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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철학 학교 중세 철학 자료 2003.07.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의 중세적 논의 1
-'변화와 운동'의 존재론적 상태에 관하여-
유대칠
(토마스 철학 학교)
ㄱ. 중세 자연철학의 위치
중세 자연철학(自然哲學)은 도덕철학과 형이상학 그리고 신학의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으로서 다루어졌다. 그리고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위(僞)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저서(libri naturales)가 알려지면서 본격화되었다. 가장 중요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저서를 두
가지 든다면, 그것은 {자연학}과 {영혼론}이다. 실제로 1270년과 1277년에 이루어진 지성의 단일성 문제와 우주의 영원성 등에 관한 것이
바로 이들 자연학 저서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혼론} 3권은 중세 심리 철학의 핵심적 논의로 등장하였고, 당시 이루어진 단죄와 깊은
관련을 가진다. 또한 중세에 이러한 문제성 짙은 자연학적 논의는 모두가 {자연학}이라는 저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자연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의 일반론이라고 할 수 있는 저서이며, 이는 여러 개별적 논의로 확장되었다. 예를 들어, 천체에 관한 것이나 금속과 광물
그리고 식물군(flora)이나 동물군(fauna) 등의 논의와 자연스레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학적 논의는 알베르투스
마뉴스(Albertus Magnus)에게서 가장 뚜렷이 발견할 수 있다. 로베르투스 그로세테스테(Robertus Grosseteste)와 로저
바콘(Roger Bacon)등의 광학(光學)과 버얼리(John Burley)에 의하여 자연철학 가운데 실제론적 변증가에 의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뷔리당(John Buridan)은 임페투스(Impetus), 즉 기동력에 관한 새로운 문제를 다루었다. 또한 옥캄(Willam Ockham)은
형이상학이니 윤리학에 관한 주해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관한 질문들(Quaestiones)과 주해(Expotisio)를 남겼다.
이와 같이 중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은 매우 중심 된 문제로 다루어졌다. 이러한 자연학적 관심 가운데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변화의
존재론적 상태에 관한 것이다.
ㄴ. 중세 시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중세 학자들에게 {자연학} 1권의 문제는 소크라테스 이전 학자들의 생성(genesis)에 관한 문제였다. '무에서부터 어떤 것도
나오지 않는다'라는 명제가 그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제일 질료는 제일 현실태 혹은 형상에 앞서서 자기 자신의 일부 현실성을 가진다고
보여졌다. 하지만 이것은 무에서 창조라는 그리스도교적 논의에 일치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주 영원성의 근거가 되는 이러한 논의는 당시
비판과 반박의 대상이 되었다. 토마스는 질료는 순수 가능태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질료는 그 스스로 어떤 현실태도 가지지 않는 것이다. 그에
의하며 형상에 의하여 질료는 현실태를 가지게 되며, 이로 인하여 무엇임과 존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본질과 존재가 가지는 관계와 같이 질료와
형상이 관계를 가지는 것이기에 질료는 그 스스로 어떤 현실태를 가지는 것일 수 없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2권의 논의는 자연철학의 주제를 한정한다. 그것은 자연(natura)이다. 이는 운동의 원리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에 관한 논의는 형상인인 형상(forma)의 능동적 의미와 질료인인 질료(materia)의 수동적 의미 가운데
다루어졌다. 그리고 형상인은 외부에서 정해진 목적을 향하여 현실화시키는 것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작용인과 목적인도 다루어져야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에 자연철학자들은 바로 이들 형상인, 질료인, 작용인, 목적인을 연구해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학}의 논의는
변화 개념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 그리고 3권에서 8권에 관한 중세인들의 관심은 변화에 관한 논의에 집중되었다. 그러면 변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차적으로 "가능적인 한에서 가능태의 현실태로의 이월"이다. 이에 관한 예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건축을 든다. 건축되어짐의 과정은 건축되어질 수
있는 것의 현실화이다. 즉 건축되어질 수 있는 것이 건축물로의 이월과정이 건축되어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에 관한
주목할 만한 해석을 우리는 알베르투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운동의 정의를 세 가지로 알아듣는다. 1) 가능태인 한에서 가능태인 것의
현실화 2) 움직여있는 것으로 움직여지는 것의 현실화 3) 장소를 취하는 변화 가운데 있는 것으로 움직여지는 것과 원인으로서 움직이는 것의
동시적 현실화이다. 이를 알베르투스는 종합적 정의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작용인과 함축적인 목적인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알베르투스에 의하면
능동(agere)의 범주 가운데 그것으로 인하여 나오는 것으로서 작용자가 나오고, 수동(pati)의 범주에 의하여 그 가운데 존재하는 것으로서
수용(recipient)이 나온다. 이제 여기에서 알베르투스를 비롯한 13세기 학자들의 변화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자. 이를 위하여 우리는
아베로에스(Averroes)와 아비첸나(Avicenna)와 같은 이들의 해석을 거칠 것이다.
