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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의자리

알베르투스 마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실체변화의 윤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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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투스 마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실체변화의 윤곽

:13세기 초자연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의 부조리 문제


유대칠

(토마스 철학 학교)



1. 빵, 그것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성체성사의 여정


 예수는 이야기했다. "이것은 내 몸이다." 이 말이 가지는 신앙적 의미는 그리스도교의 신자만이 절실히 느낄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우리는 그것의 신앙적 의미에 관한 논의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 글이 신앙에 도움을 주고자 의도된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을 다룰 것인가? 바로 “실체변화”(transsubstatiatio)라는 단어이다. 이 말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말이 성체성사 가운데 적용될 때, ‘이것’ 즉 빵은 실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실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장 이 말이 일반적으로 쉽게 이해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모양과 맛 그리고 향이 모두 빵인데, 어찌하여 그것의 실체가 빵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이란 말인가? 이러한 자연스러운 의문은 의미에 의하여(in signo) 빵이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킨다는 논리를 낳기도 하였다. 하지지만 이러한 이론은 곧 파문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중세 그리스도교 사회는 실체변화에 의하여 성체성사를 교리로 받아드렸다. 하지만 그에 관한 논의는 그렇게 간단하게 조용해지지 않았고, 그럴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다른 것을 모두 미루어 놓고라도 분명 이것은 당시 신학의 고유한 문제였다. 필자는 알베르투스와 토마스의 논의를 정리하고, 이들의 신학함의 한 모퉁이를 정리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생각하는 철학함과 신학함 그리고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에 관하여 정리해보고자 한다. 


2. 알베르투스의 ꡔ성체성사에 대하여ꡕ(de eucharistia) 1부 3질문 4절 문헌 분석.


 알베르투스는 성체성사에서 실체변화가 가지는 문제에 관한 자연 철학적 혹은 존재론적 어려움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를 우리는 그의 ꡔ성체성사에 대하여ꡕ 1부 3질문 4절의 대론(對論)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는 우유(accidens)가 존재하는 것은 내재(inesse)라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므로 이 우유가 어떤 물체(corpus) 가운데 내재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것으로 보여진다.1)


 이것이 왜 반박의 대상으로 등장한 것인가? 성체성사 가운데 빵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 실체가 변했다는 것이 실체변화의 주된 내용이다. 그러면 빵의 실체는 더 이상 빵의 실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빵의 우유는 빵의 실체가 없이도 계속 자신을 유지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알베르투스는 이것이 성체성사의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우유는 실체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논의를 소개하면서 문제를 시작하는 것이다. 위에서 알베르투스는 우유의 속성을 정의하였고, 이어서 그는 실체에 관하여 정의하면서 보다 분명히 문제점을 드러낸다.


실체(substantia)는 스스로 실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유가 스스로에 의하여(per se) 실존한다면, ‘실체’로 전환되었다고 보여진다.2)


 여기에서 알베르투스는 논의의 문제점을 보다 선명히 그려내고 있다. 위에서 이미 우유를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정의 내렸고, 이어서 두 번째 대론에서는 실체를 스스로 존재한다고 정의하고 만일 우유가 실체 없이 스스로 존재하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우유가 아니라 실체로 전환되어버린 것을 의미한다고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알베르투스는 우유가 실체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상의 문제점에 관하여 해결책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우유는 실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고유한 본성으로 인하여 스스로에 의해 실존함이 인정되지 않지만, 외적 우연성의 능력으로 그 자체가 실존함이 인정된다.3)


 그는 성체성사에서 빵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이란 실체로 실체변화함 후에 남은 우유가 실체 없이 있다고 하여 그것이 스스로 실체가 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외적 우연성의 능력으로(vittute extrinseci continentis) 인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외부에서 주어진 이러한 우연성의 정체는 무엇인가? 무엇이 우유를 실체 없이 남게 하였는가?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지금 내재 할 수 없으나, 그러나 물체 가운데 실존하는 신성의 능력으로 유지되어진다.” 이제 위에서 이야기한 외적 우연성의 능력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것은 “실존하는 신성의 능력”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금 다루는 ꡔ성체성사에 대하여ꡕ 1부 3질문 4절의 주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성사 가운데 우유적으로 남겨진 것에 대하여”이다. 이 논의는 이미 성사 가운데 우유적인 것이 남겨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남겨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간단하게 실체 없이도 신에 의하여 사라지지 않고 남겨진 것이 된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우유의 존재론적 위치는 어떠한가?


