후기 중세 철학의 여러 흐름이 집결하고 논쟁되어가면서 다음 시대를 기약해 가던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15세기 전 후기 스콜라 철학에서 프라그(Prag) 대학은 광대한 철학적 논의가 집결하던 곳이다. 그곳은 당시 학문계의 선두에 선 파리와 옥스퍼드의 가르침과 함께 그 자신의 것을 가르치고 논의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지적 유산을 크라카우로 넘어간다. 그렇게 넘어간 지적 유산의 대표적 상품이 바로 ‘뷔리당주의’(Buridanismus)이다. 이러한 유입은 1415년을 기점으로 수동적으로 일어났다.1) 이러한 수동적 유입은 크라카우에서 철학적이고 학문적 운동을 일어나게 하였다. 논리학에서 뷔리당의 “구논리학” 주해들과 ꡔ소크라테스적 논박ꡕ 그리고 ꡔ분석론 전서ꡕ의 주해 이어서 페브루스 히스파누스의 ꡔ논리학 개요ꡕ(Summulae logicale)에 관한 뷔리당의 주해가 알려졌다. 논리학 뿐 아니라, 자연철학에서도 뷔리당의 영향은 컸다. 심리학에서도 뷔리당은 린도레스의 로렌츠(Lorenz von Lindores)와 함께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기상학의 연구에서도 니콜라스 오렘(Nikolas Oresme)과 작센의 알베르투스(Albert von Sachsen) 그리고 아이리의 페트루스(Peter von Ailly)가 사용되었고, 윤리학의 연구에서는 인겐의 마르실리우스(Marsilius von Inghen)와 함께 뷔리당이 논의되었다.2) 예를 들어, Bartholomaeus von Gaslo(1362-1407)는 뷔리당과 작센의 알베르투스를 자신의 윤리학 저서에서 인용하고 있다.  또한 크라카우 대학의 첫 윤리학 교수들, Nikolaus von Glagau, Lukas von Kosmin Wielki, Nikolaus Badwissen von Aowy Sacz와 같은 이들은 뷔리당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수동적 유입 이후 곧 크라카우 자신의 성과물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Andreas Wezys(1377-1430)는 자연철학에서 자연학의 대상은 움직이는 존재자(ens mobilis)라고 하면서 저서를 남겼고, 자연철학의 교재를 저술했다. Andreas von Kokorzyn(1379-1435)는 중요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주해를 남 겼다. 논리학의 영역에서 당시 크라카우에선 Nikolas von Kazlow(1378-1444)가 의미 있는 저서를 남겼다.3) 그렇다고 크라카우에는 뷔리당의 추종자만이 존재한 것은 아니다. 1477년 이후 Johannes von Glogau와 Jakob von Gostynin과 같은 알베르투스주의자가 있었다. 그 외에도 Michael von Biestrzykow와 같은 스코투스주의자가 있었다.4) 하지만 무엇보다 뷔리당의 영향력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바로 크라카우의 헷세(Hesse von Krakau, 1389-1456)이다. 그러면 15세기 크라카우에서 일어난 철학을 더욱 더 자세히 정리하고, 이어서 크라카우의 헷세의 위상을 살피기로 한다. 


2. 후기 스콜라 철학의 전람회장.