ㄷ. 아비첸나의 해석
아비첸나는 자신의 {수피치엔티아}(Sufficientia)에서 자연에 관한 논의를 다룬다. 그의 자연에 관한 이해는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에 기반을 둔다. 그리고 다른 한편 알-킨디(Al-Kindi) 이후의 전통에 기반을 둔다. 전자에 의하여 제일 원동자가 다루어지고, 후자에 의하여 필연적 실존(wajib al-wujud)이 다루어진다. 특히 필연적 실존은 그의 자연에 관한 이해에도 영향을 준다. 필연적 실존과 예지체에 의한 그의 우주관이 그의 자연에 관한 이해에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압도적으로 우세하게 수동적으로 자연의 개념을 기초로 한다. 그것은 어떤 운동이든지 운동은 예지체에 의하여 야기되는 형상의 흐름(fluxus formae)으로서 수동의 범주를 따른다고 본다. 그에게 자연의 변화는 자연을 넘어선 혹은 외부의 작용인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운동 혹은 변화는 수동의 범주 가운데 놓여지는 것이다.
ㄹ. 아베로에스의 해석
아베로에스는 하나의 범주로 변화를 나타낼 수 없다고 한다. 그는 {범주론}을 따라서 운동을 양(量), 질(質), 장소, 실체의
범주와 관련시킨다. 하지만 운동이 수동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도 무시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의 가능태와 현실태의 측면에서도 수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쉬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 가지 범주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음의 논의를 들 수 있다.
가능태와 현실태로써 운동 혹은 변화는 네 가지 범주 가운데 하나로써 '수동'으로 실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분명한 해결책은 아니다. 이에
관하여 아베로에스는 그의 저서에서 형식적으로는 수동의 범주이고 실질적으로는 네 가지 범주 가운데 있다고 한다.
우선 그에게
운동은 우선 불완전한 형상(forma incompleta)으로써 운동과 형상을 향한 과정(via ad formam)으로서 운동이다. 후자에
관하여 익명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운동은 그것을 통하여 자기의 형상을 취하게 되는 중간 과정(via media)이다." 여기에서
운동은 '형상을 향한 과정'과 동일시되고 있다. 또 다른 익명의 저자는 불완전한 형상으로써 운동을 다룬다. 운동에 관한 형상-이론의 불완전한
형상은 불안전한 행위로써 서술되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형상은 아직 충분히 현실화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아베로에스
자신이 행위는 현실태와 가능태 사이의 중간자라고 한 것에서 지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아베로에스의 이론에 관하여 13세기
옥스퍼드의 자연철학자들은 형상의 불완전성과 운동의 불완전성의 차이는 분명히 다른 두 가지 형태라고 하며 비판하였다.
ㅁ. 알베르투스의 해석
알베르투스는 아비첸나와 아베로에스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다룬다. 그는 자신의 저서 {운동에 관하여}(De motu)와
{자연학}(Physica)에서 이에 착수한다. 운동 혹은 변화는 세 가지로 진술된다. 첫째 '어떤 것인 것', 둘째 '어떤 것 가운데 있는
것', 마지막 셋째는 '어떤 것에 관하여 진술되는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로의 분류는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론후서} II에 다루어진 것을
수용한 것이다. 알베루트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행하는 과학적 지식의 논의를 위하여 요구되는 정의(quid est), 속성에 관한 논의(qualis
est), 인과적 관계에 관한 결정(propter quid est)이라는 세 가지를 따라서 운동의 류(類)와 종(種)과 인과(因果) 관계를
다루는 것이다.
운동이 '어떤 것'이라고 진술되는 것 가운데 운동의 류에 관한 문제가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물음이다.
알베르투스는 그의 {운동에 관하여}에서 운동을 움직여질 수 있는 것의 제일 완전성 혹은 우선적으로 작용자의 행위로부터 결과되는 불완전에서
완전으로의 과정이라 한다. 그리고 그에게 이는 단지 하나의 류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 것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범주론}에서와 같이 운동이 몇몇 범주와 관련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알베르투스는 운동이 단지 하나의 혹은 일의적인 의미에서 다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는 유비적 의미에서 다루어져야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의 정의가 아닌 더 많은 정의가 운동에 적용된다고 한다. 그렇기에
다양한 류들과 관련된 완전성의 형태로서 운동을 고려하는 것일 필수적인 것이다.
두 번째는 운동이 '어떤 것의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운동의 종에 관한 고찰이 된다. 운동에 관한 위의 논의를 참고하자면, 운동은 단일한 하나의 범주에
제한되는 것이 아닌 어떤 것의(alicuius) 완전성이다. 이에 관한 보다 온전한 이해를 위하여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들어가야
한다. 그 시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 혹은 변화는 수동의 범주 가운데 혹은 움직여지는 물체에게 가해지는 당함의 범주 가운데 있음을 고려한다.
