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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의자리

초기 중세 개체화 이론의 성립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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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개체화 이론의 성립과 전개 그리고 그 철학적 의의
-오도, 길베르투스의 논리-존재론에 기초하여-

그냥 적은 것입니다. 완전히 요약 수준의 글입니다.

 

중세 개체화 이론의 성립과 전개 그리고 그 철학적 의의
-오도, 길베르투스의 논리-존재론에 기초하여-

유대칠
(토마스 철학 학교)


1.0 흔히들 중세 철학의 중요한 논의로 제시되는 보편논쟁과 개체화이론은 왜 그들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는가? 도무지 보편(普遍)이 우위이건, 개체(個體)가 우위이건 그들에게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 왜 문제가 되는 것인가? 왜 그것을 다루었는가? '인간'이라는 보편 개념은 실존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소리에 지나지 않은 것인가? 그리고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하나의 철학적 이론이 단지 어떤 실용적 가치도 없다는 것은 매우 무의미한 이야기이다. 우리의 시대에서 그것이 단지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시대 그 문화적 패러다임이 그러한 이론을 요청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논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든 철학적 논의는 그 시대에 있어서 매우 유용한 것이 수 있다. 중세 철학의 무척이나 추상적인 논의들도 그 시대의 요청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면 도대체 보편 논쟁과 개체화는 어떤 요청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인가? 이러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도(Odo)와 질베르투스(Gibertus) 등의 문헌을 살필 것이다. 본 연구는 이들에 관한 문헌 소개의 형식을 취할 것이며, 그것은 아직 이에 관한 논쟁적 글을 다루기에 필자 자신의 역량이 모자라기 때문이며, 우선은 이들의 원전을 읽어 가는 것이 필자 자신에게나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더욱 더 유익할 것이라는 확신에서이다. 이들 두 사람의 글을 읽어봄은 적어도 보편 논쟁이 그 시대의 요청일 수 있으며, 또한 이들의 논의가 상당히 논리적 타당성을 가진다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가 이 글을 적은 필자 자신의 의도이며, 필자 자신도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2.0 이 문제의 시작이 된 포르피리우스(Phorphyrius)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은 후대에 던진다. 과연 보편은 자존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개념일 뿐인가? 만일 자존한다면, 물질적인가 아니면 비물질적인가? 그리고 감각으로부터 떨어진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이러한 포르피리우스의 질문은 중세 철학자들에게 고심거리가 된다. 이에 관하여 처음으로 주목할만한 고민을 한 철학자는 보에씨우스(Boethius)이다. 그는 그의 포르피리우스의 『이사고게 두 번째 주해서』에서 알렉산더 아프로디시아스(Alexander Aphrodisias)의 것이라며, 추상(抽象)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는 선분의 예를 사용한다. 선분은 물질적 사물 가운데 있는 것이고, 그 가운데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추상을 통하여 이를 받아드릴 수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보편은 추상을 통하여 얻은 것이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보편은 개별적 사물 가운데 있지만, 보편자로서 사유되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보편은 추상된 것으로서 지성 가운데 하나의 상에 지나지 않은 것이 된다. 그는 이렇게 나름의 해결책을 내어놓지만, 이러한 것이 그 자신의 고유한 것이라고 하지 않으며, 그 몫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돌리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논의는 어떻게 중세인들에 사용되었는가? 한마디로 무슨 효용성을 가지는 것인가? 적어도 무용한 것이라면, 이러한 논의는 단지 지적 만족감에 지나지 않은 것인가? 이에 관하여 우리는 오도의 논의에로 다가가 볼 필요가 있다.

3.0 가톨릭 교회의 주교였던 오도(Odo turonensis)는 그의 『원죄론』(De peccato originali)에서 이를 다룬다. 그의 이 저서는 교부문헌 총서 160권에 속해있으며, 이 저서에서 그는 형이상학적 논의를 근거로 인간의 원죄의 유전(遺傳)됨에 관하여 다룬다. 그리고 그러한 논의의 핵심에 보편과 개체에 관한 논의가 놓여있다. 그는 그의 저서에서 원죄에 관한 논의를 중세기의 "유명한"(famosa) 논의 가운데 하나로 인정한다. 그것은 원죄에 관한 논의의 핵심이 죄가 어떻게 아담 한 사람에게서 후세 전체 인간에게로 이어지는가에 대한 난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모두가 지은 죄 가운데 것이 아담 가운데의 것과 같다(Rom.5) 이는 다음과 같이 탐구되어진다. 우리는 어떻게 아담 가운데서 죄를 지었는가? 죄의 원천을 어떻게 아담에게 이끌어지는가?

