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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의자리

옥캄에서 루터에 이르기까지 유명론적 사유의 진격로


옥캄의 진격로

:옥캄에서 루터에 이르기까지 유명론적 사유의 진격로



1. 들어가면서.


 14세기 이후 스콜라 철학에서 옥캄의 위치는 다분히 지도적이라 하겠다. 13세기는 비그리스도교적 서구철학, 즉 이슬람 철학의 수용과 그와의 조화의 자기 동일성이 논의의 주제였다. 하지만, 14세기 철학과 신학은 13세기 이후 성립된 시대적 배경 가운데 자체적 문제의 어려움을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즉 13세기가 타자와 다른 자신을 정립하며, 종합을 지향한다면 14세기의 지적 양상은 이렇게 종합으로 이루어진 자신 가운데 일어난 내부적 문제의 해결에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그러한 옥캄이 유럽 사상계에 어떻게 전파되어 가는지 그 진격로를 따라가 소개하려는 것이다. 많은 경우 필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큰 물줄기에서 철학사를 읽어간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스코투스, 옥캄이란 거장에 의한 철학사를 접하는 것이 일상적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필자는 다소 무모하지만, 그런 단순한 거시적 관심에서 세부적 역사의 흐름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한다. 그것은 역사란 단지 거장의 소유물 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옥캄에 관한 외곽선을 시대상을 중심으로 그의 정치사상의 형성을 살피고, 이어서 옥캄주의의 세부적이고 역사적 전개 과정을 간략히 소개할 것이다. 이를 통하여 옥캄에서 시작하는 종교개혁의 시원을 분명히 하고, 그가 어떻게 유럽에 전파되어 가는지를 알아갈 것이다.


2. 옥캄의 생애.


 옥스퍼드의 총장인 제속 사제 성직자인 존 루터렐은 1322년 대학 당국의 요청으로 물러나자, 1323년 아비뇽의 교황법황청에 가서 옥캄을 이단으로 고소한다. 즉 옥캄 사상의 고난이 시작한 것이다. 이에 관해 당당한 옥캄은 스스로 아비뇽에 가서 직접 변호하려 한다. 이때 교황청 조사 위원회는 옥캄의 명제집 주해들로부터 몇몇 부정적인 것을 꺼낸다.1) 그러나 옥캄에 관해 공식적 단죄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옥캄을 철학사에서 이단아(異端兒)로 만들려 가는 것은 그의 순수한 철학적 논의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논의와 그 입장에 의하여 야기된 것이다. 간단하게 루터렐은 성체성사의 화체설에 관한 논의를 고소하였다. 하지만 이는 본격적으로 그를 이단으로 몰지 않았다. 하지만 후에 그의 정치적 입장이 그렇게 옥캄을 역사 속에 많은 누명을 쓰게 한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그에게 주어진 이단아란 이름은 단지 그의 순수한 철학적 신학적 맥락에서 근거한다고 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닫힌 인물이 아니면, 당시 동시대 인물인 리딩의 요한(John of Reading)과 알뉘크의 윌리엄(William of Alnwick) 그리고 아우레올리의 이론에 고민했으며, 그 뿐 아니라, 자신의 초기 이론인 ‘만들어진 것-이론’(fictum-theory)을 비판한 샤톤(Chatton)의 견해에 귀를 기울였다. 또한 자신의 정치적 입장도 그저 이단적 사고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속한 수도회의 이상, 즉 자신이 따르는 수도원의 이상에 기반 한 것이다. 그는 프란치스코회에 속해 있었고, 이는 청빈(淸貧)과 깊은 관련을 가진 수도회이다. 교황 요한 22세는 1323년 11월 교서 Cum inter nonnullos에서 그리스도와 사도가 공적으로 사적으로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이론을 잘못으로 규정한다. 이어서 Quia quorumdam mentes에서 교황 요한 22세는 그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관하여 체세나의 마카엘(Michael of Cesena)과 베르가모의 보나그라시아(Bonagratia of Bergamo)와 같은 이들은 교황 요한 22세의 이러한 주장에 도전한다. 그들의 주장은 삶이 지속되는 동안 청빈이 의무적이며, 법적/상속재산을 사용하지 않고, 간단한 음식과 의복의 사용만을 포함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프란치스칸의 핵심이다.2) 요한 22세는 종국에는 Quia vir reprobus에서 자신의 이론에 관한 고집을 정점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미카엘에서 ‘이 이교도’(iste hereticus)라는 수식어를 붙인다.3) 옥캄이 이러한 논쟁에 힘을 더 한다. 옥캄은 1332-1334년 저서인 opus nonaginta dierum에서 교황의 이러한 이론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리고 이 저서는 미카엘주의의 주된 저서가 된다. 수도회의 총장인 미카엘은 1328년 옥캄을 황제 루드비히에게 옥캄이 갈 수 있게 길을 마련해 준다. 사실 루드비히 황제는 군주들의 선거로 선출된 황제이지만, 교황은 이에 관한 임명을 거부한다. 이에 1328년 7월 13일 황제는 로마에서 교황을 새로 세워 대관식을 행했다. 그리고 요한 22세가 주장한 그리스도와 사도의 소유에 관한 이론을 이단이라 논박한다. 황제에게 옥캄은 필요한 존재였다. 옥캄은 미카엘의 동지로 교황의 가난 이론을 반대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옥캄은 교황의 소유와 청빈 이론에 반대자인 미카엘과 같은 수도회의 인물이며, 그의 일부 저서를 편집하기도 한 인물이다. 옥캄은 자신의 저서 opus nonaginta dierum에서 교황이 사용하는 전문용어의 내용을 차분하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옥캄은 소유권은 인간의 자연권에 의한 것이며, 신의 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재산권 역시 세속적 권위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교회의 재산은 군주의 것이며, 교황의 재산은 세속 정부인 군주의 것이며, 교황이나 사제가 이를 처분할 수 없다고 한다. 이에 관한 논의는 지금에는 매우 당연한 것이지만, 그 당시는 지금과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교황이 세속적 통치권과 종교적 통치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지만, 옥캄은 세속적 통치권은 교황의 것이 아니라며, 그로 인한 재산을 맘대로 하지 못하며, 이는 다만 세속적 통치권의 권리 가운데 행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옥캄은 자신의 수도회의 이념을 옹호를 위하여 교황의 이론과 투쟁하였고, 이는 종국에 그의 정치철학적 성과로 이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그는 요한 22세의 이론을 이단적이라고 하며, 잘못된 이론을 주장하는 교황에 관한 탄핵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옥캄은 교황과 같은 이들의 눈밖에 나가되고, 그는 황제의 보호 가운데 생의 마지막까지 교신으로 논쟁을 이어간다.

