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목숨은 없다.
2020년 12월 20일, 영하 18도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비닐하우스에서 생활하던 캄보디아인 이주 노동자가 추위에 얼어 죽었다. 2022년 2월 23일, 미숫가루 공장에서 일하던 한 인도인 이주 노동자가 불에 타 죽었다. 2022년 8월 9일, 역시나 제대로 된 안전시설 없는 컨테이너에 생활하던 중국인 이주 노동자가 차오르는 물에 죽임을 당했다. 추위에 얼어 죽고, 불에 타 죽고, 물에 빠져 죽는다. 더 적으려면 더 적을 수 있다. 나의 이주 노동자 친구에게 하나하나 물어 기록해 가면 기사가 되지 못한 더 많은 죽음을 적을 수 있다. 이런 슬픔 하나하나 적어가는 것도 괴로운 일이다. 너무나 미안하다. 우리의 차가움이 얼마나 차가운지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가 조금만 더 따뜻했다면 죽지 않을 목숨이다. 그런데 우리의 차가움은 이주 노동자를 또 죽어간다.
아파도 아프단 말을 하지 못한다. 죽을 듯 아파도 아프단 말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죽는다. 우리의 차가움은 그들의 입을 막아 버렸다. 살고 싶단 말도 아프단 말도 막아 버렸다. 사실 그들의 노동 강도와 노동량은 엄청나다. 내가 그들과 더불어 노동하는 사람이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옷을 입고 그들과 함께 일하는 노동자다. 그러니 잘 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일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잘 안다. 그런데 그 열심을 누군가는 그저 성능 좋은 그리고 값싼 기계 정도로 생각한다. ‘동료’가 아닌 ‘기계’란 말이다. ‘기계’는 아프단 말을 해선 안 된다. 피곤하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마음도 몸도 병들어가며 일을 한다. 그 병은 서서히 깊어진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죽어간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2017년에서 2021년까지 한국에서 죽은 태국인 이주 노동자는 535명이다. 일 년에 거의 100명씩 죽었다. 3~4일에 한 명씩 죽었단 말이다. 태국인 이주 노동자만 그만큼 많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죽음의 이유조차 모른 채 죽어간 이들이 213명이다. 10일에 한 명은 죽음의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간다. 이미 우리의 농촌과 어촌에도 이주 노동자는 없어서는 안 될 고마운 이들이다. 그런데 2017년에서 2021년까지 어업 현장에서 더불어 일하던 미얀마, 베트남, 인도네시아, 중국의 이주 노동자 가운데 98명이 죽었고, 그 가운데 62명이 죽음의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갔다. 한 달에 한 명은 죽음의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간단 말이다. 사실 우린 이만큼 많은 이들이 죽어간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니 더 정확하게는 죽음의 사실도 죽음의 이유도 모른 채 그 많은 이들이 죽어간다는 말이다.
얼마 전 우즈베키스탄 이주 노동자와 함께 일하며 슬픈 이야기 하나를 들었다. 어느 불법 이주 노동자 한 분이 ‘불법’ 이주 노동자란 이유로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었단 이야기다. 목숨에 불법이 없다. 불법이든 아니든 그를 치료받아야 했고 살아야 했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그 죽음 앞에 너무나 미안했다. 2021년 8월, 한국에서 3년을 일한 태국인 이주 노동자는 받지 못한 임금을 사업주에게 원했다. 당연한 요구였다. 그 당연한 요구에 사업주는 경찰서에 그를 불법 이주 노동자라며 신고해 버렸다. 불법이든 아니든 그 당연한 요구에 차가운 우리는 그들을 이렇게 아프게 한다. 이런 식으로 입을 막아 버린다. 내가 직접 접하고 분노한 사례는 이보다 더 차가운 사례도 많다. 이런 차가운 법의 논리 앞에 목숨도 불법이었는지, 불법 이주 노동자는 아픔조차 숨기고 숨기다 죽은 거다. 나의 우즈베키스탄 친구가 전한 그 불법 이주 노동자 역시 우린 살릴 수 있었다. 그냥 우리가 나쁜 거다.
미국의 공중 보건 학자 겸 인류학자인 세스 홈스(Seth M. Holmes)는 이런 이주 노동자의 눈에 보이지 않는 죽음을 “서서히 죽어감”이라는 의미의 ‘슬로 데스(Slow death)’로 표현했다.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차가움이 그들을 서서히 죽여간다. 그냥 단번에 죽이지 않으니 죄책감이 덜할지 모른다. 서서히 온 사회의 다양한 차가움이 그들을 서서히 죽여가니 나만의 잘못이라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 원래 세상이 그렇다는 식으로 생각해 버리면 자신의 죄책감이 덜 해질 수도 있다. 우리의 이런 차가움에 그들은 서서히 죽어가고, 그 죽음과 그 죽음의 이유로 기억되지 못한 채 사라진다. 그리고 그 사라진 자리를 우린 또 다른 이주 노동자로 대체한다. 마치 기계 부속처럼 말이다. 우린 참 나쁘다.
‘성령’의 라틴어는 spiritus(스피리투스)다. 그 라틴어의 또 다른 뜻은 ‘숨’ 혹은 ‘목숨’이다. 우린 ‘목숨’으로 산다. ‘목숨’이 곧 삶이기도 하다. 그리고 누구의 ‘목숨’도 또 다른 누군가의 욕심을 위한 수단이 되어선 안 된다. 누구의 ‘목숨’도 함부로 다루어질 사소한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이 땅 많은 이주 노동자의 ‘목숨’이 아프다. 서서히 죽어간다. 몸이든 마음이든 서서히 죽어간다. 이들의 아픈 ‘목숨’에 고개 돌린 이들의 성령을 향한 찬양은 왠지 어색하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다. 부디 이들의 목숨과 더불어 살자. 목숨엔 불법이 없다. 다른 종교나 다른 인종 그리고 다른 문화 이 모든 이유는 그저 나쁜 핑계다. 달라도 사랑하는 게 진짜 사랑이다. 달라도 더불어 사는 게 진짜 우리다. 부디 더불어 일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과 더불어 우리를 이루자. 이들의 목숨도 우리의 목숨도 다르지 않은 하나이기에 말이다. 그때 성령을 향한 찬양도 어색하지 않을 듯하다. 그리고 불법이란 이유로 이주 노동자란 이유로 서서히 죽어가는 목숨도 사라질 거다. 분명히.
2022년 8월의 어느 날
유대칠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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