그리고 같은 작품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과 변화에 관하여 실체적 변화, 장소 운동, 양적 운동, 질적 운동을 다룬다. 이러한 그의 논의는 후에
해석가들에게 골머리를 썩히는 문제가 된다. 아베로에스는 비록 수동으로서 운동이 더 잘 알려지는 것이지만, {자연학} 가운데 다루어지는 몇몇
범주에 의한 운동이 더 조리 있다고 한다. 그러한 이러한 해결책도 모호한 것이다. 그것은 아베로에스 자신이 이러한 논의를 한 그의 저서에서
수동의 범주 가운데 운동이 있지 않다고 하고, 몇몇 범주 가운데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위에서 형식적으로는 수동이며,
실질적으로는 몇몇 범주 가운데 있다고 그의 해결을 정리했다. 그리하여 알베르투스는 아베로에스와 이 문제에서 일치된 견해를 가지기를 거부한다.
그의 관점에서 아베로에스는 불명료(obscura)하고 회의적인 것(dubia)이었다. 알베르투스는 페리파테투스 학파의 전통에서 운동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이에 의하면, 운동은 1) 능동, 2) 수동, 3) 어떤 존재자의 흐름(fluxus alicuius entis)이다. 그리고 어떤
존재자의 흐름으로서 운동은 다시 나누어진다. a) 목적과 관련된 것과 b) 본질적으로 목적과 무관한 것이다. 그는 이 네 가지를 각각 고려한다.
알베르투스는 운동과 그의 목적 사이의 본질적 차이에 반대한다. 그러면서 그는 운동을 본질적으로 '형상의 계속된 유출'(continuus
exitus formae)이라 하고, 이는 그의 목적과 같은 것이며, 반면 그와 다른데, 그것은 정적인 형상보다 오히려 흐르는 형상(forma
fluens)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고 그는 아비첸나와 같이 운동을 그저 수동이라 하지도 않고, 또한 능동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운동은
단순하게 능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작용자 가운데 단순한 완전성이 아니라, 완전과 불완전을 포함하는 당함 가운데 혼합된 완전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순하게 수동도 아니다. 물론 수동이라는 개념이 운동을 이해하는 것에 유용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비첸나가 이야기하듯이
운동이 단지 수동도 아니다. 아비첸나는 일의적 개념으로서 운동의 목적으로부터 본질적으로 분리하여 운동을 수동이라는 단일한 범주에 넣는다. 하지만
알베르투스는 일의적인 것부터 받아드리지 않았으며, 하나의 범주에 운동을 묶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확인했었다. 그렇기에 알베르투스는
아베로에스와도 아비첸나와도 운동에 관한 동일한 견해를 가지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인과적 관계를 살펴보자. 알베르투스의
해결책은 움직이는 것에서 움직여지는 것으로의 연이은 흐름(fluxus)으로 운동의 상에 있다. 그에게 움직이는 것과 운동의 수용 사이의 흐름은
본질적으로 같은 운동이다. '움직임'이라는 것은 두 가지로 사용될 수 있다. 그것은 움직이는 것의 흐름 혹은 움직여지는 것의 흐름 양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움직여짐'은 주체 가운데 수용됨으로서 흐름을 의미하며, '움직임'은 작용자에 의하여 원인 되어진 흐름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운동은 흐름이다.
운동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원인에 의하여 생산되어진 것으로 운동은 움직이는 것에 의한
것이고, 주체 가운데 현존하는 것으로 운동은 움직여지는 것 가운데 있다. 여기에서 '움직임'과 '움직여짐'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하지만
언급하는 관점의 차이에서 다른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이론은 작용자와 수동자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에 "운동은 움직이는 것과
움직여지는 것 양자의 완전성이다."
와이스헤이플(J.Weisheipl)은 그의 논문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의 해석과 운동과 같은
학문]("the Interpretation of Aristotle's Physics and the Science of Motion")에서
알베르투스의 운동에 관한 세 가지 정의를 소개하며 이를 정리한다. 1) 가능적인 한에서 가능성의 현실화 2) 움직여질 수 있는 한에서 움직여지는
것의 현실화 3) 원인으로서 움직이는 것과 움직여지는 것 양자의 동시적 현실화이다. 왜냐하면, 알베르투스는 그로부터 일어나는 능동의 범주와 그
가운데 일어나는 수동의 범주 모두는 만족시키기 위해서이다.
ㅂ. 마무리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된 운동 혹은 변화에 관한 존재론적 문제는 중세에도 주된 문제로 다루어졌다. 그것은 이미 논의한 대로
이러한 자연학적 논의가 그들의 형이상학적 논의를 비롯한 많은 논의의 근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비첸나와 아베로에스의 이론과 이들 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스스로의 해석을 마련하고자 한 알베르투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옥캄 등의 논의까지 이 논의는 이슬람 철학의
유입 이후 중세 말엽까지 꾸준히 다루어졌다. 그렇기에 이 논의는 여기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후에 다루어질 논의를 약속해야만 한다. 알베르투스
이후 이에 관한 논의, 그 논의에 관한 정리를 약속하며 여기에서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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