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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정리한 것입니다.
답답한 수준입니다. 중세 존재(esse)와 본질(essentia)에 관한 여러 가지 학설을 정리한 것입니다.
토마스 이후 존재(esse)와 본질(essentia)의 실재적 구분(distinctio realis)과 형식적 구분(distinctio formalis)의 문제
유대칠
(토마스 철학 학교)
1.0 여는 말
제목을 보는 것으로 우리는 몇 명의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당장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와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그리고 수아레즈(Suarez)와 겐트의 헨리 (Henry of Ghent)그리고 로마의 자일즈(Aegidius Romanus) 등이다. 물론 그 외에도 몇몇의 인물을 더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스콜라 철학의 형이상학 혹은 존재론의 주된 문제인 존재(esse)와 본질(essentia)의 구분에 관한 논의를 다루고자 한다. 과연 이는 실재적으로 구분되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형식적으로 구분되는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다룰 논의의 중심에 있다. 실상 이 논의를 위해서 우리는 스콜라 철학의 많은 논의가 그러하듯이 다시 이슬람 철학으로 올라가서 도움을 받아야한다. 우선 아비첸나(Avicenna)에게서 어떻게 존재와 본질이 다루어졌는지가 다루어져야한다. 그 이후 이러한 아비첸나의 논의가 오베르늄의 윌리엄(Quiliaume d'Auvergne)과 그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이어지면서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도 알아야할 것이다. 그리고 자서 토마스 이후 존재와 본질의 구분에 관한 논의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둔스 스코투스와 겐트의 헨리 그리고 수아레즈는 존재와 본질의 형식적 구분을 주장한다. 반면 로마의 자일즈는 실재적 구분을 주장한다. 그 외에도 시제 브라방(Siger Brabant)이나 비터보의 제임스(James of Viterbo) 그리고 퐁테느의 고트프리(Godfey of Fontaines), 옥캄(William Ockham) 등이 이와 관련된 논의를 다루었다. 이렇게 보자면 이 문제는 분명 중세 존재론 혹은 형이상학의 중심 문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논의를 통하여 당시 존재론을 연구한 이들의 고민에 다가가 보고자 한다.
2.0 이슬람 철학에서 존재와 본질의 문제
알 킨디(Al-Kindi)와 알 파라비(Al-Farabi)라는 선배들에 의한 사변의 발전은 아비첸나에 이르러 정점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의 존재와 실체에 관한 연구는 그의 형이상학이 번역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중세 철학자 혹은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 일찍이 알 킨디에게 신은 진(眞)이며, 알 파라비에게 신은 '우선된 것' 혹은 '제일 존재'를 가리킨다. 이는 다른 것에 의하여 있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에 의하여 존재하는 필연적 존재를 가리킨다. 우선된 것은 mahia(본질)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단지 annia(실재성)를 가진다. 그리고 알 킨디는 이 둘을 구분했다. 그리고 annia를 이야기할 때, 실재성은 존재와 하나이다. 그러나 madia는 다르다. 이는 실존과 상반되는 것이다. 그리고 본질은 존재의 실존 원인이다. 그러하여 본질은 실존을 앞선다. 하지만 신 가운데 실존은 본질에 따라나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annia에 더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된 모든 존재자들의 경우는 신과 다르다. 그것들은 신이라는 필연적 존재에 의한 가능적 존재이며, 이는 madia와 annia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아비첸나 역시 가능적 존재에 관한 이러한 존재와 본질의 설명의 기본적 도식을 수용한다. 그는 존재와 본질에 관한 논리학적 분석에서 출발하여 형이상학으로 나아간다. 그는 창조된 존재자는 존재와 본질의 복합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철학사에서 본격적으로 존재와 본질의 구분에 의한 존재론적 논의는 어쩌면 그의 선배에 비하여 그에 의하여 실재적으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신은 곧 존재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에게 존재와 본질은 동일한 것이다. 하지만 창조된 것은 다르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와 본질의 구분은 단지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재적 구분의 양상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실재로 아베로에스(Averroes)가 행하는 아비첸나의 존재와 본질의 구분에 관한 비판에서 우리는 아비첸나의 존재와 본질이 형식적 구분이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비첸나의 존재와 본질에 관한 논의는 후에 토마스의 존재와 본질에 관한 논의를 다루면서 다시금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에선 이 정도로 정리한다.