 이 성사에서 우유 가운데 있는 제일 되는 것은 양(quantitas)이고, 이것 자체는 양이다. 그리고 왜냐하면 이들은 질료에 더 고유한 것이고, 이것이 스스로 있고, 또한 다른 우유는 마치 모양, 색 그리고 맛, 향과 같은 그러한 것은 (양) 그 자체 가운데 있다.4) 


 이는 중세 철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알베르투스는 우유가 실체 없이 존재하며, 그것이 그러한 상황에도 남아있는 것은 신에 의하여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유는 본시 주체 가운데도 있지만, 그러한 우유 가운데 첫째는 양(quantitas)이며, 양에 다른 우유들이 그 가운데 존재한다고 논의하고 있다. 즉, 맛이나 향 그리고 모양이나 색과 같은 것이 양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양이 실체가 없이 신에 의하여 유지된다면, 다른 것은 그것에 의하여 유지되며, 그렇기에 빵은 여전히 빵의 맛을 가지고 모양을 가지며 색과 향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14세기에 논박의 주된 대상이 된다.5)

 여기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성사라는 기적의 한 장에서 신의 초자연적 전능이다. 알베르투스에게 신의 전능은 실체 없이 우유를 남길 수 있게 하는 것으로서 자연 철학의 인과적 단계를 넘어서 있는 그러한 능력이다. 이는 우유적으로 남겨진 것을 논의하는 4절에 앞선 2절에 이미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물리적 작용자의 현실태는 앞서 있는 가능태를 내세우지만, 그러나 자연을 넘어선 작용자의 현실태는 질료 가운데 가능태를 내세우지 않는다. 하지만 활동적 가능태인 작용자 가운데 (가능태를 내세운다.) 또한 창조물 가운데 마치 유사한 것에서 이야기했듯이, 창조자의 작품에 순응의 가능태를 내세운다.6)


 여기에서 알베르투스는 성사, 즉 기적과 같은 사건에서 일어난 일은 자연의 원리에 의하여 질료 가운데 앞서 있는 가능태의 현실화로 설명되지 않음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성사의 일은 자연을 넘어선(super naturam) 것이며, 이는 작용자인 신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자 신에 대하여 창조물은 단지 순응에 의하여 기적을 받아드린다고 한다. 그러면서 알베르투스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처녀인 마리아의 자궁에서 일어난 일을 소개한다.


 그러므로 신은 처녀의 자궁이 임신하게 할 수 있으며, 그리고 처녀의 자궁은 순응할 수 있었다.7)


 그리고 이러한 일은 단순한 자연계의 일이 아니라, 알베르투스는 기적 가운데(in miraculis)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알베르투스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사실 자연계에서 처녀가 남성의 정자에 의하지 않고 임신을 한다는 것을 불가능한 것이며, 빵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며, 빵의 우유가 빵의 실체의 부재(不在)에도 남겨진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면 이러한 종교적 사건들의 가능성은 오직 신의 전능으로 돌려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기에 알베르투스는 이는 자연을 넘어선(super natura) 것이라 언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알베르투스, 그의 머리 속에 들어선 자연학적 논리는 다분히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그렇기에 그가 이해하는 자연계의 모든 일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 가운데 이해되고, 해석되어야한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설 때, 이것이 “초자연적 현상”이 된다. 결국 성사에서 이루어지는 실체변화는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고 알베르투스는 정의내린다.     


3. 토마스의 ꡔ신학대전ꡕ(Summa theologica) III, qq.75-77 문헌 분석.


 알베르투스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스승의 노선을 이어간다. 근본적으로 토마스는 실체변화의 입장에 따라서 의미에 따른 변화를 거부한다. 그렇다면 야기되는 근본적 문제점, 이미 그의 스승이 잘 정리하였듯이 아리스토텔레스적 자연철학과의 모순에 관하여 그의 태도는 다분히 극단적이다. 실체 없이 지속하는 우유의 문제와 설사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감각되지 않은 그리스도의 실체에 관한 지식에 관하여 그는 “오직 신앙으로”(sola fide)라는 입장을 보인다. 그의 논조를 살펴보자.