 이미 위에서 15세기 당시 뷔리당을 중심으로 일어난 크라카우의 철학을 소개하였다. 그러면 더욱 더 자세히 이 당시 크라카우의 철학을 마르코프스키(M.Markowski)의 소개에 따라서 정리해보기로 한다. 후기 중세 철학의 온갖 논의가 서로 만나서 논의되고 있던 크라카우에선 두 가지 큰 흐름이 있었다. 그것은 개념론(terminismus)과 실재론(realismus)이다. 이는 철학의 많은 부분에서 일관되게 나타났다. 첫째 논리학이다. 첫 논리학적 성과는 1402년 이후 등장한다. 그리고 이 분야에서 처음으로 두드러진 성과는 헷세에 의하여 일어난 것으로 1415년 이후 이루어졌다. 이는 뷔리당학파의 개념론의 영향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논리학의 대상은 의미론적으로 파악되어진다. 헷세는 논리학의 대상은 심적 존재자의 기호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논리학의 가르침은 학문적 사고의 수단과 관련된다고 한다. 그리고 15세기의 막바지가 되면, 개념론이 아닌 실재론의 도입 가운데 논리학의 의미 있는 논의가 Johannes von Glogau와 Michael von Brestrzykow 그리고 Michael Falkeuer von Breslau에 의하여 이루어졌다.5) 둘째 수사학이다. 당시 수사학은 두 가지 흐름을 가진다. 하나는 문학적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적이다. 전자의 경우는 말함의 기술과 관련되어 발전되었고, 후자는 윤리학과 경제학 그리고 정치학적 논의와 관련되어 다루어졌다. 셋째 문법학이다. 크라카우 대학에선 오랜 시간 문법학이 철학적으로 다루어지지 못 했다. 그리고 1460년 이후 처음으로 흥미 있는 논의가 등장했다. 개념론에 근거하여 ‘의미의 양상’(modus significandi)에 관한 논의와 함께 문법을 논의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은 의미의 양상을 존재의 양상(modus essendi) 없이 심적 존재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사물의 존재의 양상에 기초하는 사변문법도 15세기 이후 등장한다. 그리고 스코투스적인 극단적 실재론의 근거에서 의미의 양상에 관한 논의가 크라카우에 16세기 초 Johannes von Stobnica에 의하여 저술되어진다.6) 넷째는 인식론이다. 15세기 인식의 자발적 학문은 없었다. 당시 인식의 문제는 진리의 확인의 올바른 수단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크라카우의 개념론자’들은 주체적 확신에 의하여 이를 근거한다. 이러한 이들로는 다음과 같은 이들이 있다. Peter von Sienno, Paul von Wurzen, Johannes von Slupcza, Johannes von Raciborsko와 같은 이들이다. 반면 실재론자들은 객체적 확실성에 근거한다. 이와 같은 이로는 Johannes Orient, Johannes von Glogau, Johannes Sommerfeld, Sigismund von Przewodow과 같은 이들이다. 이 둘의 의견 차이는 전체 철학의 문제로 이어진다.7) 인식론에서 이 의견의 차이는 진리의 신뢰도에 관한 것에서 일어난다. 개념론자들은 진리의 주체적 개념화에 의해 논의를 전개하며, 근본적으로 진리의 기준은 본성적인 인간의 사고행위 혹은 이해의 판단에 있다고 본다. 이는 옥캄의 후기 사상에서 사고-이론의 그것과 같은 것이다.8) 이러한 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요한 권위에 대한 도전을 낳았다. 반면 크라카우의 실재론자들은 객체적 진리를 옹호한다. 그러면서 주체 외부, 즉 영혼의 외부에 실재하는 존재자와의 일치에 의한 인식이란 요소를 고수한다. 하지만 뷔리당의 세례를 받은 크라카우의 개념론자들은 자신들의 비판주의적 견해를 고수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에서 이어진 절대적 인식의 개념을 버리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개연적 인식을 인식론에 중심에 놓게 한다.9) 그리고 이는 개연주의(Probabilismus)의 인식론 가운데 펴지게 되며, 이로 인하여 개연적인 것이 인식의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10) 다섯째는 존재철학이다. 여기에서 크라카우에 흐르는 두 흐름이 다시 명확하게 구별된다. 하나는 개념론자들이다. 다른 하나는 실재론자들이다. 개념론은 1418-1460년 사이 일어난 뷔리당의 영향에서 일어난 새로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관한 주해의 주인공들인 Peter von Sienno, Paul von Wurzen, Johannes von Slupcza, Johannes von Raciborsko에 의하여 중흥된다. 이들에게 존재철학의대상은 존재자(ens)라는 개념이다. 이와 함께 인간은 개별존재자를 인식한다고 논의한다. 그 가운데 한 명인 Peter von Sienno의 관점에서 범주는 단지 기호에 지나지 않으며, 형이상학은 그 내용을 논의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개별화의 원리는 실체의 존재자의 우유들로 표기된다고 한다. 그리고 존재와 본질의 구별에 있어서도 그는 이는 단지 개념적으로 구별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질료적 존재자는 형상과 질료의 합성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이 합성된 존재자는 형상보다 더 완전하다. 그리고 단지 신만이 유일하게 단순한 존재라고 한다.11) 이러한 개념론자들의 논의 이외에도 1426년 크라카우의 실재론자인 Johannes Orient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주해하였다. 또한 여섯째는 자연철학이다. 헷세와 Andreas Wezyk 그리고 그의 학파는 15세기 변화와 운동이란 관점에서 존재자를 다룬다. 그 외에도 천체의 질료성과 합성체에 관한 논의도 Peter von Sienno와 Johannes von Slupcza 그리고 Johannes von Kety와 헷세에 의하여 논의되었다. 또한 1420년에는 땅의 운동에 관한 문제가 크라카우 대학에서 토론되어졌다.12) 당시 크라카우 대학의 자연철학에선 알베르투스주의, 에지디우스주의, 베르소르주의, 스코투스주의의 영향이 논의되고 있었다. 물론 뷔리당의 영향은 두말할 것도 없다. 헷세는 그의 영향에서 자연학에서 임페투스(Impetus)를 논의하기도 하였다.13) 일곱째는 인간학이다. 인간학에서 초기에는 뷔리당의 영향을 그리고 후기에는 린도레스의 로렌츠의 영향 가운데 있었다. 1417년 Paul von Wurzen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ꡔ영혼론ꡕ에 관한 크라카우 지방의 첫 주해를 작성했다. 1430년 이전에는 린도레스의 로렌츠의 해법에 따른 헷세에 의한 주해가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토마스와 알베르투스 그리고 에지디우스 로마누스의 권위에 신학의 문제에 증거로 삼았다. 하지만 심리철학 혹은 심리학은 이러한 범위를 넘어 더욱 더 다양했다. Andreas von Kascian은 15세기 중반 크라카우에 아베로에스의 심리철학을 도입한다. 그 외에도 Micheal von Brestrzykow에 의하여 1490년 스코투스적 견해가 심리철학에 유입되었다. 또한 1468년엔 Matthias von Szydlow와 같은 이에 의하여 토마스의 사유에 충실한 가운데 심리철학의 논의가 전개되었다.14) 


