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리학과 예술
초기 조선은 그림을 그려도 중국의 풍경을 그렸다. 그냥 우리 나라의 산수를 그린다고 그려도 사실 도저히 우리 나라의 산수라고 볼 수 없었다. 소를 그려도 우리 땅엔 있지 않은 물소를 그리곤 했다. 주희가 중국 남방 사람이니 주희와 함께 주희의 산수가 조선 초기에 들어온 것 같다. 주희의 사상을 따르던 이들은 자연스럽게 그것이 남의 산수라는 것을 바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그냥 자연스럽게 중국의 산수를 우리의 산수로 그렸다. 조선의 권력자였던 김알로의 아들 김시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16세이 그는 조선의 소를 그린다고 그린 것이 물소다. 김알로의 권력 몰락 이후 아들 김시를 대화가가 된다. 선비의 삶을 살 수 없으니 화가의 삶을 산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성리학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니 그의 그림엔 자연스럽게 물소가 등장한다. 주희가 있는 것이다. 주희가 중심이었던 것이다. 그림에 그 모습이 고스란히 그러진 것이다.
동아시아의 왕조의 이념은 250년 정도의 수명을 가진다. 그래서 중국 왕조도 일본 막부도 그 정도의 수명 동안 산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은 500년을 갔다. 오래 갔다. 조선은 250년이 되었을 경우 기득권의 고정된 이념이 썩어지고 이 무렵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 무렵 전기 조선의 말기 현상이 나타난다. 이때 그림에도 여전히 조선의 소는 물소다. 조선 초기 250년을 중국의 주희로 조선이 유지되었다면, 조선 후기의 시작은 달라진다. 후기 조선의 성리학은 중국의 성리학에서 시작하여 자기화된 조선 성리학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후기 조선 성리학의 특성이다. 그 시작은 이황에 의하여 조선 성리학의 틀이 마련되고, 이제 그 이후 이이 등이 조선의 보다 더 확실한 조선색의 성리학을 만들어간다. 주자 성리학은 이기 이원론이지만, 이이 일원론이란 조선 성리학의 큰 흐름이 잡힌다.
이황은 이는 불변적인 요소, 기는 가변적인 요소인데, 이 둘이 서로 만나면 서로 발동한다는 이기호발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이는 불변적인 요소라서 발동하지 않으며, 기가 발동하면 기에 편승한다는 기발이승설을 주장한다. 이, 즉 이치는 모든 존재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것이고, 기는 그렇지 않다. 인간의 기는 인간에게 고양이의 기는 고양이에게만 있다. 우둔한 이와 영리한 이가 나온 것은 기의 차이다. 이는 모든 것이 가진 것이고, 바로 기의 차이란 것이다. 이러한 이이의 기발이승설은 중국에 없는 조선의 것으로 조선 성리학의 주된 논의다.
철학에서 이렇게 조선의 고유한 철학이 등장하자, 조선 성리학이 등장하자, 율곡의 벗, 가장 조선 성리학에 익숙한 이들이 이러한 조선 성리학의 이념을 현실에 적용한다. 조선만의 철학은 조선의 자존감을 주었다. 그러나 조선의 산수가 달리보이게 되고 조선을 조선으로 보게 된다.
도자기도 그렇다. 조선 전기와 조선 후기는 도자기가 다르다. 그 색이 다르다. 고려색에서 완전히 구분되는 조선 고유한 도기 색은 후기에 등장한다. 조선 백자말이다. 고유한 그릇이 등장한다. 그리고 화풍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글씨로도 이어졌다. 조선 고유색의 서체, 한석봉체가 등장한다. 그는 율곡학파에 속한 인물이다. 강경하고 선명하고 경계가 분명한 서체, 조선인의 미감이 등장하는 서체가 등장한다. 그의 서체가 천자문의 서체가 되면서 조선 후기의 모든 선비는 그의 서체에 익숙하고 따라하게 되었다.
이정의 '풍죽'을 보면 그 대나무는 조선의 것이지 이제 중국의 것이 아니다. 1579년 태어난 김식은 김시의 손자다. 그의 소는 할아버지와 다르다. 그도 여전히 물소를 그리지만, 그 형태는 조금씩 달라진다. 조선소와 혼혈과 같이 말이다.
인조반정 이후 후기 조선이 본격화된다. 조선성리학이 이제 완전히 주도적인 이념이 된다. 정명공주의 서체는 대단했다. 중국 전체 역사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서체다. 조선 성리학이란 배경 속에서 가능하다. 조선색의 문화 속에서 가능했다. 인조반정에 참여한 조속(1595-1668)에 의하여 처음으로 진경산수화가 시작된다. 그의 그림은 중국풍이 아닌 조선풍이다. 조속은 조선 산수를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묵의 번짐으로 그리는 묵법(남방화법)과 선으로 그리는 필법(북방화법) 이 두 화법을 조화시키는 것이 중국 화가의 숙제였다. 조선에서 이 둘을 조화시키는 그림이 등장한 것으로 진경산수화이며, 그 완성은 정선이고, 그 정선의 선구는 조속이다.
조선 성리학자인 김창흡은 겸제 정선의 선생이다. 겸제는 성리학적 배경이 강한 그림을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조선색의 성리학으로 무장한 겸제는 조선색의 사상이 녹아든 그림을 그렸다. 이제 우리 옷을 입은 이들이 등장한다. 조선 성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주역의 음과 양과 조화 속에서 금강산을 드린다. 진경이란 사진 같은 진짜 그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산수를 우리의 성리학으로 그렸다. 겸제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의 철학으로 본 진정한 경치를 그린다.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은 그냥 화공이고, 그는 철학자이며, 철학으로 그린다. 그의 그림은 조선성리학에 따라서 산수를 그린다. 그리고 그 그림은 조선성리학이 고유한 조선의 것이듯이 그의 그림도 조선의 고유한 것이 된다. 그것이그의 진경산수화다.
굳이 율곡의 노선이 아니라도, 허목과 같은 이도 중국과 구별되는 조선색을 구사하며 조선 곳곳에서 조선의 색이 녹아든 조선 철학, 화풍, 문학 등이 등장한다. 이러한 조선다움이 사라지면서 어느 순간 조선도 그 마지막 250년의 마지막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조선미술과 성리학을 생각하면서 허수 유지승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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