 옥캄은 1326년 공개적 단죄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는 옥캄에 대한 첫 비난의 시작이라고 여겨진다. 그후 옥캄주의는 1340년 파리 대학의 교수인 뷔리당(Buridan)에 의하여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단죄를 당한다.4) 그리고 이는 1346년과 1347년에 절정에 이른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이 옥캄의 진격로를 차단하지는 못했다.


3. 옥캄주의의 전파


 당시 철학의 중심적 위치를 행한 곳인 파리대학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것에선 이미 1326년의 단죄로 인하여 옥캄의 사상에 관해 매우 각박했었다. 그러나 유명론은 뷔리당과 같은 이들에 의하여 연구되고 있었지만, 옥캄주의는 한편 뷔리당과 같은 이들에 의하여 1340년에 단죄를 당했으며, 이후 1346년과 1347년 이어 수난의 세월을 겪는다. 그러나 파리대학의 유명론은 사라지지 않았다. 뷔리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파리 대학에는 옥캄에 호의적이며, 유명론적 색체를 가진 이들이 교수로 있었다. 그 가운데 삭센의 알베르투스(Albert von Sachsen)이 있었고, 파리에서 가르치다 쾰른으로 자리를 옮긴 라이덴의 요하네스 도르프(Johannes Dorp von Leyden)와 같은 이들이 교수로 있었다.5) 그뿐 아니라, 아이리의 피에르(Pierre d'Ailly)와 같은 이들이 파리대학에서 활동을 하였다. 파리에는 뷔리당이 있어 유명론적 사고가 존재하였지만, 1362년에 이르도록 수난의 여파 때문인지 실재론이 우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1407년까지 유명론이 다시 등장하고, 1437년까지 다시 실재론이 그리고 1474년에 이르도록 유명론이 다시 주류가 된다. 또 이어서 1474년에서 1481년에 이르기까지 실재론이 활발하게 활동한다.6) 이러한 실재론 우위적 경향은 1474년 파리에서 행해진 유명론에 관한 단죄에서 결정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단죄를 받은 인물들은 옥캄, 미르꾸으뜨의 요하네스 그리고 리미니와 뷔리당 또한 아담 위드햄과 작센의 알베르투스와 인겐의 마르실리우스와 페트루스 알리아쿠스와 요하네스의 도르프와 같은 이들이다. 이 단죄에는 부슬라디유의 프란치스쿠스(Franciscus de Buslaidieu)와 야코부스 호울트(Jacobus Hoult)를 비롯한 20여명의 신학자가 서명했다.7) 파리에서 일어난 이러한 실재론의 강세는 1407년에서 1437년 동안 이루어진 알베르투스주의의 영향도 크다. 1405년에서 1425년 사이 파리에서 실재로 3000여명의 학생이 실재론을 근간으로 학습하고 있었다.8) 1410-1415년 사이 노바 도모의 요하네스(Johannes de Nova Domo)와 같은 이들은 파리의 알베르투스주의를 설립하였고, 그의 제자인 캄포의 하이메릭(Heymeric de Campo)은 토마스와 알베르투스에 관한 글을 적기도 했다. 또한 요하네스 벤크(Johannes Wenck)는 파리에서 1413년 공부를 시작했으며, 1414년 선생이 되었다. 그리고 이 시절 그의 독일인 제자인 콘라두스(Conradus)는 1415년, 또 요하네스 라이볼핑거(Johannes Leivolfinger)는 1416년 그리고 니콜라우스는 1416년 또 헷세의 사람 루드비쿠스 로리히(Ludvicus Rorich)는 그에게 수학을 하였으며, 이는 후에 독일에 실재론을 전파하였다.9) 그리고 요하네스 벤크는 1418년 파리에서 마지막으로 거론되어 그 이후 하이델베르그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1435년 교수가 되었다. 하이델베르그는 유명론자인 인겐의 마르실리우스가 활동하고 있었다. 즉 유명론이 강세였다. 그러나 1443년 쾰른에서 공부한 알크마르의 페트루스 이보니스(Petrus Ivonis)가 1444년 하이델베르그에 왔다. 그러나 그는 제대로 이를 전하지 못하고 강제로 1445년 추방당한다. 실재로 그는 1447년 파리에서 발견되어진다. 이러한 독일에는 파리에서 떠난 학생에 의하여 유명론이 강세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파리에서 일어난 유명론에 대한 단죄와 파리로부터 독일 학생의 이탈로 인한 것이다.10)