2. 그곳에서 크라카우의 헷세는?


 그는 15세기 초반 크라카우의 뷔리당주의 학파에 의미 있는 철학자였다. 심리학에서 그가 적은 ꡔ영혼론의 질문들ꡕ(Quaestiones in Aristotelis libros de anima)은 당시 크라카우의 심리학에서 영향력 있는 고전이 되었고, 그 당시 많은 문헌에서 ‘베네딕토 헷세의 정신에서’(ad mentem benedicti hesse)라는 말이 발견되어진다.15) 그리고 1421년 자연학에 있어서도 그는 ꡔ자연학에 관한 질문들ꡕ(Quaestiones super octo libros physicorum aristotelis)을 적었다. 이곳에선 수학에 관한 이론들이 전개되고 있다.16)

 그는 논리학과 자연철학에서 뚜렷하게 뷔리당의 영향을 받았다. 1420년 “구논리학”에 관한 주해를 저술하였으며, 이는 당시 크라카우 출신의 논리학 저서 가운데 가장 위대한 논리학적 저작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학문론과 방법론에 관한 의미 있는 논의를 전개하였으며, 그의 방법론적 입장은 그의 모든 철학적 저작에서 드러난다. 그는 논리학에선 논리학의 대상을 기호(Zeichen)로서 기호를 위한 기호라고 하며, 사고된 존재자의 기호라고 하였다. 또 이 기호는 자의 적으로 이해에 의하여 산출되지 못하며, 영혼 외부의 사물 가운데 그 실재적 근거를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학의 대상에 관한 연구는 매우 흥미 있는 것이다.17) 그리고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ꡔ천체론ꡕ 주해에서 양적 존재자에 관하여 논의하고 있으며, 천체물질에 관한 논의를 다루었다. 또한 자연학에선 뷔리당의 영향 가운데 임페투스(Impetus)를 주장하였다.18) 그러면 본격적으로 헷세의 논의와 그의 역사적 위치를 살펴보자. 

 15세기 크라카우의 자연학적 성과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간단하게 역사적 사례의 하나를 들어보자. 근대 자연학의 선구자인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는 15세기 말 1491-1495년 사이 크라카우 대학에서 수학하였다는 것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이미 마이어(A.Maier)와 무디(E.Moody) 같은 이들에 의하여 근대 자연학이 중세 후기 14세기 뷔리당과 같은 이들에 의하여 영향 받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면 16세기의 갈릴레이와 같은 이들에 14세기 뷔리당의 논의가 넘어가기 위해선 15세기의 논의가 필요하게 된다. 즉 이 15세기는 중세의 지적 자산을 16세기에 넘겨진 가교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15세기의 가교 가운데 우리가 논하는 있는 크라카우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헷세가 있다. 헷세는 이미 앞서 말한바와 같이 뷔리당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수용한 뷔리당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론도리우스(Londorius)의 중계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실상 헷세는 그의 문헌의 15%를 론도리우스의 것에서 빌려왔다. 또한 그 가운데 개념들을 정의하였다. 그렇다고 헷세가 그의 것이나 뷔리당에게만 매여있던 것은 아니며, 당시 크라카우의 자연철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많은 이들의 논의를 인용하고 있다.19)