3.0 오베르늄의 윌리엄의 존재와 본질
윌리엄은 그의 저서 {제일 원리에 관하여}에서 esse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본질과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동사인 라틴어 est 혹은 영어 is와 관련된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아비첸나를 수용한다. 그 역시 아비첸나와 마찬가지로 신 가운데 존재와 본질을 하나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은 다른 것에 의한 것도 아니고, 변화하지 않으며, 영원하고 비물질적이며, 단순성의 가장 높은 단계라고 한다. 반면 아비첸나와 마찬가지로 필연적 존재 이후에 창조된 모든 것은 합성된 것이다. 창조된 모든 것은 제일 원리에 참여함으로서 존재하게 되고, 제일 원리를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창조물은 신을 통하여 존재하고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못하는 본질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존재는 토마스와 다르지만 아비첸나와 마찬가지로 본질에 부과되는 것으로서 본질에 비하여 우유적인 것이다. 그의 이러한 존재와 본질의 구분은 아비첸나의 영향 가운데 있으며, 이러한 그의 구분은 단지 이성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재적 구분을 의미하는 것을 보인다.
4.0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와 본질
이 실재적 구분인가 형식적 구분인가의 문제는 토마스를 기점으로 본격화된다. 수아레즈에 의하여 확인된 것에 의하면 토마스의 전통적 해석은 실재적 구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에 의하면 토마스는 창조물 가운데 존재와 본질의 실재적 구분과 실재적 합성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논의를 우리는 우선 그의 {존재자와 본질에 관하여}를 따라가며 논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그는 합성 실체와 단순 실체를 나누어 다룬다. 합성 실체는 그 본 질 가운데 형상과 질료를 가지는 것이다. 반면에 단순 실체는 형상만을 가진다. 이러한 단순 실체에는 영혼과 천사 그리고 신과 같은 존재를 들 수 있다. 이러한 단순 실체들은 그 본질과 존재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존재와 본질은 실재적으로 구분되는 것인가? 그는 불사조의 본질을 아는 것과 그의 존재를 아는 것이 구분됨을 보인다. 그러면서 존재와 본질이 서로 다른 것임을 보인다. 불사조는 신이라는 제1의 존재자로 부터(a primo ente) 존재를 가지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천사와 같은 것은 형상(본질)과 존재로 이루어진 존재자이다. 여기에서 본질은 존재의 관점에서 가능태의 상황이며, 존재에 의하여 현실적으로 존재자가 된 것이다. 이렇게 존재와 본질은 다른 것이다. 여기에서 신은 다른 단순 실체들 즉, 천사와 영혼 등과 구분된다. 그의 본질은 곧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조물은 분명히 존재와 본질의 결합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창조물 가운데 행해지는 토마스의 실재적 구분이 토마스주의자인 성 토마스의 요하네스(Johannes a S. Thomas)가 이해하듯이 "상이한 두 개의 사물"(duae diversae res)이라는 식은 아니다. 그는 이러한 실재적 구분의 근거를 토마스의 것이라고 오해된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대전}(Summa totius logicae Aristotlis)를 인용하여 내세운다.
4.1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대전}의 존재와 본질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대전}의 제2논구 2장에서 우리는 다음의 논의를 읽을 수
있다.
상이한 두 개의 사물과 같이 창조물 가운데 본질의 존재와 실존의 현실적 존재는 실재적으로
구분되어진다.
그리고 이 문헌은 이어서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 "실존의 현실적 존재는 사물의 본질 외부에 있다"고 한다. 이렇다면, 존재와
본질은 실재적으로 구분되는 두 개의 사물과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본질과 존재가 두 개의 사물이라는 해석에 의한 실재적 구분은
수아레즈에 의하여 비판받는다. 그러면서 수아레즈는 이성에 의한 구분을 주장하게 된다.
