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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의자리

중세의 철학과 신학 1 아우구스티누스의 '향유'와 '사용' (유대칠의 슬기네집(슬기로운독서교실))

중세의 철학과 신학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슬기네집) 강의

 

왜 하필 그때 그곳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향유(fui)와 사용(uti)

 

눈에 보이는 구원은 멀기만 했다. 아니 불가능해 보였다. 검투사 대부분은 노예 신분이었다. 쉽게 말해 사회적 약자였다. 죽을 때까지 싸우는 일은 강자의 일이 아니라, 약자의 일이다. 하지만 약자는 서로의 아픔을 쉽게 안다. 그러니 검투사의 싸움은 대부분 미리 짜고 하는 일종의 연기였다. 승자를 향하여 패자를 죽이라 소리치는 잔인한 로마시민의 차가운 외침에 죽이는 척할 뿐 정말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연기로 잔인한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연기할 수 없는 대상과 싸우게 했다. 바로 짐승이다. 이제 검투사는 구경거리로 싸우고 구경거리로 죽임을 당했다. 로마제국엔 매춘(賣春)이 흥했다. 지금과 매춘을 보는 눈이 달랐다. 그러니 상류층의 여인 가운데 자발적으로 매춘한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가난하고 소외당한 여인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남편 없이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여인, 버려진 신생아의 출신, 해적의 포로가 된 여인, 성폭행당한 여인 등등 어쩌면 그 삶이 힘들고 괴롭고 어찌할 수 없는 폭력에 노출된 이들이 매춘을 강요받았다. 결국 가난과 폭력으로 매음굴과 유곽에 버려진 슬픈 삶이었다.

 

가난한 이를 위한 사회 안전장치가 있던 세상이 아니었다. 기원전 1세기 식량 위기로 로마가 힘들 때, 가장 힘든 이들은 이미 충분히 가난한 이들과 나이 많은 이들이었다. 자기 몫의 소유가 대단하지 않은 이들은 나이 들어감이 곧 고통이며 불안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거대한 제국의 관리를 위해 많은 돈이 필요했고, 이 돈을 위해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야 했다. 이런 사회적 구조에서 가난한 이들의 가난은 더욱 심해져 간다. 2세기경 소작인은 수확량의 절반을 소작료로 내야겠다. 소작료가 너무 높아지자 노동 자체가 삶의 질을 높이기보다 더욱 비참한 삶으로 이끄는 지옥 길이 되었다. 그러니 농토를 버리고 도시로 도망쳐 버리는 소작인이 늘어났다. 그러니 지주(地主)는 더욱 소작인을 단속했다. 도망가다 잡히면 노예 대접하며 쇠사슬을 묶어 강제 노역에 동원시키곤 했다.

 

눈에 보이는 구원은 불가능해 보였다. 로마 황제의 힘보다 더 높은 이는 없어 보였고, 그가 스스로를 ‘신의 하느님’이라 칭해도 의심하거나 거부하는 이는 없었다. 정말 그는 그럴 만큼 강하고 높디높은 곳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건 그의 힘으로 바꿀 수 있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황제뿐 아니라, 사회적 신분이 높은 이들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그리스도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잡아 참혹하게 죽이며 이를 구경거리 잡았다. 검투사도 그리스도인도 그들의 눈엔 그저 자기 기쁨을 위해 소비되면 그만인 존재였다. 자기 기쁨을 위한 수단이지, 그들 하나하나가 자기 삶을 가진 주체적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구원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리스도교인 검투사의 손에 그리스도인이 죽어가고 짐승의 힘에 죽어갔지만, 사실 이 잔인한 폭력은 검투사의 잘못도 짐승의 잘못도 아니다. 바로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그저 자기 기쁨의 수단으로 여기는 이들, 그들이 힘을 가지고 국가를 운영하는 구도적 잘못이 크다. 이런 구조 속에서 눈에 보이는 구원,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눈에 보이는 해방을 경험하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런데 낮은 자리에 있는 형제는 자신의 높아짐을 자랑하고, 부자는 자신의 낮아짐을 자랑하세요. 이는 들에 핀 꽃과 같이 사라질 것이니 말입니다.(Καυχάσθω δὲ ὁ ἀδελφὸς ὁ ταπεινὸς ἐν τῷ ὕψει αὐτοῦ, ὁ δὲ πλούσιος ἐν τῇ ταπεινώσει αὐτοῦ, ὅτι ὡς ἄνθος χόρτου παρελεύσεται.)”