 이러한 파리대학은 비록 유명론과 옥캄을 그리 좋게 보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고 보인다. 즉, 파리 대학은 유명론의 주된 거점이기도 하고, 수난의,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1473년 3월 1일 루드비히 11세(Ludwig XI)의 명령으로 옥캄의 가르침은 제한을 받는다. 그런 이유에서 이미 논의하였듯이 1474년에서 1481년까지 실재론이 다시 주도권을 찾는다.11) 이러한 파리 대학은 옥캄주의의 대표격인 오뜨꾸르트의 니콜라우스와 미르꾸르뜨의 요하네스 그리고 리미니의 그레고리가 활동하였던 곳이었다. 미르꾸르뜨의 요하네스는 1345년 파리에서 명제집을 주해하였고, 리미니의 그레고리는 1341년 이후 10년간 명제집에 관한 강의와 주해를 하였다. 또한 유명론의 근원적 지역은 하이델베르그와 바젤 그리고 프라이부르그가 있다. 하이델베르그는 1452년 처음으로 실재론이 발견되었고, 프라이부르그는 1456년에 문을 열며, 바젤은 1460년에 세워지고, 1464년에 유입한다. 바젤의 유명론은 1464년 세 명의 실재론 선생의 등장으로 이루어진다.12) 뢰벤(Loeven)에서 1480년 몇몇 선생에 의하여 옥캄의 의도에 의하여 아리스토텔레스를 읽기도 했다.13)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파리에서 가르치다가 쾰른으로 자리를 옮긴 라이덴의 요하네스 도르프와 같은 이들로 보아 쾰른 역시 옥캄 혹은 유명론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알폰수스 톨레타누스의 ꡔ명제집 주해ꡕ를 통하여 우리는 그 시대의 유명론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14) 14세기 이후 15세기에 이르기까지 옥캄의 영향력은 꾸준히 지속된다. 1393년에서 1400까지 교수 활동을 한 페트루스 만투아누스(Petrus Mantuanus)와 1451년 사망한 파울루스 펠굴렌시스(Paulus Pergulensis) 등의 옥캄주의자가 있었고, 이 시기 특히 유명한 이로는 1425년에 태어나 1495년에 사망한 가브리엘 빌(Gabriel Biel)이 있었다. 빌은 많은 경우 마지막 스콜라학자라고 칭한다. 그 이후에도 다비드 클란스톤(David Cranston)과 스페인으로서 안토니우스 코로넬(Antonius Coronel)과 카르퍼 락스(Kasper Lax)가 있었으며, 1471년에 태어나 1513년 사망한 잔 둘랜르트(Jan Dullaert) 등의 옥캄주의자가 있었다. 그 외에도 유명론적 개념론적 사고를 한 이들로는 라이프치히의 하인리히 그레베(Heirich Greve)와 크라카우의 브래슬라우의 미카엘(Micheal von Breslau) 그리고 민델하임의 알텐스타이히(Altenstaig von Mindelheim)과 부헨의 톤라드(Konrad von Buchen) 등이 있었다.15) 이러한 대륙에서의 확산뿐 아니라, 영국에서의 확산도 분명하다. 이는 옥캄의 직접적 후계자인 위드햄은 옥스퍼드에서 옥캄 아래 교육을 받았고, 이후 런던에서 신학을 가르치다, 옥스퍼드로 가서 가르쳤다.16) 그는 옥캄의 imitator(모방자)라고 불린다. 또한 캠브리지의 도미니칸인 로버트 홀코트 역시 영국에서 활동한 옥캄주의자이다. 하지만 옥캄의 사상은 이러한 여러 수난 가운데도 유럽 전역에 전파되었다.