4.2 토마스의 실재적
구분
위펠(J. Wippel)이 지적하듯이 존재와 본질이 각각 하나의 사물(res)과 비유되는 것은 문제를 제기한다. 왜냐하면
사물이란 것은 매우 중요한 철학적 용어로써 현실적 존재자 혹은 본질이라는 의미의 전문 용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토마스의 실재적
구분과 다른 것이다. 토마스가 생각한 존재와 본질을 각각 하나의 사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논의하였듯이 {존재자와 본질에
관하여}에서 보인 예와 같이 말이다. 불사조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그것의 존재에 관한 것과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토마스는 존재는 본질
혹은 무엇임과 상관없는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다시 말해, 형식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실재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존재와
본질을 두 개의 사물과 같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 토마스의 해석이다. 그 이유는 토마스에게 사물 즉 라틴어 res는 존재자인 라틴어 ens와
같은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용어의 사용은 토마스의 {진리론}(De veritate) q.1, a.1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재적 구분에서 실재적이라는 의미의 라틴어인 realis는 사물(res) 사이의 구분(alis)이라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기에 그 자체로 이미 사물 가운데 구분이라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의 어려움은 존재와 본질을 마치 두 개의 사물
혹은 존재자인냥 이해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가 수아레즈와 같은 이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토마스에게 본질은 존재자가 아니라,
그 스스로는 존재하지 못하고, 오직 존재에 의하여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존재는 그 스스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 의하여 무엇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며 존재 그 자체로 남아있을 뿐이다. 이렇게 토마스에게 본질과 존재는 각각 하나의 사물은 아니지만
실재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5.0 시저 브라방은 존재와 본질
시저 브라방은 토마스의 창조물 가운데 존재와 본질의 실재적 구분은 부정한다. 시저에 의하면 토마스의 존재는 사물의 본질에 더해지는 것이며, 이는 본질 그 자체도 아니고, 형상과 질료와 같이 본질의 부분도 아니며, 우유적인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토마스의 존재는 실재성 가운데 네 번째 본성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시저는 실존과 본질은 같은 사물이나 본질 그리고 같은 개념을 의미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입장은 후에 창조물 가운데 본질과 존재의 실재적 구분이라는 토마스의 주장으로 가까워졌다고 한다.
6.0 로마의 자일스의 존재와 본질
로마의 자일스는 존재와 본질의 실재적 구분을 옹호한다. 하지만 그가 과연 토마스 아퀴나스의 노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는지는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그가 많은 부분에서 토마스와 다른 견해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실존은 현실성이고, 질료의 현실성이고 완성인 형상으로서 본질의 완성이고, 질료와 같이 실재적으로 형상과 다른 것으로서 그렇게 본질은 실재적으로 실존과 구분된다.
여기에서 그는 형상과 질료와 같이 존재와 본질을 구분한다. 그러면서 이 둘의 '실재적 구분'과 '실재적 분리'를 의심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분리되어질 수 있는 것과 다르게 사변 가운데 분리되는 것을 적어야한다... 만일 그들이 단지 사변 가운데 분리된다면 그들은 이성적 구분이다. 만일 실재적으로 분리된다면 그들은 실재적 구분이다... 실재적 분리가 실재적 구분이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는 실재적 분리가 가능한 것은 분명히 실재적 구분이 적용되어야함에 의심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 그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실존과 본질은 두 개의 사물(doas res)이다. 그렇게 실존은 본질에 실재적으로 더해지는 현실성 이외 어떤 것도 아니다. 실존과 본질은 모든 창조물로 실재적 합성된 것이다.
