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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철학 학교 중세 철학 자료 2003.07. http://wissen.com.ne.kr
알베르투스 마뉴스의 발생론에 관한 연구
유대칠
(토마스 철학 학교)
1.0 보편적 박사(doctor universalis) 쉽게 만물박사(萬物博士)인 알베르투스 마뉴스(Albertus magnus)의 지적 영역은 실로 대단하다. 우리는 그에게서 중세 자연학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여기에서 다룰 것은 그의 발생학(Embryology, 發生學)이다. 생명의 탄생에 관한 과학적 탐구는 이미 과거 그리스의 학자들에게서 시작되었다. 대표적으로 당시 자연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생물학적 저서인 ꡔ동물의 생성에 대하여ꡕ 등에서 이에 관하여 논의하고 있으며,1) 또한 갈렌과 히포크라테스 등의 논의에서도 이에 관하여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교화 된 유럽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여 신학적인 발생학이 인간의 원죄와 같은 신학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다루어졌다. 이러한 몇몇 논의들을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논의 전통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신학적 발생학의 전통이다. 그리고 둘째는 자연철학적 발생학이며, 마지막 셋째는 의학적 발생학이다. 이에 따라서 첫째는 아우구스티누스적 논의에서 확인이 가능하며, 둘째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논의에서 그리고 마지막은 갈렌이나 히포크라테스 등의 논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알베르투스는 이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신의 발생론에 근간으로 삼는다. 실제로 그는 ꡔ동물에 관한 질문들ꡕ(Quaestiones de animalibus)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용 생물학적 저작을 검토한다. 1권은 ꡔ동물지ꡕ(De historia animailum) 1. 1에 해당하며, 2권은 ꡔ동물지ꡕ 1. 2에 해당한다. 그리고 3권은 1. 3 그리고 4권은 1. 4, 5권은 1. 5에 해당한다. 이렇게 10권의 1. 10까지 이어간다. 이어서 11권은 ꡔ동물의 부분에 대하여ꡕ(De partibus animalium) 1. 1에 해당하며, 이후로 14권의 1. 4까지 이어간다. 마지막으로 15권에서 19권까지 그는 ꡔ동물의 생성에 대하여ꡕ(De generatione animalium)를 1. 1에서 1. 5까지 다룬다. 그러면 이러한 ꡔ동물에 관한 질문들ꡕ을 중심으로 그의 발생론에 관한 논의를 다루어보자.
2.0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ꡔ동물의 생성에 대하여ꡕ에서 발생론을 다룬다. 그에 의하면 남성의 정자는 여성의 것에 비하여 능동적이다. 정자는 피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지만, 열처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는 물과 프뉴마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프뉴마가 정자에게 생식력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자가 여성의 월경피에 에 작용을 하여 생명체가 발생하는 것이라 한다. 여기에서 여성의 것은 정자에 비하여 수동적이며, 질료의 성격을 가진다. 그리고 남성은 그러한 질료에 작용을 가하며 형상을 주는 것으로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여성은 정자를 만들 수 없다. 그것은 여성이 열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열기가 부족한 여성은 정자를 만들지 못하며, 열기가 충분한 남성만이 정자를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발생론적 논의를 근거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을 “결함을 가진 남성”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에서 결함은 열기의 부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2) 하지만 이러한 이론만이 고대에 존재한 것은 아니다. 히포크라테스는 여성과 남성이 모두 정자(sperma)를 배출한다고 했다. 히포크라테스적 사고에 의한 저서인 ꡔ정자에 관하여ꡕ에 의하면, 단지 영양분을 제공하는 월경피뿐 아니라, 질 분비물과 여성의 씨를 동일시 하며, 여성에게 보다 우월한 발생학적 위치를 부여하려고 하였다. 또한 갈렌은 여성의 고환(testes) 혹은 난소(ovaries)는 불완전한 정자를 생산하며, 그것은 남성의 정자적 유동체와 함께 결합된 후에 생성 혹은 발생의 능력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3) 아비첸나의 증언에 따르면, 갈렌의 학설은 다음과 같다.
