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겐네스
기도에 관하여
ΩΡΙΓΕΝΟΥΣ
ΠΕΡΙ ΕΥΧΗΣ
오리게네스 씀
유대칠 옮김
1 1.1 있는 모든 것 중에 가장 위대한 것, 우리 사람을 벗어나 너무나 높이 있는 것, 우리네 사라질 본성을 너무나 벗어난 것, 이는 이성을 가진 죽을 운명의 우리가 알긴 불가능합니다. 하느님 뜻은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에게로 흐르는 신성한 은총의 헤아릴 수 없는 풍성 가운데 가능하며, 우리를 향한 놀라운 은총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협력하시는 성령을 통해 가능합니다. 그러니 사람의 이런 부족한 본성으로 온전한 지혜를 얻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다윗이 이르기를 지혜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능하지 않은 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지혜뿐 아니라, 의로움과 성화 그리고 죄 사함이 가능케 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입니다.
1 1.1 Τὰ διὰ τὸ εἶναι μέγιστα καὶ ὑπὲρ ἄνθρωπον τυγχάνειν εἰς ὑπερβολήν τε ὑπεράνω τῆς ἐπικήρου φύσεως ἡμῶν ἀδύνατα τῷ λογικῷ καὶ θνητῷ γένει καταλαβεῖν ἐν πολλῇ δὲ καὶ ἀμετρήτῳ ἐκχεομένῃ ἀπὸ θεοῦ εἰς ἀνθρώπους χάριτι θεοῦ διὰ τοῦ τῆς ἀνυπερβλήτου εἰς ἡμᾶς χάριτος ὑπηρέτουἸησοῦ Χριστοῦ καὶ τοῦ συνεργοῦ πνεύματος βουλήσει θεοῦ δυνατὰ γίνεται. ἀδύνατον γοῦν τῇ ἀνθρωπίνῃ φύσει ὑπάρχον σοφίας κτῆσις, ᾗ τὰ πάντα κατεσκεύασται ? < πάντα > γὰρ κατὰ τὸν Δαυῒδ ὁ θεὸς < ἐν σοφίᾳ > ἐποίησε, δυνατὸν ἐξ ἀδυνάτου γίνεται διὰ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Ἰησοῦ Χριστοῦ, < ὃς ἐγενήθη σοφία ἡμῖν ἀπὸ θεοῦ δικαιοσύνη τε καὶ ἁγιασμὸς καὶ ἀπολύτρωσις. >
사람이 무엇이며 누구이기에 하나님의 권고를 알며 누가 주님의 그 뜻을 깨우치겠습니까? 죽을 처지의 우리가 가진 생각이란 나약하기 그지없으며, 그런 우리가 품은 목적이란 것 역시나 실패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큽니다. 쉽게 썩어 버리는 우리네 육체는 영혼을 짓누르고 생각을 담은 마음이란 것 역시 지상의 장막으로 힘겨워합니다. 땅은 일은 쉽게 예견하나 하늘의 일은 누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하늘의 일을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이 불가능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그 넘치는 은총으로 가능하게 해 주신 겁니다. 왜냐하면, 제3의 하늘에 붙잡힌 사람은, 사람이 말할 수 없는 말을 듣고서, 세 하늘의 일들을 추적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이 사람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세 번째 하늘로 올려진 이는 사람이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고, 세 하늘 가운데 있는 걸 찾아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사람이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τίς γὰρ ἄνθρωπος γνώσεται βουλὴν θεοῦ; ἢ τίς ἐνθυμηθήσεται τί θέλει ὁ κύριος; ἐπεὶ λογισμοὶ θνητῶν δειλοὶ, καὶ ἐπισφαλεῖς αἱ ἐπίνοιαι ἡμῶν· φθαρτὸν γὰρ σῶμα βαρύνει ψυχὴν, καὶ βρίθει τὸ γεῶδες σκῆνος νοῦν πολυφροντίδα. καὶ μόγις εἰκάζομεν τὰ ἐπὶ γῆς, τὰ δὲ ἐν οὐρανοῖς τίς ἐξιχνίασε; > τίς δ' οὐκ ἂν εἴποι ἀδύνατον εἶναι ἀνθρώπῳ ἐξιχνιάσαι < τὰ ἐν οὐρανοῖς; > ἀλλ' ὅμως τοῦτο τὸ ἀδύνατον τῇ ὑπερβαλλούσῃ χάριτι τοῦ θεοῦ δυνατὸν γίνεται· ὁ γὰρ ἁρπαγεὶς εἰς τρίτον οὐρανὸν ἐξιχνίασε τάχα τὰ ἐν τοῖς τρισὶν οὐρανοῖς διὰ τὸ ἀκηκοέναι < ἄῤῥητα ῥήματα, ἃ μὴ ἐξὸν ἀνθρώπῳ λαλῆσαι > ἦν. τίς δὲ δύναται εἰπεῖν ὅτι δυνατὸν ἀνθρώπῳ γνωσθῆναι τὸν τοῦ κυρίου νοῦν;