 그리고 15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파리에서 다시 유명론이 부활한다. 파리에서 프라그를 걸쳐 크라카우로 전해진 뷔리당의 유명론이 1390-1415년가 크라카우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을 때, 파리에선 이미 논의한 대로 알베르투스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고, 이를 유럽에 퍼뜨리고 있었다. 또한 1416-1425년 사이 크라카우의 지적 유산이 뷔리당주의에 있어서 소위의 성과를 내고 있었고, 이후 1440-1450년경 뷔리당주의, 즉 유명론은 쇄락의 길을 가며, 이때 파리에선 다시 유명론이 시작된다. 1474년 7월 9일 파리에선 일부 유명론 저서의 존재가 보고되고 있으며, 이는 왕의 호의에 의한 것이다. 1476년 7월 5일 옥캄의 저서가 인쇄되었다. 하지만 그 출판인의 이름이 적혀있진 않다.17) 옥캄을 비롯한 유명론 저서의 저술을 출판한 무명의 인쇄공은 일부 증언에 의하여 바그너(Wager)나 스톨(Stoll)이 아니라, 그들 두 독일인의 견습공(Louis Simonel, Richard Blandin)들로 여겨진다. 파리대학에선 유명론 저작에 관한 해금이 1481년 4월 29일 편지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좋은 소식은 큰 기쁨이 되었다. 이러한 유명론의 승리는 왕의 측근인 베렌가리우스 메르카토리스(Berengarius Mercatoris)와 마르티누스(Martinus)의 중재에서 기인한다.18) 1487년 11월 15일 파리에선 뷔리당의 ꡔ논리학 개요ꡕ(Summulae logicale)이 유명론자인 요하네스 도르프의 주해와 함께 요하네스 카라인(Johannes Carain)에 의하여 출판되었다.19) 이렇게 15세기 말 파리에선 서서히 유명론이 힘을 얻어간다. 


3.1 옥캄과 옥캄주의 그리고 유명론자.


