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세철학의자리

철학사, 원인은 결과를 의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원인은 원인이 아니다!

원인은 조금도 의도하지 않았는데, 누군가의 원인이 되어 버리곤 한다. 예를 들어, 반-그리스도교인의 철학이든 신플라톤주의는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신학적 사유에 적극 활용된다. 그렇기에 플라톤-플로티노스-아우구스티누스 이런 식의 계보를 만든다. 혹은 이후 신플라톤주의-독일관념론 등과 같은 계보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나 잘 보면 원인은 그 결과의 원인이 되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봐야 한다. 포르피리우스의 '이사고게'가 시작되면서 물어지는 물음들, 하지만 막상 포르피이우스는 그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 자신의 논의에 그 물음에 대한 답이 어울리지 않으니 생각하지 않은 거다. 그러나 그 물음에 대한 답을 하면서 중세 보편 논쟁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중세 신학자는 포르피리우스의 물음에 답을 한 것일까? 아니다. 그들이 그 시대 필요한 신학적 물음, 예를 들어, 삼위일체나 교회론 등등에 보편에 관한 논의가 필요했고, 이 필요에 의하여 보편 논쟁을 했을 뿐이며, 그 보편 논쟁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주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그 책의 안내서인 포르피리우스의 '아사고게'를 형식적인 원인으로 삼았을 뿐, 실상 보편 논쟁의 원인은 중세 시대 신학자의 현실이다. 그 현실은 중세 초기와 중기 그리고 후기가 달려서 보편 논쟁의 존재 이유도 다르다. 포르피리우스가 원인이 아니듯이, 중세 신비주의자의 그 신비의 원인은 플로티노스가 아니다. 그들이 살아간 현실이다. 그 현실에서 교회와 신 그리고 개인 사이의 여러 고민 가운데 플로티노스의 사유, 혹은 그와 유사한 사유에 도움을 받은 거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그런 사유를 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이다. 그러니 플로티노스를 직접 읽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미 머릿속에선 신플라톤주의라는 다양한 저서들... 저자가 분명하지 않은 저작들이 있었고 그런 저작들 가운데 자기가 내리고 싶은 답을 가지고 논리를 구성한다. 플로티노스의 철학은 엄밀하게 그리스도교의 신이 필요하지 않고 신에 의한 은총이나 구원을 위해 철학하지 않았다. 플라톤과 플로티노스도 얼마나 다른가... 하여간 플로티노스는 에크하르트나 쿠사누스의 원인이 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가 중세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독일 관념론과 얼마나 다른지... 그것을 알아야 플로티노스를 만날 수 있겠다. 플로티노스가 정말 헤겔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이야기와 얼마만큼의 교집합을 머릿속에 그릴지 나는 개인적으로 매우 의심스럽다. 어쩌면 다른 철학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밥그릇과 요강은 다르다. 생긴 게 비슷해도 그 원인, 그 존재 이유가 다르다. 그렇게 각 시대의 철학은 그 존재 이유가 다르다.

하여간...

철학사의 많은 경우, 원인은 결과를 의도하지 않았다. 그러니 원인은 엄밀히 원인이 아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엄밀히 결과가 아니다. 

 

유대칠 씀

 

[대구에서 그리고 온라인 공간에서 독서와 철학 그리고 신학 교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소소하지만 삶에 녹아드는 독서와 철학 그리고 신학을 더불어 누리고자 한다면, 그렇게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자 한다면, 연락 주셔요. oio-44o4-0262로 꼭 문자를 먼저 주셔야 합니다.]

 

아름다운 공사장( 2023 유대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