하지만 이것 역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제자들에게 “저는 더 이상 당신들을 두고 종이라 부르지 않을 겁니다. 종은 자기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신을 친구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저에게 있는 것이 모두 당신에게도 있으니 제가 저의 아버지에게 들은 모든 것을 당신에게도 알게 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들에게 뜻을 알게 하려 함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주님의 뜻을 가르치고자 한다면, 더는 주인이 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전에 주인으로 있던 이가 이젠 친구가 된 사람으로 그 뜻을 가르치고자 합니다. 또 사람의 일도 사람 속의 영 이외 다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느님의 일도 하느님의 영 이외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ἀλλὰ καὶ τοῦτο ὁ θεὸς διὰ Χριστοῦ χαρίζεται [.....] τὸ θέλημα τοῦ κυρίου ἑαυτῶν οὐκέτι, ὅτε διδάσκει. αὐτοὺς τὸ θέλημα τοῦ κυρίου εἶναι θέλοντος ἀλλὰ εἰς φίλον μεταβάλλοντος τούτοις, ὧν κύριος πρότερον ἦν. ἀλλὰ καὶ ὡς οὐδεὶς < οἶδεν ἀνθρώπων τὰ τοῦ ἀνθρώπου εἰ μὴ τὸ πνεῦμα τοῦ ἀνθρώπου τὸ ἐν αὐτῷ, οὕτω καὶ τὰ τοῦ θεοῦ οὐδεὶς > οἶδεν < εἰ μὴ τὸ πνεῦμα τοῦ θεοῦ. > εἰ δὲ μηδεὶς < οἶδε > < τὰ τοῦ θεοῦ > < εἰ μὴ τὸ πνεῦμα τοῦ θεοῦ, >
하느님의 것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한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은 게 아니라, 오직 하느님에게서 온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도록 은총으로 알게 된 겁니다. 우리는 사람의 지혜로 이를 말하지 못하고, 오직 하느님의 영의 가르침 가운데 말할 뿐입니다.
ἀδύνατον εἰδέναι ἄνθρωπον < τὰ τοῦ θεοῦ. > καὶ τοῦτο δὲ κατανόησον, πῶς δυνατὸν γίνεται· < ἡμεῖς δὲ, > φησὶν, < οὐ τὸ πνεῦμα τοῦ κόσμου ἐλάβομεν ἀλλὰ τὸ πνεῦμα τὸ ἐκ τοῦ θεοῦ, ἵνα εἰδῶμεν τὰ ὑπὸ τοῦ θεοῦ χαρισθέντα ἡμῖν, ἃ καὶ λαλοῦμεν οὐκ ἐν διδακτοῖς ἀνθρωπίνης σοφίας λόγοις ἀλλ' ἐν διδακτοῖς τοῦ πνεύματος. >
그러나 제 생각엔 바르게 경건하고 부지런한 암브로시오(Ἀμβρόσι)와 신중하고 남자다운 타티아나(εΤατιανὴ), 여성스러운 단점이 그 옛날 사라(Σάῤῥᾳ)의 경우와 같이 그들에게도 완전히 사라졌음을 저는 인정합니다. 이 모든 게 하느님의 은총으로 사람에게 불가능한 게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에 관한 글의 서론에서 언급되는 이유는 무엇인 것 같습니까. 그건 우리의 주제가 바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Ἀλλ' εἰκὸς, Ἀμβρόσιε θεοσεβέστατε καὶ φιλοπονώτατε καὶ Τατιανὴ κοσμιωτάτη καὶ ἀνδρειοτάτη (ἀφ' ἧς ἐκλελοιπέναι „τὰ γυναικεῖα„ ὃν τρόπον ἐκλελοίπει τῇ Σάῤῥᾳ ἤδη εὔχομαι), ὑμᾶς ἀπορεῖν τί δή ποτε, περὶ εὐχῆς προκειμένου ἡμῖν τοῦ λόγου,
유대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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