 이는 핵심적 질문이다. 어떻게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이어지는가 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는 『원죄론』 2권에서 보편 개념을 가져온다. 그에 따르면, "류(類)보다 종이 더 실체적이다. 그렇기에 동물보다 인간이 더 낮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성적이지만, 동물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자면, 인간 보다 페트루스가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페트루스와 같은 개체는 종 아래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오직 인간 종만이 개체인 페트루스를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 종은 다양함 가운데 개체들의 집합"이다.
 최초의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인간 영혼이 있었다. 이는 아담과 이브의 영혼이다. 이때 두 인격 가운데 인간의 영혼은 개체가 아니라, 두 인격의 집합이다. 물론 그 집합 가운데 구별되어지는 것으로 집합이다. 인격은 이성적 본성의 개체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인간이라는 류(類)와 한 인간이라는 개체(個體)에 관한 논의를 형이상학적으로 진행한다. 그는 오세르의 레미지우스(Remigius) 등에 의하여 주장된 실념론(實念論)을 수용한다. 이러한 실념론은 종은 류의 한 실체적 부분이며, 인간이라는 종은 많은 개인들의 실체적 통일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다양한 개체들은 수에 있어서 하나인 공동의 실체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전체 가운데 개체는 다만 우유적으로 구별될 뿐이다. 그리고 이는 단지 이성적으로 구별될 뿐이라고 한다. 실재적 구별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오도는 원죄론에 관하여 당시의 보편에 관한 논의를 수용한다. 그는 종 가운데 개체에 관하여 이렇게 부르지만, 류 가운데 종에 관해서는 실체적이라고 한다. 마치 선(linea) 가운데 점(punctum)이 그러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종은 실체적인 것이다. 하지만 개체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다. 그는 보편적 개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그 자체로 보편적이며, 그 가운데 완전함과 전체를 가지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인간을 이해해보자. 인간이라는 보편적 종(種) 가운데 각각의 인간은 단지 우유적 구분에 의하여 그러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인간으로서 하나이다. 그리고 각각은 단지 집단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인간은 각각의 인간으로 이루어진 보편적 개체이며, 각각은 인간은 단지 개체이다라는 이러한 사고는 원죄론을 옹호하기 좋다. 인간은 본성상 다른 인격이 저지른 죄로부터 분리된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인격과의 구별은 단지 우유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극단적 실념론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원죄론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보편논쟁은 당시 시대적 요구이기도 했으며 여러 문제와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4.0 포와티에(Poitiers)의 주교 길베르투스(Gilbertus)는 독특한 온건한 실재론을 주장한다. 그의 독특한 플라톤주의는 후에 아비첸나의 유입과 함께 조화되며 둔스 스코투스에게로 이어진다. 그러면 여기에서 간단하게 그의 논의를 살피기로 하자. 그는 {삼위일체론 주해}에서  자존(Subsistentia)과 실존(Substantia)을 구별하며 보편 논쟁을 시작한다. 인간 개개 가운데 개별화되어 있는 본질(essentia) 혹은 실체와 실체적 형상 혹은 자연적 형상들(formae nativae)을 구별한다. 자연적 형상은 동일한 종(種)이나 류(類) 가운데 같은 것이란 의미에서 공통적이다. 지성이 사물 가운데 그 자연적 형상을 생각할 경우 지성은 추상을 통하여 그 사물을 생각한다. 그렇기에 지성은 종과 류를 향한다. 하지만 이러한 종과 류는 '자존'이지만, 실체적 존재는 아니다. 이는 단지 유사함에 따라서 모여진 집합(集合, collectio)일 뿐이다. 자존은 간단하게 류(類)와 종(種)이다. 이는 본질이 되기 위해서 우유성을 필요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스스로 다른 무엇을 있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실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실체는 우유적인 것 가운데 개별적 존재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류와 종은 단지 이러한 실체들의 집합일 뿐이다. 실체는 본질(essentia)이 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는 자존이다. 그러나 모든 자존이 실체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다른 무엇의 유지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실체는 그 스스로 다른 무엇의 유지자이지만 말이다. 간단하게 실체는 개체 가운데 사물의 우유성이 내재하여 개별화되어 있는 본질이다. 그리고 자존은 그러한 실체의 형상이다.
 그는 보편의 실체성을 거부한 것이다., 보편은 실체가 아니다. 그러면 그에게 류와 종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집합(collectio)이다. 그는 여기에서 추상(抽象)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자신의 정신으로 추상한 것을 서로 비교하여 유사한 개별 대상의 형상을 하나의 관념으로 형성한다고 한다. 마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치체로가 인간이라는 관념을 공유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보편자이다. 이는 다양한 자존들을 하나이거나 유사한 것으로 이야기되는 것은 추상으로 그러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상이한 동물은 '동물'이 되고 상이한 인간은 '인간'이라는 하나의 관념이 되는 것이다. 즉, 그는 보편을 하나의 집합 명사 정도로 생각했다. 이러한 그는 온건한 실재론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간단하게 그에게 보편자란 다수의 개체들 가운데 유사성을 이야기하는 것 정도일 뿐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그의 문헌을 통하여 확인해보자.