 칸디아의 페트루스에 의하면, 유명론자 혹은 명사론자(terminist)를 옥캄주의자라는 이름으로 가리키고 있다. 그의 아들, 그의 추종자들의 의미하는 다양한 라틴어 단어, filii, sequaces, sequentes, imitatores... 등이 사용되었다.20) 이는 당시 많은 이들이 옥캄과 유명론적 사고를 어떤 유사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실상 유명론, 즉 nominalismus라는 말은 알베르투스에 의하여 사용된 이래 14세기 초에 이르러 옥캄과 관련되어 사용된 것이다. 하지만 유명론이 곧 옥캄주의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분명 뷔리당과 같은 옥캄의 반대에 선 인물도 유명론적 사유를 가지고 있으며, 최근의 연구에서 드러나듯이 후기 옥캄을 유명론자라고 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많은 경우에 옥캄을 유명론을 시작한 이로 부른 것은 사실이다. 1339년 9월 25일 옥캄은 파리 대학의 인문학부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한 1340년 옥캄의 오류(errores occanici)에 관하여 이어서 1341년 옥캄적 학문(scientia okanica), 또 같은 해 옥캄주의자(occhaniste)에 관한 교회는 호의적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옥캄의 수난과 함께 유명론적 사고도 어려움을 맞이한다. 예를 들어 1346년에 단죄 당한 오뜨꾸르트의 니콜라우스와 다음 해 단죄 당한 미르꾸르뜨의 요하네스 역시 옥캄주의자였다. 옥캄에 관한 이러한 경직된 태도는 이미 위에서 논했듯이 옥캄주의의 확산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시기 일반적으로 옥캄을 유명론과 관련되어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이러한 흐름은 적어도 뵈너(Boehner)의 연구가 이루어지기 전 까지 옥캄 이해의 기본적 태도인 것으로 보인다. 알베르투스가 처음 이야기한 유명론, 즉 nominalismus는 지성 가운데 보편자를 두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유명론자는 13세기 거의 찾을 수 없으며, 그 시기는 대체로 실재론 우의의 시대였다. 14세기 새로운 존재론, 즉 유명론자들에게 13세기의 이러한 흐름은 오랜 길, 즉 via antiqua라 불렸고, 반면 유명론 혹은 명사론은 새로운 길 혹은 현대의 길, 즉 via moderni라 불렸다. 페트루스의 니그리와 같은 이는 새로운 길에 개념론을 더하기도 한다.21) 여기에서 개념론은 보편자를 우유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 인물로 옥캄의 이론과 당시 옥캄주의에서 이해하는 옥캄, 즉 유명론자 옥캄은 구별되어야한다. 현재 연구된 역사적 인물로 후기 옥캄은 중세인들이 이해한 옥캄주의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당시 옥캄주의는 곧 유명론자이지만, 역사적 옥캄은 초기에는 유명론자지만, 후기에는 개념론자이다. 그러면 우리가 이해하는 개념과 당시 니그리가 정의하는 개념론은 동일한 것인가? 옥캄은 후기에 이르러 사고-이론에서 개념은 주체적 존재를 가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엄밀하게 당시 유럽에 나돌던 옥캄=옥캄주의=유명론=개념론은 지금의 우리에겐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옥캄은 초기에는 유명론자이지만, 후기에는 개념론이며, 이때 개념론이란 개념이 단지 우유적 존재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엄밀하게 옥캄과 옥캄주의 그리고 유명론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옥캄과 옥캄주의 그리고 유명론을 하나의 사슬 속에 묶여있었다.


3.2 당시 옥캄주의자의 진격로?