나는 대답한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이 성사 가운데 참인 것은 감각으로 포착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오직 신앙으로, 즉 신성한 권위에 지탱되어진다.8)


 벌써 시작부터 성사와 같은 종교적 기적의 문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자연철학의 한계, 즉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들어간다. 간단하게 성체성사의 문제는 ‘아는 것’의 대상이 아니라, ‘믿는 것’의 대상인 것이다. 하지만 토마스는 이러한 한계 가운데도 그의 스승과 선배들이 그러하였듯이 최대한 이해를 추도하는 신앙을 보이려 한다. 이러한 이해의 어려움은 다음의 경우에도 드러난다. 그리스도가 성체 가운데 현존한다면, 그리스도는 천상에 그의 자리를 버려 둔 것인가? 이에 관한 토마스는 강한 부정을 보인다.9) 제대 위에 빵과 포도주라는 장소를 차지하는 그리스도가 그 장소에 현존한다면, 장소적으로(localiter) 그곳에 놓여진다면, 천상에도 그곳에도 모두에 현존한다고 해야 하는가? 적어도 의미에 의하여 혹은 상징에 의하여(in signo) 이루어지는 성체성사에 관하여 반대하였다면, 실체적으로 빵에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이야기해야한다.10)


그리스도의 몸은 그의 면적의 장소로 생각되어지는 장소 가운데 있듯이 이 방식으로 성사 가운데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성사에 고유한 것인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다른 제대 가운데도 있다고 하지만, 성사 가운데 존재하는 것과 같이 다른 장소 가운데 있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가 기호 가운데 있듯이 오직 장소에 있다고 이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장소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이야기함 바와 같이 고유한 방식에 따라서 이 성사에 있다고 이해한다.11)


 여기에서 토마스의 이야기는 성체의 존재방식은 한마디로 특별한 방식으로 있다는 것이다. 빵과 포도주에 현존하는 그리스도는 이로 인하여 천상에 현존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면적의 장소로 생각되듯이 그렇게 성사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이 현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우개가 책상 위에 놓여 존재하듯이, 즉 지우개의 면적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듯이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가 성사 가운데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제대 위에 빵에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몸은 또한 특별한 방식으로 다른 제대 위의 빵에도 실체적으로 존재한다. 여기에서 토마스가 이야기하는 특별한 방식은 인간의 이해가 다가가기 힘든 방식이다. 그리스도는 빵에 실체적으로 현존하지만, 장소 가운데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현존한다. 그렇기에 다른 제대 위에 빵에도 실체적으로 현존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하나의 빵에 실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존재한다면, 다른 제대 위에 빵에는 존재하지 않아야 하며, 천상에서도 그의 존재가 중단되어야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러한 그의 존재를 그 빵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가? 이를 위해서 우리가 이해해야하는 것은 ‘성사’라는 특수한 상황이다. 토마스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다른 제대 가운데도 있다고 하지만, 성사 가운데 존재하는 것과 같이 다른 장소 가운데 있지 않다고 이야기한다”고 이야기한다. 제대a 위에도 그리고 제대b 위에도 그 가운데 빵에 그리스도는 실체적으로 현존하며, 그 제대 위 빵이라는 장소에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으로 성사 이외에도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같은 곳이 동시에 다른 장소에 드러난다는 것은 자연 철학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성사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는 가능하다. 성사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축성된 빵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이 실체적으로 존재하지만, 축성되지 않은 다른 빵에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둘 다 보이기에 그저 빵이지만, 하나는 그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다른 것은 그저 빵이다. 이 두 빵의 실체는 존재론적으로 다르다. 그렇다면, 장소의 문제에서 보자면, 하나는 빵이 장소를 점유하고 있지만, 다른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점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토마스는 이를 거부하는 것이다. 후에 이는 옥캄과 같은 이에 의하여 다시 제고의 대상이 된다.

 토마스가 이야기하는 특별한 방식은 성체성사의 실체변화에도 이어진다. 이미 논의하였듯빵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은 오직 신앙으로 믿는 것이지, 이성이나 지성에 의한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의하면 감각으로 인식되는 것은 우유일 뿐이다. 그런데 우유의 조건에서 축성 이후 성체는 여전히 빵이다. 하지만 그 실체는 더 이상 빵이나 포도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며 피이다. 그렇기에 성서에 등장하는 “이것은 나의 몸이다”(hic est corpus meum)이라는 것은 “빵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이다”(substantia panis est corpus christi)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12) 그리고 이러한 것은 이미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알베르투스의 그것과 유사하다.