 '같음'은 종에 의하여 불리어진다. 예를 들어, 카토는 치체로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카토와 치체로에 의하면 같은 종이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다. 다른 종류의 자존, 그것은 하나의 종이며, 이는 실체적으로 그들을 비슷하게 만든다. 이들 자존 가운데 하나에 의하여, 카토는 사람이고, 다른 경우 치체로도 사람이다.

이어서 다음의 문장도 확인해보자.

 많은 자존은 또한 '하나' 그리고 '같음'이라 불린다. 하나의 본성 가운데 단일성(singularity)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차라리 많은 본성의 연합에 의한 것이며, 이는 그들의 유사성의 이유에 의하여 일어난다. 왜냐하면, 연합의 이러한 종류에 의하여 몇몇 인간들은 하나 혹은 같은 인간이라 불리어졌고, 몇몇 동물은 하나 혹은 같은 동물이라 불리어졌다.

 이 논의를 더욱 더 분명하게 그의 주장을 보여준다. 각각의 인간이 '인간'인 것은 그것들에 준한 보편자의 실체성에 의하여 그러한 것이 아니다. 같은 종과 류 가운데 '같은 것' 혹은 '하나'라고 불리는 것은 오히려 많은 본성들의 연합 혹은 집합이며, 이들의 유사성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에 적용될 때 어려움을 겪는다. 왜냐하면, 신과 신성 그리고 성부와 성부성을 구별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의 보편에 관한 논의는 삼위일체론과 연관되고 비판된다.

5.0 오도는 보편자가 실재한다고 한다. 여기에 길베르투스는 보편자는 단지 유사한 것의 집합 정도라고 한다. 이러한 길베르투스의 이론에 아라스의 부주교인 클라벰발두스(Clarembaldus)가 반론을 제기한다. 그는 길베르투스와 같은 텍스트인 보에씨우스의 {삼위일체론}을 주해하면서 맞선다. 그의 주장을 살펴보자.

 분명하게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치체로는 같은 인간성(人間性)에 의하여 사람이다. 그리고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사람이고, 플라톤도 사람이고, 치체로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세 사람은 의심의 여지없이 사람이다. 그리고 놀랄 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같은 인간성에 의하여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다수성은 그 가운데 간격을 가진다. 그들 우유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말이다.

  그는 직접적으로 '인간'이라는 보편자의 실존을 주장한다. 즉, 그는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인간성이 존재하며, 개별적 인간은 단지 우유성에 의하여 다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6.0 이상 몇몇 학자들의 보편과 개체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았다. 보편의 실재성을 주장한 오도와 클라벰발두스와 보편을 단지 집합 정도로 생각한 길베르투스의 논의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논의를 그 뒤에 다시 더욱 더 풍성한 논의를 낳게 된다. 이들의 논의는 그저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보편자의 존재성에 관한, 즉 존재론에 관한 논리적 분석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는 오도의 원죄론(原罪論)과 길베르투스의 삼위일체론(三位一體론(論))에게서 보여지듯이 당시 신학적 문제와도 연관을 가진다. 이렇게 당시 보편자에 관한 존재론적이고 논리학적인 논의는 단지 논리학이나 존재론에 관한 관심이 아니라, 신학적 관심과 연관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 꽃을 피지 못한 보편자와 개별자에 관한 참예한 철학적 논쟁이 중세에 와서야 꽃을 바라게 된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기반으로 우리는 차후에 이후의 논의를 다룰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보편자에 관한 기본적인 입장 정립은 차후에도 이어진다고 할 수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