 하지만 헷세는 누구보다 뷔리당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뷔리당과 같이 임페투스를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자유낙하의 경우 낙하하는 물체는 임페투스에 의하여 가속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의 자연적 위치를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헷세는 임페투스를 주장하였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장소에 관한 의미 있는 논의를 전개하였다. 그에게 장소는 부동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이었다. 장소는 ‘관찰’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실체이며, 주변의 의미에서 우유이다. 그에게 물체와 합성된 운동은 장소의 본성이 아니다. 그리하여 그는 뷔리당과 같이 장소는 동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장소에 관한 사유는 세계의 중심에 관한 근대적 사유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세계의 중심에 관한 사유와 임페투스라는 것에 관한 사유는 16세기 자연학으로 넘어간다.

 자연학의 영역에 포함되는 문제로 심리철학은 크라카우에서 역시나 뷔리당의 영향을 크게 입었다. Paul von Wurzen과 같은 이들은 15세기 초에 이미 영혼론의 주해를 행했으며, 이는 한편으로 토마스, 알베르투스, 로마의 에지디우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뷔리당의 영향 가운데 있는 것이었다. 15세기 심리철학의 문제에서 모든 것이 뷔리당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Johannes de Glogow와 같은 급진적 알베르투스주의자들은 인간 지성을 두가지 부분으로 구별한다. 하나는 신적 부분으로 상위의 부분이고, 다른 것은 인간적 부분으로 하위의 부분이다. 그리고 후자는 심적 본질과 관련된다고 한다. 이러한 심리철학의 논의말고도 1476년에는 Laurentuius Grodziskide Poznania는 토마스적 영향 가운데 영혼론 주해를 작성하였다. 이어서 1485년에는 Michael de Biestrzykowo가 스코투스적 영향 가운데 ꡔ영혼론ꡕ을 주해하였고, 이에게는 또 다른 스코투스 주의자인 Johannes de Stobnica와 같은 이들이 배출되었다. 헷세는 역시 ꡔ영혼론 주해ꡕ를 남겼다. 그는 인간은 육체와 영혼의 합성체라고 한다. 그러면서 인간의 형상,즉 실체적 형상은 영혼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의 어떤 형상은 질료와 함께 그자체로 묶이며, 이로 인하여 실체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다섯 가지 형상을 열거한다. 이는 요소의 형상(forma elementi), 복합의 형상(forma commixti), 식물혼(anima vegetativa), 감각혼(anima sensitiva), 이성혼(anima rationis)이다. 그 가운데 처음의 4가지 형상은 질료의 등급에 의하여 제어되는 형상이며, 오직 이성혼만이 질료의 압박에서 덧어나 넘어서 있다. 그리고 이는 순수하게 비질료적이다. 여기에서 만일 중세철학사의 중요한 문제를 알고 있는 이라면, 지성단일성과 관련된 이중진리설의 문제를 떠올릴 것이다. 이에 관해서 헷세는 나름의 해안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차후에 다루어보자.

 당시 심리, 즉 인간 정신에 관한 것은 지성뿐 아니라, 의지의 문제도 중요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의지와 관련된 심리결정론에 관한 것이 그러한 것이다. 이에 관하여 헷세는 주지주의적 입장이 아니라, 주의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그는 인간 의지는 자유의 근거로 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도 쉬운 것이 아니다.

당시 심리, 즉 인간 정신에 관한 것은 지성뿐 아니라, 의지의 문제도 중요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의지와 관련된 심리결정론에 관한 것이 그러한 것이다. 이에 관하여 헷세는 주지주의적 입장이 아니라, 주의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그는 인간 의지는 자유의 근거로 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도 쉬운 것이 아니다.    

 지성 혹은 인간 영혼과 관련되어 인식의 문제에서도 영육의 관계에 관한 것을 알 수 있다. 헷세에 의하면 영혼은 인식에 있어서 오직 영혼 자신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식은 인간 전체로 가능한 것이다. 즉 영혼과 육체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다. 영혼은 육체의 조력 없이 스스로 인식을 이루지는 못한다. 즉 육체는 인식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인간이 보편개념을 형성할때 인식은 감각기억과 사고능력에 의존한다. 외부감각과 사고능력은 감각기관과 뇌(腦)의 조력으로 기능한다. 여기에서 인간영혼은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사고력을 가진다. 왜냐하면 인식형상을 수용할때는 수동적이지만, 인식을 형성할때는 능동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과정, 즉 인식과정은 인간 영혼과 육체의 조력으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죽음 이후 인간은 육체 없이 직접적으로 이해한다고 인식한다고 한다. 