「야고보의 편지」 1장 9~10절

 

그리스도교는 낮은 이는 높여지고 높은 이는 낮아질 것이라 했다. 돈 없고 힘없어 버려진 이들, 하지만 자신을 돌아보며 살아가는 낮은 자이의 창녀보다 교만 속에서 남을 함부로 평가하고 이용하는 높은 자리의 권력자와 종교인이 신에게서 더 멀리 떨어진 이로 본 거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이들은 이미 하느님이 창조한 질서 속 누군가를 위해 창조된 걸 홀로 독점한 죄인이다. 그러니 부유함은 죄다. 이런 생각은 이후 여러 교부(敎父, Pater Ecclesiae)의 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니 부자는 자신의 소유를 자랑할 게 아니라, 자신이 가진 걸 나눔을 자랑해야 한다. 교부 암브로시오와 같은 이의 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며 다른 많은 교부의 글에서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공유의 사유’, 즉 ‘더불어 소유함의 사유’다. 가난한 이는 영적 가난으로 볼 수도 있고 경제적 가난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다른 게 아니다. 마음을 비운 자, 즉 욕심을 비운 자이니 남을 괴롭히며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하지 않는 이들이다. 영적으로 가난한 이는 이렇게 경제적으로 남을 괴롭히지 않는 이다. 그러니 이들은 이미 혹은 쉽게 ‘더불어 있음’의 삶에 머물게 된다. ‘홀로 있음’의 삶이 얼마나 상대방에게 잔인한지 온 삶으로 알기에 말이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의 나라는 ‘이타심의 나라’이고, 사람의 나라는 ‘이기심의 나라’로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에선 순례자이며, 하느님의 나라에 속하는 이(peregrinus in saeculo et pertinens ad civitatem Dei (Augustinus. De Civitate Dei XV, 1))’와 ‘사람의 도성에 속하는 이(pertinens ad hominum civitatem (Augustinus. De Civitate Dei XV, 1))’로 사람을 나눈다. 그러면 어떤 이가 ‘하느님의 나라에 속하는 이’인가? “가장 온전한 질서와 가장 온전한 조화를 유지하며 하느님을 향유 하며, 하느님 가운데 서로를 향유하는 사회(ordinatissima et concordissima societas fruendi Deo et invicem in Deo. (Augustinus, De Civitate Dei, IXX, 13))”에 속한 이들이 바로 이런 이들이다.

 

