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부학
Patrologia
유대칠 씀
Pax semper filiae meae Edith!
1. ‘교부(敎父, Patres Ecclesiae)’란 누구인가?
하느님의 계시는 성서(聖書, Sacra Scriptura)와 성전(聖傳, Sacra Traditio)으로 되어 있다. 성서는 흔히 알 듯 신약(新約)과 구약(舊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서를 접하기 위해 우린 직전 성서를 읽으면 된다. 그리고 관련된 주해서를 읽고 강의를 듣고 묵상하면 된다. 구체적 형태가 있기에 성서 공부는 성전 공부에 비하여 편하다. 성전, 즉 거룩한 전통은 공부가 쉽지 않다. 성전 공부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게 바로 교부의 가르침을 읽고 연구하며 묵상하는 거다. 그것은 성전의 주요 기둥을 교부의 가르침으로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개신교회는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그리고 ‘오리엔트 정교회’에 비하여 성전을 향한 관심이 크지 않다. ‘오직 성서(Sola scriptura)’라는 외침에서 알 수 있듯이 오직 성서에 중심을 두고 성전엔 큰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 오랜 시간 다양한 신앙의 고민을 궁리하고 또 궁리한 신앙 선배의 가르침이 지금 우리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Αυγουστίνος Ιππώνος, 354~430)의 고민과 오리게네스(Ὠριγένης, Origenes, 185?~253?)의 고민 그리고 테르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155?~240)의 고민이 지금 우리의 고민에 방해가 되기보다는 더 깊은 고민과 더 깊은 성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도 많은 개신교회의 학자 역시 교부의 문헌을 연구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느님의 사랑은 성서 곳곳에 적혀 있지만, 그 사랑을 구체적 삶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우린 교부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문자로 있는 하느님의 뜻을 궁리하고 묵상하여 그것을 삶으로 살기 위한 고민과 결단을 읽을 수 있단 말이다.
교부는 말 그대로 ‘교회의(Ecclesiae) 아버지(Patres)’, 즉 교회의 부모와 같은 존재다. 그리고 원래 이 말은 ‘주교(主敎)’를 두고 부르던 말이다. 지금도 ‘공의회 문헌’을 보면 그 문헌을 결정하고 반포한 ‘주교’를 ‘교부’라고 적고 있다. ‘교부’라는 말은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진 말이다. 교부는 사도의 제자인 사도교부를 시작으로 라틴 교부로는 대 교황 그레고리오(Gregorius Magnus, 540~604) 혹은 세비야의 이시도로(Isidorus Hispalensis, 560?~636)의 시대까지 헬라 교부로는 다마스쿠스의 요한(Ιωάννης ο Δαμασκηνός, Iohannes Damascenus, 676~749)의 시대까지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교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따르며 어떤 점에서 유대교와 다른지 설득하던 이들이다. 그리고 무엇이 정통인지 설득하고 정통이 아니라며 서로 다투던 이들이다. 결국 우리가 교회사나 신학사를 공부할 때 영지주의와 다투던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 모두 교부다. 신도를 설득하여 이단에 빠지지 않게 하고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설득하던 이들은 대체로 주교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주교가 아닌 이들이 이와 같은 일을 하며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이에 교부이며 히포의 주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비록 주교가 아니지만, 교회와 신자에게 큰 도움을 준 인물인 히에로니무스(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 347~420)를 ‘교부’라 불렀다. 그리고 레랑의 빈첸시오(Vincentius Lerinensis, ?~445?)가 쓴 『비망록(Commonitorium)』에선 하나의 교회, 하나의 신앙 가운데 있고 애쓴 이라면 그의 신분이 무엇이든 교부로 존경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주교가 아닌 ‘사제’나 ‘평신도’도 교부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주교도 아니고 사제도 아니다. 그는 평신도다. 평신도지만 당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고민하던 문제에 관해 깊이 궁리하고 나름의 논리로 설득한 인물이다. 그러니 그를 교부로 기억한다 해도 조금도 과한 일이 아니다.
신약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 이후 사도에 의하여 여러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고, 각 교회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예수의 제자, 즉 사도는 편지로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도 이후 사도의 제자들은 각 지역 교회의 책임자가 되어 자신이 스승에게 배운 대로 문제에 봉착하며 해결책을 제시했다. 즉 이단이 등장하면 이단을 경계하고 정통 신앙을 옹호하며 신도를 설득하였고, 그 이외 이런저런 다양한 문제가 등장하면 과연 무엇이 정통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인지를 얘수의 제자이며 자기 선생인 사도의 가르침을 부여잡고 궁리하여 설득하였다. 그렇게 사도 혹은 사도의 제자가 주교가 되고, 주교는 올바른 길을 알려주며 교회의 터를 잡아가는 교회의 부모와 같은 존재, 즉 ‘교부’가 된다. 그렇게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지는 사도좌(使徒座, Sedes Apostolica)를 중시하며 거룩한 전통, 즉 성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로마교구의 첫 주교는 예수의 12제자 가운데 한 명인 ‘페트루스(Πέτρος, Petrus, ?~66?)’다. 이후 페트루스의 제자이며 후계자인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4장 21절에 등장하는 리노(Linus, Λῖνος, ?~76?)와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4장 3절에 등장하는 로마 사람 클레멘스(Clemens Romanus, Κλήμης Ρώμης, ?~101?)가 주교의 자리를 이어간다. 사도 교부 문헌으로 연구하는 「클레멘스의 첫째 서간(Κλήμεντος ἐπιστολὴ πρὸς Κορινθίους Αʹ)」가 로마 사람 클레멘스의 글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동방 정교회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안드레스(Ανδρέας, Andreas)의 사도좌를 이어간다. 조지아 정교회(Ecclesia Orthodoxa Apostolica Georgiana)의 전승에 의하면, 조지아 정교회 역시 안드레스에 의하여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다. 오리엔탈 정교회(Ecclesias Orthodoxas Orientales)에 속하는 콥트 정교회(Ϯⲉⲕ̀ⲕⲗⲏⲥⲓⲁ ̀ⲛⲣⲉⲙ̀ⲛⲭⲏⲙⲓ̀ⲛⲟⲣⲑⲟⲇⲟⲝⲟⲥ, Ecclesia Orthodoxa Coptorum)의 수장은 ‘성 마르코의 사도좌에 앉은 전체 아프리카의 총대주교이며 알렉산드리아의 교황(Papa Alexandriae et Patriarcha Omnis Africae in Apostolica Sancti Marci Sede)’이라 불린다. 즉 「마르코 복음」의 마르코 사도좌를 이어간다는 말이다. 이처럼 오랜 교회는 아무나 세운 게 아니라, 사도 혹은 사도의 제자에 의하여 시작되었고 그렇게 사도좌와 주교좌를 이어가며 유지되었다. 그것이 권위의 토대이기도 했다. 교부는 바로 이런 사도의 제자로 교회의 초석을 다진 이들이며 사도의 제자이며 주교좌의 선 주교로 권위를 가진 인물이었다. 교부는 바로 그런 주교에 관한 호칭이지만 차차 주교가 아닌 사제와 평신도라 하여도 교회에 큰 도움을 준 이라면 부르는 호칭이 되었다.
이제 교부의 네 가지 조건에 관하여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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