갈렌은 다른 견해를 가진다. 그는 정자의 각각은 응고를 위한 응고력과 수용력 양자를 가진다. 그러므로 그는 응고력은 여성보다 남성 가운데 더 강하고, 한편 응고를 위한 수용력은 남성보다 여성 가운데 더 강하다.4)
여기에서 갈렌은 인간의 발생에서 여성의 보다 능동적인 작용을 주장한 듯이 보인다. 그는 각각의 성이 각각 자신이 강한 것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은 정자를 생산할 수 없다고 단언하며, 여성의 것이 임신의 과정에서 능동적일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앞서 논의한 대로 여성은 열기에 부족하기에 결코 정자와 같은 것을 생산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 알베르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동조한다. 그는 우선 성(sexus)가 생성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남성과 여성에 관하여 작용자(agens)와 같이 남성이 그리고 수동자(patiens)와 같이 여성이 그러하다고 한다.5) 그러면서 남성만이 본질적으로 그리고 참으로 정자를 생산하며, 이러한 정자는 형상인이고 작용인이라고 한다. 반면에 여성의 것을 정자라고 하는 것은 다의적(多義的)으로 그러하며, 그것은 형상인도 작용인도 아니다. 실제로 여성의 것을 두고도 정자라고 한 것은 아비첸나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지방과 살을 제외한 기관들은 남성과 여성의 정자 양자에서부터 발전된다”라고 하면서 남성과 여성의 정자를 이야기한다.6) 하지만 여기에서 여성의 것을 정자라고 한 것은 알베르투스에겐 단지 다의적인 것일 뿐이다. 그렇게 알베르투스는 여성의 것도 남성과 같이 어느 면에서 능동적이라는 갈렌의 것을 거부한다.7) 그에게 여성의 월경피는 남성과 여성 모두의 질료(materia)로 존재하는 것이다.8) 그렇다고 어찌 보면 남성의 우월이라고 하기에도 그러한 것이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여성이 없이는 생명작용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남성과 여성 모두가 중요한 것이다. 실제로 알베르투스도 이 둘을 모두 필수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한 이유는 남성이 정자를 만들고 월경피를 만들지 못하며, 여성은 월경피를 만들고 정자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9) 그렇기에 결국 생명작용을 위해서는 모두가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도 그는 근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입장에서 해결한다. 즉 4 원인설로 이루어진 해석에서 그는 남성의 정자를 작용인과 형상인으로 두는 것이다. 알베르투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적는다.
고유한 정자의 가운데는 활동적 능력과 사지(四肢)의 형성 그리고 영혼의 출현이 있다. 그리고 오직 남성의 정자 가운데 이러한 능력이 있다.10)
이는 근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 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갈렌의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를 여기에서 선택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를 여성이 남성의 열기에 비하여 그것이 부족하다고 하였다. 그러면 이에 관하여 알베르투스는 어떠한 견해를 보이는가? 그는 우선적으로 이에 관하여 긍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는 이러한 견해에 힘을 주기 위하여 당대 최고의 의학서인 아비첸나의 ꡔ규범ꡕ(Canon)을 인용한다. 그에게 이 저서는 의학의 권위(Auctores medicinae) 그 자체였다.11) 이러한 권위를 빌려서 그는 일반적으로(universaliter) 남성이 여성에 비하여 더 뜨겁다고 한다. 이에 관한 근거로 그는 여성은 남성보다 더 습하다고 한다.12) 또한 ꡔ규범ꡕ을 직접적으로 인용하면서 가장 뜨거운 여성은 가장 차가운 남성보다 더 차갑다고 한다. 다시 말해, 남성이 여성 보다 더 열기를 가진 존재인 것이다. 그러면 그에게도 열기는 정자와 어떤 관련을 가지는가? 이에 관하여 우리는 정자의 생성에 관한 논의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3.0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정자에 관한 논의를 위하여 선배들과 대립되어야 했다. 선배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정자가 “몸 전체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히포크라테스와 같이 남녀가 각각 정자를 생산하여, 이것의 결합이 생명을 낳는다는 것이다. 후자는 이미 논박되었다. 