이는 존재와 본질이 마치 두 사물과 같이 실재적으로 분리됨을 보인다. 그리고 그는 실재적으로 분리되는 것은 실재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실재적 구분이 존재와 본질에 적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존재와 본질의 실재적 구분이라는 논의는 창조물의 우연성이라는
특성을 위한 논의와 관련을 가진다. 로마의 자일스의 이러한 존재와 본질의 구분은 마치 사물(res)과 사물(res)의 구분이란 언급으로 드러나
어려움을 가진다. 그의 이러한 용어 사용은 매우 불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용어 사용은 분명 토마스적이지 않은 면이다. 그리고
실재적으로 구분된다고 실재적으로 분리되어진다는 그의 논의도 토마스적이지 않다. 자일스는 실재적으로 분리되지 않으면 단지 형식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며, 오직 실재적으로 분리되어야 실재적 구분이 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토마스는 분명히 실재적으로 구분되다고 실재적으로 분리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존재와 본질이 독자적으로 자기의 존재를 가진다고 하지는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그의 실재적 구분은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실재적으로 분리됨의 가능성을 이야기하지만 실재적 존재와 사물을 분리된다고 하지는 않은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볼 때, 그가 실재적 구분을 논의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토마스적 면이 보인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논의의 과정에서 그는 非-토마스적 논의의
면모를 보이는 것이다.
7.0 겐트의
헨리의 존재와 본질
겐트의 헨리는 로마의 자일스의 존재와 본질 사이에 실재적 구분을 비판한다. 그러면서 창조물 가운데 존재와 본질은 실재적 구분을
가지지 않으며, 단지 지향(intentio)에 따라서 구별되는 것일 뿐이라고 한다. 이는 실재적 구분과 순수 형식적 구분 사이에 있는 것으로
새로운 구분인 지향적 구분(intentional distinction)이다. 그리고 본질의 존재(esse essentiae)와 실존의
존재(esse existentiae) 사이의 차이를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는 아비첸나의 본질의 세 가지 구분을 수용한다.
이는 1) 그 자체로 단순하고 절대적인 것, 2) 개별자 가운데 현실화된 것 그리고 3) 지성 가운데 현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첫 경우에
주의를 기울인다. 본질의 존재는 창조물에 본질적으로 속하는 것으로 본질 자체의 존재성을 의미한다. 그에게 '본질의 존재'는 개별적 실존 가운데
현실화되지 전에 신의 지식 가운데 대상인 가능적 존재자로서 존재성과 관련된다. 그리고 개별적 실존의 창조는 신적 의지의 중재가 더해지는 것을
요청된다. 여기에서 신은 시간 가운데 몇몇 본질에게 '실존의 존재'를 전달한다. 여기에서 본질은 현실적으로 있고 객관적으로 있는 본질로서 그
자체로 어떤 현실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본질의 존재로 인하여 가능적 존재자는 신의 지식의 대상으로서 충분한 존재론적 일관성(sufficient
ontological consistency)을 가진다. 그리하여 실존의 존재와 상관없이 그것이 그 자체로 이해되는 것은 바로 본질의 존재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존재가 창조물 가운데 본질에 어떤 절대적인 것을 더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실존의 존재는 본질에 어떤 실재성을 더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존재와 본질은 실재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는 본질의 존재에 관한
논의에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본질과 존재의 구분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조건 아래에서 이 둘을 구분하는 지향적
구분을 이야기한다. 그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존재와 본질의 구분은 실존의 존재가 본질에 더하는 것은 본질과 실질적으로 다른 현실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실존의 존재이게 하는 작용인으로 신과의 현실적 의존 관계이다.