 하여간 당시 옥캄은 분명 유명론 혹은 명사론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졌고, 실재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제 필자는 앞에 논의를 이어 개개인을 언급하여, 옥캄에서 루터에 이르는 옥캄의 진격로를 살피려 한다. 옥캄의 제자이며, 1340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한 위드햄의 아담(Adam Wodham 혹은 Godham)이 있다. 그리고 그의 명제집 주해는 오이타의 하인리히(Heinrich von Oyta)에 의하여 출간되었다. 또한 영국에선 영국 출신으로 캠브리지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친 도미니칸인 로베르트 홀코트(Robert Holkot)이 있었다.22) 그리고 파리에서 공부를 한 리미니의 그레고르(Gregor von Rimini)가 있었고, 그는 뷔리당과 인겐의 마르리우스(Marilius von Inghen)과 더불러 아비텐(Aviten)에 의하여 유명론의 기수라고 불렸다. 이미 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파리는 옥캄의 중심지이며, 또한 힘겨운 싸움터였다. 리미니의 그레고르를 비롯하여 미르꾸르뜨의 요하네스오르꾸르뜨의 니콜라우스와 같은 옥캄주의자가 있었다. 전자는 파리에서 1345년 『명제집』을 강의하였고, 1347년 자신의 『명제집 주해』에서 40개의 명제가 단죄되어진다. 후자의 인물 역시 파리에서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그도 미르꾸르뜨의 요하네스에 앞서 1346년 파리에서 공개적으로 비난을 당했다. 그리고 그의 저서는 패기되었다. 이 당시 이 두 인물의 어려움은 그들 혹은 옥캄주의의 인과성 문제와도 관련되는 것이다.23) 또한 파리에선 작센의 알베르투스가 있었고, 그는 1353년 파리에서 교수생활을 하였으며, 1363년 빈 대학이 성립되고 그곳의 첫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파리에서 있었던 옥캄주의의 중요한 구성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참여한 빈 대학의 성립이란 첫 시도는 실패하고 이후 알베르투스 3세에 의한 대 시도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당시 파리의 유명한 유명론자들이 초빙된다. 여기에는 롱겐슈타인의 헨리(Henry of Longenstein)과 같은 이가 있으며, 또한 오이타의 하인리히 그리고 칼카르의 헨리 키크폿(Henry Kikpot of Kalkar)...등이 있다.24) 작센의 알베르투스와 동시대인으로 라이덴의 요한네스 도르프가 있었으며, 파리에서 가르치고, 후에 쾰른으로 갔다. 파리에선 오렘의 니콜라우스(Nicolaus von Oresme)가 있었고, 그곳에서 그는 1348년까지 공부했고, 그 후 교주가 되었다. 그의 자연학은 데까르트와 갈릴레이의 선구적 모습이라 하겠다. 인겐의 마르리우스는 논리학에서 옥캄의 영향을 수용하며, 이는 그 자신의 저서에서 드러낸다. 그리고 그는 파리에서 또 다른 옥캄주의자인 헷센(Hessen)의 하인부흐의 하인리히(Heinrich von Hainbuch)와 함께 활동하였다. 그리고 하인부흐의 하인리히의 절친한 벗인 또 하나의 옥캄주의자인 오이타의 하인리히도 파리에서 가르치고 있었다.25) 오이타의 하인리히는 1372년 파리를 떠났으며, 프라그(Prag)에서 가르쳤다. 이어서 1383년 오이타의 하인리히와 하인부흐의 하인리히는 빈으로 초빙되었고, 이 두 친구는 같은 해인 1397년 사망하였다. 그 외 파리의 옥캄주의자는 아이리의 피에르와 같은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14세기 후반인 1363년에 태어난 요하네스 제르송(Johannes Gharlier 혹은 Gerson)은 1377년까지 파리에서 아이리의 제자로 공부하였으며, 1395년 그의 뒤를 이러 강의하였고, 1397년 브뤼그(Bruegg)에서 가르쳤다. 그리고 다시 파리로 와서 가르쳤다. 1414년에서 1418년까지 콘스탄츠의 공의회에 아이리와 함께 관여하였으며, 1429년에 사망하였다.26) 하지만 그는 옥캄의 철학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스승보다 옥캄의 철학에서 자유로웠다. 즉 그는 스승 보다 더 독재적인 것이다. 아이리와 제르송이 이 새로운 길을 가는 시기가 지나고, 1473년 3월 파리에선 루드비히 11세 왕의 지시에 의하여 옥캄의 가르침이 금지된다. 그 후 이러한 유명론은 독일로 넘어간다. 이미 위에서 몇몇 옥캄주의자가 독일지방으로 가 강의한 것을 확인하였다. 빈과 에어푸르트, 프라그와 쾰른, 그리고 라이프지히 등은 옥캄주의의 분리된 영역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독일에 일어난 새로운 노선의 첫 대표적 인물이 가브리엘 빌이다. 그는 그의 제자인 벤델린 스타인바흐(Wendelin Steinbach)에서 글을 적었으며, 그는 그의 스승의 저작을 편집하였다. 그리고 독일 지방의 종교개혁자인 루터는 가브리엘 빌을 통하여 옥캄주의에 다가갈 수 있었고, 실재로 루터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스승인 스타우피츠(Staupitz)와 나틴(Nathin)은 튀빙겐에게 빌과 스타인바흐의 제자였다.27) 이렇게 옥캄은 파리로 전파되고, 파리의 옥캄주의는 독일로 넘어가 루터의 존재론적 근거가 된다. 실재로 루터는 옥캄을 스승이라 칭했다. 옥캄은 교황의 탄핵 가능성을 논의했고, 루터는 이를 실행하였다.  물론 가브리엘 빌을 제외하고도 이미 논의하였듯이 라이프지히의 하인리히 그레베와 크라카우의 브레슬라우의 미카엘 등이 있었다.28) 

 그러면 이렇게 유럽 대륙이 옥캄이 퍼지는 동안 영국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영국에는 사상사에 깊은 영향을 준 머튼 학파가 있었다. 머튼 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넘어서 자연학을 발전시켰고, 이는 유럽의 자연학 발전으로 이어졌다. 그 학파의 주역인 브래드와르딘(Bradwardine)과 관련된다. 그는 옥캄과 어울리지 않았다. 브래드와르딘의 논의는 본질적으로 유행하는 회의주의에 답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회의주의는 옥캄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29) 이렇게 비록 반대자로 등장하지만 옥캄은 영국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3.3 유명론과 중세 후기 대학의 동향.