 토마스는 “그리스도의 몸은 장소적 변화를 통하여(per motum localem) 이 성사 가운데 존재하기 시작 할 수 없다”고 한다.13) 이 말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몸이란 실체가 제대 위에 빵 가운데 현존하지만, 천상의 존재를 그치는 것도 아니며, 또한 그렇기에 장소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이러한 실체란 어떤 장소에 제한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빵과 포도주 가운데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적으로 현존한다.14)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기에, 장소적으로 제한되어 한 곳에 존재하는 것가는 다른 양식을 가진다.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가 천상에도 존재를 그치지 않으면서 성사 가운데 각각의 제대 위에 빵에 현존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4. 신학과 철학의 자리 매김.


 둘 다 성체성사에서 일어나는 것을 초자연적인 것이라고 한다. 기실 신학이란 초자연적인 것을 그 대상으로 한다. 알베르투스와 토마스 모두 신학의 대상은 신이며, 초자연적인 것이라고 한다. 이에는 이론의 여기가 적어도 이 두 자제지간에는 없다. 알베르루스에 의하면, 신학이란 신적 빛에 의하여 그리고 신조에 의하여 주어진다.15) 그렇다면 우리는 알베르투스가 여기에서 논의하는 것의 또 다른 면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실체변화에 의한 성체성사에 이해는 공의회를 통하여 승인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것을 주장한다는 것은 적어도 가톨릭의 입장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후기 종교개혁을 준비하는 이들에게서 성체성사에 관한 여러 가지 상이한 이론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알베트루스에게 실체변화는 교회의 가르침이며, 이는 어떤 의미에서 ‘신조’이다. 그에게 이는 신학이 서있는 곳이며, 이를 거부한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신조’란 그리스도교의 신앙 규준이다.16) 중세 그리스도교회는 이를 옹호하기 위해 2차 그리고 4차 라테란(Lateran) 공의회에서 이론(異論)을 가진 알비(Albi)파와 위클리프(Wicliff)와 같은 이를 단죄하였다. 그리고 콘스탄츠(Konstanz) 공의회에서 이를 분명히 하였다. 알베르투스는 분명히 철학과 신앙을 분리하였다. 그리고 철학은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가능하며, 신학은 신앙(fides)에 의하여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신앙의 신뢰성에 근거하여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논거한다고 적고 있다. 그에게 실체변화는 숙고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신뢰성으로 수용해여할 그 무엇으로 보인다. 그는 이에 관하여 완전히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칼로 분해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주어진 실체변화를 인정하고, 그 위에서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토마스에게도 그러하다. 토마스는 인간의 고유한 사고력으로 실체변화를 완전히 가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을 거부한다. 오히려 이것은 신앙에 의하여 가지적인 것이라고 한다.17) 즉, 실체변화란 궁극적으로 신앙의 대상인 것이다. 여기에 칼을 들이대는 것은 잘못이라 보는 것이다. 이 둘 다 신앙에 의하여 실체변화를 수용하고, 이러한 수용의 근거에서 논리적인 추론을 행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실체 없이 우유가 남겨진다는 공통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뿐인가? 이 초자연적 현상은 인간의 이성으론 도달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측면을 남긴다. 한 존재자가 천상에서 그 존재를 그치지 않으면서, 제대 위에서도 존재를 유지해야한다. 한 곳에서도 존재를 상실하지 않으면서 다른 곳에서도 동일한 존재자가 다른 한 곳의 상실을 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연적인 현상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동일한 존재자가 한 곳에서 존재를 유지하며, 다른 곳에 동일한 존재를 유지한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힘든 일이다. 이러한 것은 분명 ‘기적’(Mysterium)이다. 흄(D.Hume)에 의하면, 기적은 자연 법칙의 위배가 분명하다. 이렇다면 분명히 이러한 현상은 기적이다. 이는 자연학의 대상일 수 없고, 인간 이성의 사고력을 넘어선 것이다. 알베르투스가 이야기하듯이, 단지 이를 신앙의 신뢰성에 의하여 수용하고, 그렇게 확보된 근거에서 인간 이성의 추론과 같은 것이 가능할 뿐이다. 이렇게 알베르투스에게 철학함과 신학함은 다르다. 이 분은 결국 서로 다른 학문인 것이다. 토마스 역시 신학함과 철학함을 구분한다. 그렇다고 이 둘의 신학의 학문성에 관한 논의가 같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둘은 분명 신학의 학문성에 관한 논의에서 서로 다른 길을 간다. 하지만 여기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철학함과 신학함을 구분한다. 토마스는 그의 ꡔ신학대전ꡕ의 첫머리에서 신학의 학문성을 다룬다. 그러면서 신학은 신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에 기반하기에 가장 확실한 근거에서 출발하는 학문이라 한다.18) 그리고 알베르투스 역시 계시에 의하여 신학이 학문이라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이는 철학함과 다르다. 철학함은 기적과 같은 것에서 침묵해야한다. 어떤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 이야기하듯이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조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철학 본연의 모습이다.  