그러면 남은 것은 전자이다.13)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자가 몸 전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영양분의 나머지”라고 정의한다.14) 그리고 피에 열처리가 이루어진 것이 정자라고 한다. 알베르투스 역시 이를 고민하였다. 그의 논변은 또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로 돌아간다. 그는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육체 전체에서 출현하는 것은 땀에 관하여 이야기되듯이 확정된 수용처를 육체 가운데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정자는 확정된 수용처를 가진다. 그러므로 육체 전체에서 출현하지 않는다.15)
여기에서 그는 정자가 몸 전체에서 나온다는 견해를 따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정자는 땀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확정된 수용처를 가지는 곳이지 땀이 온몸에서 나듯이 그렇게 온몸에 펴진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정자를 라틴어로 superfluitas ultimi cibi 즉, “마지막 영양분의 나머지”라고 한다.16) 그러면 그 내용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확정된 부분에서(a parte determinata) 나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정자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또한, 정자는 근본적으로 피(sanguis)이다. 그러면 이 두 가지를 다루어보자. 전자에 관하여 알베르투스는 뇌(cerebrum)와 심장(cor)과 우선 관련짓는다. 결론적으로 정자는 “원리적으로 그리고 극단적으로 심장에서 나온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정자는 뇌에서 흘러나온다.”17) 뇌는 하얗고, 진홍색이며, 축축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가운데 정자의 실체가 적합한 것이다.18) 또한 뇌는 심장에서 나온 열기에 한 몫 하는 것이며, 그 가운데 정자는 열기의 수용됨이 가능하다.19) 그에겐 심장 가운데 열기의 근본적 원리(prima principia)가 있다. 그리고 정자에겐 뇌에서의 한 몫 되어진 열기가 더 적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수분과 결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장은 수분이 없다(sicco)고 그는 보았기에 뇌가 더 적당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20) 그렇기에 정자는 우선적으로 심장에서 기인하고, 직접적으로는 뇌에 기인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자 혹은 정액분비기관으로 뇌를 가정하는 것은 이미 피타고라스 학파의 의사인 알크마이온(Alkmaion)에서 시작된다. 그는 다른 당시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정자가 척추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뇌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4.0 그러면 이러한 정자와 피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우선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즉 철학자의 권위를 빌려 “정자는 마지막 영양분의 나머지이다”라고 하는 것을 인용한다.21) 그리고 이러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는 소화 흡수된 마지막 영양분인 비와 성질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알베르투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정자의 생성의 보편적 원리는 피이지만, 직접적으로 그 생성의 원리는 축축함이며, 이는 피에서 생성되어진다.22)
여기에서 그는 이어서 정자 생성의 원리는 축축함과 피와 관련됨을 적고 있다. 여기에서도 그의 기본적인 노선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정자에 관하여 다시 그 속성을 다룬다. 물론 이것도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노선에서 말이다. 그는 정자가 임신에서 질료적 부분인가를 묻는다. 여기에서 결론적인 답은 부정적이다. 즉, 질료적 부분이 아니다. 그러면 여성의 것과 남성의 정자를 비교해보자. 알베르투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 자체로 여성의 월경피의 넉넉함은 해산의 봉사의 질료를 위한 것이다.”23) 그렇기에 이미 논의한 대로 여성의 것은 근본적으로 질료적인 것이다. 반면 그는 남성의 정자에 관하여 다음가 같이 적고 있다.