 옥캄으로 대표되는 당시 유명론의 전개과정을 위에서 살펴보았다. 학자들에게 대학은 하나의 진지(陣地)이다. 그러면 이젠 위의 내용을 상기하며 당시 몇몇 대학의 상황을 요약해보기로 한다. 그것은 위의 논의에 관한 요약이 될 수도 있으며, 또한 결론의 역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리는 진정 철학자의 도시였다. 그것은 옥캄주의와 관련된 유명론뿐 아니라, 알베르투스와 스코투스주의 그리고 토마스주의에서도 중요한 진지가 되었다. 이미 논의하였듯이 파리에선 유명론과 실재론 사이의 전투가 있었다. 그리고 이는 1474년 유명론의 단죄 혹은 금지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는 1481년에 해금된다. 이후 유명론의 승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15세기 말 유명론은 파리에서 힘을 얻는다. 그리고 여기에서 필자는 파리와 하이델베르그의 관계에 주목하게 된다. 하이델베르그는 유명론자인 인겐의 마르실리우스가 시발점이 된 대학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곳에 실재론의 공격이나 진지가 없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1452년 10월 8일 기스펠투스 크린크카르트(Gispertus Klinckart)가 쾰른에서 돌아왔다.30) 그리고 요하네스 벤크의 지도 가운데 있던 파리의 학생인 암스테르담의 헨르비쿠스 기스베르티(Herwicus Gisberti)가 교수로 1453년 1월 5일 도착하였다. 이 두 교수가 하이델베르그에 도착함으로 하이델베르그는 스스로 실재론자를 배출할 수 있기 되었다. 그리고 하이델베르그산 실재론자 부르카르두스 벤크(Burchardus Wenck)를 배출한다. 그는 파리에 가서 인문학부 선생이 되었다가 다시 고향인 하이델베르그로 돌아왔다. 또 독일인은 아니지만, 다치아(Dacia) 사람인 요하네스 페르티(Johannes Perti)가 있으며 그는 부르카르두스 벤크와 함께 했다. 그 외 콘라두스 수테르린(Conradus Suterlin)이 하이델베르그에서 파리로 가서 1448년 교수가 되었고, 다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선생이 되었다.31) 하지만 이러한 실재론자들이 있음에도 하이델베르그는 유명론의 힘을 유지하고 있었다. 1454년에서 1500년 사이 702명의 학생 가운데 435명이 유명론이었고, 267명이 실재론자였다. 그리고 1481년 파리의 유명론의 승리 이후 하이델베르구에서 훈련된 새로운 길(via moderna), 즉 유명론자들이 파리에서 유명론의 힘을 더욱 더 강하게 하였고, 이들이 다시 하이델베르그로 돌아왔다. 그들 가운데 우리는 야쿠부스 메츠러(Jacobus Maetzler)와 같은 이들이 있었고, 이들로 인하여 1485년 경 하이델베르그의 유명론은 더욱 더 힘을 얻는다. 그리고 1481년 하이델베르그에서 나온 Manuale Scholarium에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을 통한 대화에서 우리는 당시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카밀루스: 나는 대학이 유명론 선생으로 가득하다고 많은 이로부터 들었다네.

바르톨두스 : 그것은 사실이야, 선임 선생들은 여전히 유명론자들이네, 허나 학생들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아.32)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 유명론이 하이델베르그 대학을 지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르톨두스의 대답, 즉 학생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객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15세기 말 하이델베르그는 이미 논의한 대로 유명론이 다시 일어나고 있었고, 그 대학의 기원을 마련한 인겐의 마르실리우스의 추종이 다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논의한 대로 파리에서 알베르투스주의, 즉 실재론이 지배하던 시기, 즉 1390년에서 1415년 사이 크라카우에선 파리를 떠나 프라그를 걸쳐 온 뷔리당을 중심으로한 유명론이 힘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크라카우에서 실재론이 서서로 힘을 가지던 15세 중엽 파리에선 유명론이 다시 시작되었다.33) 은 유명론자인 작센의 알베르투스에 의하여 그리고 이후에는 롱겐슈타인의 헨리에 의하여 강의가 이루어졌었다. 즉 이곳은 설립부터 유명론적이었다. 그 외 많은 대학이 있지만, 여기에서 그치도록 한다.             


4. 나가며...


 옥캄주의는 결코 후기 중세 철학의 전부가 아니다. 분명 토마스주의와 스코투스주의가 있었다. 그리고 옥캄주의는 후기 세 학파의 하나이며, 중세 후기의 주된 흐름이었다. 그를 통하여 옥캄의 역사적 위치에 관한 대강의 모습과 그로부터 후기 종교개혁에 이르는 사고의 노선을 따라가 보았다. 그리고 필자의 본 논의는 단지 더 많은 옥캄 이후 연구를 위한 작은 초석이며, 끝나지 않은 시작을 위한 시작이다. 그래서 이 글은 결론이 없다. 다음을 기약하며, 더욱 더 많은 자료를 의지한다.  