5.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하여 말하지 않기.


 마지막에 섰다. 인간이 인간의 고유한 능력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자연적 현상이다. 하늘에 돌을 던지면 그것이 중력에 의하여 떨어지는 것, 태양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는 것 그리고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이러한 것이다. 이러한 것이 자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신학은 이를 넘어설 수 있다. 예를 들어 알베르투스나 토마스는 모세의 기적을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철학, 즉 자연철학의 영역을 넘어선 논의이다. 자연철학, 중세 자연철학은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적어도 토마스에게 이것은 명확하다. 형이상학적 논의도 그러하다. 우유는 실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그렇듯이 토마스와 알베르투스에게도 그렇다. 이러한 것, 자연적인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이것이 형이상학과 자연철학과 같은 학문에서 다루어진다. 이러한 인간의 이성에 의한 학문 혹은 철학으로 신학의 문제를 다룰 수는 없다. 위에서 이야기한 하나의 실체 혹은 존재자가 서로 다른 존재자에 존재하면서 그 동일성을 상실하지 않은 채 어느 곳에서도 그 존재를 상실하지 않는다는 것은 철학으로 해결할 수 없다. 실체 없이 우유가 존재한다는 것도 그렇다. 그 대표적인 예로 예수의 부활이나 처녀의 잉태와 같은 것도 그러한 것이다. 이는 자연학 혹은 인간 이성의 이해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다. 어쩌면 철학은 이에 관하여 침묵해야한다. 그 이유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더 이상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중세 신학자들이었던 중세 철학자들은 여기에서 자신의 자리를 고민했다. 그렇기에 중세 많은 이들이 신학의 학문성이나 신학함의 방법론에 관하여 일관되게 고민했던 것은 아닌가 말이다. 계시된 학문으로 신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계시라는 것으로 수용한 것에서 학문하려는 하나의 탈출구일지 모른다. 이미 논의하였듯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들은 신앙으로 이를 수용하고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철학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하여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신학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하여 말해야한다. 거기에 이 둘은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자연적 현상과 초자연적 현상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닌가? 여기에서 논의를 마친다.  


1) Albertus, de sacramentis, tractatus V, de eucharistia, I, q.3, a.4, ad 1. (61, 44-45) 필자가 본 논의에서 사용하는 알베르투스의 판본은 Opera omnia Tomus XXVI, (Aschendorff, Muester Westf.: 1958)이며, 괄호 안에 번호는 사용 판본의 쪽수와 줄 번호이다.


 

2) Ibid, I, q.3, a.4, ad 2. (61, 47-49)


 

3) Ibid., I, q.3, a.4, ad 2. (61, 86-88)


 

4) Ibid., I, q.3, a.4, ad 5. (62, 14-17)


 

5) ‘양’(quantitas)의 문제는 차후 필자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질 때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는 비단 성사의 문제를 넘어서 13세기 이후 중세 철학의 이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6) Ibid., I, q.3, a.2, ad 4. (59-60, 91-1)


 

7) Ibid., I, q.3, a.2, ad 4. (60, 5-7)


 

8) ST., III, q.75, a.1, c.a.


 

9) Ibid., III, q.75, a.1, ad 3.


 

10) Ibid., III, q.75, a.1, c.a.


 

11) Ibid., III, q.75, a.1, ad 3.


 

12) Ibid., III, q.75, a.2, c.a.


 

13) Ibid.


 

14) In IV Sent., d.10, q.1, a.1.


 

15) Albertus Magnus, Summa theologiae l.1, p.1, t.1, q.1, ad 1 (p.6, 61-62) 판본의 위의 것과 같으며, 그 가운데 1978년에 나온 Opera Omina Tomus XXXIV Pars 1이다.


 

16) ꡔ철학대사전ꡕ (서울: 학원사, 1980), 636-637쪽.


 

17) ST., III, q.75, a.1, c.a.


 

18) Ibid., I, q.1, a.2. 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