정자는 임신의 질료적 부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정자가 능동적이고 활동적인 능력을 가지지 않는 한에서 그렇게 불리지 않기 때문이다.24)
알베르투스는 매우 당연히 이러한 사실을 받아드리고 있다. 물론 이러한 논의는 근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4.0 그러면 정자와 영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당시 영혼은 생명 그 자체이다. 영혼의 문제는 그렇기에 바로 생명의 문제이다. 현대에도 낙태에 관한 논의에서 과연 어디까지 생명이라고 해야하는가에 관한 논의가 제기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베르투스에게도 문제가 되었다. 그는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를 사용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잠자기 기하학자의 예를 사용한다.25) 그와 같이 알베르투스는 ꡔ형이상학ꡕ등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건축가의 정신 가운데 집이 현실태로 있지 않는 것과 같이 그렇게 씨앗 가운데 영혼은 현실태로 있지 않고 단지 가능태로 있다.26)
정자에겐 영혼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이야기하듯이 그것은 가능태로 있는 것이다. 알베르투스는 논의를 이어간다. 그의 논의를 살펴보자.
씨앗 가운데 영혼의 능력이 존재함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철학의 ꡔ자연학ꡕ 8권에 의하면 생명체들의 속성은 그 스스로 움직여지는 것이지만, 무생명체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한다. 그런데 씨앗 가운데 있는 이 능력은 씨앗을 움직이고, 조직하는 것을 위해 자신을 둔다. 그러므로 이 능력은 영혼의 능력이다.27)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논한다.
동물의 생성은 일의적(一義的)이다. 그러므로 말에서 말이 나고, 나귀에서 나귀가 난다. 하지만 영혼의 능력이 씨앗에 있지 않으면 이도 아니다.28)
여기에서 분명 씨앗은 영혼의 능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러한 씨앗 가운데 능력이 영혼보다 고귀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는 영혼의 가능적 상태에 놓여있으며, 영혼의 능력을 가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29) 이어서 알베르투스는 씨앗 가운데 있는 능력과 지성의 관계를 다시 문제 삼는다. 그는 씨앗 가운데 지성의 능력이 없다고 한다.30)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영혼의 능력을 가지며, 가능적으로 영혼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완벽한 의미의 현실적인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5.0 정자의 상태를 넘어서 이젠 태아의 형성으로 넘어가 보자. 간단하게 그는 7개월에 태아는 완전해진다고 본다. 즉, 그의 존재를 위해 필요한 것을 모두 갖추게 된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조산아(早産兒)들이 7개월이면 태어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ꡔ운명에 관하여ꡕ(De fato)에서 이를 간단히 진술한다. 태아는 7개월이면 다 완성된다. 그러면 왜 더 남아있는 것인가? 그 이유는 형성 능력과 질료 사이의 충분한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이다. 그리고 이는 한번의 달 회전을 통한(per unam lunae conversionem) 쉼에서 얻어진다.31) 이러한 정황을 통하여 그는 인간이 단번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어간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인간 영혼에 대한 가능적 상황에서 영혼을 가지는 정자에서 완전한 태아가 되기까지 말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인간이 심장과 폐와 같은 것이 동시에 생긴다고 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차적으로 생긴다고 한다. 그리고 알베르투스는 바로 후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그리스도교적 배경에 의하여 남성의 씨앗과 여성의 월경피가 혼합되었을 때, 신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혼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육체의 제일 현실태 혹은 완성태이다. 그렇기에 그는 명제론 주해에서 육체의 완성태이며 정신적 실체인 영혼은 오직 육체가 조직되었을 때, 본성에 의하여 만들어져야하는 것이라고 한다.32)
6.0 알베르투스는 기형아의 발생에 관한 것도 다룬다. 그는 여기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비첸나에 의지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정성적 아이와 천체의 관계를 이미 적은바 있었다. 그리고 아비첸나는 기형아의 발생은 천체와 임신 시기의 문제라고 했다. 알베르투스는 이를 그의 ꡔ명제론 주해ꡕ에서 인용한다. 그러면서 태양이 특정의 자리에 오고 양자리가 쇠퇴할 때 인간의 생성이 자리가 없으며, 씨앗이 자궁가운데 들어가도 기형아가 탄생하게 된다고 한다.33) 알베르투스는 이미 우리가 위에서 달 회전과 같은 천문학적 논의가 인간의 탄생 혹은 발생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본 것이다.