1) 옥캄의 『명제집』 주해 저작은 ReportatioOrdinatio로 나뉘진다. 전자는 그의 강의 청자에 의하여 구성된 것이며, 후자는 학사로 개인적인 해제작업이다. 옥캄의 보편자 이론에서 이 두 저서에서 각기 다른 입장을 드러낸다. 이는 그의 연대기적 연구의 시작이 될 수 있다. 


 

2) Leff, G., Heresy in the Later Middle Ages (New York: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67), pp.238-239.


 

3) Ibid., p.247.


 

4) 1340년의 단죄와 옥캄의 관계는 쉬운 것이 아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과제로 남겨둔다. 과연 1340년 단죄와 금서 조치된 옥캄은 어떤 옥캄이며 옥캄 그 자체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관한 논의는 차후에 다루기로 한다. cf. E.Moody, "Ockham, Buridan, and Nicholas of Autrecourt" In Studies in Medieval Philosophy, Science, and Logic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nia Press, 1975), pp.127-160.


 

5) De Wulf, M., Geschichte der mittelalterlichen Philosophie, uebers. R.Eisler (Tuebingen: Verlag von J.C.B. Mohr, 1913), S.385.


 

6) Ehrle, F., Der Sentenzenkommentar Perters von Candia (Muenster: Verlag der aschendorffschen Verlagsbuchhandlung, 1925), S.239.


 

7) Gabriel, A., "Via Antiqua and Via Moderna and the Migration of Paris Studens and Masters to the German Universities in the Fifteenth Century" In Antiqua und Moderni, ed. A.Zimmermann (Berlin-New York: Walter de Gruyter, 1974), p.446.


 

8) Ehrle, F., Der Sentenzenkommentar Perters von Candia, S.324.


 

9) Gabriel, A., "Via Antiqua and Via Moderna and the Migration of Paris Studens and Masters to the German Universities in the Fifteenth Century", p.451.


 

10) Ibid., p.457.


 

11) De Wulf, M., Geschichte der mittelalterlichen Philosophie, S.440.


 

12) Ehrle, F., Der Sentenzenkommentar Perters von Candia, S.238.


 

13) Ibid., S.161.


 

14) Ibid., SS.148-149.


 

15) De Wulf, M., Geschichte der mittelalterlichen Philosophie, S.440.


 

16) 질송, ꡔ중세철학사ꡕ, 김기찬 옮김 (서울: 현대지성사, 1997), 683쪽.


 

17) Gabriel, A., "Via Antiqua and Via Moderna and the Migration of Paris Studens and Masters to the German Universities in the Fifteenth Century", p.452.


 

18) Ibid., p.453.


 

19) Gabriel, A., "Via Antiqua and Via Moderna and the Migration of Paris Studens and Masters to the German Universities in the Fifteenth Century", pp.454-455.


 

20) Ehrle, F., Der Sentenzenkommentar Perters von Candia., SS.78-79.


 

21) Ibid., S.107. 니그리는 다음과 같이 개념론을 정의한다. “보편자는 실체인가 우유인가?... 이 가운데 하나의 의견은 보편자가 심적 개념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들은 개념론자라고 불린다. 이는 필연적으로 모든 보편자는 우유라고 이야기한다.”


 

22) Ueberwegs, F., Grundriss der Geschichte der Philosophie - Zweiter Teil (Berlin: Ernst Siegfried Mitter und Sohn, 1915), SS.613-614.


 

23) Ibid., SS.614-615.


 

24) Gabriel, A., "Via Antiqua and Via Moderna and the Migration of Paris Studens and Masters to the German Universities in the Fifteenth Century", p.457.


 

25) Ibid., pp.622-627.


 

26) Ibid., pp.628-630.


 

27) Ibid., p.631.


 

28) De Wulf, M., Geschichte der mittelalterlichen Philosophie, S.440.


 

29) Leff, G., Bradwardine and the Pelagian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7), p.13.


 

30) Ehrle, F., Der Sentenzenkommentar Perters von Candia, S.179.


 

31) Gabriel, A., "Via Antiqua and Via Moderna and the Migration of Paris Studens and Masters to the German Universities in the Fifteenth Century", p.461.


 

32) Ibid., p.463.


 

33) Ibid., p.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