8.0 퐁테느의 고트프리의 존재와 본질
픙테느의 고트프리는 실재적 구분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는 존재와 본질은 단지 구체적 방식과 추상적 방식으로 동일한 것을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실재로는 차이를 가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음에 다루어질 비터보의 제임스의 것과 비교될 수 있다. 그는 분명히 지향적으로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실재적으로 다른 것도 아니며, 오히려 실재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이 구분의 문제는 추상된 명사(본성)과 구체적 명사(지칭된 것) 사이의 대조를 통하여 규명한다. 이 대조는 마치 '인간성'과 '인간'과 같이 추상적 보편 명사와 구체적 보편 명사에 의하여 의미되어지는 것의 사이 일어나는 것과 같으며, 혹은 '이 인간성'과 '이 인간'과 같이 추상된 개별적 명사와 구체적 개별 명사의 관계와 같다. 그리고 이는 그에게 간단하게 본성과 지칭된 것의 관계에 관한 것이고 근본적으로 혹은 일차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하지만 추상에 의하여 의미하는 것과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것에 따라 어떤 것을 의미할 때, 그 의미의 방식(modus significandi)에 의하여 달라진다. 이에 의하면 존재자(ens)와 본질(essentia) 그리고 존재(esse)의 문제는 구체적 명사와 추상적 명사 그리고 동사 사이의 관계와 견주어진다. 이는 다른 경우에 currens, cursus, currere에서 실재적으로 구분되는 사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같은 방식으로 존재자와 본질 그리고 존재에 적용된다. 하지만 이들은 의미의 방식에 의하여 차이를 가지며, 실재로는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제임스 보다 더 존재와 본질의 실재적 동일성을 주장한다. 본질과 존재, 즉 라틴어로 essentia와 esse를 그는 빛과 비춤 사이의 관계와 유사한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명사화된 빛(lux)은 실재적으로 동사인 비춤(lucere)과 실재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9.0 비터보의 제임스의 존재와 본질
비터보의 제임스의 존재와 본질의 문제는 전적으로 실재적 구분을 수용하지 않고 우선적으로는 동일한 것이며, 조건적 관점에서 구별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기존의 이론을 세 가지로 구별한다. 그 가운데 첫째는 퐁테느의 고트프리의 것으로 알려진 논리적 질서 가운데 본질과 존재가 구분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존재는 본질과 구별되는 사물이라는 것으로 로마의 자일스의 생각과 유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실재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며, 지향적으로 다르다는 것으로 겐트의 헨리의 생각을 든다. 제임스는 이 모두가 적당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우선적 그리고 원리적 의미에서 창조물 가운데 현실화되어지는 것으로서 존재와 본질은 하나의 것 혹은 같은 것이다. 즉, 존재와 본질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차적 의미에서 존재가 의미하는 것은 본질이 의미하는 것과 다르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안셀무스의 {모놀로기온}의 한 구절을 인용해야한다.
빛(lux)과 비춤(lucere)과 비추는 것(lucens)이 서로 관계하는 것처럼 본질과 존재와 존재자가 상호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빛과 비춤은 추상적인 것(the abstract)과 구체적인 것(the concrete)으로 하나의 다른 것과 관련된다. 그러나
비춤은 빛 그 자체를 의미한다. 물론, 행위의 측면에서 말이다. 이를 인용하여 제임스는 존재와 본질의 구분을 다룬다. 그에 의하면 구체적인 것이
추상적인 것과 다르듯이 존재가 본질과 다른 것이다. 추상 명사는 단지 형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편 상응하는 구체 명사는 형상과 그것의 주체
양자를 의미한다. 그런데 창조물은 형상과 그 주체가 동일하지 않다. 그러므로 창조물의 측면에서 구체 명사는 추상적인 것이 행하는 것 보다 실재
가운데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 가운데는 형상과 형상의 주체의 구분이 없다. 그렇기에 신 가운데는 논리적으로 구체 명사가 추상적인 것
보다 많은 것을 의미하지 실재적으로 그렇지 않다.
