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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성사에 관한 중세 철학자들의 논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중심으로-
유대칠
(토마스 철학 학교)
1.0 가톨릭 교회에서 행해지는 7성사들은 중세 철학자와 신학자들에게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었다. 그 가운데 유독 성체성사가
그러하다. 예수로 변화한 빵의 실체라는 것은 쉽게 설명되기 어려운 신학적 논의였고, 이는 자연스레 철학자들에게 논리적 설명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논의는 베렌가리우스(Berengarius)에게서도 보여지며, 그 외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와 시제
브라방(Siger Brabant) 등에게서 보여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토마스 아퀴나스 등을 중심으로 이러한 문제를 다루어 봄으로 그가 행하는
신앙에 대한 지성의 이해, 즉 이해하는 신앙의 한 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중세 철학자들이 행하는 신앙에 관한 태도와 철학적 내용의
신학적 활용을 이해하고자 한다.
2.0 우선 간단하게 이에 관한 논의를 개괄해 보자. "이 빵은 내 몸이니라." 이 말에서 기인하는 성찬식에서의 빵은 신학적으로 매우 큰 어려움을 남겨주었다. 빵이 예수의 몸으로 변화하였다면, 과연 빵에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아무리 보아도 빵인 것이 어떻게 예수의 몸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난해한 문제는 분석하고 논의하기 즐기는 중세 철학자들에게는 매우 좋은 논의 거리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화체설(doctrine of transubstantiation)이다. 이는 빵의 요소를 이루는 실체가 신의 능력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질료설에 입각하여 근거한 것을 전재하고 있는 학설이다. 하지만 이러한 학설은 종교개혁자인 루터(M.Luther)와 같은 이들의 공재설(혹은 실체공존론)(Konsubstatiationslehre, doctrine of consubstantiation)에 의하여 공격받는다. 그 후 칼뱅(J.Calvin) 역시 토마스와 다른 설을 주장하였다. 칼뱅은 성찬식이 이루어지는 동안 빵과 포도주를 마시는 동안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통하여 우리와 연결되며, 고립된 빵과 포도주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렇기에 그는 성령이 없이 온전한 성찬식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필자는 이들 가운데 하나가 다른 것들에 비하여 우위에 선 것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여기에서 필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중세 철학자에 관하여 여기에서 다룰 것이지만, 루터나 칼뱅의 것에 비하여 우울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구사하는 논리적 사고 속에서 행하는 성찬식을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구신교 간의 차이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 신학의 논리성과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의 일면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일찍이 성찬식의 논의는 실재론자와 상징론자가 대립하여 왔다. 실재론자, 즉 빵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는 이론은 다마쉐누스(J.Damascenus)가 초기에 있었고, 후자는 클레멘스(Clemans)와 오리게네스(Origenes) 등이 있다. 그리고 중세시기에 전자는 랑프랑크(Lanfranc)와 후자로는 베렌가리우스가 있다. 이어서 후에 1215년 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실재론적인 논의인 화체설이 교리화 되었다.
3.0 중세기 많은 사람들은 성체의 기적에 의하여 빵을 예수의 몸으로 이해하였고, 빵으로 보이는 그것을 예수의 몸이나 몸의 일부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베렌가리우스와 란프랑크는 이에 관하여 서로 다른 견해를 가졌다. 란프랑크와 같은 실재론적 해석을 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빵 가운데 실체적으로(substantialiter) 존재한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실체적이라는 것은 단지 상징적인 것을 넘어서 물질적으로나 실체적으로 예수의 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란프랑크와 같은 이들은 성찬식에서 빵의 실체는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몸이 대체된다는 결론을 이끌러낸다. 성사 가운데 제대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물리적으로 새로이 이루어지며, 빵의 실체가 변화하고 빵의 우유성이 분리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베렌가리우스는 빵 가운데 그리스도가 실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성찬의 기적을 우습게 만들어 버렸고, 성찬식에서 식인(食人)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을 지우고자 하였다. 그는 '이것은 나의 몸이다'(hoc est corpus meus)에서 이것(hoc)이 빵을 가리키든지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키든지 모두 문제를 가진다고 했다. 여기에서 '이것'이 빵이 된다고 하면, 문장의 지속성과 주어의 동일성에 문제를 가지게 된다고 보았다. 또한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실체를 주어로 만들어도 논리적인 문제를 가지게 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교회는 실재론적 해석의 손을 들어주었고, 토마스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은 사제의 독신제를 출현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주는 사제의 손에 여자가 주어지는 것은 불가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그 이후 다양한 문제를 야기하였다. 신은 실체적으로 빵이 아닌 것을 빵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라면, 신이 인간의 인식에 이런 식을 간접한다면, 일체의 학문은 가능한 것인가? 플라시가 이러한 성체론에 관한 논의 이후에 안셀무스의 엄밀한 학문 구축을 논의하는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것으로 보인다.