 이러한 헷세의 자연학과 관련된 논의에서 필자는 다음의 것을 주목하려 한다. 우선 헷세가 뷔리당의 영향을 받으며,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적 논의에 근간을 두면서 이를 넘어서려 했다. 예를 들어 수학에 관한 논의에서 그리고 자연학에서 임페투스와 장소에 관한 논의에서 그는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을 넘어갔다. 특히나 근대 역학의 길로 넘어갔다. 하지만 헷세는 한편 고민하는 철학자이며, 학자였다.  예를 들어 그는 시간의 문제에서도 주관주의와 객관주의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근대적 사유를 준비하는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상 그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새로운 길(via moderna)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이 새로운 길은 뷔리당과 무관하지않았다. 크라카우는 14세기 뷔리당의 지적 유산을 이어받아 이를 연구한 곳이다. 그리고 16세기 갈릴레이와 같은 이들이 역학의 근원이 중세적 자연학이며, 그렇다면, 15세기 크라카우는 적어도 14세기와 16세기의 사이에도 흐르던 중세자연학  일면을 보여줄것이다. 그러면 중세 철학은 어디까지인가라는 문제도 이 시간의 철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무우 썰듯이 시대를 구분하는 철학사라는 것은 매우 인위적이란 것을 15세기 크라카우는 우리에게 스스로의 역사로 보여준다. 바로 이 점에 필자가 그 당시 크라카우의 철학적 논의를 정리하려는 이유이다.

 이곳은 바로 사상사적 위치, 혹은 엄밀하게 적어도 자연학사적 위치에서 근대적 사유와 중세적 사유의 가교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을 헷세를 중심으로 다루어 보았다.     

                     

          




1) Markowski, M., "Der Buridanismus an der Krakauer Universitat im Mittelalter", In Die Philosophie im 14. und 15. Jahrhundert, ed. O.Pluta (Amsterdam: Verlag B.R.Gruener, 1988), S.245.


 

2) Ibid., SS.246-248.


 

3) Ibid., SS.248-250.


 

4) Marawski, M., "Die philosophische Wissenschaften an der Krakauer Universitaet im 15. Jahrhundert" In Philosophie im Mittelalter, ed. Beckmann et al. (Hamburg: Felix Meiner Verlag, 1996), S.364.


 

5) Ibid., S.360.


 

6) Ibid., S.361.


 

7) Ibid.


 

8) Boehner, Ph., "Relative date of Ockham's Commentary on the Sentences" In Collected Articles on Ockham (New York: The Franciscan Institute, 1992(2ed)), pp.99-100. 이러한 관점에서 옥캄은 유명론을 넘어서 개념론으로 이해된다.


 

9) 이 논의는 스코투스에 의하여 일어나고, 옥캄에서 발전하게 된 직관적 인지에 관한 세밀한 논의가 요청되는 부분이다. 이는 직관적 인지와 옥캄과 그 주변 시대의 인식론적 논의의 이해에서 제대로 이해되어진다. 이에 관하여 필자는 차후 중세 후기 인식에 관한 체계적인 논의를 약속한다. 


 

10) Marawski, M., "Die philosophische Wissenschaften an der Krakauer Universitaet im 15. Jahrhundert", S.362.


 

11) Ibid., S.363.


 

12) Ibid., S.365.


 

13) Markowski, M., "Der Buridanismus an der Krakauer Universitat im Mittelalter", SS.253-254.


 

14) Marawski, M., "Die philosophische Wissenschaften an der Krakauer Universitaet im 15. Jahrhundert", SS.366-367.


 

15) Burrichter, B. et al., "Die Diskussion der Frage nach der Unsterlichkeit in den des Benedit Hesse von KraKau" In Die Philosophie im 14. und 15. Jahrhundert, SS.573-574.


 

16) Wielgus, S., "Ausgewaehlte Problem der des Benedikt Hesse von Krakau" In Dis Philosophie im 14. und 15. Jahrhundert, S.85.


 

17) Markowski, M., "Der Buridanismus an der Krakauer Universitat im Mittelalter", SS.250-251.


 

18) Ibid., SS.253-254.


 

19) Wielgus, S., "Ausgewaehlte Problem der des Benedikt Hesse von Krakau", SS.85-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