7.0 알베르투스는 자연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가진 발생학에 관한 관심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이러한 자연학에 관한 관심은 그를 단지 토마스의 스승으로 그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토마스가 생물학이나 발생학과 관련된 독립된 저서들을 내세우기 힘든 것에 비교되기 때문이다. 그는 발생학에 이론적 토대를 아리스토텔레스에 둔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아비첸나와 같은 이들의 해석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그러면서 자기 가운데 자리 잡게 하였다. 그는 그 가운데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을 심어두려 했다. 즉, 단지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발생학과 조화가 되게 하려한 것이다. 당시 아랍을 통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자연학의 재수용과 이슬람 철학와 자연학의 수용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놀라움이 단죄로 드러나기도 하고, 수용의 형태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알베르투스는 고대 그리스와 이슬람의 발생학적 지식을 수용한다. 그러면서 이를 그리스도교의 세계에 소개하고, 해석하려 하였다. 이러한 그의 발생학에서의 기여는 새로운 과학적 운동이 일어나는 시기에 유럽의 학자들에겐 절실한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1) 이에 관하여 우리는 조대호, 「ꡔ동물의 생성에 대하여ꡕ를 통해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성이론」, ꡔ西洋古典學硏究ꡕ18(2002)를 통하여 하나의 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2) 같은 책, 107-114쪽.
3) Demaitre, L. and Anthony, T., 'Human Embryology and Development in the Works of Albertus Magnus' In Albertus Magnus and he Sciences Commemorative Essays 1980, ed. J. Weisheipl (Toronto : PIMS, 1980), p.415.
4) Avicenna, The Canon of Medicine, trans. O. Gruner et al. (Chicago : Great Book of The Islamic World, 1999), §151 p.52
5) Albertus magnus, Quaestiones de animalibus XV, q.1, 260, 24 (ed. E. Filthaut)
6) Avicenna, The Canon of Medicine, §150 p.52
7) Demaitre, L. and Anthony, T., 'Human Embryology and Development in the Works of Albertus Magnus', p.419.
8) Albertus Magnus, Quaestiones de animalibus XV, q.7, 263, 75.
9) Ibid., q.19, 271, 46-49.
10) Ibid., 271, 80-84.
11) Ibid., q.6, 263, 10-14.
12) Ibid., 〔f〕emina est huminior mare.
13) 조대호, 「ꡔ동물의 생성에 대하여ꡕ를 통해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성이론」, 106쪽.
14) Aristotles, De generatine animalium I, 19, 726b 3.
15) Albertus Magnus, Quaestiones de animalibus XV, q.12, 266, 54-57.
16) Ibid., 266, 60.
17) Ibid., q.14, 268, 83-84.
18) Ibid., 268, 28-30.
19) Ibid., 268, 30-33.
20) Ibid., 268, 77-80.
21) Ibid., q.15, 269, 28-29.
22) Ibid., q.16, 269, 75-78.
23) Ibid., q.20, 272, 76-77.
24) Ibid., 273, 3-5.
25) 조대호, 「ꡔ동물의 생성에 대하여ꡕ를 통해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성이론」, 115쪽.
26) Albertus Magnus, Quaestiones de animalibus XVI, q.1, 274, 21-23.
27) Ibid., q.2, 274-275, 79-3.
28) Ibid., 275, 9-11.
29) Ibid., 18.
30) Ibid., q.12, 283, 14.
31) Albertus Magnus, De feto, art.4, 76, 10-23 (ed. P. Simon)
32) Demaitre, L. and Anthony, T., 'Human Embryology and Development in the Works of Albertus Magnus', p.424.
33) Ibid., p.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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