4.0 란프랑크는 아직 실체변화(transubstantiatio)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 이론은 토마스에 의하여 용어적으로 그리고
교리적으로 모양을 갖추게 된다. 토마스는 빵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화하였다고 했다. 이것이 그가 이야기하는 실체변화, 즉 화체설의
기본이다. 이에 관하여 보다 더 자세히 들어보자. 이를 위해서 {자유토론집} V, q.6, a.1과 {신학대전} III, qq.75-82를
살펴보아야 한다.
성찬식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외형으로 빵이며, 포도주이다. 누가 보아도 그것은 빵이고 포도주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그리스도인가? 그러면서 그는 실체변화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근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놓여있다. 그는 성체 축성 기도문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실체에로 빵의 실체가 전환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전환됨은 빵의 실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전환되는 것이다.
사라진다는 것은 무(無)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빵의 실체는 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 실체가 종결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빵의
실체는 없지만, 논리적으로 살피자면, 사라지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유토론집}에서 성찬식 가운데 사라지는 것은 없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실체에로 빵과 포도주가 전환되는 것은 자연적 원인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자연적 변화가 아니다. 이러한 자연적이지 못한
초자연적 변화를 토마스는 전문적 용어로 '실체변화'라 부른다고 정의한다. 이러한 실체변화를 통하여 실체가 변화됨으로 빵의 실체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 전환된다. 그런데 그 모습은 여전히 빵이고 포도주이다. 이에 관하여 토마스는 만일 진짜 인간의 몸과 피가 된다면
성찬식의 분위기가 너무나 공포스러운 것이기에 이것은 신의 배려라고 재미난 이유를 제시한다. 그런데 이렇게 빵과 포도주로 그 모양이 변화하지 않은
논리적 이유는 다음과 같다. 빵과 포도주는 실체가 전환되었다. 그런데 실체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에 의하면 형상과 질료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빵의 형상만 그리스도가 된 것이 아니라, 실체, 즉 형상과 질료가 모두 그리스도가 된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빵의 질료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분리된 형상으로 존재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빵의 모양이 남은 것은 질료가 남은 것이 아니라, 단지 비본질적인 것이 남았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우유적인 것만이 남은 것이다. 실체는 그리스도의 실체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보는 것은 단지 비본질적인 것이며, 빵의
실체는 그리스도의 실체로 온전한 것이다. 그러한 실체는 우리는 볼 수 없다. 감각은 우유적인 것을 대상으로 가진다. 그런데 남아있는 비본질적인
우유는 빵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제시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실체는 우리는 가지적을 알 수 없다. 가지적인 것은 감각에서 시작하는
것인데. 감각은 그리스도의 실체가 아니라 빵을 우리에게 보인다. 그리하여 토마스는 이러한 논의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실체는 단지 신앙에 의하여
가지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것도 더 어려운 근본적 문제를 가진다. 빵과 포도주에 남은 비본질적인 것 혹은
우유적인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에 의하면 실체에 의존하여 있는 것이다. 우유가 독립적 존재론적 지위를 가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빵과 포도주의 우유는 성체 축성 기도문 이루에 더 이상 빵과 포도주라는 실체에 의존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실체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빵과 포도주의 우유가 그리스도의 실체에 의존할 수도 없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주체 없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면 빵과 포도주에 남은
비본질적 것인 우유는 어떻게 자신을 유지하는가? 여기에서 토마스는 전능한 제1원인인 신이 존재의 제2원인인 빵과 포도주의 실체의 결핍을 보충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신의 전지전능함에 의하여 남은 비본질적인 것은 빵과 포도주의 특성을 보존하게 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전과 같은 맛을
가지며, 부패도 하는 것이다.