‘향유(frui)’와 ‘사용(uti)’은 서로 다르다. 사용은 대상을 무언가 다른 목적으로 만나 이용하는 행위다. 하느님을 천국 가기 위한 수단으로 믿는다면, 하느님은 천국 가기 위한 수단이다. 즉 하느님은 나만의 ‘홀로 좋음’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향유’는 대상을 다른 어떤 목적으로 위해 이용하는 게 아니다. 그 자체가 목적을 향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직접 읽어보자. “향유를 위한 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사용을 위한 건 행복을 바라게 우릴 돕고, 말하자면, 그 도움으로 우리는 행복하게 하는 것에 이르게 되고 잡고 있게 됩니다 (Illae quibus fruendum est nos beatos faciunt; istis quibus utendum est tendentes ad beatitudinem adiuvamur et quasi adminiculamur, ut ad illas quae nos beatos faciunt, pervenire atque his inhaerere possimus. (De doctrina christiana, I.III.3.)).” 향유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사용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돕는 거다. 이어서 더 읽어보자. “‘향유’는 그 자체로 인해 어떤 걸 사랑함입니다. 그런데 ‘사용’은 좋아하는 대상이라면,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얻고자 관련되는 되는 것을 이용하는 겁니다. (Frui est enim amore inhaerere alicui rei propter seipsam. Uti autem, quod in usum venerit ad id quod amas obtinendum referre, si tamen amandum est. (De doctrina christiana, I.IV.4.)).” 향유는 가장 온전히 사랑함이다. 수단으로 삼지 않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사용은 그 사랑을 위해 이용되는 수단이란 말이다. 황제에게 검투사도 그리스도교인도 그저 자기만족과 자기 행복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에게 향유의 대상은 그저 자기 자신의 욕망뿐이다. 철저한 ‘홀로 있음’과 그 ‘홀로 있음’을 위한 ‘홀로 좋음’뿐이다. 여기에서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저마다 이기심으로 다투게 될 것이 뿐이다. 저마다 서로를 자기 기쁨을 위해 이용하려 하니 다툼이 생기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도 그리고 우리 서로를 향한 마음도 향유이어야 한다고 한다. 서로를 향유하는 이들이 있는 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라면서 말이다. 내가 누구를 만날 때 그를 내 기쁨을 위한 이용의 대상으로 삼아선 안 된다. 창녀를 보자. 우린 그를 철저하게 이용한다. 나만의 기쁨을 위해 말이다. 검투사 역시 무엇이 다른가. 그들의 목숨도 로마인에겐 그저 자기 기쁨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사용하는 무엇일 뿐이다. 그리스도교인이 짐승에게 죽여지는 것을 보면서 기뻐한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들은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나란 사람이 사용할 대상일 뿐인 거다. 이렇게 나 하나만이 ‘홀로’ 있는 곳, 그렇게 서로 다투는 곳, 바로 그곳이 사람의 나라다. 이와 달리 서로를 향유 하며 서로를 향한 향유를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 무엇인가를 궁리해 슬기롭게 사용하는 이들의 나라가 하느님의 나라다. 너를 나의 이기심을 위해 사용하는 나라가 아니라, ‘너’를 향유 하며 ‘너’가 수단이기 때문이 아니라, ‘너’가 바로 ‘너’라서 ‘너’를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 인해 네 아픔을 덜어줄 수단을 궁리하며 슬기롭게 사용하는 나라가 ‘하느님의 나라’란 말이다.

 

하느님은 모두 더불어 잘 살 세상을 창조하였다. 가장 온전한 질서를 가진 세상을 창조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욕심, 우리의 이기심이 그것을 무너뜨린 거다. 악, 즉 나쁨은 그렇게 우리의 욕심으로 생겼다. 황제의 욕심, 그 이기심이 제국을 불행하게 만들었고, 서로의 욕심이 우리를 모두 지옥에 살도록 만들었다. 그러니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교부는 이런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를 제안한다. 사랑의 나라, 서로 향유 하는 나라, 그 향유를 위해 서로의 행복을 궁리하고 위하며 ‘더불어’ 있는 나라, 그런 나라를 제안한다. 비록 눈에 보이는 로마제국은 사람의 나라로 서로 다투고 이기심으로 누군가는 누군가를 조금의 미안함도 부끄러움도 없이 괴롭히지만, 그들은 지하무덤 교회에서 서로를 위하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했다. 서로를 향한 사랑과 헌신이 마땅한 세상을 그 작은 공동체에서 이루며 살았던 거다. 그것은 도저히 변화될 것 같지 않은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희망 없이 살던 이들에게 너무나 큰 위로였을 거다. 부모도 딸을 매매하는 차가온 현실 속에서 모두가 형제자매라며 서로를 위하는 하느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열심은 그대로 큰 위로가 되었을 거다. 자신을 사용하기만 하던 이들에 익숙한 그들에게 자신을 향유하며 자신과 ‘더불어’ 있는 공동체의 따스함은 그대로 이 땅의 천국이었을 거다.

 

교부는 체계적인 이론을 만드는 신학자가 철학자가 아니라, 우선 아프고 힘든 이들을 위로하는 이들이었다. 이기심을 경계하며 이타심의 삶을 설득해야 하는 이들이었다. 교부의 등장은 그래서 그때 가장 적절했다.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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