그에게 존재와 본질에 관한 논의는 상당히 복잡하다. 그가 주장하듯이 본질과
존재는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으로 관계된다. 그리고 이는 일차적 의미에서 하나이고 같은 것이다. 그리고 후자적 의미에서 그들은 신 가운데
논리적으로 구분되고 창조물 가운데 실재적으로 구분된다. 요약하자면, 존재와 본질은 일차적 의미에서 실질적으로 동일하고 또 이차적 의미에선
실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0.0 카예타누스의 존재와 본질
수아레즈의 진술에 의하면 카예타누스(Thomas de Vio Cajetan)는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 실재적 구분을 주장한 이이다. 그의 이러한 논의를 {존재자와 본질에 관하여 주해}를 통해 살펴보자. 우선 그는 카프레오루스(Johannes Capreolus)의 견해를 수용한다. 카프레오루스는 직접적으로 토마스와 같이 존재와 본질에 관한 실재적존 구분을 주장한 이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는 {존재자와 본질에 관하여 주해}에서 실재적 구분을 주장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존재자와 본질에 관하여}에서 본질과 존재는 다르다고 했다. 이를 이어서 카예타누스는 라틴어 esse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며, 이는 존재와 본질이라고 한다.(esse est duplex scilicet exsitentiae et essetiae) 그리고 그러한 존재와 무엇임(quidditas) 혹은 본질은 실재적으로 구분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의 예를 든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았듯이 소크라테스의 무엇임은 그의 존재와 실재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하얀 사물의 하양은 그것의 고유한 존재와 다르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와 하얀 사물은 본질과 존재의 합성물이다. 그에게 이렇게 존재는 본질과 구분되는 것이다. 그리고 토마스는 불사조의 존재와 비존재를 아는 것은 불사조의 본질을 아는 것과 다르다고 한다. 이어서 카예타누스는 장미의 예를 들며 이를 설명한다.
장미의 존재는 겨울이나 봄 가운데 있지 않다. 왜냐하면 장미의 본질, 그것은 항상 그 자신의 무엇임에 관한 서술을 가지며, 이는 존재의 현실력(actus essendi)를 아직 더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서 장미라는 꽃에 관한 무엇임의 서술은 그것의 존재와 비존재(esse vel non esse)에 관한 것이 아니다. 본질은 정의와 관련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존재에 관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물론 존재자(ens)는 존재와 본질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본질은 이 존재자의 구성원 가운데 하나이며, 존재는 이러한 본질을 결합되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존재와 본질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11.0 수아레즈의 존재와 본질
수아레즈는 실질적 구분을 거부한다. 그는 존재와 본질의 구분을 실재적 구분과 양상적 구분 그리고 지성에 의하여 구분으로 나눈다.
그리고 실재적 구분이란 대체로 오랜 토마스주의의 견해이며, 여기에 속하는 이들로 카예타누스와 페라라(Ferrara) 그리고 로마의 자일스 등을
든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실재적 구분에 속하지는 않는다. 즉 그 자신은 기조느이 정통적 토마스의 해석과는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자신은 어디에 속하는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론에 입각한 논의는 한편으론 실재적 구분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둔스 스코투스와 이를 따르는 후대
프란치스칸 그리고 수아레즈와 예수회 회원들이 이들이다. 이들은 실재적 구분이 아니라, 형식적 구분을 주장한다. 스코투스는 "사물의 본성으로부터의
형식적 구분"(distinctio rationis ex natura rei)을 주장하고, 수아레즈는 "사물 가운데 근거하는 이성적
구분"(distinctio rationis cum fundamento in re)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수아레즈는 실존이 본질에 무엇을
더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재로는 아무 것도 더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 만일 하나의 가능적 본질이 있다면 , 신이 그것을 창조한 것이다. 신이
본질을 창조한 것이다. 그리고 그 본질에 있어서 신에 의해 현실화되었다는 것과 실존되었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 그는 신의 정신 가운데 가능적
본질의 실재적 본질은 항구적이며, 완전하게 규정되어야한다고 본다. 그렇기에 그것은 어떤 현실성도 결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물 그
자체 가운데 존재와 본질은 실재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는 실재적 구분이 아닌 순수 이성에 의하여 구별된
이성적 구분에 의하여 구분됨을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 자신은 실재적 구분과 같이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과 다르다'는 양식에 의하여
본질과 존재가 구별되지 않고, 사물 그 자체 가운데 이성의 작용에 의하여 구별될 뿐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실존하는 본질에서 실존으로부터
본질을 추상한다. 하지만 이러한 심적 작용이 사물 그 자체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즉 이렇게 현실적 본질과 현실적 실존은 어떤 구분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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