5.0 위에서 우리는 그가 전개한 문헌에 충실하여 화체설과 실체변화를 정리하였다. 이제 이를 필자의 흥미에 맞추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논리성에 근거하여 정리하기로 한다. 데이비스(B. Davies)가 이야기하듯이 토마스는 죽었고, 현대 인물도 아니지만, 여전히 그가 이야기하는 성체성사에 관한 논의는 나름의 의미를 우리에게 가진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이론은 그의 대표적 상품은 이성과 신앙의 조화로 인한 철학적 논의를 근거로 하고 있다. 그저 신학적 논의에서 신앙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가 이야기하는 우유와 실체에 관한 기본적인 논의를 정리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장 근본적 주체는 개별적 인간과 같은 개별적 실체이다. 그리고 그러한 실체는 다른 것에 의하여 진술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하여 그러한 것이다. 그렇게 제일 주체는 모든 것에 앞서 실체라 불릴 만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실체는 다른 것에 의하여 의존된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이러한 실체가 아니라, 실체에 의한 우유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오감(五感)으로 지각하는 모든 것은 우유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토마스는 이러한 것을 "어떤 실체도 그 자체로는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없다"라고 하며, 단지 우유에 의하여 지각될 뿐이라고 한다. 이렇게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에서 실체와 우유를 구분한다. 그리고 토마스는 빵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실체가 된다고 한다. 그렇기에 제대 위에 있는 빵은 빵이 아니라 온전하게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빵으로 지각하는 것은 단지 남아있는 우유로 인한 것이다. 예를 들어 제대 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육체라고 이야기 할 때, 제대 위라고 하는 것은 분명 우유적 진술이다. 왜냐하면 장소의 범주는 우유적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제대 놓여있다라고 하는 것이나 방안에 있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가 성체 축성 기도문 다음에 현존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빵을 두고 지각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빵인 것이다. 토마스는 분명히 빵의 맛과 같은 것도 빵이니 그리스도의 맛은 아니라고 지적하였다. 이를 두고 루터는 토마스의 이러한 성체성사에 관한 논의는 이성적 근거도 성서적 근거도 없는 공중에 매달린 것이라 비판한다. 어떤 지각도 그리스도를 보이게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빵의 우유는 어떻게 그를 지속하는 것인가? 빵의 우유가 지지할 빵의 실체는 더 이상 빵의 실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에서 볼 때 그의 입장은 논리적으로 지지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그는 초자연적 논의로 넘어간다. 즉 기적이 등장하는 것이다. 토마스는 여기에서 성사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이 기적적으로(miraculously) 행한다고 한다. 그러면 성서 가운데 기적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에 관하여 클리마는 빵에 남은 우유는 그들의 실체 없이 신적 능력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토마스의 {신학대전}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클리마는 분명하게 '기적' 가운데 그들의 주체 없이 우유를 신의 능력이 존재하게 한다고 토마스의 견해를 정리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빵이란 우유를 가진 그리스도의 실체를 가지적으로 인식하는 것인가? 여기에서 그는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신앙에 의하여 가지적인 것이 된다고 시인한다. 즉, 기적의 영역은 온전히 이성의 논리적 능력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실체 없이 우유가 유지되는 것은 자연의 질서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오직 이성을 넘어선 기적 가운데 가능하다. 여기에서 토마스가 이야기하는 기적에 관한 데이비스의 정리를 소개해 보자. "그는 저서 {신학대전}에서, 기적적으로 적절하게 불리워져야만 할 것들은 자연의 순리로부터 동떨어진 신의 힘에 의하여 행하여 진 것들이다" 이성은 '자연의 순리'에 한정된다. 그리고 기적은 이것을 넘어서는 것이며, 이성은 자연적인 것을 넘어선 것에 있어서 신앙에 그 영역을 넘겨야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체 성사에서 이성과 신앙은 각각 자신의 몫을 가지는 것이다.
6.0 성체 성사는 그리스도 문화 속에서 사는 철학자와 신학자들에게 중요한 논의 대상이었다. 성체 축성 기도문 이후에 빵은 실재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인가 아니면 단지 상징이나 의미일 뿐인가? 여기에서 토마스는 실재론적 논의를 지지한다. 이것은 당장 상징론에 비하여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과정을 초래할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실제로 토마스는 자신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도구를 이용하여 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실체와 우유라는 것을 가져와 우유는 남아있고, 실체는 빵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기도문 이후에 감각하는 빵이라는 것을 우유이며, 그
실체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 그리고 빵의 우유가 빵의 실체 없이 유지되는 것은 기적으로 넘긴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성의 영역도 정지되고
신앙으로 그 몫을 돌린다. 이렇게 신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의 면모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중세 철학자들은 성체 성사에 관하여 신앙을 인간의
능력 속에서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즉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노력한다. 그리고 토마스는 이러한 노력 가운데 이성과 신앙을 초화하고 서로의 영역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여전히 토마스는 이러한 